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에게

by 김지숙 작가의 집

시집詩集『봄봄 봄봄』



바람에게



천 길 허공에

바람이 지나는 길이 있다


늘 같은 손짓으로 다가와서

말없이 그리움 흔들어 놓고

흔적 없이 사라진다


해 질 녘 풍경처럼

풀잎의 속삭임처럼 다가와

대숲 안에 들듯

차갑고 싸늘하게 흩어진다


지나는 길만 다니지만

바람의 첫 길은 언제나 그 길이다



바람은 아무리 아름다운 꽃잎 위에도 오래 머물지 않는다 또한 아무리 어려운 산길도 꼬부랑길도마다 않고 잘 다닌다 언제나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다가와서는 고요히 사라지는 바람은 어디에도 연연하지 않고 떠나가고 돌아온다

바람처럼 살다 간다는 말은 여린 영혼으로 모양 없이 따스하게 왔다가 그저 봄눈처럼 사라지는 것이리라 바람이 흔적을 남긴 모래밭을 본 적이 있다 사막에서도 바람이 다녀간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바람은 그림자가 없어서 더 빨리 움직이고 소리가 없어서 더 잘 들리는지도 모른다

물처럼 바람도 막히지 않고 흘러야 살아있다 바람이 흐르지 않는 곳은 사람도 살 수 없다 바람이 불면 많은 것들이 반긴다 푸른 잎새도 구름도 아이들도 보이지 않는 바람을 기다린다 바람이 꽃잎을 지게 하는 것은 아니지만 꽃잎이 져야 열매를 맺는다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을 것 같지만 흔적이 남는다

다만 그 흔적은 바람을 느낀 자의 것이다


세상을 살아보니 바람을 일으키는 사람이 따로 있다 생명력을 잃은 것 같은 집단에도 유독 신바람 같은 한 사람이 있어 그 단체는 생명력을 갖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 같이 출렁인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 살아가기도 쉽지 않지만 신바람이 나는 일을 하는 것도 쉽지는 않다 하지만 그런 사람 옆에만 있어도 생이 활기 차게 느껴지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살면서 그런 사람들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나도 그런 생명력을 가지려고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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