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진주색 장갑
1. 히다 료카-엄마의 과거를 이끌어 긴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주인공
2. 히다 하즈키-료카의 부
코하네-료카의 모
3. 후미코-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끌려감(코하네의 엄마로서 한국 이름 이영선)
4. 히다 나오코-미네코의 친딸로서 타다요시의 의붓딸, 하즈키와 의붓남매
5. 히다 타다요시-하즈키의 부
미네코-나오코의 친모
6. 켄지 겐토- 하즈키와 아주 오래된 친구
7. 마호- 코하네의 친구
8. 아키라- 코하네의 할머니 츠키노 집안의 모든 일을 맡은 집사로서
홀로 남은 코하네를 돌본다.
9. 마나츠- 켄토와 하즈키의 친구
10. 유키코- 아키라의 딸
료카가 막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코하네는 연락마저 끊긴 하즈키를 찾아 어린 딸을 데리고 도쿄로 무작정 날아갔다. 잠이 많던 료카는 하즈키를 본다는 설렘에 벌겋게 부어오른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하지만 기다리던 아빠는 결국 보지 못한 채, 한국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료카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마치 죽은 시체와 같았던 코하네의 절망적인 표정은 그때까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기억을 떠올려보려 하지만 코하네는 죽음을 마주했을 때도 그런 표정을 지은 적이 없었다.
그때의 그녀 얼굴은 생명을 잃었지만 살 수밖에 없는 저주받은 꽃과 같았다.
내가 고모라고 불렀던 나오코라는 여자는 죽을 때까지 침을 쏘아 대는 장수말벌 같은 단어를 쓰는 여자다. 료카는 하즈키를 볼 수 없다는 나오코의 말이 아직도 귓가에 울려 침을 가득 꽂고 윙윙거리는 것 같다.
그때 장수말벌은 료카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했다.
“코하네, 너를 위해서야 볼 수 없어.”
일곱 살 세상을 산 어린 료카는 엄마의 손을 꼭 잡고 위로하는 법을 그때 배웠다.
모녀를 재워주고, 엄마가 으스러질 때마다 나무가 되어 준 마호는 그때부터 쭉, 그들과 함께였다.
아빠를 만나지 못한 료카는 마호의 손을 놓지 않았다.
엄마가 보란 듯이, 엄마가 웃을 수 있게, 료카는 괜찮다, 아빠가 없어도 괜찮아,라고 대신하기라도 하듯, 마호의 손은 료카 가까이 있었다.
코하네는 료카가 마호와 수다를 떨거나, 미소를 지을 때, 비로소 절망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그래, 괜찮아,라고 미소를 애써 보였다.
코하네를 위로하기 위한 마호 아저씨와 손잡기는 어느새 습관이 돼 있었다.
하지만 처음 생리를 시작한 열다섯 무렵, 손잡기는 조금 느려 터진 어색함으로 시작했다가,
성인이 된 후부터 아예 사라져 버린 행동이 되어 버렸다.
손바닥을 활짝 열고 싶었다.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료카의 정신은 반쯤 깨어 있었고, 승무원이 방송하는 소리가 웅얼웅얼 들려왔다. 카이토가 다 마신 맥주 캔을 찌그러뜨리는 소리가 귀를 찢었다.
몸을 움직일 수가 없다.
코하네가 써먹던 방법, 숫자를 세어 본다.
‘2, 4, 6, 8, 10, 12…’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카이토가 료카의 손을 마호처럼 잡았다.
이마에서 귀까지 선크림이 녹아내려 우유 빛 땀이 흘러내렸다.
“료카, 괜찮아?”
슬로 모션처럼 료카의 눈이 떠졌다.
“하, 후...”
카이토가 마호처럼 땀을 닦아냈다.
료카가 말했다.
“괜찮아.”
승무원의 눈에도 료카의 얼굴이 이상하리만큼 창백해 보였던 것 같다.
말을 걸진 않았지만, 난기류를 만나 비행기가 심하게 흔들리고 있는 동안에도 료카 곁을 몇 번을 왔다 갔다를 하며 기웃거렸다. 이 승무원은 참으로 책임감이 과한 여자인 듯하다.
그런 승무원이 불편한 료카는 매듭을 지어 주고 싶다.
“물 좀 부탁할게요.”
그제야 신입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승무원은 웃으며 평안을 되찾은 것 같다.
승무원은 물과 함께 종이봉투를 건넨다.
“혹시 필요하시면 사용하십시오.”
승무원 특유의 친절함이 벤 끝이 올라가는 어투다.
료카는 얼굴이 발개지더니, 쓰지 않고 꽂혀 있던 종이봉투를 승무원에게 보여 주었다.
앳된 얼굴의 승무원 표정은 그제야 완벽한 평안을 찾는다.
마신 물은 흰 가루약을 탄 것처럼 쓰디쓰다.
료카의 기억은 또렷했다.
낡은 구둣방의 크기는 일곱 살, 그때와 같아 보였다.
이곳까지 찾아오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정말 그때 그대로였다.
아키라 할아버지의 딸 유키코와 코하네가 함께 살았던 곳이다.
아키라 할아버지는 코하네의 집에서 관리를 도맡았고, 모든 일을 척척 해 주는 슈퍼맨이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료카는 아키라의 사진만 보았을 뿐,
늙은 슈퍼맨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늦게 태어난 자신을 원망했다.
그때의 어린 료카는 슈퍼맨 할아버지가 있는 엄마가 아주 대단한 공주쯤 되는 줄 알았다.
유키코 이모가 만들어 준 스키야키는 달콤함으로 어린 료카를 유혹했고,
그런 유키코는 료카에게 천사 같은 이미지로 남아 있었다.
유키코는 코하네가 손재주가 좋아 늘 할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기 때문에 가끔 딸인 자신의 혹독한 질투를 감내해야만 했다고 말했다.
그들의 옛 모습을 상기시키며 말하는 그녀들의 모습은 정말 행복해 보였다.
아키라 할아버지가 죽은 후, 유키코는 섬나라는 늘 차가워,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고 한다.
아마도 엄마 코하네의 영향을 받았겠지만, 유키코 또한 자라면서 할머니 후미코를 가까운 곳에서 봐 왔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슈퍼맨 아키라 할아버지가 죽고 난 후 천사 이모 유키코는 도망치듯, 노아,라는 미국 사람과 결혼 후, 이곳을 떠났다.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 코하네가 죽었을 때의 소식을 마지막으로 연락은 끊겼다.
유키코는 료카의 기억에 맴도는 유일한 천사였기 때문에 행복하게 살고 있을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를 위해 늘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료카는 강을 바라보며 그녀를 위한 기도를 흩날리는 분홍색 잎을 보며 읊었다.
30년이 넘는 시간에 다시 찾아온 슈퍼맨의 집은 낡고 칙칙함을 벗어던지고 화사한 꽃들과 짙은 녹색의 풀들이 조화를 이루었고 사람 손이 닿지 않은 숲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어릴 적 맡았던 기억 속의 구두 방 냄새를 다시 맡고 싶었지만,
주인이 머물지 않은 집에는 어색한 꽃향기가 맴돌았다.
해가 점점 기울더니, 바람도 강해졌다.
명을 다한 꽃잎들이 마지막을 알리듯 미친 듯 포효하며 흩날린다.
긴 시간 동안 똑같은 곳에서 날리는 꽃잎들을 다시 볼 수 없는 코하네,
그녀의 빈자리가 불쑥 돋아나와 아랫배가 아팠다.
카이토가 탁한 녹색의 음료를 건넸다.
녹색 페트병에 들어 있는 음료는 유키코의 말소리처럼 따뜻하다.
“카이토, 어디까지 갔다 왔어요?”
그의 얼굴이 찬 바람에 발갛다.
“따뜻한 게 필요할 것 같아서...”
“고마워요”
색깔만큼 진한 녹차는 부드럽고 고소했다.
“이제 돌아갈까? 점점 추워질 거야.”
“으응.”
료카는 베이지색 코트의 깃을 여몄다.
일곱 살 료카가 되어 달콤한 스키야키의 간장 냄새를 맡으며
엄마와 유키코 이모가 깔깔거리던 소리를 머릿속, 추억 속에서 듣는다.
마호의 손을, 아니 이제는 카이토의 손을 잡고 걷고 또 걸었다.
카이토는 차가워진 료카의 손을 잡아 자신의 코트 속으로 깊게 집어넣었다.
그의 손은 난로처럼 따뜻하다.
기억 속 어딘가 숨어 있던 낯익은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댕, 댕댕댕 댕 댕 댕”
카이토의 집은 예상대로 작다.
료카의 기억에 나고야의 집만 커다란 성과 같았고,
여기저기를 둘러보아도 이곳 사람들의 집과 집기들까지도 모두 작았던 것 같다.
꼭, 어릴 적 소꿉놀이를 해야만 하는 기분이 들었다.
다행히 카이토의 침실과 거실은 분리되어 있었고, 방해받지 않을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을 안도했다. 오랫동안 방치한 캔들 위에는 먼지가 눌어붙어 버릴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만약 캔들에 불을 놓는다면 먼지들은 마치 불꽃처럼 타닥타닥, 거리는 소리를 내며 반짝일 것만 같았다.
그는 결국 퀴퀴한 냄새를 그녀에게 들켰지만, 훤히 열어 놓은 창문 덕에 낯 닦음을 할 수 있었다.
다행히 창문 밖은 다닥다닥 붙어 있는 건물을 피해 눈을 편하게 해 주는 갈색과 녹색
그리고 또 녹색이 가득했다.
아직 채 떨어지지 않은 꽃잎들은 살랑거렸고,
불어오는 바람은 바닷가의 습함과 짠 내를 남기고 그곳으로 다시 돌아갔다.
습기로 인해 료카의 머리칼은 힘을 잃고 축 처진 미역과도 같아 보인다.
카이토는 히터를 켠다. 묵혀 있던 히터에서도 퀴퀴한 냄새가 났다.
그 냄새를 참기보다 약간 쌀쌀한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료카는 미간을 찌푸리며 활짝 열린 창문을 다시 확인했다.
“나오코 씨가 사는 곳, 여기서 가까워.”
“응, 알고 있어요.”
“미리 약속을 잡고 만나는 건 어때?”
“그렇게까지… 그러고 싶지 않아
내 마음이 언제 변할지 모르고... 또.”
“그럼?”
“딱, 앞에 무섭게, 갑자기 나타나는 거지 영화처럼.”
“짓궂어.”
“당신도 그랬잖아, 몇 년 만에.”
“숨이 탁 막히는 말이군.”
“사람은 생각할 시간이 부족하면 감정적으로 선택하게 돼
지금 상황에서 이성적인 것은 거짓이지
감정적인 게, 그게 진짜 아닌가?
정말 솔직한 거니까…
난, 그 모습을 보고 싶은 거예요.”
“당신 말, 언제나 틀리지 않지.”
“그러니까, 더 솔직함이 필요해
나이를 먹는다는 건, 거짓과 친하다는 거니까
그때 나오코는, 내가 일곱 살임을 동정하지 않았어
나도 동정하지 않아...”
“흠, 당신은 정확한 사람이지.”
카이토의 노트북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불이 들어왔다.
이 노트북은 부팅이 성질날 만큼 속도가 느리다.
그들은 지독하게도 모든 것이 아날로그다.
행동도 말도 생각까지도.
료카는 재빠르게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지도, 여기.”
“흠, 크게 보자 조금만 기다려 봐.”
료카는 포기라도 하듯, 느려 터진 컴퓨터의 깜박이는 화면을 멍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넵, 교수님.”
카이토가 안경을 찾아 쓴다.
누가 뭐라 해도 그 사람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사람이 확실해 보였다.
“자, 봐 여기 맨션이야.”
카이토가 줄을 그어 나가며 맨션과 그들이 살고 있는 곳의 거리를 알려 준다.
그들의 집은 한국에서 부르는 주상 복합형, 고급 아파트다.
“이곳이 명칭이 같은 공동주택.”
카이토가 좀 더 가까이 맨션을 클릭했다.
일본의 촘촘히 붙고 좁은 맨션은 비교가 안 될 만큼 창문의 크기만 보아도 공간이 예측된다.
“주말에 봐,라는 말을 남긴 사람은
추운 겨울, 짐 하나 챙겨가지 않았어
실종 신고를 해야 하는 걸까?”
나오코의 맨션에 히다 하즈키가 있다는 상상을 하자
바보 같은 코하네의 목소리가 귀를 아프게 했다.
카이토의 주방은 개수대가 딱, 하나다.
밥주걱은 숟가락으로 써도 될 만큼의 크기였고,
밥그릇은 숟가락질의 실수를 조금이라도 했다간,
앞으로 뒤로 훅, 넘어갈 모양새를 하고 있다.
마치 몇 년 만에 찾아온 사람에게 훅, 넘어간 자신과 비슷해 웃음이 나왔다.
카이토가 한 시간 내내, 주방에서 주물럭거렸던 음식이 완성됐다.
어릴 적 맛보았던 달콤함을 혀끝은 기억을 해냈고
추억 속에 숨어 있던 료카의 일곱 살이었던 때의 식욕은 침을 발산시켰다.
“카이토, 잘 먹을게요.”
그의 표정은 우스꽝스럽게 굉장히 거만스러웠다.
“응, 내일은 힘을 내야 하니까, 스모선수처럼 한번 먹어보자.”
카이토가 내민 달걀노른자를 풀어놓은 트라이앵글 같은 그릇에 채소와 고기를 적셨다.
노른자가 대롱대롱 매달려 시각적으로 맛을 떨어뜨렸다.
료카는 그것을 재빨리 입속으로 밀어 넣었다.
카이토는 긴장한 눈으로 그녀의 입술을 놓치지 않고 관찰했다.
드디어 료카가 꿀꺽하는 소리를 냈다.
“하, 카이토. 이건... 정말 맛있어.”
그제야 카이토는 젓가락을 움직여볼 생각이다.
“훗.”
카이토의 요리는 혼자 생활한 세월이 길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게 했다.
그들의 대화 소리는 줄어들었고, 감탄사와 달그락거리는 소리, 후루룩, 하는 소리만 요란하다.
베란다에는 바싹 말라비틀어진 정체 모를 화분이 주인을 원망하며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베란다에서 보이는 많은 집은 키가 작고 창문도 작다.
마치 장난감 블록을 맞춰 놓은 것 같았다.
그가 들고 온 맥주는 한국에서도 흔히 마실 수 있는 술로 실망한 기색을 들키지 않으려 한다.
납작한 소시지를 잡은 검지와 엄지에 기름이 잔뜩 묻어났다.
“카이토 부모님 집은 어디라고 했죠? 여기서 멀어요?”
그가 먼 산 보듯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멀지, 신칸센 타면 지금이라도 당장 갈 수 있는 거리긴 해.”
“아버지는?”
그는 잠깐 망설이며 말했다.
“아버진, 날 아주 젊었을 때 낳았어
아마도 내 머리칼의 흰색 개수가 더 많을 거야.”
“큽.”
맥주가 심심한 료카는 미지근한 위스키를 따라 그에게 건넸다.
“응, 고마워.”
“아버지는 어떤 분?”
“흠, 말하지 않았던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지만, 나와 반대의 역사를 가르치지...”
호기심이 가득 찬 그녀가 자기의 얼굴을 카이토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카이토는 료카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위스키의 쓴맛을 느꼈다.
지는 햇살은 온기를 준다.
따뜻했고, 주황색 하늘은 잘 익은 오렌지가 즙을 내어 뽐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짐작했던 것과 같이 나오코는 료카의 목소리를 듣고 절대 놀라지 않았다.
소름 끼칠 정도로 침착하게 굴었다.
30년 만에 들은 조카의 예고되지 않은 목소리에 놀라지 않았다니,
그 침착함에 료카는 약이 올랐고, 긴장감이 올라왔다.
마치 료카가 온 것을 알았다는 것처럼, 대답했다.
나오코는 뭐가 그리 당당했는지, 외출하려면 시간이 많이 필요하니,
약속 시간을 넉넉히 잡길 원했다.
“외출하려면 시간이 많이 필요해
세 시간 후가 괜찮겠어, 어떠니?”
결정을 해버리고 자신에게 묻는 그녀에게, 뻔뻔함은 액세서리에 불과했다.
나오코를 땀이 나도록 당황스럽게 만들고 싶었지만,
이곳에 왔다, 는 말을 뱉을 때 그녀는 더욱 침착해 보였다.
료카는 사실, 그런 그녀를 보기 좋게 당황하게 만들 수는 없을 것 같아
약간 겁을 먹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나오코가 사는 이곳은 한국의 한강을 근처에 끼고 사는 것과 같아 보인다.
멋들어지게 길게 뻗은 다리를 바라보니,
일제 강점기의 지독했던 잔인함을 안고 현재의 완벽한 나라를 이루고 평화롭기만 한, 이곳이 지독하게 미웠다. 료카는 지독하게 미우면서도 동경하듯, 주변을 바라보는 자신의 자세를 바로잡고,
고개를 도리질한다.
해변을 앞에 둔 맨션들을 둘러보며 카이토가 컴퓨터에서 본 사진과 같은 곳을 곧 잘 찾아낸다.
“여기.”
“으응.”
카이토가 료카의 머리칼을 매만진다.
“마무리되면 전화해.”
바다를 앞에 둔 카페의 대형 파라솔이 바람에 삐걱삐걱 소리를 낸다.
“그냥 있어요, 카이토.”
“그분, 괜찮을까?”
“당신은 내 걱정만 해야 하는 거야.”
“그래, 따뜻한 커피 마실래?”
그녀가 고개를 끄덕인다.
약이 바싹 오른 료카는 집으로 가겠다는 말이 입안에서 머물다가
끝내 낮고 침착한 나오코의 목소리의 바람대로 바다를 앞에 두고 만나게 되었다.
인공으로 만들어진 해변의 색깔은 탁한 갈색빛에 그러길 바라듯,
역한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료카가 생각하는 피의자의 마음처럼 탁하게 보였다.
이 카페의 커피는 자판기 커피조차도 따라가지 못할 맛이다.
‘차라리 보리차를 팔지...’
이상하리만치 이곳에서 먹는 것들은 먹고 또 먹어도 배가 차지 않은 느낌이다.
아주 작은 종이컵에 담긴 보리차 같은 4천 원짜리 커피를 보니, 어이없는 웃음이 새어 나온다.
료카는 나오코를 너무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멀리서 걸어오는 모습은 유독 눈에 띄었다.
큰 키에 64세답지 않은 곧은 허리를 갖고 있었고,
니트로 짜 놓은 긴 카디건은 그야말로 완벽한 조화를 이뤘다.
멀리서도 그녀 둘은 서로의 눈을 꼿꼿이 맞추고 있었다.
강하게 풍기는 나오코의 당당함은 료카가 기죽기에 충분해 보였다.
가까워질수록 료카와 나오코는 시선은 마치 자석처럼 제대로 달라붙어 움직이지 않았다.
나오코는 성장한 료카를 보고 하즈키와 너무 닮은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오코의 틀어 올린 머리카락은 나이답지 않게 흰색을 찾아볼 수 없다.
일찍부터 머리카락이 백색으로 시들어 버린 엄마 코하네의 머리칼이 생각나
들이치는 분노로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어릴 적 기억 속이 말했다.
코하네에게 무언가 억압적으로 대했던 나오코의 모습은 변하지 않았을 거라고.
나오코는 도통 세월을 머금고 살지 않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카이토가 벌떡 일어난다.
가까이 올수록 나오코의 걸음은 점점 느리게 료카 앞에서 멈춰 섰다.
“히다 료카?”
료카는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속으로 중얼거린다.
‘젠장, 왜지? 왜 당당한 거야?’
료카는 어릴 적부터 능숙한 일본어 말하기와 정확한 이해가 빨랐다.
료카는 일어나지 않았고, 고개를 빳빳이 들고 나오코의 눈을 올려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카이토가 가볍게 고개를 숙인다.
“안녕하십니까? 료카와 결혼할 사람입니다.”
료카가 그를 빤히 쳐다본다.
나오코의 목소리가 생각보다 부드럽다.
“반가워요, 앉아도 될까요?”
카이토가 대답했다.
“네.”
나오코는 굉장히 또렷한 눈매를 갖고 있었고, 젊은 료카 보다 더 매력적으로 보였다.
나오코는 4월의 햇살에 더욱 반짝이는 진주색 장갑을 끼고 있었다.
그때 장갑 낀 손을 테이블 위 료카의 손등 위에 올리려 하자
료카는 재빠르게 손을 허벅지로 옮겨 놓는다.
하지만 나오코는 당황하지 않았고,
약간의 입술이 실룩대는 모습은 마치 료카를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료카는 자꾸만 계속 그녀를 비틀어 댔다.
“료카, 내가 누구인지는 알고 있을 테니...”
료카는 입을 앙다물고 나오코의 비열한 입술에 집중하려 했다.
나오코는 정말 자신이 고모라도 되는 듯,
자기 가슴에 손바닥을 대고 아련한 눈빛으로 료카를 바라보고 있었다.
료카는 그 모습에 토악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어릴 적 코하네를 닮은 모습은 많이 사라졌구나 어쩜, 하즈키의 딸이 맞아.”
“난, 엄마 딸이에요.”
나오코는 가슴에 갖다 댄 손을 살포시 내린다.
“코하네는 천사의 날개를 단 작은 새 같았지 정말, 보고 싶구나.”
료카는 과거 형으로 말하는 그녀가 미웠다.
“그때의 날 혹시 기억하니?”
“나의 나쁜 기억을 지울 수 있는 망각은 없으니까...”
나오코의 고개는 숙어졌지만, 눈은 치켜뜨고 있었다.
“흐음.”
나오코의 볼살은 료카의 처진 볼살보다 더 탱탱해 보였다.
“한국은 언제쯤 돌아가니?”
나오코는 거부하기 힘든 이상한 친숙함을 발산하고 있었다.
“오래 있진 않을 거예요.”
료카의 귓가에 원하지 않는 순수하고 맑은 코하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곳 사람들은 모두 내 가족이야 료카, 잊지 마...”
나오코가 진주색 장갑을 벗더니, 가방 안에 들어 있는 누런 빛의 음료를 마신다.
“많이 생각했고, 연습도 했어
네 얼굴을 보니 무슨 얘기를 먼저 해야 할지 이런, 모두 잊어버렸구나.”
료카는 나오코에게 돌진하듯, 큰 소리로 말을 꺼낸다.
“엄만 당신들이 가족이라고 했어요, 죽기 전까지도...”
나오코가 갑자기 고개를 푹, 숙인다.
이때다 싶은 료카는 잔인한 말들을 하기 시작했다.
“코하네는 죽기 전에, 당신들을 보고 싶어 했어요
왜, 오지 않았어요? 가족이라면서?
난, 하즈키란 사람이 엄마를 버리고 도망친 거, 이젠 궁금하지 않아요
당신이란 여자가 있었으니까...
이 세상 사람들은 다 알 겁니다
이건 비정상적인 일이란 것을 죽어가는 사람을...
앞에 두고 가족이란 사람들이, 어떻게 그러지?”
나오코는 갑자기 선글라스를 쓴다.
료카는 또렷한 그녀의 눈동자에서 거짓으로 보이는 눈물이 맺혀 있는 것을 보았다.
료카는 속이 또 메스꺼워졌다.
“료카, 하즈키는 충격을 받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어.”
“훗, 재밌네요 코하네는 충격을 받아도 되는 건가?
충격을 받아도 괜찮은 사람이 따로 있습니까?
난 그때 당신이 엄마에게 했던 말, 똑똑히 기억해요
얼마나 잔인했는지, 얼마나 차가웠는지...
코하네는 하즈키만 기다리면서 평생을 죽은 듯이 살았어요.”
카이토는 흥분한 료카를 다독이기 위해 테이블 밑으로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럼, 코하네를 천사라고 말하는 당신은요?”
나오코의 목소리가 커졌다.
“난, 가고 싶지 않았어.”
“이제야 솔직하네요?
그런데 왜 이제 와서 엄마를 찾아간 거죠?
그리고 왜 나를 찾는 거지?
면죄부라도 쓰고 싶어요?
그래야 당신들 맘이 편해지니까?”
“하, 료카 내가 지난 일을 말하는 건 모두 변명밖에 되지 않아
아주 잘 알고 있어, 그리고 내가 그때 코하네를 만났다면
난 죽어야 할 사람이었을 거야
한데 난 그럴 수가 없었어, 지켜야 할 것이 너무 많았지
그리고 난, 충분히 벌 받는 중이야
충분히...”
나오코가 중얼거리는 말은 정말 사실 같아 보여서 딱히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 사람은, 하즈키는 용서받아야 할 사람이야
그 사람은 단 하루도 네 생각을 안 하고 지낸 날들이 없단다.”
“용서를 판단할 사람은 코하네예요, 당신 같은 인간들이 아니라...”
나오코는 누런 액체로 다시 입안을 적신다.
“료카, 말장난하고 싶지 않아
미안하지만 너를 만난 이유는 네 이야기를 듣기 위함이 아니야.”
료카는 자신이 정신없이 떠들어 댄 말들에 실수가 있었는지 다시 곱씹어 보았다.
나오코는 금장으로 장식이 되어 있는 가방 안에서 분홍색 손수건을 꺼내더니,
선글라스를 들어 올려 눈가를 닦았다.
료카는 다시 심호흡하며 나오코의 당당함과 차분함을 따라 해 본다.
“그 사람은 자기가 살고 있는 저 맨션 앞에
내가 왔다는 거 알고 있어요?”
어느새 말의 속도가 느려지고 소리도 차분해졌다.
나오코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역시 나오코는 상대방을 위해서 거짓말을 늘어놓는 여자는 아니다.
“이해가 안 되네요.”
“하즈키는 널 만나고 싶어 하지만
그것마저 너에게 상처를 주는 거라 생각해.”
“상처라고요?
웃음밖에 안 나오네... 왜 불구라도 된 건가요?”
나오코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너, 그러길 바라니?”
조용히 지켜보던 카이토가 끼어들었다.
“바람이 찬데, 안으로 들어갈까요?”
그들은 카이토의 말을 들은 것 같지 않다.
“료카, 넌 코하네를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구나”
“그렇게 코하네가 천사 같아서 코하네를 배신했군요?
다루기 쉬웠으니까, 아니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는 나와
고모라는 행색이 당신과 닮았나요?”
나오코의 입술이 다시 실룩거렸다.
“이런 이런, 료카...
날 만나기로 했다면 들을 자세도 되어 있어야 하는 거야
아까도 말했다시피 난 네 말을 듣기 위해서
편지를 몇 통이나 보낸 건 아니란다.”
나오코가 가방에서 노란 봉투를 꺼내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잠시 가방에 붙은 금장이 빛에 반사되어 료카의 눈을 방해한다.
료카는 무엇이냐는 질문도 하지 않고 나오코를 노려보았다.
“하즈키가 부탁했어
코하네의 재산과 나고야 집이야.”
“이걸 왜 그 사람이 갖고 있죠?
이해가 안 되는 것뿐이네.”
“코하네는 한국에 있었기 때문에, 오래전 내게 부탁했어.”
나고야에서 코하네의 유년 시절은 극단적인 기억들이 가득했다.
너무 행복하거나, 너무 잔인하거나.
코하네가 가까이 다가와 속삭이는 것 같았다.
코하네의 기억을 누가 채 갈 세라 얼른 봉투를 가방 안에 구겨 넣었다.
나오코가 옷매무새를 만지며 천천히 일어선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네가 들을 수 있는 자세가 되었으면 하는구나.”
나오코의 눈빛은 간절함이 녹아 있었다.
“먼저 일어나마, 카이토 씨라고 했나요?
오늘은 실례가 많았어요, 그럼.”
“아, 아닙니다.”
나오코는 그렇게 오던 길을 똑같이 천천히 걸어갔다.
나오코는 그렇게 정말 가버렸다.
료카는 그녀의 뒤통수에 강하지 않은 꿀벌의 침을 쏘아 댔다.
“뭐가 그렇게 당당해? 왜? 왜? 왜에?”
료카의 소리가 귀와 목구멍까지 닿아 나오코의 걸음을 머뭇거리게 만들지만,
장수말벌은 절대 이길 수가 없다.
나오코는 뒤돌아 왼손을 보란 듯이 치켜세우며 그들에게 인사하며 걸어갔다.
약이 바싹 오른 료카는 64세의 당당하고 멋들어진 여자에게
코하네도 느낄 수밖에 없었을 질투심을 느꼈다.
“료카.”
카이토가 어깨를 쓰다듬는다.
“후...”
“물 좀 마셔.”
숨이 가쁜 그녀에게 물을 건넨다.
“되려, 내가 뭔가 잘못한 사람 같아...”
“료카, 이렇게 돌아갈 순 없잖아.”
“이상해, 저 여잔 정말 잘못이 없는 사람 같아...”
료카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가득 고였다.
“나오코가 하는 말은 모두 틀린 말이 없어.”
료카는 소리 내지 않고, 어깨를 흔들며 조용히 울어 댔다.
“료카”
다시 코하네가 속삭였다.
“꼭, 전해줘,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고, 모두 사랑한다고”
모래밭에 앉아 있는 중년 부부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아내의 웃음소리는 어린 소녀와 같이 가르륵, 소리를 낸다.
기어코 지는 햇살은 중년 부부의 독차지가 되어 버렸다.
나오코가 지나간 자리에 머스크의 잔향이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