쫄딱비

by 김지숙 작가의 집

시집 『어서와 봄날』


쫄딱비




내 생전에 불한당 같은 비 맞기 처음이다

머리통을 뒤흔들 듯 세게 두들겨 맞기도 처음이다

예고 없이

소강상태에서 들이닥친 억수 같은 비

억화심정인양 송두리째 내게만 쏟아붓는 붉은 비


대책 없이 말간 마음으로 길을 가다가

여름옷, 가진 마름 몽땅 털리고

머리털 한올까지 물벼락을 맞았다.


황당한 비 세례

감당하기 어려운 억수비, 그 배신



소나기가 맞을까 아니 그래도 경상도 사람들은 일부 그렇게 쓴다 억수비 쫄딱비는 장마철에나 맞는 비일 수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생을 살면서 그렇게 세게 배신의 뒤통수로 갑작스레 맞은 것은 처음이었다 그 펄펄 끓는 분노를 뜨겁게 내려 붓는 이유를 모르고 '인생비'를 맞은 날은 잊히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은 아픈 마음을 가슴에 넣어두고 어떤 이유로든 쉽게 꺼내어 자신의 마음을 발가벗겨 보이지는 못한다 그래서 시인은 시를 쓰고 화가는 그림을 그리고 음악가는 음악을 하고 춤꾼은 춤을 추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들은 미주알 고주알 속속들이 다 자신의 내면을 다 드러내지 않고 스스로의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방법을 시도하는 것이리라 그래서 자신과 유사한 경험이나 생각을 담아낸 예술작품들을 좋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래된 나의 책들을 정리하면서 내가 쓴 시 중에서 이런 마음이 들어 있는 시를 찾았다. 왠지 시를 읽으면 시를 쓴 당시의 마음이나 상황들이 생각나서 사실은 마음 아픈 경우가 되살아나서 나의 글이나 시들은 피드백 하기를 꺼린다. 하지만 '와신상담'이라는 말도 있고 세월이 꽤나 지났고 지금은 심적으로 평온한 상태라서 가능할 것 같다.

솔직히 나는 비교적 대부분의 일에 모질지 못하게 세상을 살아왔다 그래서 대신 내게 다가온 일들은 완벽하게 해낸 것도 적고 모진 일들을 끝가지 견뎌 원하는 상황으로 바꿔내는 일도 해내지 못했다


내 젊은 날, 홀로 적적하게 늙어가는 어느 노 시인이 내게 한 말이 생각난다

'김시인은 강단은 있지만 착하고 순해서 맺고 끊는 일을 잘못하지 그래도 극단적인 나쁜 일은 반드시 피해 갈 거야 나처럼은 살지 않을 거야 부럽다'

라고 한말이 생각났다 그때는 승승장구하던 때라 그 말이 그냥 칭찬쯤으로 들렸다. 하지만 살다 보니 그 노시인의 말은 방점이 나쁜 일에 찍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내 지인들보다 혹은 친구들에 비해 혹은 자랄 때의 환경보다도 훨씬 어렵고 나쁜 일들을 수 차례 겪었다. 그게 내가 나빠서가 아니라 주변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거절하지 못해서 생긴 일들이 태반이었다 하지만 난 언제나 나는 거기서 답을 얻었고 한 걸음 때로는 108계단 높이만큼 심적으로 성장했고 그곳에서 무사히 빠져나왔다. 지나고 보면 최악의 순간은 끝내 비꼈다 그리고 지금은 순하지도 착하지도 않은 마음가짐을 배웠다 맺고 끊는 것도 이전보다는 훨씬 더 잘하려고 노력 중이다 지금은 죽고 없는 노시인의 말이 한 번씩 생각난다


그 시절 쓴 시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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