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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채기

9. 죽음과 시작

by 금봉





1973년의 7월은 유난히도 잔인한 여름이었다.

해안에서 부는 바람이 더운 수증기를 만나 얼굴을 타고 갈 땐

어김없이 목덜미에 끈적함을 남긴다.

마나츠의 숨이 뜨거운 바람에 훅, 하고 막혀버렸다.

먹구름이 가득했던 하늘은 끝내 더 끈적한 비를 내리고 있다.


“젠장.”


일 년이 넘어가는 결혼 생활을 돌이켜 보면 생각보다 꽤 온전한 날들이었다.

위기가 찾아왔다고 생각했을 땐,

흐르는 시간과 감정에 대한 망각은 위기를 온전함으로 변화했다.

인간의 망각은 최고의 선물이라 했던가.


그 온전한 날들은 마나츠가 하즈키를 더욱 옭아매는 도구가 되었고,

그들의 생활은 너무도 조용한 나머지

관계에 있어서 꼭 할 말들을 아끼며

입을 닫는 일이 다반사다.

모두가 이해하지 못하는 답답함과 불안은

마나츠만 느낄 수 있는 존재일 것이다.


마나츠는 다시 돌아갈 곳을 생각하니,

또 한 번 숨이 턱, 하고 막혀 왔다.

하즈키가 마나츠를 밀어낸 그날 이후,

마나츠의 삶은 조금씩 엉망이 되어 가고 있었다.

하긴 엉망이란 것을 일부러 달고 사는 것도 맞다고 할 수 있겠다.

감정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 웅크린 남자의

뒷모습을 볼 때마다 마나츠는 윽박지르고 욕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런 모습을 보여도 그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말하지도 않았을 것이 뻔했다.


마나츠는 무료한 시간이 지날수록,

한 달에 길면 보름을 넘게 본가에서 생활했다.

그때 조금은 반갑기라도 했던 하즈키의 방문과

억지스러운 달램은 다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주기도 했다.


돌아온 곳의 타다요시의 집은 다시 온전하게 돌아갔고,

하즈키에 대한 희망은 마나츠의 희망뿐이라는 것으로,

현실로 그렇게 다시 돌아갔다.


물론 마나츠의 잦은 본가 방문은

그녀의 몸이 좋지 않은 것을 이유로 삼았다.

그들 모두에게는 임신이라는 귀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 가지 신기한 일은, 무뚝뚝한 타다요시가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미네코가 술을 끊을 수 있도록 변화시켰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의 사이에 쩍쩍, 하고 금 가는 소리가

오랫동안 요란하게 들려왔기 때문이다.

한순간에 술을 끊고 변화를 작심한 미네코는

어울리지 않은 자수를 놓으며 자신이 대단한 사람인 양,

굴며 자기 모습과도 같았던 마나츠를 말로써 괴롭히기 시작했다.


아마도 괴롭혔다는 것은 마나츠의 극단적인 생각이지만

미네코는 마나츠를 감정적으로 돕고 싶었던 마음이 더 컸다.

점점 비뚤어 가는 건 마나츠 그녀였다.


대체 타다요시의 어떤 노력인지는 알 수가 없었으나,

보통의 사람보다 더 완벽함을 갖추려고 애쓰는

미네코를 보면서 그들의 사랑은 아직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리고 하즈키는 그런 타다요시를 닮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언제나 허수아비처럼 곧게 서서 말없이 헛기침만 일삼는

타다요시를 생각하면 대단한 결과가 아닐 수 없다.

마나츠는 어쨌든 다시 사랑을 받고 있는 듯한 미네코가

다행이며 부러웠다.


마나츠는 예전의 미네코처럼 모든 것을 삐뚤어지게 보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것이 하나의 시샘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언제나 말없이 미소로 일관하는 타다요시의 얼굴만 보아도

짜증이 밀려왔고, 마나츠 인생의 제일 중요한 키를

손에 쥐고 있던 하즈키와 마나츠의 관계를 마치

단순 동거인으로 생각하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나뿐인 아들 부부의 관계를 알면서도

웃음으로 일관하는 것을 보면 의심이 아닐 것이라며

마나츠는 속으로 비아냥거렸다.


다른 또 하나, 마나츠의 분노를 더욱 부추기는 건,
나오코일 것이다.


그날, 나오코는 분명 하즈키가 자신을 거절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게 분명할 것이라고 억지스럽게 믿었다.

이 또한 비뚤어진 마나츠만의 생각일 것이다.

언제나 마나츠를 증오하던 눈빛으로 흘기던 나오코는

그때부터 마나츠를 아주 대놓고 이죽거렸기 때문이다.




나오코는 하즈키와 대화할 때마다 일부러 더 큰 목소리를 내며

마나츠의 귀가 찢어질 때까지 웃음소리를 내는 건

말이 필요 없었다.

뭐가 그리도 좋은지 그 둘이 대화할 때는

하즈키는 늘 웃고 있었다.


나오코가 어쩌다 마나츠에 대한 동정심을

내비치려는 척을 하는 눈을 보고 있으면,

정말이지 토악질이 나올 만큼 분노가 치밀었다.

나오코는 마나츠에게 정말 나쁜 년, 이 되어가고 있었다.


마나츠는 또다시, 본가에서 돌아오는 날,

굳게 다짐했다.

아이를 갖게 된다면 모든 상황은 다시 좋아질 것이고,

하즈키의 입에서 다시 분가하자는 말이 나올 것이다.

처음 마나츠가 그 말을 제안했을 때,

자신이 해 놓은 말에 더욱 자신 없어하던 그녀였다.

그 말은 다시 그녀로 인해 없던 일이 되어 있었다.

하즈키가 그렇게 하자,라고 했을 때,

실행에 옮기지 못했던 그때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어쨌든 자신들의 핏줄을 아끼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고

당연히 마나츠의 아이를 바라보는

하즈키의 변화되는 모습을 먼저 기대했다.


미리 준비한 마나츠의 행동에는 거침이 없었고

계획까지 완벽했다.

마나츠는 그렇게 또 기대를 안고

관계를 다시 시작해 나가려 했다.

아이를 갖고 싶다는 얘기에 하즈키 또한 반가움을 표시했지만,

그의 역할은 딱 그뿐, 그녀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마나츠의 노력을 미네코도 모르고 있지 않았던 터라,

안타까움에 몸을 보신할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 마나츠를 위해 해다 바쳤다.


그때마다 미네코를 극단적으로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이다,라는

억지스러운 생각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미네코의 눈은 진짜를 말하고 있었기에

어떤 트집을 부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미네코는 진심으로 마나츠의 임신과 건강을 빌어주었다.

아이를 갖는다는 희망에

모처럼 가족이 똘똘 뭉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짧지만 기뻤고, 하즈키의 동거인이 아닌,

진짜 가족애를 느낀 몇 달이었다.

물론 나오코는 그때까지도 마나츠를 이죽거리며 다녔다.

마나츠에게 나오코는 여전히 나쁜 년,이었다.


마나츠의 계획에 자신의 몸이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정상적인 몸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리스트와 대안은 없었다.

이 일로 찰나의 행복이 사라지고

마나츠의 계획과 몸과 마음까지도,

모든 것을 산산조각 내는 일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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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에서 이 가족들과 하즈키와

다시 같은 길을 걸으며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자신의 목을 조르고

그녀의 자궁을 밟고 뭉개는 것만 같았다.


점점 마나츠의 몸은 월경을 거치지 않는 몸이 되고 있었고

그녀의 여성성은 사라져 갔다.


물론 병원 처방도 무용지물이다.

마나츠는 하즈키를 원망하기에 바빴다.

하즈키의 사랑에 대한 감정이 어찌 되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선택한 것은 마나츠였다.

원망한다는 것은 규칙에도 어긋나고

자신의 자존심에도 허락하지 않은 일이다.

하즈키를 원망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더 이상 그의 곁은 두 사람 모두에게 위험하다는 신호다.


즉, 그 사랑에 이제 증오도 섞일 것이라는 뜻이다.

이제 하즈키를 온전한 사랑으로만 대할 수는 없었다.

하즈키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거짓말 대신 침묵을 일관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처음으로 그녀에게 거짓말을 했다.

아니, 위로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 위로는 그녀에게 더욱 증오를 피어나게 했다.


“마나츠, 난 우리 둘로도 충분해
그리고 당신은 아직 젊고 아름다워.”


하즈키의 빛나는 갈색 눈은 마구잡이로,

좌우로 흔들리고 있었고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그녀의 겨울은 옷을 아무리 껴입어도 외로움에 덜덜 떨었고,

여름은 항상 화가 달해 남 보다 훨씬 더위를 느꼈다.

마나츠는 습관처럼 밖을 나가 서성거리기 일쑤다.

자신을 모르는 낯선 이들과의 만남을 즐겼고,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도 숱했다.

다른 사람과 밤을 보내는 날에는

새벽을 넘나드는 시간에 하즈키를 불러 내,

우연이 아닌 약속된 마주침을 만들어 냈다.

마나츠는 하즈키도 꼭,

같이 고통의 수렁으로 빠져들게 하고 싶었던 거다.


그녀의 애(愛)에서 증(憎)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하지만 하즈키는 다른 이와 뒹굴고 있는 그 순간을

마주했음에도 화를 내지 않았다.

그는 책임감을 무자비하게 버린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고 했다.

마나츠는 이런 생활을 하는 여자에게서

책임감은 필요 없다는 뜻으로

하즈키의 결단을 쉽게 만들어 주려는 방법 중 한 가지를 선택한 것이다.


하즈키가 자신을 놓아주길,

아니 버려 주길 바랐지만 하즈키는 마나츠를 놓지 않았다.

줄곧 그녀가 그를 놓지 않으려 했던 일들이

이젠 서로 반대가 되고 만 지경까지 온 것이다.


“나 같은 여자에게서 책임감 따위,

느낄 필요 없어, 우리 제발 그만 멈추자.”


반복되는 일상에서도 하즈키는

늘, 자신 탓을 했다.

마나츠를 열렬히 사랑했다면

이 또한 있을 수 있는 감정이었을까, 하며

그들은 혼란스러운 날들을 반복했다.


마나츠가 그 집을 향해 꼭 걸어야 하는 이 비참한 길바닥은,

마치 가까운 곳에서

고양이 털이 날리는 것 같아

코끝이 간질거렸고

진한 미네코의 머스크 향내가 풍기는 것 같았다.

자신을 암묵적으로 죽이려 드는 살인자들이

득실거리는 기분이었다.

그들이 하는 진실한 행동은

모두 자신을 이죽거리고 있다며 상상하며 걸었다.

갈수록 그녀의 비뚤어짐은 더욱 심해져 갔다.


“꿍 쾅, 쿵 쾅.”


마나츠 또한 밖의 계단을 이용하고 있었다.

내딛는 발, 한 걸음마다 분노가 담겨 있다.

복도 끝에 접어들었을 땐

일부러 나오코를 마주치고 분노를 쏟아내고 싶었다.

나오코 방문 앞에 서성여 보지만, 그녀는 없다.


“안 돼, 안 돼.”


안 된다고 외쳐 보지만,

단 두 마디의 소리침에 분노는 쉽게 가라앉을 리 없다.

이 집의 일요일은 귀신도 무서워할 만큼 조용했다.

사람이 있어도 인기척을 내지 않으려 애를 쓰다

나무의 삐걱거리는 소리에 오히려 그들이 놀랄 일이 허다할 것이다.

음침한 사람들의 소굴인 것 같아

끈적한 목뒤에 오랜만에 소름이 돋았다.


복도의 반질반질한 윤기는 미네코가 청소를 말끔히 끝냈다는 뜻이다.

미네코는 여전히 암묵적으로 마나츠를 위로하고 있었다.

마나츠는 고개를 마구 뒤 흔들더니,

예전 술 취한 미네코를 떠올리며 원망할 구실을 찾았다.

새로 고친 문고리가 금색으로 눈이 부셨다.


“아악, 깜짝, 이야.”


컴퓨터를 만지작거리던 하즈키가

오히려 더 놀랐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나츠?”


커다란 가방을 다다미 위로 집어던진다.


“놀랐잖아, 무슨 사람들이 인기척도 없어?

하... 숨은 쉬고 살아?"


하즈키의 눈빛은 방문을 열고 들어온 건

너야, 라 말하는 것 같다.

하즈키가 말했다.


“덥지? 시원한 것 좀 갖다 줄게.”


마나츠는 엉덩이를 바닥에 붙이지도 않는다.


“필요 없어, 하즈키.”


“지쳐 보여.”


“짐, 챙겨 갈게.”


마나츠는 하즈키의 빛나는 갈색 눈을

똑바로 바라보기가 버겁다.

그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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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 중… 이잖아, 시간을 줘.”


마나츠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내려온다.


“노력? 당신의 노력은 나를 숨 막히게 해 말했잖아?
우린 노력이 아니라 결론이 필요해,
어떻게 사랑하기 위해 노력해?
아니야 아니지 딱한 하즈키
사랑은 노력해서 되는 게 아니야
아직도 모르겠어?”


하즈키가 단호하게 말했다.


“이런 식으로 당신을 놓을 순 없어.”


“왜? 죄책감? 책임감?”


“마나츠…”


마나츠가 얼굴을 쓸며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남아 있는 희망도 사라져 버렸어, 그만하고 싶어

당신 말처럼 난 지쳤고 점점 악독한 나쁜 년으로 변해 버릴 거야.”


하즈키가 그녀의 팔목을 잡았지만,

그의 손아귀는 풀이 죽어 힘이 없었고

긴장된 땀으로 축축했다.

그녀의 가슴이 아렸다.


“날 사랑하지 않는 당신을 선택한 건 나야,

날 더 초라하게 만들지 마.”


“우린 사랑하는 방식이 다를 뿐,

난 다른 방식으로 당신을 사랑했고 존중해.”


마나츠가 그의 말을 잘라먹는다.

가라앉은 분노와 더위가 한꺼번에 차올랐다.

선풍기의 목을 누르고 눈을 감고 가장 센 바람을 맞았다.


“썩을 존중 같은 말 따위, 하…

당신 점점 거짓말이 늘고 있네?
당신은 날 사랑하지 않아."


끝내 마나츠는 고인 눈물을 떨구었다.

얼마나 진한 슬픔이었는지,

그 묵직한 무게의 눈물이 볼을 타고 천천히 내려갔다.

그리고 피처럼 끈적거렸다.

하즈키가 그녀의 얼굴을 수건으로 닦아 낸다.

시커먼 화장이 얼굴 전체에 범벅이 되었다.


“하즈키, 난 당신을 사랑해,

그리고 당신은 늘 이렇게 친절해
그래서 난 당신과 살 수 없어,

난 더 망가질 거야 내가 망가지지 않게 해 줘

살고 싶어, 하즈키..."


하즈키가 마나츠를 품에 꼭, 안았다.

마나츠는 그의 품에서 여러 가지의 감정을 전해 받았다.

하즈키는 분명 그녀 때문에 가슴이 아픈 것이다.

들키지 않으려 하즈키의 얼굴을 가렸지만,

하즈키는 알 수 있다.

마나츠는 그때 하즈키가 그랬던 것처럼 달아나려 한다.

마나츠가 슬픔을 토악질하듯 뱉으며 말했다.


“하즈키, 난 이 감정으로 충분해, 살고 싶어.”


하즈키의 어깨에서 울리는 진동이 점점 세지는 것을 느낀다.

여전히 하즈키는 말이 없다.

하즈키는 아직도 마나츠에 대한 감정을

무엇이라 판단할 수가 없었다.

처음 마나츠를 보았을 때,

당당하고 도도한

관심에 이끌렸고,

처음 맛보았던 욕망은 참을 수 없이 치솟아

그녀를 당기게 하는 원천이 되어 버렸다.

끊임없이 구름처럼 머리 위를 떠다니는

그녀의 다리 사이는

그의 감정을 혼란 속으로 빠져들기에 충분했다.


그게 사랑이라 결론짓기가 충분하다 생각했던 그다.

마나츠의 결혼하자,라는 말에

쉽게 반지를 나누어 꼈으며 매일 밤,

욕정을 채운 밤을 보내고,

밀려오는 공허함에 몸서리쳤다.

완전하지 못했던 사랑에는

늘 허기가 지는 법이다.

그럴 때마다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건,

하즈키 자신에게도 비밀스러운 부분이었다.

구석에서 자신을 보고 있는 마네키 네코와

눈이 마주치면 마치 큰 죄를 짓는 기분이 들었다.

그 생각이 떠올랐다가, 도

자신이 꺼내 놓은 생각에 더욱 몸서리쳤다.


겐토가 말 한 실수라는 의미는

되돌릴 수 있는 것들이다.

하즈키의 착각으로 한 사람의 사랑을 짓밟았다.

그의 몸은 더럽고 추한 살덩어리와 같았다.

도저히 자신을 봐줄 수가 없었기에

마나츠를 놓을 수 없었다.

그 또한 그의 이기심,

양심을 위했던 거라 판단한 건 오래되었다.


마나츠가 꿈꾼 마지막,

아이에 대한 끈을 묶어

서로를 단단하게 만들고 싶었던

희망까지 날아가 버렸다.


이젠 그가 아닌 그녀가 떠날 준비를 했다.

하즈키를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건

마나츠를 위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정말이지 끈을 놓아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아니, 끈이란 건,

처음부터 그들 사이에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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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잔히 내리던 비가 창문을 때리며 적막을 깨뜨린다.

두 개의 커다란 가방 중 마지막 가방의 지퍼를 닫았다.

창가 구석진 자리에 항상 자리한 마네키가

새삼, 다르게 보인다.

없었던 것이 생겨난 것처럼 의아했다.

또는 마네키가 떠나는 마나츠를 아쉬워하는 건 아닌가,

라는 생각도 들었다.

마나츠의 눈이 가늘어지며 미소 짓는다.


“저, 인형.”


하즈키가 뒤돌아 마네키를 바라보았다.


“그때 그 아이, 생각나
당신이 넋을 놓고 봤던 아이.”


하즈키가 갑자기 고개를 홱, 돌리더니

감정을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모른 척, 을 떨었다.

마나츠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몇 번을 마주쳤지

아니, 당신 맘속으로 매일 마주하고 있을지도..."


장마가 시작된 것을 알리려는 심산인지

창문에 부딪히는 빗소리가 심상치가 않다.


“비가 내려, 지금 가는 건 무리야, 마나츠.”


마나츠는 그대로 마네키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이 그 아이를 보는 눈,

그 눈 때문에 내가 당신을 욕심냈다면,

당신이 믿었을까?”


하즈키가 마나츠의 손에 든 가방을 살며시 빼앗는다.


“그때 당신을 잡지 않았다면,

당신은 아마 진짜 사랑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마나츠, 무슨…”


마나츠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니까, 우린 똑같아진 거야,

누구의 잘못도 아닌 거야 명심해,

절대 자책 말아.”


하즈키가 고개를 떨군다.

마나츠가 소리쳤다.


“말해, 비긴 거라고.”


“마나츠…”


“제발, 말해.”


거짓말처럼 요란스럽던 비가

다시 잔잔하게 그들처럼 반복했다.

하즈키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래, 우린 비긴 거야.”


그제야 마나츠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즈키의 눈은 더 이상 포로가 갖고 있는 눈이 아니다.

슬퍼 보였지만 다시 반짝거렸다.

마나츠는 3년 동안 머물렀던

좁은 방 안을 둘러보았다.

하즈키가 쥐고 있던 가방을 다시 꼭 쥐고 일어섰다.

나무 향은 왜 지금 와서

진하게 여운을 남기며 그녀의 발목을 잡는 것인가.


“당신, 늦기 전에 이곳을 떠나,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대로 살아.”


마나츠가 왼손을 내밀었다.

왼손잡이 하즈키를 마지막까지 배려하는 몸짓이다.

하즈키는 그녀의 어깨를 이끌어 안으려다 그만둔다.


“정말 갈게.”


“데려다줄 게.”


마나츠가 뒷걸음치며 그를 막아선다.


“제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둬
대신 내가 눈치채지 못하게

커튼 틈으로 배웅해 줘 갈게.”


마나츠의 발소리는 당당하고 가볍다.

잠시 후, 하즈키는 커튼 틈 사이로 그녀를 배웅했다.

마나츠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하즈키가 자신을 엿보고 있는 기분을 만끽하고 싶었다.

늘 자신이 했던 저 행동을 곱씹으며

쓸쓸함을 다시 곱씹는다.

불 꺼진 창문의 어둠은

꼭, 그 같아서 가슴이 아팠다.


‘당신에 대한 내 사랑을, 나는 잊어도 그 사랑은 잊지 마.’


집 외관에 덧대진 나무의 색이 바래

회색빛마저 감돌았다.

비에 젖은 나무는

다신 회복되지 않을 것처럼 병들어 있었다.


마나츠가 떠난 후, 집 안은 더욱 적막에 휩싸였다.

더 이상 주방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

미네코가 억지를 부리는 잔소리,

나오코의 이죽거리는 웃음,

하즈키와 마나츠의 달콤했던 속삭임,

정적이 흐르는 지금 어쩌면 이 상황이 정상이다, 고

생각할 정도로 마나츠는 이곳에서

살았던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다.

마나츠의 흔적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타다요시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다.

마나츠의 빈자리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는지,

며칠 전부터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더욱 그를 괴롭혔던 건

예전처럼 늦은 퇴근 시간과 얼굴과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하즈키의 모습이다.


말 없는 타다요시의 입술은 더욱

움직이지 않는 시간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타다요시는 부쩍 몸이 쇠약해지기 시작했고,

겨우 하루를 앓던 시간은 길어졌고

몇 날 며칠이 되고 있었다.


하즈키는 타다요시의 건강에 대한

심각성을 금방 알아차렸다.

타다요시가 늘 집을 비우던 그 시간은

미네코를 힘들게 하려던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한 배려였다는 것 또한, 알게 되었다.


타다요시는 깊이 병들어 있었으며

때를 기다리는 것만 할 수 있었던 상태였다.

누워 지내는 시간이 늘었고

자연스레 병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중 누구 한 명, 이라도

그를 질책도 원망도 하지 않았다.

그의 눈이 왜 그렇도록 불분명한 초점을 하고 있었는지

알아차리지 못한 그들은

소리 없이 자신들을 원망할 뿐이다.


의사의 잘못 없는 미안하다는 말에

소리 없이 진행해 온 암 덩어리에

불복할 수 없는 미네코는

이리저리 바쁘게 뛰어다녔다.


밤을 새우며 고통에 몸부림치다

약에 지쳐 잠든 타다요시를 멍하니

보고 있는 일이 잦았고,

좋다는 온갖 알 수 없는 명사를 갖고 있는

것들을 해다 먹이고 또 재우고

또 달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타다요시는 절대 그녀에게 하지 말라,라는

말을 하지 않았고, 그만 먹고 싶다, 는

거부의 말도 하지 않았다.


출처 없는 것들을 갖고

입에 넣어 주면 넣어 주는 대로

받아먹기만 할 뿐이다.

그 모든 날을 회상해 보면 타다요시는

미네코를 굉장히 사랑했던 것이 분명하다.


만약, 최후의 몸부림조차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면

미네코 또한 마음에 암 덩어리와

싸웠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미안하다는 말밖에 몰랐던 많은 의사가 암시한

그의 시간은 조금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다.


무슨 이유에서 인지, 아님 미네코가 들이대는

이상한 냄새를 뿜어 대는 약재들 때문인지,

그는 예정된 시간을 훌쩍 뛰어넘고 있었다.

이상하게 들릴 수 있는 얘기지만,

미네코는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된 그 때문에

어느 세월보다 더 끔찍하게도 행복해 보였다.


미내코가 몸에 좋다는 그 무언가를 위해 집을 비우는 날이면,

하즈키는 오랫동안 곁을 지켰다.

그는 타다요시가 아닌 것처럼

몹시 낯설 정도로 말라 있었다.

오랫동안 타다요시를 바라본 건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었다.


아버지의 노랗게 바래진 눈은,

솟은 핏줄과 초점 없이 마구 굴러갔다가,

시간이 걸려서야 아들의 얼굴을 찾는 눈,

거친 숨소리, 그 모든 것들과 마주했다.

그렇게 몇 년의 세월을

암세포와 홀로 살아온 것이다.

그런 타다요시가 아들을 바라보며 미소 짓는다.

말라비틀어진 검은 입술은

아들이 아무리 닦아 내도 붉어지지 않았다.


“왔구나…”


자리를 지킨 지 한 시간을 넘어선 아들을

이제야 알아본다.

타다요시의 목소리는 하루가 온전히 다 지나가는

속도의 소리를 내며 말한다.

하즈키는 대답할 수가 없다.

아버지는 아들을 볼 때마다 아들의 텅 빈 옆자리를 보며

모든 것을 잃은 듯한 표정을 짓곤 했다.

그럴 때마다 옥죄여 오는 책임감에 대한 죄책감은

누구에 대한 반성인지 분간이 가질 않는다.

어쩌면 모든 시작이 안타까운

타다요시를 위한 시작이었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쳐 지나갔다.

마나츠는 정확히 그들을 보고 있었고,

그녀가 떠나라고 했던 말 또한 정확히 맞는 부분일 것이다.


타다요시는 보름이 넘는 시간 동안 의식이 없었다.

오래된 고통의 끝을 맞이한 사람처럼 평온했다.

나오코는 대답 없는 의붓아버지의 귀에 대고

책 속의 클라이맥스를 아주 맛깔스럽게 읽어 내려갔고,

하즈키는 내내 거실 바닥에서 귀를 쫑긋거리며 잠을 청했다.

미네코는 그날 밤도 타다요시의 등을

내내 바라보며 쪽잠을 청하고 있었다.


새벽 두 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하즈키 또한 넋을 놓고 미네코의 등을 바라보았다.

마치 도미노를 연상시키는 그림과 같다.

엄마의 물건에 손을 댈 때마다,

미네코를 미워했던 모든 감정들을

토해 내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움에 치를 떨었다.

미네코는 세상을 먼저 떠나 타다요시를 힘들게 했던

엄마보다 더 완벽한 아내일 것이다.


미네코가 인기척에 뒤를 돌아보았다.

어둠 속에서 잘 보이지 않았던 미네코는

아마도 쓸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던 것 같다.

미네코는 끊임없이 타다요시의 등을 쓰다듬었다.


그들의 주말 아침 풍경은 당연히 달라졌다.

누가 먼저일 것 없이 타다요시의 호흡을 확인하느라,

코 밑으로 검지를 쭉 뻗는 것은 무언의 첫인사다.


이른 아침부터, 다시는 보지 못할 것 같았던 마나츠가

현관문 앞에 자리하고 있었다.

무슨 이유에서 인지, 마나츠가 그렇게 서 있었고,

아주 자연스럽게 부엌으로 달려가

앞치마를 두르고, 달그락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하즈키는 마치 마나츠를 처음 보았을 때처럼

심장이 뛰고 있었다.

병에 지쳐 누워 있는 타다요시에게

죄책감을 느낄 정도로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미네코는 그날은 타다요시가

고통 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날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타다요시는 마나츠가 굉장히 보고 싶었을 것이라며

혀를 쯧쯧, 거리며 하즈키를 원망이라도 하는 듯 말했다.


미네코의 간단한 설명으로도 눈치 빠른 마나츠는

그들을 위해 발을 디뎠다.

마나츠는 늘 그런 여자였다.

그날은 다행히 나오코는 이죽거리지 않았고,

\그녀답지 않게 고맙다는 말의 발음을

흘리듯 말하며 마나츠 곁을 지나다녔다.

그날따라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주말 아침을 비추는 햇살도

그들을 축복해 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울리지 않은 행동이지만,

하즈키는 여유를 부리며 녹차를 마셨다.

오랜만에 마주 앉은 마나츠는 정말 아름다웠다.

구름 한 점 없는 영원히 고통이 없을 것 같은

이기적으로 아름다운 파란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때 갑자기 타다요시의 신음소리가 들렸다.

아주 작은 소리지만 그들은 들을 수 있었다.

그가 깨어난 게 분명하다.

미네코가 급히 나오더니 하즈키에게 얼른 들어가라며

바쁘게 손짓한다.

그 손짓의 의미가 무엇인지 너무 잘 전해져서

찻잔을 들고 있는 하즈키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머뭇거리는 그를 마나츠가 손을 이끌어 타다요시에게 다가갔다.


타다요시의 초점이 정확히 하즈키를 바라보았고,

텅 비어 있었던 자리를 채우고 서 있는 마나츠도 훑어보았다.

타다요시는 분명히 작게 미소 짓고 있었다.


하즈키의 머리가 잠시 어지럽다.

아무 말도 남기지 않고 몰래 떠난 엄마가 생각났다.

말없이 가버린 엄마를 오랫동안 용서할 수가 없었다.

아니, 용서보다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또래의 아이들보다 늦은 걸음마에

엄마의 손은 하즈키의 걸음마 연습 중

기댈 수 있는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하즈키는 그 손으로 자기의

뺨이라도 어루만져 주길 바랐다.

어린 하즈키의 생각에

어른들이 수없이 내뱉는 죽음이란 단어에

그날 밤은 엄마에게 죽음이 올 것이란 것을

미리 짐작하고 있었다.

몰려오는 잠을 이기며 엄마 곁을 떠나지 않으려

애를 썼지만, 완강한 엄마의 고집은

그때도 꺾을 수가 없었고,

끝내 엄마는 어린 하즈키를 밀쳐 내고

하즈키가 잠이 들었을 때 그렇게 떠났다.


그때 엄마의 따뜻한 손바닥 느낌은

아직도 생생하게 느껴졌다.

많은 어른이 웅크리고 있던 하즈키가

들을 수 없다 생각이라도 했을까,

아니면 죽음을 모른다고 생각했을까,

네 살배기 어린아이가

저 모습을 어떻게 이해하겠느냐,

아이만 불쌍하다, 고 쑥덕거리기만 했다.


그렇게 엄마의 장례식이 시작되었고,

어린 하즈키는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 시간 속에

자신만의 시간 속에 갇혀서

장례가 끝날 때까지도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타다요시가 억지로 잡아끌었을 땐

이미 정신을 잃고 자지러졌기 때문에

그를 다독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눈을 떴을 땐 관 속의 엄마도 사라지고 난 후였다.


스무 살이 돼 서야,

그렇게 가버린 엄마를 이해할 수 있었고,

아니 죽음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그때 타다요시가 건네준 사진이

어린 하즈키가 눈에 담을 수 있는

마지막 엄마 얼굴이었다.


어린 하즈키를 앙상한 무릎 위에 앉혀 놓고,

화사하게 웃고 있는 얼굴이다.

그때의 뾰족했던 그녀의 무릎뼈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다.


타다요시는 사진을 찍어야 하는데

눈을 제대로 뜨고 있지 않았고

어딘가 불편해 보였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타다요시는 사진 한 장을 어렵게 남기고

끝내 뒤돌아서서 가슴을 부여잡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타다요시가 누워 지내는 날이 많아진 이후,

방에서 풍겨오는 냄새는

시간이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꼭, 한 번은 발을 디딜 때마다

미간은 그냥 넘어가질 않는다.


온갖 약봉지들과 미네코가 쌓아 놓은 알 수 없는 약재들,

몇 개의 수건, 찌그러진 주전자와

나란히 줄을 맞춰 있는 두 개의 컵,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을 정도로

눈에 다시 들어온다.


타다요시의 베개는 그의 얼굴처럼 노랗고 거뭇했다.

나오코는 여전히 아버지의 손을 꼭, 잡고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투사처럼 그의 곁을 지키고 있었고,

표정 또한 비범했다.


타다요시는 약간의 표정을 남기는 듯, 했지만

금세 잠이 들어 버렸다.

나오코는 마나츠를 한 번 흘긋하더니,

하즈키에게 자신의 자리를 순순히 넘겨주곤

하즈키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마나츠는 한 참 큰 어른의 모습을 하고

지나치는 나오코를 볼 때면

가끔 친해지고 싶은 호감을 느끼기도 했다.


지금껏 타다요시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본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날 하즈키는 타다요시의 얼굴을 아주 오랫동안

자세히 들여보았다.

셀 수 없는 주름이 마치 경쟁이라도 하는 듯,

더욱 길게 높게 움푹 파인 채 뻗어 있었다.

마치 미로 찾기 게임을 하는 것 같았다.

타다요시의 모습은

어느 때보다 더 평안해 보인다.

하즈키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엄마가 죽는 날,

아버지는 심장이 정말 멈췄었다고 했는데...”


하즈키의 말끝에 신음이 얕게 따라온다.

타다요시가 가래가 가득히 쌓인 목소리를

천천히 뱉어냈다.


“하즈키…”


하즈키는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자꾸만 손이 떨렸다.

그의 뺨에 손을 뻗어 보지만

하즈키의 초점 또한 맞지 않는다.

다시 어렵게 타다요시의 눈이 열린다.

방금 눈을 뜨고 바라본 아들의 얼굴을

아주 오랜만에 본 것처럼 미소가 돌았다.

뺨에 닿다 만 손으로 그의 손을 꼭 잡았다.

하즈키의 손은 그의 손보다 더 차고 더 떨렸다.


“하즈키, 피곤하구나…”


타다요시의 목소리는

마치 주름과도 같이 몇 갈래의 소리를 냈다.

아들은 미동도 없다.

마나츠가 타다요시의 귀에 대고 천천히 말했다.


“늘 하즈키 곁에 있을게요.”


고개를 끄덕이는 것도 그에게는 버거워 보였다.


“난 이제 쉬고 싶…”


타다요시가 눈을 감고 한참 뒤,

허공에 대고 손가락을 힘겹게 뻗는 동작을 하더니,

금세 힘이 빠져 털썩,

소리와 함께 손을 떨궜다.


마나츠는 깜짝 놀라, 미네코를 불렀고,

하즈키는 역시 미동도 없다.

하고 싶었던 모든 말들이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았음을 원망할 뿐이다.

그의 귀에 대고 나지막이 속삭인다.


“저를 용서하세요.”


미네코가 빠르게 다가와 그를 일으켜 안더니

그의 얼굴을 사정없이 보듬었다.

미네코가 손으로 타다요시를 보듬을 때마다

이상하리만큼, 다시 혈색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아버지의 죽음 보다 더 미네코에게 눈이 돌아갔고,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마치 아기를 요람 태우듯,

그를 안고 보듬기를 반복했다.

미네코가 정신 잃은 사람처럼 주절거렸다.


“여보, 그 사람 만났어요? 으억, 잘 가요 잘 가…
나 기다려 줄 거죠? 잘 가요, 여보.”


미네코는 다시 타다요시를 부둥켜안고

넋 나간 얼굴로 아이를 재우듯, 요람을 태운다.

그렇게 한참을 그 누구도 그에게서

미네코를 떼어 놓지 못했다.


하즈키는 현실감을 잃었고

눈물 한 방울을 떨어뜨릴 수가 없었다.

엄마가 죽음을 맞이할 때와같이

수군거리는 사람들은 아들을 비꼬기에 이유가 적당했고

매정한 사람이라며 아들의 귀에 들리도록

바늘 같은 말들로 그를 괴롭혔다.


하즈키는 장례가 끝나고,

한참 동안 잠을 자지 않았다.

눈 밑이 보라색으로 물들어

깊이 파일 때까지 잠들지 않았다.

물론, 먹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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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나츠의 위로도 필요 없었고,

겐토의 격려와 질책도 필요 없었다.

작은 빛이 통과하지도 못하게

모든 틈을 막아 버렸고,

닫을 수 있는 문과 창문 또한

모두 닫아 버렸다.

오로지 심장 하나만

열린 채 어렵게 숨을 쉬고 있을 뿐이다.

그 누구도 들어갈 수가 없다.

달빛조차 들어올 틈을 주지 않았다.


나오코의 방에서 피우는 잠잠하던 향내가

다시 온 집안을 뒤덮기 시작했다.

온 집 안의 나무로 된 모든 것들이 바싹 메마르기 시작했다.

마나츠가 잠깐 집 안을 들를 때면

잠시나마 음식 냄새가 풍기긴 했지만,

그것도 잠시,

끊임없이 피워 대는 향으로

안개처럼 덮이고 살아 움직이는 건

오래된 나무를 갉아먹는 벌레뿐,

먹지 않은 음식은 수없이 되풀이하며 버리기 일쑤다.


달빛도 체념했는지

하즈키의 집을 피해 빛을 비추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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