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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의 외출

14. 양화

by 금봉 Mar 24. 2025



양화(洋靴)          



코하네의 방 한쪽 귀퉁이 벽에는

낯선 문장을 조합하여

길게 배열해 놓은 것이 걸려 있다.

간혹, 어디선가 찾은 단어를
가위로 오려 붙인 것들도 있고,

오직 만들어 놓은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배열이다.


마네키 네코의 흔들리는 손에는

한글로 [안녕하세요]  적힌

종이를 붙여 놓았고,

벽의 모서리 끝은 붉은 글씨의

[정신대] 란 글씨를 적어 놓다가,

지운 흔적이 보인다.

흑백의 종이로 된 조각들은

알 수 없는 여자들의 모습,

일본 군인이 총을 들이대고 있는 모습,

마른 몸의 여자들이 웅크리고 있는 모습,

오랫동안 아주 자세히 봐야

알 수 있을 정도에

그들의 몸처럼 찢긴 조각들이다.


출처, 귀향


집게 모양의 핀으로

조심스레 묶어 놓았지만,

구겨진 조각들은

불지도 않은 바람에 조금씩 날리고,

구부러진 모양새다.

마치 그들이 그들을 총으로 권력으로

썩은 방망이로 짓이겨 진 것처럼.


코하네는 가끔 정신이 뒤집히는

후미코에게 이끌려

좁은 방 안에 웅크린 채 갇혀 있어야만 했다.

츠키노가 살아 있을 땐

코하네의 손을 잡아 구제될 수 있었지만,

츠키노의 빈자리는

후미코의 고통 속 기억을 고스란히

딸에게 전해 주는 꼴이 되고 말았다.


후미코는 코하네를 빼앗길 수 없다며

뜨거운 여름날에도

이불로 코하네를 꽁꽁 두르고 싸매고,

허공에 대고 보이지 않는 괴물들의 손에서

그녀를 지키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코하네는

힘에 눌려 호흡이 자유롭지가 못했다.

그 기억은 오랫동안

코하네의 수면 속 호흡을 힘들게 만들었다.

이불 속에 갇힌 코하네는

기어코 숨이 목까지 차올라,

눈알이 시뻘겋게 튀어나올 지경에 이르렀다.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지만,

몸의 온도는 서늘하기만 했다.

돌돌 말린 이불에는

이름 모를 그녀들의 핏자국이 말라,

찌든 내가 진동했다.

그것은 모질게도

열린 콧구멍 틈으로 비집고 들어오더니,

결국에 온갖 색색의 벌레들로 변해

몸의 구멍이란 구멍을 탐색하며

자리를 잡으러 들어온다.

수십 번의 노력으로

겨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엄마, 제발 꺼내 줘, 제발.”


어둠에서 막 나온 달이

가득 차오르고 있는 깊은 밤,

온갖 곤충들의 숨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고요하다.

몸의 온도는 점점 더 내려가는 중이다.


“으억, 으으억 엄마 제발.”     



새끼손가락이 움찔, 하더니

발가락도 움찔한다.

그제야 육신이 제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 자세로 누워 영원히 떠지지 않을 것 같던

붙은 눈이 서서히 열렸다.

천장이 낮게 눈에 들어온다.

길게 숨을 내뿜었지만,

숨마저 떨려 오들거렸다.

천천히 무릎을 꿇고

엎드려 베개에 입을 틀어막았다.

다행이다.

그것들은 과거 후미코의

머릿속 형상이었으니 말이다.


“으억, 으으으.”


코하네의 신음은 잦아들지 않았다.

숫자의 짝수를 불러와 세기 시작했다.

 

“2, 4, 6, 8, 10, 12….88.”


넋이 나간 채 몸을 일으켜

방 안을 서성거렸다.

수돗물을 벌컥거리고 마신 후에야,

얼굴에 선홍빛 평화가 찾아왔다.

흑백 사진 속,

후미코의 얼굴을 덥석 잡더니,

재빨리 거꾸로 뒤집어 놓으며 중얼거렸다.


“제발 이러는 거, 이제 정말 별로야.”


늘 그리워하던 후미코의 얼굴이지만,

가끔 찾아오는 후미코의 뒤집어진

정신의 꿈속 얼굴은 반갑지 않다.

긴 마라톤을 끝낸

사람의 얼굴을 하곤

시간을 몇 번이고 확인했다.


“다섯 시도 안 됐어, 후…”


코하네는 마네키 만한

크기의 조명 불을 켜고,

물을 끓였다.

다락방 특유의 반 틈 짜리

창문을 열어 가득한 달빛의 공기를 들이마신다.


“흠, 화아.”


만발한 꽃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새침 떨며 반복되는 또 하루의 달빛에

초록 잎들로 변하기 시작했다.

연둣빛 잎들과 강물은

달빛에 반사되어 연신 반짝거렸다.


물이 끓어오르기 시작하면

취하는 소리와 더굴더굴, 같은 소리를 낸다.

마치 곁에 누가 있는 것처럼

속삭이듯 더굴더굴 보글거린다.

오랫동안 턱을 괴고

반짝이는 강물을 바라보았다.

새벽잠 없는 아키라는

골무도 끼지 않은 채

멋없는 구두를 만들고 있을 게 뻔했다.

차를 조심스레 들고

아키라의 흔적을 찾지만 아키라가 없다.


“아직, 주무시나.”

     

구석진 쪽 문이 열린 틈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어 보았다.

그의 이부자리를 보았지만 역시 없었다.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고

형광등을 모조리 켰다.

아키라의 이불은

다다미 위에 각을 세우고,

개켜져 있었다.

벽에 붙은 옷 고리를 보았지만,

아키라가 늘 쓰던 모자와 지팡이가 사라졌다.


노아의 집으로 가 있는

유키코에게 이 시간에

전화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작업실 안쪽을 살폈다.

그가 늘 기대어 앉아 있던 의자에는

짙은 색의 신발과 종이가 놓여 있다.

누런 종이 위에는 아키라의 뭉툭한 손으로

꾹꾹, 힘을 주어 눌러쓴 글씨가 있었다.    

 

[코하네 보거라

 이걸 집어 든 것을 보니, 또 악몽을 꾼 게 맞을 게야]


 코하네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놀라지 말고 보거라

나는 지금, 후지산을 보며 가고 있을 게다

고향에 가 본지가 오래 됐어
계절이 바뀌면

집은 손볼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닐 것이야
내가 그곳을 간다고 했다면

네가 따라왔을 테지…
코하네, 당분간 이곳을

올 생각은 마

나중에 아주 나중에 오거라
나는, 잠시 이곳에 머물거다
나는 네가 혼자 사는 법을

익혔으면 하는 구나
할애비가 왜 이렇게 말하는 지,

잘 알게야

그리고, 그 신발은 꼭, 맞았으면 좋겠다
내가 마치 도둑고양이 같구나,

재미있지 않느냐? 허허


코하네, 이 세상을 살 수 있어서

살아가는 건 기적과도 같은 일이란다
그 기적은 네가 태어났을 때부터 시작됐지,

너는 기적과도 같았지
가끔, 안부 전할 것이야,

걱정 말거라
태어나 글을 이렇게 써 보는 건

처음이구나, 아주 피곤한 일이야]


코하네의 입에서 피식,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 다녀오마』  

   

가끔 코하네는 물었다.


“할아버지, 죽음은 두려운 거예요?”


“글쎄 죽은 그들에게

물어 볼 수는 없는 일이라.”


“할아버진 죽음이 두려워요?”


“두렵기는... 죽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거나
죽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볼 수 없는 게

그게 두려운 게지

아니 그렇더냐…”     


코하네는 편지를 내려놓고,

아키라의 빈 의자를 내려보았다.

아키라는 자신이 세상을 뜬 후에도

코하네와 딸 유키코가

감당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주고 싶었을 것이다.

코하네는 그 이유를 너무 잘 알고 있다.

아키라는 몸이 좋지 않아도

코하네 앞에서 티 내는 법이 없다.


안색이 좋지 않아

코하네의 얼굴에 걱정이 쓰여 있을 때면

오히려, 쓸데없는 짓을 한다며

호통을 치곤 했다.

요즘 들어 부쩍 쇠약해진 모습에

그나마 붙어 있던 살점들이

뼈마디에 아슬아슬하게

붙어 있음을 볼 때마다

코하네의 눈시울이 뜨거워지기 시작한다.

질색하는 아키라를 알고 있었기에,

괜찮아요? 라는 물음 한번

말해 보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평생 아키라를 괴롭혔던

당뇨의 질병도 늙음 앞에서는

그의 걸음처럼 느리게 와 줘도 될 법한데,

그것들은 모질게도

예의 없이 그렇지가 못했다.


병원 내원 날이 잦음을

알아채고 있었지만,

아키라에게 내색할 수가 없었다.

아키라는 그런 모습을

그들에게 보여주기 싫었을 뿐 아니라,

자신의 병을 좀 더 편하게

받아들이고 싶었을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키라가 챙겨간 짐이라곤,

모자와 지팡이뿐.

물론, 그곳을 떠날 때도

마찬가지 지팡이와 모자뿐,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었기에

그는 오고 가기만 하는 사람,

온기를 두고 다니는 사람이었다.


검정 구두가 반짝이며 촌스러움을 과시했다.

코하네의 코끝은 별에 쏘인 듯,

찡, 하는 느낌이 오래 갔다.

하얀 맨발을 구두 속에

밀어 넣어 보았다.

새 신이라고 느끼지 못할 만큼,

가죽의 느낌은 보드라웠다.

가죽이 부드러워지려면

아키라의 손길이 수백 번,

수만 번, 닿아야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거짓말처럼 보드라운 가죽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코하네 발을 온전히 감쌌다.

처음 닿는 차가움은 이내

아키라의 온기로 가득해진다.

구두를 신고 아키라의 전용

냉장고 문을 열었다.

코하네는 맥주 캔 하나를 집어 들더니,

키득거렸다.

아키라가 있었다면,

새벽부터 탐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출처, 리틀 포레스트


“꿀꺽, 꿀꺽 흣.”


코하네는 모든 문을 확인하고,

아키라의 말을 되새기며

하나의 빛도 허용하지 않고

커튼을 내렸다.

다시 잠에 들기란,

일어나지 않을 일이다.

구두를 신은 채 아키라의 의자에

기대어 흥얼거렸다.     

  




아키라는 지붕처럼 커다란 문을

한 번에 밀어제치니

비이이익, 하고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커다란 종이 울리는 소리 같다.

얼마 만의 방문인지

노인네의 심장이 벌떡거렸다.

발 하나를 안으로 들여놓자마자,

자신도 모르게 으억, 하는 소리로

감정을 드러냈다.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이다.


집 전체를 차지하는

짙고 단단했던 나무는

세월을 먹었다며

자신들의 성질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마치 아키라처럼.

낡을 대로 낡아 색은 바랬고,

나무의 결이 거칠어져

튕겨 나온 곳이 대부분이다.

언제부터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아키라의 손길이

끊이기 시작할 때부터일 것이다.



바싹 마른 대기 덕분에

딱딱거리는 소리를 주기적으로 들려주며

손을 갖다 대기만 해도 성질을 부린다.

마치 그의 이마에

튕겨 상처를 낼 것 같았다.


그 소리와 기괴함에

약간은 공포스러운 감정도 섞여 나와

맺히던 눈물은 뚝, 하고 끊겨

결국 흐르지는 못했다.

덧댄 나무를 치우기 시작한다.

이상하게 그것들은

예전처럼 무겁지가 않다.

텅 비어 있는 나무 속이라 생각하니

씁쓸한 위액이 목 위로

번져 올라오는 것 같다.


변하지 않은 이곳의 아침 햇살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젊음을 자랑할 때처럼

숨을 고르고 마루에 벌러덩 누워,

하늘을 바라보았다.

당연히 또렷하게 눈을 뜨고

볼 수는 없었지만, 아름다웠다.

사람이 살지 않아 기괴했던 곳에

햇살이 차오르니,

방 안에서 츠키노가 단장을 하고,

나와 인사 할 것 같다.

츠키노는 늙지 않았고

아키라의 모습은 푸석한

수염을 늘어뜨린 영감탱이다.


츠키노의 화단이 눈에 들어온다.

온갖 잡풀로 무성하기만 했다.

그 광경을 본 츠키노가

등 뒤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듯하다.


아키라는 마치 젊은 장정이 된 것처럼

벌떡 일어났다.

오랜만에 할 일이 많아질 것 같은

설렘에 노인의 쭈글쭈글한 등줄기가

오싹해질 정도로

기분 좋은 소름이 돋는다.

굉장한 아드레날린이

그를 흥분하게 만들었다.


강한 초여름 햇살이

아키라의 남지 않은 정수리 머리칼을

태우는 것 같아 수건으로 머리를 두른다.

얼마 남지 않은 머리칼이

걱정은 되었나 보다.

그의 정수리는 벌써

흥건하게 젖어 땀이 턱 밑까지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키라가 머물던 곳은

세 채의 연결된 집 중,

가장 작은 한 채로

그곳에서 하루의 반을 보냈다.

거의 모든 시간을 그들이 생활하는 곳에서

온갖 허드렛일을 해 왔다.


더욱 정확히 말하자면,

츠키노의 관한 일은 모두 그가 맡아서 했다.

물론 츠키노의 남편의 일도 그러했지만,

남편은 늘 밖으로 내 돌았고,

또 한 명의 부인을 둔 채,

집을 번갈아 다니며 생활했기 때문에

그 사람의 존재감은

늘 텅 빈 잔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뀐 세상에서도 아키라는

그 역할을 자처하고 늘 그들 곁에 있었다.

츠키노의 숨소리, 발소리, 웃음소리,

말소리만 들어도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아키라는 기가 막힌

손과 발이 되어 평생을 바쳤다.


코하네가 뒤뚱뒤뚱 걸음마를 배울 즘,

화단의 꽃을 꺾어

아키라에게 가져다주던 모습이 선했다.

그때 코하네를 바라보던

츠키노의 얼굴이 떠오른다.


아키라는 츠키노가 평생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을 처음 보았다.

그 기적과도 같은 찰나를 남기고 싶었지만,

이젠 머릿속에서도

희미한 안개처럼 번지고 있었다.


그들이 오고 가던

화단 옆의 길을 보니,

또다시 심장이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응접실 쇼지 (종이로 된 미닫이문) 를

밀어내면 가득해진

채광이 다다미를 비춰준다.

바람이 밀려 들어와

오래된 나무 냄새를 들어

다시 날아간다.

바다를 타고 온 바람은

비릿하지만 들어오기와 나가기를

반복하면서 내내 머금은 습기를

말려 주니 고마운 존재다.

응접실 구석을 차지한

츠키노와 후미코 부부 사진 앞에

향을 피워 놓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아키라는 허리를 굽히고

오랫동안 그렇게 엎드린 채 중얼거렸다.

눈가의 주름은 더 깊은 고랑을 만들어

내며 눈물이 고였다.

한 번 고인 눈물은

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그렇게 머물렀다.

뿌옇게 쌓인 먼지들 사이로

몇 개의 음이 찢어지는 소리를 내며

아키라는 화들짝, 한다.

먼지가 가득한 곳에서

소리가 나니 어안이 벙벙하다.


“짜르릉, 짜르릉, 짜르릉.”


아키라는 너무 놀라 항상 그래왔듯이,

반사적으로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뿌연 먼지가 눈물의 고랑에 내려앉았다.


“네, 여보세요.”


여전히 느린 그의 말투다.

이번엔 상대방이 머뭇거리는 모양새다.

전화 올 곳이라 곤,

그녀뿐이란 것을 이미 알고 있다.


“음, 코하네냐?”


화단 앞에 어린 코하네가

햇살을 쫓으며 뛰어다니는 것 같다.


“네, 할아버지 저예요.”


“이 전화가 되긴 되는 모양이구나 허허.”


아키라의 건강한 웃음소리를 들으니

걱정했던 긴장이 풀린다.


“잊지 않고 있었어요.”


“그렇구나.”


“괜찮으신 거죠?”


“그럼 그럼, 좋다 걱정 말 거라,

그사이 전화는… 녀석.”


코하네는 약을 꼬박꼬박

챙겨 드시라는 말이

목구멍에 가득했지만,

끝내 말하지 못했다.

머뭇거리는 모양을 봐서

아키라가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었다.


“약 챙겨 먹는 시간도 아깝구나, 허.”


“할아버지…”


“그만 좀 부르거라, 원.”


“네, 할아버지.”


“여기가 정리되면

하루 정도는 왔다 가도 된다.”


“네, 그럴게요.”


“그래 알았다,

끼니는 꼭 챙기고 다니거라.”


그녀는 보이지 않는

아키라의 얼굴에 대고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구두가 너무 예뻐요.”


“다행이구나.”


“감사해요, 할아버지.”


“그래 그래, 나는 이곳에 오니

잠이 참 달콤해, 아주 좋아 코하네.”


“할아버지.”     


“이제 그만 끊자,

전화기가 이렇게 무거워서야 원.”


코하네의 숨소리가 지지직, 하며

무겁게 들려왔다.


“건강 챙기세요.”


“먼저 끊으마.”


아키라는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끊어진 전화기를 한참 바라보았다.

살포시 내려놓은 전화기에서

차마 날리지 못한 먼지가

빛에 비춰 모기처럼 사방을 날아다닌다.


출처, 동경가족



“쿨룩, 쿨룩, 녀석하고는 쿨럭.”


며칠 동안 집을 손보는 일은 계속되었다.

아키라에게 시계가 따로 필요 없다.

해가 뜰 때 시작한 일은,

해가 지기 전에 늘 마무리가 되었다.

넓게 자리한 공간에 모인

세 채나 되는 집은

어느새 여러 사람의 온기가 있는 것처럼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누렇게 될 때까지 방치되어 있던

다다미를 닦아 마당에 넓게 펼쳐 말렸다.

새까맣게 변한 걸레는

아무리 빨아도 제 색깔로 돌아가기엔

버거워 보인다.

화단 가장자리에 떡, 하고 버티고 있는

벚나무가 파릇파릇한 잎으로

살랑 춤추며 그를 위로했다.


츠키노가 가장 아낀 벚나무는

다행히 아직도 제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몇 년 만에 활짝 열어 놓은 대문으로

지나가던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

아키라에게 먼저 다가가 인사를 나누었다.

온갖 소문으로 무성했던 곳이었기 때문인지,

사람들의 궁금증은 날이 갈수록 더했다.

아키라는 그들을 놀려 줄 작정이라도 한 사람처럼,

사람들의 궁금증을 해소해 주기는커녕,

더욱 호기심을 유발하는 대답을 늘어놓곤 했다.


마치 소문 때문에 힘들었던

그들을 대변해 주는 양,

있는 대로 심술을 늘어놓았다.

해가 지면 늘어지게 술을 마시며,

보이지 않는 츠키노와,

또 후미코와, 대화를 나누며

중얼거리다 잠이 들었다.

그곳은 그로 인해 온기가 가득했고,

밥 짓는 냄새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아키라의 작은 구둣방에서

들려오는 재봉틀 밟는 소리가 정겹다.

몇 안 되는 구두 창은

진한 고무 냄새와 가죽 냄새를 뿜는다.

한 달에 한 번 손님이 올까 한 구둣방이지만,

쓸쓸한 향기는 없다.

코하네는 사방 벽마다

작은 인형에게나 맞을 듯한

크기의 옷들을 만들어 걸어 두었다.

섬세하지 못한 바느질이지만,

후미코가 아끼던 옷과

거의 흡사한 모양임이 틀림없다.

아무리 두들겨 빨아 보아도

찌든 때가 벗기지 않던 옷이었다.

그런 옷을 후미코가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모습을

그땐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옷은 한국에서 입고 온

마지막 남은 한복이었다고 했다.

그 구깃거리는 형태는

아무리 다림질해도 숨겨지지 않는

고생이란 단어가 튀어나오기도 했다.

틈날 때마다 만들어 놓은 옷들이

이제는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의 개수를 차지한다.


출처, 귀향


강둑의 바람에

옷고름이 하늘거리며 수줍은 인사를 했다.

어린 후미코는 양쪽 볼을 붉게 물들이고

얼룩진 옷의 치맛자락을 잡고

하염없이 웃고 있었다.


아스팔트가 달궈 지기 시작한

계절의 공기가 벌써 뜨거움을 가득 품고

구둣방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뜨거운 바람을 밖으로 돌려보낼 작정으로

문고리를 고정하고 바람을 기다렸다.


습기가 가득한 바람은

기어코 코하네의 옆 머리를 조금씩 적시고 있다.

엉성한 바느질이 돋보이는

손수건으로 짧은 머리카락을

질끈 묶어 보았다.

손수건의 크기는

워낙 작은코하네의 얼굴을

집어삼킬 것처럼 보였다.

벌써 두 시간이 훌쩍 넘은 시간 동안,

마호는 코하네에게

끈질긴 주문을 걸고 있었다.

옷고름의 바느질을 마무리할

섬세한 동작을 남겨 두고 있었다.

아주 천천히 재봉틀을 밟고

손가락을 조금씩 움직였다.

워낙 작은 모양의 옷고름이라,

아무리 능력을 갖춘 사람이라 해도

빠른 동작은 가능할 수 없을 것이다.

갑자기 일어나 밖을 나가는 마호의

덜컥, 하는 소리에 그만,

바느질이 엇나갔다.


“앗, 이런.”


입을 삐죽거리며 나간 마호가

두 손에 아이스크림을 들고 자랑하듯,

코하네에게 뽐내고 있었다.

코하네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재봉틀 의자에서 벗어난다.

밝게 웃는 코하네의 눈가에

질끈 묶은 손수건의 매듭이 흘러내렸다.


“자, 바닐라지?”


코하네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밀자,

마호는 바날라 아이스크림을 주는 척, 하다

이내 뒷걸음질 치며 웃었다.


“안 되지, 안돼 대답하라고, 어때?”


“아, 마호.”


“그곳은 정말 네가 일하기 딱, 인 것 같아
자 그럼, 이렇게 하자

우선 나와 함께 가보는 거야, 어때?  

그리고 결정은 네가 해

난 절대 강요하지 않아.”


코하네는 눈을 흘기더니,

머리에 감은 손수건을 달랑거리며

못 이긴 척,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호는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그녀 얼굴에 갖다 대며

한 번 더 고개를 끄덕이라고 강요한다.

뜨거운 바람의 계절은

역시 아이스크림의 유혹을

떨쳐 내기가 힘들다.

마호가 소리친다.


“아주 좋았어.”


마호는 장난기를 멈추지 않고

아주 천천히 아이스크림 포장지를 벗겨 냈다.

당연히 뜨거운 바람으로 인해

홀쭉하게 끝이 말아 올라갔던 모양의

아이스크림은

뭉툭한 모양으로 조금씩 흐르고 있다.




“자!”


코하네는 재봉틀 선반 위에 다리를 얹고

기대어 달콤함을 만끽했다.

마호도 따라 아키라의 테이블 위에

다리를 얹고 그녀를 바라보고 웃었다.


코하네의 헐렁한 흰 티셔츠가

바람에 날려 깡마른 몸을 드러내니

마호의 표정은 측은하다.

웃음인지 슬픔인지 모를

코하네의 가느다란 눈은

가끔, 시선을 독점하게 만들어

그를 당황스럽게 했다.


누구든지, 코하네의 그런 눈을 보며

지금 코하네의 감정이 어떤 것인지

알아내고 싶어 안달이 날 것이다.

코하네는 마호가 뚫어져라 바라보는 모습을

인식하지 못하다 이내 들키고 만다.


“마호, 왜?”


코하네의 눈은 분명히 웃었고,

볼은 붉어져 마네키 네코가 되었다.


“엇, 아니 아니야 하하.”


“뭐야?”


코하네는 실수로 붙어 버린 옷고름을 들고

거울 앞에 서서 완성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며 연신 비춰 보고 있었다.

마호가 말했다.


“자주 보았지만 볼수록 낯설어.”


“그래?”


“요즘 유행하는 기모노야?”   

  

마호의 질문에 코하네의 얼굴이

경직됨을 읽었다.


“마호, 말도 안 돼

이건 기모노가 아니라고 몇 번 말해.”


마호는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기모노? 이건 비교가 되지 않아.”


코하네는 말끝을 흐리며 말했다.

코하네를 가까이할수록,

비밀은 점점 더 많아졌다.

알고 싶은 충동은 늘 있었다.

하지만 코하네의 얼굴은 부정적인 것과,

긍정적인 것 모두

동시에 갖고 있는 사람이다.

그 이상의 질문은 코하네를 위해

아껴 두었던 게 여러 해가 지났다.

코하네는 마치,

비밀이 지켜져야만 살 수 있는

그런 사람 같았다.

알아낸다면 아마도 그녀는 사라지고 말 것이다.


보이지 않는 자물쇠는 여전히

코하네의 발목을 옥죄고 있었고,

마호는 코하네를 살게 하는 사람 중

한 사람이 분명하다.

처음 코하네가 이곳에 왔을 때,

처음 본 이웃이 마호였다.

아키라의 집이 강을 바라보는 방향이라면,

마호의 집은 다리를 건너,

아키라의 집을 바라보는 방향이었다.


매일 아침 맞은 편으로 보이는 사람이

마호란 것을 알게 된 것도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다.

마호의 어머니는 생선을 절여 파는 일을 했고,

가끔 신선한 달걀도 팔았다.


매일 이른 아침부터,

생선 가게 문을 여는 일은 마호의 일이다.

아키라는 늘 그곳의 절인 고등어와

달걀을 고집하곤 했다.

꼭, 그것들을 자기의 눈으로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지만,

어느 때부터 코하네는

아키라 대신 절인 고등어와

달걀 심부름을 시작하기 시작했다.

처음 심부름할 때,

이른 아침부터 바삐 움직였던 그가

마호란 것을 알았다.


코하네는 밖을 나올 때마다

멀리서도 마호와 눈이 마주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호도 역시 알고 있었을 것이라 확신했다.

마호는 코하네가 처음 심부름을 온 날, 을

선명하게 기억했다.

코하네는 흰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자기 발보다 더 큰 나막신을 질질 끌고 왔었다.


출처, 좋아해


“저기, 안녕하세요!”


마호는 넋을 놓고 코하네를 바라보기만 할 뿐,

들고 있던 물건을 잡고 멈춰 서 있었다.


“저기요, 절인 고등어가 필요해요.”


그때, 마호의 어머니가

구석진 쪽 문에서 나와

빠르게 고등어를 골라 담았다.


“어서 와요, 할아버지께서 보냈구나?”    

 

“네, 안녕하세요.”


아주머니는 고등어를 뒤적이며

제일 커다란 것을 잡더니,

종이에 둘둘 말았다.


“자, 여기 달걀은?”


“그건, 괜찮아요.”


“아이구, 손녀가 참, 귀엽기도 하지.”


코하네는 허리를 굽혀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고맙습니다.”


“나도 고마워요,

아차 혹시 달걀이 필요하면 전화해요,

가져다줄 테니.”


“네, 고맙습니다.”


코하네는 거스름돈을 주머니에 넣으며

동전 소리를 내며 걸어갔다.

나막신이 어찌나 커다랬는지,

끌고 가는 품을 보고 그제야,

마호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시간이 흐른 뒤 마호는 아키라가 자주 깜박하고

달걀, 또는 고등어를 잊고

두 걸음 한 일이 종종 있었다고 했다.

눈치를 채고 있던 마호의 어머니는

아키라에게 어떤 눈치도 주지 않고,

자연스럽게 그것을 가져다 주거나,

자신이 깜빡했다는 투의 말로 얼버무렸다.


마호를 처음 본 날도 어김없이

아키라는 달걀을 깜박하고

코하네에게 말하지 않았다.

단, 한 번도 달걀을 들고

아키라의 구둣방에 배달하지 않던 마호가,

그날은 무슨 일인지,

달걀을 들고 손수 아키라의 가게에 발을 디뎠다.

처음 보았을 때와 달리,

마호의 입이 쉬질 않는다.


“저기, 이거 달걀.”


코하네는 역시 나막신을

질질 끌고 나와 달걀을 받았다.


“고맙습니다.”


“이것, 달걀 하나 더 챙겨 왔어.”


코하네의 눈이 동그래져서

말이 짧은 길쭉한 마호의 얼굴을 올려 보았다.



“으응?”


“자, 받아.”

     

“아무튼, 고맙습니다.”


마호가 귀밑 턱 부분을 긁어 댔다.

아무래도 멋쩍은 모양이다.


“반가워 저기 난 마호.”


코하네는 약간의 낯섦으로

쭈뼛거리지만 싫지는 않은 모양이다.


“난, 코하네.”


새하얀 달걀은

코하네의 맑은 얼굴과도 같다.

마호는 그런 코하네의 모습이

언제부터 출현했는지

모두 꿰고 있었다.

매일 늑장을 부리던 마호는

반사적으로 이른 아침이 오길 기다렸다.

가게 정리를 마친 후,

의자에 앉아 강 너머를 바라본다.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코하네의 창문이 열리는

순간을 기다렸다.

넉살 좋은 마호가 손을 흔들고 있다.


자연스럽게 입가에 웃음이 배시시,

튀어나오는 순간이다.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마호가 가져다준,

달걀값을 치르지 않고 먹을 수 있었다.

눈치 빠른 아주머니가 당연히 모를 리 없었고,

마음이 착한 아주머니는

끝까지 그 달걀을 모른 척했다.


코하네는 가끔,

생선 가게에 들러 아주머니의 말동무를

해 주거나, 대신 생선을 팔아주거나, 로

고마움을 대신했다.

아주머니에게서 풍기는

고등어의 비린 냄새는

코하네에게 가족과 같은 존재다.

마호를 늦은 나이에 낳았다는

아주머니의 머리칼이

점점 하얗게 변해가는 요즘,

가게 문을 일찍 닫거나,

열지 못하는 날이 많아졌다.

하지만, 그 자리에 생선 가게가

버텨 준다는 것만으로

코하네는 큰 위로를 받았다.


바람이 거세지고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갑자기 자리를 차지한

잔뜩 웅크린 구름으로 가득했다.

거센 바람에 고정되어 있던 문이

꽝, 하는 소리와 함께 세차게 닫힌다.

그 모습이 미리 눈에 들왔음에도

코하네의 어깨는 놀라

위로 올라갔다 내려왔다.

거친 소리는 노아에 의해 다시

부드럽게 고정된다.

노아는 이상하게도

발걸음 소리마저

부드러운 소리를 냈다.

유키코가 마호를 보며

반가움을 놀림으로 위장한다.


“아키라가 없으니,

마호의 엉덩이가 여기 붙어 버렸군, 그래?”


마호가 얼굴을 붉히며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오셨어요?”


가볍게 손짓하는 유키코에게

코하네가 달려가 안겼다.

유키코가 좋음을

귀찮다는 표현으로 바꿔 말한다.


“어쿠, 놀래라.”


쌀쌀맞은 듯, 하거나

가시 있는 말을 뿜어 내는 유키코지만,

속마음은 보드라운 노아의 목소리와

닮아 있다는 것을 코하네는 잘 알고 있다.

코하네는 반색하는

유키코의 얼굴을 보고

팔을 늘어져라 잡고 놔주질 않았다.


“오셨어요? 노아.”


금빛 머리칼이 바람에 날리며

노아가 미소 짓는다.

구둣방은 어디에도 노아에게

맞는 의자가 없다.

긴 다리가 고무처럼 늘어져서

감길 수만 있다면, 이라는 상상을 한다.


오늘도 역시 노아의 다리는

불편함을 무릎 쓰고

작은 의자에 웅크리고 앉았다.

노아는 유키코가 우려낸, 차를

굉장히 좋아한다.

아니 사랑한다.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맛이라고 했다.

똑같은 찻잎을 넣어,

뜨거운 물에 몇 번 걸러내어 따라 봤지만,

역시 코하네가 한 맛과는 천지 차이라 말했다.

코하네는 사랑은 차의 맛까지도

변화시킨다고 믿었고

그 힘은 우주보다 강하다, 라 믿었다.

코하네는 그때부터

그 둘이 하는 사랑에 관해서

동경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유키코는 차를 담아낼 땐,

말하지 말아야 한다고 한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이지만

덕분에 차를 따라내는

맛있는 소리가 귀를 간질인다.


“조르르 조르륵.”


유키코가 친절하게 말했다.


“노아, 마셔요.”


코하네의 귀가 쫑긋하다.

매번 노아를 마주할 때마다

그의 이름을 궁금해한 적이 없었다.

그의 이름은 진짜 예수일 거라,

당연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노아?”


예수 같은 노아가 코하네를 보며

낮은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네에, 코하네.”


“아, 이름이었군요.”


유키코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이름을 부르기로 했어.”     


“왜요?”


코하네는 왜, 라는 말을 하고도

말이 안 되는 말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큭, 왜, 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는데.”


마호도 뒤떨어지지 않게 예수, 라는

이름에 호응을 보였다.


“노오…아.”


노아는 그저 껄걸거렸고,

차를 흐읍, 하아, 하고

마시는 소리만 낼 뿐이다.

유키코가 가져온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차 마시고 있어요,

코하네? 나 좀 도와줘.”


유키코가 자기 방으로

가방을 들고 갔다.

짐을 챙기러 온 게 분명 하다.


“짐이라곤, 이것뿐이네.”


유키코는 지난겨울 입었던

낡은 코트를 보며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유키코, 지금처럼, 가끔 올 거잖아요?”


“음, 물론이지

그저 이것들은 챙겨가고 싶어,

이곳에 두면 안 될 것 같아.”


유키코는 아마도,

짐승과 함께 지냈던 물건들을

모조리 정리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코하네는 더 이상 질문하지 않고,

알아서 물건들을 가방에 넣었다.

끔찍했던 그날,

끌고 왔던 구두도

고스란히 유키코의 방에 있었다.

구두를 들어 꼬질꼬질한 겨울 코트로

닦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새 구두처럼 윤기가 나더니,

몰라볼 정도로 아키라의 실력이 그대로 드러났다.


“우와, 유키코 새 신발이 됐어요.”


“으응, 아주 잠깐 신었던 거니까.”


“이것, 예수, 아니 아니, 노아한테 맞을까요?”


코하네는 유키코가

하고 싶어 했던 말을 거들어 주었다.


“워낙, 큰 신발이니까 혹시 모르지?”


“흠, 꼭 맞았으면 좋겠어 흣,

진짜 신발 주인이 나타난 거지.”     


유키코는 다시 구두의

앞 코부터 닦기 시작하며 말했다.


“코하네.”


“으응?”


“노아는 나와 결혼하고 싶어 해.”


“너무 좋은 일이에요, 유키는요?”


“물론.”


질문 같지 않은 질문에

애써 대답하는 말투다.


“아마, 멀지 않은 날에

노아를 따라 미국으로 가야 할 거야.”


코하네의 표정을 보니

이번엔 정말 놀란 기색이었다.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얘기였고,

노아와 유키코는

늘 이곳에 머문다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다.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

코하네의 입술은 앙,

다문 채 머뭇거렸다.


“물론, 노아는 내게 그런 말은

아직, 하지 않았어
내가 아는 척을 하지 않는 이상,

그는 내게 그 말은 하지 않을 거야
내가 원하는 곳에 머물고 싶어 할 사람이니까,
그는 나를 위해서라면

자신을 내놓고도 남을 사람이잖아 ?
하지만 나 때문에 그를 이곳에 붙잡아 두는 건,

옳은 일은 아닌 것 같아.”


코하네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깊은 생각에 빠졌다.

유키코가 덧붙였다.


“결혼은 그런 거니까.”


“유키코, 이곳에서

다 같이 살면 안 되는 거예요?”


유키코가 코하네의 정수리를 쓰다듬었다.


“노아의 가족들이

노아를 많이 보고 싶어 할 거야

물론, 나도 그래, 그리고…

노아에게 그런 희생을 하게 하고 싶지 않아.”


“그렇네, 다 같은 마음,

할아버지도 서운하고… 저도.”


“아직 결정을 내린 건 아니야,

아직은 말이야.”     


코하네는 다행이다, 란 생각과

어쩌지, 라는 생각이 들쑥날쑥하더니,

함께 한숨을 혹, 하고 밖으로 뱉었다.


“하아, 만약 유키코가 가면,

너무 보고 싶을 거예요, 아키라도 나도.”


유키코가 코하네에게 손을 내밀어 끌어당겼다.


“이리 와, 코하네.”


코하네는 오랫동안

유키코의 품에 안겨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생각해 볼 거야 알았지?”


“으응.”


코하네의 머릿속엔 그날,

피폐해진 유키코의 얼굴이 떠올랐다.

만약, 유키코가 구둣방과

모든 이들이 이유가 되어

노아를 혼자 미국으로 떠나보낸다면

그녀의 예수는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유키코는

사랑을 떠나보낸 사람이 된다.

죽음의 두려움에 관한

아키라의 말이 떠올랐다.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없는 것이

가장 두려운 게지.”


예수 노아를 보낸 유키코의 얼굴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린다.

일어나면 안 되는 일이 일어난다는 건,

무서운 일이다.

분명 전보다 더 피폐해지고 말 것이다.

코하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비범한 표정을 지으며 누가 들을까,

유키코에게 속삭였다.


“유키코, 노아를 따라 가요,

할아버지 곁에 내가 있잖아요?
할아버지가 그랬던 거처럼,

이젠 내가 해요.”


유키코가 작은 눈에 힘을 주더니

있는 힘껏 크기를 늘려 볼 생각이었다.


“코하네… 이런 너를 내가 미워했다니…”


“진심이에요, 할아버지가 유키코를

많이 그리워하긴 하겠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없는 것만큼,

두려운 일은 없는 법이니까
그건 죽음 보다 더 두려운 거니까.”


“뭐라고?”


유키코가 하하, 거리며 웃었다.


“코하네, 꼭 기억할 게, 고마워.”     


마호가 금빛 머리칼과

정적을 깨지 못한 게 어색했는지,

유키코의 방 안을 어슬렁거렸다.

코하네가 마호에게 눈을 흘기며 키득거린다.


“도와줄 건 없나 해서.”


마호는 쑥, 내밀었던 고개를

다시 집어넣는다.

유키코가 빠르게 노아에게 달려가

구두를 신어 보라며 졸라 댔다.

노아의 눈은 구두를 제대로 훑어보기는커녕

대충 훑기만 할 뿐,

유키코에게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거짓말처럼, 구두가

노아에게 딱, 들어맞는다.

노아는 기다란 몸통을 쭉,

일으키더니 왔다 갔다를 하며

뽐내는 동안에도 섬세하게

유키코의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아키라는 마치, 이런 일이

다가올 것이라 미리 알았던 거처럼,

그 구두를 만든 것 같다.

그 구두가 만들어진 이유는

정말이지 노아였던 게 확실해 보였다.

아키라가 이 모습을 보고 있었다면,

허허거리며 몰래 웃었을 것이다.


“저 녀석 말이야,

머리 색이 맘에 들지 않아.”라고.


그들을 배웅하는 동안

석양도 함께 그들을 따라나선다.

그 모습이 점이 될 때까지

유키코와 노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호 또한 유리를 사이에 두고

그들을 배웅 중인 코하네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큼,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코하네는 마호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도

인식하지 못할 만큼

유키코와 노아의 모습에 넋이 나가 있었다.

정말이지 그렇게 행복한 표정을 짓는 모습은

드문 일이다.

묶기엔 조금 짧은 머리칼을 하곤,

코하네의 머리 통보다

훨씬 큰 손수건을 동여맨 모습이

우스꽝스럽기도 했지만,

마호에겐 그 모습이 유난히 더 귀해 보였다.

꽤 오랫동안 그 길에 박혀

움직이지 않던 코하네가

유리문을 통해 왜곡되어 보인

마호의 얼굴을 보더니, 미소 짓는다.

그 모습이 너무도 귀해

마호의 온몸에 찌릿한 통증이 밀려왔다.

마호는 거짓말처럼

온몸에 가시가 박힌 것처럼 아팠다.


“마호.”


“으응.”


마호의 표정이 굉장히 당황스럽거나,

고통스러워 보였다.


“왜 그래?”     


“응? 뭐…”


마호의 뭐, 라는 말은

나는 괜찮다, 는 뜻이다.


“아주머니가 기다리시겠다,

오늘도 혼자 저녁을 드시게 하지 마.”


“흠, 후.”


“얼른, 가 봐.”


“갈이 가.”


“할 일이 있어.”


코하네에게 방금 또 하나의 비밀이 생겼다.


“응, 그래?”


비밀을 캐내고 싶은 마음은

코하네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다.

그 마음은 계속 쌓이고 쌓여

큰 산이 될 게 뻔했다.

아니 이미 높은 산이 된 것 같다.

코하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가보라는 손짓을 한다.


“알았어, 간다 문단속 잘해.”


“응.”


길고 긴 석양도 사라진 지 오래다.

마호가 나서자마자

커튼을 내리고

모든 문을 잠그기 시작했다.

아키라의 냉장고 안에

다행히 아직도 머물러 있는 맥주를 꺼내 들었다.


맥주는 서운함이 남아 있는

저녁에 최고의 만찬이다.

성급하게 꿀꺽거리기 시작했다.

그 맛은 달콤하고, 쌉쌀했다.

완성된 저고리를 만지작거렸다.

제일 처음 만들었던 것만큼

의미가 있는 옷이다.

사람이 입을 만한 크기로 만든 것이지만,

코하네의 체구보다 더 작은 사람에게나

맞을 법하다.


탁자의 미끄러운 모서리를 타고

저고리가 바닥에 떨어졌다.

널브러져 있는 저고리 안쪽에는

또다시 낯선 글씨체가

선명하게 코하네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영 선(후미코 한국 이름)”


코하네의 목덜미에

미지근한 땀이 조르륵, 흘러내렸다.

후미코는 후미코라는 자기 이름을

누가 지어 주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할머니 츠키노가 후미코를

영선이라고 부를 때면

이름을 더럽히고 싶지 않다고,

자신은 후미코라며,

화를 내곤 며칠 내내 말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 이후로 후미코는 이영선, 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적이 없다.

이 사실 또한 후미코가 죽고 난 후,

신페이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다.

출처, 리틀 포레스트


선명한 분홍빛을 띠고 있는 저고리를 보니,

잊고 있었던 후미코의 이야기들이

기억에서 별빛처럼 쏟아져 내린다.


“이 영 선, 삶이 고통이었던 나의 엄마…

지금은 편한가요?”


생선 가게 문이 그대로 열려 있었다.

문을 닫을 시간이 훨씬 넘었는데도

라디오 또한 그대로 켜져 있는 상태였고,

어머니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마호가 말했다.


“어디 계세요?”


정적만 흐를 뿐이다.

이층 계단으로 발을 옮기고 방 안을 뒤졌다.


“어머니.”


이불도 펴지 않고 쭈그린 채

잠 들어 있는 모습이다.

놀란 마음에 쿵쾅거리며

발소리를 낸 것이 미안해 죽을 지경이다.

그녀는 요즘 들어 쉽게 피곤하거나,

어디서나 쪽잠에 빠지기 일쑤다.

그 어떤 소리도 용납할 수 없다는 듯이

조용히 이불을 덮으며

주름이 진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쿵쿵거리는 소리에도

눈을 뜨지 않던 그녀가

마호의 손길에 눈을 뜨더니 놀라지도 않는다.


“응, 왔니?”


“일어나지 말고 주무세요,

뒷정리는 제가 해요.”


“으으, 음 그래 줄래? 고맙구나.”


어머니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쌔근거리는 소리를 내고 금세 잠이 들었다.

그녀의 부쩍 피곤한 모습을 보니

관심이 오직 코하네에게만 쏠려 있던

자신이 민망하기 짝이 없다.

개수대에 아침을 끝내고 난 후,

식기가 그대로 쌓여 있었다.

젊은 시절 어머니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마호는 그런 모습을 꽤 많이 봐 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적응하기가 어렵다.

마치 어머니의 세월이

점점 많은 숫자로 늘어나

흔적을 남기는 것 같아 씁쓸했다.

그나마 그녀가 끼니를 챙긴 흔적이 있어

다행이라며 씁쓸한 미소를 지어본다.


6월의 밤은 아직 바람이 차다.

겨드랑이의 끈적임이

고맙게도 어느새 사라졌다.

따뜻한 날씨 덕에

생선들도 축 늘어져 있었다.

절인 생선이지만,

덥기 시작할 땐

저장에 좀 더 신경을 써야 할 터다.

빠르게 냉동고로 생선을 옮겨 담았다.


마지막으로 어머니가 늘, 앉아 있는

나무 의자를 안으로 들여놓고 마무리한다.

강 건너 코하네의 다락방에는

아직 불이 채 켜지지 않았다.

일 층에서 희미하게 불빛이

새어 나오는 것을 보니,

아직 그곳에 머물며

비밀스러운 일을 치르고 있을 것이다.

미치도록 궁금했고 미치도록 알고 싶었다.

어머니가 삶아 놓은 달걀을

소금에 찍어 입 안에 밀어 넣었다.

목이 메지만 코하네의 비밀을

참아 내는 것처럼 물 한 모금 넘기지 않았다.

오 분 정도의 시간이 넘어서야

입안의 것들이 뻑뻑함을 이겨냈다.


“후, 아.”


달걀은 언제나 맛있게 먹다

끝을 낼 즈음엔 비린 냄새에

다시 먹고 싶은 욕구가

사라져 버리는 음식이다.

끝내 참지 못하고 맥주를 들이켰다.

달이 비추는 코하네의 다락방엔

등이 필요 없는 모양이었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끝내 코하네는 등을 밝히지 않았다.


보송한 겨드랑이 덕에

스르르 눈이 감긴다.

코하네의 커다란 손수건이

작은 눈동자를 자꾸만 보지 못하게 가리고 있다.

손을 뻗어 보려 하지만

코하네는 암흑 속 깊은 곳으로 사라져 버렸다.     


 




아키라     



신칸센을 이용하는 비용은

코하네의 일주일 치 생활비보다

더 무섭게 들어간다.

쉽게 쓰이지 않던 지폐로

교환한 종이 조각을

그 어떤 것보다 더 귀하게 접어

가방 속 깊은 곳에 찔러 넣었다.

반대편 자리에 앉은

심술 궂어 보이는 중년의 여자가

입술을 쑥, 내밀고 있다.

티켓을 손에 쥐고 혼자 중얼거리는 걸로 보아

아마도 그녀 또한 값을 아까워하는 것이 분명했다.


중년의 여자 입에서 나오는 한숨은

코하네를 계속 신경 쓰이게 했다.

보지 않으려 애를 썼지만,

눈이 계속 마주쳤고,

다시 한번 코하네의 시선을 느끼곤

중년의 여자가 티켓을 올려 보인다.

중년의 여자는 보란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코하네는 중년의 여자를 보고

미소를 전한다.

코하네도 가방 안을 훑더니

귀한 종이 조각의 내용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출발한 지 몇 분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

열차는 있는 힘을 다해서 속도를 냈다.

얼마나 빠른 속도였는지,

내리는 비까지 헐떡이게 만드는 것 같았다.

뭐가 그리도 급한지

창문에 부딪자마자 마치 혼자임이

맘이 들지 않은 듯,

서로 흐드러지며 엉켰다.


그렇게 하나의 큰 방울이 되어 툭, 하고

뵈지 않은 곳으로 떨어져 사라져 버렸다.


열차의 속도에 민감하게 반응한

코하네의 신경도 어느새 적응했는지,

심장 박동이 바닥으로

가라앉는 것처럼 느려졌다.

창문에 엉키는

빗방울의 엉킴도

지겹기 시작할 때쯤,

가방 속을 뒤적였다.

작은 반짇고리는 꼭,

그녀의 새끼손가락만 하다.

각진 순면의 손수건을 꺼내어

무릎에 살포시 얹히고,

바늘에 초록색 실을 꿰었다.

흔들거리는 기차 안에서

실 꿰기 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세 번의 시도 끝에

손수건에 초록색 실을 찔러 넣을 수 있었다.

미리 재봉틀을 사용해서

마무리할 생각이었으나,

아키라의 이름만은

자신이 직접 새기고 싶었다.


자로 잰 듯한 모양을 갖출 수는 없지만,

삐뚤어진 글씨가,

그래도 재미있어 보인다.

할아버지의 이름은

사람의 표정을 갖고 있었다.

물론 그녀만의 상상이지만,

마치 웃고 있는 아키라의 얼굴과 비슷했다.


코하네는 글자를 표현할 땐

마치 사람의 얼굴인 듯,

웃었어, 울었어, 화났어, 행복한 이름이야,

라는 말들로 마호의 입을 웃게 만들곤 했다.

아키라의 이름은

행복해서 웃는 글자의 모양을 닮았다.

마호가 물었다.


“자, 나는 어때?”


“음, 마호는 심술을 부리지,

그리고 키도 멀대처럼 크지.”


“코하네는?”


“음… 나는 좀 복잡하게 얽혀 있어,

거미줄처럼 말이야.”


그때 마호는 거미줄의 의미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생각해 보면 정말

코하네의 말처럼

이름마다 표정이 살아있었다.

코하네라는 이름을 적어 보니

그 또한 그녀의 말이 맞는 것 같다.

마호는 그녀의 이름 속 거미줄 중 하나는

꼭 자신이길 간절히 바라며

코하네의 이름을 반복하며

적어 내려갔다.



어둠을 드리운 밖은

어쩌다 보이는 불빛만이

자신의 정체를 드러냈다.

그저 검게 보이는 창문은

코하네의 창백한 얼굴과

반대편 중년 여자가 입을 벌리고

잠이 든 모습을 비춰준다.

불빛이 없는 곳을 달릴 때면

그 모습은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검은색 창문이 창백한 코하네의 얼굴을

비추는 게 썩 맘에 들지 않아 보인다.

코하네는 괜히 겉옷의 옷깃을 세우고

얼굴의 반을 가려 보았다.

다시 곁눈질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며

고개를 홱, 하고 돌려 버렸다.      


초록색의 굵은 실이

마네키를 닮은 코하네의 웃는 모습을

완성 시켰다.

뾰족한 바늘은 미련이 남았는지

머뭇거리다 실을 뱉은 후, 떨어졌다.

열차 바닥을 샅샅이 뒤져 보지만

바늘은 사라졌다.

아니 그곳에 있었지만 보이지 않는다.


오랜만에 밀려오는 두려움이다.

바늘이나, 작은 칼날과 같은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으면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물건이다.

분명히 떨어지는 부분까지

눈을 놓지 않았지만,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당황한 코하네는 벌떡 일어나,

자신이 앉아 있던 좌석까지 훑기 시작했다.

바늘을 찾지 않은 상태에서

그 자리에 다시 앉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옆으로 엉덩이를 밀어 보지만,

만약, 이라는 생각에

그곳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승객 중 한 명이

자신의 자리를 앉을 리 없을 테니, 라며

마음의 안식을 찾으려 애를 쓰는 중이다.


코하네의 얼굴은 바늘 하나에

점점 더 창백해지고 있었다.

코하네는 시계를 보며

얼마 남지 않은 도착 시간을 가늠하더니,

숨을 길게 내쉰다.

중년 여자의 입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벌어졌고

고개는 아예 하늘 위로 솟아 있었다.

아주 깊은 잠을 취하는 중년의 여자가 부럽다.  

   

해도 인사하지 않은 젊은 별이

어슴푸레한 색깔을 뽐내는 새벽녘이다.

아키라의 나이 때는

언제나 몸보다 마음이 앞서기 마련이다.

미닫이문을 밀어내며

파란 바깥 풍경의 공기를 크게 들이마셨다.

아키라의 시간은 지금부터

1초 동안의 시간까지 매우 바쁠 것이다.


색이 바랜 마른 헝겊으로

마루 자리를 하, 후, 불어가며

수없이 닦아 냈다.

며칠 동안 입을 앙다물고 있던

꽃들이 활짝

입을 벌리고 약간의 비를

머금고 있었다.


그들은 싱그러운 향기를 뿜고

살랑 부는 바람에

박자를 맞춰 흔들대며 웃었다.


여러 개의 그림을 만들고 있는

뿌연 거울은

유일하게 아키라가 손보지 않은 것 중, 하나다.

하지만 오늘도 이를 모른 척, 할 수가 없다.

까만 손으로 거울을 쓱쓱, 닦아 보았다.

몇 번을 문질러 보지만

찌든 먼지는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얼굴의 형체만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투명함이다.


거울을 물에 담가 빨아내듯,

닦고 또 닦았다.

낡았지만, 쓰임에 충실했던 손수건을

꺼내 들고 물기가 남은 틈을 타,

열심히 닦아 냈다.

역시 노력은 결과를 꼭, 말해 준다.

거울 속 아키라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얗게 센 머리칼을 제대로 묶지 못해

이리저리 산 짐승처럼 튀어나온 모습,

길게 늘어진 수염은

자세히 들이다 보면 혹, 이라도

발견되지 않을까, 싶다.

중력의 힘을 그대로 받아들인 모습은

턱 주변의 남아 있는 살이 축,

늘어져 고집 센 노인을 더욱

강조하는 모양이다.

탁한 검은 눈동자는 뿌연

거울과도 같이 불투명한 막을 쓰고 있었다.

당연히 초점은 정확하지 않다.


회색빛 입술은 높은 산봉우리의

모양으로 웃어도 웃는 모양이

나오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닐 것처럼 보였다.

가까운 곳에서 코하네의 잔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그렇게 한참을 거울 속을 헤매다

정신 차린 아키라는 녹슨 가위를 집어 들었다.

우선 우후죽순으로 뻗어 있는 수염을 모으더니

쓱싹, 쓱싹, 소리를 내며 잘라 냈다.

그 모습은 여간 우스운 게 아니다.

산봉우리가 훅, 하고 순식간에 짧아진다.

두 번의 쓱싹거림은

선수라도 된 양,

엄청난 속도로 거칠게 쓱싹거렸다.


차분함이라고 찾아볼 순 없지만,

산 짐승 같은 모습보다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키라는 재미라도 들렸는지

이번엔 머리칼을 한 움큼 잡아

쓱싹거리기 시작했다.

녹슨 가위는 삐죽 튀어나온

머리칼을 이기지 못하고 어긋난다.


아키라는 갑자기 중얼거리며

욕하기 시작했고 녹슨 가위에

벌이라도 내리는 듯,

온 힘을 다해 집어 던졌다.

그야말로 일정하지 않은

길이의 머리털은 장관이다.


언제 쓰던 물건인지 알 수는 없지만,

먼지가 붙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

포마드의 뚜껑을 열었다.

내용물을 손에 잔뜩 묻히며

뻗은 머리털에 대고 쓱쓱,

문지르며 쓰다듬었다.

머리칼이 거짓말처럼 잘 정돈되더니

실타래 같은 모양이 되었다.

빠르게 고무줄로 머리칼을 꿰어 묶었다.


단 한 올의 머리칼도 튀어나오지

않음을 확인하며

사진 속 츠키노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엄지를 번쩍 들어 올리고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듯하다.

아키라도 따라 미소를 지으며,

누런 이를 드러내며 매무새를 다시 정돈한다.


여러 번의 세안은 자신의 얼굴이

하얗고 맑게 될 거라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몇 번을 푸하. 소리가 나도록 씻었는지

아키라의 얼굴은 기름기 하나 남지 않은 상태다.

누런 이를 확인하려 입을 벌릴 땐

좌우 볼에 붙어 있던 남은 살점들이

찢어 질듯이 펴졌다, 오므라들었다.

그럴 땐 주름이 한 줄 더 생긴 기분이 들었다.

투명한 플라스틱 통에 담긴 초록빛 액체를

손에 탁탁 털어 살점 하나 없는 얼굴에

쓱, 쓱 세수하듯 문질렀다.

싱그러운 향기가 나다가

쏘는 듯 얼굴이 따끔거렸다.

알코올이 섞인 향이

그리 나쁘지 않은 모양새다.

푸석했던 얼굴에 다행히 윤기가 돌기 시작했다.


시간에 쫓겨 허둥지둥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평화로운 얼굴을 되찾은 뒤,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오직 대문만을 지켜보고 앉아 있는 중이다.

1초도 아까워하던 모습이

1초가 1시간 같은 지루함에

혀를 쯧쯧거리기 시작했다.


점점 잦아들기 시작한 비가

미세한 이슬로 어깨에 내려앉았다.

기다림의 지루함을 이기고자,

밖으로 발을 디딘다.

미세한 빗줄기가

짧아진 아키라의 수염 위에

내려앉아 동글동글 맺힌다.

멀리서 푸른 빛이 도는

비닐우산이 반짝거렸다.


“왔구나.”


다리가 걷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코하네가 분명하다.

심장이 펌프질하기가 버거웠는지

약간의 통증이 밀려왔지만

아주 잠시, 참을 만한 통증이다.

감색이 도는 얇은 코트 하나를 걸치고,

어깨엔 코하네의 몸보다 더 큰

가방을 메고 있었다.

발보다 더 마음이 앞서 벌써

코하네의 가방을 들고 있었다.

오랜만에 꾀꼬리가 말하는 소리를 듣는다.


“아키라, 할아버지.”


“오냐, 이리 다오.”


“괜찬…”


코하네의 말이 끝을 맺지도 못하게

황소 같은 고집과 힘으로

가방을 낚아채 어깨에 둘렀다.

아키라는 코하네를 보자마자

반가움을 역설하기 시작했다.


“구질구질한 날에 뭐 하러 와.”


오랜만에 듣는 아키라의 역설에

그저 웃음이 나와 킥킥거렸다.

코하네는 아키라의 팔짱을 끼고 기대어 웃었다.


“들어가자.”


“네, 할아버지.”


몇 년 만에 발을 들이는 곳이다.

두려움도 있지만

아키라가 있었기 때문에

문제 될 건 없다고

애써 그것을 감추고 있었다.

몇 년 전만 해도 위압감이 들 만큼

커다랗고 쓸쓸한 집이었다.


아키라의 손을 스치고

그의 온기가 더해져

더 이상 쓸쓸함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나무 마루는 윤기가 흘렀고,

쩍쩍 벌어지던 나무 사이에 박아 놓은,
전혀 맞지 않은 색깔의 나무 색깔도,

싱그러운 나무 냄새가 나는 다다미도,

모든 것이 다 완벽했다.


출처, 녹차의 맛



집안을 서성이는 아키라를

오랫동안 말없이 지켜보았다.

아키라에게 코하네의 모습은

뒤뚱거리는 오리처럼 걷는

네 살배기 어린아이가 되고,

코하네 앞에서 츠키노가 양팔을 벌리고

맞이할 것만 같다.

아키라가 꾸며 놓은 츠키노의 화단은

서서히 찾아 든 어둠도

그들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시간이 걸릴 것 같아 만개한 꽃들을

심어 놓으니 반짝거리며

코하네에게 인사를 했다.

코하네는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할아버지 어디 좀 보세요.”


코하네가 아키라의 얼굴을

요리조리 살피려 눈을 굴렸다.

싫지 않다는 표현을

아키라는 또 역설하기 시작했다.     


“이 녀석이.”

코하네는 아키라의 삐뚤어진

턱수염을 발견하곤,

애써 설명하려 드는

아키라의 눈치를 무색하게 만들고

크게 웃었다.


“크하하하하.”


“산 짐승 같은 모습보다는 낫지 않더냐.”


코하네는 늘 그랬던 것처럼

후미코가 햇빛을 쏘이던

가장자리를 찾아 나선다.

마치 후미코가 금방 앉았다가

일어선 것처럼 따뜻했다.

오늘같이 볕이 없는 날에도

그 자리는 코하네를 배신하지 않았다.


“할아버지.”


“그래.”


“할아버진 여전히 마법사 같아요,

그 사이 집이 이렇게 달라지다니…”


“늘 하던 일이 아니더냐.”


코하네는 꽃을 발견하더니

화단으로 몸을 향해 쭈그리고 앉았다.


“할아버지, 이 꽃은, 본 것 같긴 한데…”


“야생화다 어려운 꽃이야,

얼마나 심술궂다고,
조금만 신경을 쓰지 않아도

꽃을 피우지 않지.”


“아…”


방울처럼 생긴 흰 꽃을

인사라도 하듯,

손가락으로 살짝 튕겨 보았다.


“그러니까, 아키라 할아버지는 마법사.”


코하네의 기억 속에

어렴풋한 그림이 떠올랐다.

할머니가 좋아했던 꽃이지만

꽃을 피우지 못해

잎만 주렁주렁 달려있었던

기억이 났다.


“맞다 기억해요, 할아버지

이건 할머니가 좋아했던 꽃이에요.”


“기억도 참 잘하는구나.”


방울이 여러 개의 띠를 하고

달려있는 모양이 징그럽기도 했지만,

할머니가 원하던 가족의 모습 같기도 했다.

절대 하나만 피우지 않고

여러 개의 띠를 둘러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양이

예전 그들의 모습과도 같다.


“배고프지 않니?”


“네, 할아버지 배고파요.”


“그래그래 들어가자, 들어가.”



출처 리틀 포레스트




이곳은 오랜만에 도마를 두드리는 소리와

그릇을 달그락거리는 소리,

기름이 자글거리는 소리가 가득하다.

된장은 끓자마자 온 집안에

향기를 뿜고 입술에 내려앉았다.

간장에 졸인 생선은

무의 달콤함이 극에 달해 있었다.

그들의 입은 연신 오물거리다,

소리를 내다 음식이 튀거나,

어떤 소리도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다.


아키라는 코하네의 입이

웃음을 베어 내고 오물거려도,

마호의 어머니가 절인 생선만 한 건,

없다며 괜한 투정을 부렸다.

아키라의 젓가락은

생선 살을 고르게 바르더니

코하네의 소복한 쌀밥 위로 가져간다.


“할아버지, 드세요.”


“얼른 먹기나 해.”


눈이 좋지 않은 아키라가

바른 생선에는 작은 가시가

조금씩 박혀 있었다.

코하네는 생선을 그대로 입안으로 넣어

우적우적 씹었다.

섬세한 혀 놀림으로 바른 가시를

어금니로 가져가 맛있게 씹을 작정이다.

고와질 정도로 씹어 얼른 삼켰지만,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물 한 잔을 냉큼 비우자,

할아버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먹다가 물을 마시는 건 좋지 않아.”


코하네는 오랜만에 듣는

아키라의 잔소리가 달콤하게 들렸다.

코하네는 연신 하하거리며

웃기에 바쁘다.


“네, 할아버지.”


추적거리는 비가 내린 후

밤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변덕을 부렸다.

커다란 지붕 위로 작은 별들이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 같았다.

이곳의 검은 하늘은

늘 수많은 별을 매달고 있었다.

아키라는 과식으로 불편했는지

마당을 연신 왔다 갔다를 하는 중이다.

코하네는 아예 벌러덩 누워

수많은 별의 무게에 버거워 보이는

밤하늘을 보고 또 바라보았다.


“할아버지,

옛 생각이 계속 떠올라요.”     


아키라는 한낮에 온 비로 떨어진

마지막 꽃잎들을 쓸어 담으며

잠시 먼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니 집인 게지.”


“음, 그렇다, 집!

큭 할아버지 말을 듣고 있으면

항상 그게 답이에요.”


“녀석.”


코하네가 몸을 일으켜 앉아

덧신을 신은 발이 바닥에 데일 듯한 자세로

종아리를 흔들거렸다.


“할아버지, 직장을 구했어요, 음.”


코하네는 말끝을 억지스러운 기침으로

마무리한다.

굴곡진 시멘트 바닥에

언제 불어와 앉았는지

비닐 쪼가리가 끼어 빠지지 않았다.

아예 그대로 말라 버린 것이

새로 발라 놓은 시멘트 자국이 선명했다.

아키라는 코하네의 말을

듣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비닐 조각을 빼내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이 정말 많아요
 고급 경양식 집이라고 얘기하면 쉬울까…
 음식도 얼마나 맛있는지 몰라요,

 좋아하는 생선찜은 없지만.”


잡아당긴 비닐 조각이 쫙,

하는 소리를 내며 찢어졌다.

발라 놓은 시멘트 안의 비닐 조각은

부서지지 않은 이상

끝내 뺄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이런.”


“그곳은 늦은 시간까지

근무하지 않아도 돼요,

또 정말 다행인 건

마호와 함께 일할 수 있다는 거예요
기억하세요? 예전에 일했던 곳,

정말이지 그곳에 비하면 천국이에요.”


코하네는 아키라의

예스란 답을 얻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아키라는 찢어진 비닐 조각을

주워 담으며 혀를 찬다.


“쯧쯧쯧, 이건 망치로 깨야 나올 것 같군.”


아키라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용납하지 않은 성미다.

완벽함을 더 완벽하게 만들고 싶어 하는

그에게 구두 만들기, 란

손님들의 인내심과도 직결했다.

단골손님이 꽤 있었지만,

공장에서 찍어 나오는

신발에 점점 밀리는 터였다.

오랜 시간을 두고,

완벽하게 만들어 놓은 구두를

몇 번이고 가위로, 쓱싹, 해버린 건

예삿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하나둘, 손님을 잃었지만,

다행히 할아버지의 그런 성격을

좋아하는 손님도 있었다.

물론, 그 단골이 신은 아키라의 신발은

수년 동안 보수 작업만 하러 왔다.

아키라의 신발은 그렇게 질기고 오래갔다.

발라 놓은 시멘트 안에

얄밉게도 끼어 있는 비닐은

아마도 내일도 지나지 않아

밖을 보게 될 것이다.


코하네의 커다래진 눈이

점점 밑으로 축, 쳐지고 있었다.


“할아버지.”


“넌 이제 성인이잖니,

네가 맘에 든다면 그리해야지 암.”


“할아버지 허락하신 거예요?”


“허락이고 말고 할 것이 어딨느냐?

녀석하고는.”


코하네의 목소리는

점점 더 단호해지고 자신만만 해졌다.


“천천히 맨션도 알아볼 거예요.”


코하네는 아키라의 눈이

그제야 휘둥그래진 것을 눈치챘지만

그는 애써 침착한 표정을 지었다.


“흠…”


아키라의 행동이 잠시 멈추었고,

비닐을 이내 포기하는

믿을 수 없는 행동을 했다.

마루를 걸치고 앉아 한 숨을 내쉬었다.


“할아버지, 지금 당장이라는 얘기는 아니에요.”


“음… 그래그래, 알았다.”


잔잔하던 바람이 갑자기 훅, 불어온다.

마치 누군가 빠르게 코하네의 곁을

뛰어 스친 것처럼 머리칼이 펄럭였다.

방울 꽃도 잠시 흔들흔들

댕댕, 거리는 소리를 낸 것 같다.


“코하네.”


“네.”


“마호는 친구인 게냐?”


코하네의 볼이 먼저 발개지더니,

하얀 얼굴 전체가 붉은빛이 돌았다.


“할아버지, 마호는 정말 좋은 친구예요.”


“녀석, 얼굴은 왜 그 모양이 되? 허허허.”

    

아키라는 오랜만에 갈매기처럼

휘어진 눈웃음을 지었다.

한 번 발개진 볼은

다시 돌아올 생각이 없다.


“코하네, 넌 점점 츠키노가

젊었을 때와 닮은 구석이 많아지는구나
훗, 아주 많이 닮았어.”


아키라의 뿌연 눈동자가

깊은 동굴처럼 폐여 보였다.

아마도, 그때의 추억을 곱씹는 중일 것이다.

츠키노의 추억을 물어 보고 싶지만,

먼발치의 사진 속에서

츠키노를 바라보고 있는

친할아버지의 모습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엄만, 처음 제 얼굴을 봤을 때,
 할머니의 얼굴과 너무도 닮아서

 가장 기뻤다고 했어요
 자기를 닮았다면 정말 슬펐을 거라 했어요.”


“그랬었지…”


아키라의 말끝은

공기를 먹은 것처럼 헙, 하는 소리를

내뱉더니 굵은 기침 소리를 냈다.


“쿨룩, 쿨룩, 쿨룩.”


코하네는 빠른 걸음으로

담요를 가져와 그에게 건넨다.


“쿨룩, 쿨룩.”


“밤공기는 아직 차요, 할아버지.”


“그래그래 고맙다.”


아키라는 세월을 따라

날로 작아지는 어깨에

흘러내린 담요를

더욱 바싹 끌어당겨 올린다.


“코하네, 잘 듣거라

너는 소중한 아이란다 잊어서는 안 돼,

어느 곳에 있든 어떤 일을 하든

항상 잊어서는 안 된다!

자신을 아껴야 한다는 것을 잊는 순간,

모든 게 엉망진창이 될 수 있어
너 자신을 귀히 여기거라 알았느냐
세상에서 자기 자신을

귀하게 여기는 것만큼 현명한 일은 없으니.”


아키라는 후미코도 신페이도

모두 죽음의 손에 맡긴 일이

생생하게 머릿속에서 맴 돌았다.


“응 그럴게요, 할아버지.”   

  

“그래 그래 쿨룩, 쿨룩.”


“따뜻한 차 좀 내올게요.”


아키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목까지 두른 담요도 함께 끄덕였다.    

 

아키라는 츠키노의 방에

이부자리를 만들고 있었다.

코하네는 괜찮다고 만류하지만,

미동 없는 움직임이다.

예전 같았으면 코하네의 방에 머물렀을 거다.

하지만 신페이도 죽고 난 후,

늘 츠키노의 방에서 지냈다.

매일 악몽에 시달린 그녀에겐

아주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었기 때문이다.


작은 공간에서의 아픔은

크기와 반대였다.

아키라는 코하네가 자신의 방에

얼씬거리지도 못하게

아예 문을 잠가 놓은 모양이다.

녹인 슨 자물쇠지만

여전히 제 역할은 하는 것 같다.

아키라는 응접실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여기서 잘 것이야, 걱정 말 거라.”


코하네를 해칠 그 무엇도

아키라를 이길 수 없다고

그녀에게 단단히 이르는 것 같다.


“히잇, 네.”


할아버지의 방은 따로 떨어져 있는

안채였고, 코하네가 괜찮다고 한들

이 또한 들을 그도 아니었다.


“할아버지, 추울텐데...”


아키라가 고타쯔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놈이 있는데 춥기는.”


아키라가 눅눅해 보이는 성냥에

불을 붙이며 등잔에 불을 넣었다.

세월을 먹은 등잔도

환한 불빛을 내주지는 못했다.

뿌연 유리 안쪽으로

검은 그을음이 가득하다.


“꺼지지 않으니, 걱정 말 거라 자자,

그만 눈을 붙여야지,

하루가 굉장히 길었어.”


미세한 공기가 만드는 길에

주황색 불빛이 요란하게 흔들거렸다.

불빛에 잠시 스친 아키라의 얼굴에는

피곤함이 역력했다.

코하네의 입속은 제가 할 게요, 라는 말이

계속 머물기만 했다.


“왜 또 그런 눈으로 보는 게야.”     


“할아버지도 얼른 쉬세요.”


“나는 문단속을 해야겠다

잘 자거라.”


이불 속으로 몸을 집어넣었지만,

마음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네, 할아버지 주무셔요.”


아키라는 뒤를 돌아 보다

코하네의 삐죽 나온 마른 어깨를

못마땅해 혀를 끌끌 찼다.


“쯧, 쯧.”


아키라는 이불을 잡아당겨

겨우 숨 쉴 수 있을 정도의

여유를 남겨 두고 덮어주었다.

코하네의 가느다란 눈을

흘기며 미소를 지었다.

눈을 감으라는 무언의 신호에

1초도 안 되는 시간을 두고

눈을 감았다.


희미하게 미소를 띠며 그제야 불을 끄고,

츠키노의 사진 옆에

등잔을 옮겨 놓았다.

보송보송한 이불은

햇볕에 잔뜩 그을린 마른 냄새가 났고,

새하얀 이불의 색은

달빛이 되어 방안을 훤히 밝혀 준다.


홑겹의 면을 덧대어 꿰맨 자국이

듬성듬성, 바느질마저도

아키라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할아버지는 정말 마법사처럼,

단잠에 빠져들게 해 주었다.


코하네의 눈이 스르르 감기기 시작할 때,

맥주병 따는 소리,

맥주를 따르는 소리, 가 들렸다.

가끔 들리는 기침 소리는

꿈속인지 현실인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꿈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할아버지의 얕은 노랫소리가 맴돌았다.

아키라는 몇 번이고

코하네가 깊은 잠에 빠졌는지 귀를 기울였고,

확인을 한 후 에야,

깊은 잠에 빠졌다.  

   

깊은 잠에 빠지고 난 후의

아침은 언제나, 상쾌하다.

날씨도 한껏, 좋은 기분을

도드라지게 해 주었다.

하늘은 하얀 구멍 난 곳 없이 파랬고,

그친 줄 알았던 보슬비가

밤사이 꽃 위에 내려앉아 있었다.

언제 왔다가 흔적을 남기고 갔는지,

채 떨어지지 않은 빗방울이

은방울꽃 위에 맺혀 있었다.

코하네는 쭈그리고 앉아

맺힌 방울을 다시 또 툭, 하고

건드려 본다.

반가운 아침 인사를 한다.




“앗, 차가워.”


코하네의 기다란 눈이 캬르륵, 하고

마네키 네코처럼 기울어졌다.

이른 아침에도 불구하고

6월의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그새 미지근하다.

어둠 속에서 어제 보이지 않았던

집 안 구석구석이 눈에 들어왔다.

애써 모른 척하고 싶은 물건들과

눈을 박아 두게 하는 물건들이

마치 일부러 분류해 놓은 것처럼 보였다.

츠키노가 쓰던 물건들은

새것처럼 윤기가 흘렀고,

사람 손을 타지 못한

후미코의 물건들은 여전히

남의 집에 얹혀사는 듯,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먼지 하나 없이

아키라가 닦아 놓은 것이 분명했지만,

정말 괴이하다.

죽어서도 자신의 고통스러운

세계에 갇혀 쓸쓸하고 외로워할

후미코를 생각하니

코하네의 심장이 뛰지 않는 것처럼,

좀처럼 숨이 잘 쉬어지질 않는다.

코하네가 중얼거렸다.


“사실 난 숨을 쉬고 있는걸..."


얼마 동안의 멈춤 자세는

숨이 자연스러움을 찾을 수 있게 해 준다.

코하네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

온갖 서랍장을 뒤적이더니,

사진첩을 꺼내 들었다.

첫 장을 넘기며 끝장을 넘기는 데까지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시 한번 첫 장부터 넘기기 시작했다.

반복을 몇 번이나 했을까,

신페이와 후미코가

함께 있는 모습을 찾을 수가 없다.


하루의 반을 다른 사람이 되어 살았던

후미코는 남편 신페이를 저주했다.

그런 이유일까,

그들이 나란히 있는 모습은

어디에도 없다.


후미코의 몇 장 안 되는 사진은

모두 두려움에 떠는 얼굴이다.

그것과 다르게 신페이는 늘 웃고 있었고,

정면을 보지 않고 다른 곳에 시선을 둔

사진이 많았다.

아마도 그 시선은 항상 지켜봐야 했던

후미코이거나,

코하네가 꽤 차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코하네는 가장 눈에 띄는 사진을 각각,

두 장을 잘랐다.

녹슨 가위 치곤 슥슥, 하는

소리를 내며 제 역할을 다하는 척을 한다.


후미코의 얼굴은

최대한 두려움이 없는 것으로,

신페이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박혀 있는 것으로,

두 사람을 서로 나란히 바닥에 뉘었다.

드디어 신페이가 후미코를 바라보고 있었고,

후미코는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꽤, 다정해 보이는 모습이다.

좌, 우 평형이 맞진 않았지만.

액자에 끼워 넣으니 문제 될 건 없다.

정말이지 꽤, 잘 어울렸다.


“휴, 훗.”


코하네는 흰 수건이

새까만 무늬를 만들어 낼 때까지

액자를 닦았다.

츠키노의 액자보다

더 빛이 나는 것 같다.

잠시 츠키노의 얼굴을 보더니,

혀를 날름거렸다.

아키라의 발소리에

급하게 혀를 집어넣다 그만,

송곳니에 긁히고 말았다.


“아얏.”     


자신도 모르게 입을 크게 벌리고 멈추었다.

아픈 것 보다 놀람이 더 컸을 것이다.

기분 나쁜 쇠의 맛이 혀를 맴돌았다.

아키라가 액자를 바라보며 헛기침했다.

이번엔 진짜 기침이 아닌

말 같은 것이어서

코하네는 다행이라 생각했다.


“허허허, 쿨룩.”


“그곳에선 엄마가 아프지 않을 테니까,

아빠를 좋아할지도 모르잖아요.”


“할아버지, 우리 사진 찍어요.”


“됐다 다 늙어 사진은 무슨.”


아키라는 사진첩 한 장 한 장을

아기 다루듯 소중히 넘겼다.


“할아버지, 함께 찍어요. 네?”


사진 속의 모든 장면마다

보이지않은 아키라의

사진 찍는 소리가 찰칵, 하고

귀를 간질이는 것 같았다.

거의 모든 사진 속에는

츠키노의 모습이 없는 사진이

없을 정도로, 찰나를 잘 잡아냈다.

코하네를 중점으로 둔 사진 속에서도,

츠키노의 모습이 희미하게 담겨 있었다.

코하네는 모른 척,

입을 앙다물고 있지만

그들이 살아 있을 때처럼

아키라는 신경 쓰고 있지 않았다.

남겨진 건, 츠키노의 어린 손녀와

그였으니, 말이다.

아키라는 사진을 보고 또

쳐다보았다.


“그래, 알았다 알았어.”


코하네는 자기 모습이

흑백으로 남은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다.

지금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겨 있었다.

코하네의 가느다란 눈이

눈썹에 닿을 정도의 큰 원으로 변했다.


“헤엣? 할아버지, 이건.”


“놀란 모양이구나.”


아키라가 조심스럽게

비닐 속에 있는 사진을 꺼내 들었다.

너무 바싹 말라 있는 탓에

잘못했다가 바삭, 소리와 함께

형체도 없이 날아가 버릴 것 같았다.

아키라가 사진의 뒷면에

입을 갖다 대며 하하, 하고 불었다.


“이땐, 네가 태어나기 한참 전이지.”


“우와, 정말 놀랐어요.

제가 할머니 손녀가 맞네요. 큭.”    

 

“녀석, 할애비가 말했지?

넌 츠키노와 닮아도 너무 닮았다고 말이다.”


“엄마와도 비슷해요.”


“허허, 그렇지 후미코도 많이 닮았지.”


츠키노의 이목구비는

흑백의 오래된 사진 속에서도

빛을 발하고 있었다.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금방이라도 눈을 깜박거릴 것만 같았다.

아키라의 젊음은 츠키노였다.

츠키노의 아름다움을 찍어낸

사람의 마음이 전해지는 사진이다.

아키라의 애달픔이

가슴에 와닿아 안타까울 뿐이다.


“이때, 신페이가 겨우 걸음을 걸을 정도였으니까,

참… 오래됐지.”


이른 아침의 태양이 슬슬 기지개를 켜며

집 안으로 발을 들이기 시작했다.

얼마나 짙은 빛을 이루고 있었는지,

바닥으로 반사된 빛은

눈을 제대로 뜨고 쳐다보기가

힘들 정도다.

따뜻한 보리차도

이젠 어울리지 않은 계절을 맞고 있었다.


“참, 할아버지 그 예수 말이에요, 노아..."


궁금했던 얘기였는지

아키라가 고개를 휙, 돌리며 말을 기다렸다.


“유키코에게 청혼했어요,

참 잘 어울려요.”


다행이라는 표정의 언어는

늘 느긋해 보이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구두도 거짓말처럼

노아에게 꼭 맞아요,

노아가 주인인 것처럼 요.”


“음, 다행이구나.”


“할아버지도 좋으신 거죠?”


“잘 살기만 한다면 야,

문제 될 건 없다.”


“유키코와 함께 오면,

그땐 다 같이 사진을 찍어요.”


“알았다, 알았어.”


아키라의 얼굴색이 점점 거뭇해지다

창백해지기도 했다.

알은체하며, 말을 꺼내고 싶지만,

손사래를 치며 됐다, 는

말만 할 게 뻔하다.

거무튀튀한 얼굴이

점점 푸른 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또한 이상할 정도로

어깨의 좌우 평형이 맞지 않아 보인다.


그런 아키라를 두고

발을 떼야 하는 심정도 꽤 불편하다.

할 수 있는 건 아키라가

한시라도 빨리 쉴 수 있도록

가까운 곳에 머물 수 있도록

시간을 내는 것뿐일 것이다.

코하네는 행동을 서둘렀다.


가방 안에서 아키라가

여름 내내 입을 모시옷 두 벌과,

손수 만든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모시로 된 옷은 땀이 많은 아키라에게

없으면 안 되는 필수품이다.

오랫동안 입은 것들을 여미고,

꿰고 한 것이 십 년도 더 넘었을 것이다.

코하네는 벼르고 벼르던 옷을

새로 살 때만큼, 정말 행복했다.


“할아버지, 이것.”


아키라는 기쁨을 다시 역설했다.


“녀석, 무슨 돈이 있다고,

이 비싼 것을 또 사 들고 온 게야 이런.”


“할아버지 선물이에요.”


“네 몸보다 더 큰 짐을

짊어지고 오더니… 이런.”


“벌써, 오늘도 이렇게 해가 쨍, 한데

시원하게 입으세요.”


“있는 옷을 뭣 하러.”


“또 이러세요?

되돌릴 수 없어요, 할아버지 큭.”


“음… 고맙다.”


아키라는 퉁명스럽게 답했지만,

옷을 다루는 손길에

고마움이 녹아 있었다.


“자, 그리고 이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것.”


짙은 녹음을 품고 개켜 있는 손수건은

일반 손수건 보다 더 도톰하고 커 보였다.

한쪽은 실크 같이 윤기가 흐르는 모습을 했고,

한쪽은 수분을 삽시간에 먹어 버릴 듯한

면의 톡톡함을 지니고 있었다.

가장자리에 아키라의 이름이

선명하고 도드라져 보인다.


“이게, 무어야.”


“제가 만들었어요, 손수건.”


아키라는 커다란 손수건을 펼쳐 보더니,

눈동자가 조금 흔들리는 낌새다.

푸른 녹음에 반사된 그의 얼굴이

더욱 푸르뎅뎅해 보였다.

이번에 절대 역설할 수 없는 모양이다.


“코하네, 실력이 좋구나.”


“크기가 커서 흔한 수건 같아 보이지 뭐예요,
 그래서 한 쪽을 그렇게 박아 버렸어요.”


“고맙다.”


“아마 이 여름 할아버지 땀은

요것이 책임질 거예요.”


“그래, 그래 헌데 이거야 원,

이리도 귀해서 콧물이나 제대로 닦겠느냐

허허허”


아키라의 고르지 못한 수염이

자랑이라도 하듯, 입술을 실룩대며

크게 웃었다.

코하네의 손재주는 츠키노의

솜씨 와도 똑 닮아 있었다.      


코하네의 고집은 아키라의 고집을

절대 꺾을 수가 없다.

아키라의 안색이 계속 신경 쓰였던

코하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키라는 끝내 역 앞까지 와서야

발을 멈췄다.

아키라의 어깨는

여전히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왠지 걸음도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보였다.

코하네의 걱정이

눈 안에 그대로 나타났다.

아키라는 코하네의 손을 꼭, 잡고

놓지 못한다.


“코하네, 강해져야 해 알았느냐?”


코하네는 고개를 끄덕이며

차마 그의 눈을 보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어서 가거라.”


아키라 입은 코하네를 보내지만,

여전히 손은 놓지 못했다.


“할아버지, 전화 자주 할 게요

그리고, 건강… 챙기세요, 네?”


“나는 걱정 말 거라 어서 가.”


“으응, 갈게요 할아버지.”


코하네가 먼저 재빨리

열차 안으로 들어갔다.

아키라는 눈을 맞추더니,

아직 출발하지 않은 열차를

뒤로 하고 창문 너머 코하네를

돌아보지도 않고 걸어갔다.

코하네는 눈과 고개를 끝까지 돌려

아키라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눈 한번 깜박거리지 않았다.


역 밖을 나오자 마치 처음 와 본 곳처럼

낯선 기분이 들었다.

처음 본 광경인가,

정신이 아득하고 내리쬐는 볕은

아키라의 깊은 이마 주름을

태워 버릴 작정인 것 같다.

아키라의 걸음은 점점 느려졌고

코하네가 본 것처럼

오른쪽으로 기울여 걷기 시작했다.

미지근한 바람은 불꽃 같은 아키라의

성격에 불을 지르기에 충분하다.

아키라의 입에서 단 내와 함께 헉헉, 대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좁은 차도를 가르는 차의 소음이

아키라의 정신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아키라의 머릿속에서 앗차, 하는

소리가 났다.

이렇게 넋을 놓고 있다간

무슨 일이 생길 수도 있을 거란

두려움이 닥쳤다.

순식간에 정신이라도 잃어버릴까,

하는 생각에 눈을 똑바로 뜨고

걸음을 재촉했다.

어지럼증은 쉽게 가라앉을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아스팔트 위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그 위로 집이 보이기 시작했고,

헉헉 소리는 억억, 하는 소리로 변해갔다.

바지 속의 끈적하고 축축함은 대체 뭐길래,

그것들은 정신을 더욱 아득하게 만들었다.


해가 쨍, 한날, 갑자기 쏟아지는

비를 홀딱 맞은 채

집 안에 발을 디디자마자 털썩 주저앉았다.

거의 초인적인 힘과 정신으로

버티며 들어섰다.

초점이 점점 흐려지더니,

주위가 뱅뱅 돌기까지 했다.

낡아 빠진 전화기의

꼬불꼬불한 선이

자신의 생명 줄을 엮어 놓은 것처럼 보였다.


“으엇 헉헉.”


쇳덩이처럼 무거워진

생명 줄을 어렵게 들었다.

그 순간에도 바지의 축축함은

다신 겪고 싶지 않은 찝찝함이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몇 번의 울림이었을까,

압력으로 귀가 꽉 막혀 소리조차

잘 들리지 않았다. 온

몸의 구멍이란 구멍이

모두 꽉, 막힌 느낌이었다.


“여보세요.”


아키라는 목소리를 듣자마자 유키, 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말이 나오질 않는다.

젠장, 이라고 말하지만

아무도 듣지 못할 소리다.

머릿속에서 외치는 소리를

입술은 자꾸 모른 척했다.


“으어, 우우.”


유키코는 빠르게

아버지의 목소리를 확인했다.


“아버지? 아버지, 아키라?

무슨 일이에요?”


수화기 너머 아키라의 신음이 계속 들려왔다.

그녀는 침착하려 애썼다.

출처, 유성의 인연


“아, 아버지?”


아키라가 쥔 손수건이

시멘트 바닥으로 툭, 하고 떨어진다.

아키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유키코는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을 직감했다.

또한 코하네도 자리에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아버지, 걱정 마세요,

조금만 쉬고 계세요
곧 구급차가 갈 거예요,

조금만, 조금만요.”


유키코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빠르게 노아를 불러

어떤 얘기를 해서라도

아키라의 정신을 붙들어 달라 말했다.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가까운 파출소로 뛰기 시작했다.




아키라의 얼굴은 금세 땀이 식어

열 번을 세수한 듯 말끔하다.

푸른 듯한 얼굴은

멍이 든 것처럼 더욱 푸르다.

다행히 숨구멍이 트였는지

입을 쩍 벌린 채 우스꽝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다.

눈은 지그시 감고 마치

꿈이라도 꾸는 듯했다.

바람에 촐랑거렸던

은방울꽃의 무리 중 하나가

고개를 떨구고 떨어졌다.

흙은 아키라가 외롭지 않게

살포시 꽃을 담아냈다.


감은 눈의 세상은 온통 하얀색이다.

카세트의 빨리 감기라도 한 듯

눈을 둘 세 없이 휙휙,

지나가고 또 지나갔다.

도대체 무엇인지 알아볼 수가 없다.

앞은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가 들렸다.

감고 있는 눈꺼풀이 무거웠고

새까만 세상이 펼쳐졌다.

깊은 잠에 빠져들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헤어나 올 수가 없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얼굴이

아키라의 얼굴과 겹치며 호흡이 가빠졌다.

오는 내내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던

유키코였지만 병원에 다다른 순간,

어머니의 투병 생활이 떠올라

올곧던 정신이 순식간에 무너져 버렸다.

가빠진 호흡 덕에 손바닥에 땀이 흥건했다.

복도 손잡이에 유키코의 끈적한 지문이

선명하게 남았다.


달이 깊어진 어둠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다급한 사람들의 목소리,

기계 소리,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 가

점점 요란을 떨었다.

귀에 송곳이 달린 것처럼

갖가지 소리가 날카롭게 들려왔다.


옆에서 중얼거리며 기도를 읊는

노아의 목소리조차 듣고 있기가 버겁다.

바닥이 헤진 슬리퍼를

질질 끌고 오는 거구의 남자가

유키코 앞에 멈춰 섰다.

가장 궁금한 순간,

가장 두려운 순간,

가장 알고 싶지 않은 순간이다.


“다카하시 아키라씨 보호자 되십니까?”


유키코는 넋을 놓고 그를 올려 보기만 할 뿐이다.

노아가 재빨리 일어서 그녀를 대신했다.


“네, 맞습니다.”


몇 초가 흘렀을까,

그제야 노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구의 사람은 한없이 푹 꺼진

눈을 한 유키코를 보더니,

자기 위치를 선명하게 드러냈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을 리가 없는

허무한 물음에 대답은 의미가 없다.

아무 반응이 없는 모습에

그 또한 어떤 표정도 없었다.

아마도 그들의 감정은

늘 그러할 것이라는 생각을 잠시 해 본다.

노아가 그녀의 어깨를 살포시 잡으며

일으켜 세웠다.     


“괜찮습니다! 앉아서 들으세요,

저도 앉아서 설명하겠습니다.”


거구는 다른 흰색 가운의 사람들과 같지 않게

그들을 배려하고 있었다.

유키코가 입을 열었고,

입술 가장자리는 하얗게

말라비틀어진 침이

군데군데 묻어 있었다.


“어떻게 하면 되나요?”


유키코는 다른 보호자들의 물음과는

전혀 다른 말을 꺼내고 있었다.

거구도 그땐,

조금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 네 우선,

현재 환자분 의식은 돌아온 상태입니다.”


유키코를 대신해 거구는 환자의 상태에 관해

먼저 말을 꺼냈다.

노아는 순간 두 손을 모으고

깍지를 끼고 있었다.


“보호자 분도 알고 계시겠지만,

연세가 많은 분은 관리가 필요합니다
진료 기록과

복용하고 있는 약을 살펴보니,  

꽤 오랫동안 치료를

미루셨던 것 같습니다
꾸준하게 약을 복용 했다면,

급격히 나빠지진 않으셨을 텐데 말입니다.”


유키코는, 이 거구의 남자가 하는 말이

도통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녀의 검은 눈 밑이

미세하게 떨리더니,

말을 더듬기까지 했다.


“무, 무슨, 대체 무슨 얘기를…”


거구는 알고 있었다는 듯이,

유키코를 대신해 한숨을 뱉는다.


“오늘 환자가

정신을 잃은 원인은 저혈당 쇼크입니다
또한 관리에 소홀하다면

생명에 지장이 생길 수밖에 없지요
하지만 아키라씨는

꽤 운이 좋으셨습니다.”


“또한, 이라니요?”


유키코는 쓸데없는 헛기침을 하는

거구의 의사가 맘에 들지 않았다.


“환자가 앓고 있는 증상을

알아보기 위해
병원 기록을 확인한 바로는
치매 증상에 필요한 약 처방 기록이

중단되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물론, 증상 악화로

잊었을 수도 있는 부분입니만,
아시다시피 보호자의 도움 없이는

완화가 어렵습니다.”     


유키코는 앉아 있는

의자 바닥에 손을 떨구고

작은 주먹을 쥐고 떨고 있었다.


“환자분은 세심한

보호자의 관리가 필요한 상태입니다
지금은 환자의 절대적인 안정이

필요한 때이니
퇴원은 이틀 후 하시죠

치매 진행 속도를 알아보기 위해
몇 가지 검사를 더 해 봐야 할 텐데요,
환자를 일반 병실로 옮긴 후

다시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노아가 다시 또 유키코를 대신한다.


“네 잘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네, 그럼.”


유키코는 거슬리는 소리를 내며

걷는 거구의 슬리퍼가

자꾸 신경이 쓰였는지

그의 발을 보며 뭔가를 꾹, 꾹

참아 내는 모습이다.


“후, 우…”


“유키코.”


노아가 유키코의 어깨를 감싸더니

끌어안으려 했지만,

그녀의 몸은 딱딱하게 굳어

움직이기를 거부했다.


“허 참 허무하네, 치매를 앓고 있다니…”

기가 막혔는지 연신 헛바람을 불어 내는 소리를 해댔다.

“헛 하…”

“유키, 앞으로의 아키라가 중요해요. 그것만 생각해요.”

그녀가 도리질하더니, 손짓으로 그에게 비켜 달라며 어디론가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노아는 유키코를 내버려둘 수밖에 없다. 그녀에게도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노아는 유키코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다시 눈을 질끈 감고 두 손을 모으고 중얼거리며 기도했다.

병원은 어느 곳을 가도 쾌쾌하거나, 톡 쏘거나, 하는 냄새가 났다. 이마를 잡고 걷기를 얼마나 했을까, 유키코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겉모습만 보아도 심각함을 알 수 있는 환자들이 너무도 많았다. 백색의 가운들은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알 수 없는 언어들을 말하며 소리를 질렀다. 유키코는 왔던 길을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다행히 병원 밖으로 나올 수가 있었다. 어딘지 모를 곳이라 눈치챘을 때, 곁에는 노아가 있었고, 유키코는 당연하다는 듯, 그의 어깨에 기대어 숨을 골랐다.

이상했다. 병원 밖도 마치 톡 쏘는 듯한 소독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눈을 감고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눈을 감고 있어도 태양은 눈 속 하얀 점처럼 선명하게 보였다. 눈을 감고 눈을 깜박거렸다. 점점 태양의 흰 점이 번지며 사라진다.

아키라는 자신의 병을 알고 있음에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들을, 가족들을 끔찍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그럴 리 없었다. 이건 배신과도 같다. 어쨌든 치매라는 병은 가족들을 피폐해지게 만드는 병이라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무 예고도 없이 고향 땅을 밟았고, 설마 혼자, 없어져 버릴 생각이 아니었을까, 끔찍한 장면이 계속 떠올랐다. 아키라는 홀로 그 순간을 준비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노아는 유키코의 손을 꼭 쥐고 다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아키라는 말도 안 되게 평화롭게 잠 들어 있었다. 마치 갓 태어난 아기처럼 쌔근거렸다. 유키코 또한 조급했던 마음에 안정이 파고들고 있었다. 아버지란 사람의 능력은 어디까지일까, 라는 생각을 했다. 노아는 아예 가방 속에서 성경책을 꺼내어 아키라의 머리 밭에 두고 읊조리는 중이다.

노아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유키코의 눈도 점점 현실과 동떨어질 준비를 하는 듯했다. 갑자기 아키라가 뒤척거리기 시작했고, 그 모습에 그들은 동시에 벌떡 일어났다.

“아, 아버지?”

유키코는 감기는 눈이 번쩍 뜨여 부릅뜨고 아키라를 바라보았다. 몇 번의 끙, 하는 소리를 내더니, 아키라는 다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의사 말에 의하면 쭉, 주무실 거라 했어요.”

노아의 말에 유키코가 고개를 끄덕였다. 노아는 다시 성경을 읊조리기 시작했고, 유키코는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 자리를 지켰다. 3년이라는 시간 동안 병상을 지킨 젊은 어머니의 얼굴이 아키라의 얼굴에 겹친다. 죽어가는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보지 못했던 유키코는 감기는 눈을 부릅뜨고 아키라를 노려보듯, 보았다.

천장에 검은 먼지가 가득 낀 환풍기 속에서 미지근한 바람이 유키코의 머리칼을 신경질적으로 건드렸다. 정말이지 기분 나쁜 공기였다. 덥기 시작한 날씨에 에어컨인지, 히터 바람인지 알 수 없는 미적지근한 바람이다. 몸이 점점 기울어지더니,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기 시작했다. 눈을 뜨려 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아예 의자에 몸을 웅크리고 얼굴을 감쌌다.

아키라의 손에 들고 있는 노란 카스텔라의 달큼한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얼른 집어먹고 싶었지만, 언니들의 눈치를 보느라 입속에 침이 가득 고이기 시작했다. 다음을 기약하고 노란 카스텔라를 쥔, 아키라를 기다렸지만, 아키라의 모습을 다신 볼 수가 없다. 눈치로 맛보지 못했던 카스텔라, 감은 눈의 유키코의 입꼬리가 올라가더니, 침을 꿀꺽, 삼켰다.

코하네의 눈은 빨간 거미줄을 쳐 놓은 것처럼 충혈이 되어 있었다. 새하얀 얼굴은 붉은 기로 얼룩덜룩했고, 눈가는 퉁퉁 부어 살이 찐 것처럼 보였다. 어쩌다 다른 사람과 눈이 마주칠 때면 그들은 눈병 걸린 전염병 환자를 본 것처럼 바라보았다. 아키라가 싸준 도시락을 맛있게 먹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구둣방에 발을 들인 순간, 찢어질 듯한 전화벨 소리가 왠지 두렵기까지 했다. 자신도 모르게 모른 척, 한 전화는 몇 번을 다시 울렸다. 잔뜩 화가 난 듯한 유키코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말은 아주 간단했고 이해하기 쉬워 질문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아키라가 쓰러졌어, 그리고 여긴 병원이야.”

아키라가 싸준 고기덮밥이 목구멍으로 다시 올라옴을 느낀다. 전화를 끊은 순간부터 아무것도 기억할 수가 없다. 어떻게 신칸센에 다시 오르고 이곳까지 왔는지, 정말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핏기 없는 아키라의 얼굴을 보고서도 코하네는 기차 안에서 맛있는 도시락을 먹으며 흥얼거렸고, 멀리 보이는 후지산을 보고 감탄을 하며 행복하다고 중얼거렸다. 아키라를 혼자 두고 온 것은 온전히 코하네의 잘못이었다. 순간, 덜컥 겁이 났다.

그들 앞에 얼굴을 내밀 수가 없다. 혹시나 들킬까, 유키코의 뒷모습만 따라다녔다.

유키코가 주위를 두리번거릴 땐, 쥐구멍을 찾아 코하네 또한 두리번거렸다. 문틈으로 유키코가 잠든 모습을 보고 난 후에야, 아키라의 얼굴이 보였다. 잘 보이진 않지만, 아키라의 가슴 위가 아래로, 위로 움직이고 있었다. 아주 고르고 안정적인 호흡이었다.

발을 떼 보지만, 도저히 그들 앞에 서기가 힘이 들었다. 화장실로 뛰기 시작했다. 걸음을 빠르게 옮기며 검은 물기가 가득한 바닥에 주저앉아 가슴을 세게 주먹으로 때리기 시작했다. 코하네는 입술을 깨물며 소리 내지 않고 눈물을 흘렸다. 숫자를 세며 몸을 앞뒤로 움직인다.

“둘, 넷, 여섯, 흐흐, 여덟… 스물둘, 흣.”

병실 앞으로 두 명의 사람이 빈 간이 침대를 요란한 소리를 내며 끌고 갔다. 해 질 무렵은 병원도 잠잠해지는 모양이다. 작은 소리까지 복도에 울려 퍼졌다. 단, 한 명의 흰색 옷을 입은 사람도 지나가지 않았다. 밖을 내려다보고 싶었지만, 창문은 어디에도 없다. 병실 안으로 들어설 용기는 없었지만, 유키코가 병실을 나오는 순간을 기다렸다.

코하네는 한 걸음도 다른 곳으로 옮길 수가 없었다. 가방 안의 초록색 실은 어느 순간 검지를 돌돌 말아 쥐었다. 감각도 없고, 보라색으로 변한 색깔도 보이지 않았다. 조금만 스쳐도 피가 사방으로 튈 것처럼 단단하고 통통해졌다. 말아 쥔 손가락을 살짝 구부리면 통증이 밀려왔지만 동시에 긴장을 풀어주는 쾌감도 스친다. 몇 시간동안의 무한 반복이 코하네를 안정시키는 중이다. 코하네는 왼손의 감각이 둔 해지자 오른손 감기를 시작했다. 오른손의 검지는 더 굵고 짧아 보라색이 더욱 선명했고, 통증의 쾌감은 배가 된다. 아키라에 대한 죄책감을 덜 수만 있다면 모든 손가락을 동여매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풀린 실을 다시 되감는 그녀의 손이 멈췄다.

“코하네.”

코하네는 퉁퉁 부은 얼굴을 하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대답도 하지 못하고 그저 유키코의 얼굴만 올려다보는 중이다.

“언제부터 있었던 거야? 이런, 얼굴은 또 왜 그 모양이야…”

유키코가 코하네의 얼굴을 감싸고 끌어안자 그제야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힘없이 내뱉는 코하네의 목소리는 떨림이 있었다.

“죄송해요.”

“이런 이런, 코하네.”

유키코는 누렇고 얇은 코트 덕에 마른 코하네의 몸을 보고 안타까워하지 않을 수 있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코하네가 다시 입을 떼며 얘기를 이어보려 하지만 유키코가 말을 잘랐다.

“할아버지가 아픈 줄 알면서…”

“쉬, 괜찮아 코하네, 아키라는 괜찮아.”

바닥에 떨어진 초록색 실타래를 줍더니, 코하네의 손가락 붉은 줄을 확인하곤, 인상을 찡그렸다.

초조함을 달래는 코하네의 버릇을 알고는 있었지만, 정도가 지나쳐 보인다. 당장 혼을 내줄 거야, 라고 생각은 했지만, 퉁퉁 부은 코하네의 얼굴은 아키라처럼 안정이 필요해 보인다.

“아키라는 내일 퇴원할 수 있어.”

유키코의 희미한 웃음은 억지스러웠다.

“죄송해요.”

“아니, 코하네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닌걸.”

코하네가 다시 고개를 들지 못하고 땅만 바라보았다. 아키라의 구두 소리가 들린다. 사슴처럼 긴 노아의 다리는 얼굴을 보지 않아도 그 사람임 알 수 있다.

“코하네, 들어가 봐요.”     

유키코도 코하네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가 봐.”

병실로 들어서니 그렇게 찾던 창문이 보였다. 코하네의 걸음은 조금씩 비뚤었다. 아키라를 가까이서 보고 싶었던 마음과는 다르게 두려움에 잠깐 멈칫, 한다. 아키라의 얼굴은 유키코의 괜찮다는 말과 일치했다. 푸른 빛이 돌았던 얼굴에는 붉은 기가 돌았다.

한숨이 길게 나와 끝이 없는 것처럼 계속 이어졌다. 조금 더 발을 디디고 아키라의 곁으로 다가갔다.

“할아버지.”

코하네의 목소리는 모기 날개 짓 소리보다 더 작다. 마치 처음 보았던 것처럼 뼈가 앙상한 아키라의 손등이 낯설다. 살가죽은 얇디얇아 핏줄이 불거져 나왔다. 손이라도 갖다 대면 핏줄의 미로가 끊겨버릴 것 같다. 연한 보라색 가느다란 핏줄 위를 손바닥으로 스치듯 건드려 본다. 혈액이 돌고 있다는 확신이 들 만큼 아키라의 손 등은 따뜻했다. 살포시 아키라의 손 위에 이불을 얹으며 앉는다. 시간이 좀 지나서야 코하네의 입술도 핏기가 돌았다.

“죄… 송해요 할아버지.”

한 번 더 할아버지라고 부르면 그가 일어나 왜, 왔냐고 핀잔을 줄 것 같았다. 그의 평온한 얼굴은 정말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다.

“할아버지, 일어나시면, 꼭 수염을 다듬어 드릴 게요,
 그땐 싫다고 하지 말아요”

유키코가 손수건을 내보이며 다가왔다.

“이것, 쓰러지셨을 때 손에 꽉 쥐고 있었나 봐 보자마자 알아챘지, 네가 만든 거라고.”

“으응, 네.”

유키코는 코하네에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아버지가 깨어나면 그때 전해 줄게 아마 제일 먼저 찾으실 테니까.”

“네, 유키코.”

코하네는 아이처럼 고개를 두 번씩 씩씩하게 끄덕인다. 그들의 간단한 대화는 서로의 마음을 읽고 있다는 표현이다. 굳이 가보라는 말을 꺼내지 않아도 자연스레 코하네의 발이 밖을 향했고, 유키코 또한 자연스레 손짓했다. 노아는 코하네의 걱정을 잊지 않았다.

“걱정하지 말아요, 깨어 나시면 바로 연락할게요.”

“네, 가볼게요.”

유키코는 코하네가 뒤돌아서 가는 모습을 보지 않았다. 마치 화가 났지만, 난 참고 있는 중이야, 라고 코하네에게 투정을 부리는 것 같아 여전히 마음이 편치 않았다. 물론 유키코는 화를 낼 사람이 아니란 것을 잘 알고 있다. 판단을 잘못한 코하네의 죄책감 때문일 것이다.

자신을 감싸느라, 아키라의 딸인 유키코를 제대로 위로 해 주지 못했다는 것을, 병원 밖을 나와서야 알았다. 생각해 보니, 오히려 위로를 받고 온 건 코하네다. 코하네는 아키라의 딸도 손녀도, 아닌 남이었다는 것에 덜컥 겁이 났다.

부끄러움이 온몸을 감쌌다. 코하네를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코하네는 고개를 들고 걸을 수가 없다. 작은 보폭의 걸음은 더 작은 보폭으로 엄청난 속도를 내고 있었다. 빠른 걸음을 걸을 때마다 코하네의 양쪽 검지에 통증이 걸음을 맞추며 고개를 내밀었다. 가방 속 아키라의 빈 도시락도 통통거리며 소리를 낸다.

다시 또 갑자기 딱딱한 얼음덩어리와 거센 비가 후드득 떨어졌다. 피할세 없이 순식간에 지나간 요란이다. 비옷을 대신할 코트도 무용지물이다. 길가에 납작하게 뻗어 나온 잎사귀에 구멍이 뚫렸다. 온몸이 그것들로 젖어 속옷을 지나 발목까지 물이 흘러내렸고, 눈 밑의 어둠은 그 날밤 찾아온 어둠보다 더 새까맣다.

새까만 하늘 안에서 어디에 숨었다 나왔을까, 동그란 달빛이 코하네를 비추기 시작했다. 길가에는 달빛에 어색한 작은 얼음 부스러기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잠시 꿈을 꾼 것처럼 정신없이 내리는 것들은 점점 사라진다.

걱정했던 집 안은 다행히 나무판이 비를 막아주고 있었다. 손질된 나무는 유난히 윤기로 도드라져 보인다. 방금 일어난 일인 듯, 전화기의 전선은 돌돌 말려 있는 채 자기 자리를 벗어나 있었고, 아키라의 지팡이는 마치 일부러 던져 놓은 듯, 마당에 내팽개쳐져 있었다.

눈을 감고 아키라의 다급했던 동선을 떠올렸다. 화단의 꽃들과 풀들이 우박으로 우후죽순 파헤쳐져 있었다. 코하네는 흙을 손으로 털어내고 정리를 해 보지만 소용이 없다. 달빛이 잔인하게 파헤쳐진 그들을 더욱 밝게 비춰준다. 젖은 옷을 갈아입으려 후미코의 옷장을 뒤졌다. 거의 모든 것들을 태워 버렸지만, 다행히 꼭 맞는 흰 원피스가 남아 있다. 흰옷을 입으면 깨끗하고 순결해진다고 믿었던 후미코가 가장 아끼던 옷이다. 재빨리 옷을 걸쳤다. 거짓말처럼 꼭, 맞는다.     

거뭇한 수건을 찾아 머리를 먼저 말리고, 젖은 코트를 툭툭, 털어 걸어 놓았다. 한기가 들기 시작했고, 아키라가 켜 놓고 간 고타츠가 온기를 천천히 뿜었다.

코하네는 담요로 몸을 감싸고, 아키라의 방으로 달렸다. 아키라의 미닫이문을 열자, 특유의 책 냄새와 톡 쏘는 듯한 다량의 알코올 냄새가 풍겼다. 재채기는 참았던 눈물을 아닌 척, 하며 흐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아키라의 방 안에 있는 물건들은 손가락으로 세어도 충분했다.

코하네가 어릴 적, 이곳에 몰래 들어왔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 아키라의 방 안은 지금보다 더 썰렁했다. 그저 이불, 책, 모자가 전 재산이라고 할 정도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상하리만큼 수상한 일이었지만, 코하네는 이해할 수 있다. 그렇게 아끼던 츠키노의 사진도, 츠키노의 책도, 그의 방에는 없다. 흔적은 불행을 만들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을 감정을 어린 시절 코하네는 알고 있었다. 코하네의 입가는 미소를 띠기 시작했다. 그들 아키라와 츠키노의 무언의 비밀 약속은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코하네는 신발을 벗어 던지고 한기를 피해 아예 미닫이문을 닫아 버렸다. 얼굴의 눈 코 입만 보일 정도의 뿌연 거울, 낮은 책상 위에 이제는 자리 잡을 수 있는 츠키노의 물건과 사진, 벽장 안의 이불, 아키라의 단순함에 코하네는 피식거렸다.

“후흣.”

그대로 다다미에 드러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무슨 자국인지 모를 얼룩들이 가지각색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젖은 머리는 베개를 적셨고 축축함을 불평하며 중얼거리기를 시작했을 때, 눈이 스르르 감기며 입은 조금 벌어졌다.

이른 아침의 맑은 빛이 좁은 문틈을 잘도 찾아냈다. 코하네의 광대뼈를 빛으로 건드리며 간질인다. 소리 없는 움직임에 따끈함을 느끼며 커다란 눈을 깜박였다. 꼭, 백 년의 잠을 자다 일어난 것처럼 온몸이 욱신거린다. 입안은 뜨거웠고, 움직일 때마다 살갗이 아린다. 젊은 아키라가 사진 속에서 코하네를 꾸중하는 듯 말하는 것 같다. 코하네는 담요를 걸친 채 사진 속 젊은 아키라를 가방 속에 꾸역꾸역 집어넣었다.

미닫이문을 열자마자, 습한 바람이 스치며 마른 머리카락의 비린 향을 타고 넘는다. 스친 바람에도 살갗이 아리기 시작했다. 마루 가장자리에 앉아 빛을 받고 오랫동안 기대어 늑장을 부려 보았다. 가기 싫은 발을 누군가 잡는 것 같이 무거웠다. 집 밖을 나오기까지의 계속되는 뒷걸음질에 발이 계속 꼬였다.

코하네는 작고 가느다란 입술을 앙, 다물고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깨어난 아키라를 놓칠까, 있는 힘껏 날았다. 아린 몸의 살갗들이 만류해 보았지만 소용없는 짓이다. 가방 속의 아키라가 천천히 가라고 재촉하며 꾸짖지만, 이미 코하네의 날개는 활짝, 날개를 펴고 날았다.          

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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