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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샤론스톤 Feb 03. 2024

풍물시장에서 풍월을 읊는 야채들

토란같은 할머니들의 손길로 자라난 야채들이 5일장에서 풍월을 읊는다.

지난 한 주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주말을 기점으로 월, 화, 수, 목, 금요일이 하루처럼 지나가버린다.

어제 너무나 감사하게도 친정 아빠가 아이를 데리러 와주셨다. 아이가 없는 주말이 내게 주어져야 주중에 챙기지 못했던 집안 살림들이 정리가 된다. 거실에는 지난 월요일에 돌려놨던 빨래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한쪽에는 아이가 어질러놓고 간 레고와 블록, 책들이 흩어져 있었다. 주중에 쌓인 음식물 쓰레기봉투가 꽉 차서 싱크대 한쪽을 차지하고 있었다. 팬트리에는 각종 박스와 플라스틱 용기와 같은 재활용 쓰레기들이 쌓여있었다. 세탁실 바구니에는 한 주간 쌓인 세탁물이 가득했다. 

청소는 숨 쉬는 일과 같아서 멈출 수가 없다. 청소를 하지 않게 되면 질서가 사라지고 공간의 생명력이 소멸해 버린다. 

아이를 낳고 살림이 늘어나면서 그처럼 어렵게만 느껴졌던 집안 살림의 핵심은 물건들을 제자리에 잘 갖다 놓는 일이었다. 이것만 익혀서 정리한다면 살림의 이상은 해결된 것이라는 것을 아이가 5살이 되는 2024년 용의 해를 맞이하며 문득 깨달았다


친정 아빠 덕분에 쌓아두었던 빨래도 개켜서 수납장에 넣고 밀린 빨래도 다시 돌렸다. 

쌓인 음식물 쓰레기와 재활용 쓰레기들도 버리고 창문을 활짝 열고 청소기를 돌렸다. 물건들을 모두 제자리에 집어넣고 청소를 했더니 어지러웠던 질서가 잡히면서 죽어가던 공간의 생명력이 살아났다. 

차분히 정돈된 주방의 테이블 위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전원을 켰다. 오랜만에 글을 쓰는 것 같다. 

지난 한 주 게을러서 글을 못쓰고 월, 화, 수, 목, 금요일이 하루처럼 지나가 버린 것이다. 

아이를 재우고 난 뒤에 일어나서 글을 쓰고 자야 함에도 눈에 추가 달린 것처럼 한번 감기면 떠지질 않고 아이와 함께 잠들어버리기 일쑤였다. 


내게 글을 쓰는 일은 일종의 수행이었다. 글을 쓴다는 것은 글을 쓰는 고요한 시간 동안 그동안 방치되었던 나의 내면의 세계로 파고들어 가서 부지런함과 자애를 닦아가는 오솔길이었다. 

오늘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글 수행을 이어가 본다. 


불가에는 '행주좌와 어묵동정'이라는 화두가 있다. 걷고 머물고 앉아있거나 누워있거나 말하거나 침묵하거나 움직이거나 가만히 있는 모든 순간에 깨어나 선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는 화두다. 

내가 명상이나 절을 할 때뿐만이 아니라 모든 순간에 깨어있을 수 있다면 글을 쓸 때에도 요리를 할 때에도 

심지어 죽음이 내게 다가온 순간에도 성성적적한 선에 들 수 있고 깨어있을 수 있을 것이다. 


제는 산을 타고 내려와서 강화풍물시장을 다녀왔다. 풍물시장은 2,7일로 끝나는 날짜에 열리는 5일장이다. 지난 한 해 동안 나는 풍물 시장을 종종 다니며 강화 할머니들이 정성껏 농사지은 제철 채소들을 사서 순무김치도 해 먹고 동치미도 해 먹고 각종 나물요리도 해 먹었다. 

풍물시장은 주중에 가는 게 현명하다. 주말에는 사람들이 너무 붐비고 복작거려서 입구에서부터 차가 들어가는데만 한참을 기다려야 하고 주차난이 심각하여 장 보는 시간보다 주차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더 오래 걸릴 수 있다. 


작년 봄에 처음으로 풍물 시장을 가봤는데 주말이어서 교통체증이 심각했다. 그 뒤로는 주말에는 다시는 풍물시장에 가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주말을 피해서 나는 주중에 풍물 시장을 다녔다. 주중에도 풍물시장 5일장은 오전 10시 전으로 일찍 도착하거나 오후 4시 전후로 늦게 가는 게 주차하기에 한적하여 편안했다. 

오후 4시 이후로 가면 파장 시간이라 장을 볼 때 할머니들께서 덤을 많이 주시고 후하게 담아주셨다. 


문수산 시골집에서 강화대교만 건너가면 바로 강화다. 시골집에서 풍물시장까지는 차로 10분도 걸리지 않는다. 시골집주인 할머니와도 풍물시장에 몇 차례 함께 왔었다. 근거리에 이런 시골장이 있어서 신선한 식재료들을 구매하기에 매우 유익했다. 


나는 주차를 하고 바퀴 달린 바구니를 꺼내서 드르륵 끌며 상쾌한 발걸음으로 풍물시장으로 향했다. 

파장 때라서 그런지 사람들이 많지 않고 한산했다. 5일장 입구에는 엿장수 아저씨가 가위질하는 소리로 요란했다. 나는 빠르게 한 바퀴를 돌며 시장에 나온 식재료들을 훑어보았다. 나는 표고버섯과 양파, 마늘을 필히 사야 했고 그 외에 장에 나온 신선한 야채들을 사갈 생각이었다. 

두 바퀴를 돌 때에는 눈으로 찜해두었던 식재료들을 신속하게 구매했다. 나는 입구 쪽에서 어린 시금치 한 바구니를 5천 원에 샀다. 5일장에 오면 할머니들이 키운 어린 시금치를 살 수가 있었다. 어린 시금치는 뿌리를 따로 다듬을 필요도 없고 부드러워서 살짝 끓는 물에 데쳐서 나물로 해 먹으니 너무 맛있었다. 


그리고 강화 양파 한 망을 만원에 샀다. 꼬부랑 허리에 까맣게 탄 얼굴의 할머니가 양파망을 하나 번쩍 들어서 주셨다. 할머니의 손가락은 토란의 뿌리처럼 까맣고 울퉁불퉁하고 거칠었다. 얼마나 농사를 지어야 손가락이 저렇게 되는 것인지 가늠이 되지 않는 할머니의 인생이 두 손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오일장에 나온 강화 할머니들의 손길로 자라난 채소들이 풍물 시장에 나와 풍월을 읊는 것 같았다. 

나는 할머니들의 그 토란 같은 손으로 채소를 건네받을 때마다 숙연해졌다. 양파 한 자루를 넣었더니 장바구니가 묵직해졌다. 나의 장보기 원칙은 장바구니가 꽉 차면 그날 장은 다 본 것이다. 

특별히 김치를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배추나 무를 사야 하는 일이 아니라면 말이다. 


표고버섯을 사려고 단골집 할머니를 찾으러 갔다. 오일장을 자주 오다 보니 단골집이 생겼다. 이 할머니가 키운 표고버섯이 두툼하고 쫄깃하고 맛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할머니가 후덕하셔서 덤이 많고 가끔씩 가지도 덤으로 주곤 하셨다. 그래서 이 집이 표고버섯 단골집이 되었다. 표고버섯 단골집을 찾아갔는데 할머니가 화장실을 가셨는지 자리를 비우신 모양이었다.

옆에 앉아계시던 할머니께서 대신 팔아주신다며 한 바구니를 넣어주셨다. 

"할머니, 저 여기 단골이에요. 할머니께서 서비스를 많이 챙겨주셔서 여기서만 표고버섯 사거든요. 덤 많이 주세요." 

"아이고 알았어." 할머니는 바구니에 담긴 표고버섯을 봉지에 담더니 작은 손으로 한번 움켜서 표고버섯 4개를 더 넣어주셨다. 

"여기 표고버섯 할머니는 양손으로 두 번씩 가득 담아주시는데...... 그래서 제가 여기만 오는 거예요."

"아이고~" 그 할머니는 마지못해서 한 번 더 작은 손으로 몇 개 더 담아서 넣어주셨다.

'다음부터는 할머니 계실 때 와야겠다. 저 할머니는 손이 너무 작으시네. 표고버섯 할머니가 손이 크신데.'

"감사합니다. 많이 파세요." 

두 바퀴를 다 돌고 세 바퀴를 돌며 장에 나온 야채들을 좀 더 꼼꼼히 보았다. 못난이 흙당근이 눈에 띄었다. 

"할머니 이거 당근 얼마예요?"

"3천 원."

"당근 5천 원어치 주세요."

당근 할머니도 허리가 꼬부라지고 토란 같은 손으로 주홍빛 당근을 담아주셨다. 당근을 자주 사서 먹다 보니 생긴 것만 봐도 맛있는 당근이라는 느낌이 오는데 너무 굵지 않고 울퉁 불퉁하니 잔뿌리가 살아있는 게 분명 맛있는 당근이었다. 할머니는 하얀색 종량제 봉투에 담긴 당근을 몇 개 더 꺼내서 봉지에 담아주셨다.

"감사합니다. 많이 파세요."


나는 이번에는 야콘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이거 야콘 아닌가요?"

"맞아요. 야콘이야. 그냥 과일처럼 껍질 까서 먹으면 달고 맛있어. 건강에도 얼마나 좋은데."

"잘 알죠. 얼마예요?"

"한 바구니에 만원이야. 덤 많이 넣어줄게." 할머니는 벌써 봉지를 뜯어서 야콘을 담을 기세였다.

"한 바구니 주세요. 덤 많이 주세요."

정말로 덤을 많이 주셨다. 야콘은 마트에서는 보기 힘들고 온라인에서 사려고 해도 이런 가격에 사기 힘든데 오일장의 매력이라면 양껏 덤도 많이 주고 맛과 건강에 이로운 신선한 식재료를 살 수 있다는 점이었다.

야콘집에서 깐 마늘도 만 원어치 함께 샀다. 이렇게 오늘 사야 할 식재료 장을 후다닥 다 보았다.

나오는 길에 찐 옥수수의 냄새가 유혹하였지만 이미 바구니가 꽉 찼고 지갑도 다 털려서 현금이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뭘 저렇게 맛있게 먹고 있나 궁금하여 가보니 어묵집이었다. 

지난여름 이 자리에서 우뭇가사리 콩국을 팔았었는데 겨울에는 어묵과 국화빵을 팔고 있었다. 


장을 다 보고 나오는 길에 엿장수 아저씨께서 호박엿을 먹어보라며 엿 한 조각을 주셨다. 고소한 콩가루가 묻은 호박엿이 입속에서 부드럽게 녹으며 호박의 풍미와 달달한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아저씨 호박엿 한 팩 주세요. 현금을 다 썼는데 계좌이체 되나요?"

"돼요."

"아저씨는 무심하게 호박엿 한 팩을 봉투에 넣어주셨다."

나는 호박엿을 장바구니에 담고 계좌이체를 하고 있었다.

"아저씨, 방금 이체해 드렸어요. 확인해 보세요."

"고마워요."

아저씨는 방금 전에 한팩 싸서 장바구니에 넣은 걸 잊으셨는지 다시 한 팩을 봉지에 담아서 내게 건네주셨다.

"아저씨, 방금 전에 주셨잖아요. 또 주시려고요?"

아저씨는 요란하게 가위질을 하면서 내게 건네준 호박엿을 다시 가져가셨다.

장바구니가 꽉 차서 제법 무거웠다. 장바구니에 바퀴가 없었다면 정말 힘들었을 것이다.

조금 더 여유가 있다면 풍물시장 건물로 들어가서 2층에 있는 수수부꾸미를 한 봉지 사가지고 갈 텐데 아이 픽업 시간이 늦어져서 다음에 와서 먹고 가기로 했다. 

차에 장바구니를 싣고 부지런히 시동을 걸고 다시 강화대교를 지나서 아이 어린이집으로 달려갔다.

아이는 어린이집 모래 놀이터에서 한참 놀다 가겠다고 성화였다. 그렇게 30분을 놀다가 젤리를 손에 쥐어주고 나서야 집에 가겠다고 차에 탔다. 30분을 달려서 집으로 도착했다.     

야콘으로 야콘 동치미를 만들어 먹을 생각이다. 배와 무, 쪽파, 양파, 마늘, 생강을 넣고 시원하고 달달한 야콘 동치미를 먹으며 봄을 준비해 본다. 

하얀 겨울을 제대로 못 본 것 같은데 이렇게 지나가버리는 건 아니겠지?

봄이 오기 전에 함박눈을 맞으며 설산을 타고 싶은데 말이다. 

이대로 겨울을 보내기엔 너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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