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스물아홉이었을까? 서른이었을까? 친한 여동생과 거사님을 따라서 눈 쌓인 설악산 봉정암을 올라갔었다. 봉정암은 미리 예약을 하고 올라가야 방을 내어준다.
우리는 무슨 배짱인지 예약도 없이 그냥 올라갔고 봉정암에 도착했을 때 이미 해가 저물고 있었다.
우리가 산행을 했던 그날, 봉정암은 예약이 폐쇄된 상태였다.
우리는 봉정암 스님께 폐쇄 사실을 미처 알지 못하고 올라왔다고 했다.
이렇게 해가 저물고 깜깜해지는데 밤에 내려갈 수도 없고 하룻밤만 이곳에 머물 수 있도록 간곡히 부탁을
드렸다. 그때 우리를 바라보던 스님의 떨떠름한 표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봉정암에서 내려다본 겨울 설악산의 황홀경은 정말 숨 막히게 멋졌다.
그러나 나는 고된 장거리 산행 덕택에 터질 것 같은 허벅지 근육통으로 풍광을 음미할만한 여유가 없었다.
당시에 산행을 이끄셨던 거사님께서 여기에 왔으면 대청봉을 갔다가 가야 한다며 다음날 새벽에 랜턴을 켜고 우리를 대청봉까지 데리고 갔다. 그리고 나는 다시는 봉정암이든 대청봉이든 여기에 올 일은 없을 것이라며 못을 박고 내려왔다.
그로부터 약 7~8년의 세월이 지나갔다.
그 사이에 남편이 생기고 그 사이에 떡두꺼비 같은 아들도 생겼고 그 사이에 희귀암도 생겼다.
그 사이에 치병도 하고 그 사이에 폐전이 소견을 받았던 암도 사라졌다.
나는 이번 부처님 오신 날에는 봉정암에 갔다 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혈액암 환우가 봉정암 순례길에 함께 하고 싶다고 하여 함께 가게 되었다.
5월 14일 새벽 6시 속초행 버스를 타러 강남고속버스터미널로 갔다.
백담사로 가는 버스는 동서울 터미널에서 타야 했는데 서울경부선에는 속초행밖에 없다는 것을
버스에 타고나서 알게 되었다. 버스에는 우리 둘 뿐이었다. 버스 한 대를 통째로 전세내고 속초를 향해서 달려갔다. 버스에서 사과도 먹고 한참 수다를 떨었다. 쿨쿨 자다가 눈을 떠보니 벌써 속초였다.
백담사를 가기 위해서 용대리 정류소에 가야 하는데 시외버스터미널로 가야지 용대리 정류소를 가는 버스를 탈 수 있었다. 속초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속초 시외버스터미널은 약 1km 거리를 두고 있었는데 우리는 택시를 타고 가기로 했다. 시외버스터미널까지 택시비 5천 원이 나왔다.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용대리 정류소까지 가는 버스를 기다리며 김밥을 먹었다. 버스를 타고 용대리 정류소에 내렸다. 용대리 정류소에서 백담사로 가는 셔틀버스 주차장까지 약 1킬로 정도 걸어가야 하는데 콜택시를 불러서 택시를 탔다.
셔틀버스 주차장에서 셔틀버스표를 끊고 백담사까지 버스를 타고 올라갔다. 여기서부터는 백담사 셔틀버스와 백담사 사찰 관계자 차량만 출입이 가능하다. 일반 차량은 출입이 불가능하여 입구에 주차를 하고 걸어서 올라가야 한다. 걸어서 백담사까지 약 2시간이 걸리기에 체력과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 셔틀버스를 탔다.
멋진 설악산과 계곡을 보며 올라오니 금방 백담사에 도착했다.
우리는 백담사에 들러서 잠깐 사찰을 둘러보고 대웅전에서 삼배를 드리고 나왔다.
우리는 백담사 다리를 지나서 봉정암으로 향했다. 설악산 국립공원에서 예약자들 신상 확인을 하고 있었다. 같이 셔틀버스를 타고 올라오던 몇 분은 미처 예약을 못하고 왔는데 갈 수 있겠냐고 울상을 짓고 있었는데 입구에서 퇴짜를 맞아서 되돌아가는 길이라고 했다. 나는 예약자 대기 명단에서 내 이름을 찾고 몇 가지 정보들을 기재한 뒤에 노란색 산불조심 라벨을 받아서 입산했다.
다시는 올 일이 없을 거라고 대못을 박고 내려오던 그 길을 이번에는 45리터 배낭을 메고 맨발로 걸어가고
있었다. 7년 전에 거사님을 따라서 왔던 코스는 오세암을 지나서 가는 코스였던 것 같다.
우리는 영시암까지 정말 편안하게 부드러운 길을 걸어서 왔다. 영시암에서 점심을 먹으며 충전을 했다.
용아장성의 호위를 받으며 편안하게 올라왔다. 그동안 산을 타며 체력의 그릇이 커진 것인지 약 12kg 무게의 45리터 백팩을 메고도 맨발로 쌍용폭포까지 수월하게 올라왔다. 쌍용폭포는 두 마리의 용이 마치 하늘을 승천하는 듯했다.
봉정암 보살님께서 오후 5시까지는 봉정암에 올라와야 저녁 공양이 가능하다고 하셨다.
나는 7년 전 혹독했던 봉정암 산행이 기억에 강렬하게 남아서 시간 내에 오를 수 있을지 의문스러웠지만
생각보다 그동안 가꾼 체력이 잘 받쳐줘서 거뜬히 올라왔다. 함께 온 혈액암 환우분도 잘 올라오셨고
중간중간 계곡에서 발도 담그고 간식도 먹으며 쉬었다가 올라왔음에도 시간이 넉넉했다.
지혜샘을 지나서 올라가다 보니 해탈고개가 나왔다. 해탈고개를 지나면 봉정암이 보이는데 이 구간이 마지막 험준한 깔딱 고개였다. 북한산 숨은 벽을 지나서 백운대를 가는 길에도 이런 구간이 있는데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동안 북한산과 도봉산에서 맨발 산행을 한 덕택에 해탈고개도 어렵지 않게 올라갔다.
해탈고개를 올라서자 사자바위가 나왔다. 봉정암으로 가는 길에 알록달록 예쁜 연등이 달려있었다.
사자 바위에 올라가서 멋진 풍경을 바라보고 내려왔다.
오후 4시 45분 봉정암에 도착했다. 다시는 올 일이 없을 것이라고 대못을 박고 갔던 그 자리에 맨발로 올라왔다. 멋진 풍경에 숨이 막히고 만감이 교차하며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가슴이 먹먹해졌다.
도량에 있는 의자에 앉아서 신발을 신었다. 방의 자리 배정을 받으려고 종무소에 들어갔는데 스님께서 나를 보자마자 이렇게 말씀하셨다.
"젊은 보살. 내일 자원봉사 좀 하고 하루 더 자고 가."
"네? 저도 마음은 그러고 싶은데요... 일정을 조정해 보고 가능하다면 저도 하루 더 있다가 갈게요."
함께 온 환우님은 하룻밤 더 있다가 갈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아이를 부모님께 1박 2일 동안 맡기고 온 터라
죄송한 마음이었다. 그리고 목요일에 유치원 선생님과 면담이 잡혀 있었다.
먼저 엄마에게 전화를 해서 이래저래 한데 하룻밤 더 묵고 갈 수 있는지 여쭤보았다.
엄마가 아이 못 봐준다고 바로 내려오라고 해서 내일 내려가야겠구나 싶은 마음으로 전화를 끊으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엄마가 그 찰나에 갑자기 힘들게 갔는데 하루 더 있다가 오라고 했다.
유치원 선생님께는 사정을 말씀드리고 면담 일정 조정을 부탁드렸다.
그렇게 우리는 예정에 없던 1박이 더 추가되어 2박 3일 봉정암 순례를 하게 되었다.
우리는 7호실 방에 5번과 6번 자리를 배정받았다. 바닥에는 매직으로 그어놓은 칸에 번호가 새겨져 있었고
포스트잇에 쓰인 번호를 찾아서 가면 그곳이 내가 누워 잘 수 있는 곳이었다.
칸에 맞는 방석 하나와 짐과 물건을 올려놓을 수 있는 선반, 빨랫줄이 있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예약비 만원을 내고 받기에는 과분한 대접이었다.
자리에 배낭을 내려놓고 짐을 풀고 절을 하러 나왔다.
봉정암에서 적멸보궁으로 올라가는 길에 대청봉 가는 길이 있었다.
적멸보궁에 들어왔더니 커다란 통창 밖으로 펼쳐지는 설악산 봉정암의 풍경에 또 한 번 입이 떡 벌어졌다.
다시는 올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7~8년 만에 이렇게 다시 왔다며 두 손을 모아 무릎 굽혀 삼배를 드렸다.
저녁 공양을 하러 나왔다. 밥과 미역국 김치, 떡이 오늘 저녁이다.
그릇에 밥을 퍼서 덜고 미역국을 덜고 그 위에 김치를 퍼서 김치 미역국이 되었다.
김치가 너무 맛있었다. 김치 미역국은 생각 못해봤었는데 김치 미역국도 굉장히 맛있다는 것을
봉정암 미역국을 먹으면서 알게 되었다.
식탁도 따로 필요 없었다. 그냥 도량 의자에 앉아서 경치를 보며 따끈한 김치 미역국밥을 먹었다.
너무 맛있었다. 떡 안에 앙꼬가 들어있었는데 떡은 또 왜 이렇게 맛있던지.
저녁을 먹고 방에 들어와서 한숨 돌렸다. 함께 온 환우분도 이런 곳이 있는지 몰랐다며 너무 좋다고
메모지에는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세상의 모든 환우들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서 삼천배를 올립니다.'
발원을 쓰고 절을 시작했다. 숫자를 세며 발원하며 백배를 하고 백배가 끝나면 메모지에 뽀로로 도장을
쾅~! 찍었다. 뽀로로와 크롱이 참 잘했어요라는 칭찬을 해주는 도장인데 우리 아이 손등에 찍어주던 도장을
챙겨 와서 깜찍한 에너지가 가득했다.
그렇게 절을 계속 이어갔다. 저녁 기도 시간이 되었던 건지 스님과 불자님들이 법당에 올라오셔서 천수경 기도가 시작되었다.
함께 천수경 염불을 했다. 눈물이 뺨을 타고 주르르륵 흘러내렸다. 하염없이 내리는 눈물과 함께 하염없이 절을 했다. 천수 기도가 끝나고 모두 내려가셨다. 나는 텅 빈 적멸보궁에서 계속 절을 했다. 저녁 9시에 스님이 또 올라오셔서 기도를 하셨다. 나는 계속 절을 했다. 스님이 내려가셨다. 나도 화장실이 급해서 잠시 절을 멈추고 다시 적멸보궁 계단을 내려가서 화장실로 갔다.
화장실 가는 길이 멀다. 그리고 역한 냄새가 올라오는 화장실 변기에 엉덩이를 대는 것도 쉽지는 않다.
절을 하다 보면 목이 타서 물을 마시게 되는데 너무 많이 마시면 화장실이 가고 싶어 져서 목이 타도 한 모금씩 아껴 마셨다. 계단을 올라와서 다시 적멸보궁에서 계속 절을 했다.
뽀로로 도장 9개가 쾅쾅쾅 찍힌 시점부터는 몸이 으스러지는 것 같았다. 무릎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천배를 마치고 시계를 보니 저녁 11시였다. 나는 후덜 거리는 다리로 적멸보궁을 내려왔다.
일단 오늘은 자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늘 땀을 너무 많이 흘려서 아무리 피곤해도 샤워는 하고 자야 했다.
밤 11시에 6호실에 갔더니 소등이 된 상태로 불자님들이 전쟁터 피난민들처럼 뒤섞여서 자고 계셨다.
혹시라도 나의 부주의로 인해 머리나 다리를 밟을까 봐 핸드폰 불빛에 의지하여 조심조심 불자님들을 지나서 내 자리로 왔는데 내 자리에 누군가 이미 침범해서 잠을 자고 있었다. 내가 눕기에는 너무 비좁은 틈만 남아있었다. 아무튼 핸드폰 불빛에 의지하여 배낭에 있는 짐을 꺼내고 갈아입을 옷과 수건, 칫솔을 꺼내서 나왔다.
봉정암에는 보살님 세면장이 있는데 여름이든 겨울이든 차가운 계곡물로 냉수마찰을 해야 한다.
세면장에서 샴푸나 바디워시는 계곡물을 오염시킴으로 사용금지한다는 표시가 되어있었다.
나는 머리는 못 감더라도 계곡물로 냉수마찰을 하며 땀만 닦아내는 정도로 샤워를 했다.
생각했던 것만큼 그렇게 차갑지는 않았다. 시원한 계곡물로 샤워를 하고 났더니 정말 개운했다.
다시 방으로 들어와서 내가 잘 수 있는 틈을 찾아보았다. 중간쯤에 틈이 보였다. 나는 그곳에 방석을 깔고
누웠다. 불자님들의 코 고는 소리가 무지개 빛깔처럼 다양했다. 그 틈에서 어찌어찌 잠을 청해보았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하며 한참을 뒤척였다. 바닥이 따끈하니 금방 피로가 녹는듯했다.
몸은 피곤한데 낯선 공간에 낯선 사람들 틈에서 좀처럼 잠이 오질 않았다.
잠에 든 것 같았는데 어디선가 누군가의 핸드폰 알람이 요란하게 울려대고 알람이 꺼진 것 같더니 또다시
다른 방에서 울리는 것인지 핸드폰 알람 소리가 금방 울려댔다. 새벽 내내 알람 소리가 수시로 울려댔다.
그렇게 이리 뒤척 저리 뒤척하다가 첫날밤이 지나갔다.
잠은 제대로 못 잤지만 그래도 따끈한 바닥에서 몸을 지지며 누워있어서 다시 절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침에도 미역국이 나왔다.
나는 밥을 먹고 조금 쉬다가 다시 절을 하러 올라갔다.
절을 드리는데 무릎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수없이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할 수 있을까?" 그래도 나는 계속 절을 하고 있었다.
뽀로로와 크롱이 "참 잘했어요!"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할 수 있지." 하면서 계속 고개를 넘어가듯 절을 이어갔다.
2백 배를 하고 났는데 소변이 마려웠다. 화장실을 가려면 또 적멸보궁 계단을 내려가서 역한 냄새가 나는
변기를 마주해야 했다. 이 순간도 내게 작지 않은 난관이고 수행이었다. 시원하게 볼 일을 보고 다시 적멸보궁을 올라가려니 무릎이 풀려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다시 방으로 돌아와 내 자리로 왔다.
어제 왔던 불자님들이 다 하산하고 텅 빈 방에서 나 홀로 대자로 드러누워 쉬기에 딱 좋았다.
나는 그대로 누워서 잠시 잠이 들었다.
함께 온 환우분이 내 점심 공양을 챙겨주신다고 밥을 많이도 퍼서 미역국을 담아서 갖다주셨다.
마음은 너무 감사했으나 절을 하기 전에 이렇게 많이 먹으면 사실 절하기가 힘들다.
절에서 주신 공양을 남길 수도 없고 애써 챙겨주신 마음을 거절할 수도 없고 결국 다 먹었다.
절을 할 때에는 배고프지 않을 정도로 죽 반그릇이나 견과류 한 줌 정도가 적당하다.
점심 공양을 하고 조금 쉬다가 다시 적멸보궁으로 올라갔다.
또다시 하염없이 절을 했다. 절을 하다가 방석에 쓰러져 엎드리기도 하고 드러눕기도 했다.
무릎은 찢어지는 것 같고 허리와 엉덩이까지 욱신욱신했다. 중간중간에 스트레칭을 하며 몸을 풀어주었다.
다시 또 절을 했다. 오후 7시가 다 될 무렵에 나의 메모지에 뽀로로 도장 30개가 찍혔다.
수없이 지나야 했던 '할 수 있을까?' 고개들을 넘고 넘어서 '할 수 있지.'에 왔다.
나는 삼배를 드리고 방석을 정리해 두고 적멸보궁을 나왔다. 오늘 정오부터 비가 내렸는데 삼천배를 마치고
나오니 하얀 눈이 내리고 있었다.
5월 중순에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보는 것 같았다. 왠지 모르게 대청봉에서 썰매를 타고 산타할아버지가 오실 것만 같았다. 후덜 거리는 다리로 적멸보궁 계단을 내려왔다.
따끈한 방에 그대로 뻗어 누웠다.
"샤론! 집념이 대단하다. 자기 무섭다."
함께 봉정암에 올라온 환우님께서는 내가 무섭다며 농담반 진담반으로 말씀하셨다.
그런데 나는 이 말씀을 드리고 싶었다. 삼천배 절을 하는 데는 체력도 아니고 집념도 아니다.
체력과 집념이 좋다면 헬스트레이너나 국가대표들도 모두 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삼천배 수행을 하는 수행자들은 죽음 앞에 서 있거나 불가능하다고 판정받은
병약자나 그 환우의 보호자들, 큰 난관에 봉착해 있는 분들이 그 고개를 넘어간다는 것을......
그저 그 간절한 마음이 전부라는 것을......
그 간절한 마음으로 하염없이 엎드려 절하는 수행자들 말이다.
하염없이 절을 하며 꺼져가던 촛불이 다시 불타오르는 그 신비를 어찌 말로 전할 수 있을까.
희미해져 가는 촛불을 밝혀 캄캄한 고통의 고개를 넘어가 본 자만이 걸어갈 수 있는 마음의 길일 것이다.
그날 나는 따끈한 바닥에 무릎과 다리를 지지며 잘 잤다. 내가 코를 골아서 내 옆에 있던 불자님께서
잠을 잘 못 주무셨던 것 같다.
다음날 아침, 자고 일어났더니 봉정암은 눈이 30센티나 쌓여 있었다.
아이젠도 못 챙겨 왔는데 이를 어쩌나 싶었다. 다행히 절에서 아이젠을 보유하고 있어서 아이젠을 구매할 수 있었다. 설악산이 5월 중순에도 이렇게 눈이 내려서 설악산인가 보다.
아침 공양은 비빔밥과 미역국이 나왔다. 맛있게 공양을 하고 짐을 정리해서 나왔다.
대청봉을 못 가서 너무 아쉬웠다. 눈이 와서 출입이 통제되어 올라갈 수 없다고 했다.
7년 전에 다신 오지 않겠다며 마음에 박고 갔던 대못은 뽑아두었다.
그리고 언젠가 인연이 되는 날에 또 오겠다고 구법당에 가서 절을 했다. 하얗게 눈 쌓인 봉정암을 내려왔다.
아쉬운 마음을 안고 어제 오후에 대구에서 오신 불자님들과 무리를 지어서 함께 원점회귀 하산을 하기로 했다. 해탈고개까지는 완전히 한 겨울이었다. 하룻밤 사이에 쓰러진 나무들도 많이 보였다.
언제 또 봉정암에 오게 될지 모르겠다.
조심조심 깔딱 고개를 잘 내려갔다. 어느 정도 내려오자 눈이 보이지 않았다.
눈길을 지나자 하산길은 매우 편안했다.
금방 수렴동 대피소까지 내려왔고 발열팩에 누룽지를 넣고 끓여 먹었다.
다람쥐 한 마리가 내 옆으로 와서 떨어진 아몬드를 맛있게 냠냠 먹었다.
휴식을 취하고 다시 하산을 했다. 맨발로 설악산을 느끼며 영시암을 지나서 백담사까지 잘 내려왔다.
함께 온 환우분은 장거리 산행이라 그런지 많이 지친 것 같았다.
내게 계속 삼천배했는데 다리 괜찮냐고 물었다.
엉덩이와 허벅지가 뻑적지근했지만 걷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오히려 걸어주니까 금방 풀린 것 같았다.
백담사 셔틀버스를 타고 내려와서 근처에서 점심을 먹고 가기로 했다.
눈에 들어온 황태구이 음식점으로 들어갔는데 봉정암 옆자리에서 주무셨던 불자님들을 만났다.
너무 반가워서 인사를 드렸는데 서울로 가는 거라면 자기들 차를 타고 가라며 차를 태워주셨다.
덕분에 우리는 기사님이 운전해 주시는 차를 타고 서울까지 편안하게 왔고 귀한 연밥차도 대접받았다.
우리는 봉정암에서의 하얀 인연에 감사한 마음을 전하며 작별 인사를 나눴다.
전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와 무거운 배낭을 내려놓고 소파에 철퍼덕 앉아서 눈을 감았다.
2박 3일간 봉정암의 꿈같은 시간이 눈 녹듯이 지나갔다.
나의 간절한 발원이 청정 수월도량 봉정암에서 설악산의 용아장성을 타고 온 우주로 가득 울려 퍼지는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