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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지나간 자리

8. 개인의 성인식

by 금봉


달, 그림자

8화 등장인물


1. 나오코- 하즈키의 의붓 여동생

2. 하즈키- 나오코의 의붓 오빠

3. 마나츠- 하즈키의 아내

4. 겐토- 하즈키와 마나츠의 친구

5. 타다요시- 하즈키의 부

6. 미네코- 나오코의 모

7. 이츠키- 마나츠를 짝사랑하는 이츠키의 주인장




개인의 성인식



1970년 4월, 나오코는 지역의 시립대학에 입학했다.

꽤나 공부를 잘했던 터라 타다요시는 하즈키 보다 더

나오코의 미래에 대해 기대했고, 또 지지해 주었다.

나오코는 타다요시라는 완벽한 아버지 밑에서

완벽한 딸로 탄탄하게 자리를 잡아갔다.

간혹 지독하게 신을 믿는 소문이 사실이라는 사실에 놀라기도 했지만,

그걸로 인해 골치 아픈 일을 만들거나,

가족이 피해 보는 일은 더 이상 없었다.

다만 소문 때문에 귀찮은 일이 생기긴 했지만,

그 정도라면 타다요시에게 나오코는 완벽했다.


둘의 부녀 관계는 사랑과 우정이 남달랐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기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그들의 배려심은 완벽했다.

타다요시는 오랜만에 이른 시간에 퇴근을 서둘렀고,

가는 발걸음도 가볍다.

웬일인지 오랫동안 앓아왔던 호흡기 질환 반응도

오늘은 조용함을 유지하는 중이다.


타다요시의 집을 조금 지나면 하얀색의 이층 집이 있다.

그곳에는 나이 많은 노부부가 살고 있었고,

아마도 타다요시가 이곳에 정착하기 전부터 살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마을의 보안관 노릇은 노인이 도맡아서 했고

마을 안에서의 작은 실수도 절대 용납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노인은 타다요시가 군인이었다는 점도 알고 있었으며,

마을에서 유일하게 자신 마음대로 말할 수도 행동을

보일 수도 없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날 노인은 몇 날 며칠을 고민하고,

연습하며 이 시간만을 노렸다.

몸집이 작은 노인은 타다요시의 앞에 서지 않고

멀찍이 서서 그에게 나지막이 불러 세웠다.


“저기, 이보게.”


타다요시는 무슨 일인가, 싶어 큰 키로 노인을 내려 보았다.


“네, 어르신 부르셨습니까?”


노인의 평판은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대답은 위풍당당했고,

그런 대답에 노인은 약간 마음이 상했는지,

더 핏대를 세우며 말하기 시작했다.


“에헴 자네 딸 말 일세 내가 웬만하면 말이야,

이런 말을 하지 않을 텐데...”


노인에 입에서 나오코의 이름을 듣자,

그는 눈을 번뜩거렸다.

노인은 그의 눈이 아닌 수염을 보며

연습한 대로 끝까지 말했다.



“그게 말이야, 웬만해야 말이지
그 아이가 동네 고양이한테 검은 칠을 해대니,

온 동네의 벽이 온통 검은 물이 들었어
모두 그 일로 불편하다는 말이 많다네...

이 일은 부모가 해결 봐야 하지 않겠나.”


고양이 사건은 나오코가 백 번이고 잘못한 일이기에

타다요시는 반박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번뜩이던 눈을 내리깔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노인은 그의 한숨 소리를 듣더니,

이때다 싶어 숨이 모자랄 법도 했지만 쉼 없이 을 하기 시작했다.


“이거야 원 마을 모임에서 말이 나왔을 때

그 아이에게 주의를 주지 않았다는 건가?
아니면 그때 자네는 모르고 있었나?

물론 자식이 어디 부모 마음대로 되나...
하지만 이건 아주 잘못된 일 일세,

마을이 온통 시커먼 자국으로 얼룩덜룩해
자 한 번 보게 나, 다들 쉬쉬하지만,

나까지 조용할 순 없잖나?
게다가 비가 한 번 오기라도 하면, 이거야 원, 이이... 쯧
아니, 아이가 어린아이도 아니고,

대체 무슨 화가 많아서 그러는 것인지
부모가 막아야 하지 않겠나? 안 그런가?”



타다요시는 머리칼이 설 정도로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만,

나오코가 그런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막지 못한 건 자기 잘못이란 건 노인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타다요시는 허리를 굽혀 정중히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주의를 주겠습니다.”


노인은 더욱 기세가 당당해졌고,

어느새 그의 앞에 고개를 들고 그를 올려 보고 있었다.


“오늘은 정말인가? 아이 엄마에게도 당부했지만,

쯧쯧쯧 진작에 자네가 나섰어야 해.”


“죄송합니다.”


노인의 입술이 성취감에 약간 실룩거렸다.

노인은 내친김에 타다요시의 팔을 툭, 치며 다시 말을 건넸다.


“음 그렇게 하세, 믿고 있겠네... 어서 가던 길 가게나.”


타다요시는 다시 한번 허리를 숙였다.

그의 발걸음은 철 덩어리를 질질 끌고 다니는 것처럼

무거워 보였고, 잔잔했던 입속의 간지러움이 다시 돋아나고 있었다.


“쿨룩 쿨룩.”


그는 집 앞에 서서 고개를 들어 동네를 훑어보았다.

노인의 말이 맞았다.

그는 왜 단 한 번도 눈치채지 못했는지,

아니 내심 모른 척하고 싶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온 동네가 거의 죽은 동네처럼 검은색으로 얼룩덜룩했다.

약간의 과장도 있었지만 정말 그렇게 보였다.

타다요시는 심한 자책감을 느꼈다.

성인이 된 나오코를 호되게 혼낼 수나 있을지,

어떤 방법을 써야 할지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예전처럼 나무를 심어 놓고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미네코는 저녁 식사 준비를 마치고, 대문을 서성였다.

미네코는 하늘 같은 타다요시를 맞이하며 말했다.


“당신, 왔어요?”


전화로 들리던 그의 밝은 목소리는 온데간데없이

원망 섞인 눈으로 미네코를 바라보며 휑, 하니 지나갔다.


“여보, 무슨 일, 있었어요?”


“나오코는?”


“아직.”


그는 계단을 한달음에 올라가더니,

나오코의 방문을 챙, 하는 소리가 나도록 열었다.

나오코의 방은 하즈키의 방과 같이 낯설다.

단 한 번은 와 봤던가,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방문이 열리자마자 매캐한 냄새가 가득했다.

연기는 없지만 섬뜩할 정도의 향 내가 풍겨왔다.

높은 곳에 올려놓은 향꽂이와 여러 가지 희귀한 그림,

그리고 물감, 재단 위에 올려놓은 물건은

일반 가정집에 있을 법한 것이 아니다.

희귀한 그림 속 정체는 살아 있는 생명체 같은 느낌을 주었다.

양쪽 벽에 붙어 있는 그림도 나오코가 직접 그린 그림일 것이다.

상당히 실력이 있어 보이는 그림이었고

함부로 대했다가 정말이지 나쁜 일이 닥칠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그는 애써 침착함을 갖추려 잠시 행동을 멈추고 바라보았다.


창밖에는 얼굴인지 몸통인지 알아볼 수 없는

검은 고양이 몇 마리가 벽을 타고 있었다.

따라 들어온 미네코는 들키고 말았다는 듯,

허탈한 표정을 짓고 그의 팔을 잡았다.


“여보.”


“미네코 당신, 알고 있었어?”


타다요시를 바라보는 미네코의 눈은 당신도 알고 있었잖아?

라고 되묻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할 말을 잃었다.


“후… 이건 미친 짓이야, 이 정도 일 줄은.”


"여보, 나오코는 피부병이 심한 고양이를 위해...


타다요시가 말을 잘랐다.


"그만하오."


타다요시는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던 위압감에

재단을 피해 창문으로 향했다.

창문을 거칠게 열었지만,

눈 없는 검은 고양이는 그를 피하지 않았다.

타다요시는 눈을 번뜩이며 고양이의 목덜미를 덥석, 잡았다.

녀석을 잡아 더 이상 밖을 돌아다니지 못하도록 집 안으로 옮길 생각이었다.


그 순간 겁을 먹은 고양이는 몸부림쳤고

손에서 벗어났다.

아주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고,

손에서 벗어난 고양이가 떨어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실수라는 명목하에 자신이 지금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무지막지한 덫에 걸린 기분이 들었다.

전쟁에서 숱한 목숨을 앗아갔던

그의 총구멍은 그렇게도 약한 것이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손을 떨구고 미처 밑을 내려 보지 못한 채

손을 덜덜 떨고 있었다.

미네코의 비명은 짧고 얕다.


“아앗.”


뒤늦게 퍽, 하는 둔탁한 소리는

날카롭게 튀어나온 나무 벽을 한 번,

시멘트 바닥을 한번,

단번에 미동도 없이 고요한 자태로 남았다.

타다요시의 후회 섞인 탄식이 뿜어져 나왔다.


“이게 아닌데 이런 맙소사...”


그의 감정은 혼란스러웠다.

수습할 방법은 아무것도 없다.

나오코가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아주 큰 상처를 받을 것이다.

지금까지 쌓아온 것들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게 눈에 선했다.

갑자기 주변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 같아 방 안을 둘러보았다.

그제야 눈에 보이는 건 검게 칠해 놓은

검은 벽과 온통 검은 물감이 드러나 있는 그림들뿐이다.


순간 목이 조여 오는 느낌이 들었다.

숨을 쉬기가 버거웠다.

다시 찾아온 약한 기관지는

알 수 없는 염증을 일으키며

온몸에 퍼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타다요시는 검은 연기를 들이마신 것처럼

토할 듯한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미네코는 재빨리 마당으로 뛰어갔다.

죽지 않았을 거란 생각은 쓸데없는 여유에 불과했다.

이미 고양이는 나오코를 보는 방향으로 누워 꼼짝하지 않았다.

때마침 집에 온 나오코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고

눈은 붉은 지옥을 말하고 있었다.

미네코는 딸이 죽은 아빠를 무조건 적으로 사랑했던 것처럼

검은 고양이도 그러하리라, 짐작하고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 부분만은 덮어줘야지,

모른 척 하자,라고 마음먹고 있었던 그녀였다.

결국 모른 척, 이란 것이 불행을 몰고 온 것이다.


호들갑인 미네코의 심장에 비해

나오코는 무서울 정도로 태연했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더니, 신문을 가져와 고양이를 감쌌다.

고양이의 다리와 목이 축 늘어져 있었고,

바닥에는 검붉은 피가 가득 고여 있었다.

지켜보던 미네코는 손으로 입을 막으며

튀어나오는 외마디 비명을 틀어막았다.


“업, 맙소사 나오코, 이건 실수야..."


고양이.jpeg



미네코는 단 한마디도 나오코에게 건넬 수 없었고, 지켜볼 뿐이다.

신문으로 포갠 고양이를 품에 안고 돌아서는 뒷모습은 멀어져 갔다.


잠시 후, 고양이가 말을 천천히 읊듯, 울음을 토해 냈다.

미네코는 그 소리에 작은 희망이라도 잡고 싶었던 모양이다.

검은 고양이는 아직, 죽지 않은 것이다.

미네코는 가슴을 쓸어내렸고,

나오코의 검은 눈빛을 생각하며

자신이 배 아파 낳은 기억이 있었나,라고 두려움에 떨었다.


재빨리 양동이에 물을 담아 걸레로 시멘트 바닥을 닦기 시작했다.

몇 번의 걸레질에도 검은 핏빛은 지워지지 않았다.

파란색 양동이는 어느새 보라색으로 변해 있었고,

미네코의 손바닥은 검은빛이 돌고 있었다.


미네코는 누구에게 쫓기는 사람처럼 뛰어가더니,

윗옷을 들어 올려 흙을 잔뜩 담아 바닥에 뿌린 후,

검은 흔적을 정신없이 밟고 비비고 또 비볐다.

미네코는 퍼렇게 질린 얼굴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옷은 젖은 흙으로 엉망이 되어 있었고,

보라색 양동이가 석양에 비추어 잔인하도록 아름답게 반짝거렸다.


미네코는 수만 가지 생각에 휩싸였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남편을 설득하거나, 진정시키는 것이다.

아직 숨이 남은 고양이와 나오코는 그녀의 머릿속에서 빠르게 사라졌다.


집 안으로 들어서자, 저녁으로 준비해 놓은 카레 냄새가 가득했다.

남편은 예상했던 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블랙 니카를 벌써 꿀떡거리고 있었다.

미네코는 조심스럽게 그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어 보이며 말을 건넸다.

흙과 물이 닿은 손이 얼었는지 잘 움직이지 않았다.


“여보, 나오코는...”


미네코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다.


“당신, 알고 있었다고 하지 않았소?”


미네코의 눈동자와 머리가 빠르게 굴러갔다.


“나오코는 아빠를 잃은 아이예요, 의지할 곳이 필요했던 아이라...”


“알고 있었던 당신은 뭘 했소?”


“저건, 재단은 어느 집이나 있는 거고, 아픈 고양이를
나오코는 도와줄...”


“이런 이런 이런, 그걸 말하는 게 아니잖소?”


끝나지도 않은 말에 호통을 치는 듯이 헛웃음으로 대신 소리친다.


“상담이라도 한 번 받아 볼게요.”


이제 와서 무언가를 해본다는 말에

타다요시는 그렇게밖에 생각하지 못한 그녀가

한심하기도 약간의 측은함도 생겼다.

미네코는 큰 충격을 받았을, 나오코를 잊기라도 한 것처럼

딸 걱정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가 없다.

그저 남편의 눈치를 보며 그의 눈빛이 따뜻해지기만 바랄 뿐이다.






나오코는 하즈키의 눈을, 말을, 행동을 따라가기가 바빴고,

여우라 생각하는 여자 마나츠에게 빠진

하즈키와 신뢰는 사라진 지 오래됐다고 생각했다.

그보다 더 신뢰하고 사랑했던 건 새아버지 타다요시였다.

친아빠가 죽었을 때,

나오코는 하루하루를 죽음을 예감하고 감내하며 지내왔다.

어떤 놀람과 슬픔도 예감했던 감정이기에 견딜 수 있었다.

나오코는 혼란스러웠다.

진짜 아빠보다 더 사랑하는 아빠가,

자신이 아끼는 동물을 창밖으로 내던졌고,

실수라 해도, 용납은 없었다.


만약, 나오코가 뒤뜰에 쥐를 잡아 묻어 두는 것을 막기 위해

타다요시가 키 큰 나무를 심었을 때처럼

충고를 미리 던져 주었다면 나오코는 수긍했을 것이다.

나오코는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분노가 아닌,

추위에 떠는 것이었으면 하고 생각을 고쳐 잡는 중이다.


나이 많은 나무가 바람을 막아 주고 있었지만,

흩날리는 모든 것들이 나오코의 슬픔과 절망이

바람이 되어 떠도는 것 같아 괴로웠다.

따뜻한 액체가 끈적하게 변해버렸고

나오코의 고양이 카미는 빠르게 식어갔다.

고통으로 조용히 울던 소리까지

이젠 영영 안녕이 되어버렸다.

얼어붙은 손에 혹시라도 카미가 놀랄까,

천천히 심장에 손을 갖다 댔다.

빠르게 요동치던 심장이 더 이상 요동치지도 따뜻하지도 않았다.

하늘이 나오코의 심장을 둔탁한 무엇으로 내리친 게 분명했다.

나오코의 숨조차 멎어버린 것처럼 아프고 아프다.

얕게 뱉은 신음은 고통을 약간 줄어들게 해 주었다.


“카미, 미안.”


차가운 손으로 고양이의 눈을 감기려 했지만 마음대로 되질 않았다.

마치 자신을 바라보고 무언가 말하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카미의 심장은 더 이상 말 하지 않았다.

이럴 때, 치호가 곁에 있었다면

나오코의 고통이 덜했을까,

나오코는 내내 치호의 얼굴을 떠올렸다.

대학을 들어갔지만, 가식의 굴레에서

친구들과 지내기가 신물이 날 정도로 버거웠다.

솔직히 늘, 치호가 그리웠다.


보기 싫었던 창피했던 그 몹쓸 굽은 등이 그리웠다.

나오코의 눈에서 눈물이 마구 쏟아져 내린다.

그녀는 악 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훌쩍거림도 없이 가방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노란 손수건을 꺼내 카미의 눈을 가리고

리본으로 매듭지으며 다시 한번 카미의 심장에 손을 갖다 대며 말했다.


“술래잡기 알지? 잠깐이면 돼.”


추위를 싫어한 카미를 위해

가방 안의 책을 모조리 빼내어 바닥으로 팽개치더니

굳어가는 카미를 그 속으로 집어넣었다.

아마도 카미는 성장기에 늘 굶고 다녔을 것이다.

나이는 확실히 알 수 없었지만,

다 성장한 몸은 3킬로도 채 나가지 않은 것 같았다.


가방을 둘러메고 종이짝 같은 무게에

한 번 더 가슴을 세차게 뚜드려 맞는다.

차가운 공기에 딱딱하게 굳은 핏기가

손가락에 굳게 붙어 딱지가 부서지듯 조금씩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타다요시는 분명 술을 찾아 떠났을 것이고,

미네코는 얼이 빠진 채 진한 화장을 하고

그를 기다리며 변명할 말들을 머릿속에서 굴리고 있을 것이다.

하즈키는, 더러운 마나츠와 어딘가에서 뒹굴고 있을 것이고,

은밀한 무언가를 하기에 적당한 시간이 찾아온 것이다.


타다요시가 심은 나무는 절대 뽑아낼 수 있는 크기가 아니다.

납작하고 날카로운 삽을 들고

나무뿌리 쪽의 흙을 비스듬히 파내기 시작했다.

다행히 얼어붙었던 땅은 녹아 있는 상태였고,

시간은 걸리고 힘들었지만,

땅을 파고 깊이를 가늠하자 알 수 없는 쾌감이 밀려왔다.

계획한 생각은 아니었다.

마치 누군가 의해 끌려온 것처럼

정신을 차리고 보니 땅이 부쩍 파여 있음을 보았다.

자신이 한 것임에도 놀라 입이 쩍 벌어질 정도였다.


키 큰 나무는 파인 땅에도 꿈적하지 않고

튼튼히 서서 나오코를 내려 보고 있었다.

그제야 가방 안의 카미를 꺼내어

겉옷으로 보이지 않게 둘둘 감아 감쌌다.


“춥지 않을 거야, 그리고 숨는 거야, 카미.”


나오코는 가방 속에 지니고 다니던 간식거리를

모조리 땅속으로 쏟아부었다.

꽤 오랫동안 돌돌 말려있는 카미를 꼭 끌어안았다.

그리곤 재빠르게 깊게 파인 구덩이에 카미를 집어넣고

파 놓은 흙을 다시 덮기 시작했다.

그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게,

그 누구도 파내지 못하게,

수십 번 아니, 수만 번의 비가 와도

젖지 않게 흙을 덮고 비닐을 깔고

다시 흙을 덮고 다시 비닐을 덮기를 반복했다.

나오코는 흙을 단단히 두드리고, 또 두드렸다.

아무도 나무의 뿌리 옆에 고양이가 묻혀 있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


나오코는 나무의 뿌리가 더 단단하고 커질 수 있도록 돌볼 작정이다.

커다란 나무가 카미를 단단히 묶어 두길 바랐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감쪽같았다.

주변의 돌을 주워 나무 주변을 둘러 나란히 줄을 맞춰 놓았다.


“술래잡기가 끝이 날 땐 내가 너와 함께 있을 거야.”


나오코의 코가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녀는 타다요시를 원망했지만

커다랗게 자란 나무를 뽑아 버릴 수도

베어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니, 해야 할 시기를 놓쳤다는 것이, 맞는 말이다.


그날 밤, 타다요시는 온 동네를 들쑤시고 다니며

문을 두드리고 연신 허리를 굽혀가며

죄송합니다, 는 말을 몇 번이고 하고 또 했다.

수십 년 동안 이곳에 살면서 처음 보는 이웃의 얼굴이

더 많다는 사실까지 깨닫는 중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괜찮다며

오히려 그의 등을 두드려 주었지만,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들 대부분은

용서를 구할 틈도 없이 고집스러운 턱을 하곤,

그를 쫓아내듯 손사래 쳤다.


함께 가겠다고 고집을 피우던 미네코를

데리고 나오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다.

미네코를 보호하기 위함도 있었지만,

어두운 밤 진한 화장을 한 미네코를 봤다면

더한 말을 들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타다요시가 정말 나오코를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면

허리를 굽실거리는 일은 상상할 수가 없는 일이다.


그날 이후 기대하지 않았던 일들이 생겨났다.

미네코의 단 한 번의 설득에 나오코는 흔쾌히 상담받았고,

이후의 상담 날짜까지 스스로 잡아가며 다니게 되었다.

미네코는 순수하게 딸의 행동을 받아들이기보다,

어떤 꿍꿍이가 숨어 있을지 겁이 났다.

오히려 눈치를 보고 행동한 건 미네코였고 나오코는 더욱 당당해졌다.


나오코가 상담을 받던 중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갈 무렵,

상담 센터에서 연락이 왔다.

미네코는 한달음에 달려가 확인했고,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나오코는 내내 상담을 하면서

자신의 고민을 서슴없이 털어 냈고,

병원을 가겠다, 고 결심한 이유는

카미도 쥐꼬리도 아니 다른 것이었다.


나오코가 해야만 하는 일들에 있어서

방해가 될 만한 일들을 없애 버리는 게 이유였다.

오히려 나오코는 상담사를 이용하며

자신의 대화로 빠져들게 만들어 버렸다.

그로 인해 나오코가 상담사를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상담사가 나오코를 굉장히 신뢰하고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상담사가 미네코에게 물었다.

상담사의 목소리는 날카로웠고,

나오코를 대변하듯 굴었다.

미네코는 상담사 앞에서 다시 또 살인자가 된 기분이 들었다.


“혹시, 실례지만 나오코의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

어머님은 그 자리에 있었나요?

나오코 말로는 곁에 있던 사람은 엄마뿐, 이라고 했어요
그때 나오코의 충격이 컸을 거라 짐작이 됩니다
그 부분에 있어서 아이와 솔직한 대화가 필요했을 텐데요...”


나오코가 하는 행동의 문제점을 고치기 위해

보낸 상담은 오히려 미네코가 원인이라는 점을

더 부각한 꼴이 되었다.

상담사의 표정은 마치 나오코의 엄마라도 되는 양, 굴었다.


“나오코는 착한 아이예요,

모든 것이 어머니를 위해서 한 기도였는데, 모르셨나요?”


세상에 엄마 중, 자기의 아이를 남에게 욕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그런가요? 핫, 그럼 당신이 키우지 그래요?”


미네코는 어떤 변명도 어떤 설명도

더 이상 필요가 없게 되었음을 알았다.

비전문가 적인 상담사는 미네코가 나오코의 이야기만 듣고

남편의 죽음을 도왔을 것이다?라고

결론을 내린 후, 줄곧 그렇게 미네코를 대했다.


상담.jpeg



미네코의 머릿속은 나오코의 비죽거리는 웃음만 떠오를 뿐이다.

그 이후, 상담 센터에서는 나오코가 아닌

미네코의 지속적인 상담을 권장했고,

매번 한 가정의 안위를 확인차, 방문하곤 했다.


타다요시는 그런 모습의 겉만 보며

미네코의 책임 있는 행동과 엄마다움을 칭찬했고,

따뜻하게 안아 주기도 했다.

하지만, 미네코는 점점 더 늙어 갔고,

예민함에 자기 발소리와 움직이는 머리칼을 보면서도

놀라기 일쑤였다.


또한 취침에 들기 시작하면

아침이 올 때까지 수도 없이 깨어나

다다미 위를 서성이며 다닥거리는 소리와

저벅거리는 소리를 내곤 했다.

그럴 때마다 타다요시는 어떤 말도 없이

따뜻한 우유를 미네코에게 전하며

조용히 다시 잠이 들었다.

그의 친절한 모습에 안심하다가

다시 불안에 떨며 몸을 웅크리고 잠이 들곤 했다.


사실, 검은 고양이는 타다요시의 의해 놓쳤지만,

마치 미네코가 저지른 행동처럼 느꼈다.

더 솔직한 두려움에 대해서 말하자면

언젠가는 나오코가 자신을 죽일 것만 같다는 공포였다.

오늘도 여전히 귀속에서 검은 고양이의

마지막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시간이 갈수록 안 그래도 좋지 않던 그들 사이는

점점 더 멀어져 갔고 남편과 딸의 사이는 더욱 가까워졌다.

나오코는 모든 것이 미네코가 원인이라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타다요시가 놓친 고양이도,

여우 같은 여자를 만난 하즈키도,

나오코가 생각하는 자신의 모든 불행은

모두 미네코가 원인이라 고개를 끄덕였다.


미네코는 원망이 가득한 눈빛의 나오코를 마주할 때마다

열 달 동안 배 안에 품었던 시절을 떠올리며

잃어버린 모성애를 찾기 위해 애쓰지만,

그 단단했던 모성애의 기억은

다시 찾아올 생각이 없는 듯하다.

다시 찾아오지 않을 아름답던 자신의 젊음처럼.






그 해, 찜통 같은 7월,

한 집 안의 가장이 보기에 위기를 잘 극복해 낸

타다요시의 가정은 점점 더 완벽해지고 있음을 느꼈다.

물론 점점 야위어가는 아내 미네코의 모습은

보기가 견디기 힘든 부분이었다.

미네코는 자기 입으로 여자의 갱년기를 운운하며

자신을 더 봐주길 매일매일 바랐다.

타다요시는 그 말에 늘 반응하진 않았지만,

남몰래 그녀를 걱정하는 마음은 누구보다 더 컸다.

그 시기가 지나면 미네코는 다시 처음과 같아질 거라

굳게 믿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 해, 타다요시는 코바야시 마나츠라는 며느리를 얻게 되었다.

마나츠와 하즈키의 결혼은

빛의 속도와 같이 빠르게 진행되었고 그런 이유에서 일까,

마나츠는 늘 곁에 있는 하즈키를 믿지 못했다.

그렇다고 그가 한눈을 팔거나 다른 여자와 로맨스가 있거나,

라면 이해될 법 하지만, 그 어떤 이유 없이 늘 두려워했다.


곁에 있어도 없는 것 같아, 라며

씁쓸한 미소를 하즈키에게 퍼부었다.

물론, 하즈키를 닦달하며 묶어 두려 한다면

하즈키는 이미 마나츠 곁에서 도망갔을 것이다.


마나츠는 특단의 조치로 시아버지 타다요시의 눈에 들기로 마음먹었다.

마나츠는 시아버지에게 완벽한 며느리이었고,

타다요시는 오히려 하즈키의 부족함에 며느리에게 미안하기까지 했다.

마나츠의 바람은 단시간에 완벽하게 이루어졌고,

그에 따른 책임을 하즈키는 성실히 이행하는 중이다.

어느 때보다 더 좋은 날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했던 타다요시는 더 바랄 것이 없었다.


하즈키의 성실한 회사 생활은 여러 개의 감사패와

또한 보너스는 이루 말할 것도 없었다.

마나츠는 앞치마를 늘 메고 생활했으며

시아버지와 시어머니 앞에서의

무릎 꿇음은 일상이 된 지 오래되었다.

최대한 욕심을 들키려 하지 않았던 마나츠는

하즈키의 방에 신혼살림을 차렸고,

그것에 대한 고마움은 타다요시가 제일 컸다.


마나츠의 속내는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제일 중요했던 점은 나오코 곁에서 보란 듯이

정신을 차리게 해 주고 싶었던 점이다.

물론, 시누이로서 정말 잘 지내기 위해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른 한 가지 이유는 하즈키를 가족의 힘으로

꽁꽁 묶어 도망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물론 그는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지만

그것으로 가족이 완성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마나츠는 그들의 힘으로 부부 사이를 단단하게 만들고 싶었다,

또한 타다요시가 신혼을 위해

따로 나가서 살아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고 말했을 때

말과 달리 타다요시의 눈은 그들을 붙잡고 있었다.


나오코 또한 타다요시와 같이 그들을, 아니 하즈키를

그렇게라도 가까이서 지켜보려 했을 것이다.

피가 섞인 부녀는 아니지만

하즈키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집착은

도를 지나친 점이 매우 같았다.


그들은 결혼 후, 마나츠의 제안으로

매달 생활비를 미네코에게 꼬박꼬박 챙겨 주었다.

마나츠는 가족을 위해 요리한 음식을

식탁 위에 올려야 하는 자격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미네코에게 생활비를 줄 생각은 없었다.
어쩌면 시간이 흐른 후,

미네코에게 오히려 생활비를 받아야 할 때가

올 수도 있겠다, 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마나츠의 착각이었다.

마나츠의 기혼 친구들의 충고와 경험담을 늘 듣곤 했지만,

이런 경우는 참, 드물다.

마나츠의 이야기를 들은 친구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잘된 일이라고 했지만,

여전히 마나츠는 가족의 일원 같지 않았고

겉으로만 뱅뱅 도는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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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방은 아마도 미네코가 죽지 않은 이상

영원히 그녀의 것이었고,

모든 집안일은 미네코에 따라 움직이게 된다.

밥상에 올라가는 쌀부터 반찬의 재료까지,

마나츠가 끼어들 곳은 어떤 것에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 집은 그야말로 시어머니의 완벽한 영역이었다.

어쩌다가 하즈키가 좋아하는 달걀말이라도 하려 치면,

미네코의 간섭은 끝이 없었다.

그날의 달걀말이는 마나츠가 만들었지만,

그 또한 미네코가 만든 달걀말이가 되는 것이다.


시어머니의 영역에 대해서 하즈키에게 말을 건넸지만,

얘기를 꺼내는 순간부터 마지막까지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결국, 고안해 낸 생각이 생활비를 주자라는 의견이었고,

또 다른 갈등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마나츠는 음식을 절대 과식하는 사람이 아니다.

육식도 좋아하지 않았다.

시어머니의 본색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물론 마나츠라는 며느리의 관점에서의 생각일 뿐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미네코 특유의 가느다란

콧소리 칭찬의 말투가 줄어들었고,

불만을 터트리는 날들이 많아졌다.

그래 봐야 한 명의 식구가 늘었을 뿐이고,

그 살림에 식비가 항상 모자란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투덜거림과 빈정거림이었다.

물론, 모든 재산을 비밀에 부친

시아버지의 탓도 있었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마나츠는 미네코와의 타협이 필요했다.


마나츠가 작정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


“끝도 없는 집안일에 지치지 않으세요?”


미네코의 양 입꼬리가 턱 밑으로 쭈욱, 내려갔다.


“글쎄.”


미네코가 차를 마시고 내려놓은 찻잔에 립스틱 자국이 선명하다.


“제가 아침 담당을 하면 어떨까요?”


미네코는 이번엔 마나츠를 보지도 않는다.

미네코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라는 뜻이다.


“하즈키 월급은 몇 년 동안은 같을 텐데...
솔직히 지금은 어머니께 생활비를 더 드릴 수는 없어요.”


“마나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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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부릅뜬 미네코의 눈살에 주름이 팽팽해졌다.


“그러니까, 어머니,

제게 조금이나마 알아서 할 수 있는 건 맡도록 해 주세요
그렇게 한다면 생활비가 모자라지 않게 할 수 있어요.”


“아니 마나츠?

그럼, 지금 내가 살림을 잘못하는 부분이 있다는 거니?”


“아니, 아니요 어머니...
제가 할 수 있는 부분은 제가 알아서 충분히 한다는 뜻이에요
그 부분을 좋은 쪽으로 고쳐 나가겠다는 뜻이죠.”


미네코의 얼굴이 갑자기 일그러지며

노동이라도 한 사람처럼 피곤해 보였다.


“생각 좀 해보자꾸나.”


“그래도 힘드시다면,

제가 어머니 대신 아버님께 생활비 부분을 말씀드릴게요”


미네코는 마나츠의 협박과 같은 그 말에

자신이 이 집 안에서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음을 알고 오기가 생겼다.

그렇게 마나츠는 똑똑한 머리와 빠른 눈치로

이 구성원 안에서 조금씩 자연스럽게 스며들고 있었다.


처음으로 그날 마나츠는 하즈키에게 주고 싶었던

요리를 마음껏 해 보였고,

그에 따른 대가는 요란한 밤을 보내며 사랑을 속삭이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다행히 여전히 그들 가족의 일요일 아침은

모두 둘러앉아 있었고 완벽한 가족을 연상케 한다.

마나츠까지 더해져서 집 안은 더 훈훈해진 느낌이 들었다.

마나츠는 일요일 아침 어느 때보다 더 신경 썼다.

미네코의 잔소리 덕일 것이다.


마나츠는 눈치를 요리조리 살피더니

하즈키의 흰쌀밥 위에 오이 절임을 얹어 놓았다.

계속 되풀이되는 행동에 나오코는 밥 맛이 떨어졌다는 표정을 하곤

가지절임을 억척스럽게 씹어 삼켰다.


“촵촵."


마나츠는 절대 아랑곳하지 않았고,

눈을 치켜뜨며 나오코를 보고 잔잔하게 웃는다.

나오코가 말했다.


“근데, 마나츠 그거 알아요?”


“응?”


나오코의 입에서 어떤 엉뚱한 말이 나올지

마나츠 보다 더 미네코가 긴장한 듯해 보인다.


“하즈키는 오이를 좋아하지 않아요, 특히 절인 건 더욱."


나오코는 가지를 가리키며 입으로만 키득거렸다.

마나츠가 부드럽게 대꾸한다.


“이제 몸에 좋은 것을 챙겨야지?

내가 있으니까 안 그래 하즈키?”


치밀어 오르는 화가 보이지 않게 부들부들 하지만

얼굴과 목소리는 미동도 없는 마나츠다.

마나츠는 시아버지의 밥 위에도

오이절임을 올려놓는다.

갑자기 나오코가 절인 채소가 담긴

나무 그릇을 뺏더니 허겁지겁 먹어 치우며

마나츠를 향해 혀를 내밀어 보였다.

타다요시의 헛기침도 소용이 없었다.


“여보, 난 방으로 차 좀 갖다 줘요.”


넋을 빼고 나오코를 흘겨보고 있던 미네코는

언제 그랬냐는 듯, 로봇처럼 빠르게 행동했다.

미네코의 얼굴은 갑자기 화색이 돌았고 콧소리로 답했다.


“네, 여보.”


타다요시와 부부가 된 이후로 쭉,

그들만의 신호라고도 할 수 있다.

무관심한 것 같은 타다요시는 꾸준히 미네코를 아껴 주었다.

물론 그녀 성에 차진 않았지만 말이다.

타다요시가 따로 차를 마시겠다는 것은

그의 독특한 감정 표현은 나는 당신과 차를 마시고 싶다, 는 뜻이다.

마나츠는 눈치가 아주 빠른 며느리다.


“미네코, 제가 치울게요, 차 갖고 들어 가세요.”


“응, 그래 고마워.”


미네코가 챙긴 찻잔은 도드라지게 움푹 파였고,

커다란 절구 같은 잔이었다.

마나츠는 웃음이 튀어나올 것 같았지만,

애써 물을 마시며 모른 척한다.


나오코가 벌떡 일어나 하즈키의 옆자리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빈 그릇을 치우며 곁눈질로 나오코를 보았지만

나오코는 눈치 한 번 보지 않았다.

그런 나오코의 행동은 마나츠에게 늘 눈엣가시였다.

물론 나오코에게 마나츠도 눈엣가시다.

나오코가 말했다.


“하즈키.”


얼굴에 너무 가까이 대고 말하는 나오코 때문에

하즈키의 어깨가 한 뼘 정도 저절로 물러났다.


“으응.”


마나츠가 빈 그릇을 달그락, 거리는 소리는 점점 신경질적으로 바뀌었다.


“펜, 말이야. 심이 필요해.”


“벌써?”


하즈키의 서운한 답에 나오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즈키가 산 건데 몰라?

금방 닳았어, 뜯어보니 아주 작은 심이었다고.”


마나츠가 대답할 말을 찾느라

표정부터 버벅거리는 하즈키의 행동을 붙잡으려 말했다.


“그것, 내가 골라 준 거야

그건 따로 심을 넣을 수가 없을 거야.”


마나츠는 자신이 골랐다는 단어와 없다,는

단어를 더욱 세게 표현했다.


“알았어.”


의외로 나오코의 대답은 간단했다.

마나츠는 펜을 선물로 받았을 때부터

눈치 빠른 나오코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심을 넣을 수도 없는 형편없는 장난감에

불과한 펜이란 것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나오코의 맹랑한 목소리가 다시 지지 않고 말했다.


“하즈키, 다시 새것으로 사줘 기억해

이번엔 만년필이야 이런 장난감 같은 것 말고.”


나오코가 등을 돌리고 있는 마나츠의 등을 쏘아보며 말하는 것 같았다.

마나츠의 등이 따끔거린다.

재빨리 돌아보며 하즈키에게 눈치를 주려 했지만

이미 늦어 버렸다.

어쩔 수 없지,라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하즈키의 입술이 나긋나긋하게 움직이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 그럴 게 이번엔 만년필.”


마치 잘못된 선물을 한 마나츠 탓이니까,

내가 보상할 게,라는 말처럼 들렸고,

나오코 앞에서 제대로 무시당하는 기분에 빈 그릇을 놓칠뻔한다.


“고마워, 하즈키.”


나오코는 말 안 되는 행동을 했다.

하즈키의 어깨를 두 팔로 뒤에서 감싸 안으며 갸르륵,

웃어 댔다. 마나츠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나오코의 계단 오르는 발소리가 쿵쾅거렸다.


“나오코, 그렇게 있지만 말고, 그릇 좀 치워 줄...”


빠르게 하즈키가 말했다.


“내가 도울게.”


마나츠는 맘에 들지 않은 하즈키의 말투를

하나하나 꼬집어 잘못되었음을 알려 주고 싶었다.

또한, 비싼 만년필은 어린애가 필요한 물건이 아니라는 둥,

마치 미네코가 자신에게 하는 잔소리처럼 똑같이 말해 주고 싶었다.

품 안에 머물러도 공허함이 생기는 이 남자에겐,

마나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결국 마나츠는 하즈키에게 고개를 도리질하며 웃을 뿐이다.

그 순간 하즈키는 다시 한번 마나츠가 완벽한 여자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미네코가 저벅거리며 자신의 찻잔만 담아 내오고 있다.

당연히 얼굴에는 벌써 검은 그림자가 수두룩했다.

분명 타다요시가 혼자 있고 싶다는 둥,

쉬고 싶다는 둥, 비슷한 말을 내비쳤을 게 뻔했다.

그런 말을 하기까지 분명 미네코는 다시 갱년기를 운운하며

그에게 징징거리는 말투로 나 좀 봐주세요, 라 말했을 것이다.

이유 없이 빠른 시간에 그 방에서 미네코가 나올 이유는 없었다.


축 늘어진 미네코를 보고 마나츠는 동요되는 그 감정에

진심으로 그녀를 위로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미네코의 자존심이 그러길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마나츠는 감정을 대신해 줄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때 미네코는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그새 반응하며 말했다.


“하, 마나츠 몇 번을 말해 줘야 알겠어?

젖은 그릇을 포개 놓지 말란 말이야.”


미네코의 설거지 방법은 요란했다.

빈 그릇을 포개 놓으면

묻어 난 음식물의 기름때를 씻기가 불편하다는 것이다.

다섯이나 되는 식구의 빈 그릇을 일관되게 치우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설거지는 마나츠의 몫이었고,

직접 하세요, 란 말이 튀어나올 뻔했지만,

홀로 남은 미네코의 찻잔이 안쓰러워

모기의 나는 짓한 소리로 대답했다.


“그럴게요.”


미네코는 퉁명스러운 대답이 맘에 들지 않았는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기 시작했고

그 소리에 맞추어 마나츠가 그릇을 닦아 내는 소리는 굉장히 요란해진다.


미네코는 찻잔에 보리차로 둔갑한 위스키를 조르륵, 담아냈다.

그녀가 한꺼번에 마시기는 많은 양이라 생각했지만,

곁눈질로 확인한 결과 벌써 그녀의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중이다.


다시 조르륵, 담아내며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마나츠는 극도로 불안해 보이는 미네코를 걱정하지만,

머릿속은 금세 사라져 버린 하즈키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주방 정리를 하는 내내 미네코는 끝도 없이 홀짝였다.


빠른 시간에 취기가 올라

벌써 눈동자는 외로움을 억누르지 않을 거야,

금방 포효라도 하듯, 말하는 것 같다.

취기에 소리라도 지른다면 주말, 이 가정은 시끄럽기 짝이 없을 것이 뻔하다.


“어머니, 좀 주무실래요?”


미네코의 이죽거림은 나오코가 마나츠를 이죽거릴 때와 같은 모습이다.

몸집이 큰 마나츠는 힘으로 미네코를 잡아 올리며

거의 들어 업은 것과 같이 끌며 방으로 데리고 들어간다.

미네코의 몸은 앙상했고,

잡히는 뼈와 관절이 움직이는 느낌이 징그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쇠붙이처럼 차가웠고, 기름칠되지 않은 기계처럼 삐걱댔다.


미네코는 빠르게 베갯속으로 스며들었다.

가장으로서 완벽한 타다요시를 생각하면

미네코의 이런 모습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지금 같은 시대에 여자가 자식을 달고

재혼을 해서 이만큼 산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눈 감은 미네코의 머리칼은

힘없이 축 처진 채 정수리는 듬성듬성한

머리칼 사이로 붉게 성난 피부가 도드라져 보였다.


마나츠는 나오코의 방문을 두드렸다.

인기척이 없다.

베란다 계단 쪽에서 갸르륵, 하고 웃는 소리가 들린다.

하즈키의 다정한 목소리도 함께 들려왔다.

마나츠는 벌써부터 심기가 불편했지만 늘 그렇듯,

그 마음을 절대 들키고 싶지 않다.

호흡을 다듬고 억지로 입술 양 끝을 올리며 문을 열었다.


하즈키는 계단 난간에 기대어

쭈그리고 앉아 있는 나오코를 내려 보고 웃고 있었다.

마나츠는 자연스럽게 보이려 최대한 애를 쓰고는 있지만

심장이 심하게 요동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목소리의 떨림을 들키지 않으려 최대한 높은음을 내며 말했다.


“자기, 여기 있었어?”


미처 나오코를 보지 못한 것처럼 행동했다.

손을 내미는 마나츠를 하즈키는 꼭, 잡았다.


“응.”


“엇, 나오코도 여기 있었구나?”


하즈키의 왼손은 여우 같은 마나츠의 허리를 감싸고 있었다.

하즈키의 겨드랑이에 기대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찾았어.”


나오코는 대답 대신 치켜뜬 눈을 보여 준다.


“후, 미네코에게 신경 좀 써,

며칠째 독한 술을 입에 대고 계셔.”


나오코가 나지막이 말했다.


“늘 먹는 술.”


표정 하나 변함없이 말하는 나오코가 마나츠의 동생이었다면

국물도 없어, 라며 끓어오르는 화를 속으로 애써 참는 중이다.


“미네코는 점점 바싹 말라가는 것 같아

보기 안쓰러울 정도야 뭐가 문제인지...”


나오코는 또다시 약 올리듯 퉁명스럽게 비아냥댔다.


“늘 제자리지.”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낼 즈음,

하즈키가 마나츠의 손을 더욱 꼭, 아니 세게 잡았다.


“나오코 어쩜, 넌 미네코 걱정은 아예 없구나?

그런 거지?”


나오코가 벌떡 일어나 마나츠를 내려 보며 말했다.


“다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말하고 있네?
새롭지 않으면 놀랄 일도 아니지, 안 그래?”

나오코는 꼭, 대꾸할 수 없을 정도로

명확하고 틀리지 않은 말만 골라서 했다.

나오코의 말과 같이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고

미네코가 고집이 꺾어질 사람도 아니었다.

당연히 새로운 소식에나 놀랄 만하다, 고

말하는 나오코가 맞긴 했다.

정말이지 나오코는 정을 주고 싶어도 줄 수가 없는 아이다.


마나츠는 하즈키의 행동에 더 화가 났다.

동생을 나무라긴커녕,

오히려 마나츠가 필요 없는 이야기를 줄곧 하는 것처럼

한숨만 내쉬었다.

마나츠가 지지 않으려 말했다.


“알고 있었다면 더 관심을 두면 되는 거야 나오코,

가족이니까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하는 거야.”


그제야 하즈키의 입술이 떼어졌다.

하즈키가 말했다.


“그래 나도 신경 쓸게.”


마나츠는 하즈키의 손을 신경질적으로 탁, 뿌리치더니,

팔짱을 끼고 나오코를 노려보았다.

단 한 번도 화가 난 마나츠의 얼굴을 본 적도,

화난 목소리를 들은 적도 없는 나오코는

놀랄 법도 했지만, 눈동자는 장난기로 가득했다.


“소꿉장난은 둘이 해,

정말이지 가증스러워서 더는 못 보겠어
내 엄마니까 내가 더 잘 알지 않을까?

착한 척, 친절한 척.”


나오코의 방문이 챙챙, 하는 소리를 내며

집 안을 뒤흔들어 놓는 것만 같았다.

마나츠의 목소리 또한 지지 않았다.


“너 진짜 나쁜 아이구나? 나오코? 나오코오?”


결혼 후, 처음으로 자신의 감정을 모두 드러내고

들킨 것이 처음이었다.

하즈키가 말릴세 없이 달래 줄 세도 없이

그 상황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하즈키에게 마나츠는 현명하고 절대 흥분하는 일이 없는 여자였다.

물론, 그들만의 공간에 머물 땐 그보다

더 먼저 흥분을 잘하는 그녀지만

오늘은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는 모양이다.

하즈키가 나오코의 방으로 달려가는 마나츠의 팔을 붙잡았다.


“마나츠.”


“젠장 할, 나쁜 것 같으니라고 당장 문 열지 못해?”


하즈키가 말했다.


“마나츠, 그만.”


마나츠는 숨을 고르기에도 벅찬 화를 머금은

코를 벌름, 벌름거리며 하즈키를 노려보았다.

그는 계단 입구를 얼른 닫아 버리더니,

마나츠의 두 팔을 감싸며 자기 얼굴을 각인시키려는 것 같았다.


“마나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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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앤, 어떻게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거지?

칼날 같아, 날 찌르고 죽일 것만 같다고.”


“마나츠, 나오코는 좀 달라 당신도 알고 있잖아.”


“알아, 아니까 참았던 거야,

하지만 쟨 그걸 이용해 먹고 있는 거야

당신은 그게 안 보여?”


“적응할 시간이 필요한 거야 응?”


마나츠는 나오코 보다 하즈키에게 더 서운한 맘이 컸지만,

그녀 또한 모든 감정이 나오코로 인한 것이라 미루고 있었다.


“혹시, 친엄마가 아닌 거야? 하즈키?”


“맙소사 듣고 있잖아, 그만해 마나츠.”


“쟨 눈 한번 깜박거리지 않을 게 분명해

아마 웃고 있을걸?”


“마나츠.”


그가 기다란 손가락을 하얀 이마 위에 얹으며 머리를 흔들어 댔다.

마나츠는 하즈키에 대한 나오코의 이상한 감정을 알고 있었고,

하즈키 또한 그 이상함을 알고 있었다.

하즈키와 마나츠는 그 이상한 감정에 대해

아주 오랜 시간 모른 척, 아니 서로 말하지 않았다.

그것에 대해 마나츠가 하즈키에게 알고 있었다고 말하는 순간,

이 둘의 관계는 엉망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마나츠는 두려웠다.


나오코 또한 모든 것에 있어서 솔직하게 굴었다면

지금처럼 삐딱한 삶을 살 필요 없이 편한 삶을 위해 떠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마나츠는 그런 기회를 절대 만들어 주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뒤늦게 알아챈 하즈키의 당황스러운 얼굴을 보니

더 이상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나츠는 고개를 숙이고 그의 가슴에 이마를 대고 말했다.


“아... 자기 미안
내가 말, 실수한 것 같아.”


마나츠는 자신이 현실적이지 못했다는 생각에

마음속으로 자신을 다그쳤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하즈키가 고개를 흔들며

미안할 필요 없어, 라며 속삭였다.

하즈키의 미소는 정말이지 아름답고 빛이 난다.

마나츠의 모든 화가 하즈키의 부드러운 말투 한 번으로 수그러들었다.


“적응할 시간을 좀 주자 응?”


“그래야겠지.”


“들어가서 좀 쉬어 난 일 층에 좀 내려가 볼 게.”


“고마워, 하즈키.”


마나츠는 순식간에 눈 밑이 푹 꺼진 해 힘없이 걸었다.

지나치지 않고 나오코의 방문을 흘긋거리며 중얼거렸다.

중얼거린 말은 누구도 듣지 못했지만,

그녀답지 않은, 아니 하즈키는 모르는 그녀의 모습,

마나츠의 입에서 욕이 뿜어졌다.


마나츠가 말하는 미네코는

주인에게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사랑에 목말라 있는 여자다.

매번 이해할 수 없다 말했지만,

하즈키는 미네코의 외로움을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렇다고 타다요시에게 미네코에게 관심을 가져달라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미네코는 마치 붉은 립스틱을 바르면

시간을 붙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붙잡은 시간 안에 타다요시와 함께 할 시간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녀의 붉은색은 밤과 낯을 가리지 않았다.


하즈키는 새벽녘 갈증으로 주방을 헤매다

붉은 미네코를 발견한 후론,

매일 밤 주전자를 들고 이층으로 올라가는 것이

습관 된 지 오래다.

미네코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는 사람은

오직, 하즈키 일지도 모를 일이다.

물을 가져가는 척, 떨며 매일 밤,

숱 없는 긴 생머리의 그녀를 마주하는 건

더욱 으스스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서로가 알고 있음에도 모른 척, 하고 사는 것이 몇 개나 될까,

라는 생각을 하니 자신의 비겁함에 커다란 쇳덩이가 목에 걸린 것 같다.

하즈키도 나오코와 같음이 분명하다.

미네코가 모른 척할 이유를 잘 안다.

하지만 하즈키가 알고 있음에도 모른 척, 하는 건 이유가 없다.

미네코를 위해서도 누굴 위해서도 아닌 비겁함 일 것이다.

하즈키는 자신이 미네코의 방문을 열어 본다는 것에 대해

미네코의 얼굴은 굉장히 낯설다, 는

놀라움의 표정을 보일 것이라 상상했다.

하즈키의 소심한 노크는 아주 작게 겨우 두 번만 울린다.


“똑, 똑.”


독주에 취해 쓰러져 있는 미네코가 당연히 반응할 리 없다.

다시 노크할 것도 없이 삐걱, 소리를 내며 문을 열었다.

방문을 열자마자 풍기는 블랙 니카 냄새가 코를 찔렀다.

마치 하즈키가 독주를 마셔 버린 느낌이었다.


타다요시는 그녀의 술 냄새를 알면서도

부정의 소리를 낸 적이 없다.

오히려 취기가 남아 있을 그녀에게 약을 건네는 그다.

늘 말수 적은 타다요시를 보고 있을 때면

미네코는 그에게 부정의 소리라도 듣고 싶어 하지는 않을까,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시체처럼 누워 있는 미네코의 얼굴은

긴 머리 칼로 뒤 덥힌 채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얼굴이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즈키는 진짜 어머니가 아닌,

그냥 어머니가 진심으로 걱정이 되는 중이다.


오랫동안 걸치지 않았던 진주색 가운을 걸치고 있는 미네코였다.

어쩌면 하즈키가 보지 않은 방에서만 걸치고 있었던 게 맞을 것이다.

그런 미네코가 밉기보다 이젠 측은하기에 이르렀다.

혹여 그녀가 깰까, 녹차잎을 우려낸 주전자를 쟁반 위에 올려놓고,

숙취 약도 잊지 않고 올려놓았다.

조심스레 홑겹의 이불을 덮어주고 한 번 더 미간을 찌푸렸다.

얇은 홑겹에 불과한 이불에 가려진 그녀의 몸은

정말 그 속에 있긴 한 건지, 납작해 보이는 무엇이 진짜일까, 겁이 났다.





꽃이 지나간 자리



나이 든 나무의 껍질은

군데군데 각질이 일어난 듯 들떠 있었다.

손만 살짝 갖다 대도 마른 비늘처럼 떨어졌다.

나이 많은 나무는 언제나 하즈키가 기댈 때마다

단단한 버팀목으로 꿋꿋이 서 있어 주었다.

세상에 그 어떤 존재보다 더 하즈키에게 편안함을 주는 존재는 없을 것이다.


나무의 뿌리를 감싸주는 흙은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이다.

미네코에게 타다요시는 흙일 것이다.

흙마저 늙어 떨어져 나갔는지

나무껍질의 떨어지는 모양새가 미네코를 떠오르게 했다.

높이 뻗어 있는 가을 하늘을 올려 보기가 힘이 들었다.

한 점의 구름도 보이지 않는 하늘이다.

콧속으로 스미는 공기가 파란 하늘색의 냄새인 듯,

박하 향이 나는 것처럼 달콤하다.


“흠, 하...”


하즈키 1.jpeg



아무리 들이마시고 내쉬어도 질리지 않을 달큼함이다.

요즘 들어 부쩍 작은 새의 소식이 궁금해졌다.

마나츠에게 미안한 감정이 없진 않았지만,

작은 새에 대한 감정의 종류도 분간하지 못했기 때문에

잘못됐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었다.

겐토의 소식통에 의하면 도쿄로 사는 곳을 옮겼다고 한다.

그때 큼지막한 가방은 작은 새의 전 재산이었을 것이다.

그때 작은 새의 표정을 떠올릴 때마다

작은 새의 어깨를 짚고 다정하게 이끌던 그 노인이 자꾸 맘에 걸렸다.


오랜만에 공원을 몇 바퀴 돌 작정이다.

누구도 없는 곳에서 하즈키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준비 자세를 취하곤 냅다 달렸다.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들이 사사삭거리며

그를 따라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



미네코가 가장 중요시하는 집안일 중 하나는

햇살 좋은 날에는 꼭 이불을 걸어 놓아야 한다는 점이다.

단 하루의 시간도 놓치지 않는 건

마나츠 만의 섬세함과 완벽함 일 것이다.

타다요시가 덮는 이불은 항상 담뱃잎의 누린 내가 가시질 않았다.

하지만 그 탁한 냄새가 그리 싫지는 않다.

탁탁, 소리를 낼 때마다 퍼지는 탁함이 약간의 쓸쓸함을 느끼게 했다.

하즈키가 후다닥, 거리며 빠르게 계단을 오른다.

마나츠가 있는 힘껏 불러 보지만 뒷모습을 볼 세도 주지 않고 들어가 버렸다.


“하즈키.”


뒤늦게 손을 흔들어 보았지만, 쓸쓸함만 남았다.

결혼과 동시에 들여온 살림이라면

작은 크기의 침대와 마나츠의 화장대가 전부다.

마나츠는 늘 하즈키의 볼을 붉게 만들었다.


“하즈키, 이 침대는 우리에게 너무 크지 않아? 큭.”


그때마다 마나츠의 손길은 하즈키가 꼼짝 하지 못할 정도의

위치를 꼭 확인해 가며 떨어지지 않도록 조신하게 굴었다.

하즈키는 그 침대를 보자마자 비실거리며

침대에 풀썩 드러누웠다.


약간의 맺힌 땀은 기분 나쁠 정도의 축축함은 아니다.

창문 구석에 새어 들어오는 바람이 휘, 하는 소리를 내며

마네키 네코의 손을 흔들어 준다.

하즈키의 풀린 눈이 점점 마네키에게 빠지더니

눈 속에 작은 새를 담고 새근거리기 시작했다.


완벽한 아내는 주말의 노곤함을 즐기는 하즈키를 방해할까,

고양이 발소리만큼도 소리 내고 싶지 않았다.

방문을 여는 데만 꽤 시간이 걸렸다.

투명한 갈색빛을 내는 차를 조용히 선반에 내려놓았다.

갈색 눈을 덮고 잠든 하즈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구석진 곳에서 손을 흔들어 대는 마네키가

마나츠를 보고 조롱하듯 웃고 있었다.


마나츠는 평화가 깨져 버릴 것 같은 불길함은 여전했지만,

하즈키는 바로 지금 자신의 곁에서 곤히 잠들어 있음을 잊지 않았다.

하즈키의 존재는 마나츠가 일어서는 모양새도 소리하나 들리지 않게 했다.

한 발걸음을 디딜 때마다 들리는 소리에도 민감한 그다.

소리마다 그가 뒤척이는 것 같지만 용기 내어

웃고 있는 기분 나쁜 마네키 네코를 구석으로 밀어 넣었다.

그제야 완벽한 평화가 찾아온 듯하다.


마나츠는 몇 번의 고민 끝에 나오코의 방문을 두드렸다.

평생 나오코와 이렇게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알 수 없다, 란 뜻을 이해한다, 의 뜻으로

다시 생각하기로 한 마나츠는 정말

나오코를 진심으로 이해해 볼 작정이었다.


“똑, 똑.”


그 어떤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다시 한번 이해해 준다.


“똑, 똑, 똑 나오코 나야.”


칼날과 같은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나오코는 언제나 첫마디가 물음표이다.


“왜 그러지?”


마나츠는 할 말을 잃을 수도 있었지만, 또 이해해 준다.


“들어가도 될까?”


문을 열었다는 것은 들어와,라는 무언의 대답일 것이다.

나오코의 방바닥에 커다랗게 펼쳐진

도화지 속에는 커다란 나무와 소년이 서 있었다.

너무 아름다워서 눈을 뗄 수 없었고,

시간을 끌어 더 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마나츠는 그림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오랫동안 입을 쩍, 하고 벌리고 서 있었다.

그 시선이 불편했던 나오코는 뭔가 들킨 사람처럼 조금 당황했다.

“뭐 하는 거예요?”


“어, 아, 너무 놀랐어, 이 그림 굉장해.”


나오코는 대답하지 않는다.

마나츠는 벽에 기대어 앉아 두 손을 모았다.

마나츠의 눈은 아직도 동그란 채 흥분이 가라앉질 않았다.

마나츠가 말했다.


“그림에 소질 있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이 정도 일 줄은, 상상도 못 했어.”


나오코가 비꼬아 대답했다.


“그래요? 좋다는 얘기로는 안 들리네.”


마나츠는 그림 속의 소년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나오코, 우리말이야 잘 지낼 순 없을까?”


나오코가 그린 그림 속의 소년은 하즈키다.

누가 봐도 하즈키다.

나오코가 부정해도 하즈키다.

눈부실 정도로 그는 그림 속에서도 빛이 났다.

그를 온전히 그려낸 나오코의 솜씨에 질투 났고,

나오코의 머릿속에

이렇게 아름다운 하즈키의 모습이 있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불결했다.

어쩌면 나오코의 이 이상하고 무모한 해석은

미래에 굉장히 위험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오코는 마나츠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말을 꺼냈다.


“마나츠가 아는 얼굴이지 않나…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잘 지낼 수 있죠?”


마나츠는 마치 자신이 신이라도 되는 양,

나오코를 측은한 미소로 바라보며 이해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나오코, 오빠를 빼앗긴 것 같은 느낌,

나도 잘 알아 누구나 그럴 거야
그러니까 내가 노력할게, 그러니까 나오코도…”


마나츠는 나오코의 이상한 해석을 동생들 모두가 느끼는

평범한 해석으로 몰고 갔다.

갑자기 나오코가 키득거렸다.

마나츠는 마치 뱀처럼 웃는 그녀가 오싹하기까지 하다.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는 거야? 그거 아니잖아요?
너무 잘 알 텐데, 왜 자꾸 아닌 말을 하는 거지?”


“나오코, 내가 잘 지내보자, 고 하는 말은 진심이야,

우린 가족이라고.”


나오코가 갑자기 책상 서랍을 뒤지더니, 플라스틱 펜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가져가요, 쓸모없어
그리고 노력은 이렇게 하는 게 아니지

사람의 진심은 말하지 않아도 알아
그 거짓은 말이야, 그냥 눈에 보여, 난 눈만 봐도 알거든.”


사실 감정에 단순한 나오코는 마나츠가 선물한 펜이

더 쓸모가 있는 것이었다면

정말 그녀와 잘 지내보려 조금이라도 노력했을 것이다.

나오코의 당당한 말투를 듣고 난 후,

마나츠는 나오코의 눈을 당연히 피할 수밖에 없다.

그 순간 나오코와 잘 지내보려고 하는 마음이

하즈키를 온전히 차지하려는 수단이었는지,

나오코 때문인지 확실히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작은 펜 하나에 자신의 잘못된 마음이

들켜버린 것 같아서 쥐구멍이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 기에 눌릴 마나츠가 아니다.


“네가 생각하는 것이 다 맞진 않아, 나도 마찬가지야.”


단단히 마음먹은 마나츠는 나오코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눈 한번 깜박거리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키득거렸다.


“지금 한 말은 진심처럼 들리네.”


마나츠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


“내가 먼저 노력할 거야 나오코, 잘 지내고 싶어.”


나오코는 그리다 만 그림을 바닥에서 떼어 내더니, 그림 한쪽을 들어 올렸다.


“이것, 줄까요?”


“어?”


“자, 봐요 노력은 이렇게 하는 거예요,

아끼는 걸 주거나 헌신하는 거지.”


나오코는 그림을 돌돌 말아 쥐며

한 번의 고민도 없이 마나츠에게 건넸다.

마나츠는 잠시 멈칫한다.


“왜요? 가족이라며?”


엉겁결에 받아 들긴 했지만

마나츠의 어색한 대답에 나오코에게 다시

마음을 들킨 것 같아서 화가 났다.


“그래, 나오코 고마워.”


“고맙긴, 근데 너무 노력하진 말아요.

그러다 우리 엄마처럼 될 테니까.”


방 안에서 풍기는 짙은 향냄새는

마치 복종의 마취제인 것 같다.

마나츠는 자신도 모르게 자꾸 긍정의 대답을 하고 있었다.

나오코가 다시 인정머리 없는 말투로 말했다.



“이제 나가 줘요.”


그림을 들고 있는 마나츠의 손에는 약간의 떨림이 보였다.

방문이 닫히자마자 들린 소리는

나오코가 아닌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해괴함에 다신 방문을 열어 보지 않을 거라 다짐했다.

마나츠는 그림을 바닥으로 집어던지더니,

재빨리 잠든 하즈키의 품으로 파고들어 갔다.

그의 품은 따뜻했고, 온전히 그의 온기를 담아 내도 늘 모자랐다.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사람처럼 더욱 깊숙이 파고들었다.





겐조 겐토에게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한여름 결혼식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 내느라

덕지덕지 묻은 휴지를 얼굴에 묻히고 다닌 후,

다섯 달 만에 보는 것이다.

그때에도 겐토는 나오코의 뒤만 졸졸 따라다니며

놀리기 일쑤였다.

물론 놀림에 당할 나오코가 절대 아니었지만,

나오코는 겐토와 말 섞는 것조차 싫어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시선에는 전적으로 놀림당하는 모습으로 보였다.


나오코는 하얀 휴지를 얼굴에 묻히고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겐토가 한심스러울 뿐이었다.

오로지 나오코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듣기 좋지 않은 말도 해보았지만,

그녀는 헤어지는 그 순간까지 겐토와 말을 섞지 않았다.


겐토와 하즈키는 단 한 번도 계절이 바뀌는 시점마다

함께 지내지 않은 적이 없었다.

시간이 없어서 오지 못했다, 는

대화는 그들에게 필요가 없는 이야기다.


그런 그들이 처음으로 여름과 가을의 계절을

그냥 지나치고 겨울을 함께 맞이했다.

그들은 어떤 말도 필요 없이

눈만 마주쳐도 서로를 읽어낼 수 있을 만큼의 사이다.

오랜 우정은 나오코가 질투할 만큼의 정도였다.


겐토는 대학 졸업 후, 그럴듯한 직업을 찾기가 힘들었다.

아니, 그의 성에 차지 않았다고

하는 게 정확한 판단일 것이다.

하즈키는 그만 한 직장은 또 없다고 늘 충고했지만,

겐토가 한 직장을 꾸준히 나가는 건 길어 봤자,

두 달이 채 되지 않았다.


겐토는 이번 직장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보다

더 힘든 직장이라고 떠들어 댔다.

그렇게 원하던 직장에 드디어 붙었고,

자신은 결혼만 하면 모든 것이 완벽하다며 중얼거렸다.

겐토의 말 그대로 그는 대단한 직장에 들어갔고,

모든 여자가 선망하는 대상이 되었다.

정식으로 출근할 날짜를 받아 놓은 겐토는 고향 땅을 밟았다.


하즈키는 그의 속내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타다요시의 집에서 가장 바쁘고

할 일이 많은 사람은 이제 마나츠다.

그 덕에 미네코의 신경질적인 잔소리는 더욱 늘어났고,

마나츠가 집안일을 하는 속도는 하는 일과 비례해 느려졌다.


집안일을 마친 마나츠는

오랜만에 형형색색의 화장품을

화장대에 나란히 줄을 세워 놓았다.

챙챙 거리는 바깥 계단의 철 소리가 들렸다.

하즈키는 1층을 지나며

미네코를 보고 들어오기를 얼마 전부터 그만두었다.


몇 날 며칠을 미네코가 술에 취한 모습을

차마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타다요시는 무슨 일인지, 외박을 하는 일도 잦아졌고,

하루의 외박은 2박, 3박,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고민하던 끝에 타다요시와 대화해 볼 작정으로

하즈키도 타다요시를 미네코처럼 기다리는 중이다.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타다요시의 얼굴 보기가

이렇게 힘이 들 줄은 상상도 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하즈키에게 어울리지 않은 검은색 가방은 마나츠의 고집이다.

마나츠의 고집을 구석으로 던지며 바닥에 털썩 앉았다.


“다녀왔어.”


“으응, 자기 오늘도 고생했네?”


기다란 붓으로 눈두덩을 칠하다 말고

그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하즈키는 눈두덩이에 퍼런색을 입힌 마나츠를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응?”


마나츠가 난처해하며 부정의 고개를 저었다.

하즈키의 한숨이 길어진다.


“후우우.”


파란 눈두덩이 위에 반짝거림을 더 할

무언가를 손으로 톡, 톡 두드려 댔다.

마나츠의 눈두덩에 별이 반짝거렸다.

이번엔 무언가를 태우고, 속눈썹을 몇 번 스쳐 지나가더니,

마나츠의 눈썹이 머리칼을 붙여 놓은 것처럼 길어졌다.

마나츠는 늘, 그렇게 눈과 코와 입술에 마술을 부렸다.


마나츠가 만들어 준 달걀말이 또한

마술처럼 하즈키가 그리워한 맛과 똑같은 맛을 냈다.

언젠가는 하루카의 달걀말이가 아닌 마나츠의 달걀말이를

그리워할 때가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끔 해 본다.


“하즈키.”


마나츠의 커진 목소리에 놀라 하즈키의 갈색 눈도 따라 커졌다.


“하즈키, 내가 몇 번을 불렀는지 알아?”


“아, 미안 미안.”


“당신의 머릿속을 차지한 게 뭐길래, 내 목소리가 뒷전일까?”


마나츠의 완벽한 애교 섞은 말투는

상대방의 친절함을 불러일으키는 데 선수이다.


“당신의 완벽한 달걀말이.”


“으응? 쳇.”


마나츠의 얼굴은 행복함에 가득 차

곧 죽어도 될 만큼의 만족감을 뿜었다.

마나츠의 두 볼에 붉은색을 입히지 않아도

될 만큼 붉은 물이 들었다.


“에잇, 거짓말.”


그 말은 거짓말이라도 좋아,라는 뜻이다.


“심장을 보여 줄까?”


마나츠는 대답 대신

하즈키에게 가벼운 입맞춤을 한다.

마나츠는 줄 세워 놓은 립스틱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오늘 선택한 색깔은 붉은색이었다가,

나오코의 해괴한 목소리가 생각나더니,

이내 포기하고 옅은 베이지 색의 립스틱을 골랐다.


“마나츠, 오늘 미네코는 어땠어?”


순간 마나츠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후, 글쎄 내가 곁에 있을 땐 입에 대지 않았어.”


“무슨 뜻이야?”


“하루 종일 미네코만 바라볼 수는 없으니까…”


“아… 잘 알아 당신 탓하지 않아.”


“휴, 모르겠어 술을 마시면 꼭 내 탓만 같아서.”


“어쩔 수 없는 상황이야, 마나츠.”


“나오코는 정말 코빼기도 안 보여,

방학도 했는데 말이야
내가 곁에 있지 못할 때만이라도 있어 주면 좋을 텐데 말이야.”


마나츠는 나오코의 책임도 있다고 말하려 하지만

그의 눈치를 보며 대충 둘러댔다.

하즈키는 벌떡 일어나 무언가 단단히 결심한 얼굴을 했다.


“겐토 약속 시간, 아직 시간 있지?”


“응.”


“잠깐 내려갔다 올 게.”


하즈키는 미네코의 방문을 열자마자

알코올 냄새가 난다면 굉장히 실망할 것 같아

문을 열기가 두려웠다.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문을 두드렸다.


“똑, 똑.”


한참 기다려 보지만 미네코는 대답이 없었다.


“똑, 똑, 똑, 똑.”


바닥이 울릴 정도의 노크에도

기척 없는 미네코에게 목소리를 들려준다.


“저예요, 들어갈게요.”


다시 확인해 본다.


“들어갈게요.”


테이블 위에 빈 병의 블랙 니카와

땅콩 부스러기가 늘어져 있었다.

술을 쏟은 흔적이 있었고

하즈키는 쏟은 만큼의 양은

미네코가 먹지 않았다는 것에 조금은 안도했다.

바닥을 대충 닦아 내지만 술에 절인 다다미는 색까지 변해 버린 후다.


항상 몸을 웅크리고 누워 있는 미네코는

마치 투정 부리고 울다 지쳐 잠든 어린아이 같다.

며칠 전 타다요시가 했던 말이 기억났다.


“미네코가 술을 입에 대지 못하게 해, 부탁하마.”


그 말은 마나츠에게 전해 달라는 말이었다.

타다요시의 관심이 미네코가 술을 끊게 하는

제일 좋은 방법이라고 또박또박 말해 주고 싶었지만,

말 한번 하지 않고 그냥 지나친 자신이

지나고 나서야 비겁하다는 것을 알았다.

타다요시가 집을 비운 이틀 내내

미네코는 술을 연달아 마셨을 게 뻔했다.

하즈키는 느끼지 못했던 술 냄새를 한꺼번에 역겹게 맡았다.

자연스럽게 숨을 길게 뱉는다.


“으후우우.”


미네코의 웅크린 몸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내며 움직였다.

미네코는 누운 채 고개만 돌려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하즈키가 처음 미네코를 만났을 때의 서늘하고 우울한 눈빛이다.

그때의 미네코도 지금과 같은 절은 술 냄새가 났었다.


“여긴 왜, 무슨 일이야?”


하즈키가 좀 더 미네코 앞으로 다가와 앉았다.


“계속 이렇게 살 거예요?”


하즈키의 말은 미네코에게 자극적이었다.

미네코는 몸을 더디게 일으켜 벽에 기대어 흥미가 생긴 것처럼 눈을 번뜩였다.


“눈에 거슬리니?”


미네코의 입에서 독한 말들이 퍼져 나올 때마다

측은한 마음까지 사그라지게 만드는 진짜 독을 가진 뱀처럼 보였다.

이번에는 그냥 넘어갈 수 없다는 각오로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그녀를 보았다.


“아님, 네 아빠가 날 대신 내쫓으라던?”


미네코는 자신이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얘기인 줄 알면서

괜한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미네코의 눈알이 아래위로 빠르게 움직였다.


“미네코 당신이 먹는 이 술이

원하는 것을 가져다주지 않아요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당신이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모두 빼앗아 갈 거라고요.”


미네코의 윗니가 아랫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약간의 씩씩거림은

옳은 말에 대한 분노이고

자신에 대한 미련함 일 것이다.

미네코는 자존심이 굉장히 강한 여자라는 것을

하즈키는 알고 있었다.

미네코의 반응에 더 독한 말들을 뿜어 내려 작정한 하즈키의 입 모양이다.


“이런 생활을 하는 사람 옆에 누가 있을 수가 있겠어…”


하즈키는 자기의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저어 보였다.


“날 비난하려는 거니?”


“미네코, 비난이 아니에요, 모르겠어요?”


미네코는 하즈키의 진심을 알고 있으면서

계속 반대되는 말을 늘어놓는다.


“설마 내 걱정을 하고 있다는 건 아니겠지.”


하즈키가 손에 쥔 숙취로 인한 두통약을

타다요시처럼 베개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이게 마지막 이길…”


창밖에 내린 어둠은 미네코의 눈 밑과 같고,

오랫동안 꺼억, 꺼억, 하는 까마귀 울음소리가 들렸다.



미네코.jpeg






기온이 뚝 떨어질수록 이츠키에는 사람들로 붐빈다.

이츠키는 이츠키의 튀김 용 집게를 들고 인사하는 버릇은 여전하다.


“어서들 와, 미리 전화하지 않았으면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을 거야.”


이츠키의 나이는 아무도 모른다.

그의 얼굴은 시시때때로 변해서

눈치 빠른 마나츠도 가늠할 수가 없다.

소문대로 라면 그들보다

적어도 네 살 정도는 위일 것이고,

눈치로만 본다면 또래라고 해도 믿을 것이다.


이츠키가 입을 열고 말할 땐

분명 그들보다 더 나이가 많은 것은 확실해 보인다.

그 누구도 얕보지 못할 카리스마는

취기에 술주정을 부리는 손님이 없는 가게로 만들어 준다.

한 가지, 의아한 점은 이츠키는 오직 마나츠만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대화라도 할라치면,

언제나 더듬거리거나 다른 곳을 보고

맞는 대답을 하거나

또 다른 곳을 보고 맞지 않는 대답을 한다는 것이다.


이 또한 소문이 맞다면 아주 오랫동안

그녀를 짝사랑했던 게 맞을 것이다.

겐토의 장난은 이츠키의 오래된 짝사랑 상대가

결혼해 버린 유부녀임을

더욱 모질게 깨닫게 해 주곤 했다.

오랜만에 만남으로 모두의 감정이 기분 좋은 들뜸은 물론이고,

눈에 띄는 미모를 자랑하는 마나츠가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모든 이들의 눈은 동시에 싱글거렸다.

겐토가 장난스러운 눈으로

이츠키를 바라보며 옷깃을 세우고 우쭐거렸다.


“이츠키, 나 취직했어요.”


이츠키는 멋없이 퉁명스럽게 뱉는다.


“그만둘 날짜는 언제 야?”


“아직 출근도 안 했다고, 에이 정말.”


하즈키가 큰 소리로 키득거렸다.


“이츠키, 이번엔 내가 보장해요.
저 자식은 늙어 죽을 때까지 그만두지 않을 거예요.”


이츠키의 집게가 잘 튀겨진 크로켓을 집어

기름을 탁탁, 털어 낸다.

이츠키가 손수 만든 감자크로켓은

한입 크기로 정말 먹음직스러워 보인다.

겐토가 침을 꿀꺽, 거리는 소리가

먼 밖에서도 들을 것만 같다.

이츠키가 말했다.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걸렸나 보군
자 그럼 축하의 의미로

오늘 마시는 맥주는 공짜이니 맘껏 마시라고.”


겐토가 이츠키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 보인다.

이츠키는 겐토를 보다 마나츠와 눈이 마주친 순간

얼굴을 붉히며 어색한 행색이다.

마나츠는 이츠키의 얼굴을 보고

신이 났는지 놀려 줄 생각에 어깨를 들썩거렸다.


“이츠키, 맥주 한 잔 줘요.”


이츠키는 입으로 대답은 크게 하지만

눈은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이츠키의 가게는 남자 손님보다 여자 손님이 더 많다.

하지만 이츠키는 여자 손님들에게 늘 쌀쌀맞거나

욕이 나올 정도의 퉁명스러움으로 대하곤 했다.

물론 마나츠와 눈을 마주치진 않지만,

오직 마나츠에겐 늘 친절하고 얼굴을 붉히는 그였다.


정말이지 티가 난 행동에 온 동네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이츠키는 마나츠를 오랫동안 좋아했고

그녀가 유부녀가 됐었다는 사실조차 말이다.

아마도 그러한 이유로 손님들을 차지하는 성별은

여자들이 더 많았을 것이다.

이츠키는 그녀들에게 일편단심

꿋꿋하고도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아는 사람으로 찍혔을 테니 말이다.


겐토의 말에 의하면

단 한 번도 여자를 사귀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고 한다.

생각해 보면 이츠키는 능글맞게 남자들과

대화를 잘 이끌어 가는 매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당연히 겐토의 말은 사실이 아니다.


맥주를 주문한 지 일 분도 되지 않았지만,

마나츠는 이츠키를 놀려 줄 생각에 더 한번 소리쳐 보았다.


“이츠키 씨, 맥주 더.”


역시 이츠키는 말을 더듬거렸다.


“아, 지, 지금 나가.”


겐토가 더욱 짙어진 마나츠의 화장을 훑더니,

하즈키의 옆구리를 쿡쿡 찔러 댄다.


“어때? 신혼 재미? 아주 좋아 보이는데?”


하즈키는 그에게 눈을 흘겼다.

겐토가 말했다.


“하즈키, 넌 아무튼 복 많은 놈이야

저런 여자를 평생 친구로 맞이하다니.”


자신의 행운을 뒤로하고

하즈키의 행운을 부러워하는 겐토는

목표가 정확한 놈이다.

늘 엉뚱했고, 공부와는 거리가 멀어 보였던 친구였지만,
어느 부분에서나 1등,

주변의 위치를 항상 놓치지 않았다.


나오코가 겐토의 그런 면을 몰라서

멍청이라고 부르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즈키가 생각하는 자랑스러움과

부러움의 대상이란 것은 이루 말할 필요가 없었다.


하즈키가 말했다.


“자식, 너야말로 축하한다.”


겐토의 맥주잔이 빠르게 비워졌다.

마나츠는 수줍어하는 이츠키를 끊임없이 놀려 먹었다.

볼과 입술 색깔이 거의 같은 색깔을 뽐내고 있었다.

하즈키는 문득, 홀로 있는 미네코가 자꾸 신경 쓰였다.

술잔과 술병을 번갈아 볼수록 미네코의 얼굴이 떠올랐다.


마나츠는 그런 하즈키를 살핀다.

오랜만의 외출에 간혹 우울한 표정의 하즈키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론, 미네코를 걱정하는 건 당연했지만,

결혼 후, 얼마 만에 갖는 그들만의 시간인지

그에게 일깨워 주고 싶은 심정이다.


마나츠는 노력과 헌신을 다해 지내고 있는 요즘

제대로 인정받고 싶었다.

세세한 얘기로 하즈키의 기분을 날카롭게 만들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나오코에 대한 숨은 원망의 감정도 겹쳐

취기가 오르며 솔직함도 함께 오른다.

이내 곧 폭발할 것만 같아 느긋해지는 현명함이 필요했다.


마나츠는 수줍은 이츠키를 한 번 더 불러 세운다.


“이츠키, 나 소주로 바꿔 줄래요?”


이번엔 놀리려는 목소리가 아니다.

다시 또 고개를 숙이며 튀김용 집게를 바라보며 대답한다.


“응, 어떤 걸로 줄까?”


하즈키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진 그녀는

괜한 투정을 이츠키에게 부렸다.

상체를 세우더니 팔꿈치로 버티며

고개 숙인 이츠키의 얼굴을 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이츠키, 대답할 땐 사람을 봐야지,

응? 내 눈을 좀 보고 말하라고.”


이츠키는 얼른 몸을 내빼더니,

하즈키의 눈치를 보았지만 하즈키는 마나츠를 보고 있지 않았다.


“먹던 걸로 갖다 줄게.”


마나츠가 자리 앉으며 중얼거린 말이

이츠키의 귀에 닿았지만, 모른 척했다.

마나츠가 나쁜 새끼라고 중얼거린 말은

하즈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란 것을 이츠키는 잘 알고 있다.

그들의 애정이 한쪽으로 쏠려 있다는 것을

결혼 전부터 눈치채고 있었던 이츠키다.

나쁜 새끼라는 입 모양을 본 후로,

마나츠의 입은 계속 거친 말들을 중얼거리고 있었고,

여전히 마나츠의 눈은 하즈키를 바라보고 있었고,

하즈키의 눈은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마나츠는 끝없이 술을 들이켜고 또 들이켰다.

항상 그래왔듯이, 불안해 보이는 그녀를

하즈키는 신경 쓰지 않았다.

겐토는 마침 불안해 보이는 마나츠가 눈에 들어왔다.


“마나츠, 얼굴 좀 봐,

여기 있는 술을 혼자 다 마신 거야? 맙소사.”


마나츠가 빠르게 겐토의 정수리를 손바닥으로

탁, 소리가 나도록 내리쳤다.


“오늘 같은 날이 또 와?

아니 아니지, 그러니까 마셔야지.”


겐토가 하즈키에게 재빨리 눈짓을 보냈다.


“그럼 그럼, 근데 괜찮아?”


“오늘 같은 날, 왜 괜찮아야 하지?”


겐토가 멋쩍게 웃었다.


“엇, 하하하하.”


그제야 지켜보던 하즈키가 따뜻한 녹차를 마나츠에게 내밀었다.


“마나츠, 마셔 봐.”


마나츠는 아예 턱을 괴고 하즈키의 옆자리에 머물며

하즈키를 올려 보았다.

알코올에 마음대로 되지 않은 초점이지만,

하즈키의 얼굴만은 너무 또렷하게 보였다.

그때에도 그의 얼굴은 슬프게도 아름답다.

자리를 피해 준 겐토의 옆자리에

중년의 여자가 크로켓을

입술에 묻혀가며 쩝쩝대는 소리를 내며 먹고 있다.


미간이 절로 찌푸려지는 모양새지만,

얼마나 맛있게 먹는지 겐토 자신이 먹던 것마저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겐토는 이츠키에게 크로켓를 주문하더니,

중년의 여자와 가벼운 대화를 나누는 모양이다.

역시 말보다 술잔은 더 빠르게 친근함을 가져온다.


한참 턱을 괴고 말 없던 마나츠가

똑바른 발음으로 천천히 하즈키에게 말을 건넸다.


“자기, 흐으음… 우리 나와서 살까?”


하즈키는 타다요시와 함께 살겠다고

고집 피우고 우기던 마나츠의 얼굴이 떠오른다.


“응? 이제 와서?”


“상황은 언제나 바뀌어.”


“마나츠 당신, 힘들구나?”


늘 한결같이 모두를 위해 선택했던

마나츠의 말이 그 순간 옳았는지도 모른다.

그때 선택을 달리 했다면

아마도 마나츠는 최고의 엄마와 아내가 되어

보통 사람들처럼 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녀의 붉은 입술은 어느새 색을 읽고 검푸른색을 띠었다.


“힘든 거, 난 다 참을 수 있어
그런데 당신이 날 외롭게 하는 건 참을 수 없어
당신은 늘 다른 생각에 빠져 살아

그 눈 속에 내가 없다는 거, 너무 잘 알아.”


마나츠는 아예 술잔을 들고 있었다.

하즈키의 눈은 죄책감으로 가득했고,

그렇지 않다, 고 대답할 수가 없다.

하즈키의 약간씩 꿈틀대는 눈꼬리는

그녀의 곁에서 한 발걸음 달아나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자
난 당신이 힘든 건 원하지 않아, 노력할게.”


하즈키의 대답은 간단하다.

마치 사랑하지 않는다, 란

알 수 없는 감정의 죄책감을 덜어내려는 것 같다.

다시 눈꼬리가 꿈틀거린다.

마나츠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하면

늘 들어주던 하즈키의 모습을 깜박했는지,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말 그렇게 했다가, 정말 그가 달아날지도 모른다.

타다요시가 지금 자리에 없다면 정말 그렇게 될 것이 분명하다.


순간 감정에 솔직했던 자신을 탓하여

마나츠는 하즈키에게 기대고 있던 몸을 추켜세우며 눈을 깜박이며 일어났다.


“취했어, 내가… 하즈키, 잠시만.”


“함께 갈까?”


마나츠는 마음속으로 주문을 외웠다.


‘그냥, 함께 가자,라고 하면 돼, 이 나쁜 새끼야.’


마나츠는 고개를 살며시 젓고

짙은 향수 냄새를 남기고 걸었다.

이츠키는 무얼 하는지 알 수 없도록

손은 빠르고 몸은 항상 바빴다.

고개 숙인 이츠키의 눈빛은 마나츠에게 향하고 있었다.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약삭빠름이다.

겐토가 다시 주문한 생선구이를 내주더니,

금세 사라져 버린다.

크로켓을 빠르게 먹어 치우던 중년의 여자는

겐토가 주문한 생선구이를 보더니,

다시 입이 벌어지며 그것을 탐닉하는지

겐토의 허벅지를 탐닉하는지 쩝, 하며 숨을 길게 내쉰다.

겐토가 마나츠가 사라진 틈을 타 하즈키를 질책할 참이다.


“괜찮은 거야?”


당연히 하즈키의 어깨가 올라갔다.


“너 말고, 이 자식아, 이기적인 새끼.”


“후우.”


“난 저런 얼굴을 한 마나츠는 처음 봐
왜 갈수록 얼굴이 화상을 입을 것처럼

벌겋게 피폐해지는 건지…”


하즈키의 입안에 오랫동안 머금은 술이 쓰디쓰다.

뜨거운 녹차를 후루룩, 마셔 보지만

혀끝을 아릿하게 만든 쓴맛은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겐토는 하즈키가 자세한 얘기를 풀어내 줄 때까지

그의 눈동자를 놓치지 않고 무언으로 압박했다.


화장실과 연결된 쪽문을 알고 있는 사람은

눈치 빠른 손님이거나 또는 마나츠뿐일 것이다.

이츠키는 그녀가 그 문을 자주 이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영업시간이 끝나고 난 후,

그는 항상 이곳을 먼저 확인하곤 했다.


단, 그녀가 이츠키를 방문하는 날, 로 정해져 있다.

이츠키는 담배 냄새를 좋아하지도, 피우지도 않았지만,

그녀가 풍기는 박하 향의 담배 냄새는

그녀에 대한 첫 호기심을 자극한 존재다.

당연히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벽에 기대어

몸을 잔뜩 움츠린 채 박하 향을 내뿜고 있었다.

추위에 입김과 담배 연기가 맞물려 짙은 안개를 만들었다.


이츠키의 손에는 봉투 안이 넉넉한

쓸데없는 쓰레기 역할을 하는 것들이 쥐어져 있었고,

그것을 커다란 직사각형 모양의 쓰레기통에 휙, 하고 던져 넣었다.

마나츠는 인기척에 꿈적대지 않고

시커먼 하늘에 계속 안개를 뿜어 댔다.

알은척에 굶은 것처럼,

애꿎은 쓰레기통 안의 쓰레기들을 뒤적이는 모양새는

썩 좋아 보이지 않다.


“내게 할 말 있어요? 아니다 아니다,
원래 이츠키는 내게 늘 할 말이 있었던 사람이지… 풉.”


내용물을 알 수 없는 봉투들을

다시 꺼내어 놓았다가, 다시 집어넣었다가, 를 반복하는 중이다.

이츠키는 그때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슬픈 눈을 한 그녀의 얼굴을 보자

그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쓰레기 때문에, 아니 쓰레기 같은 것들 때문에…”


이츠키는 말을 얼버무렸다.

어둠 속에 단 하나의 가로등이 비추는

그녀의 입술이 살짝 미소 짓는다.


“어떤 섬세함으로 가려 놓아도

나의 섬세한 눈치는 따라오지 못해요.”


쓰레기통에서 꺼내 놓은 봉투는

이제 단 두 개 밖에 남지 않았다.

이츠키가 말했다.


“쌀쌀해, 더 있을 건가?”


그녀의 가느다란 검지와 중지 사이의

하얀 물체는 더 이상 타들어 갈 곳 없어 보였다.


“왜, 자릿세라도 내야 하나?”


이츠키가 대답도 없이 다시 문 안으로 사라지더니,

일 초도 안 되는 시간 안에 나무 의자를 들고 나타났다.

무심하게 그녀 옆으로 밀어 놓더니,

다시 일 초가 안 되는 시간 안에 사라졌다.


마나츠는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담배로 포물선을 만들어 던졌다.

스타킹 안쪽에 숨겨둔 담배를 다시 입에 물었다.

이때 일 초의 남자가 내민 의자는

그야말로 잊을 수 없는 최고의 안락함이었다.

마나츠가 중얼거렸다.


“저런 남자를 왜 사랑할 수는 없을까…”


마나츠는 쓴웃음을 삼켰다.

하즈키는 담배 냄새를 싫어했다.

조금의 고민도 없이 하즈키를 위해 선택한 금연은

마나츠의 감정처럼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최고의 담배 맛을 선사한 나무 의자 또한 역할을 톡톡히 했다.


내내 어두운 표정을 마나츠가 신경이 쓰인다.

집에 돌아오는 동안에도

마나츠의 입은 움직이지 않았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신발이 길바닥을 저벅거리는 소리만 들려온다.

겐토가 한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여자는 시간을 기다려 주지 않아

긴 시간을 갖고 생각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생기기 마련이지.”


하즈키의 머리가 무거웠다.

마나츠와의 문제가 어떤 것 인지,

딱히 생각이 나질 않았다.

마나츠와 사이는 아주 달달한 신혼부부의 모습을 하고 있진 않았지만,

꽤 만족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은 하즈키와 달랐고,

하즈키의 나눠지는 관심에

더욱 불안함을 느끼고 있던 것이다.

여전히 그는 눈치채지 못했고,

함께 있지도 않은 겐토가

오히려 눈치채고 있었단 사실에 미안함이 앞선다.


겐토는 하즈키가 정말 마나츠를 사랑하고 있는지, 에 관해

의문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말했다.

물론, 하즈키는 아니라고 입으로 말하려 애를 썼지만

마나츠를 얘기할 때의 눈동자를 보고 겐토는 이미 알고 있었다.


마나츠를 향한 감정이 정말 사랑인지 깨닫지 못했지만

하즈키는 그녀를 사랑했다.

그 사랑의 종류를 빼곡히 써서 제출하라는 건,

정말 우리 인간들이 행복하기 위해 꼭 해야 하는 방식일까,

어찌 됐든 하즈키는 마나츠가 원하는 대로 해 주고 싶었다.


화장을 지우고 말끔한 마나츠의 얼굴은

여러 가지의 색이 뒤덮인 얼굴보다 더 아름다웠다.

그 모습이 더 아름답다, 고 늘 말해 주고 싶지만,

꾸미는 시간을 길게 할애하는 그녀의 모습에 차마, 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마나츠는 우울과 반항기 섞인 감정도 함께

지워 버렸는지 다시 환한 얼굴로 하즈키를 바라보았다.

하즈키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알 수 없는 피곤함이 온몸을 뒤덮는 기분이다.


마나츠는 하즈키의 겨드랑이 사이가

끝이 없는 것처럼 계속 파고들었다.

마나츠의 살에서 복숭아 향이 났다.

달콤하고 새콤한 향은 침이 고이게 만든다.

하즈키의 몸은 딱딱히 굳어 있었고,

금방이라도 잠에 빠질 것 같이 몸이 붕 뜨는 것 같았다.

마나츠가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오로지 당신과 있고 싶어

온전히 당신이 내게 스며들었으면…”


마나츠의 입에서 누릿한 담배 냄새가 풍겼다.

복숭아 향을 다시 맡고 싶지만,

담배 냄새는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고,

그녀는 그 모습을 슬프게 내려 보았다.


갑자기 떠오른 하즈키의 머릿속은

공원에서 다리를 벌리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던

마나츠의 모습을 꺼내어 보게 했다.

왜 갑자기 그 모습이 떠올랐는지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 순간 그녀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만 들었다.

그 모습에 욕구로 눈이 발갛던 자기의 모습까지 벗어던지고 싶다.


마나츠의 손이 하즈키의 몸을 탐닉해 갈수록

그의 몸은 힘을 잃어 가기 시작했다.

그가 등을 보이며 몸을 돌렸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나츠의 놀림에 축축한 목덜미가 기분 나쁠 정도였다.


마나츠는 끝까지 하즈키를 헤집으며

담아 내려 애를 썼다.

하즈키는 알 수 없었던 마나츠에 대한 감정을

그때야 깨닫고 고통스러웠다.

마나츠는 고개를 뒤로 젖히며 낮게 소리를 뱉는다.

감은 눈을 뜨고 자신의 위를 헤집고 있는 마나츠를 보았다.

그의 가슴을 쓸어 담는 그녀의 눈과 마주쳤다.

그가 속으로 주문처럼 읊어 댄다.


‘이 여자를 사랑해야 해.’


하즈키의 갈색 눈은 커다란 공포를 담고 있었다.


“하즈키, 사랑해 줘.”


하즈키는 움직일 수가 없다.

그는 갑자기 그녀의 허리를 잡고 들어 올리더니

팽개치듯 밀어냈다.

마나츠는 결혼 전 하즈키에게 당당하게 했던 말을 기억했다.


“괜찮아 당신이 사랑하지 않아도, 내가 하면 되니까.”


마나츠는 그때에도 알고 있었다.

하즈키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고,

우정 어린 몸짓에 불과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마나츠의 바람대로

모든 것을 순차적으로 선택해 왔지만,

그것들은 마치 모래알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르게 빠져나가고 있었다.


우정 어린 하즈키는

늘 그녀의 곁에 있을 것이고

그런 그가 사랑을 주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또한 시간이 지나면 자신을 온전히 사랑으로 받아들일 것이라 믿고 있었다.

그녀가 사랑받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 버린

순간처럼 슬프고 어디든 숨고 싶었던 적은 없다.

그녀의 그래도, 괜찮아,라는 생각은

끝이란 단어를 더욱 정확하게 머릿속에 꽂아 놓는 일이 되어 버렸다.


“하즈키?”


마나츠는 당황스러운 모습을 감추려

오히려 안정적인 감정을 내 비춘다.

하즈키가 고개를 떨구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미안해.”



마나츠가 빠르게 옷을 걸치고 앉아 하즈키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억지스러움과 고집에 붙잡혀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는 포로를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사랑받지 못하는 것보다 괴로운 건,

그의 절망과 공포가 가득한 빛나는 갈색 눈을 보고 있는 것이다.


마나츠2.jpeg



“난, 나쁜 놈이야.”


마나츠가 손바닥으로 그의 얼굴을 감싸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지 않아.”


그 순간까지도 자신을 용서하고 있는

마나츠의 모습은 경이롭기까지 했고

하즈키를 더욱더 죄책감으로 옭아매는 것처럼 느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마나츠의 손에서 빠져나왔다.


“잠깐, 바람 좀 쐬고 올 게.”

바깥 복도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오코의 얼굴이 떠오르더니 마나츠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하즈키, 겉옷, 걸치고 나가.”


거세진 바람에 창문이 들썩이며 마나츠의 마음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응.”


하즈키의 발소리는 나오코의 발소리보다

더 조심스러운 삐걱 소리다.

일 층을 지나가지 않고

얼어붙은 바깥 계단을 선택한 것도

이 공간이 몸서리치게 싫었기 때문일 것이다.

“삐이이이 익, 철컥.”


문을 닫는 소리마저 냉혹하다.

놀랄 만큼의 큰 소리가 아니었음에도

마나츠는 눈을 깜박이고 상체까지 들었나 놓았다.

창문을 가려 놓은 커튼 틈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눈치를 봐 가며, 바로 놓인 마네키 인형을 다시 뒤집어 놓았다.


누구도 눈치챌 수 없는 커튼의 틈으로 하즈키를 확인했다.

하즈키는 당연히 창문에 비칠 마나츠를 확인할 사람이 아니었지만

내심, 무엇을 기대하고 있었는지,

허탈하게 헛, 하는 소리만 뿜어낼 뿐이다.

잠시 스쳐 간 하즈키의 몸은 잔뜩 웅크린 상태였다.

하즈키를 처음 보았을 때도

그는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그 어떤 존재에도 관심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없어 보였고,

아주 맛있고 귀한 음식이 앞에 놓여 있어도

그는 고작 몇 번의 입질이 끝인 사람이었다.

마나츠는 그런 그에게 호기심이 생겼고,

자신의 관심에 조금씩 변하는 모습에

모성애처럼 진한 감정을 느꼈다.

먼저 그가 다가와 입맞춤했을 땐,

이미 마나츠는 하즈키를 사랑하고 있었다.


맞다, 하즈키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해 갔다.

그로 인해 마나츠의 자신감 또한 충만해 있었기 때문에 두려울 게 없었다.

마나츠는 자신의 선택을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다.

결혼 전 겐토의 우스갯소리가 섞인 충고가 떠올랐다.

“너희 둘 다 제정신이냐?

평생 함께?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지?”


하즈키의 움츠린 어깨가 사라진 후가 돼서야

커튼을 활짝 열었다.

하즈키가 완전히 사라졌다.

마나츠는 요즘 들어 수도 없이 그를 시야에서 놓치고 만다.

마나츠의 시야에 들어왔을 땐

이미 공포 가득한 빛나는 갈색 눈을 가진 포로임이 불과했다.

그들은 이미 각자 다른 길을 걸으며 같은 침대를 쓰고 있었다.

하즈키는 마나츠가 분명 자신을 내려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이유 없이 걸음을 더 빠르게 재촉한다.

좁은 방 안의 커다란 창문을 원망하며 걸었다.

오늘따라 달빛은 더욱 그를 환하게 비추었고,

무슨 짓을 해도 마음속 깊숙한 비밀까지 들켜버린 기분이 들었다.


겐토의 집에 다다르자,

숨이 가빠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한참을 구부린 채 호흡을 가다듬는다.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겐토의 집 대문은 항상 열려 있었다.

지금과 같은 일들이 매일 반복이 되는 그때 그런 날에는 늘,

겐토의 집에 예고 없이 들이닥친 하즈키였다.


겐토에 배려인지는 모르겠으나,

겐토는 아닌 듯, 늘 그렇게 배려라는 단어와

친해져 있는 사람이다.

하즈키는 조금의 의심 없이

문을 툭, 하고 건드려 보았다.

역시나 몇 년이 흐른 지금도 겐토는 그런 친구다.

영락없이 피식, 하는 소리가 나왔다.


“툭, 툭, 툭.”


“겐토, 나야 문 열어.”


성급하지 않은 하즈키의 성격은

겐토 집의 현관문에 다다를 때면 늘 성급하다.


안 그래도 삐죽삐죽 가라앉지 않는

겐토의 머리카락이 원을 그린 것처럼 뻗어 있었다.
하품하는 겐토의 입에서 전날 먹은 간 무와 같은 냄새가 났다.


“이아하함, 대문은 비집고 들어오더니,

현관문은 발로 차냐?”


하즈키는 겐토를 보지도 않고 안으로 들어가더니,

주인 허락도 없이 냉장고 문을 열고 멈춰 서서

오랫동안 보고 서 있었다.

한참을 들여다보며 결국 맥주를 꺼낸다.

겐토는 시계와 하즈키의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눈이 동그래졌다.

“지금 새벽 세 시야, 뭐야 너.”


“너 옷이나 좀 걸쳐라.”


그제야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자신을 훑었다.

구석에 놓인 수많은 짐은

아마도 완전히 이곳을 청산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가져가지 않았던 짐까지 수북이 한 곳에 모여 있었다.

하즈키는 사막을 걷다 만 사람처럼 맥주를 들이켰다.

겐토도 따라 맥주를 들이켜며 튀어나올 말들을 기다렸다.

하즈키가 말했다.


“아주 큰 잘못을 한 기분이야.”


“크얼, 자다가 일어나서 마시는 맥주는 이런 맛이군.”


그는 하즈키를 절대로 다그치지 않았고,

더욱 맛있는 소리가 나도록 맥주를 따라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어.”


겐토가 말했다.


“니 감정 따위 치우고 책임진다면

할 수 있는 건 많아
솔직히 그걸 숨기고 살 용기가 없는 건 아니고?”

“쳇, 들켜버리니, 속은 시원하네.”


“그래서?”


하즈키가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젓는다.

겐토가 곱씹듯 말했다.

“네가 생각했던 감정의 착각은

큰 사건 하나를 만들 수도 있어, 위험하지.”


“변명할 수도 없다.”


“욕심 많은 마나츠나,

너나 똑같이 손해 볼 건 없겠네,

무책임한 새끼들, 결혼이 장난이냐?”

하즈키는 낡아 빠진 나무로 덧대어진

모래시계를 뒤집어 놓는다.

실제 들리지는 않지만,

마치 사사삭, 거리는 긴장된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하즈키는 모래가 떨어지기도 전에 다시 또 휙, 뒤집는다.

“얜, 참 쉽네, 되돌리는 거.”


겐토는 잠을 자기엔 글렀다는 듯이

쌓아 놓은 짐들을 발로 툭툭, 건드렸다.


“언제 출발할 거야?”


“일찍.”


하즈키가 부정의 의미를 담고 말했다.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행색이네?”

겐토는 두 팔로 베개를 삼아 누우며 말했다.

“뭐, 나야 언제 돌아오든

집이 사라지지는 않으니까.”


하즈키도 아예 다다미 위에 길게 뻗었다.

“이야, 따뜻하다.”


겐토는 그를 흘겨볼 뿐이다.

하즈키는 한참 눈치를 살피더니 입을 열었다.


“아버지 생각, 가끔 해?”


“넌 가끔 미친놈 같은 질문을 해

넌 엄마 생각 안 하냐?”


하즈키가 키득거렸다.

“넌 나랑은 다른 인간 같아서…”


“난 아버지가 살지 못했던 세월까지

오랫동안 살 거야
그건 매일매일 아버지 얼굴을

떠올린다는 뜻이야 이 새끼야.”


겐토는 꼭, 백 세를 훌쩍 뛰어넘은 노인같이 말하고 있었고,

그의 말에 하즈키는 무엇인지 모를 부끄러움을 느꼈다.


“난 눈 좀 붙일게.”


하즈키의 결혼 전에는 겐토는 아무리 늦은 시간이 되어도

그에게 집에 돌아가라는 소리를 하는 법이 없었다.

겐토의 잔소리는 처음 울려 퍼졌다.


“이 자식이 가서 자라.”


“조금 있으면 해 뜬다, 그때까지만.”

“남에게 걱정 끼치는 것만큼은

할 짓이 못되지 얼른 꺼져라.”


하즈키는 웃음 섞인 한숨을 늘어놓았다.

“잔소리만 늘었어, 알았다, 알았어.”


하즈키는 벌떡 일어나 겐토의 뒤통수를 갈기고

빠르게 현관문을 나섰다.


“아앗, 저 자식이.”


“출발 전에 올 거야 기다려.”

멀어져 가는 하즈키의 뒤통수에

동네가 떠나갈 듯한 목소리로 고래고래 악 소리를 질러 댔다.

하즈키가 속해 있지 않은 낯선 밤은 달빛까지 평화롭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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