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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안나 Oct 27. 2024

갑돌이와 갑순이(노래:최숙자, 김세레나)

- 내가 좋아한 노래들(My favorite songs)





그랬데요, 글쎄



갑돌이와 갑순이는 한 마을에 살았드래요

둘이는 서로서로 사랑을 했드래요

그러나 둘이는 마음 뿐이래요

겉으로는 음~~~음~~~ 모르는척 했드래요


그러다가 갑순이는 시집을 갔드래요

시집간날 첫날밤에 한없이 울었드래요

갑순이 마음은 갑돌이 뿐이래요

겉으로는 음~~~음~~~ 안 그런척 했드래요


갑돌이도 화가나서 장가를 갔드래요

장가 간 날 첫날 밤에 달보고 울었드래요

갑돌이 마음도 갑순이 뿐이래요

겉으로는 음~~~음~~~ 고까짓것 해드래요

     - 작사:김다인, 작곡:전기현 (신민요, 1939년 <온돌야화>의 리메이크)



  우리나라 대명절 공휴일이면 늘 공중파를 통해 나타나던 「갑돌이와 갑순이」였다. 그리하고보니 대명절에 집안에서 큰 다툼들이 많이 일어난다던 말의 근원이 예에서 시작됨을 감지한 것이던지 어느날 부터 갑돌이와 갑순이는 흔적을 감추었고 보이지 않는다. 


  외할머니 돌아가신 후 변화된 것들이 있다면 그 중 하나가 민요나 트로트를 찾아 뵐때마다 들려 드리거나 알려 드리던 일이 사라졌다는 것이며, 이에서 '민요나 트로트를 좋아한 사람이 안나다',는 편견 아닌 편견이 자랐던 것으로 숨은 그림이 밝혀지듯 그들에 대한 나의 미움과 증오를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나 자신을 위한 선택이 아니라 어르신들과 함께하시는 외할머니의 흥을 돋아 드리기 위함이었던 것이며, 외손녀의 재롱용으로의 민요와 트로트였던 것이다. 대한민국 전 국토적 시각에서 외할머니와의 삶의 흔적들이 하나 둘씩 사라지며 어쩐지 불균형적인 세상을 살듯, 본의 아니게 내가 보고플때면 찾아 울고, 내가 바쁠때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한 불효자가 되가는 것을 자각해가려는 중이다.


  외할머니는 내가 만서른일곱이 되어 출산한 셋째딸 늦둥이가 겨우 백일이 지난 어느날, 찾아 뵈어야지 하는 마음만 가득하던 2006년 그 봄에 가시고 말았었다. 조금 더 기다리시지 아니하시고 그만 나를 놓치셨나 싶으니 믿기지도 않았을뿐 아니라, 부랴부랴 장례식장에 애들아빠와 겨우 5개월여된 막내를 안고 갔었고 너무도 의심스러워 외할머니 안장되신 관 뚜껑을 열어 보고 싶었다. 외삼촌과 외숙모님 어머니 아버지 모두 오신 그 자리에서 나는 나의 본능대로만 할 수 없어 큰절만 올리고 오랜만에 찾아 오신 분들과 안부를 전하고 돌아 오는 길에 아버지께서는 '발인하는 내일은 안 와도 된다' 하시어 또 화가 나려다가도 아기나 나를 생각하셔서 하시는 말씀으로 여겨 집으로 남편과 함께 돌아왔었다. 그래도 가야지, 했으나 다음 날 나는 갈 수가 없었다. 그 날 나는 절실히 깨달았다. 아아------ 나는 도무지 화장(火葬)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아니, 나의 전신과도 같으신 외할머니를 불에 태우시다니, 사람이 죽었다하여 순식간에 그토록 냉정할 수가 있는 것일까? 도무지 상상이 안되었다. 불구덩이 속 외할머니의 지각이 내게 임하듯 너무 두려워 아마 나는 그냥 아기를 안고 잠들었을 것이다. 그것이 외할머니와 이생에서의 마지막이었다. 사람들이 어찌 그리도 잔인한지 나는 그때서야 눈을 떴었다. 도무지 못할 일인 것이다.


  

  2006년의 이미 4년여전과 9년여전에 시부모님이 돌아가셨었다. 나를 애지중지까지는 아니시더라도 

늘 사랑하고 아껴 주셨는데, 두 아버지를 둔 나의 신세가 시어머님과 거의 비슷하시다며 '너는 나다'시며 늘 챙기시고 사랑해 주셨었는데, 2002년 추석 

다음 날 돌아가시고 말았었다. 바다가 보이는 전망 좋은 너른 밭에 묻어 달라셨다고 하시며 남은 가족들은 어머니를 선산에 계시는 시아버님 곁에 모시지 아니하시고, 애들아빠와 내가 '이 곳에 우리 별장을 지으면 참 좋겠다'며 결혼직후 어느 명절에 찾아 뵙고 고구마를 캐다 둘이 한마음 된 곳이었는데 어머니는 참 어찌 아셨는지, 그곳에 묻히고 싶으셨던 것이다. 사실 시어머님은 둘째아들인 나의 남편, 애들아빠를 참으로 어여삐 키우셨던것이 맞는 것으로 또한 애들아빠는 곧 시어머님과 같기도 했던 것이었기에 이 공감이 충분히 가능했던 것이다. 「시어머님은 장한어머니상을 수상하신 분」으로 온당함에 마치 나처럼 강직하시던 분이셨다. 가난해도 지킬 것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셨고, 돌아가시던 날까지 칠남매 자식들이 사업으로 진 빚더미에 눌리셔 매일이 이자 갚는 일로 진실로 허리가 굽어져 돌아가시고 마셨었다.  그 후로도 부도는 또 났었고, 나는 "어찌하여 어머니는 그 빚을 제게 다 맡기시고 가셨습니까! 밉습니다!"며 나의 맘은 한탄을 하던 중이었으며, 그러나 믿는 나의 맘을 아시고 돌아가신 이후로는 늘 우리집에 거하심으로 느끼며 나는 그나마 감사하고 돌아가셨으나 의지하고 살았었는데 지금은 다시 생전처럼 나의 그 사랑마저도 훔침당하여 이렇듯이 변명 같은 글을 쓰게 된 현실이 된 것이다.


  다시 생각해보면 나를 다 아신듯 하셔도 어머님이 아시는만큼만 아시던 것에서 온 오해의 역사가 사망이었겠으니 나는 이후 내 등에 나는 남편이 있고, 딸이 셋인 기혼녀라고 써 붙이고 다니리라고 다짐하고 살며 셋째 늦둥이까지 지금까지 키워왔던 것이다. 이 의미란, 자신을 숨기고 악한 일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않다는 의미로의 나의 선언인 것이다. 바다가 보이는 너른 고구마 밭에 묻고 돌아오면서도 나는 어머니께서 받으셨던 「장한 어머니상」만큼은 내가 가져올 수 있으면 좋겠다 하였으나 어머니 물품을 태우는 날 모두 태웠는지는 나는 잘 모른다. 그리고 유품 정리도 둘째며느리라는 이유로 전혀 나는 모르는 일인 것이다.  


  김세레나와 김부자를 모르던 대한민국 국민이 있었던가? 새타령, 달타령, 꽃타령, 핑계처럼 외할머니를 위한 재롱잔치처럼 외할머니랑 살던 안방에서 혼자 곧잘 부르거나, 불러 드리던 이 노래들이 「아리랑」과 함께 전국을 지신밟기 하듯 악신을 물리치고 민심을 다스렸는데 또 다시 핑계 같지만 도리어 역효과가 된 것만을 쟁점화 시켜 전통 문화를 사라지게 했다면 신경안정제가 사라진것과 같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글로벌 시대에 갑돌이와 갑순이도 글로벌적으로 재생되지 않을까싶다. 혹시 갑돌이와 갑순이의 재회가 간통법 폐지로 된 것은 아닌지 아, 진정 정확하게 살피어 죄 예방책으로의 간통죄목을 복원하여야 하리라.


  이 곡이 수록된 앨범은 1965년 신세기레코오드사에서 제작한 컴필래이션으로 최숙자, 김세레나 듀엣으로 녹음되어 있고 김부자, 전승애, 조미미, 장진아 노래도 포함되어 있다. 12곡 수록중 A면 첫번째 곡으로 조선시대부터의 갑돌이와 갑순이의 사랑을 <온돌야화>라는 원곡으로 부른 이병한과 함석초라는 가수들이 있었다고 한다. <온돌야화>란, '온돌방에 둘러 앉아 듣는 이야기'라는 뜻을 가진 것으로 우리나라 선민들의 따뜻한 정서를 엿볼 수 있던 것이나 어찌되었든 야담(野談)으로 재미가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구비문학(口碑文學)의 승화인 것이다. 

  

  "이야기 너무 좋아하면 가난하게 살어! 그만 해!"

  외할머니 꾸중과 지도는 나의 안식의 기초가 되었었다.


갑돌이와 갑순이는 우리 시부모님이 가신 마지막 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커버이미지 : Pinterest/3eaea7559e51f5a84a6a501804d288ee.jpg

-Writer : Evergreen정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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