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장멸치
멸치 지나는 길에 그물 쳐서
그물코에 걸린 멸치를 잡아 뭍으로 가져와서
항구에서 털면 그물 밖으로 떨어지는 멸치
이삭 줍듯 바지런한 아낙들의 손에서
봄이면 액젓으로 가을에는 육젓으로
때로는 멸치회로 찌개로 말린 멸치로
가난한 살림살이 보태는
봄날이 후덕한 대변항 부산하다
바다를 끼고 있는 부산에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굳이 바다를 보러 나가지 않은 이상 바다는 일상과 꽤 먼 거리에 있다 물론 다른 고장에 비해 근접해 있긴 하지만 여전히 벼르고 나서야 되는 곳이기도 하다 기장 앞바다는 부산이라고는 하지만 강서구나 사하구 사상구 등에 사는 사람들에게 기장機張은 오히려 가까운 창원 용원 등보다는 훨씬 더 먼 곳이라 나들이를 생각해야 나설 수 있다
기장멸치는 인근 해안에서 가장 많이 잡혀서 요즘은 축제로 열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전에서는 기차역을 중심으로 멸치철이 되면 아주머니들이 커다란 양철로 만든 동이에 멸치를 머리에 이고 다니며 '멸치사이소'라며 동네가 떠나갈 듯 큰소리로 휘젓고 다니거나 리어카를 끌고 다니면서 멸치철이 왔다는 것을 알리곤 했다 달리 축제가 있지는 않았지만 멸치철이 되면 자연 멸치 장수를 에워싸고 아이 어른 없이 멸치가 싱싱한지 눈으로 보고 한 마리로 여러 갈래로 살을 찢어서 맛을 보고 냄새를 맛고 하는 다양한 확인 방법을 강구하고 난 뒤에 멸치를 구매하곤 했다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그게 바로 온 동네 축제였다 밝은 얼굴로 삼삼오오 모여서 어느 집에 멸치 액젓을 담기도 하고 작년 담은 액젓을 걸러 김장에 쓰기도 하고 멸치액젓 달이는 고약한 냄새를 풍기기도 하고 사 온 멸치 중 일부를 덜어내서 멸치 매운탕을 끓이거나 튀김으로 혹은 지난 젓갈의 살만 발라서 쌈밥에 얹어 먹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멸치가 등장하는 시기가 되면 가까이 지내던 이웃사람들은 더 가까운 사이가 되어 마주 보고 웃게 되고 아이들과 엄마들의 정은 더 돈독해져서 이웃사촌이라는 표현처럼 먼 친척보다도 더 자주 마주 보고 밥 먹고 하하 호호 웃을 일들이 더 많았다
가끔 기장방파제를 가곤 한다 기장 앞바다를 바라보는 식당은 멸치와 관련된 메뉴들이 즐비하다 옛 생각에 멸치회를 비롯하여 이런저런 메뉴들을 시켜 먹곤 한다 옛맛을 너무 잘 기억하는 터라 쉽게 그 맛을 따라잡을 수 있는 곳은 없었지만 그래도 맛의 한 자락이라도 붙잡고 싶고 그것으로 옛 추억을 일깨우는 맛을 삼으려고 애를 쓴다
추억 속의 음식맛을 재현하기란 참 어렵다 입맛이 달라졌고 환경이 달라졌고 무엇보다도 엄마의 손맛이 세상 안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맛을 기억하기만 하면 대체로 비슷하게는 재현하지만 그래도 낼 수 없는 손맛이란 게 따로 있어서 맛을 기억하지 않는 한 늘 한계에 부딪친다 그래서 인터넷에 떠도는 레시피대로 음식을 만들면 실패할 확률은 줄어들지만 그래도 내가 먹어본 그 맛을 찾아내기란 참 쉽지 않다
멸치회무침도 멸치찌개도 그와 마찬가지이다 누구나 쉽게 만들 수 있지만 그때 그 맛을 찾으려는 머릿속이 꽤 고생을 한다 간혹 식당에서 사 먹는 멸치회나 무침 찌개 등에서는 기름쩐내가 난다 이럴 때면 어릴 적 엄마의 그 손맛이 더 간절하다
예전에 엄마는 늘 멸치가 기름기가 많아서 바로 먹으면 배가 아프다고 막걸리에 담갔다가 베보자기에 사서 기름기를 돌로 눌러 빼고 난 뒤에 회로 무쳐서 먹었다 이 회무침에 들어가는 다양한 종류의 야채들이나 음식에 들이는 정성의 종류가 달라서일지도 모른다 대변항을 찾는 사람들도 나처럼 지난 추억을 맛보고 싶어서일까 이따금씩은 이런 멸치철이 되면 해안을 찾아드는 멸치 떼처럼 내 가슴속으로 수도 없이 수많은 추억들이 밀려들고 밀려난다 이런 생각이 들면 늘 가슴 한구석에서 잔잔한 바람이 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