항공 엔지니어, 삶, 행복
도하에 온 지도 벌써 두 달이 다 되어간다.
매일 이어지는 교육과 평가로 약간의 스트레스를 받지만, 한국에서라면 만나지 못했을 여러 나라 사람들과 함께 지내며 미지의 세상을 매일 배워가고 있다.
나는 매일 회사 교육센터로 가는 길에 택시를 이용한다.
도하의 택시 기사들은 모두 외국인이다.
출퇴근 시간 동안 기사들과 짧지만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그들의 인생을 조금씩 엿본다.
이곳에서는 휴대폰 앱으로 택시를 부르면 근처 기사들이 배정된다.
목적지를 정하면 예상 요금이 표시되고, 그 금액으로 결제가 이루어진다.
요금 흥정을 걱정할 필요가 없어 참 편리하다.
며칠 전, 아침 일곱 시에 택시를 불렀다.
잠시 후, 케냐 나이로비에서 왔다는 삼십 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마른 흑인 기사가 호텔 앞에 도착했다.
그의 얼굴에는 피곤이 묻어 있었고, 인사는 생략된 채 조용히 나를 맞았다.
이곳 기사들은 대부분 묵묵하다.
손님이 먼저 말을 걸지 않으면,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기사님은 어느 나라에서 오셨어요?”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케냐, 나이로비요. 일자리 때문에 3년 전에 도하로 왔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짧은 대화가 시작됐다.
그는 세 아이의 아버지였다.
연로한 어머니, 미망인이 된 누나, 두 명의 조카, 그리고 두 명의 동생까지—그의 어깨 위엔 가족 전체의 생계가 얹혀 있었다.
누나의 남편이 병으로 세상을 떠난 뒤, 가족의 생계를 모두 떠맡게 된 것이다.
그는 도하에서 벌어들이는 돈이 고향에서의 다섯 배라고 했다.
하지만 자신은 회사에서 제공하는 기숙사에서 여러 명이 같이 지내며, 식비 12만 원과 휴대폰 요금을 제외한 거의 모든 돈을 가족에게 송금하고 있었다.
3년 동안 한 번도 고향을 방문하지 못한 이유도, 비행기 값을 아껴 가족에게 보내기 위해서였다.
일 년 365일, 단 하루의 휴식도 없이 그렇게 운전대를 잡고 있다고 했다.
그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안타까운 내 마음 한편이 저려왔다.
그가 짊어진 삶의 무게를 감히 짐작할 수 없었다.
그리고 문득, 과거의 나를 떠올렸다.
힘들다고, 불평하며 원망했던 시간들.
그에 비하면 나는 얼마나 많은 것을 누리며 행복을 누리며 살아왔던가.
회사 앞에 도착하자, 나는 요금을 카드로 결제하고 그에게 약간의 현금을 건넸다.
“힘내시고,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짧지만 진심을 담아 위로의 인사를 전하고 싶었다.
택시가 멀어지는 뒤로 보면서 그의 삶이 내 마음에 오래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