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개인적으로 일관되게 사형제를 반대한다. 사형제를 반대하는 논거는 매우 다양한 층위에서 논의되며 그 논거(예 : 인간의 오판가능성)가 설득력이 있는지 여부는 각자의 판단에 달려있음은 물론이다. 반면 사형제 찬성론이 그 논거의 설득력이 있는지 여부는 차치하고 사형제를 찬성하는 사람의 비중은 사실 강력범죄가 세간의 입길에 오르는 횟수와 강도에 강한 상관관계를 갖는다(상관관계를 넘어서 인과관계가 의심된다).
(참고로 이 단락은 재미없으니 독자들은 스킵하셔도 좋다.)
나는 헌법을 배우면서 제37조 제2항이 매우 중요한 조항임을 깨닫게 되었다.
대한민국 헌법 제37조 ②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ㆍ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으며, 제한하는 경우에도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
사형제는 국가가 강제력을 동원하여 인간의 권리를 제한함이 분명하다. 이때 이 권리는 인간의 생명권이다. 엄밀하게 말하게 생명권의 제한을 수준을 넘어서는 박탈이다. 그런데 생명권을 제한(박탈)하는 때에도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다른 권리에 비해 생래적으로 생명권은 본질적인 부분과 비본질적은 부분을 나눌 수 없다. 생명권은 보호되거나 박탈되거나 둘 중 하나이다. 국가가 생명권을 제한(박탈)하는 경우, 논리적으로 생명권을 제한할 수가 가정한다고 하더라도 본질적인 부분을 제한하지 않고 제한(박탈)할 수 없다. 고로 국가는 제37조 제2항에 의해 생명권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고 사형제는 권리(생명권)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하므로 사형제는 위헌이다. 다른 사형제 반대의 논리가 있음에도 사형제는 위헌이라는 논리는 현실에 존재하는 헌법을 기반으로 하여 논리를 전개하며 그 논리가 적어도 내 생각에는 매우 간명하여 이해하기가 쉽다고 본다.
사형제는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고 사형제 역사를 전문적으로 쓴 책도 많다. 사형제의 역사를 쓴 책을 보면 범죄의 잔인성에 대응하는 보복의 잔인성을 그대로 느낄 수 있음은 물론이고 범죄(당시의 범죄)에 대한 응보하고자 하는 개인적, 사회적 분노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유사함을 알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프랑스에서 기요틴의 도입을 주장한 자(조제프이냐스 기요탱 박사)는 사형제 폐지론자였다. 기요틴은 단두대라는 피가 튀고 머리가 떨어지는 잔인하게 보여지는 장면으로부터 이미지적인 잔인성이 강하게 느껴지지만 기요틴 도입의 이유가 인간의 인권과 평등을 위해서였다고 한다. 화형, 능지형 등에 비해 사형을 당하는 자의 고통의 시간(단 몇 초)을 최대로 줄여줄 수 있어서 인권친화적이었고 사형제를 시행하는 지역에 따라 어떤 이는 화형, 어떤 이는 능지형을 시행하지 않고 모두에게 기요틴을 시행하였기 때문에 평등적이었다.
그에 비해 우리가 시행하는 교수형은 보이는 모습은 매우 문명적이고 인권친화적이지만 듣기로는 추락사에 가깝다고 한다. 우리가 시행했던 교수형은 밧줄에 목이 메어있는 상태에서 바닥을 개방해서 사형받는 사람을 떨어뜨리고 질식사하기 전에 추락의 충격으로 매우 고통스럽다고 한다. 따라서 죽음에 이르는 시간이 기요틴에 비해 매우 길며 따라서 고통의 시간도 상대적으로 길다. 백번 양보해서 사형제를 시행하여야 하는 강력한 여론에 밀려 사형제를 시행한다고 하더라도 교수형이 아닌 다른 사형방식(약물 등)을 사용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사형제 방식과 관계없이 나는 강력하고 일관되게 사형제(최소한 집행)를 반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