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탈남님의 작은 고양이 막내를 생각하며
짐승의 한 배 새끼들 가운데 첫 번째로 태어난 것을 무녀리라 부른다. 세상을 향하는 문을 처음 열고 나온 생명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추측처럼 씩씩하고 용맹하거나 남달리 건강한 게 아니라 힘겨운 미지의 경로를 오롯이 겪어내느라 기진맥진 지친 모습이다. 무녀리는 작고 약해서 기대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생존 자체가 쉽지 않다. 짐승에게만 무녀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인터넷 포털 메인 화면에 노출된 브런치 작가들의 글을 흥미롭게 읽곤 했다. 온갖 물리적 악조건 속에서도 자기 힘으로 삶을 일구는 젊은 청년의 글, 전근대적인 시댁과의 관계를 경쾌하게 정리함으로써 많은 이에게 자극을 주는 여성의 글, 아픈 몸을 이끌고 절망하지 않으며 살아가는 삶을 그린 글, 혹은 취미나 실생활에서 유용하게 쓰일 팁을 알려주는 글 등, 신선한 소재에 흡인력이 강한 글이 많기도 했다.
열심히 살았노라 자부하지만 글감으로 쓸 특별한 경험이 없는 나는 텅 빈 곳간의 주인처럼 가난한 마음이 되곤 했다. 그러나 가진 것이 없기에 잃을 것도 없는 법! 딱 한 번만 ‘브런치 작가 되기’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 마음속엔 불이 타오르기도 했지만 실재로는 정상체온으로만 살아온 날들의 끝에서 조금 더 치열한 어떤 것을 잡고 싶었다.
결과 통보가 메일로 오는 것을 모르고 실망하던 차에 다른 일로 열어본 메일박스에 축하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곧바로 글쓰기 창을 열고 초고도 없이 흥분된 마음을 첫 글로 올렸다. 소수의 지인들께만 소식을 전하고 남편과 아들에게 조심스레 읽은 소감을 묻는다. 가장 솔직한 피드백을 받을 수 있을 테니까.
은근한 기대감도 없지 않았다. 내가 막 세상에 내놓은 무녀리에 대해서.
그러나 예상과는 다른 반응에 마음이 작아진다. 아들은 비교적 주술 호응이 자연스러운 문장을 칭찬하면서도 에세이에 큰 매력을 못 느끼는 취향임을 에둘러 전하였고 남편마저 조심스레 조금 더 '읽는 재미'가 필요하지 않겠냐는 의견을 내놓는다. 문장에 서정이 덜 하여 건조한 느낌이 있고 유머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지나친 서정성은 센티멘탈의 위험이 있고 유머만이 글의 재미는 아니라며 소심한 방어를 하고는 다시금 생각에 잠긴다.
글을 쓰고 싶은 것만이 소망이라면 혼자 써도 될 것을 나는 왜 공개된 인터넷 공간에 글을 올리고자 하는가? 글로 표현하는 행위에는 '읽힐 것'을 바라는 마음, 그래서 공감을 얻고자 하는 기대가 있는 것은 아닐까? 언어라는 매체 자체가 소통을 위한 도구가 아닌가 말이다. 여하튼, 잠들어 있던 문장들을 주섬주섬 깨워놨으면 누군가에게 다가가서 손을 잡고, 교감을 하고, 처음보다 더 많은 생각거리를 데리고 돌아와 주었으면 싶어 진다.
그러나 이제 막 쓰기의 세계에 들어선 나는 무녀리로 태어난 새끼처럼 뒷심도 부족하고 자신도 없다. 잘하고자 하는 의욕은 있지만 작은 장애물도 쉽게 넘지 못하고 힘센 동배들에게 쳐지기 일쑤인 무녀리들과 다를 바 없다. 강한 새끼를 먼저 살려야 하는 야생에서 자칫 부모에게조차 내침을 당할 수도 있는 무녀리들과.
고양이 집사인 매탈남님의 유튜브를 보면 어미 누리의 첫 배 새끼 중 아주 작은 아이가 등장한다. 이름은 막내. 무녀리로 태어났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너무나도 작고 연약하여 곧 숨이 멈출 것만 같았다. 설상가상 어미는 새끼들을 며칠이나 인간 매탈남님께 맡기고는 자취를 감춰 막내는 어미젖 한 모금도 변변히 얻어먹을 수 없었다. 매탈남님은 눈도 제대로 못 뜨는 막내에게 한 방울씩 인공수유를 했고 변을 보도록 배를 문지르며 여러 밤을 지새우다시피 정성을 들였다. 출근길에도 고 작은 것을 대동하여 보살핀 집사님의 정성도 감탄스럽지만 살아내겠노라는 의지의 화신인 양 우유를 삼키고, 뼈가 드러날 정도의 야윈 몸으로 냥냥거리며 존재를 증명하던 막내의 투지에 매료되었다. 마침내 막내는 우주 최강 미묘로 성장하여 집사님께 효도를 듬뿍 하고 있다.
하고 싶은 많은 일에서 손을 놓으며 살았다. 라켓, 수영복 등 장비만 남기고 일정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많은 운동 종목들, 앞의 이삼십 페이지만 손때가 묻은 외국어 교재들, 늘 언젠가 떠나야지 생각만 하고 있는 미국 횡단 자동차 여행(친구와 나는 ‘델마와 루이스’처럼 떠나자고 약속했었다), 철학과 과학, 수학 공부... ‘나중에 다시 하지’라는 변명은 내가 뭔가 포기한다는 사실조차 느끼지 못하게 만들었다. 삶의 여러 장면에서 나는 어린 고양이 막내만큼의 용기와 끈기도 발휘하지 못했다.
새롭게 글쓰기를 시작하면서 막내의 고군분투를 생각한다. 과연 생존이 가능할까 의심스러운 상황에서 막내는 있는 힘껏 삶의 의지를 불태웠다. 나의 소중하고 못난 무녀리, 브런치에 올린 첫 글을 다시 본다. 막내처럼 예쁜 모습은 못되겠지만 나의 무녀리도 씩씩하게 키울 것이다. 이 세상 모든 무녀리에게 응원을 보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