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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자

7. 척 애 (隻 외짝 척, 愛 사랑 애)

by 금봉


달그림자 7회 등장인물


1. 하즈키- 타다요시의 친아들


2. 타다요시- 하즈키의 아버지


3. 미네코- 나오코의 어머니


4. 마나츠- 하즈키의 연인


5. 겐토- 마나츠와 하즈키의 친구


6. 나오코- 미네코의 친딸, 타다요시의 의붓딸


7. 코하네- 나오코와 동급생


8. 후미코- 코하네의 어머니(한국이름: 이영선)


9. 츠키노- 후미코의 시어머니


10. 신페이- 후미코의 남편


11. 치호- 나오코의 친구






하즈키의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사춘기,

만지지 않아도 찢기고 상처 났던 때,

늘 보기만 했었고 말하지 않았던 시절이 떠올랐다.

이젠 미소로 추억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추워진 날씨 덕에 하즈키의 마르고 뾰족한 어깨가 더욱 움츠러드는 중이다.

일찍 서두른 교대 근무자의 쪽 잠을 깨우지 않으려

고양이 발 시늉하며 살금살금 탈의실로 들어갔다.


아주 촌스러운 연두색 형광 글씨 안에 검은색 펜을

꾹꾹 눌러쓴 글씨는 쓴 사람의 성격이 훤히 들여 다 보였다.

타다요시의 꾹 다물어 아래로 축 처진 입술과 거무튀튀한 얼굴빛이 떠올랐다.

보관함을 열 때마다 마주치는 타다요시의 글씨를 바라보면 발밑이 덫에 빠져 버린 기분이 들었다.

그것을 떼어낸다 해도 그와 약속을 저버린 건 아닐 것이다.

그의 말처럼 늘 눈에 보이는 목소리가 되었으니.


『그 어떤 이유로도 너의 삶을 뒤로 젖혀 두지 말거라 네 삶이 우선이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얕게 들리는 콧소리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재빨리 종이를 떼어냈다.


“찌이익.”


생각보다 소리가 날카롭고 짜증스럽다.

얼마나 풀칠을 강하게 해 놓았던지 그만, 두 조각이 나 버렸다.

남은 건, 하지 말라, 는 글뿐. 도둑질하다 들킨 것 같은 기분이다.

곁눈질로 보이는 남은 글씨는 가지 말라, 는 것처럼 보였다.


“후.”


나지막하게 타다요시의 가래 낀 기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한숨을 내쉬었다.

전신용 거울에 자기의 모습이 비쳤다.

작업복을 입고 있는 모습이 맘에 들지 않다.

새로 꺼내 입은 작업복은 고단한 일을 마친 값을 톡톡히 했다.

희끗희끗 안개처럼 펼쳐진 온갖 먼지들이 얼굴마저 초췌하게 보이게 만들었다.


하즈키는 요즘 들어 관심이라는 단어에 호기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끌려가는 중이다.

코바야시 마나츠는 충분히, 아니 넘칠 정도로 가치가 있는 여자다.

그녀가 하즈키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하즈키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하즈키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는 모습을 하나하나,

모두 읽혀버리는, 들켜버리는 단순한 성격이었다.


함께 음식을 먹을 때면 마치 하루카처럼

하즈키 밥 위에 반찬을 얹어 놓았다.

하루카가 자꾸만 떠올라 견디기 힘들었던 부분이긴 했으나,

마나츠의 그런 모습은 진심이 담긴 애정 표현이다.


밥을 떠서 입안으로 집어넣을 때까지 마나츠는 하즈키를 올려보고 확인하곤 했다.

늘 변함없이 같은 모습으로 그 안에 있는 감정을 끌어내어

마나츠가 만족할 만한 답을 꼭, 받아 갔다.

가장 맘이 놓였던 것은 마나츠가 보통의 정상적인 사람이라는 것이다.

겐토의 말처럼 그녀는 정말 하즈키의 짝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지 의심스러운 건 마나츠에 대한 감정이 단순한 이성에 대한 호기심인지,

마나츠를 좋아하는 건지, 를 구별하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고민할 게 뭐 있어, 같이 있어서 좋으면 그게 사랑인 거지.”


공부만 잘하는 겐토가 해 준 충고가 도움이라니, 우스워 혼자 피식거렸다.

오늘도 마나츠는 하즈키에게 잘 보일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할 것이다.


역 주변의 사람들을 쉴 새 없이 구경할 만큼의 숫자라면,

토요일 늦은 오후가 딱, 그때다.

발 디딜 틈 없이, 빠르게 사람들의 모습이 바뀌었고 휙휙, 하는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설렘이 가득한 얼굴과 두려움이 가득한 얼굴과,

구석에는 얼굴의 생김새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끈적한 머리칼을 늘어뜨리고, 구걸하는 얼굴이 반복된다.


하즈키는 사람 많은 곳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마나츠가 노력하는 마음의 반 정도라도 따라갈 셈이라고 마음먹는 중이다.

수많은 사람이 커다란 시계탑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즈키가 서 있어야 할 곳도 시계탑 앞이다.

사람들과 나란히 한 곳에서 서성거리는 것이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했다.

하즈키는 발을 뒤로 쑥, 집어넣더니 커다란 시계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고개를 약간 숙인 채 눈은 위로 치켜뜨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확인했다.

약속 시간이 조금씩 멀어져 갔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뿌옇게 흐려지더니,

빛을 머금은 오직 한 사람만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앗, 그 아이 작은 새.’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시간이 멈춘 것 같다, 는 말을 실감했다.

하즈키는 눈을 뗄 수가 없다.

작고 허연 얼굴을 한 그 소녀다.

어미 잃은 새, 코하네는 한 곳에 시선이 고정되어 있었다.

시선이 머무는 곳을 따라 하즈키의 눈도 따라간다.

이상하게 코하네는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처럼 미소를 띠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상점 안의 손을 흔들고 있는 마네키 네코(앞발을 들고 있는 고양이 인형)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하즈키는 조금 더 가까이 조심스레 다가갔지만,

코하네는 눈치채지 못했고, 마네키 네코를 보고 웃고 있었다.

마네키 네코는 코하네의 작고 가느다란 눈매를 똑 닮았다.

그녀도 알고 있었는지, 끊임없이 마네키만 바라보고 미소를 멈추지 않았다.

넋이 나간 하즈키의 어깨를 겐토가 세게 툭, 친다.


“앗, 놀랐잖아.”


“뭐야? 넋이 나가서.”


“아니야.”


겐토는 코하네에게 들킬 것처럼 가까이 다가가 얼굴을 확인하고 있었다.

하즈키가 말릴 새도 없었다.


“뭐야, 걔잖아.”


코하네는 다행히 마치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것처럼 알아차리지 못한다.

뒤따라온 마나츠가 하즈키의 목덜미를 쓸며 아는 척했다.

마나츠의 손길에 하즈키는 왕성한 호기심과 함께 등줄기에 기분 좋은 소름이 돋았다.


“오래 기다렸어?”


“아니.”


마나츠도 겐토도 관심은 쭈그리고 있는 그녀에게 가 있었다.

마나츠가 하즈키의 팔짱을 끼며 재촉했다.


“배고프다.”


“으응. 가자.”


그때 머리칼이 군데군데 희끗거리고 중년을 훌쩍 넘긴 남자가

작은 새를 일으켰다.

그들의 얼굴은 순간 어둡게 바뀌었고,

작은 새는 고개를 푹 숙였다.

중년의 남자가 잠깐 그녀를 끌어안더니,

어디론가 데리고 가버렸다.

눈치 없는 겐토가 다시 불쑥 말을 꺼냈다.


“뭐야? 가는데?”


마나츠는 하즈키의 얼굴을 살피더니,

약간의 불편한 내색을 해 보였다.


“아까부터 왜들 그래? 아는 얼굴이야?”


하즈키가 겐토를 흘긋거렸다.


“겐토, 가자니까?”


하즈키는 이럴 때마다 공부만 잘하는 눈치 없는 겐토가 못마땅하다.


“알았어, 가자 가자!”


겐토가 하즈키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하나, 둘 밝은 조명이 켜지고, 제법 굵은 눈발이 날린다.

처음 굵게 하나로 보인 눈이 셀 수 없이 마구 흩날렸다.

그 사이로 중년의 남자와 작은 새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텅 빈 곳을 응시하고 있는 하즈키의 얼굴에

마나츠가 얼굴을 가까이 대고 자신을 바라보라는 듯, 얘기했다.


“하즈키, 봐 눈이 와.”


겐토가 앞장서 걸으며 서둘렀다.

겐토는 꼭, 눈만 오면 폴짝 뛰는 강아지 같다.


“우와, 제대로 된 첫눈이야.”


마나츠가 말했다.


“하즈키, 우리 어디로 가는 거야?”


겐토가 불쑥 끼어든다.


“두말할 필요 없지, 가자 이츠키로.”


“응.”


그제야 답하는 하즈키가 마나츠는 서운한 모양이다.

그는 무엇인가 놓고 온 사람처럼 발이 느리다.

마네키 네코가 하즈키를 보며 손짓하는 모양이 계속 아른거렸다.

내리는 눈 사이로 사라진 작은 새가 계속 눈에 밟혔다.

그때 가방에 접어 놓은 우산이 생각났다.


“훗.”


굵어지는 눈발이 바람을 타고 내려앉을 때마다

작은 새가 남기고 간, 새하얀 깃털 같아 보인다.

흰 우유에 물이 섞여 나는 비릿함이 콧등에 한참 머물다 간다.




척애 심야식당.jpeg




이츠키는 그들만 알고 있어야 할 또 하나의 장소다.

이곳에 발을 들일 때마다

더 이상 손님이 들어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은 늘 배신당한다.

이츠키의 주인 이츠키는 음식 솜씨가 대단했다.

소문에는 아주 유명한 호텔에서 유명세로 드날리다

실수로 인해 왼쪽 검지 한마디를 잃고,

이곳에 자리를 잡은 것이라는 말들이 있다.

워낙 괴짜라고 정평이 나 있었기 때문에

그 누구도 소문을 직접 물어보는 사람은 없다.

이 괴짜는 손님을 골라서 받기로 유명한 터라

단 한 번이라도 술을 먹고 행패를 부렸다가

동네 어느 술집도 들락거릴 수 없다는 소문도 있다.


겐토의 말에 의하면 이츠키에 오는 손님들은

자신을 비롯해 모두 신사 같다고 늘 얘기한다.

그 얘기가 조금이라도 이츠키 귀에 들어가면

그는 겐토를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이츠키를 처음 본 사람들의 시선은

험상궂은 이츠키의 얼굴에 들였던 발을 다시 빼거나,

가게 안으로 들어와 눈치 보기 일쑤다.

마치 야쿠자라도 되는 듯한 인상은

술을 팔아 내기엔 적합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그러다 어쩌다 불쑥 튀어나오는 그의 따뜻함을 알기라도 하면

이곳을 벗어나기란 매우 힘든 일이 될 것이다.


겐토 보다 더 훨씬 나이가 들어 보이는 이츠키에게

겐토는 항상 과하다 싶을 정도의 너스레를 떠느라 바쁘다.

손님이 없는 시간을 너무 잘 알고 있던 그들은

이미 자리를 잡고 앉아서 얼굴이 발그레해지기 시작했다.


그제야 낯선 사람들은 술 냄새와 튀김 냄새와 쿵쿵한 내장 냄새를 맡고

조금씩 발을 들이기 시작했다.

아직 초저녁이다.

이츠키가 발간 얼굴의 겐토에게 튀김 용 집게를 들어 올리며 쏘아붙였다.


“신사일 때 그만 먹고 일어나!”


인상을 찌푸릴 만한 소리에도 겐토는 또다시 너스레를 떨었다.


“에이, 맘에도 없는 소리.”

이츠키가 다시 집게를 들어 올려 내리칠 것 같은 시늉을 한다.

방금 들어온 여자 손님의 안경이 하얘졌지만,

놀란 눈은 숨길 수가 없다. 여자 손님이 말했다.


“엇, 여기 앉아도 되나요?”


당황한 이츠키의 집게는 재빨리 제자리를 찾았다.


“네네, 앉으세요.”


하나 남은 빈자리는 그들과 합석을 해야만 하는 자리였다.

모서리를 사이에 두고 마주 보길 좋아하는 마나츠를 위해

앉았던 자리에서 하즈키가 벌떡 일어났다.

하즈키는 마나츠의 옆자리로 자리를 옮기며

자신이 앉던 자리를 여자에게 양보했다.

자연스럽게 겐토의 옆자리는 안경 쓴 여자가 차지한다.

눈치 빠른 주인 이츠키가 겐토를 보며 혀를 끌끌 찬다.


“쯧쯧.”


그 소리는 당연히 겐토의 귀에만 들리는 소리다.

마나츠는 하즈키를 옆에 두고 더 가까이서 바라볼 수 있었다.

옆자리에 앉아 날렵한 그의 콧날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아니 더 깊이 설렌다는 게 맞는 말일 것이다.

술을 들어 올려 입안으로 밀어 넣는 하즈키의 모습은

야릇해 보이기까지 했다.

꿀꺽하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왔고,

하즈키의 목덜미가 발개진 것을 보더니,

마나츠는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며 맥주를 벌컥거리고 마셨다.

하즈키는 마나츠를 목마르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이츠키와 겐토가 잡아먹을 듯이 서로 으르렁 내는 소리는

묵음으로 들려온 지 오래된 듯하다.

하즈키의 곁에서는 그 어떤 소리도 마나츠의 귀는 아는 척, 하지 않았다.

하즈키는 왼손을 많이 쓴다.

오른손으로 글씨를 써 내려갈 때만 해도

양손을 모두 사용하고 있는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즈키의 오른쪽 팔 끝에 밀착하여 걸을 때면

하즈키는 마나츠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리지 않았다.

마나츠가 먼저 팔짱을 껴야 그에게 다가갈 수가 있다.

미세한 차이지만 마나츠는 금방 알아차렸다.

하지만 하즈키의 왼팔 끝에 마나츠의 몸이 밀착되는 순간

그는 마나츠의 어깨를 꽉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하즈키의 오른손은 글자만 입력하는 수행원이다.

마나츠는 하즈키의 왼쪽으로 늘, 걷기를 원했다.

모든 생활의 일부분을 차지하는 왼손은 마나츠의 차지가 된 건 얼마 안 되었다.


노란 불빛에 비치는 하즈키의 빛나는 갈색 눈이

약간의 붉은빛을 띠며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쌍꺼풀 없는 하즈키의 큰 눈은 마치 영화에 나오는 흡혈귀처럼 아름답다.

마나츠는 그 눈을 다른 눈이 알아 버릴까,

하즈키를 한시라도 빨리 차지하고 싶어 안달이 났다.

하즈키는 마나츠의 욕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마나츠는 하즈키의 왼팔에 살포시 누워있는 듯,

기대어 튀어나온 복숭아뼈가 꿀꺽거리는 모양을

끊임없이 바라보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겐토, 그만 일어나자!”


겐토는 여자 손님이 싫어하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계속 말을 걸었다.

그 모습이 한심스럽다.

말을 들은 척도 안 하는 겐토의 뒤통수를 날렸다.


“아악.”


여자 손님이 웃자, 눈치 없는 겐토가 따라 웃었다.

여자는 겐토에게 대한 것과 다르게

끊임없이 미소를 지으며 하즈키를 바라보았다.

다행히 그 모습을 마나츠는 보지 못한다.

하즈키가 눈을 감고 기대어 있는 마나츠를 보며 말했다.


“가자!”


겐토가 하즈키를 비아냥거린다.


“주말마다 내가 널 보러 이 먼 곳까지

비싼 돈을 들여서 온다고, 인마 가긴 어딜?”


마나츠가 눈을 뜨고 하즈키의 팔짱을 꼈다.

깊게 밀착된 마나츠의 가슴이 볼록, 하게 팔을 넘었다.


“우리 어디 가는 데?”


하즈키는 마나츠의 몸짓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고, 힘이 풀리고 엉덩이가 간질간질해졌다.

발바닥마저 후끈해지는 것 같았다.

마나츠의 입에서는 달큼하고 쉰 듯한 술 냄새가 났다.

겐토가 하즈키를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게슴츠레 웃었다.


“흐흐흐, 조금만 더 있다가 가자.”


하즈키는 마나츠와 눈을 마주치면

자신의 지금 기분을 들킬 것 같아 다시 술을 목으로 내려보냈다.

이츠키가 두부로 만든 하얀 떡을 들이밀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마나츠를 위한 음식이다.

하지만 눈은 하즈키를 보며 말하고 있다.


“먹어 봐, 직접 만든 거야.”


마나츠가 동글동글하고 말랑한 떡을 검지로 툭툭, 건드린다.


“어머, 너무 귀엽다 잘 먹을게요.”


눈으로 보기만 해도 하얀 떡은 말랑해 보였다.


“와우, 잘 먹을 게 이츠키.”


훨씬 나이가 많아 보이는 이츠키는 겐토의 친구 같은 말에도 반응하는 일이 없었다.


“먹고, 그만 가봐!”


“쳇.”

늘 그랬듯 술에 얼큰히 취한 티가 날 때마다 들어가라며

이츠키는 하즈키 대신 가볍게 마무리를 해 주었다.

마나츠는 하얀 찹쌀떡을 먹지도 않고

턱을 괴고 떡의 중간 부분을 계속 툭툭, 건드렸다.


가라앉은 하즈키 몸의 이상 반응이 또 올라왔다.

마치 하얀 찹쌀떡은 마나츠의 젖가슴이 훤히 드러나 있는 모양 같았다.

하즈키는 고개를 세차게 뒤흔들더니, 맥주를 들이켰다.

하즈키의 취기가 가득한 얼굴은 서서히 창백해지면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눈동자가 시커먼 하늘을 올려보며 내내 투덜대기만 했다.

하즈키에게서 이런 약간의 흐트러진 모습을 볼 수 있다니,

마나츠는 그를 욕심 내는 일이 더욱 쉬워질 것을 예감하며 흐뭇하게 웃었다.








“계속 따라오네?”


마나츠는 자신에게 하는 소리로 착각하며 얼굴이 일그러졌다.


“뭐?”


이럴 때 겐토는 행동이 재빠르다.


“저놈은 술에 취하면 저 소리야
달이 비추고 있으면 옷을 홀딱 벗고 있는 기분이라나? 미친놈.”


“응?”


겐토가 웃었다.


“하하하."


마나츠가 한숨을 내쉰다.


“후.”


조금 앞서 걷는 하즈키의 걸음이 비틀거렸다.

취기에 그는 추위를 잊고 의자에 발라당 드러누웠다.

커다랗고 옆으로 가지를 늘어뜨린 나무가 달빛에 빛나며 손을 흔들었다.


“겐토, 맥주 좀 사 와.”


겐토는 누워 있는 하즈키의 발끝을 툭, 치고 도망가듯 뛰었다.

겐토는 마나츠와 하즈키의 사이가 더욱 가까워지길 바랐다.


“알았다.”


마나츠는 하즈키의 주위에 그 누구도 없다는 듯,

신경 쓰지 않고 눈을 감고 있는 하즈키가 밉지가 않다.

하즈키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비가 내릴 줄 알았어.”


마나츠는 하즈키의 달콤한 목소리를 꼭, 품에 안고 싶었다.


“그러게.”


달빛에 비친 하즈키의 눈이 다시 감겼다.

의자에 누워있는 하즈키에게 다가가 얼굴을 앞에 두고 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아주 가까이서 그의 얼굴을 관찰할 수가 있었다.

하즈키의 감은 눈 밑이 미세하게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온 마나츠의 입김을 느꼈을 게 분명했다.

가까이 다가온 입김에 하즈키는 눈을 뜰 수가 없다.

심장이 터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나츠가 그의 얼굴을 가볍게 쓸었다.

그제야 눈을 천천히 떠 보았지만,

바보처럼 수없이 깜박거리고 그녀를 바라볼 수밖에 없다.

온몸이 얼어붙은 느낌이었고, 다시 엉덩이가 간질거리고,

목덜미가 후끈거렸다.

하즈키의 모든 교감 신경이 확장되고 있음이 분명했다.

마나츠가 말했다.


“풉, 난 들킨 것 같아 당황한 하즈키 얼굴이 좋아.”


하즈키는 마나츠의 코를 앞에 두고 숨을 거칠게 쉬고 있었다.

이젠 아무것도 숨길 수가 없다.

마나츠는 하즈키의 놀란 눈을 손바닥으로 가리더니,

늘어진 나무가 보란 듯이 그의 입술에 깊게 입맞춤했다.

순간 뜨거운 것이 느껴졌고,

잠깐 정신을 잃을 것처럼 온몸에 힘이 쑥 빠져나갔다.

마치 촉촉하고 차가운 얼음을 머금고 뜨겁게 녹이고 있는 느낌이다.


하즈키는 그 순간 마나츠가 아닌

그녀의 혀라는 것에 중독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나츠가 조심스레 입술을 떼 내려했을 땐

마나츠의 목덜미를 잡고 놓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다.

아니 애원하고 싶었다.

마나츠는 다른 손으로 하즈키의 입술을 닦아주며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리며 반대편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마나츠의 입술이 투명한 액체로 반짝거렸다.

뜨거워진 몸이 아직도 축 늘어져 한여름이 갑자기 온 것만 같다.

일어날 수가 없었고, 다시 눈을 감은 채 늘어진 나무의 놀림을 받고 싶었다.

용기 없는 자신이 멍청하기 짝이 없었다.

시간을 일부러 맞춘 것처럼 겐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이 다 녹았네...”


하즈키는 죄지은 사람처럼 온몸에 힘을 주어 벌떡 일어나 앉는다.


“맥주?”


겐토는 맥주를 하나씩 꺼내 들어 나누어 주었다.

마나츠가 맥주를 들어 올리고 말한다.


“건배할까?”


겐토가 입을 삐죽거린다.


“에이, 유치해.”


마나츠가 얼빠진 하즈키를 보고 윙크했지만,

그의 눈은 이리저리 갈 곳을 모르고 방황했다.

하즈키가 그럴수록 마나츠는 그의 눈을 놓아주지 않았다.

마나츠가 말했다.


“자, 사랑과 우정을 위해서? 흣.”


겐토는 손사래 치지만 맥주를 제일 먼저 위로 추켜올렸다.

하즈키의 맥주에 쩍, 하는 소리가 나도록 부딪히더니,

기어코 겐토의 옷을 적시고 말았다.


“앗, 차가워 아 이 자식.”


겐토의 얼굴은 꿍꿍이가 가득했다.

하즈키는 들켜버린 것 같은지,

자신도 모르게 옷소매를 입술에 갖다 대고 닦아 냈다.

하즈키에게 눈을 떼지 않고 있는 마나츠는

하즈키의 어린아이 같은 모습에 못살게 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방황하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마나츠와 마주칠 때면 마나츠는 혀로 입술을 핥는 흉내를 내며 웃는다.

하즈키는 겐토가 그 모습을 볼까, 안절부절못했다.

하즈키는 맥주가 넘어가지 않을 정도로

고개를 숙이고 어렵게 목으로 넘겼다.

고개를 쑥 빼고 밤을 비추던 달빛이 점점 구름 속으로 숨어 들어갔다.

달빛이 없는 거리의 가로등은 벗이 사라져 쓸쓸하다.

겐토가 적막을 깨고 입을 열었다.


“사람은 살면서 몇 번의 사랑을 할까?”


하즈키가 입안에 있는 맥주를 뿜는다.


“푸앗.”


“왜 웃냐? 난 심각해.”


“뭐? 심각?”


하즈키가 숨도 안 쉬고 낄낄거렸다.

하즈키의 긴장은 겐토로 인해 풀어진 듯했다.

마나츠가 덩달아 하즈키에게 손을 저었다.


“나도 그런 생각하는걸?

백 년을 살면서 한 사람만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해?”


“글쎄.”


겐토가 더욱 심각해진 얼굴로 말을 이었다.


“하즈키, 넌 사랑 한 번 안 해 본 놈이니, 모르지.”


마나츠가 끼어들었다.


“그건 하즈키만 알겠지.”


겐토는 마나츠의 말에 반사적으로

하즈키와 마나츠를 번갈아 보고 미소를 띠고 있었다.

겐토가 하즈키를 놀려 먹을 작정이다.


“오호, 그렇지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으니.”


하즈키는 놀려먹는 겐토의 가슴을 주먹으로 친다.


“됐다 네 심각은 뭔데?


이제야 취기가 돌았는지 마나츠는 약간의 풀린 눈을 하곤 말했다.


“나도 궁금한데? 겐토?”


마나츠는 머리끝까지 의자에 기대어 힘을 쭉 빼고 앉았다.

힘이 풀린 마나츠의 다리는

치마 안에서 지쳤는지 다리가 살짝 벌어지며

살색 스타킹 사이로 흰색 속옷이 빠끔히 고개를 내밀었다.

못 본 척해야 할 때 하즈키는 더욱 티가 난다.

마나츠와 눈이 다시 마주쳤고, 마나츠의 장난기는 도가 지나쳤다.

겐토의 얼굴은 처음 보다 더 심각한 것처럼 보였다.


“평생 한 사람만 사랑하는 건,
불가능해 그러니까 첫사랑은 꼭 실패하는 거겠지.”


“이 자식, 너 진짜 심각하네?”


하즈키만 바라보던 마나츠가 벌떡 일어나

하즈키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왼쪽 겨드랑이 사이로 그녀의 손이 파고들었다.

차가운 손길이 싫지만은 않다.


“맞아, 첫사랑은 꼭, 실패지.”


마나츠의 말에 겐토는 아예 얼굴에 그림자가 생긴 것처럼 어두워졌다.


“시작도 하기 전에 실패할 것 같으니까, 그게 문제야.”


마나츠가 큰 소리로 웃었다.


“하하하 겐토, 넌 충분히 사랑스러운 사람이야
겁먹지 말라고 사랑은 쟁취야, 누가 먼저 갖느냐가 답이야.”


하즈키가 말했다.


“겐토, 너답지 않아, 여자 때문에 고민이라니?”


겐토가 앞을 응시하며 심각하게 말했다.


“놀랍도록 놀라운 사람이거든?”


하즈키는 어설프게 웃어 보이는 겐토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정말 사랑에 빠진 사람의 얼굴을 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과하게 감정의 기복이 드러나는 얼굴을 하고 있다.

아주 기쁘거나, 아주 절망적이거나, 절대 중간의 감정은 없다.


타다요시 곁에 있는 미네코의 얼굴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들도 중간은 없었다.

부부의 연이 오래된 노부부의 얼굴을 보면 여유가 느껴지는

사랑의 그 중간쯤의 감정, 그 또한 사랑의 감정일까,

라는 생각을 몇 번이고 되새기며 고민한 적이 있었다.


사랑에 대해서 하즈키는 겐토만큼 두렵다.

두려움의 크기만큼의 굵은 빗방울이

투둑투둑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겐토가 길게 한숨 쉬며 말했다.


“그만 들어 가자,
이러다가 첫사랑에 실패하기도 전에 얼어 죽을 거야.”


하즈키는 겨드랑이에 머문 마나츠의 손을 거부하며, 벌떡 일어섰다.


“겐토, 같은 방향이니까 마나츠랑 쓰고 가!”


재빨리 가방에서 우산을 꺼내더니 겐토에게 건넨다.

마나츠는 정말 실망한 얼굴로 하즈키를 한 번 올려보지만,

하즈키는 마나츠와 다시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응, 넌?”


“멍충아, 우산은 하나고, 나는 집이 가깝고.”


“흠, 오케이 마나츠 일어나 가자!”


“겐토, 네 얘기는 나중에 하자, 먼저 간다?”


하즈키는 굵은 빗방울을 뚫고 도망치듯 뛰어간다.

마나츠에겐 눈인사도 없이, 한 번의 돌아봄도 없이 있는 힘껏 뛰었다.

마나츠는 끝까지 그의 뒷모습을 확인했지만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출 때까지도 하즈키는 절대 돌아보지 않고 무심하게 가버렸다.


하즈키는 혹시나 그녀가 따라올까, 전속력으로 달렸다.

굵어진 비와 어둠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그제야 뒤를 돌아보았다.

골목의 가로등 불빛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이 눈처럼 떨어진다.

가쁜 숨도 바닥에 가라앉은 비처럼 조금씩 가라앉았다.

얼음처럼 차가운 비에 얼굴과 뒤통수가 시리지만

몸은 아직도 달아오르고 있었고 등줄기의 솜털까지

바짝 서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갈팡질팡한 마음에 욕이 튀어나왔다.


“젠장.”


하즈키는 자꾸만 튀어나오는 자신의 욕망에 대해 헷갈리기 시작했다.

마나츠에 대한 감정은 영원히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로 남을 것이다.

비에 젖은 가방이 점점 무거워지고 있었다.

빠른 걸음도 점점 힘이 빠진다.

입김마저 찬기를 뿜어내는 것 같았다.

축축한 비는 어느새 다시 포슬거리는 흰 눈으로 바뀌고 있다.

하즈키는 아예 가로등 밑에 자리를 잡고 섰다.

고개를 바싹 들고 흰 눈을 바라보았다.


머릿속은 자꾸 중년의 남자가 데려간 작은 새가 가득했다.

하얀 작은 새는 하얀 눈과 같았다.

아마도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면 흰 눈처럼 녹아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하즈키는 입을 벌리고 혓바닥을 길게 내밀었다.

차가운 눈은 단맛을 남기며 금세 사라지길 반복했다.


“누굴까...”


하즈키는 중년의 남자가 눈에 밟혔다.

이끌려 가는 작은 새의 모습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얼굴이었다.

나오코를 핑계로 눈 한 번 마주치고, 인사 한번 하지 못한 것이 후회됐다.

하긴 작은 새를 바라보고 있었다 해도

작은 새는 하즈키를 바라보지 않았을 것이다.


하얀 눈은 솜뭉치처럼 더 굵어졌다.

바로 앞에 놓인 집조차도 눈에는 흐릿하다.

마나츠의 길고 뜨거운 입맞춤의 느낌이 떠올라 다시 엉덩이가 간질거렸다.

마나츠는 매혹적인 여자다.

아니 곁에 있는 사람을 미치게 할 정도의 마력이 있는 여자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아마도 하즈키는 마나츠를 거부할 수 없을 것이다.

마나츠가 늘 하즈키의 곁에 맴돌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하즈키는 절대적으로 마나츠를 거부할 용기가 없었다.

아주 조금도.


하즈키는 금방 내린 눈의 첫 발자국 주인이 된다.

늦은 밤이라 해도 취기로 집에 들어갈 땐

정신을 바짝 차리고 바깥 계단을 올라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걸음을 뗐다.

하즈키는 가라앉지 않은 취기와 욕망의 간질임에

하마터면 계단에서 넘어질 뻔하다, 빠르게 균형을 잡는다.

그의 눈이 다시 또 동그래진다.


“아앗, 너... 깜짝이야, 나오코?”


계단 끝 입구에 자리 잡은 키 큰아이가 쭈그리고 앉아 있다.

갑자기 한기가 밀려오고, 어깨가 오들오들 떨려 왔다.

취기가 가라앉으면 추위가 들이닥친다.

나오코는 다행히 내리는 눈을 피해 앉아 있었다.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지만 대수롭지 않은 듯, 웃고 있었다.


“늦었네 하즈키?”


“놀랐어.”


밀려오는 추위에 이가 딱딱, 부딪힌다.

웃고 있는 얼굴 사이로 슬픔이 가득했다.

나오코는 눈을 멀뚱멀뚱, 눈 한번 깜짝하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아니 노려보는 게 맞는 표현일 것이다.


“대체 왜 이러고 있어? 춥잖아?
이제 무섭기까지 한다?"


나오코는 움직이지 않았다.


“일어나, 들어가자 감기 들면 어쩌려고?”


커다란 나오코의 눈은 더욱 크고 길어진다.

하즈키는 아랑곳하지 않은 그녀에게 단단히 화가 났다.


“나오코 듣고 있는 거야? 들어가자.”


“이러지 않으면 하즈키를 볼 시간이 없어.”


나오코의 목소리 끝은 목이 메어 작아졌고,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채 낫지 않는 감기에 약간의 목 통증이 밀려왔다.

하즈키는 예전처럼 친절하지가 않다.

하즈키는 분명 그것, 그러니까 마나츠에게 영혼까지

다 뺏긴 사람 같아 보였다.

나오코는 순간 마나츠의 얼굴이 떠올랐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필이면...”


“당장 따라 들어와.”


하즈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 안으로 들어간다.

나오코는 그제야 발소리도 숨죽여 조용히 따라 들어갔다.

하즈키는 자신의 방문을 달칵, 하고 열쇠로 열고 밀었다.

나오코가 자연스레 따라 들어오려는 것을 하즈키는 팔 한쪽을 들어 길목을 막아섰다.


“나오코 네 방에서 기다려.”


하즈키의 목소리는 굉장히 단호했다.

나오코는 기다리라는 말에 서운함을 잊은 채 자신의 방으로 달려갔다.


“응.”


늘 나오코의 얼굴은 하즈키의 말에 금세 어두워지거나,

금세 밝아지거나, 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하즈키가 생각하는 가족애,

따위인가 싶어 어느 순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나오코를 볼 때면

겁을 먹어 버리곤 했다.

나오코의 가족애는 굉장히 강한 접착제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런 나오코의 관심은 가끔 숨이 턱, 막힐 정도로 답답했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가방을 벗어던지고

잠시 멍하니 서서 나오코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생각해 보았다.

화를 낼 정도의 것도 아니었다.

푸른색과 하얀색이 섞인 옷을 갈아입은 뒤,

젖은 머리를 대충 닦아 냈다.

달이 보이지 않은 오늘은 커튼을 좌, 우로 깔끔하게 묶어 보았다.


“똑, 똑,”


아마도 나오코는 문 뒤에서

하즈키의 발걸음 소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똑, 하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문을 활짝 열었다.

그런 그녀 때문에 하즈키는 웃음이 나왔다.


“하하, 어이구.”


“들어와, 하즈키.”


하즈키는 쏟아지는 나오코의 질문에 앉을 새도 없이 벽에 기대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늘 누굴 만났어?
어디 갔다 오는 거야? 요즘 되게 바쁘네?”


“나오코.”


나오코가 하즈키의 부름에 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처럼 늦은 시간에 밖에서 기다리면 안 돼, 알았지?”


나오코는 다시 그를 빤히 쳐다본다.


“그럼 하즈키를 볼 수가 없어.”


하즈키는 나오코를 피하고 싶지도 않았고,

마음을 다치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상한 두려움이 몰려왔다.


“하긴 지루한 방학이군.”


나오코는 무섭게 그의 말을 잘라먹었다.


“내가 말했잖아, 지루해서가 아니야.”


하즈키는 자신의 또 달랐던 시절의 행동과 같아

나오코를 매몰차게 밀어낼 수가 없었다.

정상적이지 못한 것들은

이 시절이 지나면 없어질 거라 굳게 믿고 싶었다.


“그래 알았어, 방학이니까!”


하즈키는 최대한 단어를 줄여 말했다.

나오코의 눈이 어느새 가느다랗게 웃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나오코 방 창문 밖으로 고양이 소리가 들려왔다.


“됐지?”


“으응.”


“추운 날 기다리지 않는 거다?”


나오코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하즈키의 친절함을 다시 찾았지만,

또다시 불여우 같은 여자에게 사로잡혀 나오코를 잊을 것이 뻔하다.
나오코는 잊지 않고, 재단을 바라보며 기도하기 시작했다.


더욱 커지는 고양이 소리에 나오코는 벌떡 일어나 창문을 열어 놓았다.

눈에 커다랗고 새까만 반점이 있는 길고양이 한 마리가 자기 집 인양 들어왔다.

나오코는 익숙하게 고양이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습기를 머금은 비 섞인 눈에 젖은 털이 아주 무거웠을 것이다.

한쪽 눈의 새까만 반점은

마치 눈을 하나 잃은 것처럼 잘 보이지 않았다.

바탕이 흰색인 털을 갖고 있었고,

검은색 물감을 붓으로 칠해 놓은 것처럼

엉성한 무늬들은 우스꽝스럽기까지 했다.

나오코는 젖은 고양이의 털을 정성스럽게 닦아주었다.

바닥에는 검은색 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어느새 고양이의 흰 털도 검은색과 뒤 섞이고 말았다.


하즈키는 집 밖을 배회하던 그 고양이가

나오코가 돌 봐주고 있는 고양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하즈키는 그런 나오코의 행동을 모른 척해 주었다.

이상하게 비가 올 때마다 고양이는 검은 물을 뚝뚝, 흘리고 다녔다.


대체 밤마다 무슨 짓을 하는 건지,

고양이는 다음 날만 되면 더욱 새카만 무늬를 달고 다녔고,

한쪽 눈은 아예 보이지 않았다.

타다요시는 나오코가 이상한 행동을 벌이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타다요시는 나오코가 눈치채지 않게

고양이에게 그림을 그리는 행위를 멈추는 방법을 찾지 못했다.

결국, 이웃 사람들에게 소문이 돌기 시작했고,

타다요시와 점점 소원해진 미네코는 더욱 나오코를 원망했다.


닦아 낸 수건은 새카만 물이 들어

아무리 빨아 내도 원래 색을 찾기가 힘들었다.

나오코는 눈치껏, 수건을 집과 떨어져 있는 휴지통에 내다 버렸다.

내일은 눈이 내리지 않길 바라며 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구석에 잠든 고양이의 털은 어느새 회색빛을 띠고 새근거렸다.







실타래





유난스럽게 춥고 사나웠던 계절이 조금씩 화를 풀어낼 때쯤

하즈키는 마나츠와 연인이 되었다.

누가 먼저일 것 없이 자연스럽게 만남은 계속되었고,

마나츠는 하즈키에 대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하즈키가 예감했던 것처럼, 그는 마나츠에게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처음엔 불길한 예감이라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마나츠는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너그러운 인성까지 갖추고 있는 사람이었다.

당연히 그에게는 과분한 사람이었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표현하는 마나츠를 놓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사랑이다,라고 구별 지으며 고민하기엔

이미 시간이 훌쩍 가 버렸다.

그렇게 그들은 늘 함께였다.


새해를 맞이하듯,

나오코는 성인이 되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할 수 없는 것들을 할 수 있을 거라 꾹,

참고 견뎌낸 날들을 돌아보며 자신을 토닥거리곤 했다.

하즈키가 마나츠와 완벽한 연인이 되면서부터

나오코의 수다스러움은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져 버렸고, 하즈키를 대하는 자세도 바뀌었다.

겉으로는 모든 것을 인정하는 듯했지만,

밤마다 벌이는 괴상한 일들은

나오코의 절대 꺾이지 않을 고집임을 알 수가 있다.

나오코는 이해하는 중이 아니라, 때를 기다리는 것이 분명하다.


졸업이 얼마 남지 않은 나오코는

어른이 되어 갈수록 미네코의 아름다움과 여성스러움의

장점만 덧붙여 성장하고 있었다.

교내에서도 인기를 독차지했고,

만나고 싶다는 남학생들의 마음을 애달프게 만들고 있었다.

나오코의 얼굴은 갈수록

미네코처럼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듯한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누구도 감히 사귀고 싶다, 한다면

그건 극히 드물었고 굉장한 용기의 남학생일 것이다.

그나마 뒤에서 치호를 통해 작은 쪽지나 전달할 뿐,

눈 한번 마주치기만 하면 과장된 소문까지 나도는 지경이었다.


나오코와 늘 짝이 되어 지낸 치호는

그 덕에 멋지고 잘생기진 않았지만,

쏙, 마음에 드는 남자 친구까지 생겼다.

치호의 남자 친구는 유일하게

용기 내어 나오코에게 만나고 싶다, 고 말했던 남학생이다.

하지만 나오코는 자신을 좋아했던 아이라고,

치호에게 절대 말하지 않았다.

또한 나오코는 남학생에게 자신을 좋아했던 사실을

치호에게 말하기라도 하는 날엔 가만두지 않겠다며 매섭게 다그쳤다.

다행히 치호에게 비밀은 끝까지 잘 지켜지고 있는 것 같았다.

치호는 점점 자연스럽게 나오코와 함께 있는 시간이 줄어들었으며,

나오코는 그런 그녀에게 괜찮다며

굽은 등을 두드려 주며 진심으로 행복하길 바란다는 말을 반복했다.


나오코의 말수가 줄어든 시점을 정확히 따지자면

하즈키가 마나츠를 집에 데리고 오기 시작할 무렵이다.

나오코는 마나츠가 방문할 땐 특별한 일 외에,

밖을 나가는 일이 없었고 2층 자신의 방에서 절대 내려오지 않았다.

겉으로는 마나츠를 반기며 웃음을 나눠 주었지만,

재단에 초를 켜고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기도.jpeg




나오코의 속은 하즈키 조차도 알기 힘들었다.

하지만 마나츠는 달랐다.

마나츠는 눈치가 굉장히 빠른 사람이고,

눈빛으로도 앞에 있는 사람이 하고 싶어 하는 대화를 읽어 내는 데는 선수였다.


마나츠는 당연히 나오코가 하즈키를 특별히 잘 따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매일매일 자신을 쫓아내기 위한 기도를 한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마나츠는 그럴수록 하즈키의 집을 들락거리는 횟수가 잦았고,

나오코는 거의 일상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의 피곤함을 느끼곤 했다.








나오코의 마지막 학기가 시작되었을 때,

보이는 새 얼굴에 코하네의 얼굴도 있었다.

코하네는 무슨 행동을 해도 눈에 띄지 않는 아이다.

하지만 나오코의 눈에는 그녀가 작아도 너무 작았고,

하얘도 너무 하얀 얼굴을 하고 있었기에 늘 눈에 띄었다.

길고 작은 눈동자는 고양이에게 칠해 놓기에 딱,
좋은 아주 새까만 색깔이다.

작은 눈동자는 거의 검은 눈동자만 보였다.

새까만 눈동자는 나오코의 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코하네를 지켜볼 뿐, 절대 먼저 아는 척하진 않았다.

코하네 또한 나오코에게 아는 척 한번 하지 않았다.


코하네는 주위에 관심은커녕,

놀랄 만한 소리가 들려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또한 코하네는 늘 홀로 다녔다.

나오코는 책상에 몸을 잔뜩 웅크리고

엎드려 있는 코하네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치호가 뛰어오는 소리는 멀리 있어도 알 수가 있을 정도로 요란하다.


“나오코?”


“아, 요란법석.”


“크큭.”


치호도 나오코의 시선을 쫓더니, 한마디 거들었다.


“왜? 뭘 그렇게 봐?”


나오코가 길게 숨을 뱉는다.


“후우, 쟨 어디가 아픈가?
벌써 한 시간이 넘는 동안 저러고 있어.”


치호가 갑자기 고개를 숙이더니

나오코의 어깨를 감싸고 속닥거렸다.

치호가 고개를 숙일 때마다 더 굽어지는 등은 아무리 많이 본들,

나오코에게는 익숙해지지 않았다.

미간이 찌푸려졌지만, 궁금함에 나오코는 귀를 갖다 댔다.


“쟤, 얼마 전 엄마가 죽었는데
이번엔 아빠까지 따라 죽었다는 거야,
왠지 모르게 무섭지 않니? 뭔가 있는 것 같아.”


나오코는 정색하며 치호를 흘겨보며 팔뚝을 손바닥으로 세게 때렸다.


“너는?”


“으응?”


“너는 어떤데?”


“무슨 뜻이야?”


“넌 아직도 어린애 같아, 왜 그런 말을 옮기고 다녀?

죽음이 무서워? 죽음이 뭐 잘못된 거야? 아님 쟤가 뭘 잘 못했어?”


나오코는 화가 난 마음에 치호의 굽은 등을 보고 놀리듯,

너도 그랬었잖아, 너도 코하네처럼 저랬잖아,

라고하고 간절하게 말하고 싶었지만,

치호의 마음이 깊게 상처 날 게 뻔했다.

나오코는 나오는 말을 목으로 꾹 삼켜 버렸다.


“나오코?”


“다신 그런 말, 내 앞에서 하지 마.”


치호는 자신이 사람들에게 놀림과 따돌림을

받았었다는 기억을 정말 뻔뻔하게 모두 잊어버린 것 같다.

그때 엎드려 있던 코하네가 치호의 말을 듣기라도 했는지,

그녀의 손처럼 작은 지갑을 꺼내며 바스락거렸다.

갑자기 라이무라는 남학생이

코하네가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빠르게 낚아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코하네의 얼굴은 당황하기에도 모자란 시간이다.

안 그래도 라이무란, 소문난 건방진 아이 때문에 나오코는 골치가 아픈 때였다.


도쿄에서 온 아이로 대단한 집안인 건 분명했지만

그렇다고 이유 없이 나오코의 학급을 뒤집거나

시비를 걸고 다니는 건 절대 용서할 수가 없다.


나오코는 엉덩이가 순간 움찔한다.

치호가 말 없는 대화로 나오코의 손을 잡고 말리지만

그 따위 힘없는 방법이 통할 나오코가 아니다.

코하네는 무엇을 빼앗겼는지도 모르는 것 같은 얼굴을 하곤

가만히 앞만 응시하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돌려줘.”


코하네의 목소리에는 두려움도 분노도

그 어떤 감정도 엿볼 수가 없었다.

라이무라는 놈이 절대 돌려 줄리 없다.


“응? 말할 줄 아는 애였어?
흠, 이거 돌려 달라는 거야?”


라이무는 지갑을 손톱으로 툭툭, 치더니,

더럽다는 듯 꼬집듯 만지며 지갑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코하네는 움직이지 않은 채 라이무를 보지도 않은 채 허공만 응시하며 말했다.


“돌려줘 부탁해.”


라이무는 코하네의 맞은편 의자를 거꾸로 돌리더니

그곳에 앉아 나오코를 빤히 보며 말했다.


“이건, 죽은 엄마?”


라이무 손에 쥐어진 낡은 흑백 사진은

멀리서도 코하네와 같은 얼굴을 한 그녀의 엄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돌려... 줘.”


코하네는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네 죽은 엄마, 군 위안소에서 살았다며?
뭐... 돈은 벌어야 하니까.”


코하네의 입이 앙다물어져서 뚫릴 줄을 모른다.


“왜 말 못 해?
네 엄마 같은 여자 때문에 일본이 망신당하고 있는 건 알아?
혹시 네 엄마 한국 여자 아니야? 전염병 덩어리 한국 매춘부?”


라이무는 코하네의 짧은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튕겨 내며

더럽다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때까지도 코하네의 표정은 한 번도 변하지 않았다.


“돌려줘.”


라이무의 웃음소리에 주위 아이들도 따라 함께 키득거렸다.

나오코는 그런 모습을 이해할 수 없다.

라이무는 사진을 그녀에게 들이밀며 다시 말했다.


“학교 마치고 날 따라온다고 약속해,

그때 돌려줄 테니까
오지 않으면 찢어 버릴 거야 알아들어?”


코하네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지금 돌려줘.”


라이무가 코하네에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내 말, 이해 못 하는 거야?”


코하네는 라이무를 끝까지 쳐다보지 않고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돌려... 줘... 제발, 부탁해.”


코하네는 돌아서는 라이무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돌려줘...”


라이무는 자신의 길을 막고 있는 코하네에게 끈적한 침을 뱉었다.


“크억, 퉤, 더러운 한국 갈보 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나오코는

벌떡 일어나 코하네 앞에 섰다.

주머니 속을 뒤지며 손수건을 나오코에게 건네며 닦으라는 시늉을 한다.


그 모습에 얼빠 져 있는 라이무의 사타구니를

나오코는 순식간에 있는 힘껏 발로 차 버렸다.

정말이지 이 행동은 나오코만 할 수 있는 행동이다.

순식간에 라이무는 사타구니를 잡으며 교실 바닥을 뒹굴더니,

소리 지르며 죽는시늉이다.

꽤 정확하게 맞췄고 그 덕에 그가 일어날 때까지 걸린 시간은 꽤 길었다.


나오코는 라이무가 신음하는 소리에

코하네의 심장보다 더 아팠을까,라는 생각에 분노가 치밀었다.

나오코는 분을 삭이지 못하고 더욱 씩씩거리며 의자를 집어 들더니

구부정한 라이무에게 던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갑자기 키가 쑥, 커버린 나오코의 키는

학급에서 따라올 사람이 없을 정도였기에

위압감은 제대로 느껴졌을 것이다.

또한 나오코의 오빠가 하즈키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아버지 타다요시는 엄청난 계급의 군인이라는 것

또한 나오코에게 무서운 것이 없을 만했다.


치호가 뒤늦게 나오코를 말려 보지만 소용이 없다.

의자를 들고 있는 그녀를 피해 누운 채 등으로 기어가 보지만 역부족이다.


“나오코, 그만해 응?”


사타구니의 고통이 사라질 때쯤

다행히 라이무는 벌떡 일어나며 온갖 욕설을 내뱉기 시작했다.


“넌 뭐야? 죽고 싶어?”


나오코는 예전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사라지지 않은 잠재되어 있던 새카만 잿더미 같은 분노는

악마처럼 공기를 더듬거리며 나왔다.


“무기를 갖고 있는 사람은 나야, 너야말로 죽고 싶어?

그래? 그런 거야? 죽여줄게.”


“미친년, 완전히 또라이네?”


라이무는 아직 가라앉지 않은 사타구니를 잡으며

궁색한 모습으로 서서히 뒷걸음치고 더, 뒤로 발을 옮기는 중이다.


“나쁜 새끼, 아파?
정말 아픈 게 뭔지도 모르면서?”


나오코는 의자를 빈구석으로 던지더니

서슬 퍼런 눈을 라이무 얼굴 가까이 들이밀었다.

아닌 척하며 거드름을 피우고 있었지만

라이무는 오히려 뒷걸음질을 치며 난처한 모양이다.


“죽고 싶냐고? 그게 어떤 건지 알고 하는 얘기야?
가르쳐 줄까?”



싸움.jpeg



주위 아이들도 하나둘 겁을 먹더니 라이무와 똑같이 뒷걸음질을 쳤다.

치호는 나오코를 이대로 두면 정말 큰일이 벌어질 것을 예감하고

굽은 등으로 나오코를 있는 힘껏 막아섰다.

치호는 코하네를 한번 쳐다보며

아무것도 하지 않은 그녀에게 화가 치밀었다.

모든 게 코하네 때문에 일어난 일이지만,

코하네는 아무것도 보지 않았고,

표정도 입술도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있었다.

주워 담은 지갑 속에 사진만을 들여다보며 닦아 내고 또 닦아 낼 뿐이다.


그때 나오코는 주머니 속에서 붉은 접이식 칼을 꺼내 들었다.

나오코의 생각엔 앞으로 라이무와 부딪힐 일들이 많아질 것 같았고,

이런 일이 벌어진 김에 코하네에게

다시는 이런 일을 당하지 않게 마무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라이무 같은 인간은 꼭, 뒤탈이 있기 마련이다.


오랜만에 꺼내든 칼은

키가 커진 나무가 뒤뜰에 박히게 된 이후로

쓰지 못했던 물건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쥐꼬리를 자를 일을 더 이상 없었다.

주머니 속에 때마침 있던 물건에

나오코 또한 당황한 모습이 역력했다.

작은 물건이지만,

그것을 보자 곱게 자라기만 한 라이무의 눈동자가 흔들렸고,

사타구니 안쪽이 덜덜덜, 떨리고 있었다.

라이무는 손바닥을 펴 보이며 무어라 중얼거리며

급기야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


치호는 가슴을 쓸며 다시 코하네를 흘겨보았다.

정말이지 코하네는 정신이 온전치 못한 아이가 맞는 것 같다.

굽은 등 뒤로 땀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몇 남지 않은 반 아이들은 두려움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 나오코를 보았다.

그녀는 자연스럽고 능숙하게 칼을 접어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다들 들어, 이유가 뭐든 이 아이는 괴롭히지 마
그렇게 싫다면 졸업할 때까지만 참으면 돼!”


치호는 나오코의 머리에서 나오는 단어들과 말투들이 참 부럽다.

나오코가 정말 멋졌다.

치호가 나오코의 팔을 다독이며 잡았지만,

나오코는 자꾸만 끼어드는 치호가 귀찮다.

치호의 팔을 뿌리치며 자리로 돌아와 앉는다.


나오코는 생각했다.

아마도 빠르면 하루의 시간,

정도가 흐르면 미네코를 학교에 데려와야 할 일이 생길 것이다.

만약 그나마 라이무가 사내로서 최소한의

자존심이라도 남아 있다면 무사히 이 일은 마무리될 것이다.


코하네는 나오코의 손수건을 접어들고

아무 일 없다는 듯, 교실 밖을 나섰다.

치호는 고맙다, 는 말 한마디 없이 지나치는 코하네가 얄미웠고

그걸 그냥 보고만 있는 나오코도 이해되지 않았다.


“쟨, 정말 이상한 애야.”


“치호, 부모가 다 죽었는데 정상인 게 더 이상한 것 아냐?”


치호는 생각하지 못했다는 둥, 말을 얼버무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뭐,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고맙다는 인사는...”


나오코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은 치호의 목소리를 잘라먹었다.


“내가 편하기 위해 한 일이야, 그런 말 필요 없어.”


치호는 나오코 자신이 편하기 위해 했다는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어? 그, 그래.”


코하네가 지나는 길마다 아이들은 코하네를 피하며

개미 한 마리도 함께 길을 걷지 않았다.

연신 고개를 숙이며 걷느라 숨은 턱까지 늘 차오른다.

답답하고 긴 동굴을 지나 걸어온 것처럼 느껴졌다.

학교를 빠져나오자마자,

곤란한 호흡이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고 멈추었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하아악, 하악, 학.”


꼿꼿했던 코하네는 허리를 굽혀

손을 허벅지에 기댈 수밖에 없다.

봄 앞의 공기는 싱그럽고 하늘은 파랗다.

길거리엔 입을 벌리지 않은 꽃 몽우리가 가득했다.

봄이 아닌 것은 코하네의 머릿속과 가슴뿐이다.

산들거리는 바람으로 후미코의 목소리가 타고 내려와 사각사각 속삭였다.


“우리 소라, 반짝이는 소라 내 딸.”


“엄마, 난 소라 이름은 맘에 안 들어, 그냥 코하네를 쓸 거야.”


엄마의 목소리를 실어다 준 싱그러운 공기를 들여 마신다.


“흠, 하아.”


가늘고 작은 까만 눈동자에는 안개가 가득 끼어

금방이라도 물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다.

짧고 마른 다리가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바람은 코하네의 눈물을 떨어뜨려 놓고도

알은 채 하지 않고 서럽게도 불었다.


후미코는 코하네의 한글 이름을 소라,라고 지었다.

바다를 끼고 살았던 후미코는 특히

소라 껍데기에서 들리는 파도 소리를 좋아했다.

그때처럼 항구를 타고 온 바람은

소라 껍데기처럼 쏴아아, 하고 소리를 만든다.


파란 하늘 속 쨍, 한 햇빛이 빛나는 코하네의 얼굴을

시샘이라도 하는 듯 더욱 쨍쨍거렸다.

성질 급한 몽우리에 꽃잎이 고개를 내밀며 인사했다.

주머니 속 부드러운 나오코의 손수건이 코하네를 깨웠다.

코하네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린다.


“고마워!”


코하네의 집은 개조하지 않은 전통가옥이다.

수없이 세월을 먹어 낡았지만,

아키라의 손재주로 튼튼함을 유지했다.

확실치 않으나 코하네가 본 적이 없는 먼 윗대의 할아버지가 살아왔다고 했다.


코하네는 반은 한국인의 피를 갖고 있는

할아버지와 일본인 할머니 츠키노에게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자랐다.

이곳은 부모님과 함께 아름다웠던 시절을 보냈던 소중한 곳이기도 했다.


관리가 아주 잘된 다다미가 깔린 츠키노 방은

그녀의 품처럼 따뜻했고 츠키노의 냄새가 늘 존재했다.

코하네의 엄마, 후미코가 생전에 가꾸던 화단은

보기 싫은 잡초와 함께 꽃들이 불규칙하게 늘어져 있었다.

부지런 떨어 뽑아낸 잡초는 정말 또 잡초답게 살아났다.


코하네는 가방을 던져 놓고 잡초를 맨손으로 훑더니,

쑥, 쑥 잘도 뽑아낸다.

후미코의 잔잔한 잔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맨손은 안돼, 소라야 손 다친다고 했잖아?”


“엄마 난 코하네야, 코하네가 좋아.”


무의식은 후미코가 항상 앉아 있던 자리로 고개를 돌려 보게 했다.

현실은 아무도 없었고 바랜 나무뿐.

그 자리는 다른 자리보다 더 반질반질하고 회색빛마저 감돌았다.

고개를 옆으로 뉘어 보면 자리가 조금은 움푹 파인 것처럼 보였다.

코하네는 후미코의 옆자리에 앉아 볕을 받으며

손바닥으로 그녀의 자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나무 자리는 후미코의 속살처럼 보드라웠다.


“엄마, 이제 좀 편안해?”


후미코는 대답이 없고, 나무 자리에 커다란 눈물방울이 뚝, 하고 떨어졌다.

코하네의 엄마 후미코(이영선),

그녀는 15살의 나이로 일본 군에 의해 마구잡이로 인생이 짓밟혔다.


돈을 벌 수 있다는 꾐에 넘어가

다시는 고향 땅을 밟지 못한 숱한 소녀 중 하나다.

일본군이 패망하기 직전,

일본군은 어린 소녀들을 상대로 자행했던

잔인하거나 비윤리적이거나 한 행태들의 증거를 없애기 위해

아까운 목숨을 짐승과 같은 짐승들이

그 딱딱한 그 총구멍으로 불꽃을 꺼트렸다.


일부 양심을 갖고 있었던 이들도 있었지만,

전쟁으로 사리 판단이 어려운 그들은 나라의 명령에 따름은 애국이라 치부했다.


코하네의 아버지 신페이 말에 따르면

그 당시 전쟁터보다 더한 피비린내가 어디를 가든 진동했다고 한다.

그때 후미코는 반쪽짜리 한국인의 피를 갖고 있었던

군인 신페이를 만나게 되었고

피비린내 나는 짓밟힘과 죽음과 가까운 그늘 속에서

간신히 벗어날 수 있었다.


신페이의 집안은 대대로 꽤 유명한 군인 신분의 집안이었고,

그 점을 이용해 후미코를 고향으로 데리고 올 수 있었다.

후미코의 신분은 위안소 내에 있던 일본 여성으로 바뀌었다.

한국어를 할 때마다 매를 맞아야 했던 기억에

가까스로 안전함을 느낄 때조차, 홀로 있을 때조차,

한국어 하기를 두려워했고, 할 수도 없었다.

그 누구도 신경 쓰는 사람 하나 없어도

후미코는 절대 한국어를 하지 않았다.

코하네가 어릴 적 아버지 신페이에게 물었다.


“아빠, 엄마를 어떻게 만났어요?”


신페이는 매번 같은 이야기를 잊지 않을 거라는 듯,

귀를 열지 않았던 아내 후미코에게도 들리도록

늘 큰 소리로 반복하고 또 반복해서 얘기했다.


“전쟁터는 늘 먹을 것이 귀하지
바싹 마른 네 엄마는 뼈가 살을 튀어나올 것처럼
앙상한 마른 가지 같았어
아빤... 난 주먹밥을 나눠 줬지,
한데 내가 준 주먹밥을 내게 반으로 나누어 주며 웃는 거야
그때 난 네 엄마와 함께 할 거라고 마음먹었지.”


신페이는 주먹밥을 나눠주며

어린 소녀의 미소를 지켜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한국인 피가 섞인 그였지만

일본인 군인으로서 그는 나라에 충성했다.

신페이가 말했다.


“목숨을 다해 나라에 충성했지만,

결국 남은 건 보이지 않은 다른 전쟁의 연속이었어
총성 없는 전쟁이었지..."


신페이는 후미코처럼 죽기 전까지도 총성을 들었을 것이다.

신페이는 후미코를 살리기 위해 또 다른 한국인들을 죽여야만 했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신페이가 쏘아 댄 총성에 의한 비명은

절대 잊지 못한다며 매일 밤 술 없이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후미코의 신분을 들키지 않고 살 수 있었던 것은 츠키노의 힘이 컸다.

츠키노는 그 당시 갖고 있었던 일본인의 한국인들에 대한

거부감에 대해 늘 조용한 불평을 늘어놓았다.

전쟁의 피해자를 두고 구별하지도 못하는 봉사처럼

지껄이는 사람은 인간도 아니라며 무릎을 탁탁, 치며 호통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신페이가 집으로 후미코를 데리고 온 날을 후미코는 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소식을 전해 들은 츠키노는 덜덜, 떨고 있는

앙상한 뼈만 남은 후미코를 아무 말 없이 오랫동안 안아 주었다.

후미코는 자기 잘못도 아니면서

그들을 대신해 속죄의 눈물을 밤새 흘렸다고 한다.




위안소.jpeg 영화 귀향 중에서



꽃의 시절을 물어 뜯기고,

밟히고 끌려다녔던 후미코는

남편인 신페이 조차 믿지 못했다.

그녀의 눈은 언제나 수많은 이들의

죽은 눈을 담아 죽음의 강너머에 존재했다.


츠키노는 후미코를 끊임없이 보살폈고,

매일매일을 상처가 지워지지 않은

후미코의 발을 씻겨 주며 모두를 대신해 속죄하며 살았다.

많은 세월이 흐른 뒤에도 후미코는 집 밖을 나서기를 두려워했지만,

츠키노의 정성으로 지금 이 집의 가장자리에

앉아 햇빛을 쐬기 시작했고, 화단도 가꾸기 시작했다.

물론 아주 가끔은 집과 멀지 않은 공원을 산책하기도 했다.

하지만 죽음을 듣던 예민한 귀는 작은 소리에도 화들짝,

놀라 집으로 도망가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신페이는 후미코가 이 집에 들어와 처음으로

츠키노에게 웃음을 보이며 말했던 날을 회상하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화단의 잡초를 뽑으며 웃는 그때의 후미코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후미코가 츠키노에게 말했다.


“어머니, 우리 소라에게 예쁜 것만 보여줄 거예요!”


신페이는 이곳의 따뜻한 햇살과 향기로운 꽃향기가

지속되길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후미코가 코하네를 낳고, 오랫동안 천국의 날은 계속되었다.

코하네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쯤 츠키노는

심장이 좋지 않아 병을 앓고 있었다.

그때 병원은 츠키노의 병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늘 천천히 조심조심, 이라는 단어를 입에 물며

지낼 수밖에 없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츠키노는 가족을 위해

오랫동안 헌신했으며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후미코를 대신해 코하네를 보살폈고, 또한 후미코를 보살폈다.


후미코는 츠키노와 함께하는 동안

단 한 번도 인상을 찡그리거나 웃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런 츠키노는 절대 서두르는 법이 없었으며

죽음까지도 조용히 요란하지 않게 조용히 눈을 감았다.

츠키노는 마지막 길을 가기 전까지도

후미코의 손을 놓지 않았다.


수없이 많은 이들이 죽음의 강을 건너는 것을 본 후미코지만

그 순간 아주 큰 두려움에 벌벌 떨었다.

그런 그녀 대신 츠키노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후미코, 화단의 꽃은 절대 죽게 두면 안돼
끝까지 살아남아야 돼, 알아들은 거지?

나를 용서해라 모두를 용서해, 미안하다 후미코.”


츠키노는 후미코가 그 일을 손에서 놓는다면

후미코는 세상 사람이 되는 것을 포기하고

강을 건널 것이라 말했다.

후미코가 유일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화단을 꾸미는 일이다.


군인들이 왔다며 방 안으로 숨어들어

나오지 않으려 한 날에도 화단 가꾸는 일은 절대 손에서 놓지 않았다.


츠키노는 숨이 끊어진 순간까지 후미코의 손을 잡고 있었다.

후미코는 죽음이 자기 손을 잡고 끌고 가는 느낌에

다시 온몸을 덜덜거렸다.

어린 코하네는 식어가는 츠키노의 손을 붙들고

엉엉 울기 시작했고, 츠키노의 미안하다는 말에

대답조차 하지 않던 후미코가 모질어 보여 더욱 울어 댔다.


신페이는 그때 후미코의 눈은 츠키노와 두 손을 꼭 잡은 채

가지 말아야 할 그 길을 이미 함께 걸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고 했다.

츠키노의 마지막 말은 아마도,

당신이 없는 후미코의 삶이 온전치 못할 것이라

이미 예감한 것이다.

후미코의 삶은 츠키노가 떠난 이후로,

마음 병이 갈수록 더욱더 폐이기 시작했다.


점점 피폐해진 후미코는 신페이가 처음 보았던

바짝 마른 소녀로 돌아갔다.

총포의 전쟁은 끝나지 않은 침묵의 전쟁으로 남아

탈바꿈한 채 천사 같고 소중한 딸, 코하네까지 알아볼 수 없게 만들었다,


후미코의 기억은 15살 잔인한 그때에 멈췄다.

후미코에게 싱그러운 향기와 따뜻한 햇살을

선물한 집은 어느 순간,

딱딱한 이부자리와 퀴퀴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았고,

갈색의 나무는 피로 범벅되어 있는 붉은색 집으로 착각하는 날이 많아졌다.


또한 남편 신페이는 발가벗은 짐승의 모습을 한

잔혹하기 짝이 없는 군인이었으며

어린 딸 코하네는 그 눅눅하고 퀴퀴한 냄새와

소독 냄새로 덮여 있는 침구를 함께 사용했던 죽은 어린 동료였다.


여러 해 동안

그때의 모습을 한 채 자신의 방에서 한 발걸음도

나가지 않았으며 어쩌다 코하네가 눈에 들어올 때면

코하네는 꼼짝없이 후미코의 방 안에 갇혀 있어야만 했다.


군인들의 손에 이끌려 갈까,

코하네를 보호하기 위해 때가 가득한 담요로

그녀를 꼭꼭 숨겨 놓았다.

그러다 숨구멍이 부족할 땐

코하네는 늘 비명을 지르며

신페이의 도움으로 빠져나올 수가 있었다.

그때마다 신페이에게 퍼붓는 후미코의 욕지거리는

차마, 들을 수도 볼 수도 없을 만큼

가슴에 상처를 남겼다.

그렇게 츠키노의 빈자리는 후미코를 더욱 피폐하게 만들었다.


아주 가끔 후미코로 돌아올 때면

따뜻한 나무의 가장자리에 앉아 코하네를 바라보고,

쓰다듬고, 를 반복하며

그동안 벌어진 일에 속죄하며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어린 코하네는 그런 후미코의 기억이 너무도 소중해

끊임없이 츠키노 얘기를 했다.

후미코는 츠키노 이야기를 꺼내 놓을 때면

따뜻한 기억의 끝자락을 그나마 부여잡고 잊지 않으려 애를 썼다.


코하네는 일찍부터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려 하는 마음이

습관처럼 자리 잡았다.

원치 않았지만 후미코의 우울함 또한

그대로 작은 코하네에게 천천히 스며들었다.


후미코의 눈이 순간 두려움으로 가득 차,

어린 소녀의 모습으로 돌아갈 때면

어른도 잘 알 수 없는 슬픔을 느끼며

조용히 눈물만 뚝뚝, 흘리던 코하네였다.

어린아이는 슬픔을 참는 법을 너무 일찍 깨달았다.


“엄마, 돌아와 돌아와 제발.”


코하네는 여전히 꿈속에서 후미코를 찾아 나선다.

후미코를 찾아도 후미코는 코하네를 알아보지 못했다.

후미코의 열다섯 살, 코하네의 열일곱, 그녀들의 슬픔은 어쩌면 다르지 않았다.


그날의 햇살은 붉은 사막의 것처럼 유난히 빛나고 강렬했다.

늦은 여름, 오랜만에 후미코의 모습으로

화단을 정리하던 모습은 영락없는 잔소리 많은 아내의 모습이었다.


붉은빛을 머금은 후미코의 뺨은 어린 소녀 같았고

가슴이 아플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 순간만큼은 절대 후미코 안의 상처가 드러나는 얼굴이 아니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신페이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간절하게 만지고 싶었던 후미코의 하얀 손을

살며시 잡을 수 있었다.


악, 소리도 내지 못할 만큼의 찰나,

후미코는 공포로 질린 얼굴을 하며

들고 있던 곡괭이로 신페이의 어깨를 찌르고 말았다.

신페이는 후미코가 자신이 곁에 있음을

당연히 알아차린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후미코는 놀람을 머금은 상태였다.

신페이는 곡괭이를 본 공포를 느낄 새도 없었다.

그는 그때의 그녀는 후미코가 아님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등을 돌리고 무시무시한 검은 그림자를 본

위안소 안의 어린 소녀 후미코는

최대한의 방어를 하기 위해 온갖 머리를 굴렸을 것이다.

신페이는 찔린 어깨보다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후미코 때문에 심장이 더 아팠다.

자신을 알아보지 못함은 늘 반복되는 일이었지만 그때마다 신페이는 점점 더 아팠다.


정적의 순간, 붉게 흘러내리는 신페이의 어깨를 바라보며

후미코 자신이 들고 있던 그것을 덜덜, 떨며 겨우 붙잡고 있었다.

돌아온 후미코의 기억으로 신페이의 붉은 피는

자신이 한 짓임을 알고 가슴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소리를 내며 괴로워했다.


“으어어, 으어어어어.”


후미코는 고개를 도리질하며

신페이의 어깨와 얼굴을 번갈아 보며 뒷걸음질을 쳤다.

순간 신페이는 위험을 또는 죽음을 감지했을까,

후미코가 사라질 것 같은 공포에 휩싸였다.

후미코의 뺨을 물들이고 있던 붉은빛은 빠르게 검은 그림자로 덮이고 있었다.


그는 찔린 어깨의 고통 따위는 잊은 지 오래다.

자세를 낮추고 슬픈 미소로 후미코에게 나지막하게 말했다.


“후미코, 괜찮아 아무 일도 아니야,
당신은 그냥 가만히 있어 내가 해결할 거야, 응?”


신페이는 손을 뻗어 곡괭이를 들고 있는

후미코의 팔목을 천천히 잡아당겼다.

그가 안심을 하기도 전에 후미코는

다시 고개를 도리질하며 붉은 눈물을 흘렸다.

후미코를 잡은 신페이의 손은

이미 바닥을 향해 있었고 후미코의 목에서 선혈이 사방으로 흘렀다.

신페이는 바닥에 쓰러진 후미코를 안고

붉은 목을 손바닥으로 새어 나오는 것들을 틀어막았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오는 후미코의 일부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짙고 붉었다.

후미코가 입을 열었다.


“내가 당, 신을 찔렀어... 요
내가 아기를... 죽, 일 것 같, 아... 미안, 신, 페이 미 안, 해요...”

그는 그녀의 얼굴에 자기의 얼굴을 비비며 말했다.


“괜찮아 괜찮아 후미코.”


그때 오랫동안 듣지 않았던 총포 소리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후미코의 이마를 관통했다.

오랫동안 같은 군인 신분이었던

신페이의 동료가 총을 들고

그들을 넋 나간 듯 지켜보고 있었다.


후미코의 얼굴은 빠르게 멍이 든 것처럼 식어갔다.

신페이는 오랜 시간 동안 후미코를 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후미코는 츠키노가 먼 곳을 가는 날,

함께 사라졌던 사람이었다.

신페이의 절규하는 소리는 갑자기 숨을 멈추는 것처럼

읍, 하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내지 않았다.

후미코의 굳은 손은 신페이의 손을 끝까지 놓지 않았다.

시간이 흐른 뒤, 신페이는 코하네에게 말했다.


“그때 엄만, 널 기억했어 눈 속에 네가 있었지.”


후미코의 이야기를 하는 신페이의 눈은

후미코의 눈을 보며 말했던 것처럼

이미 불 꺼진 생명과 똑같았다.

신페이는 어쩌면 후미코를 사랑했던 감정보다

죄책감을 덜어낼 수 있는 존재의

한 일부였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잔인한 전쟁 속에서

신페이가 어쩔 수 없이 자행해야 했던 것들에 대한

죄책감의 덩어리 후미코가 사라지고 난 후,

견딜 수 없는 공포로 다가왔을 것이다.

속죄할 수 있는 그 무엇도 아무것도 이젠 없었다.


매일 밤, 마시는 술은

굵은 밧줄을 목에 칭칭 감고 발을 동동거리면

그 죄책감을 없애 줄 것이라 상상하고 또 상상하게 했다.


코하네는 나무 기둥에 기대어

후미코가 가꾸던 화단의 흙내와

신페이의 자장가를 들으며 잠시 잠이 들었다.

코하네는 아직도 쉴 새 없이 도망을 다녔고,

신페이는 도망치는 딸아이의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닌다.


잠이 든 코하네의 입가에 미소가 살짝 번졌다.




후미코1.jpeg






남은 자



미네코는 이제 제법 중년의 얼굴이 묻어났다.

어디서나 눈에 띄는 외모와 짙은 화장 때문에

나오코는 엄마와 함께 다니는 것을 굉장히 꺼렸다.

미네코는 어디를 가든 눈에 띄는 그것들을

마치 자랑이라도 되는 듯,

뽐내고 다녔지만 나오코는 겉치레만 그럴듯하게 꾸미는

텅텅 비어 있는 그녀가 맘에 들지 않았다.

나오코는 늘, 투덜거렸다.


“엄마, 속은 꼭, 통통거리는 빈 깡통이지.”


미네코는 어린 나이에 나오코를 낳았으며

배속에 생명이 자리 잡는다는 의미조차 잘 알지 못했다.

미네코의 모성애는 언제나 모자랐으며 안타까웠다.


남편의 큰 키와 커다란 눈동자를 닮은

나오코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자신이 낳은 아이라는 게 분명해진다.

길고 커다란 눈은 어떤 감정도 제압할 수 있는

카리스마를 갖고 있었고, 짙은 눈썹과 붉은 입술의 조화는

마치 그림을 뚫고 나온 초상화와 같았다.

미인들만 타고났다는 쇄골은 움푹 파였고,

밑으로는 풍만한 하얀 가슴이 그와 반대로 불룩 나왔다.


제법 머리까지 훌쩍 커버린 나오코에게

미네코는 이제 상대가 되지 않는다.

잔소리를 끊임없이 하다 보면

나오코는 눈 한번 깜박이지 않은 채

미네코를 노려보았다.

미네코가 잘못한 일이 없어도

잘못됨을 인지하게 만드는 눈빛이다.

나오코가 어릴 적 미네코가 그녀에게 했던 행동을

무의식적으로 나오코에게서 보게 되었다.

무언가 꽤 뚫는 듯한 그녀가 미네코는 가끔, 두렵기도 했다.


재단과 뒤뜰의 키 큰 나무의 이야기는 쑥,

들어가 버린 지, 오래다.

미네코는 가끔 온몸이 이유 없이 아플 땐

나오코의 기도가 정말 영향을 주는 건 아닐까,

란 생각에 일부러 딸을 피해 다니기 시작했다.


이마 위의 한 줄의 주름은 인사도 없이 찾아와

어느새 굵은 메스 자국과 같이 남았고,

억지스러운 미소를 지을 땐 기다란 눈꼬리가 처진다.

그 물결무늬는 입가에 남는 주름을 눈에 띄지 않게 만들어 주는

무기가 되기도 했다.

미네코는 여전히 타다요시의 사랑을 갈구했고,

그들의 굳은 약속, 주말 저녁 식사 또한 꼭 붙들어 매고 놓지 않았다.


멀리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하나둘, 입장했다.

학교의 입학 시작은 너나 할 것 없이

큰 치수로 옷을 맞추기 마련이다.

하지만 3년 시간 동안 더 크지 않은 학생들이 대부분이었고,

아직도 커다란 교복은 치렁치렁, 나무에 매달려 있는 허수아비 같았다.


유난히 교복이 작아 보이는 나오코만 눈에 띄었다.

그에 반해 대단한 노력을 해야 빛날 것 같은

자기 얼굴을 생각하니

미네코는 자신의 짙은 화장이 조금, 한심스럽다.

특별한 치장을 하지 않아도 붉은빛이 감도는

입술의 나오코는 정말 예뻤다.

나오코의 뒤를 따라가는 치호는

나오코의 말 대로 정말 등이 꼿꼿하진 않아도

예전처럼 자신 없이 뒤뚱뒤뚱 걷지는 않았다.


미네코는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전쟁 같은 결혼 생활이

끝을 맺은 지 오래고 다시 시작한 결혼 생활의 삶도

어느새 중간을 넘어선 중년의 느낌이 들었다.

빠른 시간은 벌써 나오코의 어린 시절에 마침표를 찍었다.

미네코는 인색하게도 한 번을 따뜻하게

품어 주지 않았던 나오코가 고맙게도 잘 자란 아이가 되었다.

하지만 미네코에게 고마움이란 빠르게 지나가는 바람과 같았다.

눈에 띄는 외모를 반짝이는 딸의 얼굴을 바라보며

나오코가 빨리 커버린 탓에

자신이 늙어 버렸다고 한숨을 휴, 하고 내쉬는 미네코다.


나오코는 미네코의 두 팔을 붙들며

처절하게 매달리며 당부한다.

검은 계열의 옷을 챙겨 입고 올 것,

짙은 화장은 절대 금물이라며 애원했다.

나오코의 당부가 무색할 정도의 미네코.


나오코는 멀리서도 눈에 띄는 미네코와 눈이 마주치더니,

인상을 찌푸리며 예상대로 고개를 홱, 하고 돌려 버렸다.

나오코의 검은 머리카락이

날카로운 쇳소리를 낼 것처럼 냉랭하게 찰랑거린다.

미네코는 고개를 숙여 자기 모습을 훑더니,

옆자리의 타다요시 옆모습을 한참 감상했다.

타다요시의 옆구리를 쿡쿡, 찔러보았다.


“여보, 나 괜찮아요?”


타다요시는 역시 잔잔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언제나 그런 모습의 타다요시를

미네코는 욕망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나마 긍정의 끄덕임을 보았으니,

오늘은 기분 좋게 마무리하려 노력할 것이다.

언제나 성에 차길 바라는 건 무리라는 것을 미네코는 알고 있다.

그랬다가 아마도 단순한 관찰의 눈길을 받는 관계마저

끝이 날 수도 있다는 것을 너무 잘 안다.


미네코는 나오코에게 집중할 수 없었다.

상을 받는 학생이 자기 딸인지, 딸의 차례인지,

분간하지 못한 채 타다요시만을 흘긋거릴 뿐이다.

타다요시의 아주 잘 정돈된 머리카락을 바라보며

정돈되지 않았어요,라는 눈빛을 보냈다.

천천히 타다요시 가까이 손을 갖다 대며

쓸데없이 잘 정돈된 머리카락을 매만진다.

그 사이 미네코는 그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타다요시는 친 딸도 아닌 나오코를

진심으로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있다.

나오코는 그들이 잘 알지 못하는 상장을

두 번이나 받았다.

타다요시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오코가 대학에 입학하면 모든 지원을 해줄 거야.”


어쩌면 하즈키가 하지 못했던 것들을 거뜬히 해 보이는 나오코가 기특했을 것이다.


“고마워요, 당신.”


고마움의 순간은 처음으로 만족했다.
미네코에게 이런 일쯤 당연한 일이 된 지 오래다.

이젠 돈이란 것을 걱정하던 시절은

미네코의 이야기가 아니다.

미네코는 립스틱을 꺼내 붉은 입술을 다시 고쳐 바른다.


나오코는 이 시간을 기다렸다.

묵묵히 말을 아꼈고,

티 내지 않은 수행과도 같았던 매일의 싸움을

이젠 끝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무성한 소문과 칼날과 같았던 눈빛들을

참고 모진 시간을 견디어 냈다.

기도의 결과는 바로 나타나진 않겠지만,

나오코는 여전히 받든 그 무엇인가를 굳게 믿고 있다.


성인이 되었다는 건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질 수 있는 명분이라 생각했다.

즉 솔직함과 정당성을 빙자한 거짓말도 할 수 있다고 믿었다.


나오코는 모범상을 받았다.

졸업식에 참가한 부모들은

나오코가 미네코의 딸이라는 사실을 거의 모두 알고 있다.

상을 받는 순간 미네코와 타다요시를 바라보며

박수하지만 미네코는 영문도 모른 채,

자신의 미모를 뽐내려 고개를 더욱 빳빳이 들고 도도하게 굴었다.

나오코는 상장을 받아 들며 미네코를 바라보았다.

역시 미네코는 중요한 순간을 그렇게 놓치곤 했다.

그나마 타다요시의 따뜻한 눈빛을 전해 받으니,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오코는 만족하며 안도했다.


나오코는 타다요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하즈키를 찾았다.

역시 하즈키는 오지 못했고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어도 서운했다.

숨을 크게 후, 불어내며 앞으로의

자신의 계획과 기도가

결론 내려 주기만 바라는 마음으로 기대하고 또 기대해 본다.


나오코는 상장을 가슴에 안고

미네코는 본 척도 하지 않고

타다요시의 곁으로 와 팔짱을 낀다.

미네코는 마냥 버릇없는 아이로만 보이는

나오코의 행동이 맘에 들지 않았다.


“나오코, 축하한다.”


“고마워요, 아빠.”


매일의 신경을 하즈키에게만 쏟았던 터라

오랜만에 보는 타다요시의 미소는 정말이지 따뜻했다.

나오코는 뒷마당의 키 큰 나무가 생각나

타다요시를 보며 피식거렸다.

그를 보고 웃는 나오코의 얼굴은

다시는 검은 고양이가 흘리는 검은 물감을 보이지 않을게요,

라 말하는 것 같았다.


미네코는 사진을 찍기 위해

다시 또 거울을 꺼내 들었다.

물론 나오코의 상장은

눈에 들어올 리 없었고,

딸에 대한 칭찬은 역시 생소한 단어다.

나오코는 아예 미네코의 행동을 쳐다보지도 않고

신경 쓰지 않을 작정이다.


바삐 움직이는 인파 속에서

작은 아이가 또다시 나오코의 눈에 들어왔다.

작은 아이, 코하네는 그때도 혼자였다.

사람들로 붐비는 때라

작은 그녀는 잘 보이지도 않는다.

나오코는 일부러 고개를 돌려

코하네를 바라보았다.

보이지 않았다가, 코하네는

어느새 빛을 발하는 얼굴을 하고 있다.

표정 없는 얼굴은 정말이지 슬픔이 가득하다.

어디서나 나오코의 눈에 띄는 코하네다.

나오코의 눈에는 이상하리만큼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언젠가 또다시 만날 것 같은 운명 같은,

검은 고양이와의 만남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코하네는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아빠, 잠깐만요. 친구와 함께 찍고 싶어요.”


타다요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코하네는 자신의 졸업식인지도 모르는 것처럼

넋을 놓고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너.”


코하네는 아무 대답 없이 나오코만 올려 보았다.


“사진, 찍자.”


“뭐라고 했어?”


코하네는 자신이 잘못 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사진 찍자고 말했어, 이리 와.”


눈만 가늘게 뜨고 하즈키처럼 멀뚱 거리고 서있는

코하네를 잡아끌었다.

날아가듯, 민들레 홀씨 같은 작은 아이는

빠르게 이끌려 갔다.

타다요시가 먼저 인사를 건넨다.


“나오코 친구구나, 반갑다.”


나오코는 인사하며 고개를 숙이는

코하네의 정수리가 땅에 닿을까 겁이 났다.


“안녕하세요.”


미네코는 가슴에 손을 올리며 자신을 소개했다.


“난 나오코 엄마, 음 근데 부모님은 어디 계시니?”


미네코의 말투는 언제나 그랬듯이

알고 있음을 모름으로 말했고,

모름을 알고 있다로 표현했다.

당연히 코하네의 부모 이야기는 너무 잘 알려진 소문이었고,

어쩌면 그 소문들을 더욱 빠르게 진행시킨 사람 중 하나일 것이다.

그때 짜증 섞인 목소리를 내며

나오코가 끼어들어 코하네와 타다요시의 팔짱을 꼈다.


“저기, 이제 됐어요 우리 사진 찍어 주세요.”


미네코의 말을 당연히 거칠게 무시된다.

엉거주춤하게 서있는 미네코는 사진기를 보며 활짝 웃었다.


“한 번 더 찍을게.”



졸업사진.jpeg



나오코는 코하네를 다시 끌어 둘만의 사진을 찍었다.

타다요시 또한 코하네를 알고 있었고,

그런 친구를 챙기는 나오코가 기특했다.

미네코는 내내 입을 삐죽거리며

자신이 주인공이 되지 못하는 상황을 맘에 들어하지 않았다.


근처에 있는 치호는

뭐가 그리 좋은지 여전히 정신없이 부산을 떨었다.

나오코가 코하네와 함께 사진을 찍는 모습을 보며

약간의 질투를 느꼈지만, 반면 나오코가 멋져 보였다.


치호는 평상시처럼 먼저 다가가기보다

나오코를 기다려 보겠다고 마음먹었다.

중학교 때부터 내내 붙어 다닌 그들이지만,

나오코가 치호 자신을

별로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나오코는 늘 자기가 먼저였고,

다른 친구들처럼 함께란 의식을

갖고 있지 않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치호를 마치 보호하는 듯한 느낌은 늘 받고 있었다.

마치 책임감 같은 거라고 해야 할까,

치호는 시간이 지난 지금도 나오코를 잘 알지 못했다.


그때 나오코와 눈이 마주쳤다.

마치 반사적으로 치호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나오코는 역시 치호를 보지 못한다.

아니, 보았지만 눈은 빠르게 다른 곳을 응시한다.

치호는 그날, 마지막 사진기 셔터를 누르는 순간까지

자신이 찍는 사진 속에 나오코는 없었다.


코하네는 애써 웃음을 지으려 노력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오코가 코하네에게 말했다.


“이 사진, 나중에 꼭 줄게.”


코하네는 고개를 끄덕였고

주머니 속에서 무언가를 찾더니,

어색하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이거, 잘 썼어. 지금은 깨끗해.”


나오코는 웃으며 반갑게 받아 들었다.


“잊고 있었어. 고마워.”


고마워하는 소리에 코하네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볕이 코하네의 얼굴을 비추며 그녀를 질투하듯 눈을 감겨 버린다.


“난 오늘 친구들과 신나게 보낼 생각이야, 같이 갈래?”


나오코의 목소리는 처음보다 강압적인 억양이 사라졌다.

검은 고양이를 닮은 코하네에게

호기심이 생긴 게 분명하다.

코하네는 말보다 고개가 먼저 절레절레 대답했다.


“아, 그리고 그때 고마웠어, 그 말 꼭 하고 싶었어.”


마을 사람들은 코하네를 부모를 잡아먹는 귀신 붙은 아이,

재수 없는 아이라고 불렀다.

남의 감정은 생각하지 않고

소문을 옮기며 시시덕거리는 사람은

아마도 악마의 탈을 쓴 게 분명하다.

그럼에도 코하네는

검은 것에 물들지 않은 하얀 미소를 지니고 있었다.

또한 코하네의 얼굴을 계속 보고 있자면,

하즈키처럼 자꾸만 빛이 흘러들었다.


“그래.”


“그럼, 갈 게.”


나오코는 머뭇거리다가 손수건을 도로 내밀었다.


“잠깐만, 이것, 이거 그냥 가져가.”


손수건에 나오코의 온기가 느껴졌다.


“난 신을 믿어 나의 신, 너도 그렇게 믿어 봐
이건 무기가 될 수 있을 거야, 그때 너를 지켜 줬잖아.”


“아...”


코하네는 단 한 번의 망설임 없이

나오코의 신을, 무기를 받아 들었다.

나오코는 코하네가 무기를 주머니 속에 집어넣는 것을 확인하곤,

빠르게 친구들 곁으로 스며들었다.


치호가 나오코를 급히 끌어당기며 코하네를 흘겨본다.

코하네에게 치호는 늘 그녀를 흘겨보거나,

중얼거리거나, 야, 라며 아무런 이유 없이

톡, 쏘아 대는 아이다.

유일하게 나오코에게는

최대한 등을 쭉 펴고 싱긋거리며

웃기도 잘 웃었다.

코하네는 그러한 치호의 모습이 귀엽다고 생각했다.


코하네는 오랜만에 주변을 의식하며 천천히 걸었다.

형형색색의 꽃들을 들고 웃고 있는 아이들은,

지금 얼마나 행복한가,

라는 물음에 대해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까?

라며 부러운 눈빛으로 둘러보았다.

귀를 기울이면 그 대답의 웃음소리가 다양하게 들려왔다.

그 대답의 소리는 아하하, 크크크, 우하하, 꽃들의 색같이 다양하다.

코하네는 소리 내어 함께 크게 웃었다.

주머니 속의 손수건이 온기로 아직 따뜻하다.


돌아서 가는 코하네를 다시 한번 치호는 흘긋거린다.

과하게 나오코의 팔을 꽉 잡은 탓에

나오코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다.

치호가 영 나오코의 팔을 놓아주지 않았다.

남자 친구에게 정신이 팔려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가 돌아온 치호는

정말이지 양심도 없다고 나오코는 생각했다.

답답함에 짜증이 밀려왔다.


“치호, 이것 좀 놔.”


“으응?”


나오코가 직접 치호의 팔을 잡고 뿌리쳤다.

치호는 여태껏 나오코에게 보여주지 않았던 표정을 짓더니,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듯해 보였다.

나오코는 치호와 눈을 마주하기가 힘들었다.

나오코는 재빨리 다른 곳을 응시했지만

나오코의 뒤통수는 치호의 눈빛으로 따끔거리기까지 했다.

어느새 나오코 앞에 치호가 서 있다.


“치호.”


“너무해 나오코.”


단어를 또박또박 천천히 말했다.

치호는 단 한 번도 나오코에게 투정을 부리거나,

화를 내거나 화를 돋우는 행동을 한 적이 없었다.

더욱 당황한 건 나오코다.


“치호 왜?”


“왜 내게만 그래?
네 친절을 모른 척하는 애에겐 친절을 베풀면서
네게 친절한 나에게, 왜 내게만 그래?”


“치호? 무슨 말을...”


나오코의 말을 잘라먹는 것도 처음이다.


“알면서 모른 척하긴,
넌 항상 그랬어, 공평하지 않고 비겁해.”


치호는 점투성이 볼에 투명한 눈물이 떨어진 순간

빠르게 어디론가 사라졌다.

나오코는 분명히 치호의 눈물을 보았다.

그건 자신 때문에 상처를 받았다는 신호다.

치호를 따라가 달래 줄 수도 있었지만,

치호가 뱉은 말 그대로 나오코의 감정은 비겁함이 맞다.


나오코는 그 순간 알았다.

쭉, 치호와 함께 지만, 치호의 등은

늘 시선을 불편하게 했고 창피했다.

속물처럼 겉으로는 치호를 위하는 척,

정의로운 척했으나,

속을 들여다보면 비겁했던 게, 맞다.

치호의 말이 옳다.


코하네를 향해 손가락질하는

어른들이 문득 떠오르더니,

자신도 그들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오코는 어쩌면 치호를 본 그 순간부터

속물이었을지도 모른다.

알고는 있었지만

들어내지 못했던 감정을 들키고 나니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서있는 기분이 들었다.

오히려 마음이 편해진 건 며칠이 지난 후다.


시간이 지나도 나오코는 한동안

치호를 어디서도 볼 수 없었다.

물론 치호를 찾으려 하지 않던 연락도 취했다.

가슴속 깊이 치호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치호 정도의 통찰력이라면 분명 알고 있을 것이다.

자신을 그리워하지만,

불편을 감수할 정도로 치호 자신을

찾지 않을 것이란 걸 말이다.

시간이 지나도 치호를 볼 수 없다는 것은

또한 아직 나오코를 용서하지 않았다는 뜻도 될 것이다.


나오코는 길을 가다가,

밥을 먹다가 자신도 모르게 뒤를 확인했다.

치호가 처음 나오코를 뒤뚱거리며 따라왔던 것처럼

어쩌면 치호를 그렇게 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치호는 아주 오랫동안 나오코를 용서하지 않았다.

그 덕에 나오코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애틋함과 소중함이 이별할 때 갖추어야 할 것은

무모함일 것이다.

그래야 떨쳐낼 수 있기 때문이다.





꽃 몽우리가 부드러운 꽃잎을 품고

기회를 엿보며 나올 준비를 하고 있었고,

후미코의 화단은 그나마 남아 있는

여러 해 살이 꽃들이 듬성듬성하게 올라와 있다.


후미코에게만 후하게 내주던 햇빛,

빛이 잘 드는 가장자리,

그곳에 걸치고 앉은 후미코의 엉덩이,

그 모습을 바라보는 신페이, 그가 앉아 있던 의자,

후미코의 열다섯 살해로 넘어갈 때마다

손으로 꾹 잡아 굳게 밀어 닫던 엄마의 미닫이문.

그것들이 햇살에 아직도 반짝거리며 코하네의 가슴을 쿵쾅거리게 만든다.


순간, 혼자임을 빨리 알아차린 탓인지

그게 아니라며 반항이라도 하듯

아무도 없는 곳에서 소리를 길게 질러 본다.


“아아악.”


후미코가 츠키노가 신페이가 후다닥, 달려올 것만 같았다.

그 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코하네의 목구멍 속으로 다시 들어갔다.

역시 반항은 무리, 코하네는 홀로 남았다는 것을 다시 인지했다.


“다시 돌아올 게, 잠시만... 잠시 가 있는 거야.”


코하네는 화단의 거무튀튀한 흙들을 토닥거렸다.


“할머니 말처럼 잘 지키고 있어
난 걱정하지 마, 아키라 할아버지가 있잖아.”


흙을 뒤집어쓰고 무언가가 살려고 아등바등 꿈틀거린다.

너무 많은 양의 물을 부었는지

지렁이가 숨을 쉬기 위해 머리를 빼꼼, 내밀었다.

코하네는 친절함을 베푼다.

빠르게 지렁이를 잡아 쑥 잡아 빼더니, 흙 위로 얹혀 주었다.


“숨 쉬어.”


지렁이가 놀라 얼어붙었는지 꼼짝 하질 않는다.

다시 손을 대려 하자, 아주 빠른 속도로 다시 흙 속으로 몸을 숨겼다.

코하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든든해 너, 이곳을 부탁해.”


기둥에 박혀 있는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을 확인하더니,

깜짝 놀라 걸음이 멈춰 섰다.

코하네는 방금 후미코의 얼굴을 본 것 같았다.


“엄마?”


자신도 모르게 불러 보더니, 헛웃음을 지었다.

이런 일은 홀로 된 후,

하루에도 몇 번 오고 가는 인사치레다.

코하네는 자신 몸보다 큰 여행 가방을

겨우 끌어 뒤돌아보기를 그만 체념하고 문을 나섰다.

커다란 문은 웅장한 소리를 내며 굳게 닫혔다.


“쿠우우 우웅.”


주머니 속, 나오코의 손수건이 아직도 따뜻한 것 같다.


♬ 『Bob Dylan - Girl from the north country』 ♬


하즈키의 귀속이 기타 소리로 호강한다.

눈과 피부 색깔이 다른 그의 기타 소리에 걸음을 맞춰 걸었다.

퉁, 하고 튕기는 소리에 왼발, 팅, 하고 튕기는 소리에 오른발, 지루하지 않다.


하즈키의 귀 바깥쪽 사람들은

하나 같이 모두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고,

걸음걸이는 기타 소리와 반대의 리듬을 튕겨 냈다.

음악이 뭔지 모를 엇박자를 내는 사람들 덕에

완벽함을 잃었다.

하즈키는 중얼거렸다.


“내 얼굴도 그런가...”


음악은 하즈키를 숨 쉬게 만든다.

태풍이 온다는 소리에

귀까지 여밀 수 있는 겉옷을 챙겨 입었지만,

거세진 바람은 촘촘하지 않은 옷의

촘촘하지 않은 박음질 사이로 새어 들어온다.

그가 어깨를 바짝 세우며 두 손을 겉옷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빠른 걸음으로 역 안으로 왔지만

안까지 들어찬 바람은 부러울 정도로 막강한 힘을 자랑했다.

멀리서 하즈키 자신이 사랑한다고 믿고 있는

아니 믿어야 하는 매력적인 그녀가 가 오고 있다.

거센 바람에도 끄덕하지 않을 꿋꿋한 플레어스커트가 둥실거린다.

앙고라 털로 된 두껍고 샛노란 카디건을 걸치고

목에 둘둘 감은 털북숭이의 동물 같은 것이 바람에 휘날렸다.

마나츠의 패션은 늘 난해하기 짝이 없지만

해학적이기도 하다.

오늘 그녀의 입술은 분홍을 말하고 있다.


“하즈키이, 히다 하즈키이이.”


바람에 머리칼이 헝클어져 있는 마나츠를 보고

정말이지 웃지 않을 수가 없다.

그녀는 정말 사랑스러운 여인이다.


“푸드흣.”


“으응?”


홀리는 듯한 마나츠의 눈 흘김은

그야말로 여자가 갖고 있어야 할 최고의 무기가 아닌가 싶다.


“머리카락이 난리야.”


그들이 사랑을 나누는 시점이 아니고 서야,

절대 다정한 손길 한번 하지 않는 하즈키가 마나츠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쓸어 주었다.


“다정한 하즈키.”


조금이나마, 시간이 멈추길 바라는 마나츠가

하즈키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고 놓질 않았다.

여전히 하즈키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속삭였다.


“오래 기다렸어?”


“괜찮아.”


마나츠가 그의 이어폰을 빼앗아 들었다.


“밥이랑 함께라서...?”


마나츠의 분홍 입술에서 하얀 입김이 몽실몽실 피어났다.

마나츠의 차가운 손이

그의 겉옷 주머니 속을 파헤친다.

하즈키는 마나츠의 손을 잡는 행동이 아직도 어색했다.

마나츠는 손가락을 오므렸다가 폈다 가를 반복하며

하즈키의 손을 간질였다. 하즈키의 표정도 싫진 않은 듯하다.


졸업식이 성행하는 즈음의 상점 안은 손님들로 가득 차 있었다.

가득 찬 사람들로 따뜻함이 배가 되었고

유리창은 하얗게 날숨으로 색을 칠했다.

하즈키는 좁고 붐비는 곳이 맘에 들지 않는다.

빠르게 만년필 하나를 골랐다.

색상이 어두워 나오코의 선물로 적당할지, 잠깐의 고민을 했다.


“자기, 이것 가격이 너무 비싼걸?”


하즈키는 나오코에게 이것쯤이야 라고 말하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런 하즈키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런 감정은 그에게 들키면 안 되는 것이었다.

하즈키가 말했다.


“나오코가 좋아할 것 같아.”


마나츠는 손사래를 치며 인상까지 구겨 가며 대답했다.


“흠, 내가 보기엔 예쁘지 않은걸?
막 졸업한 아이는 여성스러운 것만 찾을걸?”


갑자기 하즈키가 웃었다.


“응? 왜?”


“나오코는 더 이상 여성스러워지지 않아도 돼.”


마나츠는 하즈키가 고른 만년필에 시선을 고정한 채
나오코의 지나친 여성스러움을 더듬어 보았다.

나오코의 몸은 모델과도 같이 완벽한 몸매를 갖고 있었고,

살짝 비치는 옆모습은

여자가 보아도 매혹적이어서

눈을 뗄 수가 없는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엄연히 하즈키와 나오코는 남매지만

또한 이성 간이지 않은가,

물론 이런 생각을 음흉하게 머릿속으로 그린다는 것이

불결하다, 고 생각했지만,

자꾸 떠오르는 이 이상한 그림은

자꾸만 마나츠를 치졸한 사람으로 만들고 있었다.


가장 불행한 건, 이것으로 인해

하즈키를 구속하고 집착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즈키에 대한 욕심이 지나칠 정도로 과했지만,

마나츠는 그런 자신의 감정을 들키지 않으려 노력했다.

마나츠에게 보이는 하즈키가 대하는 나오코의 애정은

남다르다는 것을 애초부터 눈치챈 마나츠였다.

마나츠가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앗, 글쎄 말이야.”


“그럼, 당신이 골라 볼래?”


그제야 마나츠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여자 선물은 여자가 고르는 게 좋지?”


마나츠는 가격표를 하나하나 확인을 해가며

신중하게 선물을 골랐다.

하즈키는 그 틈을 타 사람이 많은 비좁은 코너를 나와

입구 앞에서 밖을 바라보았다.


“엇.”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하즈키는

숨이 잠시 막혔다.

또다시 작은 새, 코하네가 눈을 반짝이며 서 있다.

작은 새는 자신보다 큰 여행 가방을 옆에 두고

밖에서 진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상점 안의 하즈키는 마치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아,

눈을 뗄 수가 없다.

조명 때문인지 작은 새에게 하즈키는 보이지 않은 모양이다.

하즈키는 작은 새의 눈을 따라가 보았다.

진열해 놓은 금색 방울을 달고 웃고 있는

마네키 네코 (앞발을 들고 있는 고양이 모양의 인형)가

그녀의 눈을 독차지했다.


하즈키는 심장이 쿵쾅거리며 요동치는 것이 낯설었다.

심장이 고장이라도 난 건지 점점 더 빠르게 쿵쾅거렸다.

작은 새를 처음 봤을 때 보다

더 뛰고 있었다.

마치 세계 기록 보유가 가능한

단거리 달리기 선수가 된 기분이다.


하즈키의 호기심은 평범한 호기심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하기 직전이다.

갑자기 마나츠가 옆구리에 바싹 몸을 붙였다.


“자기, 이것 좀 봐, 어때?”


마나츠는 통통 튕겨 나갈 정도의 가벼운 무게를 갖고 있는

플라스틱으로 된 핑크빛과 금색 장식이 되어 있는

펜을 들어 보였다.

마나츠의 고민 없는 선택은

나오코의 불만을 터트릴 것이 뻔했다.

하즈키의 입은 마나츠를 향해 대답하고 있었지만,

눈은 한 곳에 못 박힌 채 헤어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래 그게 좋겠어.”


밖을 응시하며,

아예 고개까지 돌아가 있는 하즈키가 영 맘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마나츠가 고른 선물을

흔쾌히 받아들인 하즈키가 조금은 고맙다.

마나츠가 그의 옆구리를 간지럼 태우듯 쿡 찔렀다.


“하즈키?”


“으응, 이걸로 하자.”


하즈키는 재빨리 값을 치른 후,

잔돈도 확인하지 않고 대충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마나츠의 손을 먼저 잡아 본 적이 없는 하즈키가

마나츠의 손을 덜컥, 잡아채더니

길이 아닌 작은 새 옆을 돌아 걸었다.

마나츠도 익히 알고 있었던 얼굴이었고

하즈키의 그때와 같은 낯선 행동으로 더욱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낯선 여자를 뚫어 바라봤다면

신경 쓸 일 없을 거라며 속으로 중얼댔다.

같은 여자를 그때 보았던 같은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는 마나츠의 남자가 수상하기 짝이 없다.


작은 새, 코하네는 자기의 옆을 가까이 걷고 있는

하즈키를 느낄 새가 없다.

역시 작은 새 코하네의 세상은

남을 잘 보지 않는,

인식하지 않는 세상에 살고 있었다.

하즈키의 솟아오르던 용기가

코하네의 그런 모습에 바짝 수그러들었다.

나오코의 친구지?라는 말이 목까지 올라왔지만,

세상을 단절한 것처럼 보이는 코하네에게

말을 걸었다가 심장이 쿵쾅, 얼굴은 붉게 물들까,

걱정이 앞선다.


다시 작은 새 코하네의 눈은 마네키 네코에게 머물러 있었다.

그때 검은 코트를 입은 남자의 그림자가 코하네 앞에 섰다.

검은 챙 모자를 뒤집어쓰고 검은 구두를 신고 있는

중년의 남자는 그때 보았던 그 사람이다.

모자를 푹 눌러쓴 중년은

코하네의 몸보다 큰 가방을 대신 끌고,

코하네의 어깨를 끌며 함께 걸어간다.

웬일인지 코하네의 이곳 생활은

이제 끝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작은 새 때문에

하즈키의 심장이 내려앉는다.

하즈키는 알 수 없는 화가 치미는 중이다.


그런 그를 마나츠는 애써 모른 척,

하려 있는 힘껏 감정을 부여잡고 있었다.

하즈키의 손이 마나츠를 놓아 버렸다.


“하즈키 대체, 어디를 가려고?”


“잠깐 기다려.”


하즈키의 단호한 말투에

마나츠는 대답할 겨를 없이 그를 놓쳐 버렸다.

그는 재빨리 상점 안을 다시 들어가더니,

작은 새가 바라보던 인형을 봉지에 담아

달랑거리며 걸어 나왔다.

마나츠는 순간, 돌아 버릴 것 같은 질투가 났지만,

그 모습을 그에게 보인다면 다시는 그를 보지 못할 것 같았다.


몇 번이고 쓰디쓴, 침과 말을 꿀꺽 삼켜 버리고,

질투 섞인 분노 또한 삼키려 노력했다.

진정시킨 마나츠의 눈은 아직도 번뜩거린다.


“뭐, 하는 거야?”


하즈키는 잠깐이나마 머뭇거리는 것처럼 보이긴 했으나,

마나츠의 신경 따위는 역시 신경 쓰지 않았다.


“사려던 거야.”


하즈키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가 하는 말은 예전부터 저 멍청한

작은 새에게 주고 싶었다는 뜻일 것이다.

마나츠는 볼품없고, 비린내가 날 것 같은 멍청한 여자아이를

신경 쓰는 하즈키를 정말 이해할 수가 없다.


“그래? 하긴 나오코 친구니까.”


마나츠가 하즈키에게 한발 다가가면

그는 두발 물러난다.

하즈키는 가까이 갈수록 멀어지는 사람이다.

갖게 될수록 잃고 있는 듯한 느낌은 말할 것도 없다.

하즈키의 손을 잡고 품에 파고들지만,

하즈키는 없다.

마나츠는 그 사실을 마주할 때마다 두려움에 닥친다.

세상에 모든 공포를 자신이 떠안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하즈키는 시선에서 작은 새를 놓치고도,

얼빠진 사람처럼 앞만 보고 걸었다.

그는 마나츠를 잊은 게 분명하다.

\

뒤로 처져 걷던 마나츠가

얼어붙어 아스팔트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마나츠는 속으로 그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돌아봐 돌아봐야 해 꼭, 돌아볼 거야...’


한참이나 앞선 걸음이 하즈키도 이해할 수가 없는 참이다.

멈칫하며 뒤돌아보지만 마나츠는 한참 멀리 떨어져 있었다.

멀뚱히 서있던 마나츠가 허리를 숙이더니,

구두를 매만졌다.

마나츠는 멀쩡히 묶여 있는 구두의 끈을 풀러

다시 묶었다.

풀어낸 구두끈은 그녀의 자존심을 지켜 줄 존재다.

천천히 내쉬길 바라며 숨을 골랐지만 잘되지 않았다.


“후아, 후아아.”


밝아진 마나츠의 얼굴은 웃고 있었고,

이내 하즈키에게 달려와 그의 주머니 속을 파고들었다.

마나츠의 행동은 꽤 자연스러웠고, 현명했다.


“구두끈이 풀렸어, 미안.”


하즈키는 할 말이 없었고,

마나츠에게 미안하단 말을 한다면

그녀의 자존심을 뭉개는 말이 될 것이란 것을 눈치채며

목을 막아 버렸다.

하즈키가 마나츠를 잊어버린 것 같아

잠깐 두렵기는 했지만, 하즈키는 분명 마나츠 곁에 있었고,

마나츠에게 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마나츠 또한 말이 가득한 목을 막았다.


그들은 목적지까지 가는 내내 서로 아무 말이 없다.

서로 같은 길을 걸었고,

잡은 두 손은 한 주머니에 있었지만,

그들은 서로 다른 생각에 사로잡혔다.


잠깐, 잠깐 보이는 하즈키의 얼굴은

꼬리가 긴 작은 새 같은 멍청한 아이가

지나간 길을 훑고 있는 것 같았다.

마나츠는 하즈키를 마네키 네코에게 빼앗겨 버렸다고 확신했다.

작은 새는 예쁘지도 매력적이지도 않았다는 것이

더욱 혼란스럽게 했다.

그럴수록 하즈키의 차가운 품으로 더욱 파고들었다.

걷는 내내 비닐봉지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마나츠의 신경을 자극했다.






마네키 네코는 눈에 띄지 않는 위치에 놓여있지만

나오코의 눈에 확연히 들어왔다.

하즈키의 방 창문은 방의 벽만큼이나 넓었다.

커튼으로 가려 놓은 탓에

마네키 네코마저 커튼에 숨기에 바빴다.


좁은 벽을 타고 다니던 검은 고양이가 창문을 긁어 댔다.

커튼을 정리할 때마다 마주치긴 했지만,

하즈키의 방 창문을 긁어 대며 울어 대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하즈키는 검은 고양이를

나오코가 돌봐 주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고,

흉흉한 소문의 주인공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부쩍 커버린 나오코는

이젠 하즈키 자신 또한 가깝게 지내기가 서먹했고,

솔직히 말하자면 섬뜩한 면도 있었다.

하즈키는 달랑거리는 고양이 방울 소리 때문인가 싶어

창문에 바싹 기대어 있는

마네키 인형을 책상 위로 옮겨왔다.


순간 열어진 틈 사이로 검은 고양이와 눈이 마주친다.

아니, 솔직히 마주친 것이 눈 인지는 알 수가 없다.

너무나 새까만 색은

어디가 눈이지 도통 찾지 못할 미로 같았다.

밀려오는 섬뜩함에 커튼을 재빨리 닫아 버린다.

적막 속에 나오코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검은 고양이의 울음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마치 하즈키의 마음이 겁을 먹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다시 한번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2025년 2월 26일 오후 9시를 지나며

작가의 말


달그림자를 7회를 넘어가며

의심하지 말자, 하던 못난 마음이 또 불쑥 나왔습니다

가독성이 떨어지진 않을까.. 과연 이 글이

내가 그려낸 마음처럼 독자들도 같을까..

의심하지 말고 그저 전진할 것을 잊고

또 그 의심에 잠시 발이 걸려버렸습니다.

그저 그것이 잠시 왔다가는 거라면.. 하고 조금 입을 앙 다물어 봅니다

언제나 발걸음 해주시면서

긴 이야기를 눈 속에 마음속에 넣어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평안한 밤 되시길..



(7화는 제가 참, 많은 시간을 보내며 적어온 걸음이며

참, 아끼는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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