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편지를 쓴 적이 언제였던가 기억이 나질 않네. 요즘 매일 같이 있으니 펜을 들 일이 없었던 것 같아. 안 하던 일을 하려고 하니 뭔가 간질거리고 어색하지만 끝까지 힘을 내볼게.
네게 잘 다녀올게-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서면 나의 존재가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는 묘한 안도감이 들어. 하루를 잘 보내고 이곳으로 돌아와야지 생각하며 하루 동안 힘을 내게 돼. 엄마 아빠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의 마음이 이런 걸까? 정작 나는 어린 시절에 이런 느낌을 별로 받아보질 못해서 지금까지도 이 느낌이 낯설기만 해. 어린 시절 낮잠을 자고 일어났는데 텅 빈 방 안에 혼자 남아 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 기억력이 유난히 나빠 대부분의 기억은 희미해지고 없는데 유난히 그 기억만이 선명한 게 이상하지. 엄마 아빠를 찾아 온 동네를 울며 돌아다녔던 어린 아이에서 나는 얼마나 자라났을까. 지금도 여전히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는데 그럴 때마다 혼자 속으로 되뇌곤 해. 내게는 네가 있다고 말이야. 그러면 조금씩 내 안의 불안감과 공포가 조금씩 사라지는 것 같아. 너를 만난 순간부터 드디어 나는 조금씩 연습하기 시작했던 것 같아. 어른이 되는 연습을, 혼자서도 행복한 사람이 되는 연습을 말이야. 네가 보기에도 널 처음 만났을 때의 나보다 지금의 내가 더 행복해 보일까? 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끼고 있으니 이런 나를 보며 네가 조금이라도 흐믓한 마음이 들었으면 해.
세상에 아무 조건 없이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난 늘 의심했어. 부모님은 아무런 부족함 없이 나를 키워주셨는데도 나의 마음에는 늘 채워지지 않는 구멍이 있었어. 오사 게렌발의 책을 읽고 나의 이런 성향이 어린 시절의 정서적 방치의 결과인 건가 생각해 본 적도 있지만 부모님의 영향이라기에는 내가 스스로 만든 구멍이 훨씬 크다는 것을 나는 알아. 세상에 나의 마음을 공감해 주는 사람이 있기는 한 걸까 의심하며 살았던 나는, 나에게 호감을 보이는 사람에게 쉽게 곁을 내주다가도 금방 등을 돌리고 마는 이중적인 모습으로 남길 택했지. 내가 좋다는 사람을 만나면 늘 나는 묻고 했어. “도대체 왜 나 같은 애를 좋아해?” 무슨 대답이든 오답이 될, 정답이 없는 문제였지.
사람과 관계를 맺을 때마다 나중에 내가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 마음의 브레이크를 잡았어. 첫 연애를 할 때도 나는 빨리 헤어지고 싶어서 안달이었어. 정이 들면 들수록 헤어지는 일이 힘들 테니까. 꼭 해야 할 이별이라면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거든. 그렇게 안간힘을 쓰며 너와도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려던 내가 네게 기울어져버린 건 아마 그때였을 거야. 네가 경찰에 실종 신고를 한 그 날 말이야.
그 날따라 이상하게 피곤해서 초저녁부터 잠들어 버렸지. 내가 연락이 몇 시간 동안 되지 않자 너는 나의 원룸으로 달려오며 경찰에 신고를 했어. 집에 와보니 난 자고 있었고, 아무 일도 없어서 다행이라며 넌 안도했지. 그런 널 보며 경찰에 신고까지 할 일이냐며 화를 냈지만, 사실 난 많이 놀랐어. 네가 내게 했던 말들이 거짓이 아니었구나. 넌 진심이었구나. 나를 이렇게 걱정해주는 사람이 진짜 있구나. 그때 내가 살던 동네는 여대생들의 실종 사건이 일어났던 조금은 흉흉한 동네였거든. 실제로 엘리베이터 거울에 피가 묻은 것을 보고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갔잖아. 그런 곳에 살면서도 나의 안전을 걱정했던 건 나나 우리 가족이 아닌 바로 너였지. 그 날 이후로 난 아주 조금씩 당당해졌던 것 같아. 세상에 나의 존재를 신경 쓰고 걱정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꽤나 큰 위안이었거든. 너와 가족처럼 오래도록 함께 지내고 싶다는 생각을 그때서야 비로소 하게 되었던 것 같아.
사랑이었을까? 우정이었을까? 결핍되었던 가족애였을까?
네가 내게 채워준 건 그 중 하나가 아니라 모두였던 것 같아.
나의 마음 속에 자리잡은 어둠을 네게 내보이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내 마음은 환해졌어. 나의 어둠이 네게 가 자리잡으면 어떡하지 여전히 습관처럼 걱정이 나를 사로잡을 때가 있어. 그렇지만 너의 얼굴을 보면 나는 알게 돼. 우리가 함께 한다면 어둠 안에서도 빛을 바라볼 수 있는 힘을 낼 거라는 사실을 말이야.
널 만나며 사실 난 나를 만난 것일지도 몰라. 너무 늦게 나를 만난 내가, 내가 나에 몰두할 동안 널 외롭게 하지는 않았을까? 이제야 널 살피고 널 들여다 보는 것 같아 미안할 뿐이야. 앞으로 우리가 함께하는 시간에는 내가 널 돌볼 수 있기를 바라.
오늘 집에서는 나의 하루를 이야기하기 전에 너의 하루를 먼저 물어볼 생각이야. 너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줄게. 네가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나의 오래된 친구에게
이제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