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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이고 나서 춤은 더 멋지게

by 자유인

지금으로부터 2년 전 처음으로 혼자 해외여행을 떠났다. 대학생 백수 처지에 경제적 여유도 없고, 해외 경험이랄 것도 딱히 없었던지라 멀리 나가는 것 자체가 부담이었다. 그래서 한국인에게 여행하기 가장 만만한 나라 일본, 그중에서도 도쿄를 선택했다.


당시엔 친분을 맺어오던 많은 사람들과 인연이 끊겼다. 그 이유를 아는 경우도 있었지만 짐작조차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내 잘못으로 관계가 깨지고, 상호 묵시적 합의 하에 멀어진 경우는 이유가 명백했다. 하지만 이유도 들어보지 못한 채 상대가 말도 없이 떠난 경우도 있었다.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에서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고등학교 때 가장 친하게 지낸 친구들이 이유도 알려주지 않은 채 주인공에게 절교를 통보한다. 공들여 지켜온 완전체 관계는 허망하게 깨지고, 주인공은 18년이 흐른 후에야 절교의 이유를 들어보기 위해 오래전 친구들을 만나러 떠난다.


하루키 소설에서 주인공은 옛 친구들을 찾아 떠났지만, 나는 무엇을 찾겠다는 목적의식 없이 도쿄로 떠났다. 여행을 하는 동안 노엘의 신규 앨범 [TRIPONOEL]에 수록된 몇몇 곡을 계속 돌려 들었다. 앨범 표지만 봐도 어떤 분위기의 앨범인지 한눈에 알 수 있다. 검정과 다크블루 배경에 SUICIDE가 커다랗게 쓰인 관이 있고, 관을 벗어나려는 듯 안쪽에서 삐죽 튀어나온 손이 보인다. 그 손은 무척이나 처절해 보인다. 일주일 도쿄 여행에 이 노래가 차지한 비중을 생각하면 나는 꽤나 우울한 상태였던 것 같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여기에 수록된 곡들은 도쿄라는 도시와 잘 어울린다. 파편화된 익명의 어둠, 그것들의 집합이 도쿄라는 도시를 구성한다면 이 앨범은 분명 그와 깊은 관련이 있다. 밴드 사운드가 베이스라 유행하는 일본 노래와 이질감도 크게 없다. 앨범 수록곡 중에서 특히 9번 트랙 <내가 사라진다면>을 많이 돌려 들었다.


NO:EL(노엘) - TRIPONOEL


내가 사라진다면 먼지처럼
너무 슬퍼하지는 마요
내가 사라진다면 잿더미처럼
너무 그리워하지도 마요


일주일 간 이 가사가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각기 다른 이유로 내 인생에서 사라졌다. 광장 안에 있던 사람들은 다같이 약속이라도 한 듯 비슷한 시간에 짐을 싸고 떠났다. 시끌벅적하던 광장은 과거의 빛깔을 잃은 옛 도시처럼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떠난 사람들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나는 이제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더는 광장을 돌아다닐 필요가 없어졌다. 그냥 혼자, 가만히 있으면 된다. 두 발만 지탱할 수 있는 좁은 공간만이 내게 남았다. 앞으로 어떻게 하지? 여행하는 동안 내내 생각했다.

생각은 글로 옮겨졌다. 혼자 가는 여행이고, 여행 계획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붕 뜨는 시간에 글을 적기 위해 작은 노트를 하나 챙겨갔다. 내가 품고 있던 어둠은 문장이 되어 한 줄씩 노트를 채웠다. 그것은 하나의 방파제가 되어 어둠이 지나치게 나를 잠식하는 것을 막아주었다. 물론 그렇다고 어두운 주제만 적은 것은 아니다. 식당 알바생이 버릇없이 군 것, 신주쿠 공원 풍경, 우연히 들린 맥줏집 후기 등 주제를 국한하지 않고 다양하게 적었다.


여행지에서 글쓰기는 추천할만하다. 계속 돌아다니기 다리 아프고, 낮에는 햇볕이 쨍쨍해 덥다. 그럴 때 글쓰기의 시간이 무르익는다. 아무 카페나 들어가는 것이다. 시간도 잘 가고, 나처럼 손으로 쓴다면 평생 실물로써 기록물이 남는다. 그림이 익숙하다면 그림을 그려도 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세 살 수준의 그림 실력을 가진 나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여행을 한 지 그로부터 2년이 지난 지금, 오랜만에 그때 사용했던 노트를 다시 들춰보았다. 몇 문장만 읽어도 당시 있었던 일들이 놀랍도록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당시 떠안고 있던 구체적인 고민, 여행지에서 있었던 소소한 일들, 잊고 있던 사람들의 그립지 않은 이름들이 당연하다는 듯 적혀있었다. 글쓰기는 음악에 이은 또 다른 타임머신이 된다. 2년 전 도쿄를 여행하던 과거의 나에게 감사했다. 어마어마하게 중요한 개인적 기록물을 별생각 없이 남겨준 것에 대해서!


귀국을 하루 앞두고, 항구도시로 유명한 요코하마를 갔다. 나는 요코하마역에서 내려 10분 동안 걸었던 그 여정을 잊지 못한다. 이것도 음악과 관련이 있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갑자기 스윙스의 그 노래가 듣고 싶어졌다. 그 노래는 바로

Upgrade IISwings (스윙스)


Swings- 지금부터 잘하면 돼 (feat. Tyra)


요코하마의 바다가 언뜻 보이는 다리 위에서, 노래 후렴구가 귀에 꽂혔다. 구름은 솜사탕처럼 새하얗게 뭉글뭉글했고, 소금기 섞인 바닷바람은 한없이 청량했다. 노래를 듣고 울컥한 게 얼마 만이었을까. 번개라도 맞은 것처럼 전체 가사를 바로 확인했다. 가사를 보니 더 마음이 울렸다. 특히 3절의 가사가.


2010년 시드니. 리처드 형
울던 나에게 말해 "지금부터 잘하면 돼"
인생과 춤을 출 때, 스텝이 안 맞을 때
자빠진 너, 그래 지금부터 잘하면 돼
믿기 어렵지만 그래 나는 예수님을 믿어
가끔 내 행동들을 역사에서 지우고 싶어
하지만 그건 불가능해
어쩌겠어 친구야 그냥 지금부터 잘하면 돼
내가 되고 싶은 사람? 돈도 많은 사람,
복도 많은 사람, 또 용서 많은 사람
난 죄를 많이 지은 만큼 용설 많이 받아
성격상 더 짓겠지, 받을 용선 아직 많아


2010년 시드니에서 스윙스, 2023년 도쿄에서 나에게는 이 말이 필요했다.


"지금부터 잘하면 돼"


가사는 이어진다. 인생과 춤을 출 때, 스텝이 안 맞아 자빠질 때, 지금부터 다시 잘하면 된다고.


안 힘든 사람은 없지 babe
꼬이고 난 후 춤은 더 멋지게 la la la la la


쌓아온 모든 것을 스스로 망쳐버렸다는 자책 속에 살아가던 당시, 꼬일 대로 인생이 꼬였으니 오히려 더 멋지게 춤을 출 수 있다는 메시지는 위로를 넘어 생각의 지침이 되었다. 지금도 힘들 때는 이 노래를 듣곤 한다. 꼬였기 때문에 더 멋지게 춤을 출 수 있다는, 그 아름다운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면서.


PS. 이 노래를 들을 거라면 인트로 맨트 없이 바로 노래가 시작하는, Upgrade II 빨간색 앨범 표지에 수록된 노래를 듣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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