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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유인 May 13. 2024

하루가 망하는 패턴

하루가 망해가는 과정을 그려보겠다. 우선 망하는 날은 대게 주말이나 휴일인 경우가 많다. 충분한 자기 시간이 주어지고 해야 할 일이 평소보다 극히 적을 때, 하루가 망하는 필요조건이 충족된다. 평소처럼 학교나 직장을 가고, 다른 실무적인 일을 처리해야 할 때면 해야 할 일에 정신이 팔려 무언가 망할 틈도 없다. 그래서 바쁘면 망할 일이 없는 것이다. 하루가 망하려면 충분한 시간과 여유가 있어야 한다. 하루가 망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주어진 자유 시간을 허투루 날려버리는 데 있기 때문이다. 부과된 의무가 없고 특별한 계획이 없을 때, 하루가 망하는 조건이 무르익게 된다.     


사람마다 하루가 망하는 과정은 제각각 다르다. 나의 경우는 눈의 피로감, 건조함이 하루가 망하는 주원인이다. 귀중한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지 못하게 가로막는 최대 장애물이 바로 이것이다. 눈의 문제에 빠지면 곧바로 늪에 빠지게 된다. 그것은 낭비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다. 눈이 피로하니 밖에 나가기를 꺼리게 된다. 도서관이나 카페를 가 봐야 눈이 피로해 제대로 집중도 못 할 텐데 차라리 집에 있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나가지 않고 대게 집에 있는다. 가장 안전한 공간에서 자유롭게 눈을 컨트롤 해 가면서 할 일을 하는 게 오히려 효율적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밖에서는 눈을 의지대로 관리할 수 없다. 언제나 제약이 뒤따른다. 그러나 집에서는 의지에 따라 관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누워서 눈을 감는다든가 하는 행위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 그래서 눈이 피로하다는 느낌이 들면 나가지 않고 보통 집에 있는다.     


여기서 문제는 집에 있으면 기강이 해이해지고 몸이 늘어지게 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럴까. 약간의 우울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내 눈은 다른 누구의 것보다 예민하다. 나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감각이 짐승처럼 둔했던 어릴 시절에도 자각이 됐을 정도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평균의 사람처럼 다뤄지면 안 된다. 눈에 한해서는, 그것보다 훨씬 섬세하게 다뤄져야 한다. 그런 이유로 비효율과 우울을 초래하는데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부턴가 외출을 기피하게 됐다. 외출을 하면 자연 바람, 실내 에어컨 바람에 눈이 건조해질 테고, 강한 햇볕에 눈이 금세 피로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집에 있는 지금도 눈이 피로한 것 같은데, 여기서 외출을 해 봐야 아무것도 못 한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느낌’에 근거한다. 그러니까 눈이 피로해서 집에 머물겠다고 결심해도, 그게 사실은 집에 있을 만큼 심각한 정도는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안락함 속 몸을 파묻고 싶은 충동을 이겨내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하루치의 잉여가 주어진다면, 나는 시간을 최대한 잘 활용하고, 할 수 있는 한 많은 일을 하고 싶다. 그런데 밖을 나가지 않고 집에 있으면 그게 쉽지 않다. 조금만 책을 읽어도, 영상을 봐도, 신문을 읽어도 눈이 피로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고, 피로해진 눈을 달래기 위해 궁극적으로 수면을 취하기 때문이다. 물론 처음부터 잘 생각으로 그런 것은 아니다. 시작은 누워서 눈을 감는 것으로 시작한다. 몇 분만 눈을 감고, 눈에 충분한 휴식을 주자는 마음이다. 그렇지만 대게는 여기서 수면으로 이어진다. 당연한 이치다.     

자고 일어나면 초침 2~3개가 지나가 있고, 정신을 차리는 데 시간이 든다. 그러다가 우물쭈물 할 일을 하려고 보면 벌써 늦은 밤시간이다. 이때 친구가 전화라도 온다면 오늘 하루는 제대로 허탕인 것이다. 그나마 겨우 확보한 또렷한 안구, 명랑한 정신이 친구를 위해, 우리의 대화를 위해 고스란히 소모되기 때문이다. 통화가 끝나면 기다렸다는 듯 우울감과 자괴감이 엄습해 온다. 하지만 친구 전화가 굳이 오지 않더라도 이야기 전개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자고 일어나니, 어 늦은 밤이네? 정신은 명랑하고. 에라 모르겠다 그냥 재밌는 거나 좀 보다가 자자. 할 일은 내일 하면 되지 뭐. 그렇게 늦새벽까지 재미난 영상을 찾아다니며, 기력이 소모할 때까지 희희덕거리다가 다시 잠에 든다. 문자 그대로 망한 하루다.     


물론 눈의 피로를 씻어버리기 위해 취했던 수면이 옳은 행위며, 합리적인 선택일 수도 있다. 다시 말해, 나는 의학적으로 눈이 심각한 수준으로 피로했고, 그래서 수면이 절실했을 수도 있다. 그게 사실이라면 나는 인체의 정당한 요구에 성실히 답한 것일 뿐이다. 나에게 나태함의 죄를 물을 수는 없다. 그런데 가장 큰 비극은 그 행위가 정당했는지 게으름을 피운 것인지 영원히 알 수 없다는 데 있다. 왜냐하면 인체의 불편함은 어디까지나 나 개인의 주관적인 느낌에 호소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감각하는 주체인 나조차도 그 느낌이라고 하는 것이 모호하다. 그래서 객관성은 담보되지 않고 그 누구도 진정성을 알아줄 수 없다. 고통의 심각성, 진정성을 수치화라도 시킬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여기서 누군가는 의문을 가질 것이다.

‘의사한테 물어보면 되잖아. 의사가 하라는 대로 하면 되잖아’     


물론 의사는 일반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객관성을 담보하고 있다. 그렇지만 환자 마음속에서 의사 권위가 실추되는 것은 한순간이다. 내 담당 의사가 그랬다. 내가 의사에게 말했던 일상적 불편을 간단히 서술해 보겠다.


나는 건조한 바람이 불거나, 햇빛이 강하면 거의 눈을 감고 걸어 다닌다. 바람은 눈을 건조하게 하고, 햇볕은 눈을 피로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할 수 있는 한 눈을 감는 게 가장 좋다. 그게 눈을 보호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그래서 때때로 눈을 감고 걸어 다닌다. 물론 그럴 때는 안전을 위해 눈을 떠서 사람과 자동차가 어디에 얼마나 있는지 주기적으로 체크해야 한다. 꾸준히 동선 확인도 해야 한다. 화창한 날에는 되도록 선글라스를 끼는 편이다. 학교를 갈 때도, 달리기를 할 때도 선글라스를 착용한다. 학교 사람들이 관종으로 봐도 할 수 없다.

불편이 타인의 시선을 능가하고도 남았기 때문이다.

말로 들으면 심각해 보이지만, 막상 눈 감고 걷는 것도 하다 보면 요령이 생기고, 선글라스 착용도 별것 아니다. 이런 심각성으로 나는 올해 초부터 ipl치료를 받게 되었다. 참고로 ipl은 안구건조증이 심각한 사람이 받는 시술이다.


이에 대해 의사는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내 의사는 표정을 수습하고 해결책을 내놓았다. 그것은 네이버 블로그에서 5분이면 찾을 수 있는 “안구건조증에 도움 되는 꿀팁” 정도의 얘기였다. 네이버 꿀팁을 설명하며 의사는 '어떻게 그렇게 심할 수 있지?'라는 투로 당혹감을 숨기지 못했다.

‘이 의사는 안구건조증을 모른다’

이 강렬한 한 문장이 가슴속에 아로새겨졌다. ‘다른 건 기대도 안 하니 ipl시술이나 똑바로 해라’는 절박함만 남았다. 의사의 권위는 나뭇가지에 매달린 마지막 잎새처럼 ipl시술 하나로 겨우 버티고 있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결과적으로 내 증상은 고스란히 나만의 문제가 되었다. 의사가 도움이 되지 않는 상황이라면 그 환자는 혼자라고 봐도 무방하다. 의사에게 물어볼 수 없다면 자기 자신한테 물어보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내 감각에 의존하게 된 것이다. 그 무엇보다도 주관적일 내 감각.     


그렇게 되니 부작용이 생겼다. 앞서 말했다시피, 매끄럽게 하루를 망치게 되는 것이다. 전쟁으로 치면 적이 쳐들어오기도 전에 성문을 활짝 열어놓는 셈이다. 눈이 피로하다고 “느끼”니까 집에 있게 되고, 잠을 자게 되고, 시간 패턴이 박살이 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느낌은 정당성을 가지고 있을까? 아니면 사소한 자극을 크게 부풀려서 받아들인 것일까? 영원히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가장 걱정인 것은 눈이 피로해 잠에 드는 치역이 점점 낮아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점이다. 사소한 자극에 금세 자버리는 게 일상이 되면 나는 금세 일상생활이 불가해질 것이다. 물론 이것 역시 알 수 없다. 사소한 자극 때문이 아니라 정말로 필요해서 잔 것일 수도 있으니깐.


영국 철학자 오컴이 떠오른다. 모든 것이 불명확하고 온갖 가설이 교차하며 뒤엉켜있을 때, 그는 불필요한 가설을 최대한 줄일 것을 요구했다. 마치 청소를 하듯, 군더더기 가설을 쓸어내어 복잡한 상황을 최대한 단순하게 만들 것을 강조했다. 그에 따르면, 불필요한 가지를 쳐내고 현 상황을 관통하는 핵심만을 남겨둬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기정사실로 둔 다음, 연역적 추론을 통해 논리적인 사유를 이어가야 한다. 이 과정에서 진실은 한꺼풀 벗겨지고, 상황은 더욱 명료하게 드러나게 된다. 복잡한 상황의 단순화.

 오컴이 외쳤던 건 어쩌면 이 한마디인지도 모른다.     


내게 가장 불필요하고 의미 없는 가설은 무엇일까. 내 눈의 상태다. 눈 상태가 심각해서 잠을 자는 것인가 아니면 눈 상태가 심각하지 않은데 핑계를 대고 잠을 자는 것인가. 이것은 영원히 알아낼 수 없다. 주관성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버린다. 의미 없는 가설이자 문장이다. 눈의 심각성이 어느 정도건 정확한 사실을 알아낼 수 없는 한, 이 가설은 쓰레기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내 상황의 핵심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무엇일까. 또한 가설의 근본을 형성할 대전제는 무엇일까.      

대전제는 ‘눈은 언제나 피로하다’로 도출될 수 있을 것이다. 집에 있든, 밖에 나가든 내가 하는 모든 결정이 눈이 피로하다는 것을 전제로 두고 일어나기 때문이다.

키워드는 눈의 피로감과 시간 낭비다. 어느 수준으로 피로한 지는 알 수 없다. 심각할 수도 있고 경미할 수도 있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이제 오컴의 도움을 받을 차례다.     

대전제: 눈은 언제나 피로하다. (그 정도는 알 수 없음)     


1. 집에 있으면 자다가 하루를 날리게 된다. (언제나 눈은 피로하니깐)     

2. 눈이 ‘적당한 수준으로’ 피로하면 밖을 나가도 생산성 있게 일을 할 수 있다.     

3. 눈이 ‘심각한 수준으로’ 피로하면 밖을 나가도 시간을 버리게 된다.


정답은 나왔다. 눈이 어떻든 밖을 나가야 한다. 어쨌거나 집에 있으면 하루가 망할 확률이 월등히 높아지고 밖을 나가면, 무식하게 말해서 50퍼센트는 성공 확률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내 건강을 중점에 두고 세운 가설이 아닌, ‘일의 생산성’을 중점에 두고 세웠다. 가설은 어떤 가치에 중점을 두느냐에 따라 기울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이 가설로 말미암은 결론으로 결과적으로 건강에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 역시 가능성의 영역에 있다. 확정 지을 수 없다. 만약 그렇게 해서 건강에 위해가 되고 내가 그것을 감각하게 된다면, 그때 가서 가설을 바꾸고 새로운 결론을 도출하면 될 일이다.      


글로 적으면 간단한 가설과 결론. 여태 내가 모르고 있었을까? 내가 알고 있었는지 모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확실한 건 글로써, 논리로써 상황을 들춰내 보니 상황이 더욱 명징하게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어찌 됐든 나는 내 상황에 대한 정확한 인지 없이 그냥 될 대로 살았던 것 같다. 느낌에 근거해서 눈이 피로하면 집에 있었고, 조금만 견디기 힘들다 싶으면 그냥 잤다. 이젠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오컴 형님의 면도날로 내 상황을 조목조목 해부해 봤으니 말이다. 이제는 어느 정도 상황 인지가 됐다. 어떻게 해야 가장 효율적인지 결론 역시 도출되었다.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허망하지만 이게 결론이다. 그렇지만 가장 정직한 결론이다. 누군가 이렇게 말했던 게 생각난다.

논리학의 미덕은 그 무엇보다 단순성에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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