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천학 수선화

by 김지숙 작가의 집

한 남자를 사랑했다

사랑해선 안 될 남자라는 걸 알게 되었다

알고도 사랑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는 그의 사랑을 찾아 날마다 떠났고

나는 떠난 그를 찾아 산지사방을 헤매었다

나에겐 온통 다 있는 그 남자

어디에나 있는 그 남자

아무데도 없었다

어디에나 있으면서 아무데도 없는 그 남자를 찾아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산녘과 들녘 밭두덕

갈대밭에도 갔다

온 가슴을 헤집고 다녔다

그가 자주 간다는 물가에도 갔다

물안개 되어 공중에 뿌려진 메아리,

봄볕과 달빛...

그 물가에, 그 허공에, 봄볕과 달빛에

마늘 뿌리 매운 맛을 속 꽃잎에 박아가며

모지랑 붓 끝으로 쓴 편지를 날려 보냈다

권천학 수선화





수선화의 원어명은 나르키소스(Narkissos)로 신화에서 데려온 이름이다 용모가 매우 뛰어난 미소년으로 많은 이성과 동성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자이다 그런데 이 나르키소스는 그리스어로 무감각을 가리키는데 이는 이 꽃은 알칼로이드 성분으로 감미로운 향기를 갖고 있으며 이로써 광기를 일으키기도 한다

수선화는 자기 충족 지독한 자기애 그림자를 실체로 인식하는 나르키소스의 의미를 동반한다 수선화의 원종으로 타제타(N. tazetta) 존퀼라(N. jonquila) 포에티쿠스(N. poeticus) 세 종류가 있는데 그 중 포에티쿠스 수선화가 역사상 가장 이른 시기에 재배되었으며 고대 신화에 등장하는 수선화로 여겨왔다

시에서 화자는 어디에나 있는 아무데도 없는 그 남자를 찾아 산녘 들녘 밭두덕 갈대밭을 찾아 헤매지만 찾지 못하고 물가에 이른다. 하지만 그곳에 이르러서도 흩뿌려진 메아리만 남기고 끝내 사라진 그 남자를 만나지 못한다 화자는 자신이 찾지 못하는 그 남자에게서 발현된 쓸쓸함과 외로움의 매운 맛은 바로 그리움과 기다림이며 이는 아무도 대신할 수 없는 존재이기에 가능하다

모지랑 붓으로 쓴 편지를 날려 보낸다는 행위는 A. 반게넵이 말하는 「통과의례이론」에서 정의한 한 상태로부터 다른 상태로 혹은 한 우주나 사회적인 세계로부터 다른 세계로 통과하거나 전이하는 고비에서 행해지는 의례 체계’에 해당한다

그 남자에 대한 화자의 염원이 미루어 가닿을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을 함께 지닌 희망을 전달하기 위한 행위의 한 종류로 ‘편지 날리기’ 아닐까 한다. 동양권에서 수선화는 水仙이라 하여 물위에 떠 있는 해탈한 신선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시에서 화자는 그 남자를 물가에서 찾는다 그래서 그 남자가 신선이 되었는지 혹은 물가에서 자신의 외모에 반해 물 속으로 사라졌는지 답을 이미 알고 있는 화자는 편지를 부치는 것이 아니라 허공을 향해 날려버리고 만다

매거진의 이전글정대구 배롱꽃木百日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