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쥐꼬리 나무
6회 등장인물
1. 나오코- 미네코의 친딸
2. 하즈키- 타다요시의 아들, 나오코의 의붓오빠
3. 미네코- 타다요시의 아내
4. 타다요시- 미네코의 남편, 하즈키의 친아버지
5. 겐토- 하즈키와 마나츠의 친구
6. 마나츠- 하즈키의 연인
7. 치호- 나오코의 등이 굽은 친구
8. 코하네- 나오코와 동급생
1967년 그해, 겨울 나오코는 고등학생이 되어 있었다.
키는 1년 사이 몰라보게 커졌고 눈은 튀어나온 광대뼈로 더욱 동그랗고 도드라져 보인다.
나오코는 제법 여성스러움을 갖추어 가고 있었다.
남학생에 의해 돌에 찢긴 상처를 남기게 된 후부터
치호를 비롯한 학생들은 그 아이들과 맞섰다는 이유 하나로
나오코는 호기심의 대상, 또는 아는 척의 대상이 되었다.
그렇게 거의 모든 학생과 놀랍도록 가까워지게 되었다.
물론 하즈키가 나오코의 오빠라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고,
미네코의 유난스러운 학교의 잦은 출입은 더 큰 몫을 했을 것이다.
마치 친화력을 타고난 사람처럼 나오코는 늘 학급에서 행동대장을 도맡게 되었다.
나오코를 놀리기 바빴던 남학생은 아직도 나오코를 적대시하긴 하지만
예전처럼 일부러 마주치려 하지는 않았다.
반면 나오코가 던진 돌부리에 이마가 찢긴 아이는 나오코를 거의 신처럼 떠받들었고,
아마도 나오코를 좋아하는 게 틀림없을 것이다.
왜냐면 시간이 훌쩍 지난
지금 상처도 남지 않은 이마에 마치 훈장처럼 밴드를 붙이고 다니기 때문이다.
가장 눈에 띄는 건, 난쟁이 치호의 선천적인 굽은 등이
시간이 갈수록 펴지고 있다는 점이다.
나오코는 치호의 굽은 등은 마음의 병이 틀림없다며
그래도 여전히 굽은 등을 갖고 있는 치호를 위로하곤 했다.
한편 조금 시들한 타다요시의 사랑에 목말라진 미네코는
점점 더 겉치레에 욕심을 내기 시작했다.
한눈에 보아도 비싸 보이는 학용품들과
소꿉장난할 때나 쓸 것 같던 레이스가 달린 양말은
날개가 달려 있었고 번쩍번쩍 광이 나는 검은 구두는 마법사를 연상케 했다.
하즈키의 엄마 같은 진짜 엄마의 손이 필요했던 나오코는
거부하려 전력을 다해 뛰곤 했지만 미네코를 꺾기엔 모자랐다.
나오코 생각에 아마도 잃어버린 불단 때문일 것이라며
끈질기게 끝없이 자라고 있는 키 작은 나무를 증오했다.
아니, 이젠 더 이상 절망스럽게도 키 작은 나무가 아니다.
맘에 들지 않은 일이 생길 때마다
커다랗고 녹슨 낫을 들고 뒤뜰로 향해 보았지만
나무를 베고 난 후, 어떤 불행한 일이 또다시
닥쳐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애꿎은 잡풀들만 파헤쳐 놓곤 했다.
“엄마, 집 뒤에 숨어있는 나무는 누가 심은 거야?”
“뭘 말하는 거니?”
나오코는 당연히 미네코의 짓이 아니란 것을 알고 있었다.
절대 나무 같은 것을 심어 놓을 여자가 아니었고,
오로지 미네코의 관심은 썩지 않는 아름다움과 붉은 립스틱,
그리고 타다요시의 관심이었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다.
하즈키는 간절히 원하지 않았지만
얼마 전 자동차 회사의 정식 직원이 되었다.
정식 직원으로 교육을 받고 돌아오는 날이다.
그가 누구보다 더 착실하게 근무했다는 것을 하즈키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가 알았다.
하지만 정식 직원이 되기 위해서
남몰래 공부까지 열심히 했다는 것은
나오코에게 절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얼마든지 하즈키는 이곳을 떠날 수 있는 사람이 됐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오코는 며칠 동안 볼 수 없었던 하즈키가
학교 앞에 서 있을 것이라며 치호에게 자랑을 늘어놓았던 터였다.
주머니 속의 차가운 플라스틱 거울을 만지작거렸다.
유난히 비뚤어진 앞머리를 매만져 보지만 제자리로 돌아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오코의 입술이 퉁, 하고 불거져 나온다.
오늘따라 맘에 들지 않는 것투성이다.
치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오코, 가자, 서둘러.”
치호가 나오코의 손목을 잡은 순간 손에서
분홍색 거울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치호는 극도로 예민해져 있는 나오코의 신경을 건드렸다.
놀란 치호의 등은 더욱 굽은 것처럼 보였고, 한참 동안 발을 동동 굴렀다.
앗, 어쩌지 나오코 미안미안, 하즈키가 기다릴 것 같아서. “
치호는 굽은 허리를 더욱 구부려 깨진 거울의 플라스틱 손잡이로 주우려 했다.
치호의 입에서 하즈키라는 말이 나온 순간부터 나오코는 깨진 거울은 안중에도 없었다.
“하즈키가 기다리는데 네가 왜 호들갑이야?”
“으응?”
그때 나오코의 얼굴은 치호가 이제껏 보지 못했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매서웠다.
치호는 나오코가 하즈키를 오매불망 기다린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 기쁨에 기쁨을 보태 주려던 것뿐이었다.
나오코는 책상 위 가방을 메더니,
깨진 거울을 밟고 교실 밖으로 나갔다. 치호가 그녀의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
“나오코, 정말 미안, 이건 내가 다시 구해 볼 게.”
나오코는 귀찮다는 듯, 뒤 돌아보지 않고 낮게 말했다.
“아니, 괜찮아,
어차피 네가 살 수 있는 물건이 아니야, 먼저 갈게”
치호는 채 떨어지지 않은 눈물을 글썽이며
거울에 살짝 벤 검지를 입으로 가져갔다.
계절의 끝을 알리는 울긋불긋한 색들은 사람들의 눈을 멈추게 한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날 정도로 바싹 마른 잎이 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나오코는 하즈키가 항상 서있던 그 자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럴 리 없어.”
하즈키가 그곳에 서있을 때 보지 못했던 것들이 눈에 띄었다.
자리하지 못한 하즈키로 인해 나오코의 눈이 멈추지 않은 곳이 없다.
처음 보는 것처럼 풍성하고 키 작은 나무도 노란 은행나무도,
오래되어 낡아 깨진 아스팔트도, 그들은 나오코를 알고 있었지만,
나오코는 그들을 잘 알지 못했고, 그제야 아는 척을 해 보았다.
처음 발길을 딛는 것 같은 낯섦에 어디로 가야 할지 머뭇거리다 무작정 달려 보았다.
“약속, 해놓고... 약속했으면서.”
나오코는 자신이 느끼는 예감은 틀리지 않다 늘 생각해 왔다.
그 예감은 늘 적중 아닌 적중을 했으니까.
이번엔 하즈키가 분명 떠날 것 같았다.
어디서 잘못된 것인지 바로잡을 필요가 있었다.
물론 타다요시가 매일 같이 술에 절어 사는 모습을 보이는 이상
하즈키는 떠나지 않을 것이 분명했지만, 또한 떠날 것이 분명했다.
가을의 붉은빛은 나오코의 감정을 더욱 부추겼고
선명한 기억은 나오코를 더욱 흥분하게 만들었다.
뒤 뜰에 박혀 있는 나무를 보기 시작할 때부터 그녀의 두려움은 점점 커져만 갔다.
“쿵쾅쿵쾅.”
긴 다리는 마음이 바쁠 때 굉장히 쓸 만하다.
경사가 길게 뻗은 계단을 성큼성큼 급하게 올라갔다.
문에 들어서자마자 나동그라진 가방이 부딪혀 쇳소리를 냈다.
모리나가 밀크캐러멜을 좋아하는 예의 바른 동생 나오코는 온데간데없고,
무작정 하즈키의 방 문고리를 마구 비틀었다.
새로 바꾼 문고리 덕에 비틀 때마다
유난스럽게 들리던 삐빅, 거리는 소리조차 들을 수가 없었다.
금세 둥글고 길게 뻗은 눈에서 눈물방울이 맺혔다.
1층에선 미네코가 금속 소리처럼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를 질러 댄다.
“나오코, 뭘 집어던진 거야, 계단은 좀 살살 다닐 수는 없는 거니?”
모든 소리는 미네코의 목소리보다 더 듣기 좋을 판이다.
다시 빠르게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이번에는 투박하다.
“나오코오.”
미네코가 나오코의 앞을 가로막았다.
“나오코, 넌 인사도 안 하고 올라갔던 거야?”
현관 앞을 막은 미네코의 목소리가 짜증이 났다.
나오코의 왼쪽 눈썹이 자신도 모르게 치켜 올라갔다.
“하즈키는? 아직 안 왔어?”
“뭣? 넌 또 하즈키 타령이니?”
그제야 미네코의 앞치마를 바라보고 눈을 내리깔고 말한다.
“다녀왔어요.”
미네코는 나오코를 바라보며 혀를 끌끌 찬다.
“쯧, 쯧. 대체 너는... 뭘 하고 다니는 거야?
네 얼굴 좀 봐.”
나오코는 물을 벌컥벌컥 마시며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에 땀이 범벅이 된 것을 눈치챘다.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눈빛에는 오기와 약이 바싹 올라있는 상태였다.
흰 셔츠의 소매자락에 얼굴을 비벼 닦았다.
나오코는 타다요시의 방을 들여다보며 빠르게 신발을 신었다.
미네코는 국자를 들고 나오코의 뒤통수에 대고 소리를 지른다.
“오늘 저녁은 식구들이 다 모여서 식사할 거야,
모처럼 아빠도 일찍 들어오실 거야
나오코. 오늘 같은 날은 날, 실망시키는 건 아니겠지?"
나오코의 대답은 건조하고 간단했다.
“응.”
“부탁이야, 나오코.”
나오코는 뒤돌아 미네코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우스꽝스럽게 타다요시를 쫓고 있는 미네코의 모습이
꼭, 하즈키를 쫒는 자신 같아서 토악질이 올라올 것만 같다.
“나오코, 타다요시는 오늘 일찍 들어올 거야,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거야.”
미네코가 나오코의 팔을 꽉 움켜쥐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악, 소리와 함께 나오코는 손을 뿌리치며 빠르게 달려 나갔다.
‘나는 달라, 치호도 엄마도, 난 달라 우린 달라.’
나오코는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같은 말을 반복해서 외쳤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의 높이가 궁금했다.
정말 높다는 건, 얼마큼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즈키의 얼굴은 높아서 고개를 꺾어야만 관찰이 가능하다.
높고 파란 하늘은 꺾어보지 않아도 멀리서 보면 모든 게 다 보인다.
빛나는 갈색 눈을 완벽하게 고개를 꺾지 않아도 오랫동안 관찰하고 싶었다.
하늘에서 노란 은행잎이 나선형 바람을 타고 떨어졌다.
샛노란 가을 색에 심술이 났는지 나오코는 노란 잎을 밟아 짓이겼다.
잎에 남은 수분은 발자국을 남겼다.
나이 많은 나무의 껍질이 들떠,
손으로 만지면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다.
나오코는 정중히 나이 많은 나무를 보며 손짓으로 인사를 건넨다.
갑자기 두꺼운 껍질이 툭, 떨어지는 바람에
나오코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소리 없는 속 울음은 깊은 슬픔을 띄고 얼굴에 짙게 묻어났다.
눈물이 동이 날 때쯤 버릇처럼
주머니 속에서 거울을 찾았다.
역시 빈손을 떨궜고, 화가 치밀었다.
그 거울은 타다요시의 집에 몸을 옮기고
첫 생일을 맞았을 때 그가 준 선물이다.
미네코가 거울을 망가뜨렸다는 사실을 알아버린다면, 이라
생각하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동그란 눈은 퉁퉁 부어 눈동자를 잃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수돗물로 얼굴을 적셨다.
벌써 얼음처럼 차가워진 물에 화들짝 놀라 신음이 튀어나왔다.
“어웃.”
복숭아색 손바닥이 붉게 물들었다.
바람을 타고 오는 웃음소리,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한 하즈키의 소리다.
나오코는 벤치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를 따라 급하게 걸음을 옮겼다.
“엇, 하즈키?”
나오코는 머리를 매만지고 눈을 크게 떴다.
정말 하즈키가 있었다.
그 옆에 앉아 있는 낯선 여자의
커다란 눈과 핑크빛 립스틱을 바른 입술을 바라보고
하즈키가 자꾸만 웃는다.
등을 보이고 앉아 있는 사람은 분명히 멍청한 겐토다.
나오코가 길게 한숨을 쉬며 돌아온 하즈키에게 고민도 없이 소리쳤다.
“하아, 즈으키!”
하즈키는 듣지 못했는지 핑크빛 여자를 보고 또 웃는다.
잘 웃지 않는 그가 스위치처럼 웃었다, 그쳤다 또 웃었다, 를 하고 있었다.
하즈키를 찾은 기쁨도 잠시, 이를 악물고 괴상한 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찬 바람에 목소리가 갈라진다.
“히다아아.”
그들은 동시에 나오코를 바라보았다.
“엇, 나오코?”
나오코의 눈은 핑크 입술, 여자에게만 멈추어 있었다.
놀란 하즈키는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아, 이런.”
나오코는 볼멘소리로 분홍 입술을 흘긋거리며 말했다.
“잊은 거야? 어떻게?”
“아, 정말 미안. 알고 있었는데, 시간이 이렇게 된 줄은...”
나오코는 하즈키의 말을 싹둑 끊어버리며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괜찮아, 난 친구를 만나고 오는 길이니까.”
하즈키가 일어나 머리를 긁적였다.
“아... 정말 미안 나오코.”
꽤 당황스러운 눈치다.
나오코는 그래도 알고 있었다는
하즈키의 말에 서운한 감정이 조금 사그라들었다.
“괜찮아.”
나오코는 동그란 눈을 커다랗게 뜨고
다시 낯선 그녀를 보더니 또박또박 힘주어 말했다.
목소리는 또 갈라졌고, 창피했는지, 추웠는지 얼굴이 발개졌다.
“근데, 여긴 왜 왔어?”
하즈키의 말에 나오코는 자꾸만 서운하다.
“친구 만나고 가는 길이라고 했잖아.”
멍청이 겐토가 처음부터 말을 꺼낼 틈만 노리는 것 같았다.
겐토가 나오코를 정말 반기는 표정으로 그녀를 훑어 내려갔다.
아니 눈을 떼지 않고 계속 바라보았다.
“나오코, 오랜만인데? 우와, 이젠 몰라보겠다,
정말이지 숙녀가 다 되었는걸?”
하즈키가 멀뚱멀뚱 서 있는 나오코의 손목을 잡고 벤치에 앉혔다.
“숙녀는 무슨...”
하즈키는 어린아이를 다루는 손길로 나오코의 코를 잡아당겼다.
나오코는 여전히 여자가 거슬린다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하즈키는 마치 자신과 굉장히 친하다는 것처럼
여자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다정하게 말을 했다.
“이 친구는 코바야시 마나츠.”
하즈키가 나오코를 소개할 겨를도 없이 나오코가 직접 자신을 소개한다.
“난 나오코.”
하즈키는 또다시 아이 다루듯,
버릇처럼 나오코의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려 놓는다.
“마나츠, 이 꼬마는 내 동생.”
“동생 너무 귀엽다, 나도 여동생이 있으면 좋겠어,
정말 반가워 나오코.”
마나츠가 하즈키에게 자꾸 눈웃음치며 얌전한 척 치근덕거렸다.
마나츠의 목소리는 핑크빛 립스틱처럼 가늘고 아기 같다.
나오코의 귀마저 간질이고 있었다.
“하즈키, 오늘 저녁, 잊은 건 아니지?”
나오코는 하즈키를 당장 이곳에서 데리고 가고 싶었다.
“응.”
마나츠는 삼각형 모양의 플래어 스커트에
분홍색 카디건을 걸치고 있었다.
성인의 도드라진 여성스러움에
자연스럽게 나오코의 입술이 자꾸만 삐뚤어지는 것은 당연했다.
더군다나, 쌀쌀한 바람에 새하얀 다리를 막아주고 있는 것은 하즈키의 남색 카디건이다.
나오코의 앙다문 입안에서는
자신만 들을 수 있는 씩씩거리는 소리가
심장을 더욱 요동치게 했다.
마나츠의 여성스러움과 간드러짐은
웃을수록 말할수록 손짓할수록 더해지고 있었다.
나오코의 눈에는 모든 것이 하즈키를 놀려 먹을 헤픈 모습으로만 보여질 뿐이다.
내내 하즈키의 눈은 나오코가 아닌 마나츠를 따라가고 있었다.
나오코는 다시 갈라질 것 같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용기를 더해 본다.
“하즈키, 같이 가.”
나오코의 목소리를 들은 게 분명하면서 하즈키의 눈은 마나츠를 바라보고 말하고 있었다.
“먼저 가, 나오코. 저녁 시간에는 들어갈 거니까.”
더 이상 풀 죽은 자기의 어깨를 되살릴 수가 없다.
나오코의 고개는 푹, 목소리도 기어들어 갔다.
“그럼, 그렇게 해.”
나오코의 머릿속에는 타다요시를 쫓는 미네코의 얼굴이 떠올랐고
처음 보는 여자 앞에서 자신의 기죽은 모습에 굴욕감을 금치 못했다.
‘난, 달라...’
점점 거리가 멀어지고 있었고
마나츠의 간질거리는 웃음소리가 더욱 요란하고 선명하게 들려왔고,
멍청이 겐토는 눈치 없이 나오코에게 소리쳤다.
“꼬마 아가씨! 또 보자!”
눈치도 없고 멍청한 겐토의 입을 뭉개 버리고 싶었다.
나오코는 모른 척하며 더 빠른 걸음으로
벌거벗은 뒷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 애를 쓴다.
마나츠란 여자는 알아볼 필요도 없이
나오코에겐 오늘부터 못된 여자가 되어 버렸다.
나오코의 눈빛을 봤음에도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일부러 더 크게 웃었고, 하즈키의 눈을 일부러 더 끌고 다녔다.
나오코는 다시 불단을 세울 작정이다.
나오코는 죽은 사람은 산 사람을 도와줄 수 없다고 믿고 있었다.
도와줄 수 있었다면 죽은 아빠가 자신을 모른 척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믿는 신은 나오코가 정성을 들이는 만큼 그녀를 버리지 않았다.
이미 박혀, 많이 자란 나무를 벨 수는 없는 노릇이니
나오코의 재단 위에 나무를 박아 놓은 사람과
똑같이 머리를 굴릴 수밖에 없다.
나오코는 사방이 막힌 것 같이 막힌 가슴이 답답했다.
가슴에 손을 얹고 툭툭, 쳐 보았다.
그녀가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가슴 깊숙한 곳에서 터져 나오는 통증이었다.
나오코는 하즈키의 웃음을 생각했다.
‘진짜, 웃음이었던 거야? 멍청한 하즈키.’
오랜만에 하즈키는 평범했고, 정상적이었고, 웃고 있었다.
늘 안고 다니던 불안함, 우울함은 보이지 않았다.
다시 흐르는 나오코의 눈물이 반짝이는 구두 위로 뚝, 하고 떨어졌다.
마나츠의 새하얀 다리 위로 하즈키의 카디건이 자꾸만 아른거린다.
하즈키의 카디건 속엔 그녀의 살냄새가 베어 날 것이다.
나오코의 분홍 손바닥이 다시 벌겋게 달아올랐다.
결국, 나오코는 핑계 섞인 통증으로
미네코가 바라는 올바른 가족의 저녁 식사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2주 만의 교육을 마치고 돌아온 하즈키는 마치 딴 사람 같았고,
웃음을 짓고 있는 그의 눈을 보는 미네코는 너무 달라진 모습에 어안이 벙벙했다.
식사를 마친 순간, 하즈키의 목소리는 들어 보지 못한 높은음을 말했다.
“정말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하즈키의 목소리는 진심이 묻어나는 소리였다.
“그래, 고마워.”
어떤 표정도 없는 미네코는
차를 마시고 있는 타다요시의 얼굴만 여전히 바라볼 뿐이다.
딱히, 이유를 알 수는 없었지만
타다요시는 처음에 미네코에게 주던 관심이 절반도 안 되기 시작했다.
하즈키는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타다요시의 반응을 재촉하고 싶어
다리라도 흠씬 차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두 부부 사이의 불편함은 하즈키를 불안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게 평화로워 보이던 관계도
세월을 이기지 못했는지 남자답지 않은 비열함만 가득해 보였다.
“하즈키는 아주 좋아 보여.”
미네코는 마치 자신은 불행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만 같다.
요즘 들어 하즈키는 미네코와 말을 섞는 일이 잦다.
솔직히 미네코가 타다요시 보다 더 편했다.
“나오코는 많이 아파요?”
“감기가 유행하는 계절이잖니?”
걱정하는 엄마의 말투 같지 않아 그가 다 서운하다.
꼭, 아프지 않은 것이 이상하다는 뜻으로 들렸다.
“전, 이만 올라가 볼 게요.”
“푹 쉬거라.”
그때 타다요시가 하즈키를 불러 세웠다.
“하즈키.”
덥수룩한 수염은 세월의 흰 부분을 더 많이 달고 있었다.
오랜만에 고개를 들고 눈을 마주치는 타다요시가 미네코는 반갑다.
하즈키는 자신의 이름을 불러본 적이 있었나, 라 생각하게 만드는
타다요시의 목소리가 몰라보게 늙어 있었고 낯설었다.
묵직한 무엇이 목에 잔뜩 걸려 있는 목소리가 마음에 걸렸다.
술을 입에 대고 들어온 것이 분명하다.
아버지의 목소리에 하즈키는 어중간한 자세로 갈피를 잡지 못했다.
타다요시는 민망할 정도로 오랜 시간 동안 하즈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말씀하세요.”
타다요시는 갑자기 쿨럭, 거리더니
휴지에 먼지 덩이 같은 가래를 퉤, 하고 뱉는다.
신기하게도 그 모습이 더러울 법도 했지만,
미네코는 나란히 앉아 있는 자기의 남자가 그저 좋기만 한 눈빛이었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누런 휴지를 집으며 다른 손은 타다요시의 하얀 털에 묻는 액체를 닦아냈다.
“음, 혹시 피곤하지 않다면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타다요시 성격에 아들에게 허락받고 대화를 하자는 식의 말투는
굉장히 낯설고 용서할 수 없는 나약함이다.
“네, 그러세요.”
아버지는 엉거주춤한 자세를 바로잡고 다다미에 앉았다.
유난히 흰색 부분의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꺼낸다.
“내가 올라가마. 위에서 보자.”
미네코는 타다요시의 아들에게 남편을 한시라도 뺏기고 싶지 않은 눈치다.
하즈키는 물론 미네코를 이해했다.
얼마나 오랜만에 타다요시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지,
한눈에 보아도 타다요시를 원망하는 눈빛이다.
당연히 미네코의 얼굴은 불만이 가득해지고 그 눈빛은 오랜만에 서늘했다.
“네, 먼저 올라갈게요.”
타다요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미네코는 하즈키의 발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멀어진 후 에야 입을 뗐다.
“여보, 우리 이렇게 마주 앉은 게 얼마만이지... 몰라요.”
미네코의 목소리 끝이 잠시 흔들렸다.
타다요시는 여전히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한다.
“그러하네, 늘 미안하게 생각해.”
타다요시는 다 마신 찻잔을 한쪽으로 밀어내며 천천히 일어났다.
미네코의 눈은 깜빡이지도 않은 채 그를 따랐고,
그는 아는지, 모르는지 서러운 감정이 올라올 뿐이다.
“2층에서 술 한잔 할 테니, 준비 좀 해주지.”
그제야 둘은 눈을 마주했다.
미네코는 할 말을 입안에 가득 담은 채 꿀꺽, 하고 삼켜 버렸다.
“네, 그럴게요.”
하즈키는 꼭꼭, 잠긴 나오코의 방문에 노크했다.
“똑똑.”
반응이 없는 문에 대고 하즈키는 어깨를 살짝 올리며 머쓱한 표정을 짓는다.
나오코는 열로 인해 발간 얼굴을 하고
그의 노크 소리에 벌떡 일어나 다시 한번 귀 기울였다.
한 번의 노크로 문을 활짝 열어 버린다면
자신이 봐도 매력적인 마나츠 같은 여자가 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고양이 발걸음 소리를 하고
문고리에 귀를 바싹 갖다 대고
두 번째 노크 소리를 기다렸다.
하즈키가 발을 옮기는 기분 나쁜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달칵하고 문고리를 잠그는 소리까지 들렸다.
고요하고 평온해 보이는 하즈키의 발소리까지도 두려웠다.
금방이라도 모르는 곳으로 몰래 날아갈 것 같아 숨소리조차 내기 힘이 든다.
결국 기대했던 하즈키의 목소리는 듣지 못했다.
잠가 놓은 문고리를 혹시나 살며시 열어 놓고
혹여 듣지 못한 건가 싶어 귀를 쫑긋 세워본다.
다시 또, 오매불망 타다요시를 기다리는 미네코가 생각나 붉어진 얼굴로 자리에 드러누웠다.
‘나는 다르니까.’
미네코가 준비해 온 생강차와 감기약을 먹고 나니,
빠르게 의식이 흐려짐을 느꼈다.
정신을 차리고 뒷마당으로 몸을 옮기려 하지만 말을 듣지 않았다.
흐린 의식에 잠시 미네코가 준 약이 의심스러웠다가
이내 고개를 내젓는다.
눈에 힘을 주어 보지만 소용이 없었다.
점점 눈앞은 흐릿한 안개가 끼는 것 같았고,
희미하게 보이는 그림자는 하즈키가 보이는 것 같았다.
하즈키가 열이 끓어오르는 나오코의 이마를, 볼을, 그리고 목을 확인했다.
뭐라 말하려 했지만 목소리는 말을 듣지 않았고 하즈키도 듣지 않은 채 가버렸다.
그 순간을 나오코의 욕심처럼 잡을 수가 없다.
순식간에 눈앞에 캄캄한 암흑이 펼쳐졌고,
아주 기다란 꼬리를 갖고 있는 쥐 한 마리가 자신을 따라오라며 꼬리를 흔들었다.
나오코가 어렵게 긴 꼬리를 잡은 순간 커다란 쥐에 온몸이 질질 끌려갔다.
악 소리를 내고 싶지만 도통 입을 벌어지지 않았고,
온몸이 욱신거리고 뼈마디가 부러진 것처럼 통증이 밀려오더니 잠시 정신을 잃었다.
하즈키는 뭔가 하긴 했다, 는 뜻의 숨을 크게 쉬었다.
2주가 2년 같았던 지루한 시간을 마감하니, 살 것 같았다.
먼저 오래 묵은 나무가 보내는 특유의 톡 쏘는 향을 창문을 열어 날렸다.
혹시나 묻었을 아크릴 액자의 먼지도 손바닥으로 쓱, 쓸어본다.
“녀석 많이 아픈가...”
생각해 보니 공원에서 나오코의 모습은 어딘가 이상했다.
굉장히 급하고 당황스러워 어찌할 줄 몰라하는 모습이었고,
얼굴과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
발개진 얼굴은 더 이상해 보였다.
그때 벌써 몸이 좋지 않았던 것이 분명했다.
눈치채지 못하고 알아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문을 똑, 하고 한 번 두드리다 말고
혹시나 잠이 들었으면 어쩌지,라는 생각에
소심한 소리를 내 보았지만 역시 조용했다.
갑자기 삐익,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틈 사이가 벌어졌다.
역시 나무집은 세월을 먹으면 사람처럼 아픈 티를 내기 바쁘다.
다행히 고타츠 덕에 방은 따뜻했다.
나오코의 잠이 든 모습은 영락없는 환자의 모습이다.
이마는 뜨거운 열로 식은땀이 흘러 범벅이었고,
그 땀은 목까지 쭈욱, 흘러내린 모양이 안타깝기까지 했다.
타다요시의 관심에만 열을 올리는 미네코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즈키는 급하게 마른 수건을 집어 조심스럽게 닦아내주었다.
나오코의 볼은 찬바람에 얼마나 다녔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벌겋게 터서 하얀 가루까지 덕지덕지 붙어 있는 모양새다.
하즈키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후, 쯧.”
땀으로 축축한 윗옷이 계속 거슬리게 했지만, 방법이 없다.
미네코에게 말했다가 괜히 이상한 오해를 받을 것 같기도 했기 때문이다.
잠 속에 빠진 나오코는 꿈을 꾸는지 이불을 힘없이 잡아당기더니
힘없이 허우적댔다.
한참을 멍하니 보고 서있을 뿐,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다시 고요한 시간이 다가왔을 땐,
나오코의 얼굴이 조금 전보다 생기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를 자세히 들여다보니
처음 나오코를 마주했을 때의 장난기 가득한 얼굴은 어느새 사라지고
여느 사춘기 소녀처럼 세상의 모든 고민을 가득 싣고 있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즈키는 그때 자기 모습을 엿보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끝이 없을 것 같은 방황의 바람은 잔잔 해지기만 했을 뿐, 언제든지 태풍은 불어올 것이다.
하즈키는 나오코가 진심으로 행복해지길 빌었다.
나오코의 평온함을 깨기 싫었다.
살며시 걸어 보아도 삐걱거리는 나무를 탓해 봤자,
소용이 없을 터 찬 바람이 틈으로 새어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을 꼭 걸어 잠갔다.
하즈키는 타다요시와의 오래된 대화를 생각해 보았다.
언제 가 마지막이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고 무척 생소했다.
하즈키의 이마에는 저절로 십 일자의 주름이 생겨났다.
긴장감이 지속되고 있는 불안정한 사춘기의 감정을 그만, 막을 내리려던 참이었다.
하즈키는 시간이 빨리 흘러 마냥, 어른이 되기만을 바랐던 소년이 아니었다.
투박하고 느릿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발 등으로 차버리는 듯한 노크 소리에 기분이 굉장히 나빠졌다.
“탁, 탁.”
“나다.”
하즈키는 벌떡 일어나 문을 활짝 열었다.
“들어오세요.”
하즈키는 덜컥 겁이 났다.
아버지의 눈은 마치 엄마가 죽기 전의 눈과 같아 보였다.
하즈키를 보고 있지만, 보고 있는 것 같지 않다.
하즈키는 그제야 추워진 방 안의 공기를 느끼며, 창문을 닫았다.
아들은 아버지의 눈과 얼굴과 몸을 찬찬히 살핀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큰 키에 낯설게 굽어 있는 등과 움츠려 있는 어깨는
정상적이지 않은 감정을 꺼내 놓을 것 같아 무서웠다.
“언제까지 그렇게 서 있을 거야?
내려가서 미네코를 도와.”
“아, 네.”
타다요시가 손목을 바닥에 짚고 앉는 낯선 모습에도 눈이 동그래진다.
타다요시가 무엇에 기대고 앉는 모습이라니,
하즈키가 날름 집어먹은 겁은 점점 더 커졌다.
하즈키는 꼭, 미네코를 불러야 하는 상황이 올 때마다
머뭇거리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러다 보면 고맙게도 늘, 미네코가 먼저 뒤를 돌아보는 상황이 오게 된다.
꼭, 엄마라는 호칭을 부르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대체 얼마나 자주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미네코의 얼굴은 다시 뽀얘졌고,
붉은 입술은 더욱 탱글탱글해 보인다.
미네코가 굉장한 미인임은 확실하다.
나오코의 눈은 길게 뻗은 쌍꺼풀 없는 커다란 눈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네코와는 조금 다른 얼굴이었다.
미네코의 눈은 서양인의 것과 같았다.
하지만 나오코는 시간이 갈수록, 자연스럽게 제 엄마를 똑 닮아 갔다.
미네코를 볼 때마다 잠깐,
튀어나오는 나오코의 얼굴을 목격할 때면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며 화들짝, 놀라곤 한다.
“왜 그렇게 놀라?”
미네코는 슬픔과 두려움을 모두 갖고 있는 눈을 하고 그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아, 아니에요.”
미네코는 한숨을 일부러 길고 커다란 소리를 내며
하즈키의 기를 죽였다.
마치 자신의 시간을 훔쳐 갔다고 숨소리로 타박하는 것 같았다.
“후, 하...”
미네코가 작은 교자상을 밀어 하즈키에 건넸다.
하즈키는 그녀를 보며 유독 빛나는 갈색 눈을 반짝였다.
“고맙습니다.”
미네코는 그의 등 뒤로 젖은 목소리를 힘없이 떨구었다.
“하즈키, 네가 다 부럽구나...”
늘어놓은 말이 꽤, 솔직했는지
미네코는 민망함에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하즈키는 그런 미네코가 맘에 들어할 만한 대답을 하고 싶어
한참을 생각해다 뒤도 보지 않고 말했다.
“오래 걸리지 않아요.”
비열한 타다요시 대신 미네코의 마음을 녹여 줄 필요는 있었다.
미네코는 하즈키가 친절하게 굴 때마다
반사적으로 거부감이 들었지만, 반짝이는 갈색 눈을 바라보면
자신의 욕심껏 하즈키를 대할 수가 없었다.
하즈키 때문에 타다요시와의 사이가 멀어졌다는 것은
미네코 또한 억지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또한 그건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네코는 핑계 댈 곳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물론 조르거나, 잔소리하거나 다툰다는 것은
남편과의 사이에 있어서 절대 일어날 수는 없는 일이다.
타다요시는 싸움이 시작되기도 전에
빠르게 입을 닫아 버리는 사람이니 말이다.
만약, 그것이 가능했다면
지금처럼 하즈키에게 치사하게 투정 비슷한 감정을 비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나마 하즈키에겐 그것이 가능했고, 하즈키는 미네코를 이해했다.
“달칵.”
미네코는 문소리가 들리자마자 의자에 앉아 몸을 둥글게 말았다.
베인 상처에는 소독하고 약을 바르면 위안이 되고
잠시 후엔 고통도 가라앉는다.
외로움이 눈에 보이는 것이라면 치료는 가능했고 빨랐을 것이다.
발목부터 죄어 오는 외로움은
결국 목까지 차오르며 숨쉬기도 버거울 지경이었다.
외로움에 목이 서늘해졌다.
차가운 공기는 바닥에 깔아 놓은 다다미가
마치 얼어붙어 손만 갖다 대도 따닥, 따닥 소리를 내며 부서질 질 것처럼 만들었다.
미네코는 바닥에 잔을 놓고 심술궂은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위스키를 넘치게 따랐다.
“조르륵, 조르륵.”
빠르게 톡 쏘는 알코올의 향이 코를 자극했다.
한 번에 들이켠 위스키는 목을 타고 내려가 위를 뜨겁게 녹여 준다.
조금 녹아든 외로움은 천천히 목을 타고 내려가 발목에 자리 잡았다.
짜증 섞인 신음이 저절로 나온다.
“아, 아...”
죽은 남편의 얼굴이 떠올랐다.
남편은 죽기 전까지도 그 여자의 이름을 읊어댔다.
마지막까지 아내로 딸의 엄마로서 지켜 줘야 할 자존심까지 짓밟았다.
죽은 남편의 여자는 남편을 사랑하지 않았다.
아니, 열렬히 사랑했으나, 그 사랑은 식었다.
미네코는 괴로워하는 남편을 보고 여자의 소식을 알릴 수가 없었다.
그렇게 시간은 계속 흘러갔고,
남편의 여자는 남편의 직장 동료와 결혼했다.
물론, 회사 내에서도 둘의 관계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으며,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과거가 되어 버린 그 둘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남편의 짝사랑이었다고 소문이 나 있었다.
‘바보 같은 사람...’
결국, 그 여자의 결혼을 알게 된 후,
나약한 미네코의 남편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점점 피폐해지기 시작했다.
직장 내에서는 여자의 결혼을 가로막는 스토커에 불과한 사람이 되었고,
사람도, 직장도, 또한 아내의 신뢰도 그는 모든 것을 잃었다.
그의 입에서는 매일 같이 술 냄새와 죽음이라는 단어가 맴돌았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점점 성장해 가는 나오코에게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들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남편은 정상적인 정신을 갖고 살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 남편은 배가 불룩한 그 여자를 찾아갔다.
남편에게 오로지 맹목적인 사랑을 퍼붓고 있었던 딸,
나오코는 그때 그 여자를 보았다.
딸 앞에서 남편은 여자를 위한 평생의 눈물을 퍼부었다고 한다.
여자 또한 눈물을 훔치며 나오코의 볼을 쓰다듬었다.
남편이 죽고 난 뒤, 나오코는 미네코에게 눈물을 보이며 말했다.
“아빠는 죽어서도 그 여자를 사랑할까?”
정신 나간 남편은
그 여자 배 속의 아이가 자신의 아이가 확실하다며
미네코는 아내도 아닌, 엄마도 아닌 사람으로 살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었다.
미네코의 몸은 날이 갈수록 뼈가 앙상하게 드러났고,
입술을 붉은 석류를 일 년 내내 먹고 다니는 사람 같았다.
물론 나오코의 보호자 역할 또한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남편은 매일 같이 배부른 여자를 찾아갔고,
미네코 또한 매일 같이 남편의 뒤를 밟았다.
결국 미네코가 살인자가 될 만한 구실을 만들어 준 건
부녀였다는 것을 누구도 의심치 않았을 것이다.
가질 수 없는 사랑에 남편은 결국 죽음을 선택했다.
남편은 아주 오랫동안 연습해 온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두꺼운 밧줄을 목에 칭칭 감았다.
때마침 들어온 미네코는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까만 피부를 갖고 있었던 남편의 목에
새하얀 밧줄이 감기는 모습은 이상하게 아름다워 보였다.
남편을 서둘러 막지 않았고
남편은 자신을 바라보는 미네코를 보고
희미하게 입술을 이죽거렸다.
하얗고 커다란 뱀은 먹이가 움직이지 않도록 똬리를 틀어 조이고 또 조였다.
검고 끈적한 강을 건너는 그 순간
남편은 여자를 만났던 것 같았다.
남편의 입에서 여자의 이름이 나지막하게 들려왔다.
그는 손을 들어 올렸고
미세한 떨림은 생의 마지막 움직임을 의미했다.
미네코는 끝까지 그에게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고 내내 지켜만 보았다.
미네코는 남편이 죽어 없어진 그날,
드디어 오랜만에 달콤한 잠을 잘 수 있었다.
남편이 떠난 지 2년 후,
납골당에서 그 여자를 다시 보았다.
빛이 반짝거리는 고급 승용차에서
여자의 아들로 보이는 아이와 손을 잡고 내렸다.
그 여자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이 반짝였다.
그 여자를 맞이한 바람이 빠르게 미네코에게 다가왔다.
엄청나게 많은 양의 돈 냄새가 풍겼다.
진한 장미 향은 미네코의 잠잠했던 분노를 터트리기 일보직전이었다.
늦은 밤, 고양이처럼 이불속으로 기어들어 오던
남편의 귓등과 목과 손, 온몸에서 나던 그 냄새였다.
그 여자의 어린 아들은 나오코를 보고 있었다.
그놈은 영락없는 죽은 남편의 자식이다.
정신 나간 그 남자의 말이 옳았다.
남편이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 여자는 결혼 후에도 남편을 만나 왔던 것이 분명해졌다.
당장이라도 여자의 남자를 만나
장미 향을 풍기며 가족을 망가뜨리고 싶었다.
용서할 수가 없었다.
사라졌던 욕구와 분노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여자와 아이의 불꽃을 꺼뜨리고 싶었다.
그 어린 아들놈의 눈깔은 윤기가 났다.
그때 자신이 잡고 있던 나오코의 손을 내려보았다.
나오코의 얼굴은 잘 먹지 못해
하얀 꽃을 얼굴에 활짝 피웠고,
때 묻은 원피스는 퀴퀴한 냄새가 풍겼다.
남편의 아들이 신은 하얀 스타킹은 너무도 새하얘서 눈이 부셨다.
얼굴은 뽀얗게 빛이 났고
아들에게도 그 냄새가 풍겼다.
미네코는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목 놓아 울었다.
그런 미네코를 보고 나오코는 저주를 가득 담은 눈빛을 하고 보았다.
미네코는 남편이 죽었을 때,
눈물 한 방울조차 인심 쓰지 않았다.
아니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억울함을 갚을 형체가 사라진 것만으로도 분노가 끓었고
눈물이 나왔다면 그 분노 때문일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어린 딸은
그런 엄마를 두고 저주 퍼붓기에 바빴다.
남편을 맹목적으로 사랑하는 딸에게
모든 것을 풀어놓는다는 것은 또 다른 죽음을 의미하는 일일 것이다.
미네코는 여전히 딸에게 살인자이며 나쁜 엄마였다.
남편의 여자가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미네코는 딸에게 살인자로 남아야 할 것이다.
‘그래, 난 살인자야’
타다요시는 오랫동안 아들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앉거라.”
하즈키는 타다요시의 잔에 블랙 니카를 따르고
자신의 잔에도 따라 낸다.
위스키의 색은 어느 때보다 더 맑고 선명했다.
타다요시는 투박한 손가락으로 얼음을 집더니,
얼음을 휙, 하고 잔으로 던졌다.
타다요시의 얼굴을 자세히 본 적이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지금의 타다요시 얼굴은 전혀 다른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다.
까맣게 탄 얼굴, 입술은 바싹 말라비틀어진 회색빛,
아름답게 빛났던 젊은 날의 빛나던 갈색 눈은
누리끼리한 흰자와의 싸움에서 밀려 버린 지, 오래다.
그의 초점 또한 명확하지 못한 채 흐려져 있다.
하즈키는 고개를 좌우로 조금씩 움직여 보았다.
이상하게 타다요시의 초점이 어디로 향해 있는지
가늠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확인할 수 없음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타다요시는 늘 블랙 니카를 휙, 하고
삼키는 소리도 내지 않고 마셔 버렸다.
술은 한 시간을 채 버티지 못했다.
타다요시는 지금, 한 잔의 술이 입술에 머무는 시간은 굉장히 길었다.
마치 그가 가장 싫어하는 탄산음료를 마시고 있는 것 같다.
타다요시는 한 모금조차 넘기기가 버거워 보였다.
넘겨내는 목울대조차 거무튀튀한 색으로 완전히 탄력을 잃었다.
힘겹게 꿀꺽, 꿀꺽 굵은 주름은 징그럽기까지 하다.
쓴맛에 급격히 일그러진 그의 눈이 피곤해 보였다.
하즈키는 휴, 하며 한숨을 삼키며 술도 함께 삼킨다.
“하즈키, 미안하구나.”
하즈키는 조용히 뒷말을 기다린다.
“네가 자랑스러워,
대학 공부를 포기할 때도 나는 너를 포기하지 않았어
난 늘 솔직하지 못했지...”
하즈키는 한 모금 더 꿀꺽한다.
'
“부모는 자식을 포기하는 법이 없지...”
타다요시는 숨을 들이켜다 기침한다.
“쿨럭쿨럭, 방이 좀 차구나. 미네코를 불러야겠어.”
“창문을 열어 두어서 그래요, 곧 따뜻해질 거예요.”
하즈키 반 잔이 되는 한 잔을 따라 내며 빠르게 말을 꺼냈다.
“정식으로 회사에 취직도 했고, 열심히 해 볼 게요.”
타다요시의 눈이 웃음을 짓는다.
“응, 그래야지 하즈키...
네가 이곳을 떠나려 했다는 것을 잘 알아 물론, 지금도 그렇겠지
내가 장애물인 것도 잘 알아”
아들은 죄지은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타다요시의 기침 소리는 더 길어졌다.
“쿨럭쿨럭, 넌 곧 23살이 되겠지
세월이 참 빨라, 난 아직도
네가 처음 걸음을 걸었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말이다.”
아들은 갑자기 일어나 책상 위 아크릴 액자를 들고 아버지에게 내민다.
“이때처럼 말이죠?"
하즈키가 미소 지었다.
건넨 아크릴 액자를 보며 타다요시가 한참을 끄덕거렸다.
그의 탄식이 길었다.
“하아아아아...”
쇳덩이처럼 무거운 자물쇠로 잠가 놓은
감정의 소용돌이가 쿵쾅, 거리며 심장을 요동치게 했다.
사이사이 새어 나오는 기침은 누리끼리한 흰자에 붉은 거미줄을 쳐 놓았다.
하즈키는 불안했다.
물을 따라 타다요시에게 건넸지만, 그는 여전히 술을 마실 땐 물을 마시지 않았다.
“네 엄마는 늙지도 않고, 지금도 꼬마를 꼭 잡고 놓지 않는 군
뭐가 그리 급해서, 왜 그리 빨리 갔을까...”
타다요시는 하즈키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그녀를 사랑했다.
하즈키의 손을 꼭 잡고 걷다가 발이 엉키기라도 할 때엔
빠르게 달려와 그녀를 먼저 일으키곤 했다.
다친 곳이 없는지 꼼꼼하게 살피던
타다요시의 눈은 하즈키처럼 반짝이던 아름다운 밝은 갈색 눈이었다.
그는 허탈하게 가지런하지 못한 이를 내 보이며 웃었다.
“하하하 하즈키, 이젠 네 삶을 살아
경험은 언제나 좋은 선택이지
언제든지 네가 선택한 것이 틀렸다는 생각이 들면
머물지 말고 네 길을 갔으면 해
지금까지 내가 널 얽매이게 한 것 같아 미안했다
난 아마 네게 큰 걸림돌이 될 거야, 아주 큰 죄를 저질렀어."
타다요시는 하즈키를 뚫어질 듯이 바라보며 눈으로 총알 질을 해댔다.
“내게 얽매여서 네 인생을 저울질하지 말 거라,
이제 내 옆에는 미네코가 있어.”
타다요시는 마치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사람처럼 눈은 속죄를 말하고 있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난 네가 더 넓은 곳으로 갔으면 좋겠다.”
타다요시는 하즈키의 어깨를 툭, 하고 주먹으로 건드려 본다.
하즈키는 살짝 피하더니, 굉장히 아픈 척 허세를 떨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 건가요?"
타다요시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
그리고 고개를 저으며 어색한 웃음을 짓는다.
하즈키는 타다요시를 바라보며 빛나는 갈색 눈으로 이야기한다.
‘난 늘 불안정했던 당신을 닮았어요.’
타다요시는 눈을 내리깔고,
자신을 쏙 빼닮은 꼬마와 늙지 않은 모나리자를 아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곧, 긴 겨울 방학이 시작된다.
바스락거리는 낙엽들조차 발에 밟히지 않을 즈음이 되면
공원 또한 사람 보기가 힘들어진다.
나오코는 어둠이 긴 겨울을 좋아하지 않는다.
빠르게 기울어 가는 해를 바라보면
집으로 향해야 하는 시간이 빠르게 다가오는 것 같았다.
또한 방학이 시작되면 미네코를 바라보고 있는 시간도 길어지고,
무사히 하루를 마치기 위해서는
그녀의 비위를 맞춰줘야 하는데, 그건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사춘기 시작을 알리려는 몸부림같이
굉장한 고열과 통증에 시달린 후부터,
하즈키와 대화하는 시간이 부쩍 줄어들었다.
낯설게도 하즈키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고,
굳게 마음먹고 보려고 하는 날에는
어김없이 붉어지는 얼굴과 가슴 통증은 꼭, 하즈키에게 들켰다.
아니, 나오코 혼자만의 생각이 분명할 것이다.
줄어든 말수와 눈치를 슬금슬금 보는 나오코를 보며
하즈키는 사춘기가 찾아왔다며 놀리기 일쑤다.
나오코는 결국 눈엣가시였던 뒤뜰에
키가 커진 나무를 뽑아낼 수도, 잘라낼 수도 없었다.
모든 방법이 통하지 않았다.
타다요시와 하즈키의 은밀한 대화가 시작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에
그의 방문에 귀를 기울이다 그 비밀스러운 키 큰 나무에 대해 알게 되고 말았다.
그 나무는 타다요시의 의해서 심어진 것이고,
나오코가 저지르고 있는 모든 행태에 대해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쥐를 몰래 잡아 마치 저장해 놓은 것처럼 보이는 그곳에 나무를 심다니,
기막힌 생각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곳은 나오코가 신에게 재물을 바쳐야 하는 곳으로
기도가 이루어지는 자신만의 공간이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거다.
마치 알몸으로 하즈키, 미네코, 타다요시 앞에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혹시라도 타다요시가 나무를 심었을 거라는 생각은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다.
더욱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미네코가 타다요시에게 나오코의 일상을 일러바쳤을 리가 없었다.
아무리 형편없는 엄마라 해도 타다요시는 분명 나오코에게 계부였기 때문이다.
수상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의 연속이지만,
그렇다고 타다요시의 뜻을 거스르고 지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또한 타다요시가 진심으로 나오코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나오코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방 안에 작은 불단을 만들었다.
당연히 그곳에는 쥐를 놓을 수는 없다.
아무리 몸통이 작은 쥐라도 방 안에 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단 한 번의 포기를 모르던 그녀는
타다요시로 인한 한 번의 포기를 경험하게 되었다.
나오코는 한 번의 포기로 인한 오기와 같은 감정이
코바야시 마나츠에게로 붙어 미움과 증오는 더욱 높이 하늘로 치고 올라갔다.
나오코의 머릿속에서
유난히 빛나던 비둘기색 스타킹을 신은
마나츠의 다리가 하즈키와 함께 걷는 그림이 떠나질 않았다.
치호가 다가와 팔뚝을 툭툭, 건드렸다.
“나오코,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치호가 말을 걸어올 때면
항상 치호의 눈이 아닌 굽은 등을 먼저 확인하고 대답하게 된다.
아차, 싶다가 이미 들켜 버린 눈은 조금만 미안해하기로 한다.
“아무것도 아니야.”
나오코는 가방을 들어 올리고 물건들을 주섬주섬 챙겨 넣었다.
치호가 굽은 등을 으쓱거렸다.
“그냥 갈 거야?”
“왜?”
치호의 대답에 니오코는 눈을 동그랗게 치켜뜬다.
“왜, 라니? 미술 활동은 안 할 거야?”
치호가 등을 기대는 듯한 행동을 할 때면,
멀쩡한 등을 갖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꼭, 하루 한 번은 굽은 등이
나오코의 잘못도 아니면서 왠지 모를 죄책감을 느꼈고,
반면 아주 다른 감정으로,
자신과 치호는 다르다는 것을
확실히 하고 싶은 감정이 튀어나왔다.
그 두 개의 감정은 정말 극과 극처럼
너무 다른 것이라 꼭 한 번은 갈팡질팡하게 했다.
친한 친구처럼 늘, 함께하지만
한편으로는 창피하다, 는 기분은 숨길 수가 없었다.
지금이야말로 치호가 창피했고 짜증 났다.
“네가 좋아하는 미술인데?”
“그런데 뭘?”
“너 오늘 진짜 이상하다?”
나오코가 길고 커다란 눈을 치켜뜰 때면 치호는 깜짝, 놀라곤 했다.
“왜 자꾸 귀찮게 구는 거야?
가지 않는다고 했잖아”
나오코는 말을 시원하게 해 놓고는 괜히 또 미안해지기 시작한다.
“으응, 그래.”
치호는 개처럼 귀와 눈이 쑥 내려간 모양을 하고는
나오코의 극에 달은 감정을 끌어내는 것 같았다.
나오코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치호, 소리 질러서 미안, 몸이 안 좋아. 먼저 갈게.”
나오코는 늘 치호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달고 다녔다.
치호는 이해가 빠른 아이다.
자신을 낳아준 엄마는 정상적인 몸이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치호의 아버지는 분명 치호와 같은 몸이라는 것이다.
치호가 얘기를 풀어놓을 때면 꿈속에 빠져드는 것처럼 아주 푹 빠져든다.
치호는 엄마 이야기를 자주 했다.
치호의 엄마 또한 매일 두 개의 감정을 갖고 치호를 대한다고 했다.
하나는 측은함, 또 하나는 인정하지 못함이라 했다.
치호가 말하는 뜻을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다.
치호와의 시간을 오랫동안 보낼수록
치호의 엄마가 지녔던 두 개의 감정이
무엇인지 너무 잘 알게 되었다.
나오코에게도 치호는 그런 아이였다.
나오코는 또다시 밀려오는 죄책감에
치호의 눈을 마주하지도 못한 채 가방을 메고 힘없이 돌아섰다.
“괜찮아, 그렇게 해.”
나오코는 대답도 귀찮다는 듯
손을 뒤로 들어 보이고 서둘러 나갔다.
학교에서 부유함을 달고 다니는
엄마들의 불붙는 경쟁은 역시 피아노 학원이다.
하지만 그건 정말 극소수에 불과했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경쟁력은 대단했다.
정말 실력이 나쁜 아이들은
유치원 시절부터 시작한다 해도 빛을 보지는 못했고,
겨우겨우 악보를 보고 칠 수만 있는 실력을 유지하고 다니는 게 전부였다.
제대로 된 실력을 갖추고 있던 아이들은
학교에 머물러 있지도 않았다.
하지만 엄마들은 자기 자식의 실력은 아주 대단한 대학이라도
갈 수 있을 것처럼 늘, 선생들을 밀어붙였다.
나오코는 타다요시의 힘을 입어
늦게 피아노를 시작하게 되었고, 실력도 꽤 좋았다.
하즈키의 말로는 그의 엄마라는 사람은 피아니스트였다고 했다.
군인과 피아니스트의 만남이라니,
타다요시의 얼굴을 생각하면
그들의 사랑이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피아노를 치고 있는 하즈키의 엄마 옆에 군복을 입은 험상궂은
타다요시가 앉아 있다고 생각하면 웃음이 픽, 하고 나온다.
어릴 때 시작하는 피아노를
이제 와서 배우는 것도 싫었지만
미네코의 욕심 때문에 더욱 싫었다.
자신을 위한 것보다 하즈키의 엄마 때문에
자신을 이용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오코는 버티다 못해 결국,
타다요시의 말, 한마디로 시작하게 된 피아노였다.
거부할 수 없다는 건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신기한 건, 학원 선생의 말로는
이대로만 유지한다면 성공이 가능하다고 했다.
나오코의 선생은 미네코의 옆구리를 콕, 콕 찔러서
돈을 더 요구했을 것이 뻔했다.
나오코 또한 피아노에 재미를 붙였었다.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엄마들의
불꽃 튀는 돈봉투의 경쟁을 구경할 때마다
건반 위에 손가락을 올릴 때마다
속이 메스꺼워졌고,
결국 악보를 보는 것도 정상적으로 볼 수가 없었다.
동급생들이 하나둘 자신이 잘하는 것을 찾아갈 때
그녀는 그 어떤 것도 재미를 붙일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사진관을 지나다가
벽에 걸려 있는 그림을 보고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사진 속에는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아주 오랫동안 사진을 응시했고,
금방이라도 그림 속에서 파릇한 잎이 튀어나와
바람에 나풀거리는 잎을 만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마치 하즈키의 나무 같았다.
고민도 없이 사진관으로 들어가 졸고 있는 아저씨에게 소리쳤다.
“아저씨, 저거 아저씨가 찍은 거예요?”
아저씨의 입 주위에서 무언가 떨어졌다.
“아이고 깜짝이야, 노크를 해야지?”
“죄송해요.”
“저건 사진이 아니라 그림이야, 왜 그러냐?”
나오코는 말썽꾸러기처럼 눈알을 동글동글 굴렸다.
“아저씨가 그렸어요?”
아저씨는 다시 눈을 감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저씨, 저 그림 제가 살게요.”
눈을 끔벅끔벅하며 당찬 소녀를 보고 아저씨가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하, 너참 맹랑하구나,
미안하지만 저건 팔 수가 없단다.”
“왜요?”
“값을 매기는 게 아니니까.”
“비싸다는 건 가요?”
“아마도 그 반대가 아닐까...”
“그러니까 살 게요.”
“그러지 말고, 네 그림을 갖고 오너라
맞바꾸는 게 어떠냐?”
나오코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그렇다고 아무렇게 그린 그림을 아저씨에게 내밀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저는 그림을 잘 못 그려요.”
“그림은 누구나 그릴 수 있단다.”
나오코는 몇 초간의 생각을 골똘히 하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건넨다.
“그럼, 제가 올 때까지
저 그림은 팔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졸고 있던 아저씨의 희미한 눈은 어디 갔고,
나오코를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럼, 그럼 그렇게 하마.”
나오코는 이때부터 미술 활동에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클럽 미술 활동으로 교내에서 독보적이다.
제대로 된 기초조차 배우지 못했지만
나오코의 실력은 대단했다.
나오코의 그림을 보는 사람마다
매우 꽤, 독창적이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그 누구도 모든 그림 안에는
쥐의 꼬리와 고양이의 눈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오직 나오코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다.
남몰래 키득거린다는 것은 굉장한 쾌감을 가져다주는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자신만의 기도를 올렸고
그 쾌감은 더욱 독창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 주었다.
나오코는 자신의 그림 중 가장 말 많던 것을 골라 포장했다.
나오코가 그림을 그렸던 시간보다
포장하는 시간과 돈이 더 많이 든 것 같다며
치호에게 투덜대곤 했다.
사진관 아저씨의 그림보다 더 값져 보여야
나무 그림과 바꿀 수 있다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그날은 정말 어처구니없었고
넋이 나갔던 날이었다.
출발하기 전 치호는 내게 두 번이나 외쳤다.
“나오코 네가 말하는 그 위치엔 정말 사진관은 없어
정말이야, 내가 몇 번이나 확인했다니까?"
당연히 나오코는 치호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걸었다.
치호는 아마도 나오코의 정신을 의심했을 게 뻔했다.
그림을 끈으로 묶어 어깨에 메고
거리를 배회하기를 한 시간이 넘었을 것이다.
치호의 말처럼 아무리 찾아도 그 사진관을 찾을 수가 없었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이라며 학교를 시작으로 다시 걷기 시작했지만 소용없었다.
“나오코, 내가 말했잖아
이곳에는 애초부터 사진관은 없었어.”
“분명히 있어
그럼 넌 내가 이 짓을 하고도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거야?”
나오코는 어깨에 메고 있는 그림을 보여주며 성을 내며 미간을 좁혀 댔다.
나오코의 말 대로 이 귀찮은 걸음을 쓸데없이 걸을 나오코가 아니었다.
“그러게, 정말 이상해 정말.”
“이사를 간 게 분명해.”
치호가 고개를 도리질했을 때, 그땐 정말 그녀가 미웠다.
“하, 나오코 네가 거짓말하는 게 아니라는 건 알아
그런데 난 이곳에서 17년을 살았어
나 또한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야.”
나오코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나오코의 기분과 같이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고,
치호의 굽은 등은 더욱 굽어져서
더 이상 봐줄 수가 없이 미안하기만 했다.
그림은 아직 성숙하지 못한 나오코처럼 비에 젖어 완성을 잃어버렸다.
그 후로 오랜 시간을 자신만 보았던 꿈속의 그 사진관을 헤매고 다녔다.
치호를 혼자 두고 온 것은 미안했지만,
마나츠로 인한 두통은 가실 겨를이 없었고
짜증은 멈추지 않았다.
심장을 파고드는 듯한 차가운 공기다.
아직 남아 있는 나뭇잎들이 떨어지기 싫어
가지를 대롱대롱 붙들고 있었다.
그 모습은 꼭, 하즈키와 떨어지기 싫어하는 자신과도 같다.
익숙하지만 듣기 싫은 목소리는 얼굴을
확인하지 않아도 짜증이 솟구쳤다.
아무 생각 없이 걷다 보니 늘, 하즈키가 나오코를 기다리던 길가에 다다랐다.
“나오코, 꼬마 아가씨.”
고개를 들고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하즈키가 서 있던 자리에
멍청이 겐토가 서있으니 말이다.
햇살이 내리쬐었다.
마치 어떤 느낌에 놀라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려보니
하즈키가 보였다.
햇살이 또 하즈키만 틈 없이 비춘다.
나오코는 걸을 수가 없었다.
기쁨과 동시에 입술이 오물거렸다.
‘아, 름답다.’
그때, 생각이 났다.
사진관의 그림 속 나무, 가 하즈키가 서 있던 그 자리의
나무와 같음이 분명하다.
머릿속에 그의 그림을 넣고 있는 찰나,
멍청이 겐토가 그의 모습을 가렸다.
쭈뼛쭈뼛 뭐가 그리도 좋은지
나오코에게 손을 마구 흔들어 댔다.
다시는 기다려 주지 않을 줄 알았던 하즈키가 서 있었다.
멍청이 겐토가 방해하고 있지만 오늘은 그를 봐줄 생각이다.
나오코는 멈췄던 발걸음을 하즈키에게로 폴짝, 폴짝 뛰어갔다.
겐토는 폴짝대는 그녀가 귀여워
얼굴에 웃음을 한가득 실었다.
나오코가 숨을 헐떡이며 하즈키를 불러본다.
“하악, 하악, 즈키.”
하즈키는 역시 말없이 버릇처럼 나오코의 늘어진 머리칼을 흐트러뜨리고 웃었다.
“반가워 힛.”
“놀랐어?”
나오코가 고개를 끄덕인다.
겐토는 흔들던 손을 조금씩 감추며
자신을 본체만체 않는 나오코 때문에 머쓱해했다.
“꼬마 아가씨,
나는 안 보이냐? 나도 좀 반겨주라, 응?”
나오코는 봐주기로 한 겐토를 보며
불편한 기색이 역력한 어색한 인사를 건넸다.
“안녕!”
나오코의 고개는 금세 하즈키에게 돌아갔다.
하즈키가 떨림 있는 나오코의 팔뚝을 살며시 쓸어 주었다.
“너 춥구나?”
“조금, 그래도 괜찮아.”
하즈키는 나오코의 팔목을 잡고 이끈다.
“자 그럼 공원까지 걷는 거야,
빠른 걸음은 따뜻함을 줄 거야.”
나오코의 고개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끄덕거렸다.
멍청이 겐토는 빈틈없는 둘 사이에서 어떤 말도 꺼내기 힘들었다.
여전히 나오코에게 켄토는 투명 인간이나 다름이 없다.
조심스럽게 나란히 걷는 둘의 뒤를 조금씩 따라 걸을 뿐이다.
그 둘의 발은 척척 맞다가, 다시 흐트러졌다.
흐트러짐을 알아차리는 건 오직 나오코뿐이다.
그럴 때마다 나오코는 다시 발을 바꿔
하즈키에게 억지로 맞춰 걸었다.
그러다가 다시 보폭이 큰 걸음에 흐트러졌다.
하즈키의 말처럼 정말 으스스했던 팔뚝이 따뜻해졌다.
겐토는 그런 나오코의 모습이 안타깝기도, 귀엽기도 하다.
과하기만 한 하즈키에 대한 감정과
자신을 이방인처럼 대하는 나오코가 이해할 수 없지만
하즈키를 대하는 맹목적인 모습에 매력을 느꼈다.
나오코의 맹목적인 모습을 자신도 따라 하게 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뒤따라 걷던 겐토는 자신도 모르게 나오코와 발을 왼쪽, 오른쪽 맞춰 걷는다.
하즈키의 발은 나오코가, 그녀의 발은 겐토가 맞춘다.
나오코가 생각하는 그날의 12월은 매섭지 않았고
하즈키처럼 따뜻했다.
방학이 시작되면
하즈키의 나무 그림을 갖고 있는 사진관을
본격적으로 찾아 나설 생각이다.
사진관의 이름을 알아 두지 못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다음 시도 때에는 치호를 데리고 찾아다니지는 않을 작정이다.
문을 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주인아주머니는 그들을 반겨 준다.
아주머니는 추위에 떨었는지
보풀이 덩어리로 붙어 있는 털 옷을 목 위까지 감싸고 있는 모습이다.
정말이지 그 옷은 최악이었다.
한마디 말로 아주머니에게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나오코는 수화를 할 줄을 몰랐다.
그저 웃음을 보여주는 아주머니에게 웃음으로 답할 뿐이다.
나오코는 이 국숫집은 자기와 하즈키만의 공간이라 생각했다.
불청객 겐토에게 도통 알려 주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
하지만 둘의 대화를 들어 보니,
겐토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곳을 알고 있었다.
그를 미워했던 마음이 조금은 사그라들었지만 그래도 연신 입을 삐죽였다.
“여기 자주 오나 봐? 겐토?”
겐토에게 말을 걸어 준 목소리가 반가워 얼굴이 붉어졌다.
“응, 동네에서 제일 오래된 곳이니까.”
하즈키가 겐토의 얼굴을 보더니, 놀려 먹고 싶어 이죽거렸다.
“겐토, 너 왜 그래? 얼굴이 왜 난데없이 벌게져?”
겐토의 얼굴은 험상궂어 보일 때까지 더욱 빨개졌다.
“따뜻한 곳에 들어오니까 그렇지.”
하즈키는 한 번 더 크게 키득거렸고,
나오코는 하즈키를 보며 어리둥절하다.
주인아주머니가 따라 주는 보리차는
몇 번을 우려내고 끓였는지
짙은 색을 띠고 탄 맛과 함께 쓴맛, 고소한 맛이 어우러졌다.
마치 그 세 가지 맛은 주인아주머니를 말하는 것 같다.
투박하지만 헤어 나올 수 없는 맛을 담은
그릇을 보는 순간 세 명의 입에서 똑같은 합창을 만들어 낸다.
“우와, 잘 먹겠습니다.”
뜨거운 김이 올라와 그들의 얼굴을 가렸고,
콧속에 맑은 물을 만들어 내기에 충분하다.
나오코는 아직 남아 있는 감기 기운에 연신 훌쩍거리는 소리를 냈다.
면을 말아 올리는 후루룩, 소리가 콧물을 삼키는 소리를 막아주니,
덜 창피한 모양새다.
“끼익 끼익.”
낡은 미닫이문은 항상 듣기 싫은 소리를 낸다.
나무 작대기같이 일자로 꼿꼿이 서 있는
작은 체구의 아주 어려 보이는 여자아이가 들어왔다.
하즈키는 뒤따라오는 보호자가 있는지 다시 한번 목을 쭉, 빼고 보고 있었다.
“끼이이익.”
미닫이문이 신경질적으로 닫혔다.
주인아주머니가 누구보다 더 그 아이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저 아이도 이 동네 사람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찌그러진 주전자에서 새카만 보리차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그 아이의 하얗고 뾰족한 손가락은 군데군데 붉게 얼룩져 있었다.
물 잔을 꼭, 감싼 손바닥이 모자라 다시 양쪽 손으로 잔을 잡고 호로록, 차를 마셨다.
바람이 드세졌는지 바람이 미닫이문을 치고 달아나는 소리가 들렸다.
하즈키는 어린 손님에게 눈을 뗄 수가 없다.
나오코는 하즈키의 빛나는 갈색 눈이
아이에게 고정된 것을 보고 팔꿈치로 세게 툭, 건드리더니,
하즈키의 얼굴에 가까이 대고 속삭였다.
“이해할 수가 없어.”
정말 깜짝 놀란 하즈키는 미간을 약간 찌푸렸다.
“왜? 뭐가?”
겐토는 그사이 하즈키 그릇에 담겨 있는 면을 잡아당기며 정신없이 먹어 치운다.
“쟤, 말이야.”
하즈키는 아예 자신의 그릇을 겐토에게 밀어냈다.
쟤,라는 말에 관심이 극에 달했다.
“와우, 고마워 친구.”
“쟤, 옆 반 학생이야.”
너무 작은 체구였기 때문에
어린아이로 착각했던 하즈키는
나오코의 말에 놀라 갈색 눈이 커다래진다.
“아.”
아이를 바라보는 하즈키가 맘에 들지 않아
더 좋지 않은 소식을 남기고 싶은 욕심에 마음이 급했다.
“그런데, 쟤 엄마가 얼마 전 죽었데...
많은 이유 중 한 가지는 깨끗하지 못한 여자라 그렇다는데...”
하즈키가 인상을 찡그리더니, 그제야 나오코를 바라보았다.
“쉿, 그런 얘기 듣고 싶지 않아 해서도 안되고
너도 그런 얘기는 함부로 하지 마.”
순간 작은 그 아이가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하즈키의 정색에 나오코의 입술이 툭, 불거져 나왔다.
“어서 마저 먹기나 해.”
겐토가 끼어들었다.
“나도 얘기 들었어. 왜?
되게 멋지고 커다란 집 있잖아?
거기 사는 애야.”
힘없고 무표정한 얼굴을 가진 여자아이가 그들을 바라보았다.
아이는 마치 자신의 얘기를 하는 사람들을
수도 없이 겪은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즈키는 겐토의 뒤통수를 세게 툭, 친다.
“쉿, 빨리 먹어, 가자.”
뒤따라 말을 이으려 하는 나오코를 바라보더니
다시 쉿, 하며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하즈키는 굉장히 심각해진 얼굴로 보지 않은 척,
고개를 숙이고 눈은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오코는 그런 하즈키를 쳐다보며 벌떡 일어나
갑자기 아이에게 다가갔다.
하즈키는 나지막이 나오코를 불렀지만 소용없다.
“나오코.”
눈치 없이 겐토는 국물을 끝까지 비웠다며
텅 빈 그릇을 하즈키에게 보여준다.
금방 나온 국수를 들고 있는 주인아주머니와
아이의 동선이 겹쳐 나오코만 보일 뿐이다.
아이의 개미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주머니, 잘 먹겠습니다.”
그 소리는 조금만 방해되는 소리가 있어도
상처받을 것 같은 여린 소리였다.
나오코의 큰 목소리가 아이를 방해하고 있었다.
“저기, 너.”
작은 아이는 눈을 깜박거렸다.
아이의 모든 것이 작은 금빛 모래 알갱이로 보였다.
나오코가 다시 강요하듯, 밀어붙이며 말했다.
“나, 알지?”
“글쎄.”
목소리는 조금 전보다 더 작아졌다.
하즈키는 자신도 모르게
아이가 상처받을 것 같아 몸이 오그라들고 있음을 느꼈다.
“나를 몰라?”
나오코는 자신을 몰라보는 아이의 말이 안 되기도 했고,
자존심도 상했다.
학교 내에서 자신을 모르고 있는 아이라면
나오코를 부러워하지 않는 아이가 분명하다.
“음...”
나오코에게 가려져 반 틈의 얼굴만 보였다.
“미안.”
작은 아이의 표정은 쓸쓸했고 무언가 완벽하게 포기한 듯한 말투였다.
“난, 인사하려고 했던 거야
나는 나오코라고 해, 히다 나오코.”
아이가 잠시 웃어 보인 얼굴은 정말 예뻤다.
“난 코하네.”
나오코는 김이 나는 국수를 바라보았다.
“반가웠어, 맛있게 먹어 학교에서 봐.”
나오코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 더 당당하고 상냥했다.
따뜻한 온기에 발개진 아이의 얼굴은 어느새 제 색깔을 찾아 희고 빛이 났다.
“응.”
나오코가 돌아와 하즈키 곁에 앉았지만,
그는 국수를 먹고 있는 아이를 민망할 정도로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하즈키?”
“어, 어어.”
“내가 말한 그 애가 맞아.”
하즈키는 빠르게 눈을 돌려 나오코의 그릇을 바라보았다.
“나오코 다 먹은 거야?”
“응.”
남아 있는 국수를 보더니, 겐토가 한마디 거들었다.
“왜 남겨? 에이.”
겐토의 눈치는 정말이지
사람의 분노를 상승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었다.
겐토는 또 눈치 없이 나오코의 그릇을 가져가더니
나오코가 쓰던 젓가락까지 들어 올렸다.
“내가 먹는다?”
나오코는 자신의 젓가락으로 남은 면을 들어 올리는 모습을 보고
토악질을 할 것만 같았다.
나오코는 버럭 화를 내더니, 소리를 지르며 달려 나갔다.
“왜 남이 남긴 것을 먹어?
그건 내 젓가락이라고, 싫어 진짜 싫어.”
나오코는 주먹을 쥐며 계속 뛰었다.
하즈키는 겐토의 팔뚝을 아주 세게 쳤다.
“야, 어떤 숙녀가 자기가 남긴 것을 남이 먹는 걸 좋아하겠어?
멍청한 놈, 젓가락은 왜 또 나오코가 썼던 걸 써? 하...”
겐토는 이미 뛰어나간 숙녀를 잡지도 못하고
미안하단 말도 건네지 못한 채 머리만 긁적였다.
“아, 그런 거야?”
“한참 예민할 때라고, 넌, 그냥 공부만 잘하는 애지,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이.”
“하, 따라가지 않아도 되냐?”
“네가 따라갔다 간 그땐 아마 발로 차일 거다.”
“젠장.”
하즈키는 한숨을 내쉬며 남은 차를 마셨다.
타다가 만 해가 석양이 되어 작은 아이를 비추었다.
하즈키는 며칠 전 소중한 사람을 잃은
하얗고 작은 까만 눈동자의 작은 아이가 자꾸만 신경 쓰였다.
아이는 마치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하즈키 쪽을 흘긋 한 번 하지 않고,
입을 오물거리며 먹다, 중얼거리고 미소도 살짝 띤다.
작은 아이의 이름은 코하네다.
“잘 먹었습니다.”
미닫이문이 열리자마자 아주 거센 바람이 훅, 하고 들이닥쳤다.
주인아주머니의 앞치마가 펄럭거렸다.
지금 아주머니의 손짓은 아마도 바람이 세게 부니, 조심해서 들어가라는 말일 것이다.
하즈키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알사탕을 받아 들었다.
하즈키에게 없던 꼬리가 생긴 것 같다.
옷깃을 여미는 겐토가 빨리 나오라는 손짓에도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똥 마렵냐? 머뭇거리긴.”
하즈키가 이번에는 겐토의 뒤통수를 아주 세게 밀었다.
겐토의 걸음보다 더 빠르게 바람을 밀어내며 걸었다.
가는 내내 거센 바람에 작고 하얀 아이가 날아가진 않을까,
다시 돌아보며 희미하게 한숨을 뱉는다.
엄마가 죽고 난 후의 자기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옷깃을 여미고 여며도 바람은 몸속을 샅샅이 파고들었다.
나오코는 한참을 뛸 필요도 없이 빠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타닥타닥, 타는 듯한 낙엽 굴러가는 소리만 들릴 뿐,
멍청한 겐토의 발소리조차도 들리지 않았다.
뛰어나온 것을 후회해 봤자,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자존심이다.
이상했다.
코하네를 비추던 석양은 나오코를 피해 도망가는 것처럼 보였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즈키도, 석양도 코하네도,
나오코에게 관심을 주는 건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한동안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사진관 자리를 계속 서성거렸다.
하즈키의 나무를 찾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