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신정 가을의 회로

by 김지숙 작가의 집

이신정 가을의 회로




소슬한 바람은 하프를 켜면서

아련한 기억을 새김질한다

나무들의 수런거림이

그대 이별을 반추한다

아득한 파도소리를 끌고 오는

해변이

그대의 섬을 키우고

외로운 영혼은

지상에 안착하지 못한다

시간이 삭은 백사장에

구슬픈 발자국이 걸어오는 동안

잔잔한 밀물은

어느 꽃피는 봄날을 이야기한다

그대 짓밟고 간 살기가

날선 파도를 세우고

집요하게 내 침실을 급습한다

내 안에서 로즈 향기로 자란 여자

플랫폼에서 손 흔들던

앳된 얼굴이 인화된다

바다가 연주하는 아다지오는

밤마다 내 불치병이다

-이신정 가을의 회로




상처받는 것보다 외로운 것이 낫다는 것은 주관적인 감정이다 하지만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람에게 받는 상처나 사람으로 인한 외로움은 살아있는 동안은 언제나 진행 중이며 언제고 사라지지 않을 전염병 같은 것이다 우리는 군중 속에 있어도 외로울 수 있고 홀로 있어도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외로움은 개인 안에서 일어나지만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도 발생하는 복합적이면서도 누구나가 가지는 보편적인 감정이기 때문에 시대를 막론하고 문학작품 안에서 자주 다루어진다 관계의 결핍이나 소외에서도 유발되는 외로움은 개인적 사회적 관계 속에서 비롯되지만 정서적 방어기제의 한 요소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외로움은 잠재적인 불안의 위협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택한다는 의미에서 자기방어기제로 사용된다 그런데 이 외로움(Loneliness)은 고독(Solitude)과 구분된다 전자는 혼자 덩그러니 있는 것을 괴롭게 느끼는 것이고 후자는 자기 내면에 침잠해 자족적으로 지내는 것이다 (라르스 스벤젠)

시의 화자는 자신의 기억을 되새김질하고 이별을 반추하는 과정에서 스스로의 외로움을 키워 섬이 된다 화자는 지난 봄날의 추억을 떠올리고 스스로가 키운 장미향이 나는 여자를 떠올리며 밤마다 되뇐다 장미는 본질적으로 완벽함 완전한 성취를 상징하면서 창조 풍요 미를 상징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장미는 색깔의 의미가 더해지면 또 달라진다 붉은 장미는 정념 욕망 기쁨 성취를 상징하는 사랑의 여신 베누스의 꽃이자 아도니스의 피 예수의 피를 상징하며 백장미는 순결 처녀성 영적 개화 빛의 꽃으로 상징된다. 노란 장미는 완벽한 성취를 푸른 장미는 불가능을 상징한다

플랫폼에서 손 흔들던 얼굴은 화자에게 (붉은)장미 향기로 떠오르고 더 이상 그녀와는 함께 하지 못하는 상황에 놓여있음을 알 수 있고, 결과적으로 화자는 헤어짐에서 오는 외로움을 겪고 있다. 자크 데리다는 애도에 성공하면 실패한 것이고 애도에 실패하면 성공한 것이라고 했다 즉 애도의 성공이란 떠나간 사람을 잊고 극복하는 동시에 새 삶을 사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의미이다

이는 긍정적이고 성공적일지 모르지만 사랑하던 사람을 온전히 비워내는 것은 사랑에 대한 실패라는 의미이다 반면 애도의 실패는 떠나간 사람을 온전히 비워내지 못하고 자신의 온몸으로 부정하고 힘들어 하며 기억과 추억에 충실하며 공유하고 살아가는 점에서 성공으로 본다는 의미이다 일견 아이러니하다

떠나갔지만 그 부재를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자신의 내면에서 함께 살아가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누구나 그럴 수 있는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다 화자는 떠난 사람을 잊지 못하고 내면에 붙들고 불면의 밤을 맞는다 애도의 실패이지만 자신의 내면에서 진정한 사랑을 붙들고 지키는 데는 성공했다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사람마다 다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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