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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시간

인생의 겨울인 노년을 봄처럼 지내고 싶다.

by 나니야

오랜만에 멀리에서 손님이 왔다. 매년 한 번은 제주도를 방문하는 옆지기의 사촌동생이다.

나의 옆지기는 외아들로 자라서 사촌동생들과 살갑게 지내는 사람이다. 물론 사촌들이 모두 한 도시에서 살아가다 보니 자주 만나는 집안분위기였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다. 그것에 비하면 나는 사촌들과 그렇게 살갑게 지내지 않는 가족 분위기에서 생활했다. 아버지의 형제들은 각자 타도시에 뿔뿔이 흩어져 생활하였고, 사촌들과의 관계도 명절에 한 번 얼굴 보는 정도로 지냈으니 돈독하다고 할 만한 것이 없다. 또한 내 동생들도 모두 다른 도시에 살고 있고, 심지어 막내는 캐나다에 거주한다. 우리는 실제로 얼굴을 보며 대면하는 것보다 문자나 전화로 안부를 물어보는 것이 더 빠를 정도이다.

결혼 후 이른 시간에 시부모님 두 분을 영락공원에 모시고, 나와 옆지기는 학창 시절과 미혼시절을 보낸 도시를 떠났다. 그렇게 내 아이들도 사촌들과의 관계가 돈독하지 못한 환경 속에서 자랐고, 이제는 그들의 청년시절을 보내기 위해 집을 떠나 생활하고 있다. 그렇게 내 가족은 확대가족이 아닌, 핵가족의 형태로 살아가며 옆지기는 가끔 친척들과 연락을 하고 지내지만 내 아이들은 그렇게 연락할 친척도 별로 없이 그들만의 사회에서 생활하고 있다. 그런 생활을 하는 내 아이들이 남들보다 주관적인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었으면 하고 바란다.


멀리서 방문한 손님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해보자. 그는 자전거를 타며 한국의 산과 도로를 누비고 다니는 사람이다. 물론 그에게는 그의 취미를 이해하고 취미생활을 하는 것에 대해 지원하는 부인과 아이들이 있다.

그는 일 년에 한 번은 자전거와 함께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에 와서 한라산일대와 오름등의 자전거 코스를 완주한다. 또한 포토스폿에서 사진도 찍고 스탬프 찍는 구간에서는 스탬프도 찍어 가족과 공유하는 성실한 하이킹족이다. 그런 그의 또 하나의 취미는 사촌형님의 가족과 저녁을 한 끼 먹는 것이다. 이 취미는 내가 그에게 부여한 취미이기도 하다.

자전거를 타러 오는 그는 올 때마다 형님인 우리 집 식구들과 만나 저녁을 한 끼 먹는다. 그리고는 제주에 살고 있는 우리가 아닌 제주를 방문한 그가 지불을 한다. 이 습관은 아마도 그가 제주를 처음 방문한 때, 형가족에게 만난 것 사주고 싶다고 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그다음 방문에서도 그가 지불을 하였고 이제는 그가 밥을 사주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되어버렸다. 나는 그가 나의 옆지기인 그의 사촌 형에게서 특별한 형제애를 느끼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사촌이라고 해도 각자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존재하는 가족 구성원 중, 아버지의 형제들로 이루어진 이 가족의 사촌지간들은 서로 안부를 물으며 명절에 모이는 것이 당연한 가족이었다. 내가 옆지기의 부모님과 상견례를 하기 전, 옆지기의 사촌형제들과의 만남을 먼저 가졌을 정도로 그들은 서로 챙기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자전거를 타는 그는 옆지기의 사촌 중 막내로 당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군복무 중이라 결혼 후에야 소개를 받게 된 사촌동생이다. 제대 후 직장생활을 하며 옆지기와 간간히 연락하며 지내다 결혼을 하고 가족을 꾸렸다.

옆지기는 외아들로 컸다고는 하지만 지금은 연락하지 않는 배다른 형제가 존재하는 가족구성원의 한 명이다. 자전거 하이킹으로 전국을 돌아다니는 옆지기의 사촌동생도 시아버지의 형제 중 부인이 두 명이었던 바로 아랫동생의 두 번째 부인의 아들이다. 한 동안은 그 가족들이 동생의 존재를 몰랐다고 한다. 그러다 학교 가야 할 나이가 되자 가족들에게 소개되었고 그때부터 그는 친어머니와의 생활과 아버지 본가족과의 생활을 해나가야 했다. 어쩌면 옆지기와 같은 입장에서 아버지와 한 집에서 생활하던 나의 옆지기와는 또 다른 입장에서 살아갔을 것이다. 나는 내가 당면한 일이 아니기에 그와 옆지기의 집안일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사람이 살아가면서 느끼는 많은 감정 중, 현실에 대한 불만이 없을 수는 없기에 그들도 현실에 대한 부정을 하며 불만을 가지고 살아왔을 것이라 짐작한다. 그래서인지 나는 옆지기가 이 막내사촌동생 대하는 것이 다른 사촌동생들 대하는 것보다 애틋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나 혼자만의 착가일 수도 있다. 그런 느낌을 간직해서 인지 나는 다른 동서들보다 이 동서에게 조금 더 신경 쓴다. 그냥 잘해주고 싶다.


옆지기의 사촌동생과의 이번 식사자리에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생겼다. 옆지기가 작년 하반기부터 전면적인 임플란트에 돌입하여 마무리 단계가 되었다. 약 2주일 정도의 기간 동안 사용하기 위해 위 앞쪽의 임시치아를 했는데, 이것이 오랜만의 식사로 한우를 먹다가 홀랑 빠졌다. 집에서 나올 때까지만 해도 아무렇지도 않았던 치아였다. 처음 치아가 쑥 빠졌을 때, 우리는 옆지기가 당황할 것 같아 웃음을 참으며 식사를 이어갔다. 그런데 두 번째, 세 번째 빠지자 웃음을 참지 못한 내가 웃기 시작했다. 아들과 사촌동생도 이때다 싶어 따라서 웃었다. 오랜만에 술을 마셔 약간 알딸딸한 상태인 옆지기도 농담처럼 자꾸 빠지는 임시 앞치아에 대해 농담을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웃었다.

이제 서서히 치아손상으로 임플란트를 해야 하는 나이가 되었다는 것이 약간 우울하게도 하지만, 이런 창피할 수 있는 상황에서 웃을 수 있다는 것도 오래 살아서 생긴 여유일 것이다. 옆지기도 사촌동생에게 '앞으로 10년은 웃을 이야기네.'라고 했더니 사촌동생은 한술 더 떠 '십 년이라니요 형님, 평생 명절마다, 두고두고 웃을 일이네요.'라고 했다. 이 농담이 관계를 더 돈독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약간의 취기와 오래 살아온 연륜이 만든 유머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인생의 겨울인 노년기에 접어드는 이 시기에 친지들과 웃을 수 있는 사건,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농담 어린 사건들이 생기는 만남이 소중하다. 굳이 가족이나 친척이라서가 아니라 같이 늙어가는 형제자매들이기 때문이다.

늙어간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 시간들이 된 옆지기와 나에게 12살 띠 동갑인 사촌 동생은 당황하고 어색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은 흘러 계절을 바꾸듯이 우리네 인생도 시간이라는 계절을 바꿀 수가 없다. 어쩌면 창피할 수도 있는 임플란트를 농담처럼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 인생의 겨울을 따뜻하게 보내는 한 방법이라 생각한다. 살다 보면 여러 가지 일이 생길 수 있다. 실수한 일, 창피한 사건들 이런 일들도 인생이라는 시간 속에서 묻히고 남 이야기처럼, 책 속의 이야기처럼 할 수 있는 마음의 면역력을 키우는 것이 인생의 가을을 맞이하는 50-60대가 해야 할 일이 아닐까 한다. 예민한 성격의 소유자들에게 마음의 면역력이라는 것은 좀처럼 생기지 않는다. 그런 성격의 소유자들은 60대, 아니 70대가 지나도 창피하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마음의 면역이 있는 40-50대는 남들보다 조금 더 여유 있는 가을을 보내는 것이리라. 다가오는 겨울을 준비하는 60대(요즘 60대는 어디 가서 노년이라는 말도 못 한다고 한다)는 가을을 잘 보내는 시간을 가져야 할 것이다.

시간은 돌고 돌아 일 년을 보내고 나면 또 다른 일 년을 맞이한다. 시간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한 계절을 돌아 또 다른 봄을 맞이한다. 하지만 우리 인생에서는 돌아오지 않는 시간들을 보내기만 한다. 인생은 한 계절로 끝나는 시간이다. 20대의 청춘이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30대, 40대의 시간들이 지나면 후회하여도, 후회되어도 다시 돌아 세울 수 없는 세월이다. "언젠가 가겠지, 푸르른 내 청춘, 피고 또 피는 꽃잎처럼..."으로 시작하는 노래가 있다. "그렇게 세월은 가는 거야"하는 노랫말처럼 내 인생의 세월은 가는 거고, 다시 오지 않는다.

인생의 계절에서 시작되는 겨울을 맞이하는 나이가 된 나는, 옆지기의 임플란트에서 따뜻한 겨울을 보내기 위한 준비가 필요하다 생각한다. 한 번뿐인 인생의 겨울을 잘 보내고 싶고 잘 지내고 싶다. 어떻게 보내게 될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잘 보내기 위해 준비를 하고 그 준비를 잘 마무리하여 따뜻하고 포근한 노년이라는 시간을, 겨울처럼이 아니라 봄처럼 지내고 싶다. 시간은 돌고 돌아 제자리로 오지만 인생의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앞으로 다가올 나의 시간도 인생에서는 한 번뿐인 시간일 것이다. 그 한 번뿐인 인생의 시간을 잘 보내는 시간이었으면 한다. 그렇게 나는, 오늘도 인생의 겨울을 준비하는 나이를 살아간다.


나중에 그의 가족이 방문한다면 음식솜씨가 없어 내가 만든 음식으로 대접을 할 수는 없고, 맛있는 음식점에서 돈을 지불하고 잘 먹게 해 줘야겠다.



대문사진) 제주도 자전거 일주코스 (출처: 국토종주자전거길 홈페이지에서) -사촌동생이 완주한 코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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