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작은원 Sep 24. 2024

9. 어제는 두 발, 오늘은 고작 한 발

감정의 날을 둥글게 깎아내며

순례길을 다녀온 후,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내가 변했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변화는 내가 이전보다 긍정적으로 변했다는 말이었다.


운전 중 아버지가 화가 나신 적이 있었다. 운전을 하다 보면 화나는 상황이 생기기 마련이고, 그날도 아버지는 다른 운전자 때문에 짜증이 나 있었다. 나는 그런 아버지를 보며 ‘왜 이렇게까지 화를 내실까?’라고 생각했다. 적절히 화를 푸는 것은 좋지만, 차 안에서 화를 내고 뾰족한 말들을 들어야 하는 것은 결국 차 안에 있는 운전자와 동승자뿐이다.


나는 아버지께 너무 기분 상해하지 말라고, 저 사람도 나름 이유가 있을 수 있고 기분 좋은 외출에서 아버지의 기분까지 상해하지 말자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앞으로 먹게 될 맛있는 밥과 즐거운 일들을 늘여놓으며 웃어 보였다. 아버지는 내 말을 듣고 기분이 나아진 듯했다. 그러면서 나중에는 내가 많이 변했다고 말씀하셨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짜증 나고 화가 날 만한 상황에서도 그 감정을 그대로 내뱉지 않으려 노력하게 되었다. 결국 부정적인 감정은 본인에게 가장 큰 상처를 남긴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09월 02일

폭우를 만난 다음 날, 주비리(Zubiri)로 향하는 날이었다. 지난밤에 미리 신문지와 휴지로 신발을 말린 덕분에 다시 신은 신발에서 불쾌감을 느낄 일은 없었다. 그러나 지난밤의 여파로 진흙과 흙탕물이 가득한 길은 여전히 만만치 않았다.


어제 나의 길동무는 스페인의 하비(Javier) 아저씨와 모험을 좋아하는 러시아 친구 인나(Inna)였다. 오늘은 네덜란드 출신 교사였던 린(Rene)과 함께 걷게 되었다. 우리는 전날 저녁식사에서 처음 만났는데, 한국, 영국, 이탈리아, 미국, 러시아, 네덜란드 등 각기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한 테이블에 모여 함께 식사를 했다.


아침 식사 후, 린을 다시 만나 걸음이 맞아 함께 걷기 시작했다. 어제 내린 많은 비로 길은 질퍽거렸고, 미끄러운 내리막길과 불어난 물줄기가 우리 앞을 가로막았다. 때로는 양 떼가 지나가는 길을 걷고, 숲 속의 험한 길을 걸었다. 그러다 폭이 넓어진 물줄기를 만났는데, 린을 비롯한 장신의 친구들은 큰 보폭으로 쉽게 건넜지만, 나는 결국 발 한쪽이 물에 빠지고 말았다.


린이 다가와 괜찮냐고 물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괜찮다고 했다. 하지만 앞으로 걸어야 할 거리가 꽤나 길었기 때문에, 린은 젖은 발로 먼 길을 걷는 나를 걱정하며 다시 물었다.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어제는 두 발이 젖었지만, 오늘은 고작 한 발만 젖었어. 괜찮아!”


그 순간 떠오른 말이었지만, 시간이 지나 곱씹어 보니 그 말속에 나의 변화가 담겨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물 웅덩이에 빠진 것만으로도 찌푸린 얼굴로 하루를 망친 기분에 휩싸였을 것이다. 작은 실수 하나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며 가시 돋친 생각으로 스스로를 괴롭혔던 나였다.


날 선 감정들은 상대를 향한 것이지만, 결국 나 자신을 더 다치게 한다. 짧은 시간 안에 생긴 변화였지만, 이 긍정적인 마음가짐은 이후 일상에서 큰 힘이 되었다. 불편함을 마주할 때마다 전과는 다르게 웃으며 넘길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순례길을 통해 깨달은 작은 변화들이 나를 긍정적으로 이끌고 있다. 인생의 길 위에서 마주한 불편함도 결국 나를 더 나은 방향으로 성장시키는 계기가 된다. 더 이상 사소한 일에 휘둘리지 않고, 마음의 여유를 찾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는 이제 작은 순간들 속에서도 기쁨을 느낄 수 있었고, 불쾌했던 경험들로 날 선 감정도 둥글게 깎아낼 수 있게 되었다.

이전 09화 8. 불분명한 친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