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의 입덧과 임신 분투기
참 유난스러운 임신이었다. 초기에는 전치태반으로 출혈도 있어서 몇 주나 자리보전을 하기도 했다. 서른이 넘었으니 노산이라는 산부인과 의사의 말도 들었겠다, 잘못될까 노심초사하면서 눈물을 흘릴 때, 남편은 조용히 내 손을 잡아 주었고 내 마음도 차분해질 수 있었다. 우리가 만날 운명이라면 만나게 되겠지?
다행히 안정이 되자 찾아온 것은 세기말적 입덧이었다. 처음에는 특별한 음식이 갑자기 떠오르고 집착 수준으로 맹렬하게 그 음식만을 추구했다. 대표적 메뉴가 무섞박지. 김장할 때 채 썰고 남은 무 꽁댕이를 서걱서걱 조각내어 따로 양념하지 않고 배추 사이에 넣어두면 곧 시원한 맛이 각별한 섞박지가 된다. 적당히 익은 겨울 무김치야 싫어할 사람이 드물겠지만, 때는 이미 2월. 김치냉장고도 드물던 그 시절에 섞박지는 군내를 풍기며 시효가 끝나가고 있는 터였다.
하지만 시어머니는 맏며느리가 손주를 배태하여 원하는 것이 오로지 섞박지라는 소식에 시골 동네 가가호호에 사발통문을 돌리셨고 이웃 한 분이 함빡 시어버린 섞박지 한 통을 나눠주셨다. 급히 공수해온 그 섞박지! 그러나 통을 여는 순간 섞박지를 먹지 않으면 숨이 넘어갈 듯했던 갈급함은 사라지고 소화불량 때와는 다른 느낌의, 출산까지 계속될 구역질을 참을 수가 없게 되었다.
위액까지 토해내고 나니 이번엔 볶은 콩이 떠오르면서 그걸 한 주먹 먹기만 하면 입맛이 되살아나 춤을 출 것만 같았다. 고 파란 속살을 지닌 까만 서리태를 뜨거운 가마솥에서 들들 볶아내면 얼마나 달고 고소할지 그것을 안 먹으면 아기가 한을 품게 될 것만 같았고 이 변덕스러운 상황은 곧바로 시골에 계시는 시어머니께 전달되었다. 단숨에 공수된 볶은 콩은 그러나, 단 한 톨도 거룩한 사명을 다하지 못한 채 섞박지와 운명을 같이 하고 내 시야에 나타나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다.
그 후로 나는 아이를 낳는 날까지 냉장고를 보기만 해도 보관된 반찬의 종류, 만든 시기, 각 재료 하나하나의 냄새가 생생하게 떠오르면서 구토가 치밀었고 임신 오 개월에 체중은 오히려 줄었으며, 먹을 수 있는 건 흰 우유 조금과 기름 없이 구운 김에 싼 밥뿐이었다.
남편의 활약과 수고가 본격화되었다. 늘 좀비 형상을 하고 냉장고 곁에도 못 가는 아내 대신 식생활과 집안일을 꾸렸고 헛구역질하는 아내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매일 속이 뒤집히고, 임신 초기의 피로감에 무기력이 더해졌지만, 남편의 살뜰한 살림 솜씨 덕분에 다른 걱정은 덜 수 있었다.
첫 태동을 느끼던 날! 아기가 스윽 유영을 하는 느낌이 겉으로 전해졌다. 손으로 아기의 존재를 느낀 남편의 놀람과 감동은 아기와의 대화로 이어졌다. 당시, 모차르트의 음악이 태아에게 좋다든가, 영어로 태담을 건네면 아기의 언어능력 개발에 도움이 된다는 등 유난스러운 태교가 유행이었지만 그 무엇보다도 남편은 자신의 목소리를 아기에게 들려주고 싶어 했다. 남편의 낮은 목소리가 태아에게 더 잘 들린다는 연구도 있다면서. 남편은 어린이 책을 읽어주고, 외부의 소리들을 설명해주었다. 할머니 목소리, 음악소리, 바람에 스치는 나뭇잎 소리... 천둥이 치는 날엔 아기에게 놀라지 말라며 안심을 시켜주었고 차를 타면 덜컹거릴 거라고 얘기해 주었다. 태담 같은 것은 쑥스럽고 어색해서 하지 못하는 나 대신 남편은 다정하기 이를 데 없는 첫 선생님이 되어 아이에게 세상을 알려주었다.
그 덕분인지 아이는 태어나자 아빠의 음성에 반응했고, 울다가도 아빠 목소리를 들으면 멈추곤 해서 신기했다. 아무도 믿지 않는 에피소드 하나. 달이 꽤 찼을 때, 우리는 아이의 성별이 궁금했지만 당시에는 여아에 대한 불법적 낙태를 방지하고자 태아 성별을 알려주지 않았다. 남편이 문득 아기에게 '네 다리 사이를 보렴. 뭔가 볼록하면 아들이니까 한 번, 없으면 딸이니까 두 번을 차 봐'하며 실없는 말을 건넸다. 아이는 한 번 발차기를 했고 아들이 태어났다.(두 번 연속 차기는 어려운 일이니, 예측 가능한 결과이긴 했다^^)
1994년의 기록적 더위만큼은 아니었어도 상당히 무더웠던 1995년의 한여름. 9개월까지도 평균보다 작다던 아기는 마지막 달에 성장에 피치를 올렸다. 배는 터질 듯 부풀었고 동네에 나서면 지나던 할머니들이 '그래도 뱃속에 있을 때가 편해~^^'라고 하셨다. 믿기 어려웠다. 짐볼을 배에 넣은 듯 뒤뚱대는 모습은 이미 문제도 아니었다. 앉기도 서기도 어렵고, 눕기는 더 어려운 데다가 여름이라 두 사람 몫으로 체온이 오르는 것처럼 느껴지고, 에어컨은 좋지 않다며(이해가 안 되는 임신 괴담 중 하나! 지금 이런 말을 믿는 임산부는 없겠지요?) 땀을 바가지로 흘리고 있는 지금이 더 편할 리가요! 아기가 태어나기만 하면 배는 쏙 들어가고 아이가 갈비뼈 부근을 치받쳐 눕기 어려운 고통도 끝나 마침내 평화로운 잠에 이르리라는 희망으로 예정일을 기다리는데요!
예정일 전날 밤, 남편은 또다시 아이에게 말했다. '아가, 내일이 네가 세상에 오기로 한 날이야. 힘들지 않게 나오렴'. 역시 아무도 믿지 않겠지만 아이는 말을 알아들었다는 듯, 예정일 새벽에 태어날 준비를 했고 얼마간의 진통 끝에 드디어 우리는 부모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