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날 새벽에 일어나
차 한잔으로 마음을 씻고
늦가을 우물물로 머리감던
한 여자를 생각한다
그 여자의 새벽을 걸어가서
소반 위 정화수에 하얀 새벽달이
아직도 찰랑거리는 것을 본다
아직도 아랫목에차려진 생일상
김 오르는 찰밥에 박힌 붉은 팥을 본다
파아란 시금치나물이 들려주는
산밭의 이야기를 듣고
새벽바다의 푸른 꿈에 잠긴 눈을 끔뻑이는
간조기 한 마리와 눈을 맞춘다
해질 때까지 빈 들에서 행복을 이삭 줍고
가을이 다 갈 때까지 행복했던 소년 하나
옛 집에 살고 있는 것을 본다
무너져 집도 없는 그 집에 살며
돌아올 수 없는 여자를
아직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본다
한 번 더 그 생일상 앞에 앉아보아야겠다고
떼쓰는 그 아이 옆에
나란히 앉아 있는 낯익은 외로움을본다
코스모스꽃 흔적없이 져버린 연못가에서
낡은 하모니카로 옛곡조를 불고 있는
그 아이의 마른 눈물자국을 본다
이 시인은 늘 자애롭다 스스로 부족하다는 걸 잘 아는데도 언제나 누구에게든 ‘잘 한다 참 잘 했다 그리하면된다 그렇게 하는 거다’라는 눈물겨운 격려와 배려를 아끼지 않고 한참 모자라는데도 불구하고 늘 믿어주고 다독거려 준다 먼 길을 돌고 돌아 헤매다가 다시 그자리로 돌아가도 언제나 기다려주고 반겨주는 스승이자그가 어떤 결정을 내려도 그냥 믿게 되는 넉넉하고 탄탄한 신뢰가 바탕이 되어 준다
동인들 모두를 장중보옥掌中寶玉처럼 귀하게 여기는 이 시인의 덕분으로 대부분 동인들은 함께 해 온 세월들이 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편안하고 수월했던 것도 사실이다 정년퇴임기념으로출간한『그림자에게』(2004)는 이 시인이 전국 각지를 돌며153손수 찍은 사진을 배경으로 시를 담고 있는 시사집이다
위의 시사집에서 발췌한 이 시는 풀이 무성한 손질되지않은 뒷마당의 낡고 오래된 장독대가 배경인 한 장의 사진과 더불어 실려 있다 시에서 화자는 단지 장독대를 바라보는 데서 나아가 장독을 통해 과거로 돌아가고 과거 어린 아이 때 받았던 생일상을 다시 받고자 하는 그리움으로 내면의 길을 향해 걷는다
그리고 과거의 어린 시절로 돌아간 화자는 기억에 가장 오랫동안 남아 있던 어머니가 차려준 찰밥에 박힌 붉은 팥밥을 차린 생일상을 추억한다 생일날 새벽 정화수를 떠놓던 고마운 어머니에 대한 간절한 사랑과 그리움 그리고 되돌아갈 수 없는 지난날에 대한 회한과 행복을 잔잔한 서정으로 풀어낸다
시금치 밭이 있고 조기를 말리던 옛집에서 살았던 어린 시절의 행복을 떠올린다 하지만 행복을 이삭 줍고 가을이다 갈 때까지 행복했던 소년’은 더 이상 과거의 소년이 아니다 이제는 보다 넓은 세상으로 나와 이미 오래된 과거가 되었지만 어린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화자는 행복했던 소년이 옛 집에 살고 있는 것처럼 여유롭게 추억을 회상하며 또 정서적으로도 충분히 풍요롭다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가치를 한 번 더 그 생일상 앞에 앉아 보아야겠다고 떼쓰는 그 아이’의 응석받이 심정을 되새기고 재확인하는 과정에서 고단한 화자의 삶은 위로받고 진정되어가는 상황을 맞는다 나아가 화자는 지난날 생일상을 받았던 감동적이던 기억을 되새기는 과정에서 삶이 주는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진심을 확인한다
과거의 어머니와 신뢰관계가 굳건하게 형성된 점들을 재확인하다는 점 그리고 화자는 그러한 자신의 과거와 소통하는 점 등을 통해 스스로의 가치관에 자신을가둬두지 않고 이미 그러한 사실들을 객관화하는 상황으로 충분히 상자 밖으로 나온 삶을 살아간다 시의 화자는 생일상을 매개로 자신의 삶을 성찰하는가 하면 자신의 과거로 마음을 열어 고향을 그리워하고 두고 온 어린화자나 그리운 어머니를 있는 그대로의 상태로 바라보는상자 밖의 사람이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