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차 경단녀의 기사식당 취업한 날
나는 출산과 동시에 암 수술을 하고 회복하기 무섭게 육아전선에 뛰어들어 열심히 아이를 키웠다.
아이가 세 살이 되던 무렵에 아이가 어린이집을 들어갔다. 이제 나도 건강을 살펴야겠다고 생각했던 그때
대학병원 정기검진에서 폐전이 소견을 받게 되었다. 또다시 나의 삶에 큰 파도가 쳤다.
그렇게 경단녀 3년 차에 나는 자연치유의 길을 선택하였고 치병을 위해서 2년간 산과 집을
오가며 산중 유배 생활을 자처하였다. 인생은 늘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나는 전업 치병 기간을 2년으로 잡았고 그 안에 암이 없어지지는 않더라도 아이를 키워내는데 감당할 수 있는 체력과 건강성을 회복하겠다는 명확한 목표가 있었다.
내가 상상하고 계획했던 모습처럼 정말 신기하게도 나의 체력과 건강성이 회복되었고 폐도 깨끗해졌다.
그렇게 나는 2년간의 산중 생활까지 추가되어 5년 차 경단녀가 되었다.
나는 올 가을부터는 일을 시작하여 가계에 보탬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동안 치병을 하면서 남편이 외벌이로 고생을 많이 하였고 가계 상황이 좋지 못했다.
아이가 유치원에 있는 시간 동안 알바라도 하려고 구직 사이트를 찾아보았다.
아이를 등원시키고 10시에서 4시 사이에 할 수 있는 일을 구하는 게 하늘에 별따기였다.
나는 사실 산불감시원 같은 직업을 구하고 싶었다. 희귀 암이라는 핸디캡이 있었고 치병의 연장선상에서 치병에도 이로운 일을 구하고 싶었다. 산과 숲에 관련된 일을 하고 싶었지만 이 직업도 아이 등, 하원 시간에 맞추기는 어려웠다. 숲선생님이나 숲해설가 같은 직업군도 있었는데 교육비용과 교육기간이 꽤 길었다.
그만큼의 교육비용과 시간을 지불해 가면서 그 직업을 구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아이가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는 되어야 등, 하원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아이가 5학년이 되기 전에는 경제수혈용 아르바이트나 일을 구하기로 했다.
아이가 고학년이 되면 산에서 할 수 있는 산불감시원이나 국립공원에서 일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튼 너무 지나치게 과한 노동으로 에너지가 너덜너덜해지는 일은 자제하기로 했다.
쿠팡 배송 업무, 요구르트 배송 업무, 기사식당 도시락 배송 업무 구인공고 중에서 고르기로 했다.
요구르트 배송도 재미있을 것 같긴 한데 교육을 일주일이나 받아야 돼서 패스했다.
바로 투입돼서 일 할 수 있는 기사식당에 전화를 했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000에서 구인공고 보고 연락드렸습니다."
"네. 안녕하세요. 운전할 줄 아세요?"
"네."
"운전 경력은 어떻게 돼요?"
"약 9년 정도 됩니다."
"그래요? 스타렉스 끌어 보셨어요?"
"아뇨. 승용차만 타봤는데요."
"아. 그럼 됐어요. 스타렉스도 승용차랑 똑같아요. 몇 살이세요?"
"37이요."
"내일 아침에 오세요. 아침 식사 하시려면 9시 30분까지 오시고요, 식사하셨으면 10시까지 오시면 됩니다."
"네. 알겠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네."
그런데 잠시 후 그 기사식당 번호로 다시 전화가 왔다.
"아기 엄마시라고 했죠?'
"네."
"아이가 몇 살이라고 했죠?"
"5살이요."
"그럼 아기 엄마는 좀 힘들 것 같은데......"
"왜요?"
"아이가 좀 아프기라도 하고 그러면 아기 엄마들은 결근하고 그러는데 우리는 그러면 안 되거든요.
대체할 인원도 없고 골치 아파져서 결근을 봐줄 수가 없어요."
"아... 그렇죠. 저희 아이가 앞으로 아프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는데 제가 굉장히 튼튼하게 키워서
잘 아프지 않기는 합니다만...."
"우리는 무조건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시간대에 나와서 일을 해줄 수 있는 사람 이어야 해요."
"그건 어느 회사든 어느 사업장이든 당연한 거죠."
"나는 사장이니까 그런 부분이 걱정이 되는 거지."
"그러실 수 있죠. 그런데 너무 미리부터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걱정하시는 거 아니세요?"
"하하. 그런가?"
"저도 저희 아이가 아프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는데 아프리라는 보장도 없고 굳이 걱정을 미리 앞당겨서 할 필요가 있나 싶어서요."
"성격이 되게 좋네. 그러면 내일 오전에 오세요."
"네. 내일 봬요."
짧은 통화로 기사식당 배송 면접날이 바로 다음 날로 잡혔다.
그리고 오늘 아침 아이를 유치원에 등원시키고 시간에 맞춰서 기사식당으로 갔다.
오래되고 허름한 기사 식당이었다. 주방에는 이제 막 출근한 것 같은 이모 한 분이 요리를 하고 계셨다. 홀에는 어떤 청년과 아저씨가 식사 중이었다.
"안녕하세요. 오늘 구인공고 보고 면접 보러 왔습니다."
"안녕하세요. 식사하셨어요? 식사하세요."
"아침 먹고 왔어요. 맛있게 드세요."
"잠시 앉아계세요."
20대 풋풋한 청년처럼 보이는 남성분이 밥을 다 먹고 나서 일을 알려주겠다고 차근차근 안내를 해주셨다.
그리고 나는 그 청년이 속사포로 내뱉어대는 일의 순서와 체계들에 대한 정보를 씹지도 못하고 삼켜내느라
진땀이 났다.
식탁 위에는 초록색 통이 일렬로 쭉 올려져 있었다. 통 앞에는 회사 상호가 써져 있었고 나름의 순서와 체계가 있었다. 그것들을 확인해서 순서대로 스타렉스에 싣고 배송하는 것이 업무였다.
국통과 밥통도 함께 챙겨야 하는데 오늘은 그냥 정신없이 듣고 보았다.
도시락통은 10개 중에 1개는 엄청 무거웠다. 다행히도 나머지는 그렇게 무겁지는 않았고 내가 들을 수 있는 무게였다. 2년을 넘게 일했다는 그 청년은 손끝과 발끝이 모두 재빨랐다.
나는 청년이 일러주는 내용을 귀에 담으며 함께 국통과 밥통을 차에 실었다.
"이렇게 1차를 뛰고 갔다 와서 2차로 한 번 더 배송을 뛰면 돼요. 2차를 뛰고 와서 점심을 먹고 수거를 하러 갈 거예요. 수거를 하고 돌아오면 1시 30분쯤 되거든요? 그때부터는 이제 수거한 통들을 닦는 일을 하시면 돼요. 수거한 통을 다 닦고 나면 3시 정도 될 거예요. 그때 또 밥을 드시면 돼요."
"아. 점심을 12시에 먹었는데 3시에 또 먹어요?"
"네. 그 시간 되면 또 배고파요. 그리고 밥 안 드시면 그 시간에 홀 일 하게 되실 거예요. 그냥 고추나 만두 몇 개라도 가져와서 드시면서 앉아서 좀 쉬세요."
"아.... 네."
이 청년은 일머리도 굉장히 좋고 잔머리도 굉장히 좋았다. 28살이라는데 어쩜 이렇게 야무진지 정말 내가 너무 훌륭한 청년을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청년과 함께 스타렉스를 타고 도시락을 배송하러 거래처 공장들을 돌았다. 산기슭 같은 곳을 올라가기도 하고 우당탕탕 울퉁불퉁한 좁은 논길을 따라가기도 하고 여기가 거기인지 거기가 여기인지 헷갈렸다. 공장들의 위치가 머릿속에서 뒤죽박죽 뒤엉켜 따로따로 놀고 있었다.
"일주일은 따라다니셔야 조금 익으실 거예요."
그중에서도 거대하고 좁고 복잡한 폐차장 공장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좁은 입구에 커다란 덤프트럭이 찌그러진 폐차들을 잔뜩 실어서 나르고 있었다.
좁고 복잡한 그 길을 청년은 용케도 뚫고 들어가서 한쪽에 주차를 했다.
그리고 나는 청년과 함께 폐차장 사무실 안쪽에 도시락통과 밥통, 국통을 내려놓고 왔다.
일 자체가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겨울철 빙판길, 한 여름 폭염의 정오 시간과 우중 배송은 청년도 힘들었던 부분이라고 했다.
공장 식당과 사무실은 대체적으로 후줄근하고 지저분한 위생 상태였다.
10군데 중에 1~2군데만 좀 깔끔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한 곳은 정말 호러 영화에나 나올법한 위생 상태였는데 도대체 여기서 밥이 어떻게 넘어가나 싶을 정도였다. 오랫동안 방치되어 까맣게 핀 곰팡이들이 부엌을 덮쳐버려서 벽에 걸려있는 스텐냄비까지도 까맣게 변해있었다. 건강한 사람도 그곳에서 지내다간 암이 걸릴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오싹한 곳이었다.
도대체 직원들에게 이런 환경을 제공하는 공장장님은 얼굴이 어떻게 생겼을지 궁금해지기까지 했다.
나는 청년과 함께 2차 배송까지 다 마치고 기사 식당으로 돌아와서 점심을 먹었다.
뷔페가 종류도 정말 많고 화려했다. 잡채, 김치, 생채, 양배추 샐러드, 버섯, 감자조림, 가지 조림, 콩나물 무침, 오이 고추, 쌈장, 고추장, 조기튀김, 김밥, 고추 튀김, 제육볶음, 콩자반, 두부 뭇국, 식빵 토스트, 국수, 누룽지 등등 나는 이것저것 그릇에 담아와서 음식을 먹어보았다.
끼니당 7천 원의 기사식당 가성비에 맞춘 식재료들이기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고기는 딱 봐도 육질이 질겨보였고 양념장에서 조미료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아예 그릇에 담아 오지도 않았다. 나는 그냥 조기 한 마리와 오이 고추, 가지조림, 콩자반, 감자조림, 뭇국, 잡채, 양배추 샐러드, 잡곡밥 정도만 담아왔다.
맛은 역시나 별로였다. 7천 원을 주고 이렇게 먹을 바에는 그냥 만 원짜리 제대로 된 식사를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그냥 집에서 김치볶음밥을 하나 해 먹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질보다 양을 우선시한다는 가치관으로 세워진 기사식당이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도 음식에서 사람의 마음이 느껴졌다. 나는 그 기사식당의 음식에서 이모님들의 바쁜 손놀림과 힘겨움이 느껴졌다. 너무 힘들게 만들어져서 먹기 힘든 음식이었다.
그래도 기사 식당에 오신 아저씨들은 굉장히 맛있게 드셨다. 청년도 기사 식당 밥이 맛있다고 했다.
내 혓바닥이 언제 이렇게 비싸진 것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영 별로였다.
나는 이제 몇 숟가락 먹었는데 청년은 10분도 안돼서 밥을 후딱 먹어치우고 먼저 일어났다.
평소에도 나는 30분은 앉아서 먹어 버릇해서 여기서도 눈치 없이 밥을 너무 오래 먹었나 보다.
오후 3시 타임에 청년이 휴식도 취할 겸 밥을 또 먹는 시간이라고 해서 나는 샐러드를 담아서 먹고 있었다.
그런데 사장님께서 내 곁으로 오더니 화난 눈과 웃는 입술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밥을 너무 오래 먹어. 나도 참는데 한계가 있어."
"아~제가 좀 밥을 오래 먹었죠? 밥을 오래 씹어서 삼켜먹는 버릇이 있어가지고요... 점심은 좀 적게 먹도록 할게요."
"빨리 먹고 일하러 가야지."
"알겠습니다. 밥 양을 줄이도록 할게요."
사장님 얼굴빛이 건강한 사람의 혈색이 돋지는 않았다. 영 얼굴빛도 인상도 좋지가 않았다. 그래도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시면서 돈도 많이 버시길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 나는 집에서 간단한 주먹밥이나 샌드위치를 싸서 일터에 오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청년과 함께 주방 뒤쪽 공간에서 도시락 통을 닦고 있는 데 사장님이 담배를 피우시려고 우리 쪽으로 왔다.
나는 담배 냄새에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아. 사장님. 담배는 죄송하지만 저쪽으로 가서 피워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가 기관지가 약해서요."
사장님은 썩은 표정으로 계속 쭈그려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계셨다.
내가 콜록콜록 대며 오만상을 쓰자 옆에 계시던 전처리 담당 이모님이 말씀하셨다.
"나도 담배 냄새 질색팔색하는데 이제 적응됐어. 익숙해졌어. 사장님 때문에. 자기도 익숙해질 거야."
"저 담배 냄새 맡으면서 일 못하는데..... 다른 건 다 해도 그건 못하거든요. 저 일 못하는데 그럼."
그제야 사장님이 일어나 저쪽으로 이동하셔서 흡연을 하셨다.
내일도 사장님께서 헤비스모커로 곁에서 흡연을 하신다면 이 일터는 내가 있을 수 없는 일터다.
내일도 만약에 사장님께서 일관된 태도로 간접흡연을 암묵적으로 강요하신다면 그 일은 일찍이 그만둘 생각이다.
오늘은 그렇게 기사 식당에서 생업을 시작한 특별한 날이었다.
5년간의 징역살이를 마치고 출소한 죄수가 두부 한모를 먹고 세상 밖으로 나올 때 이런 기분이 아닐까 싶다. 사장님의 담배 냄새가 역하긴 했지만 5년 차 경단녀 치병업자에겐 기사 식당의 모든 일들이 생동감 있고 재미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