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육아기를 시작하는 이유
책임져야 할 아이가 삶에 등장하면 세상이 달라 보인다. 바람구두를 신고 세상을 떠돌던 여행자는 뿌리 내린 거주민이 된다.
어버이 은혜의 수혜자에서 양육자로의 전환은 환희이면서 고난이기도 하다. 오죽하면 육아전쟁이라는 형용모순의 표현이 생겼을까. 천지가 환해지는 기쁨 바로 뒤에는 아기가 왜 우는지 몰라 내가 더 서러워지는 고뇌가 붙어있다.
삼십 년이 되어가는 기억 속의 나도 그랬다. 남의 아이들은 잘도 크던데 막상 내게 닥친 임신과 육아는 굽이굽이 예기치 못한 일들의 연속이었다. 혼자 놀기의 달인이었던 나는 분리가 불가능한 어린 생명 앞에서 당황하고 불안했으며 수시로 패닉 상태가 되었다.
준비상태 제로인 나대신 남편은 타고난 양육자였다. 기저귀를 갈고 제 시간에 분유를 먹였으며 아기가 무엇을 원하는지 귀신처럼 눈치 채서 까르르 웃게 해주었다. 해마다 육아일기를 책으로 만들기도 했다. 무엇보다 아빠도 당연히 주양육자라는 태도를 갖고 있어서 나로 하여금 엄마라는 이름이 갖는 무거움을 털어내게 해주었다. 이제 그 육아 이야기를 시작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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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갑인 남편과 결혼을 하고 한 아이를 낳아 양육했다. 남편은 지극히 사랑이 많은 사람이었다. 새벽 전철을 타고 꽃시장에 가서 항아리에 가득 꽂고도 남을 싱싱한 꽃다발을 안겨 주었으며, 틈을 내어 직접 예쁘게 장식한 과일이며 간식 같은 것을 내 사무실로 배달해 주었다. 계절에 맞는 아름다운 곳을 찾아 교통편을 예매했고, 길고 긴 편지를 써보내 주었다. 남편은 지금도 나에게뿐 아니라 인연이 닿는 모든 사람에게 정을 나눌 줄 아는 사람이다.
나는 계절이 바뀌는 하늘빛이나, 말라가는 들풀의 향기, 투명한 초록 바다 같은 자연의 아름다움에 가슴이 뛰었고 결코 정서가 메마른 사람이 아니었지만, 타인과의 깊은 정서적 유대를 원하지 않았다. 나는 한사코 사람들과 정도 이상으로 가까워지는 것을 경계하고 있었다. 냉정하다는 원망도 들었지만, 뒤늦게 깨달은 것은 상대의 반응에 민감한 나로서는 끊임없이 상대방과 상호작용을 하는 일이 영혼을 피폐하게 만들 정도로 부담스러웠다는 사실이다.
인정 넘치는 시골에서 나고 자란 덕분인지, 타고난 성정인지 남편은 열정과 냉정 사이를 오가며 불안한 정서로 널뛰는 나를 힘들어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거의 혼자 힘으로 관계를 이끌어갔다. 제멋대로 굴었던 나의 미숙함이 그저 부끄럽고 미안할 뿐이다. 관계는 향기로운 술을 빚는 일과 같아서 한결같은 정성으로서만 완성시킬 수 있음을 남편에게서 배웠다.
결혼 전부터 친정 엄마가 병고에 시달리고 계셨던 점도 내 불안의 큰 이유였다. 내겐 신앙 같은 존재, 올곧으면서도 다정한 엄마. 세상에서 지치고 부서져도 집에 오면 엄마가 있어서 숨을 쉴 수 있었지만, 불행은 결코 나를 지나치지 않았다. 어느 날부터 눈동자가 불길한 색을 띄고, 체중이 감소하던 엄마는 담도암을 선고 받았다. 나는 타고 있던 배에 구멍이 난 것처럼 슬프고 무서웠다. 나로 인해 함께 이 난파선에 올라탄 남편은 차오르는 바닷물을 퍼내듯 나를 안심시키려 애썼고 무한한 인내로 버텨주었다.
엄마에게도 곰살궂은 남편 덕분에 엄마는 투병 중에도 간간히 웃으셨고 시간이 흘렀을 때 잘 살까 싶었던 막내딸의 앞날을 크게 걱정 않고 눈을 감으실 수 있었다.
엄마의 병세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을 무렵 결혼을 하고 곧바로 임신과 출산이 이어졌다. 준비성도 없어서 무엇이든 닥치고서야 뒤죽박죽 일처리를 하느라 정신없던 나는 육아에서도 미비하고 미숙했다. 엄마를 비롯해 모든 사람이 기뻐하니 나도 덩달아 좋은 일인가 싶었지만 나의 모성은 아주 서서히 성장하고 발현되었다. 아이가 너무 소중했지만 엄마노릇을 제대로 못할까봐 무서웠다. 차라리 아이를 위해 목숨을 내놓으라면 기꺼이 하겠지만 아기를 돌보는 일은 지극히 서툴렀다.
남편이 그토록 다정함과 섬세함, 게다가 엽렵한 손재주를 겸비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우리의 육아는 어떻게 됐을까? 물론 넘치는 애정이 있고, 남다른 책임감도 있으니 어떻게든 아이를 양육했겠지만 아이에게나 부모인 우리에게나 험난하고 힘든 순간이 많았을 게다. 그 또한 재밌는 추억이 됐겠지만 지금처럼 흐뭇하고 꽉찬 만족감을 남기지는 못했으리라.
삼십 년 가까이 시간이 흐른 지금, 기억은 군데군데 퇴색되고, 아이는 어른이 되었지만 남편의 부모노릇을 굳이 기록하는 데는 작은 바람도 담겨 있다.
내 아이를 양육하는 동시에 가르치는 직업을 수행하면서 아이가 처음 만나는 세상인 부모의 역할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과도하게 의미 부여된 모성신화, 직업과 육아를 병행하는 많은 엄마들이 져야하는 부담과 극복하지 못하는 죄책감, 함께 부모가 되었음에도 어디서도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은 아빠노릇에 지칠 뿐 아니라 육아의 주체가 되지 못한다는 비난을 감수해야 하는 아빠들의 입장에 모두 공감한다. 평균 이하의 엄마였던 내가 해결책을 내놓을 리는 만무하다. 다만, 둘이 함께여서 어떻게든 이루어낸 우리의 양육 과정을 공유하면서 특히 아빠들에게 육아가 자신의 일이며, 그 일은 인간적 성숙은 물론, 뜻밖의 보람과 기쁨의 원천이 되어준다는 진실을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