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엔 까미노, 당신이 내게 들려준 이야기들
등산을 시작하면서 많은 사람들과 마주쳤다. 가볍게 “안녕하세요”, “안전산행하세요” 같은 인사를 주고받기도 했지만, 때로는 서로에 대해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떤 산이 가장 좋았는지, 100대 명산 중 몇 곳을 가보았는지, 저 꽃의 이름은 무엇이고 오늘의 등산 도시락은 무엇인지까지 말이다. 그런 대화를 통해 자연스럽게 산에서 자라는 식물에 대해 배우고, 어떤 산이 어느 계절에 가장 멋진 지도 알게 되었다.
처음엔 단순한 운동으로 생각했던 등산이 나에게 준 것은 지식 이상의 것들이었다. 산이 들려주는 이야기와 그 속의 배움은 매우 풍부했고, 그래서 등산은 단순한 운동이 아닌, 내게 특별한 경험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순례길에서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800km에 달하는 이 길은 단순히 자연 속을 걷는 여행이 아니라, 마치 살아 있는 도서관을 걷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그 길을 떠올리면 단순한 풍경이 아닌,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목소리, 귀여운 동물들, 그리고 작은 마을들에서 맛본 음식까지 함께 떠오른다.
800km, 그 길 위에 녹아든 이야기는 내게 참 많았다.
09월 05일
벌써 누적 거리 100km에 가까워지며 다양한 국적의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순례길을 걸어본 사람이라면 “부엔 까미노(Buen Camino)”라는 인사에 익숙할 것이다. 순례자들은 서로 마주할 때 “안녕?” 대신 "부엔 까미노(Buen camino)"라는 인사를 건넨다. 이 스페인어 인사는 “좋은 길 되세요”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길 위에서 받은 이 인사들은 타인에게서 얻은 작은 선물과도 같았다.
"부엔 까미노"를 주고받으며 나눈 이야기들은 시간이 지나도 쉽게 잊히지 않는다. 때로는 날씨나 풍경 같은 가벼운 대화를 나누기도 했지만, 결국 오래 남는 것은 그들이 왜 이 길에 서 있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들이었다. 오늘은 푸엔테 라 레이나(Puente La Reina)로 향하는 길에 '용서의 언덕'이라 불리는 곳을 지났다.
그곳을 한 친구와 함께 걷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용서"라는 주제로 대화를 나누었다. 그 친구가 타인에게서 받은 아픔을 말했고, 이제는 그것을 후련하게 용서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난 그 친구와 함께 그동안 짊어지고 온 부정적인 감정을 그 언덕에 내려두었다.
'용서의 언덕'이라는 이름은 원래, 원수와 함께 오르더라도 힘든 길을 걷다 보면 서로를 의지하게 되어 결국 용서하게 된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의미가 어떻든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만의 방식으로 그동안 외면했던 부정적인 감정을 내려놓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다시 길을 걸을 수 있었다.
걷는 것은 독서와 같았다. 그들의 인생을 통해 얻은 경험들은 내게 책을 읽는 것과 같은 깊은 울림을 주었다.
새 출발을 앞두고 본인에게 값진 경험을 선사하기 위해 길을 걷는가 하면, 아픔이 있어 그 아픔을 극복하고 나아가고자 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게 혼자일 때도 있었고 둘 혹은 여럿이 되기도 하고 말이다. 사유는 저마다 다 달랐지만 그들이 내게 선사해 준 이야기는 마치 한 장 한 장 넘겨가는 책과도 같았다.
누군가 내게 순례길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걷는 독서”라고 답할 것이다. 이 길에서 들은 이야기들은 같이 흙을 밟았던 발자국 소리처럼 생생하게 내 기억 속에 남아, 나를 더 깊이 있게 변화시켰다. 나는 길 위에서 사람들의 삶을 읽었고, 그 독서를 통해 나 역시 조금 더 두터워지고 있었다. 책의 마지막 장처럼 결국 순례길도 끝이 나겠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나의 삶을 이끌어주는 또 다른 나침반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