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블랙니카(히다 나오코)
달, 그림자 주요 등장인물
히다 료카-엄마의 과거를 이끌어 긴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주인공
2. 히다 하즈키-료카의 부
코하네-료카의 모
3. 후미코-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끌려감(코하네의 엄마로서 한국 이름 이영선)
4. 히다 나오코-미네코의 친딸로서 타다요시의 의붓딸, 하즈키와 의붓남매
5. 히다 타다요시-하즈키의 부
미네코-나오코의 친모
6. 켄지 겐토- 하즈키와 아주 오래된 친구
7. 마호- 코하네의 친구
8. 아키라- 코하네의 할머니 츠키노 집안의 모든 일을 맡은 집사로서
홀로 남은 코하네를 돌본다.
9. 마나츠- 켄토와 하즈키의 친구
히다 나오코 (열여섯 소녀)
두 모녀가 새로 이사 갈 집은 1층과 2층이 분리되어 있는 집이다.
2층은 작은 다락방까지 갖추고 있었고, 나오코는 자신만의 방을 차지할 수 있었다.
더 이상 미네코(나오코의 엄마)와 살던 동굴 같은 집에서 바퀴벌레를 보고 소리를 지르거나,
벽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곰팡이를 보며 기침을 콜록, 거리거나,
색이 다른 벽지로 덧대거나, 비바람이 칠 때마다 집이 무너져 내릴까,
걱정하는 일은 이제 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가끔 TV에 나오는 사람이 죽거나,
실종되거나 하는 뉴스를 보고 현관에 커다란 남자 구두를 놓아두지 않아도 된다.
이젠 새아빠의 직업에 관하여 자랑을 늘어놓을 수도,
새 오빠라는 사람이 사주는 모리나가 밀크캐러멜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나오코에게 가장 중요한 건 다신 술을 입에 대지 않겠다고 선언한
착한 엄마가 될 것이라는 미네고의 약속과 기대감일 것이다.
나오코는 지금까지도 친아빠 쥰의 죽음은 엄마의 암흑 같은 지독한 집착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그 집착은 미네코가 열 달 동안 품고 있었던 나오코까지 부정했었다.
나오코를 낳고 젖을 물릴 동안까지도 미네코는 아기 나오코를 품에 안기를 거부했다.
결국, 나오코는 엄마의 젖을 완벽하게 먹고 자라지 못했고,
성장이 더디기만 했고, 또래 아이들에 비해 어눌한 말투는 미네코가 나오코를
더욱 멀리하게 만드는 수단이었다.
그런 딸을 바라보던 쥰은 늘, 나오코를 감쌌고, 그의 사랑과 관심은 늘 나오코였다.
미네코는 점점 얼굴이 피폐해져만 갔고, 술을 입에 댈 때마다
딸 나오코를 보며 자신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간 아이라고 저주를 퍼붓곤 했었다.
미네코와 쥰의 아슬아슬한 결혼 생활은 쥰의 죽음과 함께 빠르게 사라졌다.
쥰의 죽음은 아직도 풀리지 않은 사건이 되었고,
그 후로 조금씩 미네코는 이상하리만큼 빠르게 안정을 되찾고 있었다.
나오코는 아빠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사실을 아직도 믿지 않았다.
쥰의 입은 늘 딸 나오코와의 미래를 말했고,
중학교 졸업식에 근사한 선물을 사준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을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미네코는 남편의 죽음을 빠르게 받아들인 후, 집에 머무는 시간을 줄이기 시작했다.
물론 쥰의 재산이 아주 미흡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에, 일을 하기 위해서라고 당연하게 생각했다.
아마도 미네코는 쥰의 죽음으로 적당한 보험금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살로 마무리된 죽음은 역시 미네코의 바람대로 되지 않았다.
나오코는 몇 날 며칠을 경찰서를 오가며 아빠가 자살이 아니라고,
나름의 추론을 해가며 좁은 의자에 머물며 경찰관들을 귀찮게 만들었다.
그때마다 경찰은 나오코는 치료가 필요한 지적장애가 있는 아이로 단정했다.
“엄마를 신고하겠다니, 또 그 얘기니?”
나오코를 경찰서에서 데리고 오는 날은 집 안에 독기가 가득했다.
나오코를 다다미 바닥에 앉혀 둔 채 미네코는 그 어떤 말도 없이 무섭게 딸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것은 끝없는 행동이었고, 화장실을 갈 수 없었던 나오코는
다다미에 오줌까지 지렸지만, 미네코는 눈 한번 끔벅이지 않았다.
그 첫날 나오코는 온 다다미를 눈물바다로 만들었다.
하지만 그 후 지속된 이 일에서 미네코와 눈싸움이라도 겨루듯 한 번의 깜박임도 지지 않으려 했다.
“엄만, 살까지 차가운 뱀 같아.”
오줌으로 젖은 다다미 바닥은 서서히 냉기가 차오르기 시작했고,
나오코는 그 말을 뱉음과 동시에 정신을 잃었다.
그 후로, 미네코와 나오코는 쥰의 죽음에 관해서 말을 나눈 적도,
쥰에 대한 그리움을 토하지도 않았다.
이것은 서로 꼭 지켜야 할 금기어가 되어버린 것이다.
잦은 연애로 미네코는 늘 깜깜한 밤이 되어서야 집에 발을 들였고,
언제나 나오코의 저녁은 다 식어 빠진 된장국이 전부였다.
나오코는 가끔 그때를 생각한다.
진심으로 엄마,라는 단어에 따뜻한 입김을 불어넣어 불러보고 싶었을 때를.
미네코가 겨울비를 잔뜩 맞은 채 술에 취한 날이었다.
미네코의 낯선 행동은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나오코가 잠든 방으로 비틀거리며 들어오더니
이불을 그녀의 목까지 덮어주며 가슴 위를 손으로 토닥거리며 말했다.
“내 딸... 미안해, 엄마가 정말 미안해.”
나오코는 자신도 모르게 미네코의 목덜미를 끌어안고 이제는 그만,
그녀를 용서해 주고 싶었다.
어쩌면 미네코는 정말 나오코 자신을 사랑할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아직 지우지는 않았다.
하지만 단 한 번의 행동으로 엄마를 용서하기엔 아빠를 잃어버린 상처가 너무나 컸다.
나오코는 언젠가 엄마가 죽기 직전에 그때 왜 나를 안아 줬는지 꼭 물어볼 것이라 다짐했다.
어쩌다 운이 좋아 미네코의 기분이 좋아 보일 때면
눈치 빠른 나오코는 엄마를 치켜세워주면 맛있는 저녁을 얻어먹을 수 있었다.
그럴 때마다 미네코가 먼저 음식에 입을 대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나오코는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나오코는 쥰이 다시 올 수 없다는 것을 되새기며 스스로 자신을 보호하기 시작했고,
점점 강하고 눈치 빠른 아이로 자리기 시작했다.
미네코의 이번 연애는 굉장히 성공적이다.
아빠가 될 주인공은 다행히도 미네코를 정말 사랑하는 것 같았다.
여전히 집에서 요리를 하지 않은 미네코가 갑자기 생 재료를 사 와
몇 날 며칠을 요리하는 시간으로 보내기도 했다.
나오코는 미네코가 분명 자기를 소개하며
요리를 정말 잘하는 가정적인 여자라고 떠들고 다닌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덕분에 나오코는 오랜 시간 동안 맛있는 음식으로 배를 채울 수 있었다.
나오코는 자신만의 신에게 빌고 또 빌었다.
드디어 죽음의 위협에서 벗어나 정상적인 사람들과 가족이 된다는 결론을 위해.
‘제발 그 바보 같은 남자가 엄마에게 집착하도록 만들어 주세요’
나오코는 자신이 만들어 낸 자신만의 신에게 쥐를 잡아 재물로 올리기도 했다.
겁이 없어야 생명을 유지하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한 나오코에게
쥐를 잡기란, 그녀가 할 수 있는 일 중 가장 쉬운 일이기도 했다.
결국, 나오코의 예언대로 덩치가 크고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는 엄마에게 푹 빠져 버렸고,
자기의 기도를 들어준 신에게 감사 인사도 잊지 않았다.
미네코는 모든 것이 자신의 완벽함이 완벽한 가정을 꾸리게 만들어 준 것이라며
나오코가 지켜야 하는 여러 개의 약속을 받아 내기 위해 술을 끊는다는 가장 어려운 약속을 해 버렸다.
모든 것이 나오코의 뜻대로 완벽하게 잘 돌아가고 있었다.
나오코는 자신의 노력이 통했다는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는 엄마를,
쥰을 죽여버린 엄마를 용서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자신만의 생각일 뿐, 그 어떤 것도 사실로 들어 나지 않았지만
나오코는 아마도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것이 분명했다.
새아빠가 있는 집으로 이사하는 날 아침,
나오코는 쥐꼬리를 잘라 미네코의 가방 안에 종이로 돌돌 말아 선물인 것처럼 넣어 두었다.
아직 별일 없는 것으로 보아 미네코는 눈치채지 못한 게 분명했다.
나오코는 미네코에게 약간의 미안함과 안타까움의 감정을 느끼며
오늘 하루는 복종할 것을 다짐하며
미네코의 주문이라면 뭐든지 잘 따르려 노력하는 중이다.
새아빠의 집은 따뜻한 온기가 새어 나오는 것 같았다.
문득 새 오빠의 엄마는 어떤 엄마였을까?라는 궁금증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집 바깥으로 온기가 새어 나오는 것을 느꼈다는 것은
분명 좋은 엄마가 있었던 집이 확실했기 때문이다.
열여섯 살 나오코의 새 삶이 시작되는 시점은 바로 지금, 이곳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나오코는 집 앞에 서있는 내내 상체를 기역자로 만들어 거꾸로 집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꾸로 보아도 바로 보아도 커다란 이층 집이 틀림없다.
집 앞에 커다란 나무가 무섭게 그녀를 노려보고 있는 것 같다.
나오코가 으름장을 놓으며 말했다.
“쳇, 까불지 마.”
나오코는 재빨리 나무로 달려가더니,
늘어진 나뭇가지를 까치발을 들어 잡아당겼다가 놓기를 반복한다.
그렇게 잎사귀를 여러 군데 찢어 놓기 시작했다.
“나오코 그만하지 못해?
아저씨가 금방 나올 거야, 약속을 잊은 건 아니겠지?”
나오코는 키득거리며 미네코의 얼굴을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열여섯 살 딸을 둔 미네코의 얼굴은 백옥 같았고 이름처럼 아름다운 고양이 눈을 하고 있다.
가난하고,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미망인의 얼굴은 이사 갔던 곳마다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이었다.
정착이 필요했던 미네코는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모자란 남편을 갖고 있는 여자들은
그녀를 싸잡아 그렇고 그런 여자로 만들기 일쑤였다.
나오코는 그런 미네코의 얼굴을 보며
조금은 불쌍함과 쥐꼬리를 보고 놀라 자빠질 모양새가 생각나 동정심이 확 올라왔다.
그제야 나오코는 몸을 세우고, 긴 머리카락을 귀로 걸며
입을 앙다물며 새침데기가 되어 미네코를 동정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엄마, 나 좀 봐. 어때? 얌전하지? 내가 말했잖아
착한 엄마가 되어 준다면 난 얼마든지, 영원히 착한 딸이 될 거야.”
검고 커다란 눈동자를 가진 미네코는
영원이라는 단어를 참 좋아하는 착한 딸이 될 나오코를 바라보며
이를 살포시 내보이며 말한다.
“고마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군.”
나오코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아니 아니,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
나오코는 고개를 살짝 돌리더니 다시 키득거렸다.
“나오코... 아빠가 될 사람의 얼굴을 잊은 건 아니겠지?”
다시 뛰어 도망가려는 나오코의 머리칼 끝을 어렵게 잡을 수 있었다.
“어딜 가려고, 가만히 있어 줘, 부탁이야.”
“아얏, 알았으니까 놔줘요.”
“제발, 나오코.”
머리칼을 잡고만 미네코도 놀랐는지 먼지를 털어 내듯,
손을 떼며 얼굴에 긴장이 올라와 약간의 붉은색이 돌았다.
“앗, 미 미안 나오코, 실수야.”
절절매는 미네코의 모습이 맘에 들었는지 나오코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2층에서 쇠로 된 계단을 내려오는 요란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고
그 소리에 화들짝 놀란 나오코가 뒤를 돌아보았다.
새아빠는 감색 셔츠를 걸치고 있었고,
얕은 가죽 신발은 부를 상징해 줄 만큼 화려하고 눈에 띄었다.
그의 팔목 위 금빛 시계가 나오코의 눈을 호사스럽게 만들어 주었다.
금세 날아오기라도 한 듯 좋은 직업을 가진 덩치 큰 새아빠가 나오코 앞에 서있다.
나오코의 눈과 입이 커다랗게 움직이며 그를 올려보는 나오코의 고개가 90도로 젖혀졌다.
정말이지 커다란 남자였다.
“아저씨.”
금빛 시계를 차고 있는 새아빠는
나오코가 또래 아이들과 다른 약간의 모자란 듯한 순수함과 쾌활함에
하얀 잇몸을 내보이며 마치 아주 오랜만에 만난 친 딸인 양 그녀를 꼭 안아 준다.
그는 이 아이라면 다시 시작할 결혼 생활이 반짝반짝 빛이 날 것이라며 어떤 의심도 하지 않았다.
아주 오랫동안 반짝임을 보지 못한 그는 나오코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쁨에 치아가 만개했다.
“나오코! 어서 오너라 환영한다.”
아저씨는 두 팔을 벌리고 나오코와 미네코를 꼭 안아 주었다.
미네코는 이 찰나가 멈추지 않고 계속되길 두 눈을 질끈 감고 이 순간을 만끽했다.
‘그래, 완벽한 가족이 되는 거야’
새아빠가 말했다.
“미네코, 여기가 이제 우리가 함께 살 집이오, 준비됐지?”
그는 한쪽 눈을 찡긋하며 미네코가 사랑스럽다는 듯 손을 꼭 잡아 이끈다.
“아... 타다요시, 짐 정리가 된 텅 빈 집에서 마지막 잠을 자는 것보다 긴장돼요.”
또다시 쇳소리가 통통 소리를 내며 나오코를 반겨주는 듯하다.
“아저씨, 제 방은 2층이 맞죠?”
새아빠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갸르르, 웃음소리를 내며 곧장 집안으로 뛰어갔다.
“미네코, 우리도 들어가지.”
꽃이 피기 시작하는 파란 하늘의 아름다운 봄날, 미네코에게 꽃 몽우리가 활짝 피었다.
삐걱삐걱, 오래된 나무에서 발걸음을 낼 때마다 소리가 났다.
적막에 맞춰 고양이처럼 발소리를 죽이며 걷는 자신이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2층은 고요했다.
미로처럼 뻗어 있는 복도는 나무 바닥으로 되어 불을 켜지 않으면
바닥이 시커먼 색을 띠어 마치, 그곳을 걸으면 지하로 뚝, 떨어져 내릴 것만 같았다.
나오코는 눈에 보이는 스위치마다 딱, 딱, 소리를 내며 지그시 눌렀다.
복도 맨 끝으로 달려가 방문을 열었다.
한눈에 자신의 방을 찾아낸 자신을 기특하다며
감사의 인사를 신에게 기도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자신의 방 안으로 발을 딛다가 복도 끝 방의 문이 궁금해졌다.
미끄럼을 타듯, 복도 끝으로 조용히 뛰었다.
노크했지만, 역시 아무도 없는 것이 분명했다.
처음 얼굴을 맞닥뜨렸을 때,
새아빠 히다 타다요시의 아들 히다 하즈키는 나오코의 눈을 보지 않았다.
무언가 질문을 던져도 먼 곳을 보거나 땅으로 눈을 떨구며 대답했다.
처음 마주했을 때 식당에서 하즈키의 행동은 나오코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나오코는 미네코의 딸이었고,
그녀는 처음으로 남이라는 존재지만 남매가 되어야 하는 존재인 그에게 관심을 받고 싶어 했다.
“히다 하즈키, 맞아, 하즈키의 방이 틀림없어.”
잠시 창문을 통해 들어온 빛에 눈이 반사된다.
나오코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오래된 종이의 냄새와 나무 냄새가 섞여 기분을 좋게 만든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먼지가 뿌옇게 쌓인 액자를 훅, 하고 불어 본다.
네 살배기 정도 되어 보이는 볼이 통통한 아이를 안고 있는 그녀는 나오코의 눈을 멈추게 했다.
그녀의 얼굴은 아이가 너무 사랑스러운 듯 해바라기처럼 얼굴을 활짝 열고 있었다.
아이를 안고 있는 그녀의 손은 아마도 아이와 이별할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의 활짝 핀 얼굴은 나오코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진짜 엄마의 것이었다.
둥그렇고 커다란 눈이 마치 울음 하듯 훗, 하고 웃어 본다.
작은 나오코의 손은 액자에 내려앉은 먼지가 햇볕에 보이지 않을 때까지 계속 닦았다.
하즈키의 방에서는 나무 냄새가 난다.
나무의 벌어진 틈새로 접착제가 노란빛을 띠고 발라있었다.
나오코의 코가 시큼, 눈은 저절로 찡긋거렸다.
좁은 방을 원으로 걷다가, 걷다가 하얀 침대 위에 폴짝, 하고 뛰듯 누워 보았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길게 내뱉는다.
햇살이 드리워져 따뜻했다.
다시 삐걱삐걱, 묵직하고 아주 조심스러운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드르르륵, 쾅”
나오코가 놀라 문 쪽을 바라보았지만, 벌떡 일어나기엔 이미 늦은 듯하다.
“야 너 뭐야?”
하즈키의 목소리는 아주 신경질적이고, 쇠붙이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오코는 발걸음 소리를 들었다는 듯, 일부러 놀리려는 듯 천천히 침대에 걸쳐 앉았다.
“앗, 하즈키닷.”
하즈키는 당황스럽지도 않다.
“그래 넌 나오코지... 이제 좀 나가줄래?”
벽에 기대서서 손가락으로 나오코의 방을 가리킨다.
“응, 오늘은 그럴게
그런데 히다 하즈키는 이제 히다 나오코의 오빠야
그러니깐, 좀 더 친절해지는 연습을 하도록 해
나오코는 친절한 게 좋아.”
성과 이름을 또박또박 천천히 읊조리며 천천히 발을 옮겼다.
하즈키는 나오코가 밖으로 나가기가 무섭게 문을
쾅, 쩍, 하는 소리가 나도록 닫아 버렸다.
나오코는 문 뒤에서 입을 바싹 갖다 대며 말했다.
“하즈키,
나는 오빠 하즈키가 사주는 모리나가 캐러멜이 먹고 싶어
달콤한 밀크캐러멜.”
갸르르, 하며 나오코는 통통 뛰는 발소리를 내며 뛰어다닌다.
하즈키는 다시 한번 문을 확인하고 찰칵 잠갔다.
“귀찮아지겠군...”
액자 속 하즈키의 엄마는 여전히 하즈키를 보며 웃고 있다.
‘이 상황에 웃음이 나와?’
침대 위 하얀 베개가 날며 액자에 부딪혔다.
액자 속 활짝 핀 해바라기 엄마는 보이지 않는다.
하즈키는 엄마를 많이 가져 본 선택받은 부자다.
초등학교 때부터 받은 놀림 속 단어들은 중, 고등학생 시절까지도 쭉, 꼬리표를 달고 지내왔다.
그리고 그의 엄마들은 모두 다 빼어난 미모를 자랑했다.
간혹, 그 엄마 중, 하즈키의 남자 담임 선생님과 눈이 맞아
남모를 끔찍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져 시름시름 앓았던 적도 있었다.
처음에는 새엄마가 생긴다는 소식에 뛸 듯이 기뻤지만,
그 기쁨이 타다요시에게 자식에 대한 책임감과
엄마를 모으는 편집증 환자를 만들었다는 것을 하즈키는 받아들였고,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히다 타다요시는 겉보기엔 아주 정상적이고,
매너 좋은 신사였고, 자상한 아버지이며 게다가 부자다.
완벽한 타다요시에게 엄마의 빈자리를 갖고 있는
정신과 약을 복용 중인 아들과 블랙 니카(위스키)는 작은 약점이었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주 긴 시간 동안은 하즈키와 타다요시만의 집이었다.
1년여 시간 동안 웃음소리도, 음식 냄새도, 인기척도 없었다.
그저 블랙 니카 병이 부딪는 소리뿐이지만
어쩌면 하즈키는 그 적막을 더 행복하다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제까지 타다요시의 곁에 있었던 새엄마라는 사람들의 공통된 부분은
돈 냄새를 기가 막히게 잘 맡는다는 거다.
물론, 모든 사람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돈 냄새를 맡았어도 타다요시를 사랑하게 되었다면 문제가 될 게 아니었다.
많은 새엄마들 중 세 번째의 사람은 하루카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였다.
특이하게 그 여자는 아버지 보다 더 나이가 많은 것 같았지만
하즈키는 하루카가 떠날 때까지도 정확한 나이를 알지 못했다.
아마도 그 둘만의 비밀이었는지도 모른다.
하루카는 아버지가 유일하게 먼저 이별을 통보한 사람이었다.
하루카는 엄마로서 최고의 점수를 받을 만한 사람이었다.
타다요시에겐 순종적이었고, 하즈키에게는 늘 상냥했고 자애로웠다.
언제나 밥상에는 생선찜과 값이 꽤 나가는 채소가 있었고,
식사를 마치고 난 후에는 그 당시 먹기 힘든 과일과 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하즈키는 중학생이 되고부터 항상 자기의 속옷을 스스로 해결했고
그것은 그의 자존심과도 같은 것, 그렇게 일상이 되어가고 있던 시기였다.
그때 하즈키는 한참 끝날 것 같지 않은 극도의 신경질적인 사춘기를 겪고 있을 때였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들어선 순간,
하즈키는 입이 쩍 벌어진 채 한참을 서서
집 마당에 길게 늘어놓은 자신의 하얗게 빛나는 팬티를 구경하고 있어야만 했다.
침대 밑에 쌓아 놓았던 속옷이 이렇게 많을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하즈키는 그것을 셀 수도 없이 빠르게 정신을 차리고
빛의 속도로 속옷을 걷어 가방 안에 쑤셔 넣었다.
그렇게 하즈키가 처음 집을 나와 가출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하루카가 아버지와의 사이에 금이 가기 시작한 건
속옷 사건이 일어난 이후였고, 분명한 건 하즈키가 원인이란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하루카는 엄마로서 아내로서 완벽한 사람이었다.
그녀의 잘못을 굳이 탓한다면 과한 친절함이라고 해야겠다.
타다요시가 이별을 선언한 후에도 하루카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음식을 몰래 두고 가곤 했다.
그녀는 정말 하즈키의 엄마가 될 수도 있었던 사람이었다.
한동안 하즈키는 하루카의 마음에 상처를 준 것 같아 가끔 하루카 생각만 하면 죄책감을 느꼈다.
지금까지도 하즈키는 그녀의 달걀말이를 잊을 수가 없다.
하루카는 여전히 하즈키에게 아주 좋은 느낌의 추억 속 한 페이지에 있는 사람이다.
아마도 타다요시 또한 하루카를 무척이나 사랑했을 것이다.
그건 정말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이별이 더욱 이해되지 않았다.
짧은 가출로 집에 돌아온 후 하즈키는 되려 아버지에게 용서를 빌었고,
모든 것이 다시 제자리로 갈 줄로만 알았다.
또한 하루카도 돌아올 줄만 알았다.
하지만 제자리로 돌아간 건, 하즈키뿐이었고, 그들은 각각의 자리를 선택했다.
하즈키는 아버지의 긴 침묵을 견디며 질식할 것 같은 기분으로 지내왔다.
하즈키는 그 이후로 아버지가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연애를 했지만,
집으로 들이지는 않았다는 것에 조금은 고마운 마음을 갖긴 했다.
하즈키가 성인이 막 된 참이었다.
어느 순간, 타다요시가 술을 입에 대지 않은 정신으로 저녁상을 차리고 있었다.
역시 침묵은 아버지라는 존재를 말해주는 단어였지만
하즈키를 바라보는 눈은 웃고 있었고,
내내 반찬을 잡은 젓가락의 도착지는 하즈키의 흰쌀밥 위가 되었다.
하즈키의 짐작으로 가장 먼저 하루카를 떠올렸다.
내심 하루카가 다시 돌아올 수도 있다는 기대와 상상을 하면서
기분 좋은 아버지의 비위를 맞춰 가며 밥을 두 그릇이나 비웠다.
사실, 하즈키는 엄마에게 미안할 정도로 따뜻한 하루카를 맞이할 마음에 설레기까지 했었다.
“하즈키, 오늘 손님이 올 거다.”
이상했다. 분명 하루카가 온다면 그녀라고 말을 해줬을 테다.
하즈키의 짐작이 어긋난 것이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타다요시는 다급하게 뛰어가더니, 가느다란 목소리의 주인공을 맞이했다.
그들이 집에 발을 들인 순간, 들어오는 바람이 그들을 타고 머스크 향을 내뿜었다.
억지로 삼킨 두 그릇의 흰쌀밥을 토해 내고 싶었다.
어린 소녀는 이제 막 아이 티를 벗은 느낌에 약간 부족해 보이는 듯했고,
그녀의 엄마는 아주 큰 키에 하얀 얼굴, 새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있었다.
이상했던 점은 어린 소녀는 주먹을 보름달처럼 동그랗게 꽉 쥐고 있었고,
소녀의 엄마는 주먹 쥔 손을 잡고 있었다.
뭔가 어울리지 않고 어긋나 보이는 그들을 모녀라고 소개했다.
하즈키는 첫 만남 때도, 그리고 지금도 어떤 말도 없이
그들을 집 안으로 들였다는 것에 심한 모욕감을 느꼈다.
당혹스러움에 아버지를 올려보지만,
타다요시는 미네코의 미소에 어쩔 줄 몰라 연신 웃는 꼴이었다.
미네코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의 얼굴은 소름이 끼칠 정도의 아름다움을 갖고 있었다.
하즈키가 어릴 적 보았던 동화책 속의 마녀와도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쩌면 밤마다 그 아름다운 얼굴이 흉측한 마녀의 얼굴로 변한 걸 봤던 것 같기도 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마녀가 마법을 읊는 소리와 같았다.
“하즈키? 반가워 잘 부탁해.”
하즈키는 당장이라도 하루카를 찾아가
제발 나의 엄마가 되어 달라고 찾아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게 안 된다면 자기와 둘이 살 수는 없겠냐고,
하루카를 붙잡고 애원하고 싶었다.
제발 타다요시를 잡아 달라고 무릎이라도 꿇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즈키의 머릿속은 그날 미네코가 보여주던 입꼬리가 올라간
저주 섞인 마법과 같은 미소를 잊을 수가 없다.
자꾸만 생각은 그렇게 오류를 부르고 있었다.
또한 나오코의 주먹 쥔 손은 아마도 자신을 방어하는 무기나,
이 집 안을 먹어 치우겠다는 결심이란 생각이 스치며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날 이후, 이 집은 하즈키가 더 이상 머물 곳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1층에서는 작게 틀어 놓은 음악과 주방 기구들이 다투는 소리,
누군가가 통통 발소리를 내며 계속 뛰어가는 소리,
타다요시의 흥얼거리는 소리, 음식 냄새, 향수 냄새,
그리고 웃음소리가 가끔 들리더니,
다섯 번째 엄마의 혀 짧은 소리들이 하즈키의 신경을 거스르고 있었다.
나오코가 말한 모리나가 밀크캐러멜이 떠올라 벌떡 일어나 고개를 휘휘 젓는다.
봄의 신은 반짝이는 아름다움의 꽃을 피우고,
다시 지기를 반복하며 여름의 양기를 듬뿍 받기 위해 재촉하고 또 재촉했다.
하즈키에겐 시간이 너무 더디다.
타다요시의 강요로 들어간 대학은 역시 자기 능력에 비해 부족했고
1년도 채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 포기해 버렸다.
하나뿐인 아들의 미래를 자기 손으로 뭉갠 하즈키를
기본도 없는 자식이라며 부모 없이도 완벽하게 자란 친구 겐토와
비교하는 소리를 늘 들어야 했다.
타다요시는 학교를 그만둔 즉시 한 푼도 지원해 줄 수 없다고 쐐기를 박은 참이었다.
아버지의 돈이나 갖다 쓰는 파렴치한이 아닌 아들이란 것을 알고 있기에
아들을 나무랄 수 있는 말을 선택하기가 어려웠다.
하즈키는 아버지가 억지를 피운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고
아버지의 고집에 다시 학교를 운운할 것이라 짐작하고 있었다.
그 짐작이 실행되긴 전 하즈키는 빠르게 직장을 잡았고,
그 모습에 아버지는 아들을 포기하는 법을 처음 배우게 되었다.
시간이 갈수록 손안에 쥔 모래알이 빠지듯,
아들은 그의 곁에서 서서히 멀어져 가고 있었다.
하즈키는 자동차 공장의 부품 따위를 싣고 나르며
몸을 많이 쓰고 시간을 할애하는 일을 일부러 도맡아 했다.
알다시피 그는 매일 독립을 계획했고
매일 밤 꿈속에서도 아스팔트 위를 달린다.
하지만, 자신의 독립으로 타다요시의 삶을 상상만으로도 엿보기가 괴로웠다.
아버지는 분명 하루카를 보낸 것처럼 혼자가 될 것이 뻔했다.
물론 그 모습을 보지 않고 살아갈 수도 있겠지만,
아버지가 쓰는 특별한 무기임을 알면서도 하즈키는 자신이 없다.
하루의 시간은 온통 운전과 몸을 쓰는 일에 몰두했으며,
퇴근 시간은 밤 열두 시를 꼬박 채우곤 했다.
자연스럽게 미네코 모녀와 부딪히는 일도 줄었고,
타다요시와 다투는 소리도 들을 필요가 없었다.
그는 혼자가 아니지만, 혼자인 삶을 나름 잘 터득하며 잘 살아가는 중이다.
꽃향기가 코를 찔렀다.
자연스레 꽃의 자리로 발을 돌리게 되는 이유이다.
밝은 달빛을 바라보며 어렴풋한 기억을 더듬었다.
엄마의 얼굴은 사진을 보면 기억이 났다가,
갑작스레 떠올리려 할 때마다 떠오르지 않아 애를 먹는다.
고개를 젓고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역시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하즈키의 엄마는 타다요시와 놀라울 정도로 부부 사이가 좋았다.
군인 신분이었던 직업 특성상 엄마와 하즈키는 타다요시를 자주 볼 수가 없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처럼 따뜻했던 날들도 없던 것 같다.
그녀는 타다요시가 없는 집 안에서도 한결같이 정갈한 모습이었고,
타다요시가 마치 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를 존경하고 받들었다.
물론 그런 그녀를 끊임없이 사랑했고 끊임없이 안아 주던 그였다.
불행하게도 타다요시의 여러 여자 중 그녀를 닮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것은 아버지가 완벽함을 갖추고도 항상 허탈함에 몸부림치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타다요시의 그녀는 유독 푸른 나무와 잔디에서 풍기는 풀 냄새를 좋아했다.
집 앞 공원은 늘 엄마와 아들이 그림 하나를 만들어 내는 곳이다.
잔디 위를 뛰놀던 기억은 굉장히 선명했다.
엄마는 하즈키와의 눈높이를 맞추며 함께 아장거렸다.
먼 기억 속 엄마의 오리 같던 그 모습은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다.
밤의 어둠이 내려앉은 공원, 그 빈자리에 앉은 타다요시의 등이 외롭다.
봄이 반가운 건 분홍, 노란 꽃잎이 달빛에 반짝이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반짝임은 아마도 타다요시의 그녀와도 같았다.
거친 소리가 들릴까, 늦은 밤, 신발을 벗고 계단을 올라간다.
하즈키가 또다시 대학을 포기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네코는 처음으로 그에게 억지스러운 설득이 담긴 대화를 청해왔다.
아마도 아버지의 생각일 것이라 미루어 짐작은 했었다.
미네코의 눈과 말에 하즈키는 속아 넘어가지 않았다.
분명 거짓된 감정을 말하는 게 눈에 보였다.
미네코는 그가 대학 공부를 계속해야 한다는 종류의 관심이 아닌,
아버지에게 관심받기 위한 행동일 뿐, 입은 움직이고 눈은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이 분명했다.
하즈키는 마녀처럼 주술을 읊는 미네코의 움직이는 붉은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하즈키는 비틀어 대답했다.
“저를 설득해 주셨다고, 아버지께 꼭 말씀드리겠습니다.”
하즈키는 이런 날이 올 때마다 하루카에 대한 죄책감으로 치를 떨었다.
주먹밥 사건 이후, 미네코와 말이 오고 가는 건, 꼭 타다요시가 있는 날에만 이루어졌다.
미네코는 마치 날개를 달고 사는 여자처럼 붕붕 날아다녔다.
늘 치장하고 있는 모습과 코를 찌르는 향수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다.
미네코가 만드는 음식에도 혹시나 향수가 한 방울씩 들어간 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음식을 먹어 치워야 할 때에는 어쩔 수 없이 간장을 부어 달걀에 비벼 먹기 일쑤였다.
재미있는 건 유일하게 미네코가 끓인 차는 그녀의 향내를 이겨 먹었다.
식사 후 먹는 차 한잔은 그나마 하즈키의 위를 위로해 주었다.
듣지 않아도 되는 목소리가 소리를 낸다.
“하즈키... 오늘도 늦었구나, 주먹밥을 만들어 놨어 올라가서 먹으렴.”
타다요시가 방 안에 있는 것이 분명했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느라 하마터면 미네코의 얼굴에 침을 뿜을 뻔했다.
어울리지 않는 다정한 목소리로, 진주색 실크 가운을 여미며 눈을 가늘게 뜨더니
향수 냄새를 풍기며 돌아서서 방으로 사라졌다.
역시나 방 안에는 타다요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 큰 녀석까지 신경 쓰느라, 당신이 고생이야.”
하즈키는 쟁반 위에 올려놓은 주먹밥 두 개를 들고 키득거리며 이층으로 발을 옮겼다.
미네코는 혹시나 일찍 귀가할 아들이 겁이 나,
늦게 들어온 아들에게 주먹밥으로 상을 내리는 엄마 같다.
하즈키는 주먹밥을 손으로 쥐고 빤히 쳐다본다.
미네코가 걸친 실크 가운의 낯익은 디자인을 곱씹어 보며 이를 악물었다.
“엄마... 거야.”
미네코가 보란 듯이 엄마의 옷을 걸치고 자신의 앞에 서게 한 아버지가 더 미웠다.
엄마의 물건에 손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하즈키는 아버지가 잘 살기만을 더없이 바라지만,
엄마의 물건에 손을 댔다는 건, 치를 떨게 하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분명 타다요시는 허락했을 것이다.
실크 가운은 유일하게 남은 엄마의 물건이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하즈키는 주먹밥을 내려보더니 미네코의 향수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코가 실룩거렸다.
갑자기 주먹밥이 손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분명 이것은 하즈키의 의지가 아니었다.
나동그라진 주먹밥의 형체가 흐트러졌다.
하즈키는 어쩔 수 없이, 또는 다행이다, 는 생각을 하며 그것을 쓰레기통으로 던져버렸다.
“어차피... 떨어졌어.”
쓰레기통으로 던진 주먹밥이 둔탁한 소리를 낸다.
“툭.”
타다요시가 엄마의 생전 마지막 생일에 선물한 실크 가운,
엄마는 하루도 빠짐없이 그 옷을 걸치고 집 안을 서성였다.
그 옷을 입고 불러 주던 엄마의 자장가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역시 한밤의 달빛을 이길 수 있는 아름다움은 빛나는 엄마뿐이다.
- 일요일의 가족
쿵쿵 쿵, 쿵쿵
“하즈키, 일어나, 지금 잠을 더 잔다면 무슨 일이 날지 나는 장담 못해.”
쾅쾅쾅.
반사적으로 하즈키는 잠겨 있는 문을 열었다.
열지 않고 대답만 했다면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일요일 아침은 이 집에 있는 사람들이 같은 자리에 앉아 아침을 먹어야 한다.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나오코의 말처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다행히 아직 아무도 겪지 않았지만 좋지 않을 일임이 뻔하다.
이 약속은 미네코의 계획이다.
한데 마치 누군가 억지로 짜 놓은 대본을 읽어 댔고,
도가 지나침은 온갖 유세와 거드름을 이끌었다.
그 모습에 타다요시는 노력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고 많이 도와주라는 말만 되풀이한다.
아마도 이 시간은 이들 모두 갖고 싶지 않은 시간임이 틀림이 없다.
하즈키는 오랜만에 숙면한 탓인지 얼빠진 얼굴을 하고 급히 계단을 내려갔다.
곧이어, 나오코도 뒤따라온다.
하즈키의 얼굴을 보자마자 온갖 수다를 떨었지만
하즈키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기에 아무 대답도 할 필요가 없다.
나오코는 이른 아침부터 서둘렀는지
미네코처럼 얼굴이 말끔하게 단정되어 있었다.
늘어뜨린 머리카락에서 뿜어내는 비누 향이 나쁘지 않다.
나오코는 타다요시에게 달려가 인사를 한다.
“아빠, 안녕히 주무셨어요?”
하즈키는 나오코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아빠,라는 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실룩거렸다.
“그래 나오코, 좋은 아침이구나! 자 자리에 앉자.”
타다요시의 눈이 반달이 되어 있었고 입술이 움직이는 모양과 들리는 말이 틀려 보였다.
무슨 말을 할지 꽤 고민한 모양새다.
하즈키는 생각했다.
‘어색하기 짝이 없군.’
하즈키는 이를 악물고 웃음을 참아 보려 하지만 역부족이다.
모녀를 맞이하고 꽤 오랫동안 웃음이 없던 하즈키가 참지 못하고 처음으로 웃음을 뿜어 댔다.
“풋, 하하하 아... 참을 수가 없어.”
타다요시는 자기 모습을 들킨 것 같아 얼굴이 금세 붉으락푸르락 해졌다.
하즈키의 웃는 모습을 보고 기분이 좋았는지
엄마와 아빠의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나오코도 이내 따라 웃는다.
하즈키는 나오코를 보며 또다시 속으로 읊었다.
‘저런 멍청이.’
미네코의 찡그린 미간은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았다.
미네코는 돌아서서 생선찜을 담아 식탁에 내려놓으며
자기 음식을 누군가 자랑해 주길 원하는 것 같았다.
“오늘은 아침부터 다들 기분이 좋은 것 같은데?
음, 여보 먼저 식사해요.”
“음, 그래 냄새가 아주 좋은데?”
결국 미네코는 자신이 원하는 말을 듣진 못했지만,
타다요시를 보며 눈을 생긋거렸다.
하즈키는 눈에 눈물이 잔뜩 고여 결국, 눈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아직도 입가는 웃고 있었다.
웃음기 하나 없는 싸늘히 식은 미네코는 된장국을 호로록, 하고 마신다.
그 뒤엔 눈을 가늘게 내리깔고 무엇인가를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하즈키는 소름이 돋았다.
그녀가 눈을 내리깔자마자, 나오코의 행동이 갑자기 바빠졌다.
미네코가 나오코에게 내린 분명 무언의 약속, 이던가 무언의 명령을 내린 것이 분명했다.
아니 작전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다시 보니 나오코는 저 여자의 딸이 분명하다.
현란한 젓가락 솜씨로 생선을 파헤치더니 가장 부드러운 부분의 살을 조심조심,
가시를 발라 저 바보 같은 아저씨의 소복이 쌓인 밥 위에 얹어준다.
눈을 내리깔고 있던 미네코는 딸의 머리를 어색하게 쓰다듬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어색해 보이던지
저 여자는 나오코의 머리를 처음 쓰다듬는 것이 분명해,라고 하즈키는 생각했다.
미네코는 하즈키를 살짝 보며 말했다.
“우리 딸은 엄마는 안중에도 없네?
여보, 당신 생각하는 건 나보다 딸이 낫네요.”
바보 같은 타다요시는 똑같은 젓가락질을 자랑해 보이며,
향수 냄새가 가득하고 양념이 잘 배어든 쪽의 살을 미네코 밥 위에 얹어주었다.
“자자. 이럼 됐지? 하하, 어서들 먹지.”
하즈키는 다시 웃음을 뿜을 뻔했지만 입을 꾹 다물었다.
하즈키는 또다시 냉장고 안의 달걀을 찾아 밥그릇에 터트려 간장을 붓는다.
휘휘 젓는 속도가 굉장히 빠르다.
식은 밥알이 목 안으로 후루룩 소리를 내며 잘도 넘어갔다.
하즈키는 쉬지 않고 소리를 내가며 우적우적 씹어 댔다.
타다요시는 왜 다른 요리를 먹지 않냐고 묻지도 먹어 보란 소리도 하지 않았다.
미네코가 조금 남은 버터를 하즈키에게 내밀었지만,
이미 밥그릇을 긁는 소리가 났다.
미네코는 또 한 번 눈을 가늘게 뜨더니, 입가에 묻은 양념을 혀로 핥아 댔다.
그녀는 붉은 립스틱을 맛있게 잘도 먹었다.
하즈키에게 된장국을 내밀며 이번에도 거절할 거니?라는 눈빛을 보냈다.
“하즈키... 된장국 좀 마셔.”
타다요시가 그를 한번 훑어보곤, 빠르게 눈을 돌렸다.
어쩔 수 없이 향내가 가득한 된장국을 한 번에 들이켜고 꿀꺽 넘겼다.
꽤 오랫동안 숨을 뱉지 않았더니, 그녀의 향내가 덜 했다.
나오코는 입을 벌리지 않은 채 음식을 소리 내지 않고 오물오물 잘도 씹어 먹었다.
“엄마, 더 주세요.”
나오코는 밤새 배고픔을 어떻게 참았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음식을 무섭게 먹어 치웠다.
하즈키는 오랫동안을 불편한 상황을 빠르게 빠져나가는 방법을 터득해 왔다.
하지만, 모든 것이 미네코의 뜻대로 굴러갈 뿐
자신이 원하는 상황이 되어가려면 더디기만 할 뿐이다.
이번에도 그녀는 뜻을 굽힐 줄을 모른다.
하즈키가 말했다.
“잘 먹었습니다, 먼저 일어날게요.”
일어선 하즈키의 손을 잡아끌어 다시 앉힌다.
미네코의 가느다란 손목에서 나오는 힘이 그의 팔목을 아프게 했다.
손가락에서 느껴지는 압박감은 굉장히 신경질적이다.
반사적으로 털썩 주저앉게 된 하즈키는 미네코를 어이없게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하즈키 또 잊었구나, 차도 마셔야지?
금방 준비할 테니 기다리렴.”
그가 팔을 뒤로한 채 미네코의 손이 스친 그곳을 청바지에 쓱쓱, 닦아 냈다.
미네코는 애꿎은 나오코에게 눈을 흘기며 말투는 친절하게 주절거렸다.
“나오코, 다 먹었으면 좀 도와야지?”
착한 엄마의 목소리에 착한 딸이 반응하며 입을 비죽거린다.
“알겠어요.”
하즈키의 커피는 설탕을 아무리 넣어도 쓰기만 했다.
아버지는 난감할 때면 자주 두 손을 깍지 끼며 머뭇거리는 버릇이 있었다.
지금이 딱 그 모양새다.
“음, 하즈키 할 말이 있어.”
타다요시는 아들이 자신을 봐주길 바랐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아들은 아버지를 보지 않았다.
하즈키는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말씀하세요.”
그리고 마음속으로는 다른 말을 뱉었다.
‘하지 마세요,라고 말해도 어차피 할 거면서...’
타다요시는 자신을 보지 않고 대답하는 아들을 빠르게 포기하며 말했다.
“우리 가족이 함께 지내는 시간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구나
그래서 말인데 이제 미네코에게 어머니란 호칭이 필요할 것 같아
하즈키 네 생각은 어때?”
미네코는 손을 탁자 밑으로 은밀하게 내리더니 타타요시의 허벅지를 어루만진다.
그들은 이미 계획된 일에 하즈키를 억지로 끼워 맞추려고 했다.
이미 나오코의 아버지는 타다요시가 되어 있었고,
하즈키의 의견은 필요도 없이 미네코는 이미 그의 어머니가 되어 있었다.
하즈키에게 이런 겉치레는 중요하지 않았고,
아버지가 잘 살기만을 바랄 뿐,
또다시 자신 때문에 아버지의 인생이 새로이 달라지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한데 만약, 하루카라면, 어머니란 소리를 들으려 하진 않았을 것이다.
미네코란 여자는 하즈키가 정말 자기 아들이 되길 바라는 건지,
아버지의 사랑을 받기 위함 인지,
집 안에서의 작은 권력을 부리고 싶은 욕망인지, 의도가 궁금하긴 했다.
하즈키는 설탕을 세어 보지도 않고 커피가 끈적할 때까지 꾸역꾸역 집어넣었다.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대답했다.
“네, 알았어요.”
하즈키의 대답은 마음처럼 아주 간단했다.
20년을 살면서 가장 많이 얘기하고 들었던 단어가 어머니란 단어였다.
하즈키에게 어머니라는 단어는 가장 쉽고 또, 가장 어렵다.
보란 듯이 끈적한 설탕물을 한 번에 들여 마시고 얕은 트림을 내뱉었다.
자꾸만 달걀의 비릿함이 올라와 구역질이 치밀었다.
미네코의 신경질적인 손은 타다요시의 허벅지를 놓아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일주일에 한 번 돌아오는 휴일,
벌써 하루의 3분의 1을 다시 또 두 모녀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하니,
바싹 약이 올랐다.
차라리 휴일 없이 근무하는 편이 낫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는다.
하지만 부품 나르는 계약직 직원에게 휴일에 일을 맡겨
수당을 챙겨주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숨이 막힐 것 같은 느낌에 하즈키는 쌕쌕, 소리를 내며 예쁘게 접어놓은 종이 안의 약을 털어 넣었다.
2층의 공간과 하즈키의 방은 독립되어 사용하던 자신만의 공간이었다.
하지만 나오코와 같은 층을 쓰기 시작하기부터
제 멋대로 문을 열어젖히는 그녀의 버릇없는 행동 때문에 늘,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고, 문을 잠가 놓을 땐 거센 탕탕거림으로 예민함마저 포기하게 만들어 버렸다.
오직 달이 방을 비추어 줄 때만이 완벽하게 그만의 공간이 될 수 있다.
하즈키는 책상 의자를 밀어 놓고 커튼을 모두 닫는다.
엄마의 미소는 살짝 금이 간 유리 덕에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듯해 보였다.
사진만 살짝 꺼내 확인해야 할 것 같다.
빛나는 갈색 눈을 크게 뜨고 꺼내 보더니
다시 웃는 엄마의 얼굴을 확인하며 자기의 입꼬리도 올려본다.
사진을 손바닥으로 닦으며 겉옷 안주머니에 살짝 찔러 넣었다.
문을 잠가 놓는 것을 잊었는지 나오코는 뻔뻔하게 방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하즈키는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얏, 너, 뭐야? 노크 몰라? 젠장."
정말 화가 난 목소리다.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하즈키가 듣지 못했다고 생각 안 해 봤어?”
나오코는 노크 한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그는 귀찮다는 듯, 그녀를 밀쳐 냈다.
조금은 강압적인 말투로 내비치며 말했다.
“비켜 주겠어?”
문을 막고 서있는 나오코는 할 말이 많다는 얼굴이다.
“하즈키, 어디 가려는 거야? 나도 데려가.”
“넌 왜 그렇게 멋대로 야? 비켜.”
나오코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즈키는 나오코가 자기의 모습을 엿보고 있었다는 생각에
잠시 나오코와 닮은 미네코의 눈이 떠올라 고개를 저었다.
문에 바싹 기대고 있던 나오코의 팔뚝을 잡고 밀쳐 내더니
빠른 속도로 잡음을 내며 계단을 내려갔다.
“앗, 아프잖아.”
나오코는 이내 힘에 밀리더니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나오코는 씩씩, 대며 일어나 뒤따라 계단을 내려갔고,
사라진 하즈키를 보더니 다시 계단으로 올라가 하즈키의 방 창문을 열고 그의 동선을 확인했다.
나오코는 하즈키를 본 순간부터 찰거머리처럼 따라다니기 일쑤다.
학교를 옮긴 나오코는 몇 달이 지나도 혼자였고,
친구를 만들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믿는 거라고 가족의 일부인 오빠라는 존재다.
하지만, 그의 마음을 열기는 죽기보다 더 힘들어 보였다.
쿵쾅쿵쾅, 엄청 빠른 속도다.
주방에 있던 미네코의 눈 속에 나오코의 모습이 휙, 하더니 사라졌다.
요란한 소리에 놀라 나오코를 부르지만 나오코는 듣지 못한 게 분명하다.
“나오코, 어디 가는 거야?
나오코 해지기 전 들어와야 해, 들은 거야? 나오코.”
미네코는 나오코를 따라 빠른 속도로 마당으로 나가보지만, 역부족이다.
하, 하며 한숨을 길게 내쉰다.
봄의 햇살은 이미 중천에 머물렀다.
봄 햇살에 눈을 뜰 수가 없다.
이렇게 반짝반짝 날이 좋은 날은, 불안감도 커졌다.
늘 걷던 길도 늘 보던 나무들도 봄이 되면 낯설도록 화려하다.
화려함이 과해 눈이 부셨다.
하즈키의 친구 겐토는 도쿄에서 대학 생활을 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말이 잘 안 된다.
겐토가 다니고 있는 대학은 정말 공부를 잘하는 상위 1%만 들어갈 수 있다는 학교다.
중. 고등학교 시절 그는 여자 친구를 끼고 지냈고,
문제가 발생하는 곳에는 늘 그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공부에 소홀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겐토가 도쿄 대학에 입학한 후, 함께 어울려 다니며 똑같이 재미를 찾아 방황했지만,
하즈키 자신만 학업에 등한시한 점이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타다요시는 언제나 겐토를 입에 올리며 하즈키와 비교하는 건 일상이 되어 있었다.
때론, 그렇게 인정받는 겐토가 무지막지하게 얄밉기도 했었다.
어느 날 겐토의 칭찬을 늘어놓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
하즈키도 그와 같이 겐토를 칭찬하기 시작했다.
그땐 정말이지 하즈키의 진심이었다.
“아버지, 맞아요 겐토는 정말 놀라운 친구예요.”
가르침을 주려 했던 작전은 하즈키에게 먹혀들어 가기는커녕,
하즈키는 겐토를 마치 신처럼 대하며 거룩하다고 함께 맞장구를 쳤다.
아버지는 그 이후, 다시는 하즈키와 겐토를 비교하지 않았다.
그저 안부를 물을 뿐,
더 이상 겐토는 아버지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가 돼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겐토는 전쟁으로 부모님을 잃고 그들의 자리 없이 친척들의 도움으로 컸다.
부족함을 늘 안고 자란 그는 단 한 번도 하즈키에게 고민을 털어놓거나
불평하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누구나 자신의 고민은 있기 마련이지만,
그런 겐토의 모습은 하즈키를 더욱 작게 만들었다.
겐토는 열악한 환경에서도 자신의 앞날을 그려 놓고 하나씩, 하나씩 채워 나갔다.
하즈키는 그를 따라잡기도 따라가기도 힘들다는 것을 애초에 깨달았고,
평생 부러워만 하기로 했다.
정말이지 겐토는 참 잘 자랐다.
이 말을 들은 겐토가 비웃으며 잘 생각했다는 둥, 당연하다는 둥,
연신 비꼬기를 고집했지만, 하즈키는 진심이었다.
가장 부러웠던 건, 고향을 떠나 친척들의 그늘에서 벗어나
도쿄에서 자기의 삶을 독립적으로 살고 있다는 점이다.
겐토가 도쿄를 떠나기 전 한 말이 다시 또 머리를 스치며 쿵, 하고 가슴에 내려앉았다.
“하즈키, 네 인생은 타다요시가 아니야
네 인생은 그 누구도 조율해 줄 수 없어, 네 거니까...
그러니까 언제든지 도망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거야
뛰라고 당장?
하즈키는 쯔루마이 역(역이름)을 지나 문구점 안으로 들어갔다.
온갖 잡화 품목이 널려 있었다.
형형색색 아이들의 눈을 현혹할 만한 것들이 즐비해 있었다.
한 칸에 놓인 주인을 기다리다 곧, 수명을 다할 것 같은 먼지 쌓인 물건들이 가득했다.
먼지를 훅, 불어 보지만 끈적하게 내려앉아 그들을 꼭 부여잡고 있었다.
가짜 나무의 테두리를 한 액자가 하즈키의 눈에 들어왔다.
가짜지만 진짜 같은 나무 테두리다.
투명한 부분의 먼지를 손으로 긁어 보니 그 또한 유리가 아니다.
투명한 아크릴판으로 되어 있었지만 긁어낸 먼지 사이로 드러난 부분은 아주 깨끗했다.
나무색을 한 테두리는 정말 그 누구도 관심 갖지 않을 모양새다.
누구의 생각으로 저 물건을 갖다 놓은 건지 정말 궁금해졌다.
쓸데없는 관심에 하즈키는 아크릴 액자를 덥석 집었다.
아마도 자신과 같은 사람을 노리고, 장사를 하려는 사람임이 틀림이 없을 것이다.
청바지 주머니에서 엄마 사진을 꺼내어 아크릴 위에 살짝 비춰 보았다.
이 정도의 가격이라면 제명을 다할 때까지 값을 톡톡히 할 것이다.
갑자기 기다란 손이 아크릴 액자를 덮쳤다.
나오코다.
이 아이는 하즈키를 놀라거나 당황하게 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
하즈키는 너무 놀라 잠깐 주저앉는 시늉을 하다 다시 일어난다.
나오코의 커다란 눈은 눈동자만 보인다.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진심인지는 알 수가 없다.
하즈키는 침묵을 지키고 나오코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하즈키, 이거 내가 선물할 게 화해의 뜻.”
대체 누구 마음대로 화해라는 단어를 쓰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행동이다.
나오코는 바람이 불 정도로 홱, 돌아서더니 뛰어가 값을 치렀다.
하즈키는 거절할 새도 없었고, 뒤에서 어처구니없이 바라만 볼 뿐이다.
나오코가 액자가 담긴 종이봉투를 하즈키에게 건넸다.
나오코가 고개를 들어 올려볼 때 그녀의 선명한 눈동자가 보였다.
나오코는 자존감이 강한 모습을 보이려 애쓰는 것 같았지만
어딘가 모르게 위축된 모습 또한 느낄 수 있었다.
하즈키는 그 모습을 한 번에 알아차린다.
꼭 자신과 같았기 때문일까?
하즈키는 나오코의 모습에 날 선 신경이 조금은 누그러져 버렸다.
할 말을 삼키고 허공에 대고 후, 하고 한숨을 내쉬며
종이봉투가 부스럭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낚아챘다.
“이젠 예의를 지키는 나오코가 될게.”
하즈키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생각해 보니, 나오코는 방법이 달랐을 뿐, 그를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마치 하루카가 하즈키를 위해 속옷을 빨았던 것처럼, 그저 방법이 다른 것이었다.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가 미네코의 서늘한 웃음이 생각나 다시 도리질 치더니,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걸어갈 뿐이다.
나오코는 그의 뒤를 졸졸 따르며 말을 건네고 싶지만,
그것마저 허락되지 않을 것 같아 입을 닫고 조용히 저벅거리며 하즈키의 뒤를 따라갔다.
자신보다 훨씬 큰 키의 걸음을 따라잡기가 힘들었는지
숨을 헐떡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즈키의 귀가 쫑긋하더니,
빠른 걸음을 서서히 작은 보폭으로 나오코의 헐떡이는 숨을 누그러뜨린다.
봄 햇살이 기울어져 그림자를 늘어뜨려 놓았다.
바람은 조금씩 거세졌고, 아직 선뜻함을 버리지 않을 작정인 듯했다.
큰 키의 하즈키의 어깨도 키 작은 그녀의 어깨도 좁게 움츠러들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나오코에게 어울리지 않은 조용함에 잠시 멈춰서 뒤를 힐끗 바라보았다.
하즈키의 걸음에 나오코의 걸음도 멈추다,
어느새 하즈키의 옆자리를 차지하며 걸었다.
걷기만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공원에 다다랐다.
하즈키는 자신이 좋아하는 나무를 올려다보더니,
마치 자신의 것이라는 것처럼 그인지 그녀인지 모를 나무를 소개했다.
나오코도 뒤질세라 나무를 바라보며 하즈키의 말에 경청한다.
“이 나무는 나이가 많아."
1초의 시간이 흐르는 것도 용납하지 못하는 나오코는 대답한다.
“하즈키 보다 많아?”
하즈키는 고개를 끄덕여 보이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하즈키는 나이 많은 사람처럼 눈 밑이 푹 꺼져 있었다.
나오코의 눈은 하즈키를 보며 나무 주위를 정신없이 왔다 갔다 멈추지 않았다.
나오코의 얼굴은 뭔가를 구상하는 듯한, 꿍꿍이가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좋게 말하면 굉장히 개구쟁이 같은 얼굴이라 할 수 있다.
“너는 그렇게 항상 즐거워?”
그제야 그녀의 작은 발이 그 앞에 조용히 멈춰 섰다.
“아니, 즐겁지 않아.”
나오코의 엉뚱한 대답에 웃음이 배시시 새어 나왔다.
나오코는 하즈키의 비위를 어느 순간 망가뜨려 이 순간이 끝이 날까,
눈알을 굴리며 요리조리 눈치를 살폈다.
“즐겁지 않으니까 웃어야 해, 하즈키도 지금 내가 한 말에 웃은 것처럼...
그런데 하즈키는 왜 웃지 않아? 하즈키가 웃는 건, 우는 것 같아.”
자신을 관찰한 나오코의 말투에 피식, 웃어 버렸다.
나오코도 따라 피식, 거렸다.
하즈키가 보란 듯 큰 소리로 웃었다.
나오코도 고개를 하늘로 들어 올리며 크게 따라 웃었다.
“으하하하하.”
점점 더 세차게 바람에 나오코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의자에서 일어난 하즈키가 말한다.
“가자.”
“으응.”
하즈키의 걸음은 작은 발과 나란히 걸었다.
공원은 사람들이 유난히 많이 몰려든다.
너나 할 것 없이 웃음만 가득 안고 사는 사람들만 보였다.
호수 속, 노란빛 잉어가 빼꼼 물 밖으로 나왔다가 물이 튀기고는 달아났다.
제법 늘어서 있는 음식점들은 하나 같이 문이 좁았다.
아마도 덩치 큰 사내는 맛있는 메밀국수를 먹을 수 없을 것이다.
이곳은 겨울에도 제법 따뜻한 날씨이지만,
봄이 바람을 이기지 못해 기승을 부릴 때는 싸늘하기만 하다.
하즈키를 따라 좁은 문 안으로 들어서자, 따뜻한 입김이 하얗게 날아들었다.
마치 물속에 오랫동안 담가 놓은 나무를 말리는 냄새가 났다.
나오코는 강아지처럼 킁킁대며 코를 벌렁거렸다.
나오코는 하즈키 옆에 나란히 앉았다.
나오코의 볼이 발개진 건 따뜻한 온기 탓인지 쑥스러움 인지 알 수는 없다.
하즈키는 이곳에 오랫동안 머물던 주인과 같이 보였다.
이곳은 그의 공간인 듯하다.
하즈키의 냄새가 났다.
주인아주머니는 말 인사 대신 정이 가득한 눈웃음으로 하즈키를 반겨 준다.
작은 가게 안은 아직도 켜져 있는 작은 난로,
나무에 글씨를 새긴 메뉴에는 단, 두 가지, 보리차의 색깔을 한 도자기 컵 안에 따뜻한 보리차,
지켜보는 나오코의 눈은 따뜻하고 입도 따뜻하다.
“푸흣, 하즈키, 내가 지금 웃는 건 진짜 즐거워서 웃는 거야.”
하즈키는 보리차를 마실 뿐이다.
주문도 하지 않았지만, 아주머니는 쟁반에 담긴 따뜻한 메밀국수 두 그릇을
그들 앞에 놓고 비워 없어진 차를 더 채워준다.
하즈키가 말없이 젓가락으로 그릇을 휘휘 젓더니, 국물을 후루룩, 소리를 내며 마셨다.
하즈키가 그때처럼 맛있게 음식을 먹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하즈키는 간장에 비벼 먹는 밥만 좋아하는 줄 알았다.
딱히 그것 또한 맛있게 먹는 모습은 아니었지만,
미네코의 음식을 우물대고 골라내는 것보다는 우적우적 씹었기 때문에 든 생각이었다.
나오코는 메밀국수에 젓가락을 대기도 전에
혀 밑의 침들이 질질 새어 나올 것 같아 좋아하는 말하기를 잠시 멈추었다.
빠른 속도로 휘휘 저으며, 그리고 호로록, 한다.
뜨끈한 국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자 비어 있던 위를 달래 주고 있었다.
나오코의 첫 메밀국수 먹기는 하즈키로 인한 첫 경험이 된다.
“따뜻하고 신기한 맛이야, 왜냐면 다시 먹고 싶어질 것 같거든.”
나오코의 첫 경험에 하즈키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고 속으로 말했다.
‘이 흔한 국수를 처음 먹었다는 건가?’
나오코는 투박하고 멋없는 나무 그릇이 소박한 메밀국수의 맛과도 같아 보여
연신 그릇을 보며 미소를 머금어 본다.
그릇의 세월을 머금은 단면의 끈적함은 그리 나쁘지 않은 촉감이었다.
아마도 이 끈적임은 아무리 그릇을 씻어내도 없어지지 않은 정도의 흔적일 것이다.
하즈키는 그릇의 남은 찌꺼기 하나 없이 깨끗이 비워 내고, 감탄사를 짧게 자아냈다.
“하아아.”
하즈키의 그 소리는 이곳에서나 들을 수 있는 제일 편안한 소리와 표정일 것이다.
하즈키가 나오코를 힐끗 보더니 눈을 내리깔고 그녀의 그릇을 확인했다.
하즈키는 나오코를 매너 있게 기다려 줄 요량이다.
나오코는 다신 하즈키의 방문 고리를 당기거나
문을 마구잡이로 열고 도망가지 않기로 다짐하며 자신은 숙녀가 될 것이라며,
다시 한번 꾹, 다짐했다.
나오코의 그릇도 이미 비워진 후다. 하즈키가 말했다.
“가자.”
나오코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을 배려하는 하즈키의 흘깃거림에
손바닥을 마주치며 소리를 지르며 자랑하고 싶었다.
하즈키가 정말 자신의 오빠가 된 순간이다.
하늘은 갑자기 많아진 낮은 구름이 몰려와 잔뜩 웅크리고 인상을 쓰고 있다.
정말 골탕 먹이고 싶었다면 비를 막 쏟아부었을 정도의 인상이다.
뒤따라 나온 주인아주머니가 나오코의 옷깃을 잡아끌었다.
나오코의 손을 잡더니 알사탕 두 개를 손에 쥐어 주었다.
소리 없는 아주머니는 온데간데없이 가게 안으로 빠르게 사라져 버렸다.
알사탕은 하나를 둘이 나눠 먹어도 될 만한 크기다.
나오코는 사탕 하나를 하즈키에게 내민다.
하즈키는 알사탕은커녕 대꾸하지 않고, 쳐다보지도 않으며 대뜸 재촉하고 나섰다.
“서두르지 않으면 둘 다 비에 홀딱 젖고 말 거야.”
나오코가 손바닥을 치더니 신이 났다.
“우와, 진짜? 그거 야 말로 재미있겠다.”
하즈키는 자신도 모르게
나오코에게 친절하고 호감 있는 꿀밤을 먹이더니 발의 보폭을 넓혔다.
“아얏.”
“어서.”
“헤잇, 알았어.”
하즈키의 꿀밤도 싫지 않은 나오코는 뒤따르며 연신 이마를 비비적거렸다.
조금씩 떨어지는 비가 볼에 한 방울, 눈에 한 방울, 떨어졌다.
순간 떠오른 엄마 미네코의 얼굴은 작은 발이 놀라운 빠르기 실력을 발휘하게 만드는 중이다.
봄 햇살은 바람에 마저 밀리고 바람은 비와 함께 부딪는다.
쏴아, 쏴.
봄의 신고식이다!
타닥타닥, 쿵쾅쿵쾅
요란한 발소리를 내세워 빗소리가 숨바꼭질했다.
하즈키는 당연히 미네코의 눈에 띄고 싶지 않아 바깥 계단을 이용해 순식간에 올라간다.
나오코가 1층으로 먼저 들어간 후다.
나오코는 옴 몸을 축 늘어뜨리더니, 그 자리에서 꼼짝할 수가 없다.
한기로 어깨가 덜덜 떨렸다.
미네코가 팔짱을 끼고 허수아비처럼 서 있는 나오코를 바라보았다.
착한 엄마의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다시 뱀처럼 차가운 얼굴로 돌아왔다.
나오코는 미네코의 얼굴이 어떻게 술을 마시지 않아도 저런 표정이 가능한지, 신기할 뿐이다.
나오코는 눈치를 슬슬 보고 뻐꾸기시계를 바라보았다.
이해되지 않았다.
겨우 다섯 시가 조금 넘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나오코는 당당하게 말을 꺼냈다.
“다녀왔어요.”
“그래?”
미네코의 목소리는 기가 막힌다는 듯이 감탄사를 연발했다.
이에 지지 않고 나오코는 엄마를 똑바로 바라보며 자신의 행색을 설명하듯 말했다.
“화장실을 써야 해.”
미네코는 화장실을 막고 서 있었다.
가만히 지켜보던 미네코에게 동정을 구하는 눈빛을 내보이며
나오코는 젖은 자기의 몸을 가리켰다.
그제야 비켜선 미네코는 나오코를 기다린 후 가시 돋친 말을 꺼낼 것이 분명하다.
나오코는 생각해야만 했다.
자신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그녀가 물었을 때 얼마나 합리적으로 대답을 해야 하는지,
또는 어떻게 말을 이어야 이 순간을 빠르게 벗어날 수 있는지,
씻는 내내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타다요시는 꼼짝하지 앉는 미네코에게 다가가 어깨를 감싸더니, 다독이며 말한다.
“미네코, 아직 6 시도되지 않았고, 거기 다가 오늘은 일요일이잖소 그냥 둬요.”
미네코는 타다요시에게 딸이 차마 쥐를 잡아
자신을 오랫동안 괴롭히고 있다는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처음 가방 안에서 쥐꼬리를 발견했을 때 모른 척할 수밖에 없었던 건,
그렇게 해야, 나오코가 더 이상 흥미를 느끼지 않을 것이고 그 짓을 단념할 거라 믿었다.
그 일을 지금까지 미네코는 여전히 모른 척하고 있었고
딸이 자신을 저주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지만, 그 또한 모른 척했다.
나오코가 왜, 자신에게 이런 만행을 저지르는지,
타다요시가 알게 된다면 여전히 그의 사랑을 구걸하는
그녀 자신에게 좋은 일이 생기지 않을 것임이 분명했고
그 결과는 불 보듯 뻔했으며 두려움과 눈치만 남을 것이다.
그 두려움을 상상만 해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미네코는 남편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척했다.
숨을 몰아쉬더니, 바뀐 표정은 빠르게 온화하게 돌아왔다.
미네코는 타다요시에게 따뜻한 미소로 조곤조곤 말했다.
“당신 말이 맞지만, 약속은 지켜야...”
“여보...”
타다요시가 그녀를 단호하게 부르며 미소 지었다.
미네코에게 여보,라는 다정한 말은 세상에 또 없을 것이다.
좋은 아내의 모습을 보이고 싶은 욕망이 하늘 높이 치닫는다.
"흠, 알았어요, 당신은 하던 일, 마저 해요
하즈키도 온 것 같은데 아마 비를 맞았을 텐데...
보고 올 게요. “
타다요시는 미네코의 손을 살짝 잡더니 놓아주며 말한다.
”그래요 고맙군. "
미네코는 개켜 둔 새 하얀 수건들을 두툼히 들고 오른다.
화장실에서 세게 틀어 놓은 물소리가 요란했다.
“똑, 똑.”
하즈키도 말없이 똑, 똑 소리를 냈다.
“아마 수건이 없을 거야, 문 옆에 두고 갈게.”
“고맙습니다.”
수건을 내려놓고 보니 하즈키의 방문 틈이 벌어져 있었다.
벌어진 틈 사이로 하즈키의 방을 확인하니 열린 창문 틈 사이로 비가 들이닥치고 있었다.
하즈키의 방이라 조심스럽지만 빠르게 달려가 창문을 닫으며 들이친 비를 수건으로 닦아 냈다.
“이런, 다 젖었네.”
창틀 앞에 놓인 책들을 열심히 닦아 보지만 이미 물을 흠뻑 먹은 후다.
그 책은 하즈키가 항상 끼고 다니던 책이었는데 아끼는 물건이 아니었나 싶다.
그녀는 책을 펼치더니, 마른 수건 위에 펼쳐 놓았다.
아마도 물기가 없어지면서 울퉁불퉁 해질 것이 뻔했다.
“이런 이런.”
미네코는 자신도 모르게 안타까워하고 있는 모습에
완벽한 하즈키의 엄마가 된 것처럼 가슴에 손을 얹더니 말이 안 되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나오코는 자신과 너무 닮아 있는 아이다.
가슴이 차가웠고, 눈동자도 차가웠다. 그러나 하즈키는 달랐다.
타다요시에게 사랑받기 위한 핑계임은 분명했지만,
하즈키의 빛나는 갈색 눈은 따뜻했다.
타다요시가 아들을 지키려 감정에 호소하는 이유가 그것 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미네코는 자식이란 무조건적인 사랑이라는 뜻을 의미한다, 는 것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하즈키를 보면 타다요시가 뿜어내는 아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즈키는 늘 따뜻한 빛이 났다.
미네코에게 없는 것을 갖고 있었고,
때론 그 질투심으로 가시 같은 말을 뱉거나,
집요할 정도로 흘긋거리지만 미네코는 하즈키를 미워하진 않았다.
자신도 모르게 하즈키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구가 생겨나고 있었다.
진정한 엄마의 자리에서.
하즈키는 방문을 항상 잠그고 다녔다.
세월을 많은 먹은 문고리를 단속해 봤자, 소용 있는지는 모를 일이다.
미네코는 빠른 눈치로 타다요시에게 말해 낡아 빠진 문고리를 바꿔 줄 생각이다.
“이게 무슨 냄새지?”
미네코는 하즈키의 방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킁킁거렸다.
쓰레기통 안에서 뭔가 썩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자신이 만들어 준 주먹밥을 담은 접시가 그의 책상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하즈키는 죽을 때까지 자신을 가족으로 생각하지 않을 것이란,
불길한 생각이 밀려왔다.
이 또한 모른 척해야 할 일인지 짧은 시간에 머리를 써야 했다.
미네코는 쓰레기통의 뚜껑을 조용히 밀었다.
비릿한 향은 비 오는 날의 눅눅함을 머금고 있는 김에서 나온 냄새다.
버려진 주먹밥을 확인하더니, 재빨리 돌아섰다.
미네코는 진심으로 모른 척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순간 샤워를 마친 하즈키와 눈이 마주쳤다.
미네코는 기쁨과 절망이 섞여 혼란스러워 보이는 눈을 번뜩거렸다.
수건을 들고 있는 하즈키는 꽤 오랫동안 그녀를 지켜보고 언제 말을 걸면 좋을지 망설였다.
미네코는 빠르게 감정을 가다듬고 애써 냉정한 표정을 지었다.
하즈키가 말했다.
“아, 죄, 죄송해요.”
미네코의 모른 척하려는 작전이 어긋나 버리고 말았다.
“그럴 필요 없어.”
미네코는 어색하게 고개를 저었다.
“쓰레기는 제가 비울 게요.”
하즈키는 조금 느껴지는 미안한 감정을 마저 없애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미네코는 그것을 허용해 줄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럴 필요 없다고 했잖아.”
미네코가 빠른 속도로 쓰레기통을 점령하더니 휙, 하고 사라졌다.
하즈키는 미네코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던 것을 분명히 보았다.
그 눈은 자신이 알고 있었던 욕망이 득실득실한 눈이 아니었다.
덕분에 없애지 못한 미안함이 배가 되어버렸다.
낡은 문고리를 찰칵, 하고 닫았다.
젖은 책이 나란히 뉘어 있는 모습이 이해되지 않았다.
이 모습도 그녀의 계산기 속에 있는 모습인지, 혼란스럽기 짝이 없다.
하즈키는 한참을 창밖만 내다보았다.
미네코는 재빨리 주방 쓰레기통 안의 것들을 봉투에 담아낸다.
“흡, 이게 무슨 냄새지?”
화들짝 놀란 미네코가 뜻하지 않게 그것들을 감추고 뒤로 한 채 타다요시를 바라보았다.
“아, 아니에요, 아무것도...”
타다요시는 지나친 행동의 그녀가 수상쩍었다.
“뭔데 그래요?”
“뭐긴요, 쓰레기통을 비우잖아요.”
타다요시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하즈키 것 아니요, 녀석이 하게 둘 것이지.”
“별것 아닌걸요.”
찢어진 봉투 사이로 쉬어 빠진 주먹밥이 터져서 개수대 안으로 나동그라졌다.
타다요시가 빠르게 눈치를 챘다.
“이거...”
타다요시가 벌써 뒤돌아서 계단을 오르는 중이다.
“여보.”
미네코가 그의 팔을 낚아챘다.
“놔 봐요.”
“이건, 별일 아니에요.”
“비켜요.”
“별일, 아니에요, 당신 이러면 정말 별일이 되는 거예요.”
“늦은 밤 싸 놓은 주먹밥이 버려져 있는 것이 아무것도 아니란 거요?”
막아선 미네코를 비켜서더니 계단을 쿵쿵, 거리며 천천히 올라간다.
“타다요시, 날 형편없는 사람으로 만들 거예요?”
그의 귀는 닫힌 채 그녀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계단을 오르는 내내 그의 얼굴은 점점 험상궂게 변하고 있었다.
미네코는 체념한 채 팔짱을 끼고 귀를 쫑긋 세우고 서성였다.
쿵쿵 쿵쿵.
꽃가루가 가라앉은 날의 공기는 신선했다.
비가 들이치지 않을 정도의 창문 틈새는 적당한 습기를 머금게 해 준다.
따뜻한 술이 생각나 눈을 감고 입맛을 다셨다.
툭, 불거져 나온 문고리가 끼익, 소리를 내며 비틀어졌다.
하즈키는 그럼 그렇지,라는 표정을 지으며 한소리를 했다.
“나오코, 노크노크 응?”
열린 문으로 생각지도 못한 타다요시의 모습이 곰과 같은 크기로 그를 압도했다.
그는 역시 군인이 갖고 있는 특유의 압도적인 카리스마가 있었다.
하즈키는 너무 놀라 벌러덩 누워 있는 자세에서 몸을 세우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다.
타다요시는 그의 방에 올라오는 일이 거의 없었다.
주먹밥 사건이 들킨 것임이 틀림없다.
아무 일 아닌 척하며 내려가던 미네코의 뒷모습이 생각났다.
이내 일러바쳤을까?라는 생각에 화가 끓어올랐지만,
정성이 들었든, 향수를 뿌린 음식이든, 짓이겨 버렸다는 건, 제 잘못임이 확실했다.
미네코의 행동은 연결 고리가 없다.
그를 위해 책을 펼쳐 놓고 말려 주는 친절함과
뽀얗게 삶은 비누 냄새가 나는 수건을 내민 친절함과,
주먹밥의 일러바침을 대체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아버지에게 혼쭐나는 것보다 더 난감한 사실이었다.
타다요시의 두 팔은 허리춤을 받치고 있었다.
“하즈키, 넌 대체 뭐가 불만이야?”
하즈키는 이미 알고 있었다며,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해요, 고의가 아니에요.”
“뭐가 말이야?”
하즈키는 그를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바라보았다.
타다요시는 겉이 완벽한 가족의 굴레가 깨지는 게 두려웠을 것이다.
또다시 시작하기엔 타다요시의 나이도 적지 않다.
하즈키는 두려움이 가득한 덩치 큰 사내가 안쓰러웠다.
“잘못했어요.”
“아니, 설명해.”
단호하게 말하는 타다요시의 말투는 참으로 오랜만이다.
하즈키는 설명할 말이 없었다.
정말 향수 냄새가 나서 먹기가 싫었고,
엄마의 자리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타다요시의 생각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물론 엄마의 실크 가운도 몫을 하긴 했지만,
정말이지 향내가 나는 음식은 먹을 수가 없었다.
여전히 타다요시의 눈은 깜박이지 않고 있었다.
“설명해.”
실수로 떨어졌다는 사실은 도무지 꺼내기가 싫었다.
“향수 냄새가 싫어서요.”
“뭣?”
“정말 다른 이유는 없어요.”
타다요시의 뒤에 미네코가 빠끔히 상황을 들여다보았다.
“여보, 별일이 아닌데, 왜 일을 크게 만들어요?”
“잘못된 건 가르쳐야 해.”
“잘못된 건 없어요, 그저 시간이 필요한 거예요.”
미네코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타다요시는 표정으로 정성스럽게 답을 주고 있었다.
정말이지 미네코의 저 모습이 거짓이라면
저 여자는 정말이지 대단한 여자임이 분명하다.
미네코가 타다요시의 팔을 끌어당겼다.
그의 눈이 따뜻하게 답례했다.
“하즈키, 이유가 그게 다야?”
타다요시가 대체 어떤 대답을 원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네.”
“이건 정말 잘못된 행동이란 건 알고 있는 거겠지?”
하즈키는 자신의 진심을 알아주지 않은 타다요시의 행동에 오기가 발동했다.
침묵을 지키고 싶었다.
대답을 기다리는 타다요시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의 앞으로 한 걸음 바싹 다가왔다.
하즈키는 절대 뒷걸음치지 않았다.
미네코가 타다요시의 팔을 잡아당겼지만, 그 거구에겐 역부족이다.
“알고 있냐고 물었다.”
“말, 했잖아요.”
하즈키는 미네코에게 미안하다는 의사를 분명하게 표했기 때문에
다시 한번 그녀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행동은 하고 싶지 않았다.
“여보, 하즈키와 나는 얘기를 모두 끝냈어요, 그만해요.”
“당신은 조용히 해.”
타다요시는 처음으로 그녀에게 단호한 말투를 내뱉었다.
그는 주먹밥은 잊은 채 이젠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은 아들에게 화가 난 것이다.
학교도 직장도 자기 뜻대로 이루어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미네코도 더 이상 그를 말릴 수가 없다.
잡아당긴 팔을 빼내더니, 그녀가 약간 뒤로 밀쳐졌다.
“다시 한번 물으마, 잘못된 행동이란 것을 알고 있단 말이지?”
하즈키는 물러서지 않았다.
“말했잖아요.”
“그렇다면 미네코에게 사과해라.”
다시 팔을 잡아당기는 미네코의 모습은 정말이지 얄미웠다.
하즈키는 새로 갈아입은 목을 감싸는 면 티셔츠가 답답해 숨이 막혔다.
티셔츠의 목 부분을 잡아당기며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정말 더는 못 봐주겠어...”
사건은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났다.
타다요시의 손이 아주 빠른 속도로 하즈키의 뺨을 갈라놓았다.
쩍, 하는 소리는 나무와 나무 사이의 건조함 때문에 갈라지는 소리와 같았다.
샤워를 마친 나오코는 놀란 입을 손으로 가리고 소리 내지 않고 방문을 닫고 들어갔다.
미네코가 하즈키의 얼굴을 바라보았을 땐
이미 그 둘의 사이는 나무처럼 갈라졌음을 알 수 있었다.
미네코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맙소사.”
타다요시의 번뜩이는 눈이 가라앉더니,
아주 느린 속도로 터덜거리며 계단을 내려갔다.
나오코의 방문에서 찰칵, 하며 문을 잠그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타다요시가 그런 행동을 한 이유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타다요시는 하즈키가 예의 바르고 반듯한 성격임을 알고 있었고,
자기의 행동이 과하다 거나 억지스러운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미네코를 오랫동안 곁에 두고 싶었던 마음이 컸을 것이다.
아들 앞에서 당신 편이야,라는 무언이 행동이 그녀에게 전해졌을 것이다.
또한, 본보기로써 두 사람 사이에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하는 일이다,라는 경고의 메시지일 것이다.
하즈키는 타다요시의 행동의 메시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녀에 대한 미움이 화산처럼 달궈졌다.
미네코가 얼어붙은 하즈키의 볼에 손을 두 손을 갖다 댔다.
미네코의 진심을 알 리가 없는 그는 역시 그녀의 두 손을 뿌리쳤다.
“이제 됐죠?”
“하즈키.”
미네코의 얼굴은 당혹스러움이 가득했다.
그때에도 그녀의 행동은 어떤 부분이 진짜 미네코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만 나가주세요.”
“하즈키... 미안하구나.”
“당장 나가, 주세요.”
미네코의 당황한 모습을 보니 발개진 볼이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그 여자는 문을 닫아 주며 뒤로 천천히 물러났다.
한참 후에야, 계단을 밟는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오코는 조용히 나와 그런 엄마의 모습을 엿보고 있었고,
처음으로 당황한 엄마의 모습을 보고 어안이 벙벙했다.
죽어가는 아빠를 보고 있을 때도 짓지 않던 표정이었을 거다.
물론 보진 못했지만, 그랬을 거다.
혹시나 하즈키 명의로 된 재산이 많이 있을까, 란 의문도 들었다.
결론은 미네코의 방금 그 얼굴은 뭔가 진심으로 가슴이 일렁였던 것이 분명했다.
아님, 내심 어쩌면 미네코는 진짜 착한 엄마가 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미네코가 나오코를 보고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대며 쉿, 하는 시늉을 했다.
나오코는 저도 모르게 아주 반듯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공유하는 그 감정도 나쁘지 않음을 느꼈다.
나오코는 저 정도의 관심을 자신에게 보여주기만 했어도
아빠의 죽음을 눈감아 줬을 텐데, 라며 속으로 읊조렸다.
나오코는 발소리를 최대한 줄이고 하즈키의 열어진 방문 틈새를 비집고 들어갔다.
하즈키의 발개진 볼이 안타까워 미간을 찌푸리고 눈을 귀에 닿을 것처럼 늘어뜨렸다.
손가락으로 잊고 있었던 노크를 그가 놀라지 않게 두드렸다.
“텅, 텅.”
하즈키는 미동도 하지 않고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하즈키, 미안. 잠깐 실례할게.”
나오코는 타다요시가 던져 버린 시큼한 주먹밥을 주워 담았다.
“이건 내가 치울게.”
하즈키는 나오코의 동선이 어디에 머물고 있는지 신경도,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때의 그는 정말이지 미소를 짓고 있는 것 같았지만, 울고 있었다.
창문을 때리던 비가 점점 굵어져 소리도 요란했다.
나오코는 뒤꿈치를 들어 올리며 창문을 닫고 빠르게 문을 나섰다.
문을 잠가 주는 것 역시 잊지 않으려 만지작거리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내가 대신 미안해, 그리고, 내가 말할게
다시는 입지 않을 거야 그 옷.”
하즈키는 나오코의 그 말에 놀람과 동시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미친 듯, 웃어 대는 그를 바라보고 나오코는 다시 한번 귀 쪽으로 눈이 쭉, 내려가 버렸다.
저 눈은 미네코가 조금 전 자신을 바라보았던 표정과 같았다.
나오코는 하즈키에게 일어난 일들을 모두 다 알고 있었다.
이해되지 않았다.
미네코와 나오코는 정상적인 모녀 사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서로에 관해 공유라도 하듯, 하즈키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다.
모녀가 공유하지 않는 한, 나오코가 과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자신에게 관심을 두고 있다는 거다.
하즈키는 갖가지 의심들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방에서 발을 떼지 않는 그녀에게 마무리를 해줘야 나갈 것 같았다.
“나가.”
그제야 찰칵, 소리를 내고 다시 쿵, 소리가 났다.
하즈키는 고개를 푹, 떨군다.
한없이 더 세지는 비와 바람은 독한 하즈키의 다섯 번째 사춘기와 너무나 닮아 있었다.
히다, 는 성을 가진 사람들의 집은
그 이후로도 꽤 오랫동안 같은 생활을 반복하며,
여느 가족들이 내는 소리와 감정들을 똑 닮아 가고 있었다.
작가의 말
어렵고 긴 이야기 오늘도 발걸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행복한 한 주 시작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