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의 마지막 날, 스타벅스에서 그리고 2024년 A'bout에서
2023년의 마지막 날. 흐린 날씨.
처음으로 까페라는 곳에 앉아서 노트북을 열었다. 젊은 작가들의 작가노트 또는 그에 준하는 에세이를 볼 때면 가끔 까페에서 글쓰는 이야기가 나온다. 나에게는 약속이 있거나 식사 후 들리는 까페에서 노트북을 앞에 놓고 앉아있는 젊은이들이나 책을 펴고 공부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아, 요즘은 이렇게 까페에서 글도 쓰고 공부도 하지'라는 생각은 했지만 막상 나는 한번도 까페에서 노트북을 펼쳐보지 못했다. 그런데 오늘, 방학을 맞은 딸과 함께 프렌차이즈 까페에 오게되었다. 이런 소란 스러운 분위기에서 공부가 되는 것도 신기하고, 각자의 테이블에서 자신만의 세계에 빠진 사람들을 보면서 낮설기도 하면서 생각에 또 자극을 준다.
얼마전 읽은 '김호연의 작업실'이라는 책에서 혼자만의 공간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에 공감한 적이 있다. 그 혼자만의 공간이 까페가 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궁금했는데, 지금 이렇게 느끼는 이 기분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2024년이 되었다. 일상에서 느끼는 이야기를 담담히, 가끔은 감정적으로 적어 온지도 어느새 2번째 새해를 맞았다. 그렇게 새해를 맞이하여 '토요일에 전하는 일상'은 브런치북에서 매거진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리고 매거진을 정리하면서 2년의 시간이 파란만장하게 지나가는 경험을 했다.
2023년은 나에게 '자신의 능력치를 시험'하는 해가 되었다. 욕심으로 시작한 도전이 돈의 위력앞에 무릎을 꿇었다.(이건 나의 판단이다. 그녀가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었던 것은 나보다 돈이 많아서 였다) 그리고 영리를 추구한다면 병원사업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진리를 끔찍히도 힘들게 경험했다. 나는 경영자의 신분이 아니었기에 관리에서 영리는 많아야 20%를 차지하였지만 영리를 추구해야하는 경영자의 입장에서는 영리가 90%이상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에서의 병원은 영리사업이지만 유교적 가치관과 결합이 될때 '허가받은 도둑'이라는 소릴 듣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비영리인척하는 영리사업이기에 기술이 발전하는게 아닌가하는 생각도 한다. 또한 그렇기에 '간호법'이 통과하지 못하는 국가가 되는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진다. 이부분에서는, 쩝!
관리직에서 물러나 요양병원의 일선에서 근무하는 현재, 마음은 편안하다. 부담없이 출근을 하고 주어진 일을 하다보면 퇴근시간이 되어 정리를 하고 인계를 한다. 그 많은 기록을 확인해주는 관리자가 있으니 그가 하는 지시에 따르다 보면 나머지는 정리가 된다. 그렇다고 내가 돌봐야 하는 환자를 소홀히하는 것은 아니다. 환자는 환자로써 대해야 하는 것이 의료인의 자세이니까. 오늘은 환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로 하자. 이또한 많은 말이 필요할 것이다. 이 환자에 대한 글은 완전히 내 개인적인 생각임을 밝혀 둔다. 어디의 통계를 참고한 것이 아니라 나의 30년 이상 직업경험의 산물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환자라고 하면 급성기의 환자를 먼저 생각한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흔히 누군가 아파서 입원했다고 하면 우린 '얼른 나아서 퇴원해야지'라고 말한다. 즉, 기본적으로 아파서 입원을 하면 나아서 퇴원을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내생각에는 나아서 퇴원할 수 있는 환자는 일반적으로 입원 환자의 절반정도 밖에 안된다. 흔히 나아서 퇴원한다는 것은 급성질병을 가진 경우이다. 염증이나 사고등으로 신체의 손상이 발생한 경우, 원인을 제거하여 원래의 생체기능 수준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 치료의 완결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일단 감기가 심하여 폐렴으로 번진 경우, 폐에 염증이 생겼기에 염증의 원인균을 찾아 항생물질을 사용하여 원인균을 죽여서 폐의 기능을 찾게하면 완치가 된다. 그러면 기침이나 고열같은 증상들이 없어지면서 생체기능이 정상적인 수준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환자의 개인적인 사정이나 특이형질로 인하여 폐렴균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은 경우 또는 폐렴균으로 인하여 폐포의 상실이 생긴 경우는 생체기능수준이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면 서서히 생체기능에 손실이 생겨 급성질병이 만성질병으로 이완하게 된다. 즉 폐렴의 완벽한 치료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만성기관지염 또는 만성폐색성 폐질환으로 넘어가게된다. 그 경우는 급성질환자에서 만성질환자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계절이 바뀔때마다 혹은 질환에 영향을 끼치는 환경의 변화에 따라 증상이 발현되거나 심한 증상으로 이완이 되어 호흡곤란, 고열 등으로 발전한다. 그런 상황이면 항상 상비약이라는 것은 소지하여 증상이 나타날 때 마다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만성질환자를 주위에서 가끔 또는 흔하게 본다. 대표적인 만성질환이 계절성 알레르기비염이다. 어떤 한 계절이나 어떤 특수 환경에서만 발생하는 비염. 생각보다 흔하다. 나 같은 경우는 각막염을 심하게 앓았던 적이 있다. 3일 정도 양쪽 눈을 가리고 생활을 했었다. 그 이후 시간이 지날 수록 건조한 환경에서 눈이 뻑뻑해지는 경험을 한다. 특히 요즘같은 겨울철에 히터를 사용하는 공간에서는 인공눈물이 상비약이다. 사소하지만 이런 경우도 만성질환이다. 생체의 항상성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안과와 비인후과의 경우는 그렇다.
그럼, 내과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내과계의 대표적 만성질환으로는 고혈압과 당뇨가 있다. 관리하지 않으면 합병증으로 발전을 하고, 그 합병증으로 인하여 죽음에 이르기도 한다. 고혈압의 경우를 보면, 흔히 알고있는 혈압약으로 적당히 치료하지 않거나 신체와 정신을 심하게 혹사하는 스트레스의 상황에서 합병증의 하나인 혈관이 터지는 경우(특히 뇌혈관)를 우린 뇌출혈이라 부르는 마비를 동반하는 질환을 마주하게 된다. 심하면 사망 혹은 혼수, 경하면 신체의 마비를 동반한 불편감까지 다양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런 경우, 입원을 하고 수술을 하여 뇌의 혈액을 제거했다고 하더라도 뇌의 일부에 손상을 입은 상태에서 신체 기능이 완전한 수준으로 돌아올 것을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의료진은 다 안다. 하지만 환자와 보호자의 정서적 상처를 초래할 수 있는 말은 직접적으로 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일은 믿고싶어 하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지극히 감정적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손상된 부위의 영구 결함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이야기를 해도 이해하지 않는다. "그냥, 이렇게 평생을 살아야 합니다."라고 이야길 해야 이해를 한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순간, 환자와 보호자는 의료인에 대한 신뢰를 철회한다. 어떻게 의사라는 사람이 그렇게 이야길 할 수 있냐는 것이다. 의사도 사람이다. 그래서 자신에게 불리한 내용은 진술하지 않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잠재고객인 환자보호자에게 상처를 주고 싶어하지 않는다. 어느 누구라도 상대방에게 상처주는 말을 하고싶겠는가? 가끔 냉정하게 딱 잘라서 이야기하는 의료진있다. 그런 의료진은 세가지 부류 중 하나이다. 원래 공감을 잘 하지 못하는 경우, 또는 항상 사실만을 이야기해야 하는 정직한 성격의 소유자가 말주변이 없어 단어선택을 잘 못하는 경우거나, 마지막 한 부류는 잠재고객을 놓친다 하더라도 환자가 상황인식을 제대로 하기를 바라는 경우이다. 대부분 마지막 경우가 많다. 나도 30년 넘게 병원생활을 하면서 첫번의 경우는 딱 1명밖에 보지 못했고 두번째의 경우는 정말 가끔, 경험 적은 젊은 의사의 경우가 해당된다. 같은 의료진에게는 냉정하더라도 고객인 환자에게는 친절하고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의사가 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래서 의사는 환자로써 만나야 좋은 사람이다. 동료가 아니라 상사로 만나면 세상없이 악독한 사람이 의사다. 세상에서 가장 잘난 사람이기도 하고 세상에서 가장 깐깐한 사람이기도 한것이 한국 의사이다(이건 순전히 내 생각이다. 이 글을 읽는 의사들은 참고해 주기 바란다. 그리고 주변의 동료가 자신을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 주기 바란다. 나같은 간호사도 있을 것이다. 의사앞에서는 존중하지만 속으로는 나도 너 만큼 잘났다고 생각하는 간호사가 바로 나이다. 우리때는 가끔 가정 형편이 어려워 간호대학을 간 장학생들이 있었으니까, 지금은 여자아이들에게도 투자하는 시대지만 난, 여자는 고등학교만 나와도 많이 배운것이고 살림만 잘하면 되는 시대에 공부한 사람이다.) 그래서 환자보호자는 상황인식을 제대로 해야 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0.0001%가 내가 되면 나에게는 100%인 것이다. 1억명 중 한 명이 나라면 나의 인생에서 1억분의 1이 아니라 내 인생의 전부라는 이야기이다. 그렇다고 희망을 버리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최선의 노력을 해도 되지 않는 경우가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은 그런것이니까.
그렇게 만성질환자가 되면 생활의 제약이 따르는 것은 기본이다.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이 생기고, 먹지 말아야 하는 음식이 생기고, 가지 말아야 하는 공간이 생기고, 급기야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행동이 생기게 된다. 그렇게 만성질환자가 되었다는 것은 본인이 제일 잘 인식한다. 그래서 화가 나고, 후회가 되고, 원망이 된다. 그런 심리가 같이 사는 사람에게, 제일 만만한 사람에게 투사를 하게된다. 그렇게 가족이 불씨의 근원이 되어간다. 급성으로 질환을 앓고 완치가 되어 퇴원을 하면 가족들은 기뻐하고 서로 진심으로 축하를 해준다. 만성질환의 경우도 첫 1년은 그럭저럭 지나간다. 가족들도 '아프니까 얼마나 속이 상할까'하는 생각으로 이해한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 수록 이해만 하기에는 너무 고달픈것이 현실 생활이다. 그래서 "병에 3년 효자 없다."라는 말이 있다. 서서히 지쳐가면서 부담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틈새 시장이 요양병원이다. 그럼으로 우린 요양병원에 대한 이해를 가져야 한다. 요양원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요양원과 요양병원의 차이는 나의 이전글에서 확인해 보시길 바란다.
나는 현재 만성질환자들이 입원하는 요양병원에 근무한다. 한국에서 요양병원이 생기기 전에는 일명 종합병원이라고 불리우는 3차병원과 일반병원인 2차병원에도 근무를 했다. 그 중 진료과 하나로 설립된 특수병원도 포함이 되고 잠시 한방병원에서 간호관리자로 근무를 했었다. 그리고 신참시절에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근무하며 해외생활도 했다. 그런 경험들을 뒤로하고 현재는 요양병원에서 일반간호사로 근무하고 있다. 작년 초까지는 관리자로 근무했지만 말이다. 이런 근무 경험이 현재의 만성질환자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난 사람에 대한 이해도를 넓히려고 노력하는 사람 중 하나이다. 그래서 질환을 이해해야 환자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환자와 사람을 따로 구분하여 이해하는 것이 치료진에게는 필요하다. 내가 상대하는 자를 사람으로 생각한다면 난 그들에게 친절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관계는 주고받는 관계이기에 내가 친절을 주면 당연히 나도 친절한 반응을 받고 싶은 것이 사람과의 관계이다. 하지만 환자와의 관계에서는 나는 친절해야 하지만 친절을 바라면 안된다. 그는 '아픈 사람이기에 여유가 없다'라고 생각해야 한다. 아픈 사람은 타인에게 신경을 쓸 여유가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아픈 사람을 우리는 "환자"라는 명칭으로 부른다. 환자이기에 이해받아야 하고, 환자이기에 돌봄을 받아야 하는 입장이 되는 것이다. 환자는 환자로 대해야 하는 것이 치료진의 기본 마음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한 사람이 환자로 분류되는 순간, 인간이 가져야하는 기본권은 어느 정도 포기를 해야한다. 많은 사람에게 나의 아픈 곳(그곳이 치부라 하더라도)을 보여야 하고, 나의 병명에 대해 알아듣지 못하는 의학용어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하고, 심지어는 필요한지 아닌지도 모르는 검사를 위해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어쩌면 저 의사놈이 오진을 한건 아닌가하는 의심이 들어도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입장이 된다. 그렇게 환자로 분류되는 순간 '을'이 된다. 의사가 시키는대로 할 수밖에 없어진다. '안 하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죽으면 어떡하지'라는 공포를 속으로 삼키며 내 돈을 뜯어가는 원무과 직원에게 화를 내고 투덜거리면서도 정작 '의사선생님'앞에서는 투덜거리지 못한다. 자식놈이 의사선생님 앞에서 투덜거리기라도 하면 '저 의사가 나를 소홀히 대할까' 겁나서 자식놈의 입을 막아야 한다. 그렇게 환자가 되고, 만성질환자가 되면 인생이 겁나 힘들어진다. 이것이 내가 이해하는 만성질환자이다.
글이 길어지고 있다. 한편으로 마무리하기에는 너무 길어질 듯하여 분리를 하기로 하고 오늘은 여기까지로 정리하자. 그래서 일단 멈추고 제목을 정하려고 곰곰 생각해 본다. 그러다 지금 내가 뭐하나 싶은 생각이 든다. 평소 하고싶은 이야기를 하면서 사는 사람들은 행복할까라는 생각도 한다. 하고싶은 말과 해야 할 말은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 우린 하고싶은 말을 많이 하려고 노력하지만 정작 해야 할 말을 더 많이 하고 살고 있다는 생각이다. 나도 어쩌면 '해야 할 말을 해야 하는게 아닐까' 생각하지만 하고싶은 말을 하고 있다. 하고싶은 말은 왜 이렇게도 많은지. 이 글에 이어 지속적으로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공간을 만들어 가야겠다. 곧 이어질 다음 글에서 어떤 이야기들이 나올지도 기대해주길 바란다.
* 오늘도 카페에 왔다. 요즘 나의 글쓰는 공간이 내 책상에서 카페로 옮긴지 3주가 지난다. 제법 도움이 되는 공간이다. "이래서 작가들이 카페를 이용하는구나" 라는 생각을 한다. 이런 공간이 주어지는 것에 적은 비용을 지불하는 것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