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번 즐겁고 행복한 시간만은 아니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한국 부모님과 연락을 한다. 지금도 그렇고, 그때도 그렇고, 우리는 늘 행복한 모습으로 영상 통화를 한다. 설령 우리에게 조금의 어려움이 있더라도 걱정 끼쳐 드리고 싶지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이긴 하다.
아이들의 생활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으니, 비로소 한 발 물러나서 우리와 나 자신을 볼 수 있는 여유와 용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내 새끼 어디 가서 주눅 들지 않게 하려는 마음 때문인지 명품은 아니지만 그래도 알만한 브랜드를 때 되면 사 입히고, 매일 깨끗하게 옷 입혔다. 어디 그뿐만인가. 학교 숙제는 꼼꼼히 체크하고, 행여나 빼먹은 것은 없을까 불안하면 늘 선생님께 먼저 연락했다. 나의 조급함으로 하루하루를 겨우 채워나갔기 때문에 마음의 여유란 생기고 싶어도 생기기가 어려웠다.
독일에서의 시간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반 이상은 코로나 시기였기 때문에 사실 큰 사건도 없었고, 그저 코로나 양성이 나오지 않기를 바랐던 시간이 많았다. 매일 아침 큰 애 학교에서는 코로나 간이 테스트를 했고, 양성이 나오면, 바로 집으로 돌아가야 했었다. 몇 가지 사건이 있었다면, 몇몇 틴에이져들이 내 뒤에서 <<코로나! 물러가라!!>>라고 하며 했던 일 정도. 처음에는 무척 당황스러웠지만 뭐, 그것도 적응이 되니까, 봐줄 만했다. 그냥 무시하면 된다. 어둡잖은 독일어로, 혹은 영어로 떠들어 봤자, 어차피 못 알아듣는다. 나의 독일어는 그들이 못 알아듣고, 영어는 그 아이들이 이해를 못 한다.
이렇게 나의 하루 일상은 시스템화되어 있는 거 이외, 자질 구레한 에피소드를 처리하는 것으로 흘러갔다. 애들 학교 관련해서 처리해야 할 안내문을 한 참을 읽어보고, 번역기를 이리저리 돌려보고 나서야 마무리를 짓는다. 아직까지 회사에서 일하던 습관이 배어있던 탓에 아이들 키우기를 업무처리 하듯이 해 나갔던 것 같다. 해외에서의 삶이란, 너무나 멋지지. 매번 바비큐 파티하면서 이웃들 초대하는 그런 환상이 있었다. 하지만 내가 마주한 현실은 좀, 너무 현장감이 있어서 오히려 현실감이 없었던 것 같다. 이러한 나의 스트레스를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잘 살고 있노라며 말하기를 반복했다.
물론 실질적으로 경제적인 어려움도 있었다. 힘들게 사는 건 아닌데... 그렇다고 넉넉하게 사는 것도 아닌... 그렇다고 부모 형제에게 손 벌린 정도는 아니고... 그저 잘 지내고 있다. 해외에 산다고 모두 주재원 가족은 아니다. 집이며, 교육이며, 추가 생활비까지 받아가면서 일하는 주재원이 아닌, 그저 평범한 해외에 사는 평범한 외벌이 직장인의 가정도 있다. 우리처럼 말이다.
자식으로서 부모님께 걱정은 꺼져 드리지 말자. 하지만 이 순수한 마음은 결국 화살이 되어 나에게 돌아왔다. 가족 중 누군가 말했다. <<너희는 아주 걱정 없이 살고 있구나! 그래, 너희만 잘 살면 되니? >> 부모에게 손 벌리지 않고, 그냥 평범하게 살아 주는 것만으로도 효도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나의 착각이었나? 해외 사는 자식의 자식 된 도리는 어디까지 인가?
어느 여름 해에, 한국에서의 휴가를 보내며 엄마에게 깊은 속내를 털어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어렵게 사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외벌이다 보니까 한 달 한 달, 마감하는 기분으로 살고 있다고 했다. 사실 내 마음속에도 좀 미안한 마음도 있었던 거 같다. 언젠가 한 번은 근사하게 해외여행을 시켜 드리고 싶었는데, 단순하게 계산을 해 봐도, 고령의 나이 감안하면 몇 가지 추가해야 한다. 내 부모, 시부모 모두 떠올려 보니, 저절로 고개가 절레절레 흔들어졌다. 그래서, 그때 엄마와의 대화에서 나는 내 방어권을 미리 사용한 것이었다. 밑밥을 좀 깔아 놓고, 엄마 나도 좀 넉넉하지는 않네?
그러고 그다음 달이 이었나? 남편과 오랜 상의 끝에, 부모님의 시간도 그리 많이 남아 있지는 않다는 것에 서로 동의하였다.
<<엄마 내년 봄에 우리 집에 놀러 와. 비행기 표 끊어 놓을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