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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 블라우스

12. 덫

by 금봉



출처 막다른 골목의 추억


매 해마다 같은 날들의 축제가

서서히 막을 내리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다시 자신들의 일상을 찾아

언제 그랬냐는 듯, 심각한 표정을 짓거나,

피로에 절어 있는 얼굴을 하곤 제자리를 찾아 흩어진다.


하즈키는 다시 자동차 부품을 나르는 일을 맡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날을 보내고 있었다.

일정하지 않은 근무시간은 일이 생길 때마다

항상 대기하고 있을 때가 많았다.

자연스럽게 집에 있는 시간은 줄어들었고,

잠만 자는 곳에 지나지 않았다.


뜨거운 여름이 막 달하려 할 때 그는

그곳을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곳의 여름은 5월에 급히 찾아와 어서 가라며

그를 닦달한다.


타다요시는 미네코가 욕심을 부리지 않아도,

힘들이지 않고 살 만큼의 재산을 남겨 주었다.

하지만 미네코의 욕심인지 취미인지는 잘 모르지만

수준급의 솜씨로 수를 놓아가며 그것을 팔기 시작했다.

종류는 정말 다양했다.

벽에 걸 수 있을 정도의 풍경,

굳이 필요하지 않은 컵 받침, 또는 냄비 받침,

상을 덮는 덮개, 간혹 구멍이 뚫린 조끼까지

거뜬히 만들어 냈다.

처음엔 마을 사람들을 상대로 조금씩 팔아 왔지만,

지금은 미리 주문하며 자신들이 원하는 모양을

스케치해서 주는 사람들까지 생겨났다.


당연히 한 작품을 만드는 것에 밤을 꼬박 새워도

사나흘은 걸리는 터였다.

미네코의 욕심이 과했는지, 지키지 못한 약속 때문에

손해를 보거나 싸움까지 생겨

난처한 상황까지 이르기도 했다.

하지만 미네코는 그 일을 일부러 미루거나

게으름을 피운 적이 없다.

워낙 꼼꼼한 그녀였고 물건을 빨리 받고 싶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문제는

일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어느새 그렇게 미네코의 좋지 않던 소문도

점점 사라져 갔고

그들은 그녀를 다른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할 때였다.


동네에서 그나마 유명했던 전통찻집의 여주인이

미네코에게 컵 받침을 주문한 지 보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보기에 아주 쉬워 보인 디자인이었고,

한 가지 색으로만 사용하는 것으로

금세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선급을 치른 후였기에

성질이 고약하고 급한 여주인은 가만히 있을 리 만무했다.


출처 아수라처럼



미리 받은 금액을 모두 돌려준 후

맞지 않은 개수라도 선물로 주겠다며

몇 번이나 사과를 한 미네코다.

하지만 고약한 여주인은 괴롭히려 작정을 한 모양이다.

결국 여주인은 마치 화풀이라도 하는 듯,

집까지 찾아와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떠들어 대며

난동을 피웠고, 미네코는 또다시 남편 잡아먹는

귀신이 붙은 여자, 재수 없는 여자,라는 소리를 들었다.

때마침 자리에 있었던 나오코는

미네코에게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광경을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나오코는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여주인을 노려보며 아주 독한 말을 내뿜었다.


“그렇게 이 집에서 그런 짓을 멈추지 않는다면
당신도 일찍 죽게 될 거야, 두고 보라고,
어디 더해 보시지 그래?”


성미가 고약한 여주인은 그제야

목소리가 조금씩 차분해지기 시작했다.

울긋불긋한 얼굴도 제 색깔을 찾아가며

어린 나오코의 눈을 슬금슬금 피하며 눈치를 살폈다.


나오코는 동네에서 오랫동안

기이한 사람으로 칭해져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성미가 고약하고 대담한 사람이라도

그녀를 이길 재간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오코의 예사롭지 않은 눈빛을

오랫동안 바라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결국, 여주인은 원금의 반과 주문했던 수량의 반을 딱 잘라,

고스란히, 부드럽게, 전달받은 후

그곳을 쥐새끼처럼 빠져나갔다.

말하자면 손해 하나 본 것 없는 거래였다.

여주인은 마치 모든 스트레스를 날려버린 사람처럼

이죽거리며 엉덩이를 좌우로 흔들어 대며 걸었다.


나오코는 험한 말을 듣고도 찍, 하는 소리도

한 번 내지 못하는 엄마가,

무턱대고 덜컥 약속해 버리는 엄마가,

이해할 수 없었다.


시간이 많이 흐르진 않았지만,

나오코는 엄마를 증오하는 기도를 멈춘 지가 오래다.

정말 이상한 건 기도를 할 때보다

하지 않는 지금의 미네코는 더 불행해 보였다.


출처 넷플릭스 아수라처럼



그 일이 일어난 후,

미네코는 또다시 술을 입에 대기 시작했고,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하루의 일과가 그렇게 끝나버리면 또 다른 하루는

다시 멀쩡하게 굴었다.

그렇게 또 하루는 술에 절어 있거나, 를 계속 반복했다.

또한 다시는 자수를 놓는 실,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미네코는 새벽마다 온갖 불평불만을 늘어놓으며

한탄하는 일이 잦아졌다.


당연히 미네코가 늘어놓는 말은 그 누구에게도

하즈키도, 나오코에게도 하는 소리가 아니다.

하즈키는 그런 그녀에게 연민을 느끼다가도

도가 지나칠 땐 잠을 자는 것마저 집 안에서 해결하지 않고

밖으로 나가 잠을 청했다.

타다요시가 없는 집은 미네코의 짙은 향기로 가득했고,

온전한 미네코의 우울한 공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하즈키는 며칠째 미네코와 얼굴을 마주치지 않아

마음에 안식을 찾은 듯, 평화로워 보인다.

미네코를 깨우지 않으려 발목까지 힘을 잔뜩 쥔 채

아주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오늘따라 무슨 정신이었는지,

집 안으로 올라가는 자신이 그렇게 멍청해 보일 수가 없다.

낡은 나무 계단은 이상하게 다리에 힘을 줄수록,

그를 내치듯, 정적을 무너뜨리며 소란을 피웠다.


“후, 됐다.”


오랜 시간을 허비했다는 생각에 욱, 하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종아리가 순식간에 당기기 시작하더니

부족한 운동 탓을 하듯, 쥐가 나기 시작한다.

하즈키는 조용함을 포기한 채

나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쥐가 잠잠해지길 기다린다.


“으, 이런 젠장.”


며칠째 방문을 걸어 잠그고

미동도 하지 않던 나오코가 그와 마주쳤다.


“하즈키, 뭐 하는 거야?”


그가 신음을 뱉는다.


“후, 아무것도 아니야, 지금 들어왔어.”


그걸 모르지 않다는 듯, 나오코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하즈키가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나오코는 그 앞을 자연스레 막고 서 있었다.

하즈키가 나오코를 빤히 내려다본다.


“왜?”


“하즈키, 얼굴 진짜 오랜만이네.”


하즈키의 좁디좁은 어깨가 으쓱거렸다.

방에 들어서자 나오코도 자연스럽게 발을 디뎠다.

하즈키는 그녀에게 나가라며, 손짓하고 싶지만

그러기엔 그녀의 발가락은 벌써 창문 쪽 깊숙이 다가와 있었다.


“휴우.”


나오코는 돌돌 말아 쥔 기다란 종이를 들고 있었다.




“하즈키는 왜 그렇게 한숨이 길어?”


“그랬나.”


“여전히 맘에 들지 않는 것, 투성이군?”


하즈키는 겉옷을 걸어 놓으며 대답했다.


“옷 갈아입을 거야.”


나오코가 종이를 쥔 손을 들어 올렸다.


“하즈키는 이게 뭔지 물어보지도 않네?”


나오코가 뚫어져라 하즈키를 바라보았다.

마치 미네코가 자신을 볼 때처럼 그 모습은 같았다.

그녀가 무슨 주문을 한다 해도

들어주지 않으면 벌을 받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즈키?”


하즈키는 약간 짜증 섞인 대답을 놓는다.


“어 그래.”


“받아.”


“이게 뭐야?”


“마지막.”


하즈키는 급격하게 피곤함을 느꼈다.


“뭐, 이름이 그렇다는 거야
그런 표정까진 짓지 않아도 돼.”


타다요시를 떠나보낸 후,

나오코와의 사이의 틈은 점점 벌어지기만 했다.

하즈키는 그걸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쉬어.”


기다란 종이를 책상 위에 놓으며

드디어 그녀의 발가락은 문지방을 건넌다.

나오코가 며칠 동안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

둘둘 말린 종이 때문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무엇을 그려 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정성을 생각해서라도 벌떡 일어나

펼쳐 보는 것이 당연할 터다.


숙면한 지가 언제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하즈키의 눈은 말린 종이 안을 들여다볼,

그 어떤 호기심도 남아 있지 않았다.

시선은 말린 종이에 멈춰서 빠르게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잠시 고요한 풍경이 펼쳐졌다.

캄캄한 곳에서 달에 실을 묶어 질질 끌고,

굽은 어깨에 커다란 얼굴을 쑥 빼고 걷는

타다요시가 희미하게 보였다.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그의 굳은 의지는

앙다문 입술에 녹아내려 있었다.


타다요시의 걸음은 느리지만

실에 묶인 달은 점점 멀어져 속도에

반비례하며 멀어져 갔고,

실타래의 길이 또한 느슨해지기 시작했다.

타다요시의 얼굴만큼 점점 커다래진 달,

덕에 그의 모습은 이제 거의 한 점에 불과해 보였다.

널브러진 실타래가 여기저기 엉켜 있었다.

하즈키는 사라지고 있는 타다요시를 부를 새 없이

실타래에 손을 뻗었다.

엉킨 실타래를 풀고 싶은 욕구에 악, 소리를 내며

뻗어 보지만 촉감으로 느껴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으어어 억.”


놀란 가슴을 부둥켜안고 눈을 떴지만,

가슴 위에 나란히 올려져 있는 두 손이

한동안 움직이지 않을 작정인 듯했다.

퉁, 탕거리는 심장을 조절하기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누런 천장을 눈 한번 깜박이지 않은 채 바라보고 있었다.

사타구니에 맺힌 땀 때문인지 은밀한 부위가 간질거렸다.

마치 벌레가 기어 다니고 있는 느낌이다.

땀이 아니라면, 정말 벌레일까,라는 생각에

몸을 벌떡 추켜세웠다.

땀이 기어가고 있는 속옷을 모두 벗어던졌다.

다행히 눈에 보이는 벌레 쪼가리는 없다.


“하아아아… 젠장.”


타다요시가 죽은 후, 꿈에서 그를 본 건 처음이다.

그렇게 그리워한 사람이었건만,

꿈에서 본 그는, 잡고 싶지도 부르고 싶지도 않았다.

아니, 불렀더라도 타다요시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갔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꽤 오랫동안 잠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줄 알았다.

시계 속 바늘은 두 시간도 채 넘지 못하고 머물러 있었다.





한낮, 봄볕의 따뜻함은 언제 그랬냐는 듯,

5월의 깊은 밤은 스산하기만 하다.

한낮의 따뜻함에 기지개를 켜다 만 파리 한 마리가

스산함에 힘을 잃었는지 낮은 비행을 하다, 멈췄다가, 반복하는 중이다.

사방이 뚫린 자신만의 공간에서

마치 누군가 함께 동거하고 있는 것처럼 눈치를 본다든가,

자신도 모르게 두리번거리게 된다.


창밖의 환한 달이

하즈키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잊었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것을 깨닫자

빠르게 새 속옷을 꺼내 입었다.

구석진 곳의 마네키 네코가 키득거린다.


돌돌 말린 종이는 바람에 다가와 하즈키의 발 등에 인사한다.

보기보다 꽤, 크기가 크다.

왼쪽을 펼치면 오른쪽이 말려 오고,

왼쪽을 펼치면 오른쪽이 말려 온다.

앙상한 다리뼈를 척, 하고 걸쳐 고정했다.

하즈키의 입이 쩍 벌어져 다물어지지 않는다.


출처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꽃잎이 바람에 흐드러지고 있었다.

정말 그림이 아닌 실제 상황 같았다.

나이 많은 나무가 중간에 믿음직스럽게 버티고 서 있었고,

그곳에 숨어 누군가가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즈키의 생각에 그 누군가는 아마도

나오코일 것이라며 짐작을 해 본다.

마나츠와 재회한 그날 하즈키의 모습이다.

하즈키는 마나츠의 무릎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하즈키의 눈동자를 그렇게 세심하게 그려 내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다.


돗자리에 놓인 달걀말이의 기름진 바닥도 그대로다.

마나츠의 새하얀 다리가 하즈키의 옷으로 덮여 있었고,

마나츠의 손이 하즈키의 손을 매만지고 있다.

놀랍고 어이없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나오코의 실력은 대단했고,

그림에서 진한 감정이 묻어 나왔다.

입가에 웃음을 짓던 하즈키의 얼굴이

갑자기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눈치챈 나오코의 감정이 무섭게 심장을 파고든다.

심지어 하즈키의 눈 안에는 공포가 가득하다.


마나츠의 새하얀 다리는 유난히 길다.

팔과 목, 손가락, 모두가 길다. 생각해 보니,

마나츠의 머리카락은 갈색이다.

한데 그림 속의 마나츠는 까맣고 길게 늘어뜨린

머리칼을 하고 있었다.

하얀 얼굴에 크고 길게 뻗은 눈,

오뚝한 코, 까만 눈썹,

모든 것이 그녀와 일치했다.


“맙소사, 나… 오코.”


하즈키는 다시 한번 눈을 크게 뜨고 그림을 곱씹었다.

나이 많은 나무 뒤에 숨어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건,

나오코가 아닌, 마나츠의 머리칼이었고

하즈키가 누워 있는 무릎의 주인은 나오코다.

등줄기에 소름이 바싹 올라왔다.

나오코를 처음 봤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 나오코가 하즈키를 바라봤을 때의 눈빛은

지금과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

하지만 뭔가 잘못되고 있음이 분명하다.


나오코의 행동이 좀, 과하다 싶을 때도 있었지만,

이건 말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순간 그림을 구겨 버리는 시늉을 했지만, 그럴 수가 없다.

집어던진 그림이 다시 돌돌 말리더니 그의 발가락에 닿았다.

돋은 소름은 가라앉기를 거부했다.


하즈키는 반사적으로 옷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정리되지 않은 옷장 속에 모든 물건을 헤집었다.

다다미 위에 널브러진 옷가지와

어릴 적 쓰던 물건까지 온갖 잡스러운 물건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널브러진 옷가지들은 가방 하나도 채

차지 않을 만큼의 양이다.


똑, 똑, 똑.


손톱으로 긁는 듯한 소리가

다시 한번 심기를 어지럽힌다.

나오코는 그녀답게 하즈키의 목소리를

확인하지도 않은 채 나오코의 말만 한다.


“들어갈게.”


하즈키는 돌아보지 않고 정신없이 옷장을 계속 헤집었다.


“하즈키?”


하즈키는 이젠 다르게 들리는

나오코의 목소리에

하즈키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지 않았다.


“하즈키?”


나오코가 그의 어깨를 세게 흔들었다.
순간 붉은 화가 치밀어 올라

나오코의 팔을 세게 뿌리쳤다.


“그만, 좀… 해.”


“하즈키…”


내쳐진 팔목이 아팠는지 감싸며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하즈키를 바라보았다.

하즈키는 다시 온화한 목소리를 들려줄 수밖에 없다.


“나오코, 지금이 몇 시야? 제발...”


“미안, 방해하려던 건 아니야.”


“그런데 넌 이미 이곳에 있지.”


나오코가 갑자기 옷장 서랍 안을 뒤지더니

마구 접힌 가방을 꺼내 밀었다.


“이것, 찾는 거야?”


하즈키 보다 더 하즈키의 물건 위치를

꿰뚫고 있는 나오코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무서웠다.

나오코는 하즈키의 맘을 자신의 것처럼 잘 알고,

느끼고 있었고, 모든 것을 멋대로 마구 흔들어 놓았다.

그런 나오코의 눈빛은 당연히 불편할 수밖에 없었지만

기이한 건 거부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이것, 너무 크잖아,
하즈키가 들어가도 남아,
정작 넣을 물건도 없으면서…”


“흐흣, 그런가…”


하즈키는 테이프를 되돌아 감기를 하듯,

널브러진 것들을 옷장에 꾸역꾸역 집어넣었다.


“어디로 갈 거야?”


하즈키의 한숨 소리가 길게 늘어졌다.

나오코는 구석에 팽개쳐진

돌돌 말린 종이를 집어 올리더니,

그림을 보고 감상에 빠진 모양새다.

하즈키가 말했다.


“넌 모든 걸 네 맘대로 하고 싶어 하지.”


“하즈키는 왜, 꼭 내가 잘못한 게
있는 사람처럼 대하는 거야?”


하즈키가 옷장을 쾅, 소리가 나도록 닫는다.

그 소리에 나오코의 어깨가 잠시 들썩인다.


“난, 네게 해줄 말이 없어.”


나오코의 표정은 그 따위 말 즘,

절대 기분 나쁘지 않아, 라 말하는 듯하다.

나오코가 책상 의자에 걸터앉아

타다요시의 사진을 들여 보며 서늘하게 말했다.


“타다요시는 죽었어.”


하즈키가 나오코의 입술을 흘려본다.


“그때 하즈키 동생, 나오코도 함께 사라졌을 거야.”


“내게 설명하지 마.”


“하즈키.”


“아니, 그만.”


나오코의 어깨를 흔들다가 툭, 하고 손을 늘어뜨린다.


“제발, 난 피곤해.”


출처 영화 나라타주



나오코는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머뭇거리던 입술이 어렵게 소리를 낸다.


“그래도, 떠날 때 얘기는 해줄 수 있지? 꼭.”


나오코는 방문을 채 닫지 못했다.

문이 삐걱거렸다.

끝내 하즈키는 또다시 쾅, 소리가 나도록

문을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처럼 닫았다.




나오코는 서랍 안을 뒤져 새로 산 촛대와

초를 꺼내 들고 갈 곳을 정해 놓지 않고 계속 걸었다.

치호와 함께 찾아다닌 사진관 자리라는 것도 까맣게 잊은 채다.

치호는 왜, 나오코의 생활 속에 속속들이 잠들어 있다가

그리움으로 자꾸 깨어나는지, 고통스러웠다.

마치 나오코를 괴롭히려는 듯,

치호의 기억을 끼워 맞추는 듯.


길가 모퉁이에 등이 굽은

백발의 할머니가 자리 잡고 있었다.

할머니는 자신이 손수 만든 것이며,

밀랍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초, 할머니의 등은 세월이 만든 것인지,

치호처럼 원래 그러한 것인 것 정말 궁금했다.

설마 치호가 그새 저렇게 늙어 버린 건 아니겠지, 하며

다시 치호에 대한 기억을 꺼내 놓았다.


등 굽은 할머니가 만든 초는

기존에 사용했던 것들과는 확연히 다른 질감이다.

단면 또한 구멍 하나 없이 단단하게 자리 잡았다.


“이 초는, 타긴 하지만 잘 타지 않아.”


아주 오랫동안 쓸 수 있다는 말이다.

초의 기둥을 만지고 있을 때의 뻑뻑하지만,

찐득거리는 느낌은 다른 것과는 비교될 수 없을 만큼

완벽한 촉감을 안겨준다.

나오코는 할머니가 내놓은 초를 모두 사 들고 와버렸다.

마치 있었던 사진관의 자리처럼,

정말 이것 또한 꿈이거나,

아니면 할머니를 다신 볼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실을 증명하고 싶었다.


'이번만은 꿈이 아니길...'


초에 불을 붙이면

촛불이 유난히 길게 쭉 뻗어 노란빛이

선명한 그림을 만든다.

초와 달이 어둠을 밝히는 모습은

오늘도 고요하다.

방 안의 보이지 않는 공기가

조금씩 노란빛을 건드린다.

마치 누군가 입김을 불어넣는 것처럼,

나오코는 그 속에 녹아들어 잠이 들었다.


새로 깔아 놓은 백지 속, 나오코의 주인공은

나무의 녹색을 뒤로하고 여자를 기다렸다.

하즈키는 나무에 등을 기대어 눈을 감고 있었고,

얼굴 없는 여자는 까만 머리칼을 바람에 날리며

하즈키에게 다가갔다.

손을 길게 뻗어 보지만

하즈키는 꿈속에서도 잡히지 않았다.

하즈키가 사진관처럼 또는 치호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바람에 날리는 날카로운 꽃잎이

얼굴 없는 여자의 볼을 스치며

지나간 자리에 핏자국을 남기고 만다.

검은 머리카락의 여자는 앗, 소리를 내며

볼을 쓰다듬어 보지만

어디에도 붉은 자국은 찰나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오랫동안 벽에 기대어 있었던 탓인지 목이 뻐근하다.

감은 눈을 뜨고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 보지만

뚝뚝, 거리는 소리가 잦아들지 않는다.

방문을 열자마자 하즈키가 있을 줄 생각 못했다.

하즈키의 커다란 발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새롭게 사들인 초는 하즈키를 위한 기도에

모두 쓰일 것이다.

지금 보이는 하즈키의 발은 비싼 초의 보상인가라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금세 일그러진 하즈키의 얼굴을 보고

들뜬 감정은 급격히 바닥을 치닫는다.

하즈키는 자신이 떠날 목적지 따위를

나오코에게 얘기할 사람이 아니었다.

지금은 그랬다.


“넌 계단으로 내려가, 미네코가 걱정할 거야.”


하즈키는 빠르게 철로 된 계단을 향해

탕, 탕, 거리는 소리를 내며 내려갔다.

그를 놓칠까, 더욱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탁탁, 소리를 내며 현관에 발을 딛는다.

한 걸음 늦은 하즈키의 얼굴을 바라보며 나오코는 말했다.


“미네코는 없어.”


나오코는 그가 어느 곳을 가도,

그를 따라갈 것이고, 막을 수 없어, 라며

강조하는 듯하다.

짧은 말속에 모든 것을 알게끔 하는

나오코의 말투가 이제는 짜증이 났고 답답했다.


나오코는 어떤 반대의 뜻을 내 비춰도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아이다.

걷는 내내 뒤를 졸졸 따르는 나오코의 인기척을 느꼈지만,

거부의 말은 절대 듣지 않을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즈키의 입이 갈수록 앙, 하고 열지 않았다.


나름의 질서를 가장 잘 지켰던 가로등마저

하즈키를 배신했다.

처절하겐 늙어 버린 노인네의 듬성듬성 빠져 버린 이처럼,

가로등의 불빛은 이가 빠져 있었다.

이 또한 완벽하지 못한 하즈키의 일부분 같아

더 이상 감정은 감출 생각이 없다.


“으억, 후우…”


나오코가 숨을 죽이며 그가 악, 하는 소리에 멈춰 섰다.

나오코의 심장이 방망이질하는 소리가 들릴까,

고개를 숙이며 신발의 코가

하즈키보다 늦지 않게 조바심을 냈다.


드센 바람에 하즈키는 머리를 냅다 숙이며

속도를 늦추며 걸었다.

목구멍에 넘어가는 독한 위스키의 느낌을

성급히 느끼고 싶어 이츠키에게 인사는 뒷전이다.


출처 심야식당



이츠키에 들어서자마자,

자리에 앉아 이츠키에게 검지를 펴 보이며

애원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하즈키의 얼굴을 보자마자,

뒤이어 나오코의 얼굴이 보이자,

오늘은 얼마든지, 마시게,라는 듯,

위스키를 아예 하즈키의 앞에 두고 잔에 따랐다.

그때의 하즈키 얼굴은 정말이지

나오코가 귀찮아, 피곤해,라고 말하고 있는 모습이다.


작은 잔의 한 모금은 하즈키의 갈증에

더욱 건조함을 느끼게 해주는 꼴이다.

빠르게 다시 잔을 따라 목구멍을 열고

고개를 들어 들이밀었다.

심장에 길을 내고

빠르게 내려가는 속도감은 말할 수 없이 짜릿하다.


“흐어…”


나오코는 미닫이문을 챙, 하는 소리가 나도록

밀어 버리며 닫았다.

주인장 이츠키는 놀람을 뒤로한 채

나오코에게 짜증 섞인 말을 뱉는다.

이츠키는 언제나 나오코가 눈에 가시가 박힌 것처럼

똑바로 바라보지도 않고 흘겼다.


“그게 부서져야 새 문을 갈아 끼우는데 말이야, 쯧.”


나오코도 함께 이츠키를 노려보았다.

이츠키는 언제나 나오코를 반갑게 여기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마나츠를 괴롭히는 모습을

이츠키의 눈으로 확인한 후, 로

부정적으로 나오코를 대했다.

남들 말에 의하면 조금은 정의로운 그였기에,

당연히 마나츠를 괴롭힐 작정으로 한 행동을

알고 있었음에도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았다.

아무도 모르게 이츠키는

나오코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던져 주었다.


“그런 짓 할 거라면 다신,

이곳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하겠어.”


그 시절, 나오코는 마나츠의 술잔에

새까만 가루를 몰래 넣는 것을

이츠키에게 들켜버린 것이다.

그건 어떤 주술의 의미이고,

그 주술은 나쁜 의미가 아니다,

마나츠를 위한 것이다,라고 설명했지만

나오코의 팔목을 잡아채고

완강하게 말하는 이츠키에게

다른 어떤 설명도 모두 변명이 될 것이라 깨닫고,

장난스럽게 말을 되받아칠 수밖에 없었다.


“서서히 죽어 갈 거예요,

이미 먹어 버렸는걸,

이거 안타까워서 어쩌지…?”


그 대답에 놀란 토끼 눈을 한

이츠키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터져 참을 수가 없었다.

아주 오랜 시간을 그곳에서 꽤 웃었던 기억이 났다.


나오코는 하즈키 때문에

마나츠를 좋아할 수는 없었지만,

마나츠를 죽일 정도로 미워하지도 않았다.

하즈키가 원하는 것을 손에 쥐게 해주고 싶었고,

하즈키를 위해서 마나츠가 임신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기도를 올리고 난 다음,

주술이 적힌 종이를 태워

하늘에 올려 보내면 재가 남는다.

그 주술까지도 마나츠가 흡수하게

해주고 싶었던 것뿐이다.

늘 그렇게 모든 주변의 사람들은

나오코를 비틀어 보고 비틀어 말했다.

이츠키가 단단한 눈빛으로 나오코에게 돌진해 왔다.


“뭘 마실 거지?”


그 새 하즈키는 또 한 잔의 위스키를

빠르게 목구멍으로 흘려보냈다.


“음, 서서히 죽어 가는 것?”


이츠키는 미친, 이라는 단어가

입으로 튀어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고 있는 중이다.


“좋아, 기다려 보라고.”


더블 잔에 짙고 투명한 노란 액체를 담아

그녀에게 내밀었다.

달콤한 향이 진하게 퍼졌다.

나오코는 이츠키를 바라보며

고개를 내리고 눈을 치켜들어 배시시 웃었다.

더블 잔을 넘기는 속도는

하즈키가 작은 잔을 비우는 속도로도 따라갈 수 없다.


밤 열 한시가 넘어가고 있는 시간,

그들만인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며

술에 서서히 물들어 가길 바랄 뿐이다.

나오코와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

무슨 얘기를 속닥거리는지

하즈키와 말이 끊이지 않는 이츠키가

질투가 날 지경이었다.

하즈키는 쉴 새 없이 위스키를 들이켰다.


하즈키는 항상 왼손의 엄지와 검지로만 잔을 들어 올린다.

나무젓가락과 꽤 닮아 있던 긴 손가락은 새하얗다.

마치 흰 석고를 나무젓가락에 붙여 놓은 모양새다.

나오코는 그를 따라 왼손 검지와 엄지로 잔을 들어 올렸다.

이슬이 맺힌 것처럼 미끄러웠지만,

몇 초는 거뜬히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고집을 세우며 손가락의 중심을 잡아 보려 했지만,

잔이 미끄러져 버렸다.

재빨리 잔은 잡아챘지만,

흰 블라우스에 노란빛 얼룩을 남기고 말았다.


“앗, 젠장.”


이츠키가 그녀를 보더니, 수건을 내밀며 한마디 거들었다.


“잔은 무사하군.”


노란빛은 점점 번져갔고

동그랗고 우스꽝스럽게 가슴 모양을 감쌌다.

하즈키가 뒤 돌아 나오코를 바라본다.

술로 얼룩진 블라우스가 젖어

나오코의 살과 닿아 있었다.

봉긋하게 올라온 젖가슴 살이

통통하게 도드라져 보였다.

자신도 모르게 눈이 그곳에 멈춰지더니,

나오코와 눈이 마주쳤다.

재빨리 고개를 돌려 보았지만,

하즈키의 눈이 그곳에 멈춰 선 모습을

나오코가 보고 난 후다.

끊임없이 식도로 술을 내려보냈지만,

정신은 더욱 선명해지고,

얼굴은 더욱 뜨거워진다.


나오코의 말 대로 타다요시가 존재했을 때의

동생 나오코는 사라졌다.

캐러멜을 쥐면 마냥 행복해하던 진짜 나오코는 사라졌다.

나오코 손엔 캐러멜이 아닌

하즈키가 필요한 모양이다.


출처, 나는 내일 어제의 너와 만난다


나오코의 심장이 또다시 쿵쾅거렸다.

하즈키와 눈이 마주친 순간,

처음 느껴 본 눈빛임을 알 수 있었다.

분명 하즈키의 눈 속에도 나오코가 말한 것과 같이

그때의 나오코는 사라졌다.


그 반가움에 나오코의 심장은

점점 더 격한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숨이 차오름과 동시에 기쁨을 맛보았다.

블라우스의 젖은 부분은 점점 번져,

속옷이 고스란히 보일 정도의 넓이가 되어 버렸다.

이츠키가 다시 마른 수건을 전해주었지만

나오코는 하즈키를 흘긋거리며 손만 닦아 낼 뿐이다.


나오코는 다시 왼손으로 잔을 들어 올렸다.

이번엔 더욱 무거운 맥주잔을 들어 올렸다.

위태로운 자극은 계속 기쁨을 맛보게 해 준다.

식욕이 갑자기 생기더니 급하게

염통구이를 우적우적 씹어 보았다.

그렇게 맛있고 쫄깃한 식감은 오랜만이다.

나오코의 왼손은 쭉, 맥주잔이 들려 있다.

더 이상의 쾌감을 느낄 기회를 이츠키가 막아선다.

이 순간에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의 이름을 읊어 댔다.


“겐토는?”


하즈키가 말했다.


“요즘 연락 뜸하네요.”


“그곳이 살 만 한가 봐.”


이츠키 또한 겐토가 부러울 만하다.


“나오코와 연락은 해?”


겐토의 이야기에 나오코의 이름을 끼워 넣는

이츠키가 얄미웠다.

이츠키는 겐토가 나오코에게 관심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나오코가 겐토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무슨 얘기예요?”


“잘들 몰려다니니까, 하는 소리야.”

“술 한 잔 더 줘요.”


“잘, 알겠습니다.”


이츠키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술을 쭉, 내밀고 일어섰다.

하즈키는 나오코가 술을 더 마시지 않길 원했지만,

뒤돌아서 그녀를 보고 말하기가 힘이 든다.

그때 나오코가 먼저 하즈키를 부른다.


“하즈키.”


하즈키의 등이 움찔했지만, 뒤돌아보지 않았다.

나오코는 하즈키가 나오코를 바라보며

목소리를 들려주길 바랐다.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해 머리를 써야만 했다.

멍청이 겐토는 정말이지 그들 사이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확실하다.

어쩔 수 없이 나오코의 입으로 겐토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겐토 말이야.”


겐토가 나오코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하즈키는 나오코를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제야 하즈키의 빛나는 갈색 눈동자를 정면으로 확인한다.


“전화가 왔었어, 겐토 말이야.”


겐토는 하즈키의 근무시간을 알고 있었고,

때마다 직장으로 전화 연락을 해왔기 때문에

집으로 연락을 해 왔다는 얘기에 흥미롭다.

분명 겐토는 나오코가 궁금했다.

하즈키는 골똘히 생각하다

나오코를 바라보며 오랜만에 기분 좋은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나오코는 자신을 놀리는 것 같아 미간은 찌푸렸지만,

그때 하즈키는 나오코를 바라보고 있었고,

드디어 하즈키가 목소리를 냈다.


“알고 있었어?”


나오코는 최대한 길게 목소리를 끌어내고 싶어졌다.


“뭘?”


하즈키가 말했다.


“겐토가 널 좋아해.”


나오코는 겐토 따위는 지금 내게 중요하지 않아,

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응, 잘 알아.”


하즈키의 눈이 휘둥그렇다.

“진짜 알고 있었어?”


나오코는 커다란 맥주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하즈키는 방금 나오코가 그린

그림 속의 나오코와 하즈키를 훅, 하고

빠르게 잊어버린 것 같다.

하즈키는 반갑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래된 것 같아, 나만 몰랐던 거지.”


겐토는 늘 여자 친구가 있었고, 꽤 인기 있는 남자다.


“난, 여자들이 좋아하는 스타일이야,
근데 그 아이는 날 싫어해.”


겐토의 투덜거리는 소리가 옆에서 들리는 것 같아 키득거렸다.

하즈키는 그림을 쓰레기통에 버린 사람처럼,

모른 척, 굴었다.

이번엔 나오코의 얼굴을 꼼꼼히 훑어 내려갔다.

나오코를 그렇게 바라보는 하즈키가 싫지 않았지만,

나오코가 원하는 감정과 이야기를

계속 지속시키고 싶었다.

나오코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왜 자꾸 키득거리는 거야?
기분 나빠지려 해.”


하즈키가 손사래를 친다.


“미안, 미안.”


하즈키는 계속 나오코를 바라보며 싱긋거리다가,

말하다가, 손짓하다가,

머리카락을 쓸다가, 를 한다.


“나오코, 네가 스물넷?”


나오코는 일초의 시간도 놓쳐 버릴까,

고개도 천천히 끄덕거린다.


“그때 넌 열여섯이었어.”


하즈키가 나오코의 어릴 적 모습을 회상하고 있었다.

나오코는 기쁨이 하늘에 닿아 떨어지지 않길 바랐다.


“내 나이만 생각했네, 훗.”


“난, 어른이 된 지 꽤 오래야

하즈키만 몰랐던 거지.”


출처, 와카코와 술



나오코가 보란 듯이 맥주잔을 들어 올리며

술을 마시는 성인이라며 꿀꺽거렸다.

하즈키는 나오코를 더욱 꼼꼼히 보았다.

처음 알게 된 것처럼,

자세히 들여다본 나오코의 미모에 놀랐다.

눈을 깜박이며 다시 확인해 보아도,

나오코는 남자의 눈이 돌아갈 정도의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오코의 말처럼, 그녀는 정말 어른이 된 것이다.


“그래, 나만 몰랐던 거야.”


키 작은 열여섯 꼬마의 정수리는

고개를 숙이며 확인했던

그에게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나오코, 넌 어릴 적 그때가 가장 예뻤어.”


나오코는 하즈키의 말은 어처구니없다고 생각했다.

미네코는 나오코의 가늘고 작은 눈과

남자 같았던 골격은 죽은 아빠와 닮아

맘에 들지 않는다는 소리를 끼고 살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미네코의 그 소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나오코는 미네코의 모습이었고, 눈부시도록 화려했다.


나오코의 흰 블라우스가 따뜻한 바람에 말라

누런색으로 바뀌었다.

나오코는 그 새 말라 버린 블라우스가 아쉽다.


“난, 그때의 내가 가장 싫어.”


검은 머리칼이 빗장뼈에 자리 잡더니

나오코를 간질였다.

빠르게 머리칼을 뒤로 넘겨보았지만 속수무책이다.

자신도 모르게 긁어 댄 움푹 파인 빗장뼈에

붉은 자국을 남겼다.


“겐토와 난, 네 어릴 적 모습을 예쁘게 기억해.”


나오코는 또 한 잔의 맥주를 들이켰다.

뜨거운 히터 바람이 하즈키의 얼굴을

불그죽죽하게 만들었다.

그는 위스키를 반 병째 들이켜는 중이다.

주황 불빛에 갈색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내내 힘을 주던 왼손에 힘이 빠져

테이블에 손을 얹고 다른 쪽은 턱을 괴었다.

그렇게 바라보는 하즈키는 정말 완벽해 보였다.


억겁의 시간이 걸린다 해도

나오코는 그의 몸짓을 섬세하게 바라보는 게 좋았다.

아무도 깨우지 말았으면 하고

입을 앙다물고 감상하는 중이다.

갑자기 정적을 깨고 미닫이문 소리가 길게

드르르륵, 열리며 끝내 꽝, 하는 소리로 닫혔다.

구석에서 꾸벅거리던 이츠키가

반사적으로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소리를 질렀다.


“아… 당장 문을 손보든 해야지 원, 쯧.”


이츠키는 겐토의 얼굴을 보더니

더욱 큰 소리를 낼까, 하다 뒤에서 얼굴을 내미는

마나츠를 확인하곤 입을 스스로 막고 비켜선다.

얼굴이 발개져 손뼉을 치며 들어오는 마나츠가

그 둘을 보고 환호한다.


겐토는 오랜만에 보는 하즈키는 안중에도 없고

나오코를 보며 살짝 뒷걸음친다.

역시나 입이 쩍, 벌어지며 꼴깍거리기 시작한다.

이츠키가 겐토의 뒤통수를 세게 내리쳤다.


마나츠는 나오코에게 가볍게 눈인사하며,

하즈키에게 다가가 앉아 있는 하즈키의 얼굴을

허리춤으로 바싹 끌어당겨 안았다.

마나츠가 하는 짓은 마치

엄마가 아기를 달래는 듯한 그런 모습이다.


“당신? 우리, 우연이야?”


목을 바싹 끌어당긴 마나츠의 손에

기분이 나쁠 법도 한데

하즈키는 마나츠에게 길들여져

오랫동안 그렇게 안겨 있었다.


나오코가 미지근한 맥주를 마저 따라 단숨에 들이켰다.

미지근한 맥주의 탄산마저 사라져

기분과 같이 저절로 미간도 찌푸려진다.

겐토가 나오코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전화를 받아야 말이지,

어쩔 수 없이 우리만 한잔하고 오는 길이야.”


겐토는 마치 자신은 마나츠와

그 어떤 관계도 아니고 친구일 뿐이야,라고

나오코에게 변명하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그 모습에 하즈키는 혼자 웃음이 터져 큰 소리로 웃었다.


“우하하하. 아, 정말… 하하하.”


멍청이 겐토가 하즈키를 따라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인다.

하즈키의 골탕 먹이려는 눈빛이

겐토를 곤혹스럽게 만들 작정이었지만

그는 이 상황이 더 좋은 것처럼 보였다.


마나츠가 앞에 있을 때면 늘,

고개 숙인 남자를 자청하는 이츠키가,

웬일로 마나츠의 눈을 마주치며

양손에는 커다란 술병을 들고 거들었다.


“자, 이 술은 오늘 내가 사는 거야.”


오늘 이츠키의 기분은 굉장히 들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쨌든 유부녀가 아닌 마나츠를 보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만족하는 모습이다.

이미 이츠키에는 다른 손님을 맞이하려는

불빛은 꺼진 지 오래다.


내내 밖으로 들려오는 하즈키의 호탕한 웃음소리와,

연신 혀 구부러진 소리를 하는 마나츠의

우리, 당신, 이라는 소리가

지나가는 사람들의 걸음을 한 번씩 멈칫,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나오코가 눈짓으로 마나츠의 담배케이스를 가리켰다.

대수롭지 않게 나오코에게 내미는 척했지만

마나츠의 눈은 나오코에게 계속 향해 있었다.

단 한 번도 담배에 손을 댄 적 없는 나오코가 궁금했다.

담배케이스의 앞뒤도 구분 못하는 나오코가

담배를 꺼내려면 굉장히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마나츠가 금장으로 된 납작한 뚜껑을 열어

가느다란 담배를 나오코에게 건넨다.


나오코는 손바닥을 편 채로, 자신 있게 받는다.

하지만 표정은 어떻게 써야 해?라고 묻고 있었다.

마나츠가 나머지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희한하게 그녀가 물고 있는 담배마저도

교태가 섞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나 다를까 마나츠의 붉은 립스틱이

끈적하게 하얀 종이에 붙었다, 떨어졌다, 를 한다.

그때 나오코는 솔직히 마나츠가 멋있어 보였다.

마나츠가 뿜어 대는 담배 연기까지도 매력적이었다.

나오코는 흡연하는 모습에도 매력이 넘쳐흐르는

그런 마나츠가 부럽다.

마나츠를 보지 않은 척, 그녀처럼 담배를 입에 물어본다.

마나츠가 붉은 대가리의 성냥으로

불을 붙여 주었지만, 불이 잘 붙지 않았다.


“나오코, 쭉 빨아들여.”


빨아 당기는 시늉을 하는 마나츠의 붉은 입술에

자신이 농락당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즈키가 인상을 찌푸리며 나오코를 바라보았지만,

나오코는 뭐든 하고 싶은 건 하고 마는 성격이라

말리는 법이 없다.

담배를 빨아들이는 순간,

기침과 연기, 침, 눈물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우웩, 콜록, 콜록. 하암.”


겐토가 빠르게 나오코의 입술에 걸쳐져 있는 담배를 빼앗더니,

자기 입에 갖다 물었다.

순식간에 뿌연 연기가 그들의 시선을 어지럽혔다.

나오코는 겐토의 모습에 어이가 없어

싫다는 표현도 할 수 없었고

그대로 매운 눈물을 흘리고 있을 뿐이다.

마나츠는 겐토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즈키 옆에 딱, 달라붙어 있던 마나츠가

눈알을 이리저리 굴렸다.



“겐토, 이건 뭘까?"


하즈키는 또다시 겐토의 행동을 보고

웃기만 할 뿐이다.

나오코가 콧물을 마저 닦더니,

겐토와 눈을 마주치며

소리 없이 입 모양을 천천히 보여준다.


“멍, 청, 이, 정말 싫어.”


겐토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뭐, 이건 몸에 좋지 않아,

배우지 않는 것이 답이야.”


마나츠가 하즈키를 한 번,

겐토를 한 번, 이츠키를 한 번,

둘러보며 의아해했다.


“나오코의 건강을? 겐토가? 풉.”


마나츠만 알지 못했던 겐토의 감정을

빠르게 알아차리며 눈치 빠른 마나츠는

감탄사를 연발했다.


“아… 뭐야, 그런 거야? 그래? 응?”


마나츠는 마치 그들의 사이를

공공연하게 떠들어 대고 싶어 하는 눈치다.

감탄사를 연발할수록,

하즈키에게 바싹 붙어 나오코를 바라보았다.

나오코는 인내심이 극에 달해

금방이라도 욕이 뿜어져 나올 것 같은 표정을 했다.

하즈키는 흡연자는 아니었지만,

과하게 술에 취했거나,

과하게 기분이 나쁘거나,

할 때 담배를 질겅이는 습관이 있다.

그가 질겅거리고 씹은 담배가

테이블 위에 지저분하게 늘어져 있다.


나오코는 고개를 숙이고 눈을 치켜뜬 채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고,

멍청히 겐토는 도쿄 생활의 주 부분인 돈과 여자,

얘기를 끊임없이 늘어놓았다.


간혹, 나오코를 흘긋거리며

자랑하고 싶은 부분의 이야기를 크게 떠들거나

테이블을 콩콩거리고 두드리거나 하는 행동들을 했지만,

나오코의 치켜뜬 눈은 겐토를 바라보지 않았다.


언제나 맘에 들지 않는 이츠키는

독한 술을 들고 또다시 나타났다.

나오코는 마나츠가 하즈키의 팔을

비벼 대는 순간이 끝나길 바랐다.

나오코는 하즈키가 질겅거린 담배를 만지작거렸다.

축축했지만, 미끈거렸고,

훅 파인 이 자국이 귀여워 보인다.

구겨진 담배를 만진 손을 코 등에 살짝 스치면

특유의 하즈키의 입속 나무 향이 나오코를 자극한다.



출처 영화 나라타주


마나츠와 하즈키는 서로 눈을 떼지 않고

테이블에 팔꿈치를 대고 왼쪽 오른쪽으로

천천히 음악에 맞춰 움직였다.

그들은 현재 부부는 아니지만,

누가 봐도 오래된 연인이나,

오래된 부부 그쯤으로 보였다.

그들 사이를 절대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없다.

고맙게도 그들을 나란하게 만들었던 음악은

아주 짧게 지나갔다.

나오코는 뭔가 결심한 것처럼,

더 이상 빛나지 않는 갈색 눈을 보고 나지막이 말한다.


“하즈키.”


음악은 다시 되돌았고 소리는 더욱 커졌다.

대답 없는 그에게 조금 더 힘을 주어 말했다.


“하즈키.”


하즈키는 그때도 나오코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알아챈 마나츠가 대신

하즈키의 손등을 두드리며 나오코를 가리켰다.

하즈키의 눈이 마나츠의 손을 타고 나오코를 바라본다.

술에 취해, 마나츠에 취해 하즈키의 눈은

죽은 시퍼런 달이 되었다.

나오코의 코끝이 바늘에 찔린 듯이 시큰거렸다.


“난 그만 일어나.”


“응, 그래.”


하즈키는 이츠키와 얘기를 나누고 있는 겐토를 불렀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겐토의 뒤통수에 눈이 달렸는지,

하즈키가 부르기도 전에 고개가 먼저 돌아갔다.


“나오코 좀, 배웅하고 와.”


“하즈키, 나는 됐어.”


“시간이 너무 늦었어.”


“하즈키, 나는…”


겐토가 나오코의 말을 또 가로챘다.


“같이 가.”


겐토는 아주 빠른 속도로 벌떡 일어나 겉옷을 걸쳤다.

나오코는 겐토를 노려보며 낡은 미닫이문을 꽝,

소리가 나도록 밀어 제치고 달렸다.

이츠키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암, 그래야지, 그래야 부서지지.”


겐토가 갑자기 하즈키의 뒤통수를 갈겼다.


“이 자식, 그만 좀 해 진짜 화났잖아.”


“얼른 따라가기나 해, 혼자 보낼 거야?”


“미친놈, 다들 기다리지 말아, 나 간다!”




겐토는 눈치를 살피며 천천히 걸음을 걷다가

밖으로 걸음을 내딛는 순간

최고의 속도를 내며 미친 듯 달렸다.

멀리서도 나오코의 뒷모습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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