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쓰는 사람이 된다는 것
대부분의 한국인이 그러하듯, 바쁘게 살아왔다. 친구들이 학교에 가게 되니까 막내딸의 어리숙함은 생각지도 않고 대뜸 1년 일찍 학교에 보내신 부모님 덕분에 연필 잡을 힘이 부족하여 가운뎃손가락이 휘어지는 참상을 겪으며 국민학교를 졸업했다. 재수도 없이(!) 대학까지 아우토반처럼 질주하고 졸업식 5일 후 첫 근무를 시작했다.
국어 교사로 재직한 지 30여년, 사회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우여곡절이 많은 시간을 학교에서 보냈다. 학생들은 골칫거리이면서도 너무나 소중했고, 나를 인간으로 성장시켜 주었다. 그 시간 속에서 이상한 나를 정상세계로 이끌어준 남편을 만났고, 영원한 사랑의 근원인 엄마와 작별을 하였다.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사랑도 있다는 것을 알려준 아이를 낳아 모자란 어미 노릇과 반성으로 눈물 흘린 날도 많았다.
가진 것 없는 시골집 장남인 남편과 영차영차 힘을 모아 인서울은 못했지만, 아파트도 장만했으며 평생 있을 것 같지 않던 남편과의 불화를 겪을 때 나만의 자동차를 사기도 했다. 교사는 순진하고 속기도 쉽다는데, 주변 동료들은 잘도 강남으로 잠실로 집을 옮겼다. 재테크에는 한 푼의 소질도 관심도 없는 내가 딱해보였던 어떤 선배님은 구체적인 대출 방법과 이사 시기를 점찍어 주시기도 했지만, 현실에서 1미터쯤 떨어진 허공에 머물며 영원한 이상주의자를 자처하는 나와 귀차니즘의 현신인 남편이 합의한 결론은 '그냥 살자!'였다. 글쎄, 지금은 반쯤 후회, 반쯤 미련이 남는 부분이다.
평생 낯을 가리고, 사람에 대한 호불호가 심하고, 관심없는 스몰톡에 집중하지 못하는 산만함 덩어리였다. 당연한 결과로 외톨이로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친절한 동료나 친구들이 모임에 나오기를 권유해 주어도 못난 나는 자주 핑계를 대며 복을 걷어찼다. 유일하게 싫증나지 않는 것은 단 하나, 책뿐이었다.
내향성 대회가 있으면 베스트 오브 베스트였을 아버지의 딸로서 나 역시 어디 가도 내향인의 소질만큼은 남부럽지 않았다. 게다가 위로 두 언니들과는 기질도 다르고 나이 터울도 꽤 있던 터라 어린 날부터 외로움은 나의 운명이었다. 심심했기에 문자를 빨리 익혔고, 어쩌다 사주시는 책들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도록 읽고 또 읽었다. 겉표지가 푸른 바다색이었던 <마젤란> 전기, 하얀 비닐 표장에 쌓여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던 월간 <소년 중앙>은 어린 날의 행복이었다.
중고등학생 때에는 선생님이 모르시는 줄 알고(내가 교사가 되어보니 다~~ 보였다^^) 책상 속에 소설 책을 넣어두고 설명과 필기 사이사이에 읽었고, 방과 후 도서관은 영혼의 쉼터이자 삶의 자양분이었다. 지금도 선연히 떠오르는 독서의 장면들:오후 늦게까지 도서관에서 책을 읽다가 어스름이 내릴 무렵 윤동주 시집을 손에 들고 가로등이 켜지는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며 시를 외웠다. '별 헤는 밤', '자화상', '서시'의 구절들을 지금까지 기억한다. 또, 전철을 타고 통학한 기간이 있었는데, 시험을 보고 일찍 파한 날 덜 붐비는 역에 내려 빈 벤치에 앉아 소설을 읽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죄와 벌> 같은 책들을 하루에도 두세 권씩 독파했다.
어른이 되어서도 특별한 취미에 마음을 붙이지 못하는 집중력 제로의 인간이었지만, 책만은 참을성 많은 연인처럼 언제나 내 곁에서 만병통치약이 되어주었다. 지지난 겨울, 네 살 위의 언니가 갑작스레 내 곁을 떠나버린 이후, 나는 엄마를 잃고 십 년이 넘도록 아팠던 것보다 어떤 면에서는 더 괴로운 날들을 보내야만 했다. 밥 한 톨 못 넘긴 장례 기간, 이러다 죽겠어서 떠난 제주도 여행에서 올레길을 걸으며 울며울며 일주일을 보내고 결국은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내 마음은 회복되지 못했다.
정년 퇴임을 몇 년 남기고 학교를 떠났다. 버틸 힘이 없었다. 작년 12월 말에 업무를 마치고, 내 인생 처음으로 홀가분할 수도 있었던 올 초, 또다시 깊은 우울에 빠지고 말았다. 이럴 수는 없어서 북한산 둘레길을 걸었다. 봄기운보다는 찬바람이 기승한 익숙하지 않은 산길을 혼자 걸으며 조금씩 다시 세상과 만날 기운을 얻었다.
평생 자발적으로 모임에 가입한 적이 없던 내가 도서관 서평 모임에 참여하게 되었고, 독서 모임과 글쓰기 모임에도 이름을 올렸다. 읽기만을 좋아했고, 새로울 것 없는 글이나 문장이 조악한 글에 냉혹한 독자로서 아무나 글을 쓰고 책을 만들면 안 된다는 입장을 고수하던 나는 서툴게 글을 쓰기 시작했고, 소수의 인원이지만, 다른 사람 앞에서 내 글을 읽기도 하는 사람이 되었다.
글을 쓰면서 삶을 내 것으로 만들어간다. 스쳐지나간 공기, 누군가의 목소리, 나무나 풀꽃의 잔향,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계절의 냄새를 어떻게든 마음에 가두고 글로 표현하려 애를 쓰면서 '내 것들'을 수집한다.
이제서야 나를 찾는 길목에 제대로 들어선 느낌이다. 특별할 것이라고는 전혀 없는 내가 프로필을 만들고 글 세 편을 올려 브런치 작가라는 이름을 얻는다. 실생활에 필요한 자격 외에는 처음 받아본 지위이다. 왕족이라도 된 듯 흐뭇하다. 앞으로 잘 써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