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사라세니아
바싹 마른 나뭇잎을 만지면 부서지듯,
하즈키의 감정과 행동은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산산조각 날 것만 같았다.
타다요시는 길었던 계절을 마치고
반복되는 또 한 번의 눈과 또 한 번의 꽃들을
보지 못한 채 떠났다.
한 편의 벚꽃도 활짝 웃어 주질 않았고,
몽우리조차 꽁꽁, 얼어붙어 있을 때였다.
미네코는 마나츠의 끊임없는 돌봄으로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는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물론 미네코가 말하길 자신의 나이도 만만치 않다,
그리고 타다요시에게 돌아가는 길이 그리 멀지 않다고 말했다.
마나츠는 미네코가 시어머니의 자리에 있을 때,
미네코의 진심조차도 진심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마지막 남은 아이에 대한 희망이 사라졌다는 순간,
더 그렇게 부정했었다.
하지만 며느리도 하즈키의 아내도 아닌 모든 역할이
사라진 지금, 마나츠는 진심으로 미네코를 걱정하고 있었다.
집 안에는 정리되지 않은 옷가지,
채 걸어 놓지 못한 빨랫감, 더 안타까웠던 건,
하루의 반을 차지했던 미네코의 뜨개질이 멈췄다.
오랜 시간을 누워 지내던 타다요시 옆을 지키며,
쉴 새 없이 속삭이며 하던 일이었다.
미네코 그녀답지 않게 모든 것이 엉망진창,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마나츠의 집안 살림을 살피면서 조금의 티끌도 용납하지 않던
미네코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그렇게 매일 무기력한 하루를 보내 다 열에 들뜬 감정에 지쳐 잠이 들었다.
마나츠는 빠르게 움직였고, 조용한 깃털처럼 굴었다.
우선 쌓인 그릇을 달각거리는 소리 없이
조용히 닦아 엎어 놓고,
엉킨 옷가지들은 차곡차곡 개켜 두었다.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한 실뜨기 상자는
미네코가 제발 봐줬으면 하는 마음에 가지런하게
정리를 해 두었다.
완성된 것 중, 구깃구깃, 쑤셔 놓은 것들을 모아
다림질을 시작했다.
마나츠는 연신 감탄사를 소리 없이 연발했다.
미네코가 수를 놓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 왜,
단 한 번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에
미안함이 앞섰다.
미네코의 솜씨는 굉장히 수준급이다.
하즈키의 모습을 완벽히 종이 위에 그려 넣은
나오코의 솜씨를 생각해 보니 미네코의 우월한 유전자만 쏙,
빼닮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오코를 생각하니, 마나츠의 감정은 잠들어 있던
부러움과 질투심이 잠시 들썩였다.
마나츠는 아직도 남은 감정에 한탄을 느끼며 피식, 웃는다.
한참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마나츠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더 이상 찾아오지 말라던 미네코의 말을 들을
그녀가 아니었기에 마나츠에게 일부러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보기 싫은 것보다, 미안함에 앞서 얼굴을 비추지 못한 게 가장 컸다.
가족의 구성원에서 빠져나간 마나츠를,
타다요시의 죽음으로 붙잡아 둔다는 건,
아니 위로받는다는 건, 말이 되지 않은 욕심이기 때문이다.
물론, 마나츠로 인해 달라질 것들은 수없이 많았지만,
언제까지 그녀에게 티 내지 않고, 안 그런 척,
기댈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방법은 딱, 하나다.
미네코가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루빨리
벗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모습을 본다면 마나츠도 더 이상
발을 들이지 않을 것이다.
미네코 또한 하즈키가 마나츠에게 느끼는 죄책감처럼
다르지 않은 죄책감을 느꼈다.
미네코의 수면은 타다요시가 사라지고 난 후부터 쭉,
한 시간을 채 온전하게 빠져들지 못했다.
잠을 자기 위해 먹었던 수면제는
더 이상 듣지 않는 듯하다.
산소가 모자란 것처럼 머리만 지끈거릴 뿐이다.
벽에 걸어놓은 거울로 보이는 미네코의 얼굴은
멀리서도 무지막지한 어둠이 보였다.
정말이지, 집 안의 적막함은 바퀴벌레가 기어가는 소리도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방문을 열자마자, 마나츠가 부린 솜씨의 된장국이
구수한 냄새를 싣어 날랐다.
사라졌던 식욕에도 입안에 고인 침은
모른 척할 수 없는 모양새다.
미네코는 한참을 멍하니 서서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다.
된장국 냄새는 제대로 된 이성적인 감정을 끌어내는
마법의 냄새다.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두근거림이 새로운 삶을 시작할 공포스러움인지,
설렘인지, 알 수가 없다.
자리에 앉고 한 참을 진정시키느라 일어설 수가 없었다.
된장국 냄새는 더욱 진하게 콧등에 자리 잡는다.
하즈키의 병가는 생각보다 오래갔다.
더 이상 회사에서도 그를 봐줄 수 없는 입장이다.
아마도 회사를 다시 다닐 수는 없을 것이다.
그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회사에서 책임감 없이 행동하는 그를 반기지 않을 테니 말이다.
하즈키는 가끔 공원을 배회하는 것을 제외하고,
통 몸을 움직이지 않았고, 방 안에 머물러 있었다.
미네코는 하즈키 방 안의 커튼은 아마도 밖의 어둠과 빛을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타다요시가 허공으로 사라진 이후에
하즈키를 대하기가 겁이 났다.
어찌 보면 한 사람의 꺼진 불씨는
지독하게도 남이라는 사실을 실어 날랐기 때문이다.
미네코는 언제든 쫓겨날 수 있는 상태라 생각했고,
하즈키가 자신을 미워한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하즈키가 눈에 보이지 않아도,
눈치가 보이는 건 사실이었다.
어쨌든 지금 상황에서 더욱 신경이 쓰이는 건,
친 자식이 아닌 남편이 남기고 간 의붓아들이다.
미네코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더니,
다짐이라도 한 듯, 2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쩔 수 없는 집안의 낡음은 지금도 미네코를 끼익, 하는
소리로 못살게 굴었다.
어쩐 일인지, 하즈키의 방문이 열려 있다.
하즈키는 절대 실수라도 문을 열어 놓는 법이 없었다.
낯선 광경이다.
나오코 방에서 풍겨오는 향 피우는 냄새가 코를 찌른다.
타다요시가 수리한 방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의 섬세함이 자신의 손끝에 닿는 것 같아 다시
코끝이 찡, 하며 매운 눈물이 맺혔다.
어느 것 하나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것은 없다.
웬일로 열린 문틈으로 보이는 하즈키는 벽을 바라보고 있었고
눈을 감은 건지 잠이 들었는지 알 수는 없다.
웅크리고 있는 하즈키의 등은 절망의 크기를 말해 주고 있었다.
위로의 말소리를 들려주며 하즈키의 등을 쓰다듬어 주고 싶지만,
그런 적이 없었을뿐더러, 그 낯섦에 화들짝 놀랄
그를 생각하니 말도 안 되는 행동일 뿐이다.
어쩔 수 없는 하즈키와의 관계에서는 아픔을 공유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네코는 나오코를 선택했다.
나오코라면 하즈키를 일으켜 세 식구가 함께
마나츠가 끓여놓고 간 구수한 된장국을 맛볼 수 있는
시간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가득 피워 놓은 향 때문에 화가 나긴 했지만,
침을 꿀꺽, 하고 삼켰다.
화가 내려가지는 않은 것 같았지만,
지금만은 나오코에게 화를 내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자꾸만 웅크리고 있는 하즈키의 등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오코의 방 문 문고리를 비틀었다.
역시 잠겨져 있었고, 미네코의 입에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후…”
나오코의 방문을 손톱 끝으로 문을 두드려 보았다.
화를 내지 않을 수 있었던 자신감이 빠르게 사라지더니
잠겨 있는 문마저 부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향을 피워 내는 냄새는 더욱더 머리칼을 서게 만든다.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다.
쉽게 마음먹고 계단을 밟은 게 아니기 때문에
환장할 노릇이다.
나오코의 잠긴 문을 뒤로하고 다시 조심스럽게
하즈키에게 다가갔다.
최대한 가느다란 목소리를 낮고 굵게 천천히 소리 내 보았다.
다행히 그는 놀라지 않은 듯 고개를 돌렸다.
“하, 즈키.”
하즈키가 몸을 더욱 웅크렸고,
그 모습에 미네코의 용기는 하늘을 찔렀다.
“하즈키?”
내친김에 그의 어깨를 세차게 흔들어 보았다.
“하즈키 고개 좀 들어봐.”
드디어 그가 몸을 일으켰다.
벽에 기대어 미네코를 바라보았다.
미네코는 애원하듯 말했다.
“밥, 먹자.”
하즈키의 얼굴에는 미세한 떨림조차 없었다.
보통 때에도 마른 몸을 가지고 있었던 그의 몸은
심각해 보였다.
하즈키 앞에서 대답 없는 대화를 기다려봐도
소용이 없을 것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미네코는 포기하지 않을 작정이다.
“마나츠가 왔었어.”
그 말은 마나츠가 하즈키, 너 때문에 오늘도 왔다는 뜻이다.
조금이라도 더 그에게 부담을 줘야
일어설 수 있을 것이다.
미네코는 타다요시의 말투를 따라 하며 약간의 강인함을 비추려 애를 썼다.
“내려가서 기다리마.”
미네코는 다시 한번 열리지 않는 나오코의 방문을 확인한 채
쥐 죽은 듯 계단을 오를 때와 다르게 소리를 내며
이 집은 사람이 사는 집이다,라고
소리 지르는 것처럼 쿵쾅거리며 걸었다.
미네코의 행동이 낡은 나무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차곡차곡 쌓여 있는 자수 완성품들이 미네코의 눈에 들어왔다.
마나츠가 가족이 되지 못한 것에 대해
또다시 아쉬움을 느끼는 순간이다.
진심으로 마나츠가 고맙다.
그녀가 며느리로서 가사를 할 때와는
전혀 다른 가지런한 모양이다.
그것은 아마도 미네코를 무척이나 배려했다는 뜻일 것이다.
복잡하게 얽히고 지쳐 있는 감정들의 체증이 싹,
가시는 것 같았다.
타다요시가 사라지고, 두 달이 지나고 나서야
느끼는 신선 함이다.
미네코는 식탁 위에 가지런히 젓가락을 놓는다.
나오코, 하즈키, 그리고 자기의 것을 놓으며
당연한 쓸쓸함에 타다요시의 젓가락도 들었다.
흰쌀밥의 윤기는 탐날 정도로 반질거렸다.
금세 데워진 된장국을 담아내고,
간장에 조려 놓은 돼지고기와 채소를 담아냈다.
하즈키가 가장 좋아하는 달걀말이도 빼놓지 않았다.
마나츠의 솜씨는 다시 한번 생각해도 가족이 아님을 아쉽게 만들었다.
조금, 의아한 점은 마나츠의 행동으로만 보면
그들의 사랑이 아직도 유효할 수도 있지 않나,라는
긍정적인 생각이 들었다.
정확하지는 않았지만, 아이를 갖지 못한다는 이유로
서로 헤어지기엔 미네코의 감정도 안타까움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휴우…”
주방 선반 유리에 유령 같은 얼굴이 잠시 스쳤다.
미네코는 유령같이 머리칼을 풀어헤치고 있었고,
끈적함은 보너스다. 고개를 저으며 재빨리 고무줄을 찾아
머리카락을 질끈 묶고, 손바닥을 쓱쓱 비벼 온기를 불어넣고 마른세수를 했다.
억지스러운 생기가 도드라지기를 기다렸다.
미네코가 하즈키에게 겁을 먹은 것은 사실이지만,
남편을 꼭, 닮은 남편의 아들을 진심으로 챙겨주고 싶었다.
그런 하즈키가 함께 해주길 바라며 오랫동안 앉아 기다렸지만,
된장국에서 올라오던 뜨거운 김이 점점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미네코는 타다요시가 저녁 시간을 지키지 않고 들어오지 않을 때가 생각났다.
그때도 식은 국을 다시 끓이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그가 집에 들어오지 않았던 이유가
전남편처럼 여자 때문인 것이라고,
생각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남편은 가족들에게 고통을 숨기기 위해서,
무슨 짓이든 다 할 사람이었다.
항상 부족했다고 생각했던 타다요시의 사랑이
이제 와서 이렇게 풍족하고 분에 넘치다니,
안타깝고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마치 내내 철들지 않았던 나이만 많은 자신이
제대로 나이를 먹고 있는 것처럼,
다른 사람으로 바뀌어 가는 기분이 들었다.
미네코는 붉어진 콧등을 훌쩍, 하며
다시 국을 냄비에 부어 끓이기를 반복했다.
절대 귀찮거나 화가 나거나 하지 않았다.
뜨거운 김은 다시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순식간에 마술 같은 일이 벌어졌다.
현관문을 열고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녔는지 모를 기이한 딸,
나오코가 들어오고 있었고, 벌써 일 층까지 내려와 있는
하즈키의 하얀 양말의 검게 때 탄 부분이 삐죽, 보였다.
나오코는 집 안에 들어오자마자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묶어 올린 미네코의 모습을 보고
소리 없이 입을 벌려 댔고, 코를 자극하는 냄새에
콧구멍도 함께 벌렁거렸다.
그들은 아무 말 없이, 누가 먼저 말할 것 없이,
자신들의 지정된 자리에 자연스럽게 앉았다.
미네코는 기쁨보다 더한 낯섦에 웃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 웃음은 타다요시가 만들어 놓은 가족이라는 행복의 단어였다.
오랜만에 보는 기이한 나오코의 얼굴은 시커먼 그을음을
어디선가 덕지덕지 붙이고 있었고,
하즈키는 마치 남편의 모습으로 둔갑한 유령처럼 보였다.
미네코의 손톱은 색이 빠진 매니큐어가 군데군데 붙어 남아
지저분해 보였다.
미네코가 먼저 된장국을 들어 올려 마셨다.
“후루룩, 후루룩.”
더디기는 했지만, 나오코와 하즈키의 모습도 덩달아 후루룩거렸다.
나오코는 내내 하즈키의 눈치를 살피며 그가 음식을 삼켰는지,
확인한 뒤, 자기 입에 음식을 가져간다.
내내 술만 마시고 버텼던 몸이라,
많은 양의 식사는 못했지만,
조금의 걱정은 덜어낼 수 있었다.
미네코는 마나츠의 달걀말이를 하즈키에게 밀어 놓았다.
하즈키의 눈은 그곳에 멈추지만, 된장국만 마실 뿐,
손은 가지 않았다.
기이한 딸, 나오코가 다시 그의 눈치를 살피며
달걀말이를 이번엔 그의 밥 위에 올려놓았다.
하즈키가 혹시 화를 낼까, 도 생각해 봤지만,
역시 하즈키는 나오코에게 약한 부분이 있다.
하즈키의 입만 바라보던 나오코는 그가 달걀말이를
오물거리는 모습을 보며 젓가락을 놓았다.
나오코는 약간의 미소를 띠며 입을 오물거렸다.
미네코는 그 모습에 감격이라도 한 듯, 연신 고개를
돌리는 척을 했다.
아주 오랜만에 듣는 기이한 딸의 목소리가 들렸다.
“잘 먹었습니다.”
미네코는 그때 나오코와 눈을 마주치지도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았지만, 나오코는 기분 나쁘지 않았다.
발소리를 통통거리며 걷는 소리가 또 한 번 적막을 깨트린다.
다시는 바퀴벌레가 기어가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다.
통통거리는 소리마저 이렇게 소중하게 들릴 수가 있는지 의아하다.
미네코는 생각했다.
전부를 의지했던 타다요시가 사라졌지만,
더 이상 나빠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차곡차곡 쌓여 있는 자수로 된 완성품을 보니
상상치도 못할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계속 살아간다, 는 긴장감에 침이 꼴깍, 하고 넘어간다.
느릿느릿 움직이던 하즈키의 입에서도 목소리가 나왔다.
“잘 먹었습니다.”
처음 보는 하즈키의 옆모습은 남편의 얼굴과 똑 닮아 있었다.
찻잔을 꺼내는 미네코의 손을 보았음에도
하즈키는 다시 이층으로 올라섰다.
미네코는 차를 마시는 것까진 기대하진 않을 작정이다.
다시 잔을 집어넣으며 숨을 들이마셨다.
귀퉁이에 남편의 낡은 찻잔이 쓸쓸히 버티고 있었다.
차디찬 겨울의 긴, 석양이 들어와 타다요시의 남은 잔을 비춘다.
하즈키의 방은 미네코의 생각대로 공기마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어 보였다.
바닥에는 술병과 먹다 남은 과자 땅콩 부스러기가
떨어져 있었다.
땅콩 부스러기는 한 군데 모여 있지 않고 날리듯,
사방으로 퍼져 있었고,
그 광경이 얼마나 한심스러웠는지, 헛웃음만 나왔다.
하즈키는 투명한 갈색 액체가 남은 병을 들고
일 층 주방으로 내려갔다.
차를 마시고 있던 미네코와 눈이 마주쳤지만,
그녀는 일부러 모른 척, 해주는 듯했으나,
반가워하는 눈빛의 느낌은 지울 수가 없다.
미네코는 마나츠가 정리해 놓은 실들을 고르며 생각에 빠졌다.
타다요시가 죽은 후, 실에 손을 대는 미네코의 모습은
처음 보는 광경이다.
하즈키는 일상에 발을 들여도 되는지,라는 생각에
잠시 타다요시가 앓던 병에 대한 통증이 전해지듯,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기 시작했다.
술병을 주방 귀퉁이에 몰아넣고, 천천히 계단을 오른다.
미네코의 눈은 당연히 하즈키의 눈이 보이지 않는
뒷모습에 꽂혀 있었다.
어제 보다 펴진 것 같은 그의 등 모양에
잠시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타다요시의 사진 앞에 꽂아 둔, 향이
굉장히 빠른 속도로 타들어 갔다.
알사탕
국숫집 아주머니는 나오코가 들를 때면 꼭,
꽃이 그려진 사기에 국수를 내온다.
아주머니는 말하지는 못해도 동그란 눈동자로
상대방의 입 모양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상대방이 말하는 동안은 절대 눈을 깜박이지 않았다.
나오코는 아주머니가 좋다.
말하지 못하는 아주머니를 보고 대화를 하면,
조금 이기적이긴 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답을 얻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나오코는 어차피 아주머니가 보여주는 수화를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주머니 또한 이제는 나오코 앞에서 수화를
해 보이지 않았다.
어눌한 입 모양, 손짓, 몸짓으로 해 보이는 답은
모두 나오코에겐 긍정의 메시지였다.
정확히 알 수 없는 메시지이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이곳에서 나오코는 굉장히 솔직하고 순수한 어린아이가 된다.
“후룩, 후루룩, 하아, 맛있다.”
수증기가 가득 차 있는 가게 안의 모든 유리에는
물방울이 방울방울 맺혀 있다.
나오코의 입에서도 따뜻한 입김이 한가득 나왔다.
아주머니는 늘 그렇듯, 나오코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고
하회탈처럼 미소 짓고 있었다.
나오코가 느릿느릿, 천천히 말했다.
“아주머니, 하즈키가 미쳤어요.”
여주인의 눈은 놀란 듯, 나오코를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하긴, 아빠가 죽었으니까…
그런데 난, 진짜 아빠가 죽었을 때
하즈키 같진 않았거든요.”
나오코는 남은 국물을 마저 입에 털어 넣었다.
“하… 타다요시는 진짜 좋은 아빠였어요,
그래서 나도 슬퍼요.”
나오코의 눈시울이 금세 뜨거워짐을 느꼈다.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 있던 아주머니는
나오코의 앞에 앉아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주머니의 손은 거칠었지만, 정말 따뜻했다.
“그래서 더욱 기도를 열심히 하고 있어요,
곧 좋아질 거라 믿어요
사실 나아지고 있긴 해요,
내 기도는 언제나 그랬거든요.”
아주머니는 나오코의 입술이 천천히 말하는 것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오코는 입구 천장에 달린 두 눈을 부릅뜬
말린 생선에 시선을 두었다.
생선에 실타래를 묶어 매달아 놓은 것을
손으로 가리키며 두 손을 모으고
잠시 눈을 감고 기도를 하는 듯한 모습을 했다.
나오코는 역시 아주머니는 자신을
이해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꼭,
같은 모습으로 두 손을 모았다.
“아주머니, 다음에는 꼭, 제정신인 하즈키를 데려올게요.”
아주머니가 고개를 끄덕이며, 주머니 속에서
사탕 두 개를 나오코 손에 쥐여 준다.
“우와, 딸기 맛 사탕이다, 힛 감사합니다.”
나오코는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의 감탄사를 뱉었다.
나오코에게 달콤함은
행복이라는 단어와 함께 떠오르는 맛이다.
하즈키에 받았던 캐러멜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아주머니는 문을 열어 놓은 채 찬 바람을 맞으며
그녀가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았다.
언제나 그 집을 나설 때면 아쉬운 마음에
다시 뒤돌아보는 모양새가 몸에 배기까지 했다.
나오코는 이곳을 들를 때면 매번 치호가 생각났다.
국수를 사주지 못하고 돌려보낸 때가 미안함으로 남아서일까,
무조건 나오코를 따르고 편이 되어주던 치호가 생각났다.
사라진 사진관을 찾으러 다니자는 약속도
이제 잊힌 채 버린 약속이 되었다.
나오코는 시간이 조금 지난 후, 확신했다.
치호가 무척이나 좋아했던 자신의 남자 친구가,
나오코에게 몇 번이나 수작을 걸어왔다는 것을 알아 버렸다는 것을.
나오코 생각에 치호는 절대 자신을 보지 않겠다고
생각할 친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나오코가 먼저 치호에게 전화했거나, 찾아갔다면,
치호는 물론 나오코를 반갑게 맞아 줄 것이다.
하지만 나오코는 더 굽어졌을지 모를
치호의 등을 교복을 입었을 때처럼,
아무렇지 않게 바라볼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모든 생각은 나오코의 생각, 추측이지만
아마도 그게 사실일 것이라 믿으며 체념했다.
오늘도, 치호의 집 주변을 수없이 돌다 그냥 지나친다.
녹슨 계단의 울림은 여전히 쾅쾅거렸다.
아직은 바람이 매서워 살갗이 얼얼하다.
한 시간을 배회하고 다녔던 터라 나오코의 코가 훌쩍거렸다.
매서운 한기에 운동화의 고무창도 얼었는지
아스팔트와 만나 딱딱한 구두 굽의 소리를 낸다.
집 안의 따뜻한 공기에 금세 손가락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살구색 두 볼도 지지 않고 달아오른다.
하즈키의 방을 지나치다, 노크를 해볼까, 하며 잠시 망설였다.
거의 한 달 내내 하즈키와 말을 섞지 않았다.
말을 섞는다 해도 그의 절망을 위로해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죽음을 일찍 깨달은 공통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피치 못할 배려일 것이다.
그때 나오코는 뭔가 생각났는지, 일 층으로 조용히 발을 디뎠다.
켜 놓은 텔레비전 속에 잡음과 흰색과 검은색
벌레들이 가득하다.
타다요시의 사진 앞에 피워 놓은 향이
많이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꺼져 있었다.
미네코가 이런 것도 신경 쓰지 않나, 싶어 화가 났다.
성냥갑을 열어 불을 붙이려 하지만 습기로 축축하기만 했다.
차고 바람 부는 건조한 날씨에도 이럴 수가 있나 싶었다.
설령 비가 왔다고 하더라도 성냥갑 전체가 축축할 순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타고 남은 향을 만져 보니 마찬가지로 축축했다.
미네코에게 따지려는 듯, 재빨리 미네코의 방문을 열어 보았지만,
그녀의 모습이 보이질 않다.
나오코의 머릿속에 다시 또 진짜 아빠가
죽었을 때가 떠올랐다.
매일매일 언제나 깊은 새벽이 되어서야
집에 들어오던 엄마 미네코였다.
나오코는 집 안의 서랍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미네코의 방 안까지,
타다요시의 서랍장까지 뒤지기 시작했다.
“하, 찾았다.”
타다요시의 손때 묻은 라이터가 눈에 띄었다.
미세한 소리를 내며 노랗고 주황빛을 한 불빛이 올라왔다.
재빨리 타다요시의 사진 앞에
바삭바삭한 향초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제야 사진 속의 타다요시의 얼굴이 웃었다.
나오코는 재빨리 자신의 방으로 들어와
형광등을 켜곤 기겁하고 뒤로 물러났다.
방 안에 한가득 술 냄새를 풍기며 미네코가 잠이 들어 있었다.
나오코가 어릴 적, 아빠가 죽은 후,
새벽에 들어와 잠이 들던 모양새와 같다.
불단 위를 살펴보니, 잔뜩 피워 놓았던 향이
타지도 못한 채 일부러 꺼 놓은 것이 미네코 짓이 분명하다.
세월이 흘렀다고 그녀를 용서한 게 아니다.
자신의 불단에 손을 댄 모습을 보니,
잊었던 원망들이 살갗 구석구석까지 파고드는 기분이 들었다.
사실 나오코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이런 작아진 미네코의 모습을 더 견디기 힘들어했을 것이다.
“못,, 견, 디겠어.”
타다요시의 재단을 망쳐 놓은 것도 미네코의 짓이 분명하다.
누구의 잘못도 아닌 일은 무조건 미네코의 탓이 되어 버린다.
미네코를 흔들어 깨우고 싶었지만,
피곤한 실랑이를 벌이고 싶지 않았다.
타다요시가 사준 진짜 만년필이 바닥에 나동그라져 있었다.
나오코가 발가락으로 만년필을 이리저리 굴렸다.
형광등을 끄고 벽에 기대어 쪼그리고 앉아
미네코가 일어나기만을 기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새 창밖은 푸른빛이 돌고 있다.
그 색은 느껴보지 않아도
어깨가 저절로 움츠러드는 춥고 쓸쓸한 색을 띠었다.
잠든 미네코의 얼굴에도 푸른빛이 맴돌았다.
금방까지도 새근거리는 숨소리를 내던 그녀가
무언인가에 놀란 듯,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타다요시의 구겨진 얇은 일기장을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혹시나 나오코가 보진 않았을까,
긴장감은 침을 꼴깍, 넘겨버렸다.
다다미 위에 모로 누워 자신이 낳은 것 같지 않은
기이한 딸이 잠들어 있다.
낯선 사람의 얼굴을 구경하듯,
더욱 가까이 다가가 나오코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어릴 적 나오코의 얼굴은 남편의 얼굴을 뒤집어쓴 아이였다.
언제 이렇게 팔과 다리가 길게 늘어났고,
남편의 얼굴을 싹 지워버리고
미네코의 얼굴을 씌어 놓았는지,
그제야 자신이 낳은 딸임을 새삼스러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 나오코의 얼굴을 보며
남편을 떠올리지 않기 시작한 것이 언제인가,
이젠 기억나지도 않은 일이다.
어색한 만족감을 느끼며 딸의 볼을 쓰다듬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길래
시커먼 재를 묻히고 다니는지,
알다가 도 모를 일이다.
긴 한숨이 절로 나왔다.
“후우, 나오코 넌, 대체…”
엄마의 차가운 손길과 도저히 적응되지 않은
남 같은 목소리에 짜증 섞인 얼굴로 일어나
이불속으로 빠르게 몸을 숨겼다.
미네코는 그런 나오코의 행동이 맘에 들지 않아 혀를 찼다.
“대체 어디를 그렇게 헤매고 다니길래
얼굴이 그 모양이니?”
애초에 미네코는 그런 말들을 내뱉을 생각이 아니었다.
생각과 다르게 말이 터지는 것이 맘에 들지 않았다.
나오코가 버럭 화를 낼 것이 뻔했지만,
미네코는 이불을 잡아당겨 보았다.
웬일인지 멀뚱히 보기만 할 뿐,
나오코는 미간이 좁아지지도 않았다.
“어딜 다녀왔어? 묻잖니?’
나오코의 볼이 실룩거리는 것을 보니 할 말이 많은 게 분명했다.
“난, 엄마가 왜 술을 마시고,
왜 남의 방에서 잠들었는지 물은 적 없어
근데, 그 수첩은 뭐야?”
주머니 속에서 삐죽 튀어나온 모서리가 보였다.
“어? 이거 별거 아니야.”
미네코는 모서리가 잘 갈아진 철퇴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나오코의 말 대로 엄마의 손길이 제일 필요했던 시기에
늘 늦는 미네코의 귀가에도 단 한 번도 궁금해한 적도 없었고,
물어보는 일도 없었다.
생각지도 못한 나오코의 압도적이고 사실적인 대답이다.
그래서 나오코의 목소리와 말은
미네코에게 송곳처럼 늘 날카롭고, 아팠다.
“별거 아닌 게 아닌 것처럼 말하네.”
미네코가 오늘 마신 술은 기쁨의 술잔,
그 틈을 타, 딸과 대화도 해볼 작정이었다.
미네코는 수첩을 다시 구겨 넣고 딴 척을 떨었다.
나오코를 기다리는 사이 술잔에 따라내는 술의 수는 늘어났고,
잠은 그렇듯, 사람이 이기지 못한다.
미네코가 원하는 그림은 더 이상 나오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나오코가 예전이나 지금이나 자신을 미워하고
원망한다는 사실을 다시 일깨워 준 셈이다.
미네코는 나오코의 압도적인 말에
대답할 수 있는 자격을 잃어버린 셈이었다.
어떤 말이 나오코를 붙들어 맬 수 있는 말일지,
눈동자가 사정없이 돌아가며 생각하려 애를 썼다.
쓸데없는 짓을 한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굳이 나오코에게 꼭, 말해야만 했다.
그런다고 나오코의 마음은 달라지지 않을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넌 죽은 사람한테 미안하지도 않니?
제발 밖에서 그 엉뚱한 짓 좀 그만하고 다녀.”
검은 재가 묻은 나오코의 볼을 가리키며 더욱 그녀를 몰아세웠다.
“쯧, 엉뚱한 짓 할 시간이면 학비라도 벌어,
그런 모습으로 돌아다니지 말고,
타다요시가 너를 얼마나 생각했는지는 알고는 있는 거지?”
나오코는 이불을 뒤집어쓰려 다 말고
독이 가득한 눈으로 미네코에게 조용히 말했다.
“그게 술 마시고 내 방에서 날 기다린 이유야?”
미네코가 말했다.
“옳은 얘기를 하면 그냥 좀 들어.”
“옳은 얘기라고 했어?
타다요시가 학비를 전적으로 책임져 주는 거지,
엄마 돈은 아니잖아?
엄마도 이제부터는 벌어야 할 거야.”
미네코는 정말 맞는 말에 기가 막혔다.
자꾸만 대화는 이상한 쪽으로 흘러갈 뿐이었다.
“하앗, 나오코.”
나오코가 짧게 말한다.
“그러니까, 그만해 말… 하지 마.”
“넌, 정말이지…”
나오코의 말은 정말 모든 것이 맞다.
미네코는 딸을 위해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다.
더 이상 미네코에겐 나오코가 하는 말 보다
압도적인 말을 찾을 수가 없다.
미네코가 잔을 올려놓은 쟁반을 들고 일어서니,
쟁반 밑에 포개어 놓은 자수를 놓은 완성품이
알록달록하게 모습을 뽐내고 있었다.
나오코는 그것들에 잠시 눈을 떨구고,
이불을 훽, 하고 뒤집어쓴다.
나오코의 그 모습에 도망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아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미네코는 허둥지둥 그것들을 쟁반 위에 담아 도망치듯,
나오코 방을 나와 버렸다.
미네코는 그동안 손수 만든 완성품을
딸에게 내밀며 미래를 얘기해 볼 작정이었다.
그들의 단추는 처음부터 잘 못 꿰어진 게 분명하다.
무슨 짓을 해도 처음 잘 못 꿴 단추는 맞게 떨어질 수가 없는 법이다.
미네코가 계단에 발을 디디자마자
나오코의 방문에서 신경질적으로 달칵, 하고
문고리의 잠금 소리가 들렸다.
마치 축배라도 들 것처럼 들떴던 마음은
습기를 잔뜩 먹은 흙처럼 무겁게 바닥에 깔렸다.
나오코는 이불을 뒤집어써도, 방 안에 어둠이 내리깔려도,
깊은 어둠 속에서도 늘 뭔가 보이는 것 같아서 불편하다.
눈을 감고 있어도 이상한 형체들이 그녀를 괴롭혔다.
상상 속에 있던 모든 것들이 튀어나와 그녀를 옥죄었다.
미네코는 나오코의 오랜 이 고통을 모른다.
나오코는 늘, 하즈키와 함께 했던 공원을 지나칠 때마다
언제부턴가 나이 많은 하즈키의 나무를 피해 다녔다.
눈이라도 마주칠까, 애써 고개를 틀고 걸어갔다.
생각해 보니, 타다요시를 진짜 아빠처럼 잘 따르기
시작할 때부터였다.
나이 많은 나무를 볼 때마다 죽은 친아빠가 풍겼던 냄새를 맡았다.
나오코는 하즈키에게, 치호에게 똑같이 물었다.
그 특이한 냄새에 대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 냄새를 맡을 수 있는 건 나오코뿐이다.
그 이후 나오코는 나이 많은 나무를 죽은 아빠처럼 생각했기 때문에
피해 다니거나, 아주 가끔 인사를 나누는 정도로 그쳤다.
어린 마음에 다른 아빠를 찾는다는 건 타다요시에 대한 배신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죽은 아빠보다 더 따뜻했던 타다요시가 몸서리칠 정도로 그리웠다.
나오코는 오늘도 늙은 나무를 지나치며
타다요시를 배신한 것 같은 마음에 온 힘을 다해 뛰었다.
오늘 밤도 어김없이 감은 눈앞의 형체가 나오코를 보고 비웃고 있었다.
베개 위에 스며드는 물방울이 회색으로 물들어 간다.
미네코는 타다요시의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혹시 모를 행동에 하즈키가 자신들을 내쫓을 수도 있으니,
제발 조심해 달라며 억지스러운 말로 나오코에게 애원했다.
나오코 생각에 미네코가 과연 타다요시를 잃은 슬픔을
제대로 느끼고 있었는지도 의심스럽다.
타다요시의 재산을 꿰찼을 미네코의 얼굴만 떠올려도 화가 났다.
마나츠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오코, 넌 미네코를 너무 몰라,
그녀는 정말 좋은 사람이야.”
꼭, 그녀의 딸에게 엄마를 좋은 사람이라며 변명해 주는 꼴이었다.
나오코의 생각에 그들의 행동과 말은
텔레비전에 나오는 코미디 프로그램을 능가할 만한 작품이다.
물론, 마나츠의 말처럼 나오코가 나쁜 쪽으로만 해석하고
있다는 꼴도 맞는 말이다.
하즈키에 대해 나쁜 사람인 양, 말할 때마다 미네코가 정말 미웠다.
미네코는 아무리 다 성장한 하즈키와 가족으로 살기 시작했다
하더라도, 하즈키를 몰라도 너무 몰랐다.
하즈키는 절대 그들을 쫓아내거나, 재산을 빼앗거나,
할 사람이 아님을 그렇게 모른다는 것인가.
나오코가 정말 두려워하고 분명하다고 생각한 건,
하즈키가 제자리를 찾기 위해 마나츠나 미네코 그들이 아닌,
하즈키 자신이 이곳을 떠날 것이라는 점이다.
나오코가 헷갈리거나, 옳은 것이 무엇인지
자꾸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는 건,
하즈키가 정신을 차리는 것과 정신을 차리지 못해
계속 저렇게 방 안에 틀어박혀 있다는 것,
그것은 그가 떠나거나, 머물거나, 하는 문제의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다시 쓸쓸한 파란색 공기가 방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
다행히 해가 아직 고개를 채 들지 않았다.
나오코는 다시 눈을 감는다.
새하얀 셔츠를 입고 햇살을 듬뿍 받고 하즈키가 걸어오고 있다.
드디어 깊은 잠에 빠질 수 있을 것 같다.
따뜻한 바람이 그의 새 하얀 셔츠를 살랑거리게
할 때마다 싱그러운 향기가 맴돌았다.
그 바람과 향기는 절대 쓸쓸하지 않았다.
밖은 온통 피어난 꽃을 찾아다니는 꿀벌의 소리와
꽃을 보는 사람들의 소리로 시끄럽다.
꽃의 계절이 시작되었고, 미네코의 주름살도 하나가 늘었는지,
몇 개가 늘었는지, 셀 수 없다.
늘 얼음을 씹어 먹은 것 같던 얼굴이
얼핏 보면 이젠 온화해 보이기까지 했다.
남편의 죽음을 받아들이면서,
절대 늙지 않을 것 같은 미네코의 얼굴은
짧은 시간에 변하기 시작했다.
가장 놀라웠던 건 검고 윤기가 흐르는 머리카락을
유지하던 머리칼이 아주 빠르게 새하얗게 변했다는 것이다.
검은 머리칼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순식간에 변하기 시작했다.
노화로 인해 정확하지 않은 시각에 돋보기가 필요했지만,
타다요시에게 그녀의 외모를 자랑하고 싶었던 터라
돋보기는 서랍 속에 조용히 머물기만 했던 터였다.
꼭 필요할 땐 돋보기를 몰래 가슴팍으로 안아
그가 없는 곳에서 쓰기도 했다.
그랬던 날들을 뒤로하고 타다요시를 늘
가까이서 찾았듯이 이젠
그의 자리를 돋보기가 메우고 있었다.
언제나 손을 뻗으면 가까이 있을 만한 그 자리를
안경 따위가 버젓이 차지한 것이다.
따뜻한 햇살이 들어와 미네코의 굵은 돋보기와
자수를 놓는 그녀를 비추고 있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처진 입가가 도드라져 보였지만,
이제 미네코는 늙고 있는 자기 모습에 신경 쓰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하나 같이 쑥덕거렸다.
젊은 나이에 남편이 죽어 나가더니,
나이를 먹어서도 남편을 죽어 나가게 만든 팔자라고 말이다.
신기했던 건, 다른 지역에서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삶의 터전을 삼더라도 소문이란 것은 늘
미네코의 꼬리를 잡고 물고 늘어졌다.
소문이란 살아서 따라다니는 신기한 생명체임이 분명하다.
그 덕에 남편을 잃은 후로 밖을 나가는 일은
손에 꼽을 정도가 됐다.
늘 집을 비웠던 예전의 미네코와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집 마당의 꽃들이 미네코를 따라 하기라도 하는 듯,
듬성듬성, 나이를 먹은 것처럼,
흉하게 입을 벌려 만개한 모습이었고,
바닥과 벽을 지지하며 기대어 꽃을 피우는 것투성이다.
미네코는 넋을 놓을 시간이 늘어났다.
열심히 수놓던 손은 갑자기 멈추길 반복하며
눈이 부셔 길게 들어오는 볕과 눈을 맞추고 있었다.
그만큼 시력이 많이 나빠졌다는 것이다.
갑작스러운 움직임과 소리에 실을 그만 손에서 놓치고 말았다.
겐토가 느리게 쭈뼛거리며 걸어 들어왔다.
겐토는 미네코와 나오코 앞에만 서면
자신의 성격을 모두 잃은 사람처럼 소심하게 굴었다.
이제 그는 머리까지 긁적이기 시작했다.
“저, 저 죄송해요,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문이 열려 있어서…”
겐토가 늘어진 실들을 주워 미네코의 무릎 위에
살포시 올려 놓아준다.
축 처진 기다란 눈으로 그를 올려보았다.
“두드렸는데도 인기척이 없으셔서...”
“누구라도 지금 네 표정을 보면,
내가 널 잡아먹기라도 하는 줄 알겠어.”
겐토가 다시 허리를 굽실거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살짝 몸을 비틀며 계단을 아주 빠른 속도로 올라가려 준비를 마쳤다.
“너 말이야.”
미네코의 목소리에 겐토의 자세가 순식간에 흐트러진다.
“네, 넵.”
미네코가 아예 몸을 비틀며 그를 흘겨보았다.
“하즈키에게 네 도움이 필요해, 알고 있지?”
“네, 그럼요. 걱정 마세요.”
미네코는 약간의 의심을 하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입가에 살며시 미소를 띤다.
“고맙구나, 올라가 보렴.”
미네코는 겐토의 원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어울리지 않게 소심한 모습을 보일 때면
더욱 놀려 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겐토와 얼굴을 마주칠 때마다 일부러 더
그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그 상황에서도 겐토는 그녀에게 웃는 얼굴을 내민다.
아마도 이 집과 마을을 통틀어 이유 없이 미네코에게
웃는 얼굴을 들이미는 사람은 겐토뿐일 것이다.
겐토는 계단을 올라오다 갑자기 인상을 찌푸렸다.
이상하게 미네코 앞에만 서면 나오코를 상상하며
자행해 왔던 자신만의 상상과 모든 불결한 마음들을
알고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미소는 마치 난 다 알고 있었어,라고 비웃는 것처럼 보였다.
하즈키 방 앞에 서 있는 동안에도 뒤통수가 따끔거렸다.
인기척에 나오코가 혹시라도 나와 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시간을 끌었다.
나오코의 방문은 움직일 생각이 없다.
오늘따라 더 지독히도 매캐한 냄새가 코와 눈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똑, 똑.”
반응이 없는 문에 대고 잠시 미네코가 있다는 것을 잊고
방문을 주먹으로 세게 치며 소리를 질렀다.
“이 자식, 당장 문 열어.”
무심결에 비튼 문고리는 자연스럽게 열렸다.
잠겨 있지 않은 것을 보더니 당황한 건 오히려 겐토이다.
“열려 있는지 몰랐다, 뻘쭘하네.”
겐토는 타다요시의 장례식 이후,
하즈키의 얼굴을 처음 보았다.
변명일 수 있겠지만, 겐토 역시 쉼 없이 돌아가는
도쿄 생활로 시간을 내기 힘들었고,
더 솔직히 절망적인 순간이 왔기 때문에
마나츠와 하즈키가 다시 부부로 돌아갈 수 있는 시간이 된다, 생각했다.
기대하기 만무한 일이 되었고,
마나츠 또한 소중한 친구였기에,
그녀의 인생이 조각나버린 것에 대한 책임에
하즈키가 조금 미웠던 감정도 있었다.
어찌 보면 그 둘의 감정에 방망이질을 부추긴 건,
겐토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회피하고 싶었던 마음도 있지만,
이 시기에 하즈키를 계속될 책임감 속 죄책감에
가두어 놓기엔 약해 빠진 놈에 불과했다.
하즈키는 장례식 때의 얼굴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워낙 마른 몸이 눈에 띄어 도드라진 광대는
이제 눈에 보이지도 않을 지경이었다.
창문을 한 번도 열어 놓지 않았던 방처럼
퀴퀴한 냄새가 가득히 풍겨왔다.
“하… “
겐토가 재빨리 커튼을 구석으로 밀어 놓더니,
창문을 모두 열어 놓는다.
순식간에 어둠이 깔린 방 안에 햇살이 가득 들어찼다.
“추워.”
“시끄러워 죽으려면 차라리
밝은 곳에서 얼어 죽는 게 나아.”
벽에 기대어 겐토의 말에 피식, 거리는 그를 보더니,
또 한 번 욕을 늘어놨다.
“미친 새끼.”
하즈키는 더욱 키득거렸다.
“크큭, 큭큭큭.”
겐토가 그의 머리통을 날려 보내는 시늉을 한다.
“미친 새끼, 진짜 고생 한 번 안 해본 새끼
엄살 좀 그만 피워.”
봄바람이 방 안을 덮치고, 하즈키 콧구멍의 지나,
더 깊은 곳으로 스며들었다.
꽃 냄새가 하즈키를 잡아 흔들었다.
겐토가 갑자기 들이닥친 것도 몫을 채웠지만
처음 맡아본 꽃 냄새처럼,
자신도 모르게 성대가 일렁거리고,
눈물이 맺혔다.
아마도 타다요시의 삶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일 것이다.
생명력을 불러일으키는 꽃향기는
무지막지하게도 사람이 살아가고 싶도록 부추긴다.
하즈키의 모습을 겐토가 놓칠 리 없었다.
“이기적인 새끼, 너만 힘든 것 같지?
주위 좀 둘러보라고,
나쁜 새끼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꼴이라니,
쯧 나라면…”
“그만해 겐토.”
“거 봐, 넌 진짜 이기적인 새끼야.”
“후… 우.”
겐토가 갑자기 시커먼 색의 커튼을 모조리 잡아 뜯었다.
다시는 막을 수 없도록 아예 찢어 버렸다.
겐토가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차라리, 분노를 해 병신같이
숨어서 술이나 처마시고,
방바닥에 귀신처럼 누워 있지만 말고, 이 새끼야
양심도 없는 이기적인 새끼
마나츠, 반도 못 따라가는 놈.”
커튼에 박혀 있는 갈고리들이
모조리 바닥에 앙칼진 소리를 내고 후드득 떨어졌다.
겐토는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다는 듯이,
약간은 당황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멋쩍은 헛기침을 쏟아 낸다.
겐토의 계속되는 목소리와 우스꽝스러운 행동에
하즈키는 또 한 번 피식, 대더니
몇 달 만의 호탕하고 큰 웃음을 소리 냈다.
“푸학, 크할할.”
겐토는 그 소리가 당연히 싫지 않았는지,
그도 고개를 돌리며 피식거린다.
“다시 시작하는 계절 그러니깐.”
하즈키가 또 소리를 내며 겐토의 말을 끊었다.
“하하하."
“잘 들어 다시 시작하는 계절이야
축제 동안 난 계속 있을 거야
있는 동안에 코빼기라도 보여
아님, 다시 와서 소원대로 죽여줄 테니까.”
겐토는 먼지가 가득한 검은 커튼을 팔목에 둘둘 감은 채
방문을 부수는 소리가 날 정도로 활짝 열어 놓고 간다.
겐토는 하즈키의 집에 발을 디디기 위해
몇 날 며칠을 고민하고, 어떤 말을 할지 고민했을 것이다.
물론, 외워 두었던 말을 더듬거리는 바람에
하즈키가 웃었지만, 그 또한 좋은 결과다.
다다미에 내내 엉덩이를 누르고 있던 하즈키의
꽉 쥔, 주먹 자국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한동안 잊었던 마네키 네코가 사라진 커튼 덕에
얼굴을 환하게 들이밀고 있었다.
바람에 길 잃은 꽃잎이 마네키 앞에 툭, 떨어진다.
떨어진 꽃잎 하나에 하즈키는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그제야 마네키가 손을 흔들며 달랑거렸다.
그렇게 하즈키에게 가장 반가운 손님이 왔다 갔다.
반가운 손님은 계단에 조용히 서서,
미네코를 어떻게 스쳐 갈지, 다시 한번 말소리를
외우는 중이다.
이번엔 더듬거리지 않으려,
고개를 좌, 우로 흔들며 입을 오물거리고 있었다.
3월은 현란한 색을 품은 꽃에 눈을 돌리기 바쁜 계절이다.
싱그러운 녹색의 향기는 늘 그렇듯,
사람들의 콧속을 호강시켜 준다.
오랫동안 묵혀 둔, 용서와 설렘들을 풀어내기에 딱,
좋은 계절이 아닐 수가 없다.
벚꽃 사이로 흐드러진 꽃잎이
마나츠를 달래 주려는 듯,
주위를 맴돌며 흩뿌려진다.
그녀는 손바닥을 올려 꽃잎을 받아 내기도
코끝에 머물러 보기도 했다.
겐토는 마나츠가 누구보다 더 잘 살길 바랐다.
솔직히 하즈키와 그녀는 어울리지 않았다고
처음부터 그렇게 생각해 왔다.
하즈키가 철새라면, 그녀는 텃새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서둘러 결혼했고,
함께한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마나츠는 그때도 지금도 변함없이 하즈키를 사랑한다.
하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깨닫는 것이 있다면
사랑만으로 두 남녀가 완성되기에는 사람도,
사랑하는 방법도 너무나 다르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점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음에도
그 짓을 반복하며 그것에 깊이 빠지며 살아간다.
어찌 보면 사람은 굉장히 바보, 속에 속하는
동물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아주 단순함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고통도 채
모르는 것들이야말로
굉장히 똑똑한 것일 수도 있다는 근거 없는 생각도 든다.
마나츠는 지금도 여전히 아름답다.
흐드러진 꽃잎이 그녀의 아름다움을 따라갈 수 없었는지,
그 아름다움은 결국 바닥에 깔려
사람들의 신발 밑창 속에 깔렸다.
마나츠는 겐토가 온 것을 눈치채고,
환한 웃음과 커다란 손짓으로 그를 맞이했다.
“겐토!”
마나츠의 새하얀 얼굴은 멀리서도 빛이 났다.
“하, 마나츠! 오랜만이야.”
마나츠가 다정하게 겐토의 얼굴을 보며 팔짱을 꼈다.
“으응, 오랜만, 겐토.”
“마나츠, 더 예뻐졌는걸?”
“나야, 항상 그렇지?
하즈키만 모를 뿐이지, 히힛.”
억지스러운 마나츠의 웃음기 있는 말속에
겐토의 마음이 먹먹했다.
그녀는 조금이라도 겐토가 미안해할 것 같은 표정을
보고 싶지 않아, 그와 만남을 계속 미루던 중이었다.
역시 겐토의 표정은 그녀를 속일 수가 없었다.
마나츠가 고개를 저었다.
“흠, 겐토 그런 표정은 사절이야 응?”
“하하.”
“난, 요즘 정말 좋아
지금처럼 마음이 편했던 적은 없어,
겐토 표정 때문에 망치고 싶지 않아 응?”
“잘, 알겠습니다.”
그제야, 겐토가 환하게, 멍청하게, 그답게 웃었다.
마나츠는 음식 솜씨가 좋다.
기름이 발라진 유부초밥은 촉촉하게 빛이 난다.
여러 가지 꽃과 같은 색깔을 한 과일과,
하즈키가 좋아하는 달걀말이,
보온병에 담아 온 장국,
빠지면 섭섭한 맥주까지,
모든 게 완벽한 봄 소풍의 모습이다.
겐토는 보란 듯이, 목을 쳐들고 맥주를 양껏 마시고는,
모든 음식을 한 번씩 입으로 구겨 넣는 중이다.
겐토가 늘 사 먹는 음식과는 비교할 수가 없을 정도의 맛이다.
“이야, 기가 막히는군.”
마나츠는 자기 입술과 같은 색깔의 토마토를 입으로 가져갔다.
서로 눈이 마주쳤고, 이유 없이 호탕하게 함께 웃어 보았다.
그녀는 불편할 법도 하지만, 늘 짧은 치마를 입는다.
당연히 불편한 돗자리에서도 자세를 연신 바꾸며
앉을 수밖에 없었다.
치마를 입은 그녀의 다리 위는
항상 하즈키의 겉옷이 올려져 있었다.
살색 스타킹이 훤히 보이는 그녀의 다리가
왠지 쓸쓸해 보이기도, 민망하기도 하다.
아마, 그녀는 하즈키를 볼 수 있다는
기대를 하고 나왔을 것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값을 매길 수 없는
하즈키의 미소를 보길 기대했을 것이다.
조금의 의심도 없이 하즈키가 늘 오던 길목에
그녀의 눈은 멈추고 있었다.
“마나츠, 그 자식 올 거야.”
마나츠가 고개를 돌려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집 안에서 오랜만의 나무 바닥이 발바닥과 만나
만들어 내는 별별 소리가 요란하게 울린다.
책상을 끄는 소리, 탁탁, 거리며 먼지를 털어내는 소리,
병이 부딪치며 내는 소리,
종종거리는 하즈키의 발소리,
미네코는 그가 만들어 내는 소리가 싫지 않다.
더욱 귀를 쫑긋 세우며 슬그머니 이층에 올라섰다.
활짝 열린 하즈키의 방문과
활짝 열린 창문이 눈에 들어왔다.
바닥에는 때가 타서 거뭇했던 자리가
말끔한 색을 뽐내고 있었다.
책상 위엔 그 새 액자 하나가 더 늘어난 상태다.
타다요시가 미네코를 보며 활짝 웃고 있었다.
화장실에서 들려오는 물소리마저 아주 경쾌했다.
방 안에 가득했던 술 냄새가 꽃향기로 둔갑했다.
미네코는 액자 속 타다요시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몇 번이고 쓰다듬는다.
구석에 쌓인 이불이 눈에 들어와, 하즈키를 기다렸다.
말없이 가져가 빨아 버린다면
기분이 상할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가,
혼자 중얼거린다.
“참나, 내가 무슨 생각을...”
하즈키가 그럴 사람이 아니란 것은 더 잘 알고 있었다.
타다요시가 없는 집 안에서 미네코는 끊임없이
하즈키의 눈치를 살피는 중이다.
이불을 손안에 가득 들고 앞이 보이지 않는 탓에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역시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미네코의 솔직한 심정은
하즈키는 서류상 자기의 아들이었고,
그러므로 자신의 역할을 잘 해내야 한다는 생각뿐이지만,
가끔 떠오르는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지우려 해도 자꾸만 떠올랐다.
눅눅한 이불 가지를 미네코 보다 더 커다란
고무 대야에 집어넣었다.
미네코의 목소리에도 굼적하지 않던 나오코가
수돗물을 받는 미네코의 옆에 다가왔다.
대야 속에 발을 집어넣는 미네코에게
짜증 섞인 목소리를 냈다.
“뭣 하는 거예요?”
나오코의 반응에 놀라
미네코는 동작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따뜻한 물 가져다줄게, 기다려요.”
미네코는 적잖이 당황스러워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대야 속의 발을 슬며시 꺼내 본다.
햇살이 따스하지만, 아직 차가운 물은 당연히 무리다.
미네코는 조용히 나오코의 행동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끙끙거리는 소리 한번 없이 무거운 물을 퍼다 날랐다.
이제 됐다는 식의 행동 또한 미네코를 당황스럽게 했다.
입을 벌리고 나오코를 보고 있다는 사실도 까맣게 잊고,
넋을 놓고 나오코의 동선을 놓치지 않고 바라보았다.
햇살을 가득 받는 나오코의 얼굴은 마치
미네코의 얼굴을 갖다 붙여 놓은 것 같았다.
우뚝 선 콧날의 모습은 나오코를 더욱 여성스럽게 보이게 한다.
나오코가 무심하게 말을 툭 내뱉었다.
“그만 좀 보시죠, 그래?”
미네코는 그제야 벌린 입을 다물더니, 피식, 웃었다.
나오코가 날라 준, 따뜻한 물에 발을 담그니,
마음이 평원처럼 넓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대야에서 올라오는 모락모락, 연기가
미네코의 코와 입을 간질였다.
미네코의 입가는 내내 올라가 있었고,
콧구멍도 내내 벌름벌름 움직이는 중이다.
하즈키에 대해 여태껏, 좋지 않은 말들만
늘어놓던 미네코가 그의 이불을 가져간다는 건,
낯설고 의심스러운 행동 중 하나다.
대체 무슨 생각에서 그런 행동을 하는 건지,
나오코가 익히 알고 있었던 미네코의 모습이 아니었다.
이기적인 생각과 행동이 몸에 배어 있던 미네코인 터라,
불길한 생각도 들었다.
나오코의 상상대로 미네코가 수돗물을 받고 있었다.
찬물에 발을 담그려는 미네코를 보니,
자신도 모르게 느끼고 싶지 않은 측은함을
불쑥, 따뜻한 감정을 꺼내었다.
그것도 하즈키를 위해서 차가운 물에 발을 담그고 있었다.
나오코는 그때 처음으로 우리도 달라질 수 있을까,
라는 기대 비슷한 생각을 했다.
미네코를 측은하게 바라본 자기 모습에도 의아했다.
벌써, 찬물에 발을 담아버린 미네코에게 왜,
따뜻한 물을 날랐는지 말이다.
첫 번째 죽은 아빠가 왜 죽었는지, 벌써 잊었나, 란
생각에 잠시 사라진 분노를 다시 찾아야겠다, 는
유치한 생각도 들었다.
나오코는 발개진 얼굴을 하곤,
방 안으로 들어와 향을 피우며 기도를 중얼거렸다.
하즈키는 묵은 때를 벗기는지
아직도 물소리를 내며 나오지 않았다.
나오코는 복도를 기웃거리며 그의 방을 힐끔거린다.
겨울잠 자던 곰 새끼 한 마리가
기지개를 요란하게도 피운다.
책상 위에 구깃구깃한 그림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 그림은 마나츠에게 전해준 하즈키를 그린 그림이다.
나오코가 그려 낸 그림이지만,
그가 살아 있는 듯, 갈색 눈을 반짝이는 완벽한 그림이었다.
완벽하게 반짝이는 갈색 눈으로,
완벽하게 나오코만 바라보았다.
그야말로 타이밍도 완벽했다.
오랜만에 멀쩡해진 하즈키의 얼굴을 보거나,
하즈키의 목소리를 들을 생각에
심장이 방망이로 얻어맞고 있었다.
해가 정확히 정수리를 정조준할 정도로
따끈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시계 침이 다른 숫자에 넘어가는 시간이 그리 긴지,
새삼 알고 화장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귀가 머리처럼 커졌다.
순식간에 구름을 만들어 내더니,
뜨거운 김이 훅, 하고 날아들었다.
마치 신이 인간을 만들어 완성된 모습을
뽐내기 위해 애쓰는 것처럼 보였다.
공기의 뜨거움은 쉽게 사그라들 것 같지 않다.
젖은 머리가 아직은 찬 공기에 서늘하다.
방 안의 온갖 문을 열어 놓은 것이 생각나
재빨리 달려갔다.
방 안에 있는 나오코를 발견하고
하즈키가 놀라 뒷걸음질 친다.
“으엇, 넛 뭐야?”
나오코가 키득거렸다.
“큿, 방문이 열려 있길래.”
나오코는 속옷만 걸치고 있는 하즈키가 불편하지도,
불편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반면에 하즈키의 얼굴은 불편함이 역력하다.
“하, 나오코 나가 줘.”
“응?”
하즈키를 내내 기다렸다는 표정을 지으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나오코, 제발 좀.”
소리를 질러서야, 몸에 비해 커다란 흰색 팬티가
사타구니에 말려 올라간 것을 보고 또 키득거리며 방문을 나섰다.
나오코는 문에 귀를 갖다 대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한다.
하즈키는 나오코의 인기척을 느꼈고,
문에 귀를 갖다 대는 모습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 되었다.
나오코라면 분명 그런 행동을 하고도 남으니까.
부모님과 함께 지내는 어떤 신혼부부든
잠자리의 예의를 지켜 내기란 그야말로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즈키와 마나츠도 마찬가지였다.
가장 뜨겁고 매일 사랑을 나누기에도 모자랐던 때였다.
그때마다 나오코는 하즈키의 방문에 귀를 갖다 대고 있었고,
하즈키는 그냥 봐줄 일이 아니라며
나오코를 호되게 혼낼 작정이었다.
하지만 마나츠는 무슨 생각이라도 있었는지
그럴 필요 없다며 자신에게 맡기라고 했던 때가 있었다.
마나츠는 그때 나오코에게 어떤 얘기도 꺼내지 않았으며
오히려 밤마다 나오코의 귀가 문 뒤에 있다는 것을 느끼며
더욱 앙칼진 소리를 내질렀다.
마나츠는 늘 그렇게 나오코와 내기라도 하는 듯 굴었다.
그때를 다시 떠올리기만 해도
하즈키는 머리가 지끈, 온몸이 휘청거렸다.
당연히 나오코의 그 기이한 버릇은 고쳐질 리 없었고,
하즈키 또한 모른 척하며 신경 쓰지 않는 날이
대부분이 돼 버렸다.
하즈키가 입을 질끈 물며 한숨을 내쉬었다.
“후유우우.”
잠시 후, 나오코의 귀 속엔 문을 달칵하며
잠그는 소리가 들렸고,
약간의 서운함으로 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
평안을 찾은 듯한 하즈키를 불안한 맘으로 기다린다.
깨끗해진 그의 방에서 신선한 음악 소리가 들린다.
girl form the north country ♬
하즈키는 열린 창문을 닫고,
사라진 커튼을 생각하며, 피식거렸다.
뻥 뚫린 창문으로 볕이 온몸으로 스며들었다.
조금 어색함에 몸이 흠칫, 놀라며
움츠러들지만 겐토의 생각과 행동은 언제나 옳다.
마나츠는 늘 어두운 색깔의 옷을 걸치는 하즈키를
맘에 들어하지 않았다.
그녀와 결혼 후, 하즈키의 옷장에는 꽃이 핀 것과 같다.
마나츠가 아끼던 분홍색 폴로셔츠를 걸쳤다.
분홍색 셔츠는 하즈키의 하얀 피부를
더욱 도드라지게 만든다며,
입을 때마다 호들갑을 떨었던 그녀였다.
몇 달 전 만 해도 꽉 끼던 청바지가 술렁, 하며
잘도 들어갔다.
낡은 남색 카디건의 보풀이
생각보다 도드라져 보인다.
보풀 따위는 그를 신경 쓰이게 할 따위가 아니었지만,
오늘은 달랐다.
뜯겨 나온 몇 개의 보풀이 바닥에
소용돌이를 만들며 날아다녔다.
하즈키는 마나츠와 다시 무언가를 만들어 내고,
다시 시작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마나츠 또한 같을 것이며,
단지 그의 생활 모든 곳에 그녀가 스며 있었고,
그것을 억지로 밀어내거나, 잊을 생각도 없다.
하지만 마나츠를 기쁘게 해주고 싶었고,
마나츠가 좋아하는 것을 하고 싶었다.
배려라 생각하면 감사하게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거울에 비친 자기의 모습에 웃음이 또 새어 나왔다.
나무젓가락에 헝겊을 억지로 끼워 놓은 모양새다.
그나마 마나츠가 좋아했던 셔츠가
하즈키의 얼굴을 밝게 만들어 주었다.
겐토가 다녀간 후, 뭐가 그리도 피식거릴 일이
많은지 겐토와 닮아가는 모습이 나쁘지 않았다.
하즈키를 안고 있는 엄마와,
미소 짓고 있는 타다요시를 바라본다.
소중함, 이란 단어는 빈자리가 생겨야만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잔인했다.
구석진 자리에서 눈치를 보고 있는
마네키 네코를 가져와 그들 옆에 나란히 놓았다.
어색해 보이지만 꽤, 잘, 어울린다.
“됐어.”
달칵, 귀가 커다래진 나오코가 문 앞에 서서
싱긋, 웃으며 그를 반겨 준다.
“응? 하즈키, 어디가?”
하즈키는 멍한 얼굴을 나오코를 잠시 바라보다가,
나오코가 동생임을, 동생과 같은 층을 쓰고 있었다는 것을
몇 달 만에 다시 깨닫는 중이다.
“응.”
“어디... 가?”
하즈키의 목소리를 들으려
몇 날 며칠을 기다린 보람이 날아갔다.
“겐토, 보러.”
하즈키는 굳이 마나츠의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나오코는 다른 준비가 필요 없다는 듯,
하즈키의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겐토?”
하즈키가 고개를 끄덕이며 손짓하더니
나오코에게서 비켜선다.
“나도 같이 가.”
하즈키는 잊고 있었던 동생이란, 존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방법을 송두리째 잊어버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잠시 고민하더니, 나오코가 생각하는
멍청이 겐토처럼 말을 버벅거린다.
“후우, 마음대로.”
“우와, 야호.”
버벅거리는 하즈키를 잠시 보며 미소 짓더니,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의 소리를 낸다.
“겉옷, 챙겨서 내려와.”
나오코가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으응, 기다려 하즈키.”
나오코의 발걸음이 우당탕탕 신이 나서
두 걸음씩 날아오른다.
추위가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던 날들이었고,
따뜻한 햇살이 어색하기만 했었다.
빨래 밟기를 대충 끝낸 미네코가 그를 모른 척, 하며
곁눈질로 관찰하고 있었다.
하즈키가 모를 리 없었고,
미네코는 먼저 말을 걸어 주길 바라고 있었을 것이다.
“저기.”
미네코는 하즈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말을 잘라먹었다.
“그래, 어디 나가니?”
좋아 보인다는 말이 입속을 맴돌았지만,
미네코의 말은 단순하게 튀어나왔다.
“그냥, 두세요.
위로 올리는 건 다녀와서 제가 할게요.”
하즈키는 미네코의 얼굴을 보지도 않고
줄곧 땅만 바라보며 말했다.
“나중에 걷어 주기나 해.”
미네코는 빠르게 자신을 지나치는 나오코를 보고
약간의 소리를 지른다.
“넌 또 어디 가는 거야?”
나오코가 하즈키를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하즈키가 말했다.
“겐토를 만나러 가요.”
대신 대답하는 하즈키의 말에
나오코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하즈키를 가리켰다.
미네코는 겐토를 만나러 간다는 소리에
내심 나오코와의 관계에 대한 기대가 부풀어 올랐다.
하즈키가 이번에는 발개진 미네코의 종아리를 내려 보았다.
식지 않은 물은 김을 모락모락 피워 냈다.
“늦지 않게 들어올게요.”
나오코는 하즈키의 허리춤에 줄을 매어 놓을 것처럼
졸졸 잘도 따라갔다.
미네코는 하즈키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보았다.
해가 듬성듬성한 미네코의 정수리를 마저
태울 것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녀를 조롱하고 있었다.
자주 다녔던 길목이 낯설게 느껴졌다.
가는 내내 둥둥 떠다니는 꽃가루가
눈에 보일 정도로 날아다니며 하즈키의 코를 간질였다.
하즈키는 따라오는 나오코의 발소리에도
귀를 기울이며 그녀에게 맞춰 걸었다.
부정의 의미가 담긴 말을 들을까,
나오코는 내심 조바심 내며 흔적도 없이
따라 걷기에 집중하는 중이다.
나오코만 마주치면 멍청이가 되는
겐토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마도, 그건 누구나 눈치채고 있는 감정임이 분명하다.
따라나선다는 나오코를 말리지 않음도,
좋게 말하면 겐토를 위함이고,
나쁘게 말하자면, 하즈키의 커튼을 모조리 뜯어 버린,
겐토가 당황할 모습이 보고 싶은 짓궂음일 것이다.
하즈키의 어깨가 으쓱, 하며 입꼬리가 올라갔다.
공원 호수에 들어서자,
봄의 기운을 맞으려는 인파로 가득했다.
갑작스러운 북적임에 현기증이 몰려왔다.
창백한 하즈키의 얼굴에 햇살이 드리워져
눈이 부실 정도로 새하얗다.
의자에 몸을 기대며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귓속에서 삐, 하는 소리와 함께
모든 것이 멈춰져 있는 것처럼,
아주 잠시 공기도 함께 사라졌다.
숨을 멈추는 순간 눈앞이 하얘짐을 느끼더니,
다시 공기가 날아들어 입속에 남는다.
“후우... 하.”
내내 조바심을 떨던 나오코가
불안한 눈빛으로 하즈키에게 다가가 앉았다.
소리라도 날까, 그 모습은 아주 느리게 움직였다.
하즈키가 먼저 말을 뱉었다.
“사람이 너무 많아.”
이제 나오코가 말해도 괜찮다는 신호일 것이다.
나오코는 준비가 되었다는 듯,
입술에 침을 바르며 고개를 연신 흔들었다.
“으응, 축제 기간이야.”
나오코는 괜찮냐, 는 물음을 하고 싶지만,
하즈키가 지금 약해 보인다는 말은 하고 싶지 않다.
하즈키는 지금 순간 자신을 걱정하는
조심스러운 그녀의 마음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 점은 언제나 그가 유일하다.
“나오코, 난 괜찮아.”
나오코는 하즈키를 보며 생긋, 웃었다.
“이힛.”
하즈키가 따라 웃는다.
“훗.”
기분이 좋아진 나오코가 벌떡 일어서더니,
하즈키의 앞에 서서 빙빙 돌았다.
“하즈키, 웃었다!”
겐토가 멀리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나오코가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나오코 앞에서 또다시 주뼛주뼛, 거리다가
나오코가 자신을 보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재빨리 그들 앞에 섰다.
유난히 기장이 길게 뻗은 청바지를 입은 나오코는
정말이지 다리가 길었다.
청바지는 언제나 길이가 길어 잘라내는 것이
당연할 정도의 절차였다.
하지만 운동화에 딱 맞게 떨어진 나오코가
입은 청바지의 기장은 마치 맞춰 입은 옷처럼 잘 어울렸다.
잘록한 허리는 동그란 엉덩이를 더욱 도드라져 보이게 했다.
겐토는 잘록한 허리에 눈이 멈추더니,
나오코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겐토는 다시 주뼛거리며 하즈키의
어깨를 툭, 하고 밀었다.
나오코는 겐토를 불쾌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눈을 아래위로 치켜떴다.
겐토가 서둘러 말했다.
“여기서 뭐 해? 기다리잖아.”
겐토의 말은 마나츠가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다.
하즈키가 대답했다.
“응, 가자.”
나오코는 자연스럽게 하즈키에게 팔짱을 끼고 걸었다.
겐토가 나오코를 보며 자신도 모르게 삐죽거렸다.
숨어있던 용기가 커다란 소리를 만들었다.
“야, 나오코 안녕, 할 줄 몰라?"
나오코는 코에서 바람이 나올 정도로
씩씩, 눈을 흘기며 고개를 돌렸다.
“안, 녕.”
“아이고, 인사 주셔서 감사합니다.”
겐토는 빈정거리지만,
올라간 입꼬리는 좋아하는 모습을 숨기기엔 역부족이다.
하즈키가 겐토를 보더니, 조용히 키득거렸다.
겐토가 재빨리 하즈키의 어깨를 다시 툭, 하고 친다.
겐토의 목 복숭아뼈가 위로 갔다 내려오며
꿀꺽, 하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겐토가 긴장했다는 뜻이다.
하즈키는 겐토가 나오코를 좋아하는 마음이
진지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가 긴장하거나, 흥분했을 때 하는 행동이었다.
겐토는 가는 내내 침을 꿀꺽, 하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수많은 인파가 돗자리를 깔고 앉아
바람에 이야기를 날려 보내고 있었다.
멀리서도 마나츠는 확연히 눈에 띄었다.
마나츠는 하즈키를 발견하고도
애써 침착하게 천천히 손을 흔들어 보였다.
마나츠의 심장이 두근거렸고
심장이 느끼는 것과 반대로 손을 천천히 흔드는 것은
너무 힘든 일이다.
하즈키가 당연하다는 듯,
따뜻하게 팔을 감싸고 있던 나오코의 손을 밀어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하즈키는 기억하지 못할 게 뻔했다.
나오코는 마나츠를 발견하고는,
다시 뒤로 처져 걷기 시작했다.
멍청이 겐토가 자꾸 나오코를 흘긋거리는 바람에
길가에 돌이라도 주워 던지고 싶은 심정이다.
하즈키는 마나츠를 보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감정을 착각할 만한 또 다른 두근거림이다.
멀리서도 마나츠가 하즈키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빛이 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미네코가 일상으로 돌아올 때부터 인가,
자주 발걸음을 하던 마나츠를 보기 힘들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때
마나츠가 집 안에 발을 들이는 것에 대해,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다시,라는 단어를 꺼낼 리 없는 하즈키는
당연히 마나츠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이었을 것이다.
늘, 미네코를 가족처럼 챙겼고,
주방에는 달걀말이가 떡, 하니 버티고 있었으니 말이다.
마나츠는 가까워진 허수아비 같은
하즈키의 비쩍 마른 모습에 심장이 바닥에 쿵, 하고
떨어지는 듯, 목이 메는 듯한 통증이 밀려온다.
손바닥으로 가슴을 톡톡, 친다.
부부 관계가 끝난 그들이지만,
남들은 모르는 그들만의 친밀감과 배려는 남달랐다.
마나츠는 벌떡 일어나 아무 말 없이
하즈키를 꼭, 끌어안았다.
몸 바닥까지 깔려 있던 무거운 공기가 길게 뿜어져 나왔다.
“하즈키...”
하즈키도 따라 마나츠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하즈키의 포옹 속 감정에 순간적으로
다시,라는 단어들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목이 울컥, 거리는 바람에 목소리를 다듬느라,
말을 꺼낼 수가 없다.
나오코는 내내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깔더니,
입은 청바지가 맘에 들지 않았는지
깨끗한 바지춤을 탁탁, 털어내는 척을 했다.
마나츠와 하즈키가 끌어안는 모습을 자주 보았지만,
지금만큼은 나오코의 감정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그 순간만큼은 마나츠가 밉지 않았다.
더 이상 가족이 아니란 점이
몫을 했다고 할 수 있지만,
그 정도로 마나츠에게 날을 세우고 싶진 않다.
어쨌든 미네코와 하즈키가
일상으로 돌아온 건 마나츠의 정성임을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나츠가 나오코를 올려보며 말했다.
“오랜만이야, 나오코 좋아 보여.”
마나츠의 진심이 나오코를 가볍게 당기며 안으려 했지만,
뒷걸음질 치며 손사래 치더니 어색한 웃음을 내보였다.
“어, 으응.”
“나오코도 올 줄은 몰랐어.”
뜻 없는 말이란 것을 알면서도
나오코의 빈정거림은 여전했다.
“나 또한, 마나츠가 있을 줄은 몰랐어.”
마나츠가 어깨를 으쓱하며 가볍게 미소 지었다.
겐토가 자연스럽게 나오코 옆에 앉았다.
나오코의 엉덩이가 들리더니,
한편으로 물러나는 모양새다.
겐토가 말했다.
“이렇게 모이니까 신나는데?”
마나츠가 따뜻한 장국을 따라내며 말했다.
“자, 하즈키.”
“고마워.”
마나츠가 하즈키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당신 얼굴, 말이 아니야 쯧.”
겐토가 끼어들어 달걀말이를 입으로 구겨 넣었다.
“역시, 맛있어 마나츠 솜씨는 일품이야.”
하즈키도 어색함은 언제 그랬냐는 듯,
눈치도 없이 잘도 먹는다.
나오코는 맥주를 벌컥벌컥, 소리 내며 삼켰다.
나오코 또한 마나츠의 음식 솜씨는 인정하는 편이기에
음식에 입을 갖다 대고 감탄사를 연발하고 싶지는 않다.
맥주가 순식간에 비워졌다.
겐토는 늘, 맥주를 벌컥거리며 마시는
나오코의 모습이 맘에 들었다.
나오코의 손가락이 어찌나 길던지,
곧게 뻗은 그녀의 다리 모양과 같았다.
겐토는 쭉, 계속 나오코를 흘긋거렸다.
나오코는 아예 겐토를 반쯤 등지고 앉았고,
그 모습에 하즈키는 킥킥, 거렸다.
봄바람에 벌들도 기지개 켠 모양이다.
열심히 꽃을 찾아 윙윙거리며
꽃잎과 함께 날아다닌다.
달큼한 과일 향을
꽃임을 착각한 벌들이 겐토 곁을 맴돌았다.
벌을 무서워하는 그가 도망 다니는 모습에 웃지 않을 수가 없다.
나오코는 참지 못하고 갸르륵, 거린다.
저렇게 멍청한 겐토가
어떻게 아무나 들어가기 힘든 직장을 다니고 있는지,
고개가 갸우뚱, 했다.
나오코의 갸륵, 거리는 소리가 좋아,
겐토는 더욱 멍청하게 벌을 쫓는다.
자연스럽게 하즈키의 카디건은
예전처럼 마나츠의 새하얀 다리를 감싸고 있다.
겐토는 그 모습을 흘긋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난
나오코를 계속 지켜보았다.
나오코의 표정은 빠르게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하즈키에 대한 나오코의 감정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 보았다.
아마도, 하즈키가 어떤 못된 짓을 한들,
나오코는 그가 옳다고 말할 것이다.
의심하고 싶진 않지만,
나오코는 하즈키와 연결될 수 없는 사이란,
것을 잊고 사는 사람 같았다.
당연히 그것이 잘못된 판단이란 것도,
모르고 사는 사람이 나오코였다.
되려, 나오코가 멍청한 건지,
순수한 건지, 판가름이 안 된다.
그런 나오코를 발견할수록
겐토는 나오코를 알고 싶은 욕구가 솟구친다.
마치 굳은 결심을 한 사람처럼
이를 앙다물고 또다시
꿀꺽거리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나오코는 오랜만에 나이 많은 나무 앞에
서서 훑어 내려갔다.
다른 이들은 모두 봄인데,
늙은 나무의 몸통은 강물로는 모자랄 정도로
바싹, 말라 있었다.
손을 갖다 대자마자,
부스러기가 바스락거리며 떨어져 나갔다.
나오코는 티 나지 않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나도 하즈키도 왔어요.’
나오코는 나이 많은 나무를 방패 삼아
조금 떨어져서 마나츠와 이야기를 나누는 하즈키를 바라보았다.
늙은 나무에 가려진 나오코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마음껏, 하즈키를 바라보았다.
돌아온 하즈키가 웃는 모습은
너무 눈이 부셨고,
곧 사라질 것 같아 겁이 났다.
흰 도화지 속에 많은 인파들은 보이지 않고,
나무에 가려진 마나츠의 자리에는 대신,
그리고 당연하게 나오코가 앉아있어야 했다.
그리고 하즈키는 계속 웃음 지었다.
넋이 나간 나오코를 겐토가 깨웠다.
“나오코?”
눈이 부셔 앞이 잠깐 보이질 않는다.
겐토가 나오코 앞에 서 있다.
평화로웠던 시간이 순식간에 깨져 버리는 순간이다.
나오코가 놀라 미간을 찡그렸다.
“엇?”
겐토가 나오코의 시야를 가려 버렸다.
겐토는 괜한 핑계를 댈 작정을 하며 말했다.
“저 둘 사이에, 있기가 좀 그렇잖아?
“왜?”
역시 나오코의 대답은 현실적이지 않았다.
겐토는 그런 나오코의 모습이 좋았다.
나오코를 향해 뿜어져 나오는 관심이
심각해지고 있다는 신호일 것이다.
겐토가 꿀꺽거리며 말했다.
“내가 여기 있는 그림이 더 나아 보여서.”
나오코는 인정이라도 하는 듯,
아예 고개를 숙이고 그를 보려 하지 않았다.
나오코가 교복을 처음 입고 다니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의 나오코는 커다랗고 놀란 동그란 눈을 하고,
빳빳하고 거친 머리카락을 갖고 있었다.
웬만해선 남학생들에게 눈에 띄는 얼굴은 아니었다.
하지만, 겐토에겐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고,
또한 동네에서 소문난 괴짜였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런 그녀가 항상 맘에 들었다.
그런 나오코가 성인이 된 모습에
겐토의 머릿속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나오코에 대한 마음이 백 년에 한 번 올까,
한 정도의 쓰나미 같은 것일 줄은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오코는 오로지 눈동자만 돌리며 겐토를 보았다.
“이유가 뭐야?”
겐토는 어안이 벙벙하다.
“응?”
겐토가 다시 또 꿀꺽거린다.
나오코가 정색하며 말했다.
“왜 자꾸 날, 흘긋거리는 거냐고 물었어.”
당연히 나오코가 모를 리 없는 말을 한 것임에도
겐토의 얼굴은 당황스러움에 볼까지 발개져 달아올랐다.
뻔한 대답을 할 수 없는 상황에 입술만 적셨다.
나오코가 빈정거렸다.
“왜 내가 모른다고 생각했나 봐?”
겐토가 일어서며 딴청을 부렸다.
“그만 일어날까?”
겐토는 멍청하게 머리까지 긁적였다.
나오코는 꼭, 부정은 하지만,
가고 싶다고 말하는 것처럼 굴었다.
“난, 마나츠가 싫어,
좀 더 확실히 말하자면
좋아할 수 없는 사람이야.”
“사람은 누구나 그럴 수 있지.”
나오코가 이번엔 고개까지 돌리며
겐토의 눈을 오랫동안 마주쳤다.
나오코는 자신을 이해한다는 말 같아,
하즈키에 대한 갈증을 겐토는 알고 있다고 확신했다.
“어떤 사람이든, 자신의 마음은 자신만 아니까,
그럴 수 있다는 뜻이야.”
그들을 바라보는 나오코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다.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그녀의 약한 모습이다.
나오코가 절망스러운 표정을 하며 말했다.
“저들은, 아마 또다시 시작되겠지?”
“글쎄, 그것도 그들만 알겠지.”
나오코는 그들을, 겐토는 나오코를 바라본다.
봄바람에 붉어진 나오코의 볼에 꽃잎이
더욱 진한 물을 들이며 바닥으로 떨어진다.
나오코의 눈이 잠시 깜박이더니,
꽃잎이 지나간 자리를
기다란 손가락을 세워 볼을 긁었다.
나오코의 피부는 아주 작은 긁힘에도
모양을 만들어 내며 붉어졌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겐토는 봄바람에 움츠리는
나오코의 어깨가 마음에 걸려
자기의 겉옷을 걸쳐주고 싶었다.
마음으로만 벗고 입었다, 를
반복하다 끝내 그녀의 어깨를 놓치고 말았다.
나오코의 행동은 하즈키에게
가면을 써 놓은 것처럼, 똑같았다.
나오코는 일어나 나무에 기대어 눈을 감는다.
이번에도 꼭, 하즈키처럼.
마나츠는 하즈키의 볼을 쓸며 쯧,
거리는 소리를 연신 연발하는 중이다.
“야위었어.”
쓸어내리는 마나츠의 팔목을 잡아 내리며 그저 웃는다.
“괜찮아 이 정도 벌, 즘.”
마나츠가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즈키의 카디건 덕에
그녀의 다리는 훨씬 자유로워 보였다.
마나츠가 다정하게 말했다.
“이제, 당신 계획은?”
어린 소녀가 동물 모양의 풍선을 들고
빙빙 돌더니, 넘어진다.
흰 바지에 묻어난 흙의 크기는
아픔을 상상할 수 있다.
어린 소녀는 아픔을 아랑곳하지 않고
손에서 떠난 풍선을 바라보며 엉엉 울기만 할 뿐이다.
대충 찍어 놓은 동물 모양의 풍선은 정말이지,
최악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개의 모습인지, 고양이의 모습인지,
더욱 자세히 보면 사람의 모습으로도 보인다.
어린 소녀의 고개는 하늘과 맞닿아 있었고,
끝내 풍선은 자취를 감춰버렸다.
어린 소녀의 울음소리가 더욱 거세어졌다.
하즈키가 힘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잘난, 이 정신으로 뭘 할 수 있을까?”
“당신, 아직 그 버릇은 살아 있네? 칫.”
그때 빛과 같은 속도의 남자 어른이
어린 소녀에게 다가가 흙을 털어 주며
연신 고부라지는 말투의 말들을 뱉었다.
하즈키는 어린 소녀가 잠시 부러운 모양새다.
마나츠가 하즈키의 옆얼굴에 집중하며 말했다.
“여길 떠나지, 그래?”
하즈키는 빛나는 갈색 눈으로
마나츠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당신은 늘, 그렇게 내 속을 모두 읽고 있지.”
“그러게, 들켜 버릴 걸 왜 숨겨?
이제 당신 발목을 단단히 묶어 둘 사람은 이제 없어.”
어린 소녀는 어느새 다른 동물 모양의 풍선을 얻었다.
흙이 묻어난 곳은 아플 법도 한데 잘만 뛰어다닌다.
이번에도 역시 마구잡이로 찍어낸 우스꽝스럽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동물 모양이다.
하즈키가 갑자기 웃음을 뿜었다.
“크읏, 훅훅흐.”
마나츠가 눈을 흘기며 하즈키를 바라보았다.
“뭐가 우스워?”
“미안, 아무것도 아니야.”
하즈키는 벌써 맥주를 모두 비워냈다.
“타다요시도 내게 말도 안 되는
저런 모양의 풍선을 사준 적이 있어
그것도 교복을 입는 나이에 말이야.”
그제야, 풍선을 확인하던
마나츠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그는 분명 당신에게 멋진 아빠였어.”
마나츠가 다시 하즈키의 볼을 우정 어리게 쓸어 담았다.
바람이 불어 우스꽝스럽게
찌그러진 동물 풍선은 마나츠를 바라보았다.
마나츠가 투덜거렸다.
“아니, 대체 뭘 그려 넣은 거야? 훗.”
“동심은 깨지 말아 줘 하하.”
하즈키의 얼굴은 붉은 기가 돌기 시작했고,
그야말로 생기가 가득했다.
식어버린 달걀말이의 폭신함은
차가움을 잊게 해 준다.
오랜만에 하즈키의 입에서
단맛과 짠맛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역시, 당신 달걀말이는 최고야!”
“좀 더 잘하지 그랬어?
그럼, 평생 먹을 수 있었을 거야.”
하즈키가 더욱 보기 좋게
마지막 남은 노란빛을 먹어 치우며 이를 드러냈다.
연분홍의 사각 도시락이 완벽하게 비워졌다.
“하즈키, 당신은 아직도 변함없이
내게 소중한 사람이야.”
하즈키의 정돈되지 않은 머리칼이
바람에 날려 갈색 눈을 가렸다.
“오랜만에 듣기 좋다 그 말.”
“머물지 말고 떠나, 하즈키.”
기름 자국을 남긴 연분홍 도시락을 정리하는
마나츠의 손톱에서 윤기가 났다.
마치 꿀을 발라 놓은 것처럼,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것 같다.
떠난다, 는 단어에 유난히 예민하게 굴던 그다.
타다요시의 집을 나와 살 것을 권유할 때도,
멀지 않은 거리란 걸 알고 있었음에도 떠난다, 는
의미를 굳이 심각하게 받아들인 그다.
그럴 때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타다요시의 눈치를 살피거나
그의 작은 행동에도 안타까워했던 하즈키였다.
타다요시에 대한 애정은
어마어마한 힘을 갖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런 아버지란 존재는 집만 덩그러니,
남겨 둔 채 그를 떠난 지가 몇 달째다.
마나츠는 진심으로 하즈키가 이곳을 떠나
새로운 삶을 살아가길 바라고 있었다.
그에겐 날개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만약, 다시,라는 단어를
그들의 삶에 다시 끼워 놓기가 가능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그 단어는 마음속 깊숙이 숨겨 놓은 채,
꺼내 놓지 않을 작정이다.
지금은 하즈키가 자신만의 삶에
온전히 젖어 살기만을 바랄 뿐이다.
“떠나면? 뭐가 있을까?”
“그곳에도 자기가 있겠지,
하지만 좀 더 나은 당신 모습?
물론 긍정적인 당신 모습.”
“어쩌면, 당신과 겐토가 하는 말은 모두 다 옳아.”
마나츠가 하즈키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 맞대고
눈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아무것도 남지 않았어,
오직 당신만 생각해.”
마나츠의 말에 미네코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나오코가 떠올랐다.
“사람은, 어느 순간에는 나를 먼저 생각하는 게,
남을 위한 또 다른 배려가 되기도 해
내가 자길 떠났던 거처럼.”
하즈키가 마나츠의 손을 잡고
새하얀 손등에 입을 맞춘다.
“지금 이건, 하즈키 당신을 위한 거야?”
다시 마나츠의 손을 잡아
손등에 입맞춤하며 웃었다.
“자, 공평하지? 우리를 위한 거야.”
“칫, 역시 자긴 날 덜 사랑했어,
훗 난 공평한 건 질색인 이기적인 여자니까.”
매번 소리를 낼 때마다
다른 모양을 한 마나츠의
분홍색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마나츠는 정말 아름답다.
“마나츠, 당신은 정말 사랑스러운 여자야.”
마나츠가 눈을 흘기며 알고 있다는 듯,
턱을 들어 올리며 하늘을 올려보았다.
“이젠 그런 말에 넘어가지 않아, 어림없지.”
하즈키가 자리에 드러누워 눈을 지그시 감았다.
“당신과 겐토에게 빚이 많아.”
“알고 있다면, 잘 살아.”
마나츠가 그의 머리통을
자신의 무릎 위에 살며시 옮겨 놓았다.
“이건, 당신의 뒤통수가 예뻐서야,
딴생각은 말라고.”
“하하하하하.”
하즈키의 웃음소리에
꽃잎과 나뭇잎이 사각거리며 바람에 나부낀다.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고,
나오코는 하즈키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겐토를 등지고 있는 나오코의 등은
겐토의 차지가 된 지 오래다.
한참 시간이 지났는지, 다시 종소리가 울렸다.
나오코가 생각한 하즈키는 벌써,
이곳을 떠나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나오코의 콧등이 시큰거려 눈물이 툭, 하고 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