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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이 Apr 14. 2023

글쓰는 찰나 - 나, 힘들어

나는 수많은 ‘은정’을 만났다. 출석부에 있는 여러 은정이들과 어색한 눈인사를 하고 선생님이 호명하는 은정이 너인지 나인지 눈치 게임을 하며 자랐다. 역시 ‘은정’인 친구 엄마들과 하하호호 웃으며 인삿말을 주고 받았고, 자주 가는 식당의 은정 사장님에게 친한 척을 했다. 지난 학교 나의 자리에는 여전히 은정 선생님이 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흔한 그 이름만큼이나 개성 없고 평범한 ‘은정들’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색무취한 익명과 다를 바 없는 나의 이름, 은정. 그런데 드라마 한 편을 보고 나의 이름이 조금씩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그런 은정이라면, 나도 그 ‘은정’과 닮아간다면, 꽤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 ‘은정’은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 같은, 드라마에서나 존재할 법한,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다. 그렇지만 드라마가 늘 그렇듯이 그들의 사랑을 해피엔딩으로 두지 않았다. 사랑하는 이는 불치병을 앓다 죽고 말고, 큰 상실감과 충격에 빠진 은정은 사랑하는 사람의 환영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 환영에 기대어 일상을 살아간다. 

여기까지의 이야기는 나의 이름처럼 너무나 흔한 설정들이다. 그러나 그 ‘은정’에게는 그 후가 특별했다. 이상한 행동을 보이는 그녀의 곁에는 그녀를 그냥 그 모습 그대로 바라봐주는 친구들이 있었다. 혼잣말을 하면 그런 대로, 혼자 미소를 지으면 또 그런 대로, 친구들은 옆에 있어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은정이가 말했다. 

“얘들아, 나 힘들어.”

그 말은 들은 친구들은 가만히 와서 은정을 안아 주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 말을 오랫동안 기다렸어.”     


짧은 그 장면을 몇 번이나 보았는지 모른다. 은정이의 말, 친구들의 포옹, 그리고 눈물. 늘 무표정이었던 은정이의 오열. 


“힘들다”는 말을 별로 해 본 적이 없다. 어떤 상황이든 생각하기 나름이고 내가 힘든 것은 다른 것에 비하면 진짜 힘든 것도 아닐 테고 힘들다고 말한다고 해서 힘든 상황이 나아지는 것도 아니니, 한마디 말로 상황을 부정적으로 규정짓기도 싫었고 나 스스로 그런 감정에 날 맡기기도 싫었다.   

   

‘힘들다’는 말 대신 항상 “괜찮아”라고 했다.     


괜찮다고 하면 다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사실 별로 안 괜찮은 것도 없었다. 괜찮다는 말을 할수록 내면이 보호되고 단단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주변 사람들이 날 높이 평가하는 것도 좋았다. 너는 어떻게 이렇게 힘든 내색을 안 하니? 너는 이렇게 공부하고도 안 힘드니? 은정 샘은 어떻게 이런 일을 웃으면서 해? 힘들지도 않나 봐? 하는 말들이 칭찬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사실 진짜 화가 나지도, 힘이 들어 버겁지도, 감내하기가 어렵지도 않았다. 나는 점점 무감각해졌고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다.     


나에게 무례한 사람에게도 괜찮아요, 버릇 없게 구는 아이에게도 괜찮아 라고 말했다.

나를 함부로 판단하는 사람에게도 괜찮아요, 애정도 권리인 양 요구하는 아이에게도 괜찮아 라고 말했다.  

   

무감각하게 흘러가는 아무렇지도 않은 나날들 속에서 나는 늘, 괜찮았다.  

   

처음 본 사람에게서 “당신의 잘못이 아니예요. 많이 힘들었겠어요.”라는 말을 듣고, 멈추지 않는 눈물이 흘러 나왔을 때, 그때서야 나는 알게 되었다. 나는 나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분노와 슬픔, 좌절과 포기, 불안과 걱정들을 나는 조금씩 연습하기 시작했다.     

 

그 감정들이 낯설고 무서웠다. 내가 나쁜 감정들을 자꾸 들여다보는 것에 죄책감이 들었다. 긍정적인 사람이라는 나의 유일한 장점도 사라지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내가 또 도망가려고 하면 나는 다시 나를 붙잡았다. 나의 불안을 느끼려고 했다. 묻어두고 외면하면, 나의 걱정과 불안과 포기하고 싶은 마음과 좌절, 분노와 슬픔이 어디선가 더 커지는 것이라는 것을 생각했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그 마음들에 삼켜지기 전에 조금씩 눈발로 흩어내야 함을 계속 생각했다.     


그 ‘은정’이의 친구들이 은정이가 자신의 감정을 직면할 때까지 아무 말 않고 옆에 있어 줬던 것처럼, 나도 내 자신을 가만히 지켜 주었다. 나도 그 ‘은정이의 말’을 하고 싶었다.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내가 지금 나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아닌지. 내가 나도 모르게 괜찮아, 괜찮아,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또 주문을 외우면서 진짜 나의 마음을 내가 눈치채지도 못하게 하는 건 아닌지. 

그래서 지금도 그 말을 못 하겠다. 지금은 못 하지만, 앞으로는...   

  

힘들 때 힘들다고 말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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