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상진론 「유리벽 위의 남자」

by 김지숙 작가의 집

유리벽 위의 남자」


여기가 나에겐 산이지요

그는 열 개의 발가락을 에베레스트에 묻고 왔다

눈사태처럼 무너져 내리는 거품

그는 유리창의 시간을 닦아내고 있다

비밀이 평생 잠들어있는 얼굴들

요일별로 성을 가진 티벳사람 같은

빌딩의 창으로 받아 마시는 커피엔

눈물 냄새가 났지

기억을 건너 절름거리며 오는

묻혀버린 사람의 전화번호

두꺼운 책의 패인 홈에 숨어 있는

유령거미처럼

유리벽을 오르내리는 그림자

저 아래 사람들은 흔들리는 밧줄을 밟으며 간다

늪 같이 어두워지는 유리의 성

그의 발가락을 품고

깨어나지 않는 산처럼 가라앉고 있다



우리는 지각하고 경험하는 일들을 현실 상황 속에서 재현하기란 쉽지 않다. 따라서 우리가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어느 부분에도 상상이나 환상 혹은 환상적 요소가 더해진다는 여지를 남겨두고 생각해야 한다 시「유리벽 위의 남자」에서는 심리적 두 층위가 나타난다

유리창 밖 빌딩 숲을 밧줄 하나에 의지하여 유리창 닦는 작업을 하는 어느 남자를 모티브로 하고 다른 하나는 화자 자신도 모르게 그 남자가 되는 동일시하는 심리적 두 층위가 나타난다 유리창을 닦는 사람의 발을 묻고 온 에베레스트로 또 화자는 유리창을 닦는 남자를 자신의 모습과 동일시되다가 책의 홈을 오르는 거미와 같은 존재로 다시 화자와 거리를 두고 멀어진다

누군가가 창문을 통해 한 잔의 커피를 그 남자에게 전해주고 힘든 노동을 하고 잠시 휴식하는 그 남자가 마시는 커피에는 눈물 냄새가 난다고 하여 화자와 그 남자와 거리를 둔다. 빌딩을 두꺼운 책의 외면으로 늪같이 어두워지는 유리의 성으로 깨어나지 않는 산으로 그 남자를 유령거미로 바라보는 집요한 시선 끝에서 보면 분명 현실이지만 비현실적이며 동시에 비유적 상황을 불러들여 현실 상황을 환상적으로 변형시키고 그 과정에서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는 모호하고 흐려진다

결과적으로 심리적 불안감과 현실의 위태로움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낯선 상황 속에서 오히려 몽환적 섬뜩함을 유발하고 이로써 내면적 각인 효과를 자아내는 동시에 환상성을 각인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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