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은 추억하는 것
순례길 출발을 앞두고 가장 먼저 떠오른 준비물이 있었다. 다른 이들은 자기 집 앞마당에 있는 돌멩이를, 어떤 이는 누군가의 사진을 챙긴다고 한다. 머릿속에서 가장 첫 번째로 생각난 물건. 나는 할머니께서 남기신 유품 중 하나였던 스카프를 떠올리며 아버지께 여쭤봤다.
"아빠, 할머니가 쓰시던 스카프 아직 있어?"
할머니께서 남기고 가신 몇몇 개의 유품에서 스카프를 보았다고 말씀하신 아버지는 아직 할머니의 손길이 많이 남아있는 그 집에서 스카프를 찾아 건네주셨다. 스카프를 받은 나는 배낭에 제일 먼저 매달아 두었다. 비록 이제는 할머니를 직접 만날 수 없지만, 이 길을 함께 걷고 싶었다.
사실 이 순례길은 퇴사 후 나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 떠난 길이었지만, 마음 한편에는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감정을 떠올리게 한 건 우연히 본 동영상이었다. 이곳저곳을 여행하는 영상 속 주인공은 험난한 순례길에서 딱 보아도 두껍고 불편한 니트 원피스를 입고 힘겹게 걷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 이유를 모르니, 그저 불편해 보이기만 했다. 그러나 그녀가 그 옷이 세상을 떠난 친구가 가장 좋아하던 옷이라고 말하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사랑하는 이를 추모하는 그 마음을 보니, 나 역시 이길을 할머니와 함께 걷고 싶다는 강한 마음이 들었다.
09월 24일
전날 '무리아스 데 레치발도' 마을에서 잠들기 전, 지금 이 순간의 나 그리고 나에게 소중한 이들의 행복을 바라는 편지를 쓰고 잠들었다. 오늘은 순례길에서 가장 중요한 철의 십자가(Cruz de Fero)를 만나는 날이기 때문이다. 일정상 오늘이 아닌 내일 새벽에 지나갈 계획이었지만, 새벽보다는 여유로운 오늘 오후에 미리 가고 싶었다.
가방에 매달아 둔 할머니의 스카프, 친구들이 건네준 작은 돌멩이들 그리고 편지의 무게가 오늘따라 더 무겁게 느껴졌다. 그 무게는 단순한 짐이 아니라, 감정과 추억의 무게가 아닐까 싶었다. 철의 십자가는 오늘 도착하는 마을인 폰세바돈(FONCEBADON)에서 약 2km을 더 가야 했다. 폰세바돈에 도착한 후, 가방을 내려놓고 곧바로 철의 십자가로 향했다.
30분 정도의 거리를 걸으니 금세 철의 십자가에 도착하였다. 큰 감정을 두고 걷지는 않았지만, 막상 철의 십자가를 마주하니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돌탑 위에 누군가의 추억과 그리움이 쌓여 있었다. 그래서 저 돌탑 위에 나의 물건들도 놓아야 했지만, 가벼운 마음으로는 차마 그 어떤 돌멩이도 밟고 올라설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라는 말을 마음속으로 계속 되뇌며, 돌 탑을 밟고 올라섰다. 그리고 마주 오는 해를 마주할 수 있는 어디 즈음에 할머니의 스카프를 두었다. 그 곳에 가져온 작은 돌멩이들로 스카프를 누르고 옆에 편지를 넣었다. 눈을 감고, 할머니께 드리지 못했던 말을 마음속으로 전했다. 목구멍에 자갈같이 거칠거칠한 것이 걸리는 기분이었다.
저마다 추모하는 이들은 달랐지만, 이 돌탑 위에는 모두의 그리움과 사랑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떠나기 전, 철의 십자가를 한 번 더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리움이란 잊기 위한 감정이 아니라, 함께 기억하며 살아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제는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이와 800km를 함께 걷는 여정. 그 여정은 내가 가져온 물건에 담긴 것이 아니라, 이미 내 마음속 깊이 자리하고 있었다.
문득 초등학교 시절, 학교를 데려다주던 할머니와의 발걸음이 떠오르는 날이었다. 꼭 잡은 손과 느린 걸음걸이 속에 손녀딸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 담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