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나오코와 그의 봄
달, 그림자 5회 등장인물
1. 나오코-미네코의 친딸로서 타다요시의 의붓딸, 하즈키와 의붓남매
2. 미네코-나오코의 친모, 타다요시의 아내
3. 하즈키-타다요시의 아들
4. 치호- 등이 굽은 나오코의 친구
새 학기를 맞춰 전학을 온 나오코는
두 달이라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학교를 가는 이른 아침마다 성장이 빠른 청소년기에 입는 교복은
왜 크게 입어야 하냐며 불평을 쏟아 냈고, 일부러 늑장을 부리곤 했다.
더 이해되지 않은 것은 미네코가 사들인 신발이다.
마치 공주병이라도 걸린 사람처럼 신발은 모두 그러했다.
무엇을 어떻게 해도 눈에 띌 수밖에 없는 모양에 나오코는 선뜻 밖으로 발을 내딛기가 힘들었다.
요즘 나오코의 큰 고민은
갑자기 자신에게 엄마의 역할을 완벽하게 해 내려는 미네코를 보고,
언젠가는 엄마를 용서해 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어른이 되면 셜록홈스 같은 명탐정이 되어 죄를 밝힐 거란 생각은 어쩌면 무용지물이 될 지경이다.
미네코의 얼굴은 점점 더 착한 엄마의 얼굴이 되어 하즈키뿐,
아니라 나오코의 마음도 약하게 만들었다.
어찌 보면 미네코는 지금 정말 행복한지도 모를 일이다.
나오코는 광이 번쩍거리는 새 신발을 꺾어 신더니,
집 안 뒤뜰로 재빨리 뛰었다.
미네코가 보지 않은 틈을 타 신발에 온갖 흙을 칠하고 묻어 두었던
쥐, 시체를 꾹꾹 밟았다.
자신만의 신에게 기도하는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침마다 늑장을 부리던 나오코는
학교를 마치는 시간이 되면 누구보다 더 재빠르게 학교를 빠져나왔지만,
오늘은 그 길이 그리 반갑지 않다.
처음 쥐꼬리를 잘라 미네코의 가방 안에 넣었을 때,
미네코는 그런 나오코를 모른 척했으며 절대 무서워하거나,
놀라거나 하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아마도 미네코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나오코는 자신의 계획이 성공을 거뒀다며 엄청난 계획을 또 세웠을 게 뻔했다.
하지만 역시 나오코는 그녀의 술수에 넘어가는 법이 없다.
미네코의 무반응에 나오코는 더욱 열심히 큰 쥐만을 골라잡았고,
계획을 좀 더 치밀하게 세웠다.
몇 번의 시도 끝에 미네코는 몸이 뒤로 자빠지며,
경기하며 놀라고 만 것이다.
요즘 들어 온화해진 그녀의 행동을 생각해 보니,
약간의 미안함이 들긴 했지만, 아빠를 죽인 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번 시도에는 미네코의 수명이
적어도 일 년은 단축되었다는 건 분명할 것이라며 의심치 않았다.
나오코는 자신의 목표에 도달하기엔 티끌조차도 되지 못했지만,
그것만으로도 만족하려 애써 보았다.
아침에 보았던 정말 착한 엄마의 얼굴을 한 미네코 때문에
양심이라는 작은 방이 생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위축된 마음을 안정시키며 미네코를 마주할 용기를 내보려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고개를 숙이고 달리려던 순간
어디선가 딱딱한 것이 날아와 그녀의 이마를 명중시켰다.
작은 돌멩이 몇 알이 바닥에 떨어졌고 그중 하나가 이마를 불쑥, 나오게 했다.
“아얏.”
새 학기가 시작되면서 눈에 띄는 남학생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언제나 세 명이 딱 붙어 몰려다녔으며
그녀와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자기들끼리 이죽거리는 것을 몇 번 목격했었다.
나오코 옆자리에 앉아 그녀보다 더 친구가 없을 것 같은
치호라는 여자아이가 첫날 경고의 메시지를 전해준 적이 있었다.
“너 새로 이사 왔지? 조심해야 할 거야, 쟤들 말이야.”
치호는 그들을 가리키며 열심히 설명했지만
나오코는 난쟁이 같은 몸을 가진 치호가 더 걱정되었다.
물론 자신 또한 큰 키는 아니지만, 걱정할 만큼의 체구는 아니었다.
치호의 말 그대로 나오코의 이마를 타격한 돌은 그들 소행이다.
벌써 세 번째 일어나는 일이었고,
나오코 나름의 용서할 수 있는 셈법은 딱 두 번, 아주 너그러운 처사였다.
나오코는 떨어진 돌멩이 딱, 하나를 손에 쥐었다.
그들 중 둘은 자전거를 타고 벌써 달아나고 있었고,
뒤따라가는 나머지 한 명은 뛰는 듯했지만, 나오코의 발보다는 못하다.
재빨리 따라잡은 뒤, 못 돼먹은 남학생 앞을 저돌적으로 막아섰다.
적지 않게 당황한 아이가 또다시 이죽거렸고
알 수 없는 언어로 나오코를 비아냥거렸다.
남학생이 손을 내 저었다.
“아, 나, 나, 나는 아니야, 아니라고.”
나오코는 주먹을 불끈 쥐고 입을 열었다.
“이유가 뭐야?”
뒷걸음질 치는 남학생의 옷깃을 잡아끌었다.
“나는 아니라고, 내가 던진 게 아니야, 진짜야.”
“그래? 그럼, 넌 아니야 그럼 걔들 이유가 뭐야?”
“그, 그건...”
나오코는 뒤돌아서서 가는 듯, 하더니
몇 걸음 앞서 걷다가 거리를 재고 손에 쥔 돌멩이를 온 힘을 다해 던졌다.
남학생의 목소리치고는 굉장히 가늘고 약한 외마디 소리다.
“우이이이 이 악.”
역시 돌을 던질 때는 중거리에서 명중시키는 게 가장 아프다.
남학생은 주저앉아 자지러졌고,
걸음에 점점 속도를 내어 달릴 때까지도 남학생의 외마디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멈추지 않고 달렸다.
자꾸 나오려는 눈물을 꾸역꾸역 참아 내느라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었다.
마치 철을 질겅거릴 수만 있다면 그때 맛볼 만한 피비린내였을 것이다.
드디어 학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졌다.
희미한 학교를 등 뒤로 확인하더니 작은 발도 느려졌다.
그제야 숨이 턱 밑까지 차올랐다.
“헉, 헉 헉 하악, 후...”
두 개의 갈림길에서 한참을 고민하다
미네코를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는지 다른 길을 선택했다.
분명 현관문 앞에서 팔짱을 끼고 나오코를 기다리고 있을 게 뻔했다.
눈물이 흐르지 않도록 이를 악물고 침을 꿀꺽,
삼켜봐도 목울대가 자꾸 아래위로 일렁일렁 움직인다.
눈물은 그녀의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 중 하나이다.
이번 학교는 괜찮을 줄 알았다.
동급생들은 자신이 갖고 있는 비밀을 절대 알 수 없을 거라 믿었다.
비밀은 자신만 알고 있었고,
다니던 학교의 누군가가 전학을 오지 않은 이상 그런 일은 없을 테니 말이다.
나오코는 놀림거리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며칠 째 이런 일이 반복된다는 게 의심스러웠다.
전에 다니던 학교생활에 대해 기억을 잃어버렸다고 해도 좋을 만큼
거의 모든 기억을 지워버렸다.
그때의 미네코는 정상적인 엄마의 역할을 할 수 없는 상태였고,
당연히 나오코는 좋지 않은 쪽으로 눈에 띄는 아이였다.
학교에서 불리는 도둑이라는 별명이 나오코의 잘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던 미네코였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신발은 거무죽죽,
일 년 내내 같은 신발을 신고 다녔고,
가방의 한쪽 끈은 떨어진 채 다니기 일쑤였다.
나오코는 한쪽 끈이 떨어진 가방을 들이대며
어렵게 미네코의 바느질을 받아 낼 수 있었지만,
그 또한 나오코가 조심스럽지 못한 탓으로 돌려댔다.
느슨하고 꼼꼼함이 없는 바느질은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또 떨어져 버렸고,
나오코는 가방의 한쪽 끈으로만 어깨에 매달고 다녔다.
나오코는 잘못한 게 없어도 잘못한 게 많다, 고 생각하는
미네코에게 바느질을 부탁할 수 없었다.
한쪽 어깨로만 가방을 메고 집 안에 들어오면
일부러 가방을 안고 들어갔던 건,
그때까지만 해도 사랑하고 싶었던 엄마에 대한 배려였다.
하지만 미네코는 지금까지도 그 의미를 알고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학교에서 나오코의 귀는 들리지 않았고,
눈은 보이지 않았으며 입은 말 하지 않았다.
기대와 다르게 소녀가 상상해 왔던 첫 천국에서의 삶도 그리 너그럽지 않을 듯하다.
귀를 열고 눈과 입을 활짝 벌리고 싶지만,
그녀에 대한 비밀을 동급생들이 알고 있는 것만 같아 다시 또 후들후들 다리가 떨렸다.
하즈키의 나무는 나오코를 반기며 봄바람에 기분이 좋아 살랑거리며 파릇파릇했다.
나오코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려 뺨을 간질이며 뽀얀 파우더 향을 날려 보낸다.
“하즈키가 좋아하는 나이 많은 나무, 안녕.”
나오코는 나무 앞에 허리를 깍듯이 굽힌다.
눈을 감고 나지막하게 들려올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오랫동안 들어 보지 못했던 친절함이 가득한 아빠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웃기지 않아도 웃으면 즐거워져, 나오코 자 봐, 하하하.”
나오코는 눈물을 훔치더니,
눈을 커다랗게 뜨고 씩, 웃어 보았다.
입안은 아직도 쇳덩이를 씹고 있는 맛이 났고,
퉁퉁 부은 얼굴은 복숭아 껍질을 비벼 댄 것처럼 따가웠다.
작은 인기척에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는지 유난히 키가 작고 등이 약간 굽은 치호와 눈이 마주쳤다.
“앗, 깜짝이야.”
치호가 다가왔다.
“일부러 놀라게 하려던 건, 아니야.”
“언제부터 따라왔어?”
눈썹을 늘어뜨리는 것을 보니 처음부터가 확실했다.
나오코는 자존심을 회복하는 것을 재빨리 포기했다.
치호가 짧은 팔을 내밀더니 살색 밴드를 건넸다.
“받아, 이마에 상처가 났어.”
그제야 자기의 이마를 만져 보았다.
손을 갖다 대자마자 쓰라림이 어떤 통증이었는지 깨달았다.
“고마워 잘 쓸게.”
치호는 이때다 싶었는지 속사포처럼 말을 계속 내뱉었다.
“걔들 말이야 이대로 넘어가진 않을 거야
뭐, 나처럼 피하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긴 한데...
네가 한 방법은 속은 후련하겠지만, 옳은 선택은 아닌 것 같아서...
걔들은 꼭, 다른 상대가 나타나야 멈추거든,
그 덕에 내가 며칠 학교 다니는 게 편했지만
나도 너처럼 이사 온 지 얼마 안 됐지
뭐, 꼭 이사를 왔다, 는 것이 이유라기보단 난 너 보다 놀릴 거리가 워낙 많잖아?
앗, 참 괜찮아? 피가 맺혔어 이런... 미안
내가 말을 한번 하기 시작하면 워낙 놓치는 게 많아.”
나오코는 살색 밴드를 비스듬히 붙였다.
상처의 모양이 가늠되지 않은 터라 밴드 옆 사이로 붉은색이 살짝 삐져나왔다.
“밴드 고마워.”
치호는 삐져나온 붉은색이 맘에 들지 않았는지 나오코의 이마를 눈으로 계속 기웃거렸다.
“고맙긴. 그나저나 꽤 아프겠다.”
“눈에 보이는 상처는 상처가 아니야, 금방 사라지지.”
치호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으응?”
그때 치호는 아마도 그녀가 더한 상처도 입은 적이 있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치호의 눈은 무언가 대단한 것이라도 본 것처럼 나오코를 오랫동안 응시했다.
“집에 가?”
나오코는 정말 귀찮긴 했지만,
살색 밴드가 마음에 걸려 친절한 대답을 늘어놓아야만 했다.
“아니.”
“어디가?”
걸음이 빨라진 나오코의 뒤를 바싹 따르며 타닥타닥 소리를 냈다.
“너, 언제까지 따라올 거야?”
치호가 씩씩하게 답했다.
“이럴 땐 둘이 나아.”
치호가 매고 있는 가방은 세월을 얼마나 먹었는지
검은색에도 불구하고 반질반질한 때가 가득했다.
나오코는 예전 자기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함께 있는 것이 불편하고 창피했다.
밴드의 반질반질한 부분을 만지작거리며 아무 말 없이 걸었다.
치호는 그때부터 끝없이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여긴, 국숫집이네?”
“왜?”
치호가 뒤로 물러서며 멋쩍게 웃었다.
“깜박한 게 있어서, 내가 이렇게 건망증이 심하다니까
그럼 맛있게 먹고. 내일 보자.
아참, 그 상처는 꼭 연고를 발라야 덧나지 않아.”
짧고 앞으로 구부정한 체구로 뛰어가는 모습은 꼭 넘어질 듯,
불안해 보였지만 치호의 잰걸음은 굉장히 빨랐다.
나중에 치호가 고백하기로, 국수를 사 먹을 돈이 부족했다고 했다.
나오코는 고마움을 빚지는 일이 익숙하지 않아
국수로 고마움을 대신하려 했지만 치호는 몰랐다고 한다.
나오코는 그때 치호를 잡지 않고 보내 버린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국숫집 온기가 말간 콧물을 흐르게 해 연신 훌쩍거렸다.
“안녕하세요, 아주머니.”
여전히, 언제나 말이 없을 주인아주머니는 그녀를 금방 알아보더니,
가볍게 나오코에게 손짓했다.
아줌마가 끓여낸 멋없는 주전자의 보리차는 따뜻했다.
“하, 좋다.”
아주머니와 눈이 마주치며 함께 생긋거렸다.
하즈키와의 함께 다녀간 후로 거의 두 달만의 방문이지만,
말 없는 아주머니는 나오코를 잘도 알아본다.
반달 모양의 눈을 가진 아주머니는 더욱 굽은 반달을 만들어 내며 메밀국수를 내왔다.
이번엔 투박한 나무 그릇이 아닌
손톱으로 툭툭 쳐 내도 ‘댕’ 하는 소리가 날 것 같은 도자기 그릇이다.
어떤 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정말 바람이 불어 흩날리고 있는 모양의 꽃잎은
말 없는 아주머니가 설명해 주지 않아 더 신비스럽다.
“잘 먹겠습니다.”
나무젓가락이 그릇에 부딪힐 때마다 딱딱거리는 소리는
나무 그릇처럼 투박한 소리를 내지 않았다.
마치 따뜻한 국물에서 꽃향기가 나는 것 같다.
아주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가 후루룩, 거리며
면을 마시는 모습을 지긋이 지켜봐 주었다.
한 그릇을 뚝딱하고 비워 냈더니 일어나기가 싫다.
알 수 없는 꽃잎들을 넋이 나간 채 보고 있으니
나오코의 마음을 알기라고 한 것처럼 주전자를 그녀에게 기울였다.
따뜻한 차를 마실 시간을 벌었고,
아주머니가 손에 쥐어 준 알사탕을 깨물어 먹을 시간을 채웠다.
나오코는 사탕을 오도독 깨물고, 차를 마셨다.
사탕의 단맛을 보리차의 밍밍함이 쓸어내렸다.
다시 오도독 깨물고 차를 마신다.
아주머니의 주전자는 어느새 그녀 앞에 놓여 있었다.
주인아주머니의 눈은 여전히 비율이 적당한 반달 모양을 하고 있었다.
잡을 수 없는 시간은 역시 걷잡을 수 없이 저녁 시간을 훌쩍 넘어 버렸다.
꽤 오랫동안을 타다요시가 퇴근하는 시간을 맞추려 기다렸지만,
타다요시의 모습은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다.
발을 내딛기가 겁이 난다.
결국 시간만 끌다 진즉, 혼날 만큼의 양보다 더 혼이 나게 생겨 버렸다.
대문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저절로 열리더니
팔짱 낀 마녀가 서 있었다.
미네코 또한 바로 앞에 대기하고 있는 나오코를 발견하고 화들짝 놀란다.
아마도 쥐꼬리를 발견했을 때보다는 덜 했을 것이다.
나오코의 귀속으로 찢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얏, 너 당장 들어왓."
미네코는 분명 아랫니와 윗니를 앙다물며 말을 뱉었다.
말속에 온갖 힘이 가해지는 과정이 나오코의 눈에 훤했다.
잔뜩 기가 죽은 나오코는 찔끔찔끔 걸음을 옮기다가
다시 귀가 찢어질 듯한 찡, 한 소리를 들었다.
“히다 나오코오, 빨리 들어가지 못해?”
나오코는 자신이 히다라는 성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뇌리에 정확히 인식했다.
미네코가 닫는 소리는 역시 문을 부숴 댈 것 같은 소리다.
나오코는 가방도 채 내려놓지 못한 채 고개를 숙이고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는 중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엄마가 저지른 잘못에 비하면
자신이 한 짓은 혼이 날 만한 내용도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약간의 억울한 눈빛을 짓더니, 숙이기만 했던 고개를 비스듬히 올려보았다.
살기 돋친 미네코의 눈과 마주치고 말았다.
단 한 번 만에 용기가 사라지고 다시 고개를 바닥으로 내리깔았다.
미네코가 다다미 위에 앉는 소리가 들렸다.
“이리 와 앉아."
예상치 못한 엄마의 부드러워진 목소리에
대단한 일이 벌어질 것만 같은 불안감이 엄습했다.
나오코는 스스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허벅지 위에 나란히 올려놓았다.
“너 어디 다녀와?
너란 애는 말이야, 내가 먼저 묻기 전에 말하는 법이 없지?"
미네코가 딸에게 남을 대하듯 말하는 화법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친절하거나 부드러워지면, 나오코는 겁이 났다.
“미안, 다신 안 그럴게.”
미네코는 다신 안 그럴 게,라는 말을 좋아한다.
“어딜 갔다 왔냐고 물었어.”
엄마가 좋아하는 말이 먹혀들지 않을 때는 최대한 눈치를 잘 살펴야 한다.
생각해 보니 요즘 타다요시 아빠와의 관계가 좋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미네코의 화장은 더욱 진해져 있었고 향수 냄새 또한 코를 찔렀다.
죽은 아빠와의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할 때의 모습 같았다.
바깥에서 2층을 오르는 계단 소리가 챙챙, 들렸다.
12시가 넘어야 들리는 하즈키의 발소리가 오늘은 빠르다.
“대답하지 못해?”
“공원에...”
“혼자?”
“친구도 같이.”
친구라는 말에 미네코의 오른쪽 눈썹이 올라갔고
나오코를 힐끔거렸다.
나오코는 말을 계속 이어가야 한다.
“또, 국수도 먹었어.”
미네코가 일어섰다.
갑자기 슬리퍼가 다가오더니 나오코의 정강이를 툭툭 건드렸다.
“집에 들어올 것이지, 왜 집 앞을 서성이는 거야?”
“아빠 기다렸어.”
“이 시간에?”
“아빠가 오실 시간이라...”
미네코의 눈동자가 희번덕거렸다.
다시 나오코의 정강이를 세게 건드렸다.
슬리퍼의 앞 코는 굉장히 단단한 고무로 되어 있었다.
“아얏.”
“아파?”
“엄마 다신 안 그럴게.”
“네가 선물로 준 괴상한 것이 대체 뭐야?”
역시 미네코는 쥐꼬리에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미네코의 얼굴이다.
인내심에 한계가 오고 말았다.
나오코의 예상이 적중했고,
은근히 피어오르는 성취감 뒤로 두려움을 감출 수는 없다.
“좋니? 아주 좋아 죽겠다는 표정이야?”
나오코는 빠르게 눈과 머리를 굴려 본다.
그리고 한껏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엄마가 행복해지게 만드는 주술 같은 거야.”
미네코는 순간 미친 듯이 고개를 천정으로 바짝 들어 올리며 하하거렸다.
“하하하, 그래?”
“놀랐다면 사과할게
하지만 우린 행복해졌잖아.”
“아주 칭찬받을 일이군... 그렇지?
팔짱 끼고 있던 자세를 고쳐 잡으며 다시 나오코를 잡아먹을 듯이 바라보았다.
“넌, 네 아빠랑 똑같아
거짓을 진실처럼 말하는 것도, 하나 다르지 않아
확실하게 알아 둬,
내가 불행해지면 너도 불행해져 이건 명확한 사실이야.”
죽은 아빠는 언제나 엄마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달고 살았다.
나오코에게 들리는 아빠의 미안하다는 말은
진심이 가득 담긴 말이었지만
미네코는 그렇게 들리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빠가 다니던 직장의 말도 안 되는 여직원과 엮였을 때도 그랬다.
나오코가 생각하기엔 미네코는
그 돼지 같은 여직원과의 관계가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아빠가 어떤 말을 해도 미네코는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거짓된 죄를 인정하고
미안하다는 말을 하게 만들어 버리는 짓을 반복하게 만들었다.
당연히 정상적인 회사 생활을 하기란, 불가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아빠를 쏙 빼닮았다는 미네코의 말에 나오코는 기분이 좋았다.
자신을 바라보며 아빠를 떠올리며 남은 양심에 떨고 있다는 증거일 테니 말이다.
나오코는 자신도 모르게 이죽거렸고,
그 모습을 본 미네코는 갑자기 그녀에게 돌진하더니
참치 못한 화로 정강이를 사정없이 발로 찼다.
“앗, 아악.”
나오코가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나 뒤로 물러서려 애를 써 보지만,
미네코의 두 팔은 이미 그녀를 누르고 있었다.
나오코는 소리 내지 않으려 입을 악물었다.
“쾅쾅 쾅쾅.”
나오코는 속으로 소리 질렀다.
‘하즈키, 하즈키.’
악, 하는 소리에 급하게 내려온 하즈키는
망설임 없이 미네코의 두 팔을 뒤에서 안다시피 하며 잡아끌었다.
미네코의 악다구니 떠는 비명과 두 다리가 허공을 헤맸다.
“으아아, 너 같은 건 태어나지 말았어야 해
아아악, 어떻게 나에게 이런 짓을 하지?
응? 악마 같은 것 같으니.”
나오코는 그 자리에 박힌 채
눈은 미네코를 안쓰럽게 바라보며 입으로는 이죽거렸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미네코가 바닥에 주저앉아 힘을 풀었다.
하즈키는 뒤에서 후후, 거리며 숨을 길게 내쉰다.
“다신 안 그럴게, 그리고 엄마도 다시는 내게 이런 짓, 하지 마.”
딱딱한 슬리퍼에 맞은 정강이를 가리키며
붉게 물든 것을 자랑하듯 내보이며 미네코에게 들이댔다.
나오코의 말은 마치 이런 짓이 또다시 반복되면 각오해, 라며 경고라도 하는 것처럼 들렸다.
뒤돌아 이층으로 향하던 나오코는 잠시 멈칫하며
미네코의 몸을 눈으로 훑더니 진주색 실크 가운을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그리고 그 옷 말이야, 엄마한테는 어울리지 않아
기억하지? 남의 것을 훔치는 사람은 도둑이나 하나 짓이라고,
거지 같다고, 엄마가 그랬잖아.”
미네코는 커다란 돌덩이를 가슴에 맞은 기분이 들었다.
나오코의 붉게 물든 정강이를 바라보며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었는지 고개를 떨궜다.
나오코와 한 번 부딪히면 늘,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들이 일어났다.
나오코가 저지른 일을 모른 척해야 하는 그녀의 인내심은 바닥이 났다.
나오코가 계단을 오르는 내내 씩씩, 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나오코는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주문을 외우는 것처럼 빠르게 속닥거렸다.
미네코는 그제야 인기척에 뒤를 돌아보았다.
말 없는 하즈키는 언제든 폭탄처럼 터질 것 같아 두려웠다.
금이 가기 시작한 타다요시와 관계는 더욱 나빠질 것이다.
얼굴에 드러난 하즈키의 감정은 도무지 어떤 건지 드러내질 않았다.
빛나는 갈색 눈이 노란빛을 내뿜는 것처럼 반짝였다.
“걱정 말아요, 관심 없어요.”
다다미에 딱 붙어 버린 미네코는
머스크 향이 가득한 실크 가운을 천천히 벗어 한편에 개어 놓았다.
그제야 나오코 이마의 살색 밴드와 시퍼런 정강이가 생각났다.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은 잡을 수도 없음을 깨닫고
실소를 머금더니 술을 다시 입에 대기 시작했다.
미네코는 오늘도 집에 들어오는 타다요시를 만날 수 없을 것 같다.
그녀가 흥얼거리는 알 수 없는 소리는 새벽 내내 울려 퍼졌다.
나오코는 이른 새벽까지 잠들지 못한 눈을 거울에 비춰 보았다.
눈이 밑으로 푹 꺼져 있는 바람에 커다란 눈은
구멍이 뚫린 것처럼 더욱 커져 있었다.
억지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머금어 보았지만
누가 보아도 불행을 가득 담고 사는 아이처럼 볼 것이다.
미네코가 술을 다시 입에 대기 시작하는 모습을 바랐던 건 아니다.
미네코가 타다요시와 잘 지냈으면 하는 바람은 진심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행복은 다시 역행했다.
타다요시는 죽은 아빠의 모습과 자꾸 겹치면서 나오코를 괴롭혔다.
아마도 타다요시와 미네코 사이에 금이 가는 소리는
이제 미네코를 괴롭히지 않아도 된다는 신호라고 생각했다.
저절로 미네코는 불행해져 가고 있었고, 죄 값을 치르기 시작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나오코는 다신 쥐꼬리로 미네코를 괴롭히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쥐를 잡아 요괴에게 바치는 일 따위를 멈추지 않았다.
정강이가 붉고 푸른색을 띠었다.
마치 귀신이 나올 것 같은 보랏빛 노을과 같은 색이다.
통증은 감정보다 아프지 않지만,
시간이 갈수록 부풀어 올라
그리 시시한 상처 같아 보이지 않아 맘에 드는 중이다.
치호가 낮에 건넨 여분의 살색 밴드가 떠올랐다.
주머니를 뒤져 밴드를 정강이 위에 붙였다.
상처에 비해 턱없는 크기지만 뭔가 대단한 것을 숨기는 것 같아 재미가 붙었다.
어차피 나오코는 미네코가 무슨 짓을 해도
아빠가 죽은 뒤로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던 터였다.
이까짓 상처는 그녀가 미네코를 더욱 미워할 수 있는 용기를 주는 것과 같았다.
미네코가 술을 입에 대기 시작했다는 것은
기상 시간과 활동 시간이 일정하지 않게 되어버렸다는 것을 뜻한다.
나오코는 그녀와 마주치기 전에 집을 나서고 싶었지만,
이른 시간에 머물 곳은 마땅치 않았다.
항상 혼자라는 치호를 떠올려 보았지만,
집이 어딘지 알아 놓지 못한 게 후회가 됐다.
나오코는 난쟁이 모습을 하고,
상처를 품고 다니는 치호가 자꾸 떠올라
이내 고개를 세차게 뒤흔들었다.
오래된 나무로 된 집에서 무언가를 몰래 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조용한 시간일수록 삐드득, 거리는 소리는 아주 신경질적으로 들린다.
천천히 밟아 보아도 짜증 섞인 소리가 울화를 치밀게 했다.
달칵, 하고 방문을 열었다.
발을 내디딘 순간 딱딱하고 바스락거리는 것을 밟았다.
“엇, 뭐야?”
나오코는 재빨리 손으로 입을 막으며 딱딱한 물체를 집어 들어 방문을 잠갔다.
발끝에서부터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이 손가락 사이사이로 웃음이 새어 나간다.
“하즈키다.”
그녀도 다른 여동생들처럼 오빠에게 선물을 받았다.
웃음이 계속 새어 나왔다.
“이힛.”
모리나가 밀크캐러멜의 이름을 가리고 있는 흰 종이가 끼워져 있었다.
캐러멜을 뜯어 얼른 입속으로 집어넣었다.
달콤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학교 끝나는 시간, 앞에 서 있을게』
처음 느껴 보는 기쁨에 머리까지 아찔해지는 순간이다.
그의 선물은 미네코와의 일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진짜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생긴 것 같아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갔고 자신감이 생겼다.
잠시 치호를 떠올리더니, 자신도 모르게 혀를 찼다.
“쯧.”
마치 나는 너와 달라,라고 크게 말하고 싶은 모양새다.
제자리서 펄쩍펄쩍 날뛰는 나오코의 정강이 위 밴드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정강이는 좀 더 짙은 색이 되어 하즈키에게 안타까움의 빌미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치호의 밴드는 쓰레기통으로 직진했다.
그의 봄
봄의 꽃, 벚꽃, 순결을 가진 그 절세미인은 아름다움을 멀리 팔아버리고
절개를 지킨 채 파릇한 잎들로 그 자리를 지켰다.
마음을 급히 먹을 때마다 또는 긴장할 때마다 나오코는 배앓이했다.
급하게 뛰어오던 걸음을 느릿느릿 조용, 걸어 보았다.
정말 하즈키가 그곳에 서 있었다.
방금 생겨난 것 같은 파릇한 잎들이 바람에 팔랑거리며 그 바람을 맞고 서 있는 하즈키.
세상의 모든 화가가 그려 낸 봄, 의 풍경을 보는 것 같았다.
하즈키는 꼭, 그 봄의 모든 생명처럼 빛이 났다.
나오코의 귀가 간질거렸다.
잔잔하게 부는 바람에 잎들이 이는 소리와
하즈키의 머리칼이 서로를 비벼내며 날리는 소리,
거뭇한 운동화로 시멘트 바닥을 긁는 소리가 들렸다.
더욱 가까워질수록 마치 하즈키의 심장 소리도 들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즈키의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다.
세상의 모든 예의를 다해 그에게 정중히 똑, 똑하고
노크를 하며 알은척, 해야만 죄를 짓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즈키가 고개를 젖히더니 왼 손바닥을 활짝 펴 보이며 해를 가렸다.
하즈키의 눈 속에 해가 쨍, 하고 들어갔다가 얼마나 흘렀을까,
이윽고, 그 속에 나오코가 들어왔다.
그제야 해를 가린 그의 손은 그녀를 향해 활짝 펴 보이며 흔들거렸다.
머뭇거리던 나오코는 폴짝거리면서 하즈키에게 한달음에 달려갔다.
쿵쾅거리는 심장이 그에게 들킬 것 같아 이내 빠르게 멈췄다.
고르던 숨이 나오코의 입술과 눈이 귀까지 뻗어갔다.
“이힛, 헥헥 하즈키, 정말이네?”
하즈키의 빛나는 갈색 눈동자가 또렷하게 나오코를 바라보고 있다.
“뭐가?”
하즈키의 대답은 항상 어정쩡하고 어리둥절하다.
“이힛, 정말 와줬어.”
그의 왼손이 나오코의 머리를 흩트려 놓았다.
길옆으로 나란히 세 명의 남학생이 그 자리에 서서 나오코를 바라보고 있다.
그들은 이마가 찢어진 남학생 친구들이다.
뭔가 행동에 옮기려던 모습을 하고 있었고 분명 나오코를 기다렸던 모양이다.
하즈키에게 눈을 떼지 않은 터라,
그들이 언제부터 나오코를 응시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마가 찢긴 아이는 우스꽝스럽게 나오코와 같은 밴드를 붙이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나머지 두 명은 하즈키를 보며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이마가 찢긴 아이는 분명 보아하니, 그들의 가방이나 들어주는 기죽은 아이임이 틀림없다.
웬일인지 그들은 속닥거리며 비아냥거리는 눈빛을 보낼 뿐,
나오코의 심기를 건드리지는 않았다.
나오코는 보란 듯이, 하즈키의 팔을 잡아당기며 옆으로 바싹 붙어 걸어간다.
하즈키가 그녀를 내려다보았지만, 나오코의 손을 뿌리치진 않았다.
“붙지 마.”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것이 뻔했지만 나오코는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잠깐만, 쉿!”
남학생은 자신보다 훨씬 나이가 많아 보이는 하즈키에게 잔뜩 겁을 먹었는지,
자전거를 탄 두 명의 학생은 나오코를 보지 못한 것처럼
딴 척을 떨며 자전거 페달을 세게 밟아댔다.
마치 꼬리가 길어도 절대 밟히지 못할 속도다.
나오코는 다시 하즈키와의 간격을 떨어뜨렸다.
나오코가 하즈키의 옆구리를 콕콕, 찔러 댔다.
“저기, 도망가는 애들 좀 봐
정말이지 나를 너무 귀찮게 해.”
하즈키의 표정은 역시 어리둥절하고 엉뚱해 보였다.
햇살이 다시 하즈키의 빛나는 갈색 눈을 가려 볼 수 없게 만들었다.
“그래?”
하즈키가 그들을 눈으로 쫓긴 했지만 아쉬웠던 건,
하즈키가 그들을 바라보는 것을 그들은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직도 구석에 박혀 있는 이마가 찢긴 아이는
가지도 서지도 못하고 그 자리를 맴돌고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도망간 학생은 아주 치사하고 의리 없는 부류일 것이라 짐작했다.
하즈키의 걸음이 다시 앞서갔다.
“자, 가자.”
그녀는 폴짝, 폴짝 신이 났다.
“우린 어딜 가는 거야?”
우리,라는 단어는 죽은 아빠가 그녀와 시간을 보내기 위한 추억 속 첫 단어였다.
아빠가 속삭였다.
“우리 나오코, 어디 가고 싶어? 오늘은 어디로 가 볼까?”
나오코는 잠시 멍한 눈으로 마치 아빠가 자신의 앞에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하즈키가 대답했다.
“막힌 곳이 없는 곳.”
나오코가 고개를 끄덕였다.
주머니 속의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요란하게도 난다.
노란색 작은 상자에서 캐러멜을 하즈키에게 건네주었다.
반듯한 눈으로 나오코를 바라보며 처음으로 온화한 웃음을 건넸다.
하즈키는 입속으로 덥석, 던져 놓는 그 순간부터 오물오물 씹어 댔다.
나오코는 하즈키를 힐끔힐끔 보더니 따라 했다.
그날 이후 그녀는 캐러멜은 입에 넣자마자 씹어 먹는 거라며 떠들어 대곤 했다.
나오코는 입속에 퍼지는 달콤함이 새어 나가지 못하도록 내내 입을 잔뜩 오므렸다.
잠시, 머릿속엔 자신에게 친절히 대하는 하즈키가 진짜 오빠 같아서,
나오코는 행복과 두려움이 동시에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햇살을 따라 걷는 그의 모습은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아름다워서 나오코를 더욱 안타깝게 만들었다.
사람은 아름다운 그림을 보면 갖고 싶어 하기 마련이다.
꽃잎이 남긴 5월의 파릇한 절개와 하즈키의 친절함,
그리고 캐러멜은 나오코의 노란 상자 속 비밀스러운 봄의 풍경화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5월의 그림이 지나가는 자리의 햇살은 바쁘게 서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하즈키가 조금씩 제대로 걷기 시작할 무렵,
이곳은 엄마와의 기억이 멈춰 있는 곳,
그리고 그의 성장이 멈춘 곳이기도 하다.
평일 오후, 웅장한 성은 텅 비어 있었다.
목소리를 내면 바다 건너까지 울려 퍼질 것만 같았다.
이곳은 하즈키의 말 대로 막힌 것이 아무것도 없다.
나오코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곳은 마치 폐가 뚫릴 정도로 숨을 들이켜서
정신을 잃고 죽어도 행운일 것 같은 장소였다.
하즈키는 또 어리둥절하고 정신을 잃은 듯이 먼 곳을 응시했다.
늘 하즈키의 모습은 말을 시작하기가 힘이 든다.
아름다운 유리잔을 깨트리면 엄마에게 벌을 받는 것처럼, 혼이 날까,
심장이 다 쪼그라들었다.
하즈키가 말했다.
“뭘 봐? 자꾸 바보 같이.”
나오코는 먼저 말을 걸어 준 그가 또 친절하게 느껴져
다시 자신의 감성을 비밀스럽게 심장 안으로 숨겨본다.
나오코는 똑바로 자세를 가다듬고, 기지개를 켠다.
“하아, 하즈키 고마워.”
“너답지 않은 말.”
두 팔을 하늘 위로 쭉 뻗은 나오코의 시퍼런 정강이가 눈에 들어왔다.
“이런, 너 다리.”
“조금 멍든 거야.”
하즈키는 더 크게 숨을 들여 마신다.
꼭, 이 웅장한 성을 모두 삼켜버릴 것 같이 길었다.
나오코는 하즈키의 눈이 밴드가 붙어있는 이마에 자꾸 멈추는 것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그는 다쳤다는 것, 을 알고도 모른 척하고 있었다.
나오코도 하즈키가 알고 있다는 것을 알고도 모른 척했다.
“너란 아이는 참.”
나오코는 밴드가 붙어있는 자리를 긁어 대며 말을 이었다.
“긍정의 뜻이지?”
나오코는 제자리에서 왔다 갔다가, 펄쩍 뛰었다가,
온갖 손짓으로 하즈키를 놀려 먹었다.
하즈키는 이상하게 나오코에게 집중했으며
한순간의 몸짓도 빛나는 갈색 눈에서 놓치지 않았다.
“그만해, 위험해.”
나오코의 손목을 낚아채 제자리에 갖다 놓았다.
“이젠 높은 곳도 위험하지 않아, 하즈키가 있잖아.”
하즈키가 시선을 낮추며 나오코를 바라보았다.
“넌 알다가도 모를 아이야.”
“쳇, 알면서?
하즈키 같은 것도 있잖아, 그렇지 않아?
잘 봐, 하즈키 엄마랑 나오코 아빠는 죽었잖아?”
나오코는 웃고 있었고, 하즈키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술을 입에 대기 시작한 불행한 미네코의 얼굴이 떠올라 심각해졌다.
목숨이 줄어들기를 바라긴 했지만,
불행하게 아주 사라지는 건 바라지 않았다.
미네코의 불행은 나오코에게 치명적인 독이 될 게 뻔했기 때문이다.
한숨이 길게 늘어졌다.
“저기, 엄마 말이야 하즈키가 이해해 줘
미네코는 불행해 그래서 조금은 이해해,
그러니까 하즈키도 이해해 줘
엄마가 아주 많이, 불행해지는 건 원치 않아.”
나오코가 미네코에 대해서 말할 때의 모습은 꼭,
미네코가 나오코에게 말하는 모습과 흡사했다.
아주 많이 불행해지는 건 원치 않지만 조금 불행해지는 건 원한다는 말인가,
하즈키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신경 쓸 수밖에 없어,라는 투의 감정 섞인 말은 바싹 마른 낙엽과도 같아 보였다.
“넌 가끔 말하는 것 보면 성인식이 필요 없는 아이 같아.”
“그 말은, 내가 어른스럽다는 거?”
하즈키가 웃어넘기려는 것을 보니 좋은 뜻은 아닌 것 같다.
“훗, 뭐...”
나오코는 성인이 된다는 것은 나쁜 짓과 착한 짓, 이
공존해야만 될 수 있는 것임을 성인이 되고서야 알았다.
그때 하즈키가 했던 말은 아주 좋지 않은 뜻이 분명했다.
“난, 여기가 어딘지 알아 해바라기 엄마가 있었던 곳이네?”
하즈키가 고개를 끄덕이며 아찔하게 뻗어 있는 땅의 끝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또다시 어리둥절한 말들을 주저리 떠들었다.
“떠나고 싶어도, 자석 같아서 갈 수가 없는 거지
아무리 확인해 봐도 올 때마다 아무것도 없는데...”
“응? 떠나?”
하즈키의 갑작스러운 떠난다는 말에 입을 확 막아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나오코가 매서운 눈길로 하즈키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아무렇지 않게 노을만 바라보는 그가 원망스러웠다.
진짜 떠날 것도 아님을 알면서도
떠난다는 단어에 나오코는 심장이 멎는 것 같다.
“또 그렇게 보는 거야? 너 때문에 자꾸 놀라.”
나오코가 눈을 내리깔 때마다 미네코가 서 있는 것 같아서 자신도 모르게 등을 움츠렸다.
“그래서 하즈키는 떠날 거야?”
“언제까지 이곳에 있겠어?”
“그럼, 어디?”
“글쎄.”
“글쎄, 는 지금은 모른다는 거네?”
“그것도 글쎄.”
“칫.”
“아마도 저 너머?”
“저기 너머에는 뭐가 있어?”
“글쎄.”
“쳇, 시시해.”
“그러게...”
“뭐, 저기 너머에 가도 동생을 뒀으니,
무슨 일이 있으면 달려와 줄 거지?”
나오코는 자신이 해 놓은 말에 유치함을 느껴
혀를 길게 내빼고 눈을 가늘게 떴다.
“헷.”
하즈키가 전망대 난간을 잡고 내려오며 손을 탁탁, 털더니
나오코의 말랑한 코를 잡아당겼다.
기습적으로 당한 나오코는 싫지 않음에
뒷걸음질 치는 척하며 계속 잡혀 주는 듯했다.
희고 가느다란 그의 손은 따뜻했다.
“아얏, 힛.”
나오코가 하즈키의 얼굴을 확인할 땐,
그가 높은 곳에 올라서 있어도, 내려와 있어도
큰 키 덕분에 고개를 들고 올려봐야만 한다.
까치발을 들고 그의 얼굴을 더 자세히 보려고 애를 썼다.
“하즈키, 배고파.”
하즈키가 나오코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꾹, 누르더니 싱긋 웃는다.
결국 가까이서 얼굴을 마주하기란 하늘에 있는 별 따먹기다.
하즈키가 잡아당긴 나오코의 콧볼이 아직도 따뜻했다.
하즈키의 왼손의 촉감과 온도를
노란 상자 속에 꾸깃꾸깃 집어넣으며 잊지 않겠다며, 마른 입술을 침으로 적셨다.
주머니 속 상자를 꺼내어 다시 한번 달콤함을 하즈키와 함께 나누었다.
나오코는 다시 입을 작게 오므리며 오물거렸다.
타다요시가 집 안에 있을 때와 없을 때는 확연히 차이가 났다.
집 안에 발을 들이자마자 캄캄함에 불쑥 누구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공포심이 생겨났다.
어둠과 적막은 또 하나의 불행을 안겨다 줄 것 같다.
저녁 시간이 훌쩍 지난 시간에도 코를 자극했던 음식 냄새도 나지 않았다.
주방 안은 독한 알코올 냄새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하즈키가 집 안의 불을 밝혔다.
역시 블랙 니카 한 병이 바닥에 널 부러 있었고,
단 한 방울도 남지 않은 빈 병이다.
나오코는 덤덤한 표정으로
이건 아주 오랜만에 일어난 습관이야,라고 중얼거렸다.
잠시 넋이 나간 하즈키는 그 말을 듣지 못했다.
“잠들었을 거야.”
역시 나오코가 말하는 머릿속의 그림과 같았다.
혹시나 했던 미네코의 옆자리는 오랫동안 텅 비어 있었다.
시체처럼 잠이 든 미네코는 실크 가운을 걸친 채 잠이 들어 있었고,
눈 밑의 까만 번짐과 입술의 붉은 번짐은 기다림의 좋지 않은 결과임을 알려 준다.
하즈키는 벽에 기대어 눈을 깜박였다.
생각해 보니 요즘 타다요시의 모습을 본 지가 꽤 된 것 같다.
모습을 마주치는 날에는 항상 술에 취해 들어왔고,
달콤함을 속삭이던 미네코와의 대화도 들리지 않았다.
잠시 엄마의 실크 가운을 걸친 채 잠든 여자에게 연민을 느끼다니, 낯설었다.
타다요시가 엄마를 잊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타다요시는 늘 다시 사랑을 했고,
그 사랑이 식을 때쯤 엔 가슴속에 숨겨둔
검은 숯 같은 엄마의 사랑을 또다시 꺼내 놓았다.
그럴 때마다 그녀들은 타다요시의 무관심에 곁을 떠났고,
타다요시는 그녀들의 심장을 할퀴어 놓았다.
머지않아 미네코 또한 타다요시의 곁을 떠날 게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하즈키는 엄마의 실크 가운을 조심스럽게 눈에서 떨어뜨린다.
나오코가 하즈키에게 눈을 찡긋해 보이며 나가자며 시늉한다.
눈가에 장난기가 가득한 나오코의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낯선 감정에 빠져들었다.
멍하니 서서 나오코의 유난스러운 손가락질과 표정을 바라보았다.
“뭐 해, 얼른 나와.”
나오코의 활짝 편 손바닥이 분홍빛을 발했다.
“엇, 어.”
나오코는 다시 손가락을 움직이더니 발그레한 입술 위에 갖다 댔다.
“쉿!”
“드르륵.”
미닫이문이 닫혔다.
나오코는 뭔가 대단한 잘못을 저지른 어린아이처럼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
“응?”
“옷, 말이야.”
하즈키는 나오코의 얼굴을 보고 소리 내지 않고 함박웃음을 지어 보였다.
늘 나오코는 하즈키의 웃음으로 경직된 어깨는 내려갔고,
얼굴에 긴 미소가 번졌다.
2층 바닥은 하즈키의 발소리에 유난히 삐걱거렸다.
하즈키가 방문을 열자 나오코는 자연스럽게 자기의 몸을 먼저 들이밀었다.
“얘기하고 싶어.”
멈칫한 하즈키가 피곤하다는 듯 나오코를 흘겼지만
하즈키의 눈은 오늘따라 많은 허락을 비치고 있었다.
나오코는 창문 쪽으로 몸을 비틀더니 커튼을 밀어 제치며 약간의 짜증 섞인 말투를 뱉어냈다.
“답답해.”
“뭐가?”
“하즈키는 늘 사방을 막아 놓으니까.”
하즈키는 다다미 모서리 끝 쪽으로 몸을 옮기더니
거북이처럼 목을 빼놓으며 창을 내다보았다.
달에 엮인 구름의 끈들이 무리를 지어 망쳐버린 솜사탕처럼 흩날렸다.
“살짝 엿보는 게 좋아, 다 보이면 다신 보고 싶지 않거든.”
“이해할 수 없어.”
나오코는 갑자기 책상 밑으로 그에게 등을 보이고 웅크리고 앉았다.
분홍빛 손바닥은 보이지 않게 앞으로 가져가더니, 고개를 돌려 하즈키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살짝, 만?”
나오코의 동그랗고 몽실몽실한 엉덩이가 보인다.
하즈키가 느낀 낯선 감정이 그녀와 같은 속도로 다시 다가왔다.
나오코가 그에게 보여주는 모든 행동 뒤에,
나오코는 꼭 하즈키의 감정과 눈빛, 그리고 행동을 확인하는 것 같았다.
지금도 역시 뚫어져라 바라보며
답을 기다리는 나오코의 눈빛에 하즈키는 자신의 낯선 감정을 들킨 것 같아
모른 척 달무리만 바라본다.
답을 듣지 못한 나오코의 얼굴은 금세 차가워졌다.
“미네코는...”
엄마의 이름을 부르며 다시 하즈키의 얼굴을 살핀다.
“엄만, 생각보다 말이 늘 앞서는 사람이야, 그래서 늘 오해가 피어나.”
눈을 내리깔고 하즈키의 얼굴을 살피는 나오코의 눈치는 미네코와 같다.
“그러니까 그 오해는 엄마의 생각이 아니야, 상대방이 만들어 낸 거지.”
“나오코, 미네코를 내게 설명하지 않아도 돼.”
“내가 불행해지기 싫어서 그래, 그러니까 하즈키가 이해해 줘.”
하즈키는 미네코와 나오코의 관계에 호기심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빛나는 갈색 눈이 왔다 갔다 빠르게 굴러갔다.
“넌 미네코를 좋아하지 않지?”
나오코가 갑자기 소리를 내며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크큭.”
“왜, 웃어?”
“하즈키는 타다요시를 좋아해?”
“훗, 운명이지.”
하즈키는 할 말을 잃었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엄만, 좋아하고 싶은 사람이었어, 근데 그럴 수가 없어.”
나오코가 쓰는 지난날을 의미하는 말을
미네코가 들었다면 나오코의 반대쪽 정강이 또한 아슬아슬, 아팠을 것이다.
“난 관심이 없어, 네가 불행해질 일도 없을 거야
정말이지 난 관심 없으니까.”
“뭐야, 그 말, 친절하지 못한걸?"
“미네코의 가방 속에 쥐꼬리를 넣는 것보단 괜찮은 거 아니야?”
나오코는 바싹 말라버린 이마의 상처를 긁어 댔다.
“쳇.”
하즈키가 방문을 끝까지 활짝 열었다.
나오코는 웅크린 몸처럼 입술을 웅크렸다.
퉁퉁 불은 그녀의 입술은 M자 모양이 더 불거져 나오게 했다.
하즈키는 다다미에 붙은 나오코의 어깨를 두 손으로 붙잡고 일으켰다.
어깨의 뼈가 살짝 만져졌고, 괴이한 느낌에
하즈키는 급하게 나오코의 어깨에서 손을 뗀 채 말을 건넸다.
“자, 이제 됐지?”
나오코는 갈색 눈동자를 끝까지 놓치지 않으려 바라보았지만
고개를 젖히고 오랫동안 서 있기엔 무리다.
나오코의 한숨이 하즈키의 입술에 닿았다.
“오늘 고마워. 하즈키.”
“응.”
하즈키는 자신도 모르게 요동치는 심장을 모른 척, 커튼을 천천히 다시 닫았다.
“잘 자.”
“응. 하즈키도.”
나오코는 문고리를 잠그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비튼 채 동그란 잠금장치를 잠그고 돌아섰다.
문을 잠그지 않은 채 돌아섰다면 언제든지 다시 하즈키의 방에 돌아와
갈색 눈을 마주할 것만 같아 겁이 났다.
나오코는 늘 생생하게 기억했다.
이때의 하즈키는 나오코 때문에 웃었고,
나오코 때문에 심장이 쿵쾅, 댔음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나오코는 자신의 방을 뒤로하고 밖의 계단을 이용해 조심스럽게 내려왔다.
다행히 가로등은 꺼져 있었고, 재물을 바치고 기도를 하기엔 적당한 환경이다.
뒷마당의 아주 비밀스럽고 흙으로 쌓아 놓은 공간에 보지 못한 것이 우뚝 서 있었다.
꺼진 가로등 덕에 달에 비친 그림자 때문에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를 지를 뻔했지만, 빠르게 자신의 입을 막아섰다.
“대체 이게 무슨?”
자신이 깊게 흙을 파서 묻어 둔 곳이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고,
그곳엔 아직 사춘기 티를 벗지 못한 키 작은 나무가 우뚝 솟아 있었다.
“대체, 누가...”
나오코는 놀람과 실망스러움을 동시에 내뿜다가 화가 치밀어 올랐다.
모든 기도가 제자리로 돌아가 수포가 될 것이 뻔했다.
미친 듯, 빠르게 흙을 파 보지만
어디에도 나오코가 바친 재물은 찾을 수가 없다.
다시는 하즈키의 친절한 갈색 눈을 보지 못할 것이고,
미네코 또한 오랫동안 목숨을 유지할 것이다.
나오코는 파헤쳐진 흙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소리 없는 울음을 토해 냈다.
어느새 달무리로 달빛은 빛을 잃기 시작했고
덩어리 진 솜사탕이 되어 하늘을 가렸다.
처음 보는 키 작은 나무의 그림자도 더 이상 눈에 띄지 않았다.
하즈키는 눈을 연신 껌벅거리며
타다요시의 발걸음 소리만 기다리다 지쳐 잠에 들었다.
깜박하고 선잠에 든 그는 1층에서 들리는 삐걱거리는 소리에
천장만 멀뚱히 바라보며 귀를 쫑긋 세웠다.
꽤 오랫동안 타다요시의 모습을 볼 수 없었던 하즈키는
미네코의 모습에서 불안정한 그들의 관계를 느낄 수 있었고
마냥, 모른 척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소리 내지 않게 조심해 보아도 나무집은 비밀스러움을 완벽히 감추지 못한다.
하즈키는 나오코의 방문을 오랫동안 바라보다 느릿느릿 1층으로 발을 디뎠다.
다행히도 미네코의 짙은 향수 냄새는 나지 않았다.
분명히 술에 그득 취한 타다요시일 것이다.
타다요시의 거친 숨소리가 훅, 하며 소리를 냈다.
얼마나 술을 들이켰는지 멀리서도 알코올 냄새는 지옥 같았다.
타다요시는 억지로 상체를 치켜세운 채
코타츠(난방기구)에 발을 집어넣고 있었다.
하루도 밀어내지 않으면 숲이 되어버리는 덥수룩한 수염 모양을 하고
갈색 눈동자는 면적이 넓은 흰자를 희번덕거리며
바닥에 나동그라진 술을 잔에 따라내고 있었다.
타다요시의 모습은 조금씩 자신의 미래에 대한 계획을
수첩 속에 고스란히 적어 놓은 것들을 송두리째 앗아가는 모습이었다.
하즈키는 중얼거렸다.
‘내가 저 사람을 떠날 수 있을까?"
하즈키는 한참 후에야
괜찮은지 정도의 안부도 채 물어보지 못했다는 것을 뼈저리게 후회했다.
처음 미네코가 이 집에 발을 들였을 때 타다요시의 눈빛이 떠올랐다.
그때의 타다요시는 진심으로 잘해 볼 작정이었다.
하루카가 곁에 있을 때에도 그런 얼굴과 그런 대화와 그런 웃음은 들어 보지 못했으니 말이다.
중요한 건 타다요시의 저런 모습의 원인은
하즈키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나마 하루카가 떠났을 때처럼 죄책감에 시달릴 일은 없을 테니 다행이다.
오늘따라 유난히 타다요시 주위에 거뭇거뭇한 그림자들이 주위를 공포스럽게 날아다니는 것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