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비언어적 욕망의 경계

서론 강남주

by 김지숙 작가의 집

서론 강남주



부산의 시, 아시아로 날다 [부산 시문학 시인회]20주년 기념 사화집이다. 사화집의 표지는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아시아 지도가 펼쳐지는데, 이로써 동인들의 시가 아시아에서 나아가 세계로 그 활동 영역을 넓히려는 비상의 열정을 잘 읽을 수 있다.

이번 사화집은 일본어와 중국어로 번역 출간되었으며, 세계화 시대에 걸맞게 폭 넓은 시적 활동하려는 각오가 담겼다는 점에서 남다르다 하겠다. 또, 아시아인과 정신적 교감을 추구하고, 지리적 문화적 거리를 좁히는 그 첫걸음이라는 점에 이번 사화집 발간은 더 큰 의미를 갖는다.

오랜 세월을 한결같이 서로를 이해하고, 이마를 맞대어 시와 삶을 이야기하며 문학 활동을 해 온 이들은 서로의 어투에서나 표정만 봐도 서로의 가슴에 품은 말과 생각을 읽게 된다. 매년 발간되는 사화집은 해를 거듭할수록 더욱 탄탄한 시력을 보이지만 그보다도 더 중요한 점은 사소한 일에도 서로 격려하고 기뻐하는 그들의 시심에 더욱 마음이 가는 것은 사실이다.

시에서 비언어적 표현은 언어적 표현을 보충하는 기능으로 상호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신체를 표현하는 정도만큼이나 다양하고 복합적이다. 또한 시에서 비언어적 요소는 신체뿐 아니라 시공간 거리, 사물, 인공물마저도 이 범주에 포함된다. 하지만 이러한 비언어적 요소는 세밀한 표현이 가능한 반면, 경계가 모호한 한계점을 지니기도 한다.

마가렛 마흘러는 ‘인간은 태어나서 엄마와 자신이 다른 존재라는 점을 깨닫는 분리의 과정에서 겪는 첫 감정’이 ‘비애’라 했다. 경우에 따라서 ‘비애’는 오히려 ‘성장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긍정적 신호가 되기도 한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줄기차게 추구해 오던 우상이 허상임을 깨닫고, 슬퍼하거나 혹은 애도의 과정을 거치면서 그 점을 흔쾌히 받아들이면서 새로운 각오와 이전보다는 더욱 폭넓은 시야를 갖기도 한다. 즉, 이전의 꿈을 날려 버리거나 기대를 포기하기도 하고, 현실과 타협하거나, 꿈을 조절하여, 적절한 행복의 균형을 찾기도 한다.



흔적 없는 바람이나 구름으로

내 그대 곁에 오래 머물고 싶다.

흔들리며 떠돌다가

졸고 있는 그대의 풍경소리로 깨어나고

메마른 가슴 적시는 비로 내려

그대의 덧없는 옛날이고 싶다.

나를 잊은 떠돌이의 손수건으로

오래토록 애잔하게 나부끼다가,

그대를 맴돌며 여윌 수 있게

캄캄한 속을 헤매다가

흔적 없는 바람이나 구름으로

내 이제 그대 곁에 머물고 싶다

-강남주, 「떠도는 자의 일기」



강남주의 시 「떠도는 자의 일기」에서 화자가 시적 청자에게 소통하려는 방식은 상대를 향해 설득하고 협상하는 과정을 거치는 관계개선이라기보다는 혼자만이 느끼는 은밀한 고통으로 내적 수련을 거듭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방향성을 찾아가고, 자기 존재를 영역화 한다.

화자는 시적 청자에게 ‘흔들리며 떠돌다가’ ‘나부끼다가’ ‘헤매다가’와 같은 비언어적인 움직임과 관련된 감정을 내보인다. 하지만 실상은 흔적조차 없는 ‘바람’ ‘구름’이 되어서라도 화자 곁에 ‘머물’고 싶은 속내를 내보이는 이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장치로 사용한다.

이에서 나아가 시의 화자는 현재, 상실의 공간에 서 있다. 과거의 아름다운 회상은 상실을 애도하는 시점부터 시작된다. 이루어지지 못한 무거운 추억 속에서 그대로 남은 화자는 ‘덧없는 옛날이고 싶’어 한다. 그 ‘옛날’을 떠나보내고 싶지 않다. 그러기에는 너무도 소중하기 때문이다. 마치 자신을 잊는 ‘손수건’으로 나부끼며, 오랜 세월을 충분히 슬퍼하고 그리워하면서 여위어 간다. 그렇게 그리움의 대상과의 관계를 애도하는 기간이 끝나고, 바람이나 구름의 존재가 되더라도 ‘그대의 곁’에 머물고 싶어 한다.

이처럼 화자는 회상의 작업을 거쳐 소중한 것을 소중한 채로 가슴 깊이 간직하고, 다른 존재로 변하여 그리운 이의 주변에 머물면서 새로이 자리 잡고자 한다. 떠나보낸다고 해서 형체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에 화자는 억지로 잊으려하지 않는다. 잊기보다는 회상을 통해 가슴 속에 새겨진 그리움을 애도하고 이겨내는 과정에서 화자와 그리움의 대상 간의 거리는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형성된다. 화자는 그리움의 대상을 떠나보낸 후, 진정으로 마음속에 살아 있는 존재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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