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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목

13. 겐토의 나오코

by 금봉




작가의 말


안녕하세요, 봄이 손끝에 다가온 모양입니다

볕이 참 예쁩니다


쉴 새 없이 <달, 그림자>를 13화까지 달려왔습니다

탈고한 글임에도 종이책 발간 전

브런치 스토리에 업로드하며

다시 수정에 재 수정을 하는 일이 참 고되기도 합니다

이에 따른 마지막 결론은 늘 보람이 따라와

글을 적어내는 행위는 참 멈출 수 없는

길인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길고도 긴 이야기를

지루하거나 숨이 차 읽어내기가 버거울 때도

있으셨을 텐데, 늘 걸음 해주셔서

함께!!!

긴 길을 걸어주셔서 참, 감사합니다

앞으로 남은 긴 이야기도 꼭 함께 해 주시길 바랍니다

열심히 전진해 보겠습니다


자, 다시!!!




겐토의 나오코



검은 머리칼이 나오코의 허리를 왔다 갔다, 스치고 있다.

그 모습을 조금이나마, 가슴에 담아 두려는 지,

꽤 오랫동안 나오코를 부르지 못한다.

달빛에 초록 나뭇잎이 반짝거렸다.

나무 앞을 서성이던 나오코의 모습이

갑자기 보이지 않자,

빠른 걸음으로 다시 찾아 나섰다.

나오코는 바람에 너풀거리는

초록 잎을 바라보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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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안돼? 왜, 왜?”


밤이슬에 나무 의자가 축축하다.

마나츠의 오른쪽 팔뚝과 손가락은 내내

하즈키의 왼쪽에 바싹 달라붙어 있었다.

그 간격에 강력한 접착제라도 붙여 놨는지

떨어질 줄을 몰랐다.

나오코는 오른쪽 손으로 주먹을 쥔 채

뾰족이 튀어나온 뼈마디를 의자에 대고 쓱쓱, 비벼 댔다.

나오코의 집중력은

그녀를 찾아낸 겐토의 그림자도 눈치챌 수 없었다.


하즈키에 대한 집착을 흙 속에 묻어두고

그 시절을 보냈다.

타다요시가 죽고 난 후,

그 낯선 감정은 죽지 않고

흙 속에서 자연스럽게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마치 영양분을 듬뿍 머금은 것처럼,

그 싹은 열매 맺기를 긴 시간 동안 기다렸다.


타다요시의 죽음은 나오코 또한 가슴 아픈 일이었다.

하지만, 죽음은 나오코가 바라는 정당성이

흙을 비집고 나오게 했다.

그 정당성은 하즈키와 나오코를 위한

남이란 이유가 되어야만 했다.


나오코는 가족이란 단어가

순간순간 튀어나올 때마다 스스로 짓이겼다.


나오코는 미네코가 죽었을 때,라는 상상도 했다.

그렇다면 관계가

성립될 수도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어떤 것들이

성립되는 관계를 만들어 준다고 해도

하즈키는 나오코를 성립시키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이젠 마나츠 또한 나오코의 적수가 되지 않았다.

그저 조금의 질투를 불러일으키는

작은 여우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또한 가장 중요한 건 하즈키는 그 여우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사랑이 아예 없다고는 확신할 순 없다.

어쨌든 그들은 부부로 살았기 때문이다.


그저 하즈키는 편함에

의지하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나오코의 감정은 하즈키가 문제였고,

마지막도 하즈키가 문제일 것이다.


나오코는 다시 뼈마디를 다시 나무에 긁기 시작했다.

무신경할 것 같던 긁힌 뼈마디가

하즈키를 볼 때처럼 욱신거리고 아팠다.


“아아 앗.”


철 지난 낙엽 밟는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려 했지만,

멍청이 겐토겠지,라는 생각에

손을 애써 감췄다.

겐토가 숨을 고르고

침을 꿀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겐토가 나오코에게 카디건을 건넸다.


“후우, 여기 있을 줄 알았어, 이것.”


겐토를 바라보는 나오코의 표정은 늘,

찌푸림만 있었던 터라,

지금의 무표정으론

나오코의 마음을 읽을 수가 없다.

겐토는 알 수 없는 나오코의 마음 때문에

조바심이 났다.

나오코가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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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따라온 거,

난 고맙지 않아, 충분히 알지 않아?”


겐토는 그나마 말로 마음을 표현해 주어

고마운 마음이다.

조심스럽게 나오코 옆,

대신 맞은편 의자에 몸을 기댔다.


“알아.”


멍청이라 불러도, 쓸데없이,

이유 없이 화를 내도 친절한 겐토가 더욱 밉다.


“왜, 그래? 왜 자꾸 친절해?”


그걸 몰라서 물어?라고 하는 듯,

겐토는 그야말로 멍청한 웃음을 내비쳤다.


“흐훗.”


나오코가 나무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겐토, 그거 내가 아는 감정이야?”


겐토는 답답하고 다시 조바심이 났다.

나오코는 겐토의 감정은

나오코가 하즈키를 생각하는 감정과는

다르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 이성을 좋아한다는 감정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 같았다.

나오코의 세상에는 마치

하즈키와 그녀 단둘, 뿐인 듯하다.


“글쎄.”


갑자기 성난 바람이 달빛에 비친

나뭇잎의 그림자가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가끔 나도 화가 나면 끔찍할 정도로

무서운 사람이 되고 싶어.”


“누구에게?”


“나를 방해하는 것들.”


자연스럽게 겐토의 말에 답하고 있는

나오코는 신기했다.


“난 방해하지 않아.”


겐토가 두 손을 들어

방어하는 자세를 취하며 웃었다.


“늘 방해했어.”


“응? 내가?”


나오코의 눈빛은 너무나 진지해서

진심으로 겐토가 무슨 방해를 하고 있었는지

금방 알아 버리게 했다.

하즈키와 나오코 사이에 있는

모든 것들은 방해꾼이다.

겐토가 말했다.


“그냥, 기다리는 것만 하는 거야,

그것도 안 돼?”


겐토의 한쪽 다리가 덜덜, 떨리는 게 보였다.

나오코는 사실 그때 처음,

겐토의 모습이 자신과 같았을까?

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애써 여유를 부리고 있는

겐토의 모습에는 긴장감과

조바심이 극도에 달하고 있음을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나오코의 이마에서 눈썹 사이에서,

콧날로 내려오는 선이

미끄럼틀처럼 곧게 뻗어 있다.

잠시 만져 보고 싶은 충동에

겐토의 손바닥이 뜨거워졌다.

더 자세히 들여다보려고

고개를 좀 더 쭉 빼 보았다.


이상할 정도로 나오코의 오른팔이

계속 등 뒤로 숨겨져 있다.

그 모습은 어색하고 수상했다.


흰 블라우스만 걸치고 있는 나오코는

추울 법도 했지만,

카디건을 걸칠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어두웠지만 추위에 어깨가

덜덜 떨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겐토가 무엇을 하려는 지

나오코의 깊은 눈빛은 알아차린다.

의자에서 겐토가 엉덩이를 떼는 순간,

나오코가 목소리를 날카롭게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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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 마, 싫어 방해하지 말랬잖아.”


겐토는 나오코의 어깨에

카디건을 걸쳐 주고 싶었다가,

블라우스의 소매가 붉게 얼룩져 있음을 보더니

그것을 확인하는 것이 먼저였다.

나오코가 거절할 수 없도록

빠르게 숨긴 팔목을 낚아챘다.


“아앗, 뭐 하는 거야?”


겐토는 나오코의 붉은 피가 묻은

팔을 확인하곤 말을 잇지 못했고,

그녀가 제풀에 꺾여 저항하지 못할 때까지

숨을 죽이고 잡고 놓지 않았다.


“놔, 놔 놓으라고 이 멍청아.”


겐토는 나오코의 콧날 가까이

고개를 들이밀고 말했다.


“힘을 빼면 놓을 거야.”


나오코는 겐토의 가까워진 얼굴을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노려보았다.

얼마 동안의 침묵이었는지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다.

둘 사이의 간격은 더 이상 좁아질 틈이 없다.

그의 생각대로 나오코는

저항하던 몸부림에서 조금씩

힘을 빼기 시작했다.

눈빛은 이제 아예 쉬고 싶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오코는 힘이 빠졌는지

의자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겐토는 나오코를 다그치지 않았다.

우선 나오코의 손등을 살피는 것이 우선이다.

어디에 어떻게 얼마나,

긁혔는지 상처 부위가 어딘지,

피가 나는 부위가 어딘지,

구분할 수가 없다.

일부러 살을 뜯어 놓은 것처럼

일정하지 않은 상처다.


겐토는 무엇을 찾는지,

몇 번이고 고개를 두리번거리다가

재킷을 벗어 안감을 뜯었다.

나오코는 질겨 보이는 안감이

한 번에 찢기는 게 신기했다.

그 순간에도 겐토의 손 위로

튀어나온 핏줄이 보였다.


겐토는 헝겊으로 빠르게

나오코의 손등을 돌돌 감쌌다.

나오코는 자신을 보호하는

멍청이 겐토의 모습이 그리 나쁘지 않은 모양새다.


겐토 앞에서 온몸에 힘을 풀었다는 것은

잠시나마 나오코를 가두고 있었던

것들에 대해 빗장을 풀었다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타다요시가 죽고 난 후,

온갖 손가락질로 힘들었을 때,

하즈키 마저 나오코를 외면했을 때

유일하게 자신에게 친절했던 사람은 겐토였다.

그 때문에 설명되지 않은 어떤 믿음,

신뢰 같은 비슷한 감정들이 있었던 것 같다.


겐토와 눈이 마주쳤다.

단호하게 나오코를 제압할 때는 언제고

정말이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굴었다.

나오코는 순간 웃음이 튀어나왔다.


“그 표정은, 뭐야? 쳇.”


겐토 또한 어이없이 피식거린다.


“넌, 정말 엄청난 여자야 후우…”


나오코가 옆자리에 널브러진

겐토를 바라보며 한 번 더 웃었다.


“훗, 아프지 않아,

아니 마음만큼은 아니지만.”


겐토는 자신도 모르게 나오코의 콧날,

미끄럼틀 위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나오코가 흠칫 놀라는 듯, 했지만

이미 빗장을 풀은 후였다.

오히려 겐토가 떨리는 손을 다시 가만히 내려놓았다.


“미안.”


나오코는 아무 말이 없었고,

입가에는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솔직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 미소 역시 뜻을 알 순 없지만

겐토는 뿌듯했다.


“가자, 소독하지 않으면 안 돼.”


“괜찮아 아프지 않아.”


“나오코.”


“먼저 가.”


“내가 아파서 그래.”


나오코는 겐토를 빤히 올려보며

아무 말할 수가 없다.

완강하게 힘을 주어 거부했지만,

겐토의 힘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나오코의 몸이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나오코 또한 헷갈렸다.

머물기를 바란 건지,

떠나길 바랐던 건지, 헷갈린다.

이 또한 처음 느껴보는 강렬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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겐토가 단번에 나오코의 팔을 끌어당겼다.

혹시나 아프기라도 할까,

겐토의 자세는 심하게 공손했지만,

또한 단호했다.

겐토가 중얼거린다.


“하즈키가 이랬다면,

너 또한 가만있지 않았을 거야.”


겐토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가자.”


발버둥 치는 나오코의 온몸에 힘이 다시 풀렸다.

어느새 그들은 손을 잡고 걷고 있었다.

조금 뒤처진 나오코가 훌쩍거린다.

겐토는 더욱 빠르게 나오코의 팔을

잡아당겨 걸었다.

어느새 바람이 잦아들었고,

이 빠진 가로등은 마술처럼 불을 밝히더니

그들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비춰 주었다.


나오코의 손은 붕대로 둥글게 부풀어 있다.

응급처치를 끝낸 겐토의 눈치를 살폈다.

겐토는 붕대 속,

상처의 이유를 궁금해하는 얼굴이다.

나오코는 대뜸

겐토의 맘속 질문에 대답하는 것처럼 말했다.


“말해줘도 이해할 수 없을 거야.”


“궁금하지만, 말하지 않아도 돼.”


겐토다운 답이다.

나오코는 훌쩍임에

얼굴 전체가 퉁퉁 부어 있었고,

흰 블라우스는 온갖 얼룩으로

더러워져 있었다.

약간의 피가 묻은 카디건을

겐토가 말아 쥔다.


“이건 내가 알아서 할 게.”


나오코의 볼에

머리카락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겐토는 손을 올려 머리카락 한 가닥씩

조심스레 떼어 주려 했지만

이내 고개를 돌려 버리는 그녀다.

멋쩍음에 겐토는 뒤통수만 긁어 댔다.


“고마워.”


“진통제 한 알 먹고 자.”


겐토는 떨어지지 않은 걸음을 딛는다.

나오코의 방을 나와

하즈키의 방에 잠시 멈춰서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돌아선다.


“갈게.”


“응.”


겐토의 뒷모습이 사라졌고,

철 계단의 챙챙, 거리는 소리가

조금씩 멀어졌다.

나오코는 커튼을 모조리 닫아 버렸다.

왠지 겐토가 나오코의 창문을

바라보고 있을 것 같아 겁이 났다.


겐토는 너덜거리는

안감의 재킷을 여미고 창문을 올려보다가,

섰다가, 다시 걷다가, 를 했다.

나오코의 카디건은

겐토의 품에 들어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나오코의 손은 발보다 더 커졌다.

하즈키가 왼손으로

잔을 들어 올리던 모습을 떠올렸다.

나오코도 함께 들어 올렸다.

겐토가 올려놓은 알약을

혀에 올리고 왼손으로 술잔을 들어 올리며

알약과 함께 삼켰다.


“꿀꺽.”


술잔을 놓친 나오코의 블라우스는 젖어 있었고,

그 찰나에 하즈키가 나오코의

몸을 훔치는 눈빛을 분명 보았다.

나오코는 계속 테이프를 되감으며

그 모습을 잊지 않으려 되풀이했다.


나오코는 넋 놓은 채

주방 바닥에 앉아 술을 마시며

사랑을 구걸하던 미네코와 똑 닮아 있었다.


타다요시가 좋아했던

블랙 니카가 눈에 들어왔다.

적막함과 어둠에 몸이 움츠러든다.

하즈키의 조각이 또다시 되풀이되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시선은 점점 흐려지더니,

그 자리에서 깊은 잠으로 빠져 들었다.

손등에서 불이 타오르더니

뜨거움은 팔까지 전해졌다.


현관문은 바람에 밀려

엄청난 소리를 내며 닫혔다.

소리에 마나츠가 놀라 눈이 동그래졌다.

며칠 동안 미네코의 장기 외출 덕에

고음의 목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다.

술의 지옥에 떨어진 하즈키의 모습을 봤다면,

일어나지도 않을 사건과

걱정을 몰아서 몇 시간 동안

마나츠의 귀를 곪게 했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마른 몸을 갖고 있던 하즈키지만,

남자 임은 분명한 것 같다.

하즈키의 팔을 어깨에 걸어 보지만,

그의 무게에 계속 미끄러지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계단을 밟다 서다

방금 잠에서 깬 듯한 나오코와 눈이 마주쳤다.

마나츠가 말했다.


“후우, 보고만 있을 거야?”


나오코는 입꼬리를 올리더니,

오른손의 커다란 붕대를 들어 올려 보이며 웃었다.

마나츠가 중얼거린다.


“젠장.”


나오코는 느릿느릿 걸음을 걸으며

마나츠의 짜증이 가득한 얼굴을

더 오래 볼 요량인지 아님,

약 올리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마나츠는 미끄러지는 하즈키의 바지 허리춤을

훅, 하고 잡아당겼다.

나오코가 한마디 거들었다.


“이럴 걸 알면서 마시게 했잖아?

즐기는 거 아니었어?"


나오코도 하즈키의 허리춤을 들어 올렸다.

마나츠가 짜증스럽게 뱉었다.


“너와 있을 때 이미 취해 있었어, 나 원…”


마나츠의 기막혀하는 말투는 예전 그대로다.

좁은 계단의 폭을 만든

타다요시가 원망스러웠다.

하즈키가 던져지다시피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악, 소리도 낼 법한 상황이었지만

하즈키는 눈을 감은 채

마나츠의 옷깃만 잡아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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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나츠.”


마나츠의 눈썹이 위로 올라가더니,

자만하며 나오코를 올려본다.

마나츠는 아기를 다루듯,

하즈키의 손을 쓰다듬더니,

하즈키의 손에서 빠르게 빠져나왔다.

마치 하즈키가 마나츠에게 붙는 양,

일부러 귀찮아하는 듯한 모양새를 했다.


나오코는 보는 둥, 마는 둥,

계단을 내려와 관심 없는 척,

할 다른 시선이 필요했다.

마르지도 않는 목을 축이며

딴청을 부려 보지만,

이미 가슴은 쌕쌕거린다.

마나츠가 등 뒤에서 살금 거리며 다가왔다.


“물 좀 줄래?”


나오코가 잔을 내밀었다.

마나츠는 쉬지 않고 한 잔을 비워냈다.


“하… 살 것 같다.”


마나츠의 관심 없는 척하던 눈빛이

나오코의 손을 가리켰다.


“왜 그런 거야? 손?”


나오코는 한참을 대답하지 않은 채

딴청을 부린다.

대답을 포기하며 현관을 향하지 않고

다른 쪽으로 방향을 튼

나오코가 맘에 들지 않았다.

나오코는 이내 소리를 크게 내며 말했다.


“희생, 정신.”


마나츠는 더 알고 싶지 않다는 듯,

물을 뿜는 척을 하며

관심 없다는 투로 말했다.


“푸핫, 그래?

병원에 갈 정도는 아니야?

그만하게 다행이군."


나오코는 착한 척, 엄마인 척, 하는

마나츠의 말투가 특히 맘에 들지 않았다.

마나츠가 타다요시의 사진이 있는

재단에 불을 붙이며

매니큐어를 바른 손톱을 반짝이며 합장했다.

그러더니, 주방을 어슬렁거리며 코를 킁킁거렸다.


“집 안에서 왜 이렇게 독한 냄새가 나는 거야?

머리가 다 지끈거려.”


나오코가 2층에서 피우는

향냄새를 갖고 하는 소리일 게 뻔했다.
마나츠는 이 집에서 머무는 동안에도

늘 냄새 타령이었다.

하즈키와 따로 나와서 살고 싶다는

얘기를 냄새 핑계를 대고

말한 적도 수없이 많았다.

나오코는 지독한 냄새를 뿜는 향을

더 많이 피워댔다.


어떨 땐, 금방 샤워를 마쳐도

머리칼에서 향냄새가 배어 있을 정도였다.

솔직히 그땐 마나츠를 몰아낼 생각에

더욱 그 짓을 많이 하긴 했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런데도 마나츠는 코를 킁킁거리고

미간을 찌푸리고,

아직도 자신이 머무는 곳인 것처럼 굴었다.


마나츠는 가방 속의

복주머니 같은 모양의 액체를

공기 중에 뿌려 댔다.

나오코는 말하고 싶지 않아,

라는 표정을 지으며 쯧쯧거린다.


“다음에 올 땐 향수를 선물로 들고 올 게,

안 되겠어. 쯧.”


나오코가 받아쳤다.


“여기, 계속 머무를 생각이야?”


마나츠가 팔목에 두른 가죽 시계를 훑어본다.


“앗, 깜박했네, 얼른 가 봐야겠어.”


나오코는 늦은 새벽녘에

약속이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마나츠가

이해되질 않는다.

마나츠는 스커트를 들어 올리며

스타킹을 살피는 시늉을 하더니,

검은 구두를 신었다.


발가락에 온 힘을 다해 힘을 주고

최대한 발꿈치를 추켜올렸다.

마치 검은 골무에

뾰족한 바늘을 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은 위태로워 보이지만

마나츠의 얼굴은 평온하기 그지없다.

뭐가 그리도 신이 났는지,

입꼬리가 연신 귀에 걸려 있었다.

낮게 들은 손은 나오코를 보며 흔들고 있었다.


“하즈키, 잘 부탁해.”


나오코는 마나츠가 나가자마자

현관문을 잠그며 괜한 탁, 탁,

둔탁한 소리를 크게 들리게 했다.


“이중인격자.”


늦은 새벽, 한참 동안을 또각, 거리는

소리가 골목길에 울려 퍼졌다.

구두 굽, 소리는 흥분을 돋우는 듯한 소리를 낸다.

괜한 긴장감에 나오코의 손바닥 안은

축축한 땀으로 흥건하다.


하즈키는 나오코 앞에서

절대 취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취한 듯해도 갈색 눈을 반짝이며

쓰러지지 않았다.

하지만, 하즈키는 마나츠 앞에서만

아이가 된 것처럼 굴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편하게 술을 마신다,

의 뜻은 분명 특별함이 숨어 있는 관계라는 뜻이다.

또다시 마나츠가 부러웠다.


나오코는 그런 특별함이

자신에게 있었는지 곱씹어 보다,

젖은 블라우스에 눈이 멈춘

하즈키를 다시 떠올렸다.

모로 누워 있는 하즈키의 모습은

엄마 손을 놓치고 헤매는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바짝 야위어 있는 등뼈가 드러났다.

척추뼈 마디의 모양대로 하나씩, 손으로

조심스레 만져 보았다.

툭, 불거져 나온 척추가

손에 닿는 느낌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말랑할 것 같았지만,

조금 힘을 가해 눌러보면

딱딱함이 뼈임을 확인시켜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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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저것도,

그리고 이것까지, 모두 다…”


나오코는 말끝을 흐리며 중얼거렸다.

미동도 하지 않던 하즈키가

신음 섞인 목소리로 소리를 낸다.


“으음.”


대체 무엇이

하즈키를 고통스럽게 하는지 궁금하다.

물론, 나오코 자신의 이유도

없음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조금의 타다요시, 또는 가족이란

단어에 대한 죄책감은 있지만

잘못된 것은 아니라 의심치 않았다.


하즈키가 나오코의 손을 끌어당긴다.

하즈키의 행동에 소스라치게 놀라지만

심장은 이내 귀한 감정으로 두근거렸다.

나오코는 갑자기 작은 조명을 딸깍, 하고 꺼버렸다.

나오코의 얼굴이 그의 눈에

들키는 것이 두려웠다.

나오코의 심장이 벼랑에 곤두박질칠 것처럼

펌프질 하기 시작했다.

캄캄한 적막 속에서 하즈키의 숨소리는

굉장히 거칠게 들려왔다.

하즈키가 자신만의 특별한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마, 나… 츠.”


나오코는 이상하게 화가 나지 않았다.

마나츠를 찾았지만 마나츠는 없었고,

나오코는 그 자리에 그가 원하는

그녀가 되어 있었다.

입이 바싹, 말라 다물고 있으면

붙을 정도로 뜨거워졌다.


마나츠는 매일매일 깊은 밤,

자기 집에서 잠들어 있는 남자와

하즈키에게 했던 것처럼 온갖 기교로

섹스할 것이다.

그런 그녀가, 왜 하즈키에게

사랑을 구걸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마나츠의 또각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붉은 흥분이 하늘에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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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즈키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다 알아들을 순 없지만,

그는 마나츠를 원했고 마나츠를 안고 있다.


나오코는 다시 하즈키의 척추를 하나씩,

섬세하게 만졌다.

툭, 불거져 나왔다가 들어갔다가,

그러다 미끄러져 내려간다.

하즈키의 척추를 만지는 느낌은

말로 표현이 되지 않는다.

온전히 그를 모두 다 알게 되는

기분이 들었다.

나오코는 모로 누운 그의 등 뒤에

똑같이 누워 그의 등에 얼굴을 파묻었다.

순간, 나오코는 마나츠가 되고 싶었다.


그가 나오코의 손을 나오코의 허리를

감싸도록 에워쌌다.

술에 취한 하즈키의 숨소리가 쌕쌕거린다.

위스키의 진한 향에

정신이 녹아들어 갈 것만 같았다.

나오코의 콧등이 그의 귓불에 닿아

그의 살냄새가 풍겨 왔다.

정말이지 하즈키에게는 나무의 진한 향이 났다.

나오코는 숨이 차오르고 숨을 쉴 수가 없다.

정신이 아득해지고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몸이 뱀처럼 똬리를 틀다가,

온갖 모양으로 꿈틀거린다.

하즈키의 정신은 사라졌지만,

하즈키의 몸은 살아 있었다.


살아 있는 하즈키의 몸을

온 힘을 다해 모두 다 빨아들이고 싶었다.

나오코는 숨소리를 낼 수 없어

숨이 가빠지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내뱉은 소리에

화들짝 놀라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새까만 어둠은 그들의 탐욕을 더욱 부추겼다.

억눌렸던 감정이 순식간에 퍼져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기가 흐르는 것 같았다.

힘이 단단하게 가해져

쥐가 올 것처럼 기지개를 켠 느낌이 든다.

이를 악물었지만,

공기층 사이로 배어 나오는 신음은

나오코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축축함과 미끈거림에

탐욕은 잦아들 리 없었다.

나오코는 오랫동안 뱀처럼 꿈틀거렸고,

꿈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비릿한 땀 냄새가 방 안에 가득 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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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비끼어 내리는 비가

창문을 세차게 때렸다.

비, 바람에 떨어진 꽃잎들이

창문에 찰싹 붙어 떨어지길 거부하고 있다.

마치 하즈키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나오코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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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빛 세상과는 다르게 나오코는

고요하게 잠들어 있다.

얼룩진 블라우스의 단추가 풀어진 채,

볼록한 가슴 위 뽀얀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가늘게 눈을 뜬 하즈키는

마치 타다요시가 살아오기라도 했는지,

눈을 깜빡이지도 못한 채

나오코를 보곤 얼어붙었다.


빠르게 침대를 헤집고 나와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상기되었고,

자기의 몰골을 아래위로 훑어보기 시작했다.

머리가 깨지는 것 같다.

부리가 날카로운 새가

같은 상처 부위를 계속 쪼아 대는 느낌이다.

몽롱한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고

입속 술의 환각 또한 사라지지 않았다.


“후 아…”


산산조각 난 기억을 되짚으려 애를 썼다.

조각들 안에는 분명 마나츠와 함께 있었다.

그 조각마저 꿈이라면,

안될 일이다.

답 없는 퍼즐처럼

계속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결국 바닥에 주저앉아 고통스러운

신음을 뱉는다.


속 옷만 걸치고 있는 자기 모습이

추하기 짝이 없다.

벌떡 일어나 웃옷을 걸치기 시작했다.

나오코가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낸다.

가장 공포스러운 순간이 아닐 수 없다.

뒤돌아볼 수 없었고,

잠시 스친 생각은 타다요시 때문에

떨어진 고양이처럼,

창문 밖으로 몸을 던져볼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오코의 목소리가 귓속으로 빨려 들어왔다.

등줄기에 식은땀과 소름이

동시에 피어나기 시작했다.


“하즈키.”


너무 공포스러운 순간이다.


“하즈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고,

뒤돌아 바닥만 바라볼 뿐이다.

풀어헤친 나오코의 블라우스가

자꾸 신경 쓰였다.

눈을 맞추지 않으려 하지만

그곳에 눈이 계속 머문다.

나오코의 목소리는 굉장히 태연했고,

평온하다.


“내가, 깜박 잠이 들었어.”


깜박이란, 그 소리에

반가움을 느낄 새도 없이

떨군 눈이 블라우스에

또다시 박혀 버렸다.

그제야 단추를 여미는 나오코가

정말이지 너무 밉다.


“왜 그래?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태연하게 구는 나오코는

정말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라는 신호를 주고 있는 것인지,

알다 가도 모를 일이다.


“마나츠가 함께 있었어,

돌아가긴 했지만.”


하즈키는 고통과 안도의 소리와 함께

숨을 있는 힘껏, 바닥에 뿌린다.


“아아…. 후.”


나오코가 회색으로 물든

창문 밖을 내려보았다.

갑자기 하즈키가

화를 버럭 내며 소리를 내질렀다.


“나오코, 왜…

여기서 잠이 들면 어쩌자는 거야?

넌 대체…”


굉장한 자신감이 있어 보이는

목소리를 내는 하즈키가 귀여워 보였다.


“기억이 안 나는 거야? 왜, 라니?’


나오코는 하즈키를 못살게 굴고 싶은 심정이다.

나오코는 창문을 열어

비와 섞인 찬 바람을 맞았다.

습한 공기가 콧속을 비집고 들어와

비린 냄새를 더욱 돋아나게 했다.

하즈키는 다시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떨구고,

왼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젠장, 술을 너무 많이 마셨어.”


물어볼 만도 한 질문들을

하즈키는 알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았는지,

말을 일부러 줄이는 모양새가 뻔하다.


“주정뱅이.”


그가 다시 한번 좌절의 한숨과

안도의 한숨을 섞어 뱉는다.


“하, 나오코.”


“응? 뭐가? 왜, 기억이 났어?”


나오코는 그에게 함정이라도 파 놓을 양,

그에게 계속 꼼짝 마, 라 말하는 것 같다.


“아니, 이 정도로 퍼부었다니, 젠장...
마나츠와 나를 들고 온 거야?”


“미네코가 없었으니, 다행으로 생각해.”


나오코는 붕대를 감은 손에

관심도 없는 하즈키가

원망스러울 법도 했지만,

더 이상의 욕심은 부리지 않기로

결심하고 방을 나섰다.


“더 쉬어.”


하즈키는 문을 빠르게 잠그고,

다시 한번, 또다시 한번,

잠긴 문을 확인해 본다.


걸친 윗옷을 벗어서 던졌다.

아랫도리의 끈적함과

축축한 불편함에 속옷까지 벗어던졌다.

홀로 인 방 안에서 눈치를 살피며

속옷을 갈아입는 자신이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마네키가 한쪽 구석에서

스친 바람에 방울 소리를 내며

그를 비웃고 있다.


목 안에 채 삼키지 못한 알코올이

남아 있었는지

무언가 억지로 삼켜 내려 다

헛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반복된 구역질에

결국 노란 위액까지

몸 안에 있는 것들을 모두 토해 냈다.

몸에 남아 있는 구멍이란 구멍에서

진한 냄새를 풍기는 땀이 뿜어져 나왔다.

한참을 쓰레기통에

머리통을 쑤셔 박고 의지하고 있었다.


고통스러움은 어느새

시원함으로 변해 버렸다.

진이 빠졌는지 굽은 몸을 펴기도 힘들다.

그 순간까지 블라우스 사이로

봉긋하게 올라온 가슴살이

떠올라 고개를 저으며

그런 자신을 혐오했다.

아무리 샤워기를 틀어 놓아도 따뜻하지가 않았다.

한참 기다렸지만, 소용이 없다.

무작정 미지근한 물에

머리를 맡기곤 알고 있음에도

놀라 멈칫하다 으억, 하는

소리를 반복했다.

몸은 어느새 빠른 적응으로

미지근한 물마저 반가워한다.

머릿속의 조각들이 맞춰질 것 같기도 했다.

마나츠를 품에 안았던 조각들이 떠올랐다.

꿈이라 해도 그럴듯했지만,

확실한 건, 마나츠의 목소리다.

그것만은 분명했다.

괜한 걱정이라며,

계속 고개를 뒤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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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핫, 말도 안 돼.”





봄의 끝자락에 선 연둣빛 잎은

한여름의 짙은 녹음이 그리 반갑지 않은 듯하다.

조금 남은 시간 동안

연둣빛을 자랑하려

바람에 팔랑거리며 손짓했다.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계속 튀어나온다.

마치 주문이라도 외우는 것처럼

중얼거리며 계단을 올랐다.


이곳은 하즈키가 살고 있는 곳의

모든 것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하즈키의 시야에 들어와

건물, 바다, 나무, 사람, 모두를

제 맘대로 손가락 하나로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늘을 표현할 수 없는 단어로

물감 색을 띠었고,

구름은 잡을 수 있을 것 같이

살이 쪄 보인다.

그야말로, 새파랗고, 새하얗다.


엄마가 있었던 그 자리의 하늘은,

사진 속의 하늘과 같았다.

너무 같아서,

해바라기같이 입을 벌리고

웃으며 엄마가 다가올 것 같다.

엄마의 맞은편은 사진 속에 없는

그들을 찍고 있던

미소를 짓는 타다요시가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왠지 든든한 기분이 든다.


전망대 끝에서 본 바닥은

커다란 나무에 분홍 꽃을

위태롭게 대롱대롱 매달고 있었다.

입을 벌린 만개한 꽃들은

세찬 바람이 미울 법도 했지만

매달린 채 내년을 기약하며 웃는다.


숲으로 이어지는 길을 알리는

아직 다 자라지 않은 연한 풀들은

사슴 한 쌍의 먹이가 된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세상은

완벽히 하즈키의 손바닥 안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꼭 붙어 있는 사슴 한 쌍을

손바닥으로 떨어뜨려 놓는 시늉을 한다.

그러다 수사슴으로 보이는

사슴의 엉덩이를 허공에 탁, 하고

튕겨 보았다.


그들은 다리가 여덟 개나 달린

한 마리의 사슴이 되어 있었다.


하즈키는 훅, 하고 웃으며

크레파스 색깔의

공기와 하늘, 구름, 나무,

풀잎을 크게 들여 마신다.


아침 일찍 연락 온

겐토의 전화 속 목소리가

자꾸 신경이 쓰였다.

아주 드물게 낮고 초조한 목소리였다.

하즈키에겐 온전해 보였던

겐토의 직장이 그에게는 망할,

이라는 소리가 날 정도의

직장이었던 적이 많았다.

완벽해 보였던 곳에서

스스로 나왔을 때 들었던 낮은 목소리다.


설마, 그럴 리가 없다.

이번에 취직한 직장은 정말,

결혼할 여자들이 줄지어 서 있을 정도로

완벽한 곳이다.

물론, 금전적인 것 또한

두말할 필요가 없다.

웬만해서 우울하거나

지쳤다는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녀석이기 때문에

마음이 무겁다.


더군다나, 새카만 머리칼을 하고

블라우스가 풀어헤쳐진 채

누워있던 나오코 때문에

더욱 신경이 쓰였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잘못을 뉘우칠 일도 없었지만 불안했다.


갑자기 등 뒤에서

날카로운 무언가 옆구리를 쿡, 찔렀다.

겐토일 거란,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자신도 모르게 방어하는 자세를 취하다,

겐토의 한쪽 팔을 꺾어 버렸다.


“으억, 아아 놔, 놔.”


하즈키는 재빨리 팔을 풀어놓으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정말 놀랐다는 듯, 쳐다보았다.


“아, 이 자식, 진짜 놀랐어.”


겐토가 팔을 부여잡으며

시뻘건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씨, 나쁜 새끼.”


“인기척 안 한, 네 잘못.”


겐토의 팔 근육이 풀어졌는지

다시 하즈키의 어깨를 감싸고

타고 올랐다.


“멍청한 새끼,

귀가 처먹었냐? 불렀다고.”


“어?”


“아닌 척하기는,

나쁜 새끼, 아씨 아파.”


겐토는 연신 아픈 척을 한다.


“쳇, 기차가 바로 있었나 보네.”


“미리 끊어 놓았지.”


“후… 점심은?”


하즈키가 전망대 난간을 잡고 올라섰다.


“뭐, 야야 내려와.”


겐토가 윗옷을 잡아당겼다.


“놔, 왜 이래.”


“너 몰라?

여기서 떨어져 죽은 애 말이야.”


하즈키가 침을 뱉다시피

폭소를 터트렸다.

웃음은 잦아들지가 않는다.


“푸하, 하하하.”


“너 지금 못 믿는 거지?”


“됐어.”


겐토가 다시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짜라니까?"


“날고 싶었나?”


“무슨 미친 소리야?

자살한 거라고.”


하즈키의 얼굴이

순간 잿빛으로 변하더니,

난간을 잡고 천천히 내려왔다.

왠지 밑을 내려다보니,

공포와 충동이 밀려와 흠칫,

놀라는 모양새다.

마치 죽은 사람이 덥석,

잡아 끌어내릴 것만 같았다.

겐토가 말했다.


“아마 여기도 조만간

출입 금지 지역이 될 거야 쯧.”


“내려가자.”


크레파스의 색깔을 뽐내던 그림들이

서서히 지는 해에 가려

단순한 색깔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바다를 거쳐 도착한 바람은

갈 길을 잃고 제자리를 윙윙,

소리를 내며 소용돌이친다.

길가에는 아직도 작년에 떨어진

마른 잎이 이리저리

바람에 끌려다니고 있었다.


높은 곳에서 내려볼 때

보이지 않은 것들이 눈에 띄었다.

마른 솔방울도 보였다.

모든 생명이 움트는 시기에

마른 솔방울이라니,

처량해 보인다.

공원 내 있는 의자도

그들의 색, 이라니 그것 또한 처량해 보였다.


겐토의 낮은 목소리의 정체가 궁금했지만,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겐토가 의자에 두 팔을 길게 뻗어

머리통을 뒤로 젖혔다.

겐토는 긴장감이 밴 헛기침을

어색하게 내뿜었다.

하즈키는 겐토의 긴장을 풀어주려는 듯,

팔꿈치를 툭, 건드리며 웃어 보인다.

겐토는 괜히 비아냥거렸다.


“웃기는.”


하즈키가 먼저 나오코의 이름을 꺼낸다.


“나오코도 온 거 알아?”


겐토가 침을 꿀꺽거리기 시작했다.


“아, 진짜 내가 그런 단계면 뭐, 고민하겠냐?”


“큭.”


“웃지 마, 나 심각하다.”


“아, 알았어 알았어.”


“너까지 어려워졌어,

이건 말이지 정말, 복잡해.”


하즈키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 지으며,

명치를 손가락으로 쿡, 찔렀다.


“어려울 것, 하나 없다 복잡할 것도.”


“네가 아니었음,

나오코를 대하는 게 이리 어렵지도 않았을걸?”


“나는 거기에 왜 갔다 붙여?”


하즈키는 내심,

나오코가 자신에게 집착한다는 것을

모른 척하고 싶은 마음에

딴 척을 피워 보지만,

겐토에겐 어림없다.


“모른 척 마 나오코가

네게 보이는 집착이 솔직히 보통은 아니잖아?”


겐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즈키는 고개를 끊임없이

좌우로 흔들어 보이고 있었다.


“아, 됐다 너희 둘 사이에 끼워 놓지 마.”


겐토가 눈을 흘기며,

하즈키의 뒤통수를 갈기는 흉내를 낸다.


“무책임한 새끼.”


하즈키는 내가 왜,라는 표정을 짓고

눈을 크게 뜬 채 깜박이지 않고

겐토를 노려본다.


“나오코가 맘을 열지 않아,

아니 열었다고 생각했는데… 또 아니야.”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났다고 그런 소리야?

뭐가 그리 급해?”


겐토가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넌? 급행열차 안 탔어?”


겐토가 주머니 속을 뒤적이며 따닥따닥,

비닐 구기는 소리를 내며

찌그러진 담배를 꺼내 물었다.

얼마나 구겨져 있었는지,

납작한 모양을 한 담배에서

과연 연기가 나올까 싶다.

성냥불을 붙이더니,

입술을 오, 하는 모양을 만들고

볼을 있는 힘껏 쏙, 하고 집어넣는다.

신기하게 불이 붙었다.


“후, 네가 몰랐을 뿐이지, 난 오래됐다
말하기 좀 어려웠어,

네 빠른 눈치도 한물갔고 말이야.”


“오래? 언제부터?”


겐토가 다시 볼이 쏙,

들어가도록 담배를 있는 힘껏

빨아들이며 눈을 허공으로 옮긴다.


“네 동생이 됐을 땐,

그저 귀여웠을 뿐,

그땐 확실한 감정을 몰랐지…
난, 워낙 인기가 많았으니까.”


겐토가 팔꿈치로

하즈키의 옆구리를 찔렀다.


“나도 어렸었다는 얘기야,

나오코는 꼭, 나만 보면

입을 쑥, 내밀고 항상 눈을 흘겼어,
그 모습에 내가 가 버렸나, 싶기도 하고,

아무튼 지금 내 감정은 확실해
중요한 건, 그걸 나오코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거지.”


“네가 어떻게 알아? 걔 감정을?”


“아무리 관계가 성립이 안 되어도

그 정도 눈치는 나누고 지냈다고. 인마.”


“휴우우 난, 진심으로 둘, 잘 되었으면 한다.”


“그러니까 네가 도와줘.”


하즈키는 눈을 크게 뜨고

말도 안 되는 얘기를 하고 있다며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떠날 거야, 이곳.”


“응? 진심이야?”


하즈키가 고개를 끄덕였다.


“갈피 못 잡을 때는 언제 고, 결정 내린 거야?”


“그렇다니까.”


“흠 알았다, 그렇다면 나는 찬성!
집, 내가 알아봐 줄게

최고의 여자들이 우글거리는 곳으로 말이야.”


길 잃은 새까만 개미 한 마리가

하즈키의 흰 운동화를 타고 올라온다.

아주 통통하게 살 오른 모습이다.

다리를 털어 내며 밟으려 다

힘을 빼고 지켜보았다.

길을 잃고 울퉁불퉁한 아스팔트 길을

아슬아슬하게 기어갔다.

아마 느껴보지 못했던 낯선

촉감을 가진 길일 것이다, 란 생각이 들었다.

흥분을 가득 싣고,

낯선 땅을 걷고 있는 자기 모습 같았다.

겐토가 말했다.


“나오코, 아슬아슬해

굉장히 위험해 보이기도 하고.”


“무슨… 말이야?”


“넌, 나오코에 대해서 아는 게 있긴 하냐?”


“왜?”


“같은 곳에 살면서 모른다는 게 말이 돼?
이 새끼 생각보다 진짜 나쁜 새끼네.”


“돌리지 말고 말해.”


“오른손등이 많이 긁혀 있더라,

상처가 꽤 깊었어.”


순간, 나오코의 손에 감긴 붕대가 떠올랐다.

잠깐 스쳐 지나갔을 뿐,

그땐 자신에 대한 정당성을

찾기 급급했기 때문에

물어볼 여력이 없었다.


“왜 다친 거야?”


“쳇, 진짜 모르는 군 자해한 거야,

아파하지도 않더라.”


하즈키가 고개를 숙이고 한숨을 길게 내뿜었다.


“다행히 반항하지 않았어,
그래서 쉽게 소독도 하고

붕대까지 감아 줬지, 어떻게 그걸 못 봐?”


하즈키는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넋을 놓았다고 말할 순 없다.


“거의 마주치지 않았어.”


“네가 피한 건 아니고?

아무튼 그래서 그런가,
내가 맘이 급해진 것 같다

걱정되어 일이 안 잡혀.”


“급행열차 타지 마라, 날 보면 깨닫는 거 없냐?

후우… 내가 딱 하나 아는 건,

내가 없어지면 나오코는 좋아질 거야.”


그들은 굳이 얘기를 꺼내 놓지 않아도,

나오코가 하즈키에게 이상할 정도로

집착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잠깐의 침묵을 지켰다.


“자식, 언제쯤 뜰래?”


“글쎄.”


“마나츠는?”


하즈키는 그가 엉뚱한 소리를 한다며

뒤통수를 후려친다.


“마나츠가 왜 나와?

잘 살고 있는 사람을, 나 때문에 망칠 일 있냐?”


“아얏, 니들 아직도 죽고 못 살잖아?”


겐토가 그의 어깨 위에 손을 얹는다.


“하, 여하튼 난 나오코랑 잘해 볼 거다

네가 오빠니까 난 허락받은 거다?”


“허락 같은 소리, 누가 누굴 허락해,

나 같은 놈이 무슨.”


“또 또 그 자학,

숨 쉴 시간도 주지 않고 진행할 거야
네가 탄 급행열차와는 달라

최고급 비행기를 탈 거니까.”


겐토의 머릿속은

온통 나오코의 생각으로 가득하다.

그래서인지 입가에 미소는

떠날 줄을 모르고 머물렀다.

하즈키가 일어서는 겐토의 엉덩이를 발로 걷어찬다.


“어련하시겠냐.”


어쩌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

믿고 있었던 일들이

일어날 확률이 높아졌다.

겐토는 자신이 목표로 삼는 일은

무조건 해내는 친구였고,

단 한 번도 이루지 못한 적이 없다.

겐토가 진짜 가족이 될 가능성은

점점 더 높아졌다.


?src=http%3A%2F%2Fblogfiles.naver.net%2F20151102_201%2Fsksms175_1446398344372vzgs7_JPEG%2F33-1.jpeg&type=sc960_832 출처, 내 하드 속에 영화 있다



하즈키의 관자놀이가

갑자기 지끈거린다.

하즈키의 머릿속에 나오코의

얼룩진 블라우스가 여전히 풀어헤쳐져 있었다.

나오코의 새까만 머리칼이 날리더니,

하즈키의 콧속을 간질이는 듯하다.


깜짝 놀란, 하즈키가 벌떡 일어나 얼굴을 털며 부산을 떨었다. 바닥으로 새까만 개미 한 마리가 툭, 하고 떨어진다. 하즈키는 이번만은 봐줄 수가 없었다. 단, 한 번에 밟아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개미 한 마리에 부산을 떤다며 겐토가 그를 이죽거리며 놀려 댔다. 흔적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지만, 하즈키의 몸 어딘가에서 나오코의 머스크향, 냄새가 날아든다.

구역질이 나왔다. 하즈키의 관자놀이에 식은땀은 멈추기를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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