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블렌더 갖고 와 봐, 다 갈아버리게
올해에는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 온오프라인 강연을 많이 들으러 다녔다. 잠깐 책 읽기에 빠졌던 이유와 마찬가지로 강연 역시 실무적인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나아가 성공한 CEO, 인플루언서들이 가진 장점을 하나씩 배워가기 위해 열심히 참여했었다. 오늘은 그중 강연 내용이 가장 솔직해서 인상 깊었던 '비이커 (BEAKER)'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 참고로 본 글은 단순히 강연에 영감 받아 쓰게 된 주관적인 글이며, 강연 내용과는 일체 관련이 없습니다.
컬처 블렌딩 유니언이라는 말이 알 듯하면서도 생소하다. 나름의 해석을 해보자면 삼성물산은 비이커를 여러 가지 문화를 한곳에서 즐길 수 있는 브랜드로 만들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이는 비이커의 해외 멀티숍이라는 콘셉트 때문일 수도 있고, 회사명 앞자리에 붙은 삼성 네임 덕에 최대한 많은 영역에서 영향력을 뻗쳐야 한다는 강박 때문일 수도 있겠다. 제일 정확한 건 맨 처음 이 비전을 기획한 사람만이 알겠지만. 회사 공식 비전을 소개하는 페이지에 이 문구가 없는 걸 보니 어쩌면 이 비전은 생긴 지 얼마 안 됐을 수도 있겠다.
그러면 컬처 블렌딩 유니언이라는 문구를 분해해보자. 두 가지 생각이 든다. 비이커는 올드 컬처와 뉴 컬처를 결합하여 세대 통합을 하고 싶은 걸까? 아니면 법이나 예술처럼 성향이 다른 두 개의 영역을 섞어 아예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내고 싶은 걸까? 삼성물산이 기존에 갖고 있던 공식 미션에서 단서를 찾아봤다.
삼성물산이 내 건 패션 부문 비전은 Global Lifestyle Innovator다. Lifestyle을 파는 곳이지만, 동시에 Innovate도 해야 한다. 그런데 그걸 Global적으로 해야 한다. 내 짧은 식견으로 보건대, 어딜 가던 다 통하는 브랜드를 만들어야 한다는 게 그들의 소명인 듯하다. 어디서든 통하는 브랜드를 만들려면 정말 다양한 시도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내가 서울에서 순대 장사를 하는 사람이라고 치자. 서울은 순대를 소금에 찍어 먹는데, 부산에 지점을 내고 싶다면 소금 대신 쌈장을 사놓아야 할 수도 있다. 나아가 미국에 진출하고 싶다면 순대 냄새를 경계하는 외국인들을 위해서 순대의 내용물 자체를 개조해야 할 수도 있다. 이를 달리 말하면 '현지화(Localization)'라고 한다. 어느 나라를 가던 그 지역에 맞게 제품의 특성을 살리는 일이다.
다만 현지화와 비이커의 컬처 블렌딩은 결이 다르다. 현지화는 내가 그 지역에 맞추는 일이지만, 컬처 블렌딩은 시장이 나를 따라오도록 현지화의 요소를 일부 활용한다. 이게 무슨 뜻일까? 일단 비이커는 멀티숍 브랜드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은 같은 한국에서 옷을 팔더라도 시장을 몇 개의 섹터로 구분한다. 비이커는 패션 장사를 하는 곳이다. 패션 시장은 개인의 성격만큼이나 다양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따라서 유로풍 옷을 좋아하는 소비자, 하이틴 옷을 좋아하는 소비자, 하이엔드 계열의 옷만 사 입는 소비자들처럼 타깃 고객을 여러 개로 세그먼트 한 뒤, 각 타깃 시장을 공략한다. 유로풍, 하이틴, 하이엔드 이 세 가지는 각기 다른 장르이지만, 비이커가 판매하는 상품을 잘 살펴보면 결국 그들만의 일관된 코드가 드러난다. 이는 제품 콘셉트에서 드러날 수도 있고, 가격에서 드러날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제품 콘셉트와 가격들은 소비자가 비이커에 맞춰줘야 하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소비자가 브랜드에 맞추는 일은 어찌 가능할까? 시장을 교육하면 가능하다. 비이커는 엄청난 자본과 기획력을 바탕으로 '우리 브랜드가 당신과 맞다'라고 시장을 지속적으로 교육한다. 옷만으로는 부족하다. 비이커는 약간 색다른 방식으로 고객을 끌어들인다. 컬처 블렌딩 유니언의 기원은 사실 이 지점에 있다.
그렇다면 비이커가 실행하는 차별화 전략은 어떤 걸까? 현지화의 요소를 쓴다는 건, 비이커가 메이커의 옷을 개조해서 매장에 들이고 있다는 뜻일까? 우선 비이커는 제품을 현지화하지 않는다. 애초에 해외 하이엔드 제품을 바잉 해오는 곳이고, (행사성이면 모를까) 의류를 특정 지역에만 개선해서 팔기란 쉽지 않다. 검색창에 컬처 블렌딩 유니언을 쳐보면 부연 설명이 나온다. 관계자의 말에 의하면 뭐시기 블렌딩은 '패션을 넘어 문화를 만들어내는 플랫폼'이라고 한다. 오케이, 컬처 블렌딩 유니언은 정신이 아니라 플랫폼이었다. 그럼 비이커는 공간에 차별화를 둘 것 같다.
다시 삼성물산 공식 비전으로 돌아가 보자. '패션의 의미를 문화, 예술까지 확장'한다는 문구가 있다. 좀 더 현실적으로 풀어보자. 패션은 비이커의 사업 아이템이고, 아이템이 의미를 가지려면 팔려야 한다. 따라서 '패션의 의미'는 제품 매출이다. 문화와 예술은 말 그대로 문화산업, 예술산업을 뜻할 것이다. 확장은 맥락 상 유통 확장으로 보인다. 그럼 결과적으로 '우리 매출을 문화, 예술 산업에서도 끌어올게'라는 뜻이 된다. 자, 그럼 지금까지 정의해 온 컬처 블렌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보자.
What is 'Culture Blending'?
1. 두 가지 이상의 다른 성향이 결합된 것
2. 세부 시장의 니즈에 응답하는 것 (현지화적 요소)
3. 패션을 다른 산업 소비자에게도 노출시키는 것 (유통 확장)
위 세 가지를 모두 상통하는 비이커의 차별화 전략은 바로 '컬래버레이션'이다. 좀 더 쉽게 말하면, 비이커는 마케팅에 과감한 브랜드다. 실제로 지난 비이커의 기사를 찾아보면, 유명 아티스트들과 협업한 사례가 굉장히 많다. 회사 내 연령대가 어디까지 포진되어 있는지, 연령별 비중은 어느 정도인지까지는 알 수 없지만 젊은 마니아들이 열광할만한 아티스트만 데려다 콜라보한 것도 참 신기하다. 맨파워가 있는 기업이라 그런가, 바잉 능력뿐 아니라 리서치 능력도 철저한가 보다. 또 온라인 이커머스를 중심으로 매출을 잡는 중소기업과 달리, 협업 목적으로 팝업 스토어를 다수 여는 등 매장 투자에도 돈을 아끼지 않는 부분이 경이롭고 마음에 든다. (실제 경영진들 반응은 어떨지 모르겠으나). 이 부분이 앞서 그들의 자본력과 기획력에 감탄을 보낸 이유다. 정말 말 그대로 타 중소 경쟁사들 갈려버리게 만드는 부분이 없지 않ㅇ ㅏ ㅇ...
아래에는 비이커가 협업한 사례들을 몇 가지 갖고 와봤다. 지금까지 글이 너무 많았으니 잠깐 감상 타임을 갖자.
쓰다 보니 사진도 구구절절 시끄러워졌다. 반성한다...
나중에 시간이 남으면 비이커가 실제로 파는 상품 사례를 들고 와서 분석해보는 방향도 재밌겠다. 브랜드가 하도 많아 상품을 일일이 연구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게 단점이다.
이만 글을 줄이기 전에, 오늘 글을 써보면서 한 가지 깨달은 사실이 있다. 고객의 입장이었을 때는 시장에는 항상 제품을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만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실제로 직장 생활을 해보고, 여러 거래선들을 만나보고 나니 제품을 사고 또 그 제품을 다시 파는 중간상이 아주 많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 사람들은 자신이 그 제품을 만든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열정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팔까?' 하는 궁금증을 올해 항상 품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효과적인 바잉은 훌륭한 사업가를 만든다. 대기업에서 태어난 비이커라는 브랜드의 사례를 보고 나서야 다양한 플레이어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 뭐든 다양한 게 재밌다. 피할 수 없다면 다 섞어보자, 비이커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