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바닷소리
달, 그림자 주요 등장인물
1.히다 료카-엄마의 과거를 이끌어 긴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주인공
2. 히다 하즈키-료카의 부
코하네-료카의 모
3. 후미코-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끌려감(코하네의 엄마로서 한국 이름 이영선)
4. 히다 나오코-미네코의 친딸로서 타다요시의 의붓딸, 하즈키와 의붓남매
5. 히다 타다요시-하즈키의 부
미네코-나오코의 친모
6. 켄지 겐토- 하즈키와 아주 오래된 친구
7. 마호- 코하네의 친구
8. 아키라- 코하네의 할머니 츠키노 집안의 모든 일을 맡은 집사로서
홀로 남은 코하네를 돌본다.
9. 마나츠- 켄토와 하즈키의 친구
료카의 부재중 전화를 확인한 카이토는 그녀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마치 료카의 생각을 읽었던 것처럼 그녀가 할 말들을 대신해 준다. 연락을 받자마자 행동에 옮긴 자존심 따위는 이미 그에게 들켜 버렸으니 미련 없이 버렸다. 예전의 카이토가 료카의 생각을 늘 잘 알아차렸듯, 지금도 그는 여전히 그녀의 머릿속을 읽을 수 있다.
카이토와 함께 거닐었던 거리와, 함께 앉아 역사에 대해 뜨거운 토론을 했던 의자, 여전히 책을 가슴에 품고 다니는 여학생들과 동그랗거나, 네모진 가방을 어깨에 두른 남학생들, 학교의 풍경과 이야기는 우리가 달라져도 늘 그렇게 싱그러움이 같다.
료카는 걸음을 멈추고, 의자에 앉아 조그만 거울을 꺼내 자기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얼굴은 하얗게 들떠 있었고 누군가를 탓하고 싶어 안달이 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변한 것 없는 일상에 료카는 잠시 집 안으로 가져온 색색들이 화장품을 다시 서랍 안에 꽁꽁 가둬 놓았다. 푸석해 보이는 찡그린 얼굴로 가방 안을 뒤적거렸다.
다행히 거무튀튀한 립스틱은 가방 안에서 그녀의 손가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확하지도, 노련미도 없는 손짓으로 입술에 색을 입혔다.
머리카락도 매만져 보지만, 달라진 건 입술 하나다.
의자에서 일어나 카이토가 있는 곳으로 시선을 옮긴다.
건물 위를 올려보더니, 자신의 낮은 자존심과 못남을 억울한 한숨으로 토해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자리까지 올라섰던 료카는 자신을 자학하며 보낸 세월 동안 갖고 있던 것을 하나씩 하나씩 스스로 버렸다.
그땐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한 상태의 그녀였다.
예주 선배와 쿠쿠의 단호한 설득에도 결국 대학원을 마치지 못했다.
억울함은 배움에 대한 갈증이었으며, 자신에 대한 원망일 것이다.
멀리서 익숙한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카이토는 같은 넓이를 소심하게 왔다 갔다 했다.
료카는 걸음을 잠깐 멈추고 손바닥을 폈다가 천천히 오므린다.
카이토의 모습은 료카의 작은 손바닥에 들어와 그림이 되었다.
딱 손안에 잡힌 그다.
이 거리에서는 료카의 손 안에서 움켜쥘 수도, 사라지게 할 수도 있었다.
그가 떠났던 것처럼 아주 쉽게.
가만히 서서 오랫동안 카이토를 바라보다, 그가 눈치채지 못하게 재빨리 도망치려 발을 옮겼지만 금방 들켜 버렸다. 카이토가 단거리 달리기 선수처럼 빠른 속도로 뛰어오기 시작했다.
카이토의 덥수룩한 수염과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은 온데간데없이 멀끔하다.
그의 진한 갈색의 두꺼운 코듀로이 코트가 펄럭거렸다.
카이토는 료카를 와락, 끌어안았다.
가슴에 책을 품은 여학생이 자신의 입을 가리고 키득거리며 지나갔다.
료카는 움직일 수가 없다. 특유의 좁은 어깨를 가진 그는 보기보다 엄청난 힘을 자랑하고 있다.
당연히 지금부터 우린 학생들의 놀림거리가 될 게 뻔하다.
수많은 학생은 어느새 그들을 에워싸고 있었다.
료카는 카이토의 귀에 대고 속삭인다.
“신문에 나오면 얼굴은 모자이크 처리해 줘요.”
정신을 차린 카이토가 팔을 놓으며 한걸음 뒤로 물러난다.
“오지 않는다, 생각했어.”
“난 비겁하지 않아요.”
카이토가 어울리지 않게 멋쩍어하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료카, 들어 가자.”
그가 그녀의 손을 잡아끌어 그들을 둘러싼 학생들을 헤치며 걸었다.
학생들의 입에서 여러 탄식의 하, 아, 하는 소리와 어머,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료카의 습관성 무관심은 당연히 남을 신경 쓰지 않았다.
유난히 추워 보였던 료카의 흰색 슬랙스는 오늘따라 온기가 가득해 보였다.
학교에서 마련해 준 카이토의 방은 료카가 늘 보아왔던 익숙한 분위기다.
좌, 우로 놓인 책장에는 알 수 없는 책들로 가득했고, 유난히 넓은 창은 마음이 훤히 들여 보이는 료카의 모습 같아 얼굴은 붉어지고 쓸데없는 기침이 나오려 했다.
한국의 믹스 커피를 좋아했던 카이토의 방 안에는 역시 믹스 커피가 놓여 있었다.
취향이 다른 그녀에게 아주 까만색의 커피를 건넨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올라와 붉어진 그의 얼굴 가려주었다.
료카는 어색함을 이기지 못하고 채 식히지 못한 커피를 입에 갖다 댄다.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 주는 행동이다.
“아앗, 아...”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가 깜짝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료카, 괜찮아?”
그녀가 손바닥을 올려 괜찮다는 손짓을 했다.
다시 침묵이 흘렀고, 실내는 쩍쩍 갈라지는 소리가 날 것처럼 건조하다.
“흠, 어쨌든 당신이 잘 되어서 좋아요.”
그녀는 모든 것을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듯 얘기한다.
그가 내내 깍지를 끼고 있던 손을 풀며 이야기도 풀어내기 시작했다.
“할 얘기가 많아.”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왜냐면 용서하지 않았으니까.”
“알아.”
“내게 그 이유가 필요할 때 그때 해요.”
그녀는 커피를 후후, 불어 본다.
“4년 동안 당신을 생각에서 놓은 적, 없어.”
이번에는 커피를 후후, 불어가며 안전하게 호로록, 마신다.
커피는 늘 쓰지만 잃어버렸던 심장의 두근거림을 일깨워 주기에 중독성이 강하다.
마치 그와 같다.
“커피, 맛있어요.”
그가 이제야 미소를 짓는다.
“할 얘기가 많았는데...”
“당신이 내게 찾아왔고
할 얘기가 많다는 건, 아마도 변명도 핑계도 아니라
현실적으로 내가 이해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겠죠
그렇다는 건, 당신도 어쩔 수 없었다는 것
그러니까 용서는 필요 없다는 얘기가 되죠?
그래서 난, 듣지 않을 거예요
왜냐면 난 용서하지 않을 거니까.”
그녀가 한쪽 입술만 올린 채 웃었다.
“분석가 료카다워.”
“내가 당신 앞에 지금 있는 건, 내 의지 때문이에요
그 누구의 선택도 아닌 나의 선택.”
“료카...”
“엄마, 딸이니까.”
코하네라는 이름에 카이토의 한숨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코하네가 늘 해주던 두꺼운 뚝배기 안의 오뎅이 떠올랐다.
둥글게 썰어 놓은 둥둥 떠 있는 무의 짠맛과 단맛, 그 균형은 침략의 역사를 알고 있던 일본인으로서 한국에 머무는 동안 카이토의 마음을 늘 편안하게 만들어 주던 무기였다.
한국인들이 맛 좋은 일본 음식을 즐겨 주는 게 위안, 또는 구원되는 것 같다며 자주 말했다.
이때 카이토의 눈에 희미한 그것이 맺힌 건 형광등 탓인지 코하네의 탓인지 알 수 없다.
“이럴 땐 마음이 잘 설명되지 않는군.”
카이토의 한숨이 따라왔다.
료카가 말했다.
“계속 동경에 있었어요?”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왔어요?”
“한 달 좀 안 된 것 같아.”
료카의 입에서 탄식의 소리가 나온다.
“하, 이제야 말이 되네.”
“으응?”
“예주 선배 만난 거죠? 쿠쿠도?”
그날은 유난히 예주 선배와 쿠쿠가 카이토의 얘기를 늘어놓은 날이었다.
도망간 사람의 흔적을 자꾸 끄집어내는 그들의 모습에 당황스러웠지만 이내 꿋꿋하게 잘도 받아넘겼었다.
쿠쿠 성격에 료카가 먼저 카이토의 이야기를 꺼냈다면 자기보다 더 화를 냈을 텐데 그날은 카이토의 대변인이라도 됐는지 지금 생각해 보니 어떤 부분에선 이해가 된다, 는 말을 자주 했던 것 같다.
“아, 료카
당신이 쿠쿠에게 갔다는 건
내가 당신을 만나고 난 후에 들었어
그 눈빛은 아니라고 봐.”
그가 검지를 치켜세우며 완강하게 오해를 풀어 달라며 애를 쓴다.
“뭐, 중요한 얘긴 아니니까.”
찻잔의 가장자리는 료카의 거뭇한 립스틱 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4년의 세월이 무색하게 그들에게 박힌 사랑의 감정은 립스틱 자국처럼 여전히 선명했다.
코하네는 딸, 료카에게 입이 닳도록 말했었다.
“부족함을 느낀다는 건
그걸 찾아 헤매도록 늘 나를 추억 속으로 빠뜨리지
한데 이 세상은 이제 그렇지가 않아
필요한 건 늘 가까이 있는 세상이지 추억할 시간을 빼앗아 가는 세상”
코하네(엄마)가 어릴 적 먹었던 음식과 항상 함께했던 물건들은 이 나라에서도 어렵지 않게 모두 구할 수가 있다. 병원에 갇혀 있는 코하네를 위해 구해온 정성은 추억을 논할 때마다 료카의 심기를 늘 불편하게 만들었다.
쉽게 구한 일본 우무와 어묵을 썰어 내며 코하네의 특이한 언어를 생각하며 쳇, 하는 소리로 웃어 보았다.
4년 전 시간이 멈춰 버린 것처럼, 카이토는 집에서의 그때처럼, 창가 옆자리에 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써 내려갔다. 정말 그때의 장면과 너무 같아서 코하네가 카이토, 하고 부르며 불쑥,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집 안에서 음식을 만드는 소리는 악기들이 소리를 내는 것처럼 재미있다.
서랍 속에서 잠을 자던 집기들이 모두 꺼내어진 지금, 두 눈이 어질, 정신이 하나도 없다.
“취, 이이, 딱딱, 툭, 또각.”
집중하며 무언가 필기하던 카이토의 어깨가 놀라 들썩인다.
압력밥솥의 성난 소리는 일본 사람인 그에게 이해할 수 없는 소리였다.
쌀에 압력을 가해서 만들어 낸 밥을 처음 먹어본 그는 늘 코하네에게 놀라울 뿐이라며 연신 대단하다는 소리를 취, 하는 소리만 들으면 같은 말을 뱉었다.
카이토는 다시 4년 만에 생쌀이 압력으로 인해 밥을 만들어 내는 소리와 된장국이 끓는 소리를 듣고 있다. 고개를 들어 채소를 썰고 있는 료카를 바라보았다.
료카의 모습은 4년 전 코하네가 앞치마를 두른 모습을 보는 것처럼 똑, 닮아 있었다.
갑자기 목울대가 꿀렁거려 애써 삼키며 료카에게 괜한 질문을 던져 본다.
“화장실 좀 써도 될까?”
료카는 고개를 돌리더니 어이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가끔 카이토의 감정이 눈빛으로 전해질 때마다 료카의 미간이 형광등에 비추어져 두 개의 줄을 선명하게 만들었다. 마치 다시 또 그 우울한 감정이 번질까 겁이라도 났던 모양이다.
마호는 언제나 초인종을 누르지 않는다.
늘 그랬다. 이유를 물어볼 필요가 없다.
꼭 돌아와야 할 사람을 기다렸던 코하네는 초인종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그것을 혐오했다.
결국 초인종이 소리를 내지 못하게 입을 꿰매 버렸지만, 다시 울림을 준비한 초인종은 코하네가 이제 없다는 것을 더욱 상기시켰다.
마호의 습관은 항상 코하네가 원인이다.
“뚝, 뚝, 뚝뚝뚝.”
아주 투박한 소리가 문을 두드려 댔다.
분명 마호의 굵은 주먹이 문을 건드리는 소리일 것이다.
료카는 마호가 두드리는 소리를 늘 알아차렸다. 마호는 오늘도 백합을 들고 있다.
“료카,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마호의 한쪽 손에는 일본 술이 들려 있다.
그 술은 코하네가 말하는 추억을 논할 수 있는 쉽게 구하지 못하는 술이다.
“어떤 날도 아니에요, 들어오세요.”
코하네(엄마)가 죽은 날부터 그녀의 집은 늘 세제 냄새와 노간주 열매 냄새만 풍길뿐, 음식 냄새는 기대할 수 없었다. 마호는 코를 벌렁거리며 료카를 어리둥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저씨, 그런 눈빛은 사절이에요.”
“아니, 아니야, 기특해서 그런다.”
마호는 코하네의 사진을 보고 너스레를 떨며 인사한다.
“당신, 오랜만이야.”
코하네에게 백합을 들어 흔들며 보여 준다. 사진 속 코하네가 웃고 있다.
복층 계단을 조심스럽게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발걸음 소리는 언제나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마호는 소파에 앉다 말고, 계단을 향해 고개를 쑥 빼고 올려본다.
마호는 놀라는 법이 없다.
병원에서 엄마 코하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갔을 때도 죽은 코하네의 얼굴을 보고도 태연했다.
마호가 코하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당신의 눈을 봐서 다행이야,라고 속삭였다.
료카는 그때 그의 목소리를 잊지 않는다.
어쩌면 내내 쓸쓸했던, 그리고 쓸쓸할 그의 삶이 죽음으로 괜찮아지진 않을까, 덧없는 생각도 해 보았다.
발걸음의 주인 얼굴이 눈 안에 들어왔다.
마호는 다리를 굽히고 반은 앉은 상태에서 카이토와 눈을 마주하더니, 조심스럽게 다시 소파에 앉았다.
마호는 료카를 한 번 바라보고, 다시 카이토를 바라보았다.
마호는 마치 오늘의 이 만남을 꼭, 알고 있었다는 듯, 굴었다.
“하하, 료카, 참 심술궂어.”
카이토가 마호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마호는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하고 이번에도 태연하게 굴었다.
일본어로 인사를 나누며 카이토가 비겁한 도망자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처럼, 다시 눈을 굴려 료카를 바라보았다.
“카이토! 오랜만이야, 자네 흰머리도 이젠 만만치 않군.”
고개를 숙이다 만 카이토는 마호의 호탕한 말투에 당황하며 조심스레 손을 내민다.
카이토는 약간의 신음을 짧게 뱉었다.
마호가 그 큰 손으로 카이토의 손을 꽉 쥐는 모습은 보기만 해도 아픔이 전해졌다.
금세 료카의 눈살이 조금 어그러진다.
마호는 목소리를 크게 내더니, 어색함을 풀어낼 헛기침을 쏟아냈다.
“모처럼 가족이 모인 날, 이군 하하하
내 이럴 줄 알고 귀한 술을 준비했지.”
“마호 아저씨, 죄송합니다.”
카이토의 말에 마호는 손사래를 치더니, 듣기 싫다며 질색한다.
“됐네 이 사람아, 가서 료카나 돕게.”
카이토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꾸벅 인사를 한다.
마호는 다시 질색하며 아예 고개를 돌려 쳐다보지 않는다.
마호는 마치 어제 보았던 사람처럼 카이토를 대했다.
료카가 말을 하기도 전에 마호는 이미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술을 따라내 자기의 입으로 가져갔다.
료카는 혼자 중얼거리더니, 찐 멸치를 들고 그가 있는 탁자 위에 탁, 하는 소리가 들리도록 올려놓았다.
마호의 껄껄거리는 소리가 료카의 뒤통수에 울려 퍼졌다.
“아저씨야말로 정말 심술궂어요.”
“내 나이에 식전주는 천국이란다.”
식탁 위에 완성된 음식을 올려놓는 료카의 손이 그릇에 맞닿아 내는 소리를 더 크게 만들었다.
카이토는 여전히 벌을 서는 사람처럼, 고개를 숙인 채 한쪽 구석에 멀뚱히 서있다.
목구멍으로 술을 넘기는 마호의 소리, 식사 준비에 여념 없는 료카의 소리는 서로 경쟁이라도 하는 듯, 선명했다. 침묵만 일관하던 카이토가 입을 연다.
“아저씨, 이제 식사하세요.”
“음, 그러자.”
료카는 앞치마를 내던지고 창문을 열어 놓는다.
“료카, 얼른 와서 앉거라.”
“네, 봄은 언제 오려나 바람이 아직도 차요.”
료카는 바보처럼 서 있는 카이토에게 의자를 꺼내 준다.
“제발 좀 앉지 그래요?”
카이토의 눈알이 이리저리 자리를 잡지 못하고 굴러다닌다.
“으, 응.”
카이토는 의자를 바짝 끌어당겨 앉았다.
“오랜만에 이렇게 둘러앉아 식사하는군, 고맙다 료카.”
“드세요, 아저씨, 당신도.”
말캉한 무와 우무를 집는 속도가 빠르다.
포슬포슬한 감자조림을 밥과 함께 뭉개어 덮는다.
카이토가 입에 음식을 가득 문 채 료카를 바라보며 말했다.
“료카, 정말 맛있어.”
마호가 말했다.
“도망을 일삼는 자들 말이야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먹으러 다시 그 자리로 돌아오곤 해
그게 그렇게 미치도록 먹고 싶다는군
참을 수가 없는 거지
그건 마치 접착제와 같은 역할을 톡톡히 해.”
카이토가 다시 고개를 숙이더니 감자를 씹던 입을 소리 나지 않게 앙, 다물며 오물거린다.
료카는 마호의 말이 싫지 않았는지 입을 실룩거리며 김치를 들어 밥 위에 얹었다.
오랫동안 적막만 흐르던 곳에서 음식 냄새와 사람 소리가 가득하다.
차가운 바람이 들어와 냄새와 소리를 안고 다시 날아갔다.
얼음이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바람이 커튼을 날리는 소리가 조화를 이룬다.
코하네의 사진은 탁자 위를 바라보고 있다.
한글로 정확히 쓰여 있는 커다란 이름 세 글자 『나오코』, 종이의 모서리가 말려 올라가 그 정체를 감추고 싶어 했다.
주방을 뒷정리하는 달그락 소리로도 모자랐는지, 카이토는 어색함을 참지 못하는 눈치다.
진을 따라 놓은 잔에 토닉을 붓는다. 탄산이 톡 터지는 소리로 마호를 자극했다.
마호는 아예 일어나 또다시 창문 너머를 확인하는 척, 카이토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 물었다.
“자네는 이곳에 계속 있을 생각인가?”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흠, 자네에겐 아주 잘 됐군.”
마호는 료카가 마치지 못한 공부를 카이토를 통해 아쉬움을 비추었다.
“료카가 다시 공부를 시작할 수 있도록 도울 생각이에요.”
“하하, 그런가? 저 녀석이 할 것 같은가?”
카이토의 작은 어깨로 손을 들어 머리를 긁적이는 모습은 영락없는 샌님 같아 보인다.
료카의 한껏 올라간 목소리가 들렸다.
“아저씨, 아주 귀한 차를 준비했어요, 술은 나중에 드세요.”
마호는 다그치듯, 어색해 보이는 카이토를 밀어낸다.
“자네가 들고 오지 그러나.”
“아, 네.”
벌떡 일어나 달려가는 카이토는 궁기가 바싹 들어간 이등병이다.
가느다란 유리병에 꽂힌 백합의 향기가 바람을 타고 들어와 날렸다.
목이 가느다란 유리병은 금방이라도 제 목숨을 다하고 가루처럼 으스러져 날아갈 것처럼 보였다.
마치 비를 쫄딱 맞은 그때의 흰색 원피스를 입은 코하네의 모습처럼.
백합의 향기가 그리움을 데려가 달라고 마음속으로 외쳤다.
어느새 콧잔등에 앉은 향내가 마호의 코끝을 벌겋게 물들였다.
코하네는 여전히 그의 눈 속에 머물러 하얗게, 하얗게 나풀거렸다.
쓰디쓴 대가로 귀하게 마셨던 차를 료카가 내밀었다.
그 후로 자신의 존재가 싱겁게 느껴질 때마다 료카는 차를 마셨고 비스킷 대신 투명한 비닐우산을 떠올렸다. 마호는 창문 밖에서 무엇을 찾는지, 당최 시선을 료카에게 주지 않았다.
정체를 감추려던 편지의 주인공 나오코의 얼굴이 떠올랐는지 얼굴엔 근심이 가득했다.
마호는 카이토의 갑작스러운 출연은 문제도 되지 않은 눈치다.
료카는 마호의 얼굴을 바라보며 미안함에 숨소리가 길게 뿜어 나왔다.
결론이 필요한 것은 오롯이 그녀 자기의 생각만으로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늘 그랬듯이 마호의 생각과 행동은 옳았기 때문이다.
그 일이 무엇이든.
적막을 깨는 소리가 료카의 체증을 가라앉혔다. 마호가 말했다.
“그 편지가 몇 통째지?”
“겨우 세 번 째죠.”
료카는 아빠 하즈키가 떠날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한 사람치고 겨우 이것, 밖에 되지 않는다, 고 표현했다. 마호가 뒤를 돌아보고 료카를 채근한다.
“세 통이 왔다면 벌써 결정을 내렸어야지.”
료카는 손가락으로 편지의 이름 석 자를 가리킨다.
“저 이름에 관하여 난...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거라 결심했어요
저 사람은 자기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거잖아요?
날 가만두지 않을 작정인 거죠.”
“네 삶이 그리 원하면 그래야겠지, 하지만 후회도 따를 거야.”
“후우, 그렇게 하려 하지만 생각의 끝은 또 저 이름에 머물러요 이름까지도 수상한."
해가 지고 바람은 더욱 차다.
들어오는 바람에 마호는 어깨를 움츠렸고 그 바람 덕에 그가 소파에 앉아 료카와 마주 볼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이미 말하지 않았니, 수수께끼는 풀라고 있는 거야.”
카이토가 눈치 없이 불쑥 끼어든다.
“료카, 아저씨 말씀이 옳은 것 같아.”
학자의 꿈을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해 질책하는 것 같아 료카는 대답하지 않은 채 카이토를 올려본다.
료카가 여섯 살이 될 무렵 코하네는 그녀의 어머니 후미코(료카의 할머니)의 기억을 맞춰가며 후미코가 살았던 한국의 그곳을 어렵지 않게 찾았다. 그곳에서는 죽은 후미코의 대해서 그 어떤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돌아온 건 후미코의 죽음과 후미코의 딸, 코하네를 달갑게 생각하지 않은 후미코의 한국 형제의 모습이었다.
겉으론 조카 또는 사촌이 되는 후미코의 딸 코하네의 손을 붙잡고, 울음을 토해내던 후미코의 형제는 자신들의 형제가 일본 사람 사이에서 자식을 낳은 것을 불경스럽게 생각했다.
그들은 당연히 후미코가 자신들의 뜻과 다르게 그들에게 더럽혀진 것이란 걸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것은 강력한 힘에 의한 지배와 성적 약탈이라는 것을 형제도 아주 정확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코하네의 뒤통수로 들려오는 말들은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었다.
“일본 놈 새끼를 배었으면 죽었어야 맞는 거지...”
그들은 마치 후미코가 독립투사라도 되었던 것처럼 자결해야 했다고 말했다. 딸 코하네를 앞에 두고 그런 말들을 일삼는 형제들은 전쟁을 일으킨 자들보다 더 잔인하고 혹독했고 감정이 메말라 있었다.
후미코의 땅, 한국에서 코하네는 이미 이방인이었고, 그 시절 후미코는 배 속에 있는 아이 코하네와 함께 죽었어야 했던 깨끗하지 못한 더러움이라 칭했다.
코하네는 후미코를 낯설고 피로 물든 그 땅에 두고 싶지 않았고, 어쩌면 바라고 있었을 일을, 어려운 선택으로 이 한 많은 땅, 한국에 후미코를 묻어야만 했다.
두 번 죽은 것과 다름없는 후미코를 코하네는 항상 가엾어했고 그녀의 짧은 생을 말하며 목말라했다.
그리고 코하네는 장담했다.
“그래도 할머니는 이곳이 좋으실 거야.”
코하네는 그 이후 단 한 번도 후미코의 고향을 찾지 않았다. 그녀가 늘 중얼거리는 괜찮다는 말과 다르게 코하네는 오랫동안 꽃병에 꽂아 놓은 꽃처럼 시들시들 해져갔다.
코하네는 어린 딸 료카에게 말했다.
“그냥 그리워하는 게 나을 뻔했을까…”
어릴 적 료카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료카가 잔에 레몬을 주먹에 쥐고 꾹 짜낸다.
뚝, 뚝 떨어지는 레몬즙은 그녀의 정신처럼 탁해 보였다.
마호는 거울에 비친 료카의 옆모습을 보았다.
료카의 얼굴은 코하네의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하즈키의 도가 지나친 아름다운 밝은 갈색 눈을 하고 있었다. 하얗고 가느다란 목은 유난히 도드라져 보인다.
카이토의 발가락은 엄지와 검지의 길이가 같다.
하얀 이불 위로 툭, 튀어나온 발가락이 비정상적으로 쓸쓸해 보여 이불로 감싼다.
료카는 그의 새하얀 얼굴과 가늘고 긴 손가락을 본 순간 사랑에 빠졌다.
그때는 감정에 충실해서 어떤 누구보다 더 열렬히 사랑했다.
카이토의 사랑은 변하지 않음을 알 수 있었지만, 료카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다 보면 나쁜 여자가 될 수도 있음을 느꼈다. 깊은 잠에 빠진 그의 숨소리가 낯설었고, 거무튀튀한 손가락에 더 이상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비스듬히 누워 예전의 그를 찾고 싶어 또렷이 바라보지만, 예전의 카이토는 사라졌다.
료카는 일어나 티셔츠만 걸친 자기의 모습을 전신 거울을 들여본다.
자기의 얼굴은 히다,라는 성의 아버지 얼굴을 쏙 빼다 닮았다는 것을 아니다, 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히다 하즈키와 히다 료카는 같았다.
나이를 먹을수록 코하네를 닮은 구석이 사라지는 것 같은 얼굴을 보며 중얼거렸다.
“히다, 히다 하즈키, 빌어먹을 히다, 히다 젠장할 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든 부분은 하즈키와 코하네가 만들어 놓은 것이다.
마호의 말처럼 수수께끼는 풀어야 몫을 다한다.
자신의 선명하고 밝은 갈색 눈동자는 흰자를 거의 집어삼킨 모습을 하고 있다.
들여다볼수록 같은 눈의 모습을 하고 있을 지금에 비겁한 하즈키가 궁금하긴 했다.
아니, 어쩌면 아주 오래전부터.
료카의 심장은 갑작스레 급해졌고, 컴퓨터를 켜고, 초초히 기다렸다.
『히다 나오코』의 이름 석 자가 남긴 주소를 검색하고, 주변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그 여자는 대단한 부자인 것 같다. 하즈키가 저 집에 함께 살고 있다고 생각하니, 욕지기가 나오고, 노트북을 만지는 손이 분노에 덜덜 떨렸다. 상처로 평생을 시들어 가며 산 코하네를 생각하니 숨이 가빠졌다.
참지 못한 분노를 카이토에게 전하려 흔들어 깨운다.
눈치 없는 카이토는 료카의 몸을 끌어당기더니,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료카만큼이나 덩치 없는 그는 뒤질세라 힘을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했다.
카이토는 감정을 속일 수 없는 눈을 가졌다.
그는 그녀를 똑바로 내려보았다.
료카의 입이 먼저 열렸다.
“없어져 버려 놓고, 왜 사랑을 구걸해?”
카이토가 다시 그녀의 품으로 조금씩 파고들어 왔다.
“그렇게 보여?”
료카의 입술은 얕은 신음을 뱉어냈다.
“당신은?”
카이토의 눈빛은 그녀가 자신을 바라봐 주기를 바란다.
료카는 카이토의 거뭇해진 그의 손가락을 보며 다시 사랑에 빠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글세...”
그들은 서로의 눈을 놓치지 않았다.
료카의 머릿속이 중얼거린다.
‘우리는 사랑하고 있었던 걸까, 과연 지금은 사랑인가’
갑자기 예약된 TV가 갑자기 켜지더니, 한눈에 보아도 우울한 하늘과 시커먼 바닷가에 큰 배가 기울어져 있었다. 배에 비친 창문으로 마치 불빛 같은 주황빛이 왔다 갔다 하는 움직임이 눈에 보였다.
료카는 자막에 뜬 글씨를 잘 못 본 것 같아 벌떡 일어나 다시 확인했다.
회색 하늘과 구름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토해낼 것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한참을 넋이 나간 채 입을 다물지 못하는 중이다.
여객선의 침몰과, 탑승객이란 자막은 동시다발로 끝을 내지 못하고 계속 오르락 내렸고, 전원 구조라는 자막으로 칠을 하다 오보라는 방송에 소름이 돋았다.
나라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그동안 배는 점점 더 기울어지고 있었다.
카이토의 등줄기에 땀이 주르륵, 흘러내려 료카의 다리를 적신다.
아주 긴 시간 동안 침묵이 계속되었고 여전히 그들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때까지도 그들은 그 커다란 배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모든 사람이 구조될 수 있을 줄만 알았다.
며칠 후, 주황빛의 움직이는 그 무엇, 은 아이들이 입고 있었던 구명조끼, 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침몰 중인 배에서 아이들이 움직이고 있었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고 우리는 그들을 구조하지 못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나라 전체가 뒤흔들려 갈피를 잡지 못한 채 탄식과 울부짖음이 요동쳤다.
냉정을 잃어 가고 있을 때, 피의자인 한 사람의 거짓된 악어의 눈물을 보고 사람들은 냉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려야만 했다.
그렇게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밝히기 위해 나라 전체가 들썩이고 있었다.
2014.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