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할매

by 김지숙 작가의 집




동강할미꽃2.png 동강할미꽃


울할매


풋풋한 열여섯 나이에

신랑 얼굴 모르고

김해 김씨 삼현파

문중 종가의 맏며느리로

시집 온 울할매


길쌈하며 부르던

노래의 반은 일본말

문득 나도 모르게

그 노래 입속으로 웅얼대다가

눈을 들어 거울 보니


내 어릴 적 할매 얼굴 거기 있다



울할매는 평생을 아침에 일어나면 쪽진 머리를 풀고 감은 머리를 말릴 틈도 없이 동백기름을 반지르르 바르고 가운데 가르마를 갈라 은비녀로 단정하게 다시 쪽을 지었다

당시만 해도 할머니들은 쪽진 머리를 풀어 컷 머리를 하거나 빠글이 펌을 많이 하고 다니던 터라 절에 다니는 할머니 중에서도 쪽진 헤어스타일은 보기 힘들던 때였다

아담하고 하얀 얼굴을 가진 예쁜 울할머니는 불심이 깊었다 제일 큰 딸이라서인지 이모할머니들이 울할머니를 따랐다 맏며느리인 엄마를 비롯하여 할머니의 며느리들과 하나뿐인 딸인 고모도 절에 다녔다 할머니가 이끄는 집안은 불심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 속에서 내가 자랐다

언제나 정해진 날이면 절을 다녔고 우리 집은 절과 가까운 곳에 있어서 사람들은 절을 나오면서 우리 집에서 잠시 쉬었다가 각자의 집으로 가곤 했다

할머니가 살아 계실 당시만 해도 나는 마음을 내어 절에 간 적은 기억에 없었다 절에 다녀오신 할머니는 손수건에 싼 커다란 콩이 듬성듬성 박힌 백설기를 가져다가 자주 내게 주시곤 했다 내가 할머니가 다니던 절에 간 것은 할머니께서 극락왕생하던 날이 처음이었다


이 시는 어느 날 문득 거울 속의 나를 보면서 쓴 시이다 염색을 하기 싫어 방학기간 동안 염색을 쉰 적이 있었다 순식간에 흰머리들이 차고 오르는 것을 보면서 문득 희끗희끗한 머리를 한 할머니의 모습이 불현듯 떠 올랐다

어린 나이에 시집와서 교량공사를 하던 할아버지를 따라 전국을 돌면서 지냈고 일본말도 곧 잘하셨다

엄마는 내가 울할머니를 닮았다고 말했다 나는 아버지를 쏙 빼닮았고 아버지는 할머니를 쏙 빼닮았으니 그 DNA가 어디서 왔을까

어린 시절 할머니는 일본말로 된 노래를 부르곤 했다 난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그 노랫가락을 따라 부르곤 했다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일제 때 소학교에서 배운 노래 같았다

그 노랫가락은 아직도 내 머릿속에 박혀 있다 대학에서 일본어를 배우면서도 그 노래를 들어본 적도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왜냐하면 그 노래는 일본 노래도 한국 노래도 아닌 울할머니의 박자와 음정과 가사로 재구성된 울할머니만의 노래였기 때문이었다

가끔씩은 울할머니가 살아계시고 집안이 사람들의 웃음소리로 온통 들썩대고 발길이 끊이지 않던 그날들이 생각난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때가 이따금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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