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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 사과

15.나카라

by 금봉




나카라(なから)-북



이른 더위는 본격적으로

치열한 여름이 오고 있음을 알려준다.

일찍이 고개를 내민 선풍기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뱅글뱅글 삐걱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사방으로 열어진 창문 사이로

뜨거운 바람이 들어와

커튼을 날리고,

나오코의 긴 머리칼도 날린다.


출처, 백만 엔 걸



하즈키가 없는 그의 공간은

어느 날은 나오코의 휴식처가 되기도

단잠을 청하는 곳이 되기도 한다.

나오코가 억지로 구겨 넣은 그림은

그 모습 그대로

가장자리가 구겨져 있었다.

아마도 하즈키는 바라보지도

만져 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즈키의 성격대로라면

구겨진 부분을 다림질한 것처럼

감쪽같이 펴 놓았을 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림 속 하즈키는

어느 한순간도 놓치기 싫은 듯,

그림 속 마나츠를 바라보고 있다.

그렇게 절실한 감정을

그 둘은 왜 서로를 밀어냈는지

나오코는 이해할 수가 없다.


나오코는 벽에 기대어 앉아

홀로 덩그러니 남은 주전자를

뚫어져라 본다.


미네코는 보름이 넘는 시간 동안

집을 비웠다.

타다요시가 죽고 난 후,

처음 있는 일이다.

나오코는 미네코의 움직임을

궁금해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한

미네코는 딸의 행동이 서운하지만,

늘 그랬듯이 티 내지 않았다.


나오코의 얼굴은

시간이 갈수록 몰라보게

달라지고 있었다.

오랜 시간이 흐른 것도 아닌데

그녀는 예쁘다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을 만큼

아름답고 고혹적이다.

굴곡진 몸매를 드러내는 게 싫어

헐렁한 티셔츠나 블라우스만을

고집하던 그녀지만

그날따라 나오코는

몸이 드러나는 티셔츠를

걸치고 있었다.

숨이 쉬어질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옷이다.


미네코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무슨 변화일까,라고

궁금했지만 물음에 답할

나오코가 아니다.

하지만 미네코의 직감은

정확할 것이다.

미네코는 꽤 마음에 든

겐토를 떠올리려 했지만,

나오코가 자기 마음과 같진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걱정이 앞섰다.

나오코는 계속 어딘가

넋이 나간 모습이다.

앞을 보는 것 같지만,

보고 있지 않았다.

자신의 머릿속에 그려진 상황에

넋을 빼고 보고 있는 게 분명했다.

보다 못한 미네코가 앙칼진 소리를 낸다.


“너, 나오코.”


나오코는 미네코를 보지도,

듣지도 못했는지,

본체만체 현관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히다! 나오코오.”


나오코는 뻣뻣한 기계처럼

천천히 고개를 미네코 쪽으로 돌렸다.


“너, 왜 모른 척이니?”


“후, 왜요?”


나오코의 대답은 왜 알은 채 해야 해?

라고 되려 묻고 있다.


“오랜만에 본 사람한테 왜?

라는 말만 하는 거야?”


미네코의 손톱 위가

다시 완벽한 붉은색으로

물들어져 있다.

미네코의 신변에도

변화가 있었던 것이

확실할 것이다.

못 본 척하는 나오코는

마치 오랫동안 미네코를 관찰한 것처럼

늘어난 얼굴 주름 수까지

알고 있는 듯했다.


“그러니까, 왜, 냐고 묻잖아요.”


미네코가 붉은 손톱으로

머리를 짚으며 방석을 가리켰다.


“앉아봐.”


“나중에 해, 약속이 있어요.”


미네코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앉아.”


출처, 아수라처럼


나오코 또한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한 미네코와

다투고 싶지 않다.

억지로 붙어 낸 엉덩이와

어깨를 으쓱하며 재촉했다.


“너, 무슨 일 있는 거야?”


미네코의 질문에 어이없는 관심이란 듯,

미네코를 빤히 쳐다보기만 할 뿐이다.


“연애라도 하는 거야?”


“하, 이 주 내내 전화 한 통 없이

흔적도 안 보이다가
지금 취조라도 하는 거야?”


“대답해 봐, 왜 그렇게 넋을 빼고 다녀?”


“내 일이에요.”


미네코의 호흡이 가빠지면서

바닥을 두리번거렸다.

화를 참을 수 없다는 표현이다.


“네 걱정… 아니,

넌 엄마한테 말하는 모양새가

왜 그러니?”


“무슨 걱정을 그런 식으로 표현해?

그냥 하던 대로 하고 살자, 네?”


“나오코”


나오코는 미네코의 말을

싹둑 잘라 버렸다.

미네코는 다 자란 큰 키의

나오코의 눈을 올려보며

단호한 모습을 보이기가

버거워 보인다.


“난 그랬던 것처럼 쭉,

스스로 잘 살 테니까
하던 대로 엄마만 생각하고 살아요, 응?

제발 안 하던 걱정하지 말고... 네?”


나오코는 벌떡 일어나

애꿎은 슬리퍼를 짓이기며

문소리가 쩍, 하는 소리가

나도록 세게 밀어붙였다.

그 소리는 바람에 의한 소리가

절대 아니다.


화내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던

미네코의 결심은 온데간데없다.

나오코를 따라 맨발로 나서더니,

뒤통수에 대고 앙칼진 소리로

끊임없이 질러 댔다.


“이만큼 살게 된 게 누구 덕인데,
이제 와서 내가 나만 생각하고

살았다는 거야?
대체 넌 누구 자식인데

늘 그런 식이지?

당장 돌아오지 못하니?”


가던 걸음을 멈추고

잠깐 뒤를 돌아본 나오코의 눈은

얼음처럼 얼어 있었다.

그 모습은 냉혹하기까지 했다.

습기를 머금고 있는

뜨거운 바닷바람에도

그 얼음은 절대 녹지 않았을 것이다.

나오코는 미네코를 흘긋

돌아보더니,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왠지, 다시는 돌아올 것 같지 않은

나오코의 모습이다.

미네코는 등줄기에

공포가 가득 담긴 소름이 돋는다.

미네코는 덜컥 겁이 났다.

아주 작은 소리로 미네코는 중얼거렸다.


“내가 먼저 살아야만 했어
그렇게 해야 너도 살 수 있었으니까,

그러다 보니…”


미네코의 오른쪽 발꿈치가 따끔하다.

마치 미네코의 잘못이라고

벌이라도 내리는 것처럼

날카로운 유리가 발바닥에 꽂혀 있다.

눈으로 확인하기 전의 따끔함과

확인 후의 통증은 굉장히 다르다.

갑자기 통증이 더해지니

화가 치밀어 오른다.



“으앗 악.


통증으로 미네코의 눈가에

아주 얕은 물이 맺혔지만

떨어지지 않고

이내 사라진다.

한쪽 다리를 절름대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점점 가까이 있는 물건이

잘 보이지 않는 터라,

유리 조각을 빼낼 수 있을지가 걱정이다.

다시 일어나 쩔뚝거리며

돋보기를 찾았다.


꼭, 필요할 땐 잡스러운

것들은 눈에 띄지 않았다.

마당에 왜 유리 조각이 있는지 의문이다.

왜 나오코가 떠올랐는지 모른다.

한동안 잠잠하던 괴이한 짓을

또 하고 다니는 건 아닌지,

이번엔 왜, 유리 조각인지,

화가 치밀어 올라 주체할 수가 없다.


한참 후에 돋보기란 놈을

코 위에 걸칠 수 있었다.

미네코는 깊게 박혀버린

유리 조각에 정신을 집중하려 하지만,

튀어나오는 욕이 미네코를

진정시키려 하지 않았다.

흥분의 아드레날린은

심장과 손을 덜덜 떨리게 했다.

손이 떨리지 않을 때까지

한참을 유리 조각만 바라봐야 했다.


“어떻게 이런 짓을…

나를 저주라도 하는 건가…”


미네코는 나오코의 짓이

아니라고 해도

나오코의 짓이라 믿을 판이다.

뻣뻣한 몸을 구부정하게 구부리더니,

발바닥을 확인한다.

다행히 유리 조각은

확연하게 존재를 드러냈다.

호흡을 가다듬고,

그것을 빼내려 하지만,

뻣뻣한 몸으로 오랫동안

구부정한 자세로 있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다시 한번의 고통스러운

시도 끝에 저주스러운 것을

빼낼 수가 있었다.


통증쯤, 별것 아니라고 산 세월이 떠올랐다.

지금 느끼는 통증에

눈물이 찔끔거린 것은,

잃어버린 세월 탓일 것이다.

이럴 땐 무심하게 미네코를

살뜰히 챙겨주던 그가,

타다요시가 미친 듯이 그리웠다.

적어도 타다요시가

나오코의 아빠 자리에 있을 때만큼은

딸의 재잘거리는 소리는 들었을 때였다.


빼낸 유리 조각 자리엔

선명한 붉은색이 맺혀 있다.

벌어진 틈 사이로 베어 든

붉은색은 닦아지지 않고

끈적하게 고여 있었다.

붉은색은 계속 그 자리에

머물고 싶은 모양이다.


미네코의 포기는 언제나 빠르다.

절뚝거리며 이층 계단을 향해 걸었다.

당연히 나오코의 방은 잠겨 있었고,

방을 여는 방법 또한

당연히 알고 있다.

서랍장을 뒤지며 숨겨 놓았던

열쇠 꾸러미들을 찾았다.

몇 번을 해 보았던 일이지만,

그 많은 꾸러미 중에서

딸의 방 열쇠를 찾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타다요시가 당부했던 말이 생각났다.


“여보, 찾기 힘들지 않소,

따로 보관하든,

이름을 적어 놓든 해요.”


매번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표시해 두어야겠다고 마음먹지만,

늘 잊어버리는 상황이 된다.

엉거주춤 서 있는 자세에

한쪽 발바닥에만 힘이

잔뜩 쥐어진다.

그러다, 헛디디기라도 하면

붉은색 틈은 여지없이

욱신거렸다.


“짤깍.”


기분 좋은 소리가 귀를 간질인다.

손바닥은 온통 쇠,

냄새로 가득했다.

녹이 슨 그 많은 열쇠는

도통 어떤 것이 맞을까,

생각하기도 벅찼다.

열쇠 꾸러미를 다시

서랍장 깊숙한 곳에 숨긴다.

열쇠에 이름을 적어 놓는 일을

미네코는 다시 잊어버린 게 뻔하다.


미네코는 나오코의 방 안을

빠르게 두리번거렸다.

하도 해괴한 것 투성이라,

어떤 것부터 손 봐야 할지 고민된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창밖을 확인하고

비밀스러운 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책상 서랍 안에는

여러 개의 방울이 모여 있었다.

아마도 고양이 목에나

어울릴 법한 것들인데,

보이지도 않은 고양이를 생각하니

의아하고 공포스러웠다.


오래전 죽은 검은 고양이가 떠오른다.

마치 어디선가 자신을 보고

있을 것 같은 느낌에

소름이 목덜미를 타고

귀 뒤까지 파고들었다.

얼른 서랍을 탁, 소리가 나도록

닫아 버리고 다음을 확인한다.

미네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보석이라도 찾은 것처럼,

검은 물건을 들고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마치 한 권의 책을 들고 있는 기분이다.

빠르게 휘리릭, 넘겨보니

잊고 있었던 나오코의

그림 솜씨를 볼 수 있었다.

미네코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나오코를 훑기 시작한다.


나오코의 첫 페이지는

단어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이야기의 처음과 끝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저 단어를 배열해 놓고

자신만의 암호로 풀어나가는 세상이다.


『엄마 뱃속, 어둠, 삐이익,

고함, 밧줄, 살인, 복수, 죽음,

카미, 키 큰 나무, 연필,

매니큐어, 냄새,

그 남자, 또 그 남자, 그리고 그.…』


정확히 알 수 있었던 건,

나오코의 세상은

깜깜한 동굴 속이란 것,

계속 읽어 내려갈 수가 없었다.

팍, 소리를 내며 그것을 덮어 버렸다.


“휴우…”


나오코가 만들어 놓은

불단 위는 어김없이

타든 향의 재가 뿌려져

먼지처럼 자리를 차지했다.

나오코는 아직도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함이 분명했다.

한참을 벽에 기대어 눈만 깜박인다.

다다미 밑으로 무언가

툭, 튀어나와 있었다.

손으로 더듬거려 보니 분명히 뭔가 있다.

다다미 밑에 숨겨져 있다는 것은,

비밀스럽다, 는 것이다.


빠르게 꺼내 들어 보니

흔해 빠진 스케치북이다.

미네코의 심장이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첫 장을 넘기고,

입이 딱 벌어진다.

나오코는 어린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었고,

타다요시의 집은 그녀를 더 작아

보이게 했다.

눈을 커다랗게 뜨고

잘 보이지 않는 희미한

무언가를 들여 보았다.

타다요시의 집을 들어오기 전

작은 골목에서

길쭉한 누군가가 나오코를 보고 있다.

흠칫 놀라 어깨를 위로 들썩인다.

마치 그림이 아닌

실체를 보고 있는 느낌이다.

나오코의 그림 솜씨는

정말 대단했다.


출처,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이건…”


처음엔 타다요시라고 생각했다.

미네코는 벌떡 일어나

붉은 틈새의 통증도 잊은 채

빠르게 일 층으로 향했다.

눈을 굴리며 빠르게 물색했지만,

또다시 돋보기가 보이지 않았다.

쉽게 얼굴이 붉어지며

영락없는 화가 치밀어 오른다.

하,라고 숨을 뱉자,

미네코의 가슴 위에 뭔가

꼼지락거리는 게, 보인다.

밉상을 한 돋보기가

얌전히 목에 걸려있었다.


“젠장.”


발바닥이 다시 화끈거렸다.

미네코는 다시 손가락으로

길쭉한 그림 속 그를 가리키며

가까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이, 건, 하즈키…?”


의아했다.

처음 타다요시의 집에 왔을 때

자기 모습과 타다요시는 없고,

그 둘만 덩그러니 있을 뿐이다.

온통 불길한 생각들이

미네코를 뒤덮었다.

연신 고개를 뒤흔들며

빳빳한 종이를 넘긴다.

나오코가 바라보는 시각의 피사체는

늘 대상이 하즈키다.

그 피사체 또한 그림을 그리는

나오코를 뚜렷이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니 불길한 일들이

일어날 것만 같다.


나무, 바다, 바위, 새, 자전거가

주인공이 되다가,

빛나는 하즈키의 모습에

주인공은 조연으로 바뀐다.

그림 속 그의 모습은

마치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사람은 이글거리는 태양을

선글라스 없이 똑바로

노려볼 수가 없다.

그림 속의 하즈키는

빛나는 갈색 눈으로

태양을 또렷하게 노려 보고 있다.

빛이 비치는 눈동자는

갈색, 주황색, 회색이

각도에 따라 달라 보인다.

나오코의 섬세한 얼굴 표현은

어떠한 부분도 찡그림이 없다.


그 모습을 오랫동안 훑어보니

나오코의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미네코는 감정이 복받치기 시작했고,

오랫동안 흘리지 못한

굵은 눈물이 툭, 하고 떨어졌다.

지금 느끼는 감정은 놀라움,

노여움도 아닌 가여움이었다.


“대체…”


마지막 장의 그림은

미완성의 그림이다.

사과를 반으로 쪼개어

놓은 듯한 모습이기도,

씨앗의 모습이기도 한,

물컹한 느낌이 드는,

만져 보고 싶은

충동이 이는 그림이었다.

그림 속, 물방울이

그녀의 머리 위를

방울방울 날아들었다.





울리는 전화 소리 속에

나오코의 목소리가 있을 리 없다.

겐토는 전화기를 집어 든 순간

나오코의 목소리가 들려

숨이 멎을 뻔했다.


“여보세요?"


“나오코, 야…”


“…에? 누구세요?”


겐토는 생각하지 못한 말이

밖으로 튀어나왔다.


“나 오 코,라고 했어.”


누구세요, 라니,

당황스러움에 몇 번을

곱씹어 생각해 보아도

이렇게 멍청한 대답은

없을 것이다.

호흡을 조절한들,

두근대는 심장은

자제력을 잃고 있다.

겐토는 기차에 오르고 난 후에도

심장의 방망이질은 계속되었다.

긴장이 수그러질 때를 기다리며

쉬지 않고 연거푸

맥주를 들이켰다.

하지만 캔의 수가 늘어날수록

정신은 더욱 말똥말똥 해진다.

나오코만 생각하면

온몸의 세포와 뇌는

자제력을 잃어버리기 일쑤다.

생각만으로도 손바닥에

땀이 흥건하게 젖어

미끄러지는 캔의 밑바닥을

움켜쥘 수밖에 없다.

지나치는 산은 굳건하고

남자답기까지 해 보인다.

겐토는 그마저 부러워

내내 한숨이 바닥을 치고 있었다.


역 안의 금시계 앞은

늘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북적댔다.

남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쭈그리고 앉아 있는

나오코의 모습을

단 한 사람도 그냥 지나치질 않았다.

검은 머리칼이

회색빛 시멘트 바닥에

닿을 듯 말 듯한 모습은

지나가는 사람들마저

긴장하게 만든다.

나오코가 고개라도 잠깐

들을 세면, 시선만 닿았던

사람들은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훑고 멈칫하며 돌아선다.


출처, 백만 엔 걸



긴 머리칼이 발목에 맞닿아

나오코를 간질였다.

겐토는 말없이 나오코를 바라보았다.

나오코가 금시계를 바라보며

입술을 내밀었다.

겐토는 자연스럽게 나오코와

눈이 마주치길 원했지만,

나오코는 겐토를 보지 않았다.

콩닥거리는 심장이 잠잠해지길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럴수록 애꿎은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었다.


약속해 놓고도,

머뭇거리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갑자기 나오코가 겐토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놓치고 말았다.

그제야 그 자리를 탐색했다.

연신 고개를 돌리며

눈은 두리번거린다.


누군가 겐토 셔츠의

뒷자락을 잡아당겼다.

빠르게 고개를 휙, 하고 돌렸다.

걸음이 맞지 않아

나오코와 몸이 밀착되었다.

겐토는 이때를 기억하며 나오코에게

그때 난 잠시 숨이 멎었고,

죽었었어,라고 말하곤 했다.


“겐토.”


나오코의 봉긋한 가슴을

느낀 그가 뒷걸음질 쳤다.


“어엇.”


나오코는 눈을 치켜뜨며

장난꾸러기 같은 표정을 짓는다.


출처, 허니와 클로버



“후훗, 또? 늘 놀라는 바보.”


“아, 아니야, 미안.”


나오코가 어깨를 으쓱했다.


“뭐가? 미안?”


“아니, 난… 어, 아니야.”


“날 보고도 그냥 가는 거야?”


겐토가 침을 꼴깍거리기 시작했다.


“아, 그랬나.”


나오코는 말을 따라 하며 빈정거렸다.


“아, 그랬나…”


“나오코.”


“나오코오…”


나오코의 장난기에

거짓말처럼 콩닥거림이

안정을 찾고 있었다.

겐토는 연신 기분 좋게

머리를 긁적였다.

겐토가 말했다.


“많이, 기다렸어?”


“아니.”


하필이면 붙는 옷을 입은

나오코의 몸매가 유난히

도드라져 보여

겐토의 눈은 갈피를 못 잡고

방황하고 있었다.

원하지 않아도 겐토의 눈은

자꾸만 나오코를 훑게 된다.

나오코보다 앞서 걷는

신사답지 못한 겐토의

빠른 걸음은

흰 티셔츠를 보지 않기 위함일 것이다.


“가자, 나오코.”


나오코는 겐토를 뒤따르며

뭐가 그리 우스운지

내내 이죽거리고 있었다.

장난기가 발동한 그녀는

먼저 가는 겐토를 뒤로하며

더욱 빠른 걸음을 했다.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아이스크림을 숟가락으로

파먹었을 때 보이는

움푹 팬 자국,

가느다란 허리는 그 자국과 같다.

자국은 겐토의 시야를 다시 막았다.

긴 다리는 동그란 엉덩이를

안정적으로 받쳐주고 있었다.

겐토의 꼴깍거리는 소리가

천둥과도 같다.


“후아.”


갑자기 떠오른 얼룩진 나오코의

오른팔을 자세히 확인한다.

두꺼운 딱지들이 떼어져 나갔는지,

상처 위는 새살이 돋아 얼룩져 있다.

손 등의 거칠어 보이는 표면과

거뭇함은 영영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아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 모습을 보자

나오코의 움푹 팬 아이스크림에

긴장한 자신이 부끄럽다.

앞서가는 나오코의 손을

잡아끌어 감싸 안고 싶었다.


상상만으로도 그녀의 까칠한 표정이

선해 웃음이 나온다.

검은 머리칼은 정확히

갈비뼈 끝부분에 머물러 찰랑거린다.

어찌나 새까맣던지,

나오코의 흰 티셔츠에

물이 들 것만 같다.

밑창이 낮은 운동화는

나오코의 엉덩이 선을

좌우로 브이를 만들며

흔들거리며 걷게 했다.

덕분에 겐토의 걸음은

점점 더 느려 터진다.



출처 심야식당



조금 이른 시간,

평일의 이츠키는 한산하다.

오랜만에 겐토의 방문은

영광이라며 말을 늘어놓는

주인장 이츠키는

새로 설치한 문에 대해

자랑을 늘어놓았다.

이츠키는 일부러 문을 잡아당기며

세게 닫는 시늉까지 해 보였다.


“이제 세게 닫고 싶어도

그리되지 않아,

닫힐 때도 아주 조용해.”


나오코가 한마디 거들었다.


“에어컨이나 달지…”


혼잣말이라고 하기엔

멀리 떨어져 앉아 있는

사람들도 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는 모양새다.

빈정거리는 나오코의 태도에

짜증이 났지만, 모른 척하며

계속 문에 관해 떠들어댔다.

이츠키에는 선풍기 세 대가 딱딱,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긴 했지만,

그 바람은 끈적한 물엿을

뿜어 대는 것 같았다.

나오코의 머리칼이

선풍기 바람에

사정없이 날리는 중이다.

머리칼이 가끔 얼굴을 때려내는

바람에 눈살을 찌푸리게 된다.


“하아.”


나오코는 그날 이후,

오른손을 잘 쓰지 않았다.

마치 하즈키처럼 원래

왼손잡이인 것처럼

착각을 만들었다.

오래된 상처인 척하는 손은

티슈로 쇄 골에

흘러내리는 땀을 닦았다.

겐토는 나오코와 약속한

금기어로 정해 놓은 얘기를

자신도 모르게 툭, 뱉는다.


“괜찮아? 손.”


나오코는 흘기듯 그를 바라보고

남은 맥주를 모두 들이켰다.


“맥주 더.”


이츠키는 언제나 말 짧은

나오코의 주문은

들어주고 싶지 않다.

나오코가 다시 말을 이었다.


“좋았어?”


겐토의 눈이 둥그레진다.


“으응?”


“좋았냐고.”


“무슨 소리야?”


이츠키가 얼음 잔에

거품을 가득 품은

맥주를 밀었다.

급히 들이마신 맥주가

입가를 타고 흘러내린다.

나오코를 만나면 뭔가,

해주고 싶은 충동이 자꾸만 인다.

나오코는 흘러내린 맥주를

핥으며 키득거렸다.


“내 엉덩이.”


겐토는 입안에 가득 고인 맥주를

뿜어낼 뻔하다 어렵사리 꿀꺽한다.


“아니, 겐토 오늘은

왜 그렇게 조용하신가?”


이츠키는 나오코 앞에만 서면

멍청해 보이는 그를 타박했다.

나오코는 결국 겐토의 얼굴을

붉게 만들 작정이다.

나오코가 말했다.


“엉덩이 얘길 했거든요.”


이츠키도 놀라 눈이 둥그레진다.


“엉덩이?”


나오코는 갑자기 바에서

일어나더니 자기의 엉덩이를

가리키며 키득거렸다.


“흘긋 대지 말고 정면으로 보라고

말하는 중이에요.”


“나오코, 아 정말…”


이미 겐토의 얼굴은

사과처럼 붉은색을 하곤

화장실로 향했다.

주인장도 덩달아 얼굴을 붉히더니

큰 소리로 웃음소리를 내며

괜찮은 척, 나오코의 엉덩이는

절대 매력적이지 않은 척, 을

떨며 비아냥거렸다.


“아직도 이런 말에

얼굴이 붉어지는 꼴이라니…”


나오코는 말과 달리

이츠키의 붉어진 얼굴을

얘기하고 싶었지만,

이츠키의 눈을 마주치고

웃기만 한다.


몸속에 파고든 알코올은

더위를 더욱 재촉했다.

나오코는 정신없이 날리는

머리칼을 잡고,

질끈 묶어 틀어 올린다.

나오코의 하얀 목뒤로

솜털이 보였다.

등 쪽으로 말려있는 모습이

상상되어 기분 좋은 호르몬이 돋았다.

겐토의 얼굴은 아직도

붉은 기가 가라앉지 않았다.


“술을 마셔도 티 나지 않은 사람이,

오늘은 얼굴이 새빨갛군, 그래.”


“그만해, 이츠키.”


겐토는 눈을 아래위로

희번덕거리며 진심 어린 경고를 했다.


“맥주 나 더 줘요.”


“알았어 알았다고.”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자

사람들이 밀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겐토는 북적여도

훼방꾼 이츠키가 사라져서

다행이라며 중얼거렸다.

계속 말이 없던 나오코가 입을 뗐다.


“왜?라고, 왜 묻지 않아?”


“뭐가?”


“저 바보 같은 대답.”


나오코는 잘 볶아진

죽순을 우적거리며 씹었다.


“전화한 이유가 궁금하지 않아?”


“말할 때를 기다리는 거지.”


“쳇, 바보.”


나오코는 겐토가 모자라 보인다는 듯,

한심함과 진지함을 섞은 웃음을 지었다.


“그냥, 기다리는 거야.”


“왜? 그냥 기다려?”


겐토가 개미만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렇게 시간이 가니까, 좋아.”


“으응?”


“아, 아니야.”


“기다리는 것, 정말 잘하네?”


“글쎄, 난 잘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나오코의 웃음소리가 커졌다.


“크크큭, 아… 그래?”


“쳇, 웃을 일… 이야?

너 너무 크게 웃는다.”


나오코가 눈을 치켜뜨며 말한다.


“겐토, 왜 나 같은 애를 좋아해?”


나오코의 나 같은 애,라는 말에

겐토의 미간이 좁아 들었다.


“흠, 같은 애가 아니라, 너니까.”


“날 꼭,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네?”


“뭐, 모르진 않지.”


나오코의 왼손 집게손가락은

연신 잔을 들어 올렸다.


“아직도 날 기다려?”


“이렇게 나왔잖아?”


“근데, 만약 후회하면?”


나오코가 잔을 탁, 소리를 내며 내려놓는다.


“후회한다 해도,

내 선택은 다르지 않아,
다시 필름을 돌려놔도 난,

널 볼 게 분명하니까.”


나오코는 겐토의 눈을 자세히

들여 보았다.

나오코의 관자놀이에

땀이 몽글몽글 맺혀 있었다.


“왜?”


출처, 오버 더 펜스



나오코는 흐르는 자신의 땀을

미뤄두고, 겐토를 응시하며

안쓰럽다는 듯,

겐토의 볼을 쓸었다.

당황스러워 뒤로 움찔하는 모양을 하곤

나오코의 긴 손가락의

감각을 받아들인다.

손톱이 훑고 지나간 자리가

간질거렸다.


“겐토의 마음은

내 마음과 같아서,

겐토가 안쓰러워.”


겐토는 하즈키를 떠올리다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 심장은 좀 특별해.”


나오코의 회색빛 손을 잡고

겐토의 콩닥거리는 가슴에 갖다 댄다.

나오코가 모른 척, 떨었다.


“쿵쿵 쿵쿵."


멋진 말을 늘어놨다고

생각했던 겐토의 얼굴이

다시 발개졌다.

나오코의 웃음소리는

쓸쓸했고 음울하다.

그나마 겐토의 웃음소리가

섞여 밝아 지기를 기다려 본다.


어느덧, 저녁 손님을 맞이하는

새로운 문은 연신 밀리며

가지각색의 발들에 의해

밟히고 있었다. 주

인장의 댕그렁, 소리가 날 때마다

새로 설치한 문에 눈이 박혀,

손님들의 주문에 한 박자씩,

늦은 대답을 했다.

그런 이츠키의 눈치를 알고,

장난기가 발동한 나오코는

몇 번이고 드나들며

댕그렁 소리를 냈다.

이츠키가 겐토에게 늘어놓는

불평이 저 밖까지 들릴 게 분명하다.


나오코는 이츠키를 정직하고

한 사람밖에 모르는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츠키의

그 상대가 마나츠기에

늘 그녀 편에 서 있는

이츠키를 못살게 굴고 싶은

심술이 툭툭 튀어나왔다.

그 표현은 당신을 싫어하지 않아요,

라는 감정이지만

이츠키는 그런 나오코를

맘에 들어하지 않았다.

이츠키는 나오코의 장난을

못 들은 척, 하지만

그럴수록 나오코의 행동은

더욱 거칠어진다.

겐토가 그만하라며 나오코의

을 잡아끌지만 소용없다.

이번엔 정말 발을 밖으로 딛으며 걸었다.


“놔.”


팔을 뿌리치며 이츠키에게

혀를 내보이며 도망치듯,

앞장서서 걸었다.

이츠키에게 혀를 보이며

이죽거렸다.


“메에에에롱.”


뒤집개를 들고 있는 이츠키가

나오코의 뒷모습을 노려보며

얼른 가라며 채근한다.

겐토가 서두르며 말했다.


“이츠키, 미안 우리 가요.”


나오코의 걸음걸이는 균형을 잃고,

길쭉한 팔과 다리가

흔들흔들 춤을 추고 있었다.

중심을 잡아 주는

버팀목이 되어 주고 싶지만,

그럴 때마다 그녀는 버럭, 화를 냈다.


“놓으라니까?”


오뚝이처럼 기울어질 때마다

겐토의 입에서 어떡하지,

엇, 아쿠, 라는 작은

신음이 들린다.


나오코는 나이 많은

나무 앞에만 서면 조용해진다.

어릴 적부터, 그 나무를 신봉하듯,

끌어안고 있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키가 커진 나오코지만,

역시나 나이 많은 나무를

올려볼 수밖에 없다.

겐토가 그녀의 옆자리를

비워 둔 채 떨어져 앉는다.


“겐토.”


“으응.”


“내게 필요한 사람들,

그 사람들은 모두 날 멀리 해.”


바다에서 밀려오는 바람이

초록색 풀을 타고 넘실거렸다.

녹색의 진한 향기가

나오코를 위로해주길 바랐다.


“미네코는 자주 그런 얘길 했어,
내가 갓난아기일 때,

나는 누군가에게 안기기라도 하면
고개를 파묻고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데,
그렇게 떨어질 땐

엄마를 옆에 두고도

위로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는지,
마치 미네코가

투명 인간이 된 것처럼, 난…
밤새도록 울었다는 거야…

뭐, 나라도 지긋지긋했을 거야
미네코는 아빠의 사랑을 받는

그 어떤 누구도 미워했어,
물론 나도 제외는 아니지,

어린 나는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고
늘 유리가 깨지는

소리를 들어야만 했어,
난 그냥 진짜 같은 엄마가

필요했던 것뿐이었는데 말이야
그 와중에 착한 아빤

엄마가 아파서 그런 거라고 설명하다니…
이해해 보려 하던 중에

그나마 곁을 지키던 아빠가
죽어 버린 거야 나를 두고… 말이야.”


나이 많은 나무의 잎사귀가

앞뒤로 팔랑거리며

나오코에게 뒤늦은 인사를 했다.


“아빠가 죽었을 때

미네코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어,

아니 난 알 수가 없었어,
미네코의 슬픔은 대체 어느 곳을 보면

느낄 수 있을까, 하고
장례식 내내 그녀를 관찰했어,
미네코가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정신을 잃는 모습을 너무 보고 싶었지,
끊임없이 상상했어,

아빠의 죽음으로

미네코가 고통스럽게 쓰러지는 것을…
그런데 미네코는 미소까지 보이며

흰쌀밥을 뚝딱 비워냈지,
흣, 난 복수하기로 결심했어,

아빠가 죽어 가고 있을 때,
미네코는 곁을 지키고 있었으니까,

죽게 내버려 둔 것이 분명했거든…”


겐토가 놀라 나오코를 바라보았다.


“나오코… 그건.”


“아니, 아니라 해도 아니야

난 끊임없이 기도했지,

죽어 버리라고,
공기처럼 사라져 버리라고.”


나오코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생각해 봤어,

내가 왜 지금도 불행한지…
어쩌면 벌을 받는 거겠지,

하지만 후회하지 않아, 지금도.”


나오코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을

모두 이해하긴 힘들었지만,

두려워하고 있다는 건 분명했다.

또한 자신의 깊숙한 비밀을

털었다는 것이 고마웠다.

겐토가 나오코 앞에 쭈그리고 앉아

흐르는 땀과 다르게

떨고 있는 그녀를 올려보았다.

이제껏 알고 있었던 삐죽삐죽한

나오코가 아니었다.

품에 안으면 그녀 말처럼

공기처럼 사라져 버릴 것만 같다.


“나오코.”


겐토가 손을 내밀더니

손바닥을 펴 보인다.


“자, 잡아봐.”


나오코의 충혈된 눈이 눈물을

뚝, 하고 떨어뜨렸다.

늘 자신만만한 나오코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는

얇은 유리 조각 같았다.


겐토는 쭈뼛거리던

나오코의 손을 거세게 낚아채 잡으며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겐토는 나오코의 한쪽 다리가

들릴 만큼 단단하게 끌어안았다.

공기가 되어 사라져도 잡을 수 있을

정도의 단단함이다.

어떤 부정도 없이 이끌려

겐토의 품 안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

나오코의 훌쩍임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출처, 오버 더 펜스



“내가 받는 이 벌은

곁에 있는 사람도 전염시킬 거야.”


“아니, 내가 널 전염시킬게.”


나오코가 아니라는 말 대신

고개를 흔들었다.

겐토가 긍정했다.


“같아질 수 있어.”


겐토는 나오코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나오코는 놓쳐 버린 비스킷을

다시 손에 쥔 아이처럼

맘 편히 그에게 몸을 맡기고

기대어 걸었다.

겐토의 어깨는 단단한 나무 같았고

커다란 손바닥은 공기가

새어 나가지 않게

나오코의 팔을 가득

움켜쥐고 있었다.


“겐토 집으로 가.”


겐토를 보진 않았지만,

겐토는 고개를 젓고 있다.

몇 번을 흔들어 댔다.

나오코가 힘이 단단히 들어간

목소리로 같은 말을 다시 반복했다.


“겐토 집으로 가.”


겐토의 집에 발을 들이자마자

나오코의 온기가 훅, 날아들었다.

땀으로 젖은 나오코의 목덜미에

손이 닿자, 뽀드득, 소리가

날 것만 같았다.

나오코의 몸이 닿은 후부터

겐토는 기억나지 않는다.

겐토는 어떤 소리에도

방해받기 싫다는 듯

귀를 틀어막으며

나오코에게 파고들었다.






하즈키의 눈에 보이는 세상은

필름을 빠르게 감아 놓은 것처럼 돌아갔다.

다른 곳에 눈을 갖다 두어도

마찬가지로 빠르게 감기는 모양새다.

심지어 파도마저 빠르게

찰-싹이 아닌 찰싹댄다.

짧은 시간에 이루지 못한

일에 대한 허탈감을 품으며

내일을 다짐하는 평범한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 홀로 이방인처럼 놓여 있다.


강렬하게 내리쬐는 태양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들이

뱅뱅 돌고 있었다.

겨우 몸을 이끌고 정수리의

불을 끄기 위해 수도꼭지를

있는 힘껏 돌렸다.

한참 물을 받아 내고 숨을 고른다.

차가운 얼음을 정신없이

씹은 것처럼 정수리에

쨍, 한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들자마자 온몸으로

물이 흘러 화장실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런, 아니 젊은이,

공중화장실에서

머리를 감으면 어떡하나?”


화장실 청소 중이던 노인이

금방이라도 걸레 자루를

그에게 들이밀 기색이었다.

하즈키는 말없이

그대로 손만 들어 보이며

양해를 구해 보지만,

노인의 혀를 끌끌 차는 소리가

뒤통수에 메아리쳤다.


“에흐, 쯧쯧.”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다행히 해가 기울고 있었다.

항구 앞에 놓인 의자에서

그대로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젖은 머리가 뜨거운 공기에

다시 불이 나기 시작할 무렵,

화들짝 놀라 눈이

저절로 떠졌다.

회색 비둘기가

하즈키의 새까만 신발을 쪼며

맛을 느끼지 못했는지

살찐 엉덩이를 뒤뚱거리며

달아나 버린다.


남아 있던 미지근한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잘못 없는 생수통을 찌그러뜨리더니,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비둘기에게 집어던졌다.

비둘기는 놀라지도 않고

다시 생수통을 쪼아 댄다.

살아남기 위한 여러 경험이

비둘기를 강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비둘기는 하즈키를 비웃는다.


“이것 즘이야.”


하즈키는 어렵게

정규직 직장을 얻었지만,

피폐해진 마음의 병이

자신의 길을 망쳐 놓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발밑을 바라보지만,

그땐 이미 늦은 후다.

온통 걷는 걸음마다

알고도 넘어지기가 일쑤다.

벗어나려는 발버둥은

두려움과 맞닥뜨릴 때 멈춰버렸다.


마나츠와의 연애 시절,

보내온 엽서를 보다

눈에 들어온 그림이

하즈키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잔잔하고 고요한 망망대해,

깊은 바닷속 위는 배 한 척뿐,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닷속

그 위를 걷고 있다는 상상은

온몸의 세포를 깨웠다.

벌레들이 기어가는 것처럼 간질거렸다.

어쩌다 폭풍이 몰아칠 때면

목숨을 걸고 그들과 마주해야 할 것이다.

하즈키의 입속에

자신도 모르는 두려움에

환희를 느끼다 만 미지근한 땀이 고였다.


며칠 동안 전화를 붙잡고

얼굴 없는 그들과 대화를 나눴다.

그들은 단 한 사람도

얼굴을 마주하고 상담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또한 하나 같이 그 말을 잊지 않았다.


“아무나 배를 타는 게 아니에요,

바다를 우습게 보면 안 되죠.”


하즈키가 말했다.


“그래서 이 일을 원합니다.”


하즈키의 대답은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대화가 아니었다.

하즈키를 받아 주는 곳은

어떤 곳도 없다.


낮게 비둘기가 날아와

신발을 다시 쪼아 볼까 말까를 고민한다.

그 모습은 자신의 멍청한 모습과도

매우 흡사하다.

그는 갑자기 다리를 들어

비둘기를 밟을 것 같은

시늉을 했다.

생사 경험이 많은 비둘기도

경기하며 푸드덕 날았다.

멍청한 비둘기의 살찐 엉덩이 덕에

멀리 달아나지도 못하고

바닥으로 치닫는 한심한 꼴, 이다.


하늘이 유난히 파란 날에는

철판으로 된 계단의 녹슨 모습이

도드라져 보인다.

녹이 슬어 금방이라도 절단될 것처럼

금이 갔고,

녹색 페인트는 볼썽사납게

허물을 벗어 내고 있다.

타다요시는 꼭, 일 년에 한 번

페인트가 잘 마르는 건조한 계절에

계단을 보수하곤 했다.

그가 사라진 시간을

잘도 알려주는 것 같아

입 안으로 쓴 물이 올라왔다.

꽤 오랫동안 비운 방 안의 창문은

모두 열려 있었고,

마네키 네코는 바닥에 떨어져 있다.

네 개의 덩이가 되어

웃는 얼굴은

매서운 표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하즈키는 자신이 창문을 열고 갔는지,

생각해 보지만,

마땅히 끼워 맞춰 볼 기억이 없다.

하다못해 나오코가 그려준 그림까지

형체도 없이 조각이 나 있었다.

엄마와 타다요시의 사진은 왜 멀쩡할까,

싶어 형체도 없는 무언가를 향해

조소 섞인 웃음을 지었다.


한낮의 졸음을 만끽하던

미네코의 귀가 이층의 쿵쾅 소리에

놀라 구부정한 자세를

바로잡는다.

눈을 최대한 치켜뜨며

커다래진 귀를 올리며

소리에 기울여 본다.

나오코의 방 쪽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라는 확신이 들자,

도둑질을 들키지 않아 다행이란 듯,

숨을 크게 내쉬었다.


“췌… 후.”


꽤 오랫동안 주방에서

탁탁거리는 소리와

무언가를 열심히 만드는 소리가

집 안이 꽉 찬 것처럼 느끼게 했지만,

잠시의 환영이었을 뿐,

그저 독한 향수 냄새와

미네코 특유의 톡 쏘는 듯한

화장수의 냄새가 온 집안을

가득 메웠다.


오랜 세월, 미각을 자극하던

장국이 베인 냄새조차

사라진 지 오래다.


마네키 네코의 조각이

달각거리며 부딪히는 소리가

미네코의 신경을 날카롭게 만들었다.

쫑긋 세운 자신의 귀는 생각하지 않고,

하즈키를 먼저 원망하고 있었다.


미네코는 엄마로서,

꼭 알아야만 했다.

나오코의 요란하고 음울한,

그리고 빛나는 주인공이

오직 한 명인 그림의 이유를

찾아야만 했다.

굳이 나오코가 입 밖으로

뱉지 않아도 주인공에 대한

애달픈 마음을 알 수 있는 그림이다.

미네코는 급한 마음에

하즈키의 방으로 달려가

뒤적이기 시작했고,

처음 눈에 들어온 유리 밑의

그림은 미네코가 흥분할 만한

이유로 충분했다.


유리판에서 꺼내 든 그림을

발기발기 찢기 시작했다.

방 안에서 풍기는

진한 나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온 창문을 열어젖히다

마네키 네코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조각이 났다.

떨어지는 순간을 봤음에도

소스라치게 놀라 뒷걸음질 쳤다.

발바닥의 상처가 티를 내며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타다요시 옆의 그녀가

미네코를 보고 비웃었다.

빠르게 액자를 들어 올리다

숨을 고르며 타다요시 옆에

다시 고스란히 올려놓았다.


“하… 맙소사,

당신… 보고 있어요

도와줘요..."


모든 것이 타다요시가 사라져 버린

이유라는 듯,
눈 속은 헤아릴 수 없는

양의 원망이 가득했다.

망연자실, 다다미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생각을 다시 곱씹기 시작했다.


하즈키 방의 그림은

나오코가 그려준 그림이 분명했고,

그의 방 어디에도

나오코에 대한 흔적은 없다.

나오코처럼 굵은 공책에

그를 기록하는 것 따위의

물건도 없었으며,

물론 미네코의 추측이지만,

추억을 탐하는 사진조차 없었다.

오히려 마나츠와의 추억 조각뿐,

주인공에 대한 나오코의 마음은

온전히 나오코 혼자만의 것이었다.

미네코는 나오코 혼자만의 것임을

다시 한번 확신했다.


찾아볼 수 없는 흔적과

딸을 존재로 생각하지 않는

하즈키의 마음에 약이 올랐다가,

고개를 저으며 다행이라는 말을

수십 번 반복하며 중얼거렸다.

며칠 동안 집을 비운 하즈키를

오매불망 기다렸지만,

답답한 건,

딱히 꺼낼 말이 없다는 것이다.


‘나오코랑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라는 물음에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나오코에게 관심 없는
선량한 척이나 하는 하즈키에겐

우스꽝스러운 물음임이 분명했다.

주인 허락 없이 방을 헤집거나,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것을

뒤늦게 후회할 수밖에 없다.


미네코는 계속 큰 한숨만 뿜어 댄다.

하즈키가 이층에서

공구함을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귀는 이층의 소리에 집중하며

온 신경이 그가 내는 소리마다 반응했다.

먼저 하즈키를 찾아가

말을 꺼내야 할지 끝까지 모른 척 그를 대할지,

미네코의 상처 난 발바닥은

움직임 없이 아직도 고민 중이다.


오직 공구함에 집중하고 있는

하즈키는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소스라치게 놀라

나사못을 놓쳐 버렸다.

어렵게 찾은 그것은 다시

복잡한 공구함 속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앗, 젠장.”


미네코의 얼굴을 마주하더니, 정색한다.


“어엇, 죄송해요,

아무도 없는 줄 알았어요.”


미네코는 죄송이란 말에

팔짱을 끼며 당당한 모습을 해 보였다.


“너도 날 보고 하는 첫마디가 그거군.”


하즈키가 손바닥을 내보이며

어깨를 으쓱했다.

미네코의 한 손에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맥주 캔이 들려 있었다.


“계단 소리를 들었어,

한집에 사는 식구가

얼굴은 보고 살아야지.”


하즈키는 다시 공구함을 뒤지기 시작했다.


“뭘 찾는 거야?”


다다미에 다시 물이

뚝, 하고 떨어진다.


“창문 고리가 빠져 있었어요.”


“그래? 잘 모르겠구나, 난.”


미네코는 자신도 집을 비우고 있었다고

정확하게 뜻을 전달하고 싶었다.


“괜찮아요.”


하즈키는 마치, 용서해 줄 게요,

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아

그녀의 얼굴이 발개졌다.

미네코는 끝까지 한마디 덧붙인다.


“뭐가 괜찮다는 거지?”


하즈키가 한숨을 내쉬며

억지웃음을 지었다.


“신경 쓸 일이 아니라는 말이에요.”


하즈키는 정말이지,

타다요시와 꼭, 같았다.

스스로 미안해지게 만드는 그 말투,

시간이 지날수록,

그 말투는 미네코를 더욱

괴롭힐 것이 뻔하다.


“그래?”


미네코가 일 층으로 내려가는 것

같더니, 다시 그를

돌아보며 말한다.


“저녁, 집에서 먹자.”


미네코는 마음을 감추기라도 하듯,

함께 먹자는 말 대신

집에서 먹자,라는 말로

그를 붙잡는다.


하즈키는 삐걱, 삐걱, 탁, 소리에

미네코를 흘긋하며

맨발인 모양을 보고 좀

놀란 눈치다.

미네코는 집 안에서도

늘 양말과 슬리퍼를 갖춰

신고 있었고, 바닥에 무언가

흘려 있는 것조차 참을 수 없어

하는 사람이었다.

미네코의 행동에 의아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작정이다.


“그럴게요.”


그때 찾지 못한 공구함 속

숨어 있는 나사를 발견하곤,

함박웃음을 짓는다.

꽃도 없는 방 안에

길을 헤매던 작은 벌 한 마리가 날아든다.

쉴 새 없이 하즈키의 귓가에서

윙윙 소리를 냈다.

조각난 마네키 네코를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미련 없이 쓰레기통으로 쓸어 담았다.

멀지 않은 곳에서 미네코가

맥주 뚜껑을 따는 소리가 들렸다.


“달칵.”


나오코가 그린 그림의 형체가

바닥에 군데군데 떨어져 있다.

찢긴 그림을 급하게 치워버린 티가 났지만,

당연히 미네코의 짓이라고

생각하진 못했다.


나오코가 그려준 그림이었고,

하즈키가 그림을 탐탁하지 않게

생각한 것도 나오코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확실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 나오코의 짓, 일 거란

확신은 나름 있었다.

하즈키의 성격으로 보아

나오코에게 따져 묻는 다 거나,

탓할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미네코는 내심, 걱정 하나를 덜었을 것이다.


미네코는 맥주를 홀짝이며

먼지 쌓인 주방을 요란하게

돌아다녔다.

냉장고를 뒤적였다.

마땅히 저녁을 준비할 만한

재료들이 눈에 띄지 않았다.

주방에 신경을 쓰지 않고

지낸 지가 언제부터인지

기억해 내기가 힘들다.

걸어 둔 나무 도마는

바싹 말라 갈라져 있었고,

식기 위에는 초록 가루가

먼지와 함께 뒤섞여 있다.


나오코가 들어오기를 바라고 있었고

함께 식사할 생각이었으나,

할 일이 산더미로 불어 있는 것을 보니,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물을 가득 채운 개수대에

식기들을 모조리 집어넣어 버렸다.

먼지 티끌 하나 용납하지

못했을 때가 과연 있었을까,

라는 생각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미네코는 남은 맥주를 들이켜고

다시 숨을 짧게 후욱, 뱉으며

빠르게, 빠르게 닦아 내기 시작했다.


도마의 갈라진 틈 사이로

물방울이 방울방울 흘러나왔다.

문득, 늘 집과 학교만 오가는

나오코의 생활이 궁금해진다.

대체 학교가 어디 붙어

있는지조차 알고 있지 않았다.


생각하지 못한 또 하나의 양심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제야 미네코가 집을 비운 동안,

나오코가 끼니를 때운 흔적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보통 평범한 엄마라면

어쩌다 이런 생각에 다다른다는 것,

자체가 정신 나간 짓이라고

열변을 토해 놓을 게 뻔하다.

세월이 흐를수록,

나오코에게 당당하지 못할 당연한 이유, 가

또 하나 늘어난 셈이다.
자신이 생각해도 엄마의 자격은 나

오코를 낳은 것 하나,

아니 그것 또한 억지로 맞춰 내고

싶다는 욕심에 든 생각일 것이다.

나오코가 배열해 놓은

캄캄한 단어들이 떠올라,

빠른 속도로 주방 일을 하다가,

멈칫, 하다가, 끝없이 반복한다.


“휴우…”


갑자기 채 닦지 않은

젖은 손으로 타다요시에게 다가간다.

죽은 사람에게라도 매달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의 위패 앞에 향을 피워 냈다.

습기 때문인지,

웬만해선 불이 붙지 않을 것만 같다.

나오코의 방으로 가 향을 가져올까,

도 생각해 보지만

열쇠 꾸러미 안에서

맞는 열쇠를 다시 찾아야 함에

화가 치밀었다.

미네코는 또다시 타다요시의

당부를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마지막 석양이 하즈키의 새카매진

양말을 가리키며 기울어져 간다.

낮잠은 달콤했다.

내내 내리쬐는 태양에 지쳤는지,

시간이 지나도 눈꺼풀이

떠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낮에 들어온 벌 한 마리가

하즈키의 귀 볼을 간질였다.

멈추지 않는 날갯짓은

윙윙거리는 소리로

눈꺼풀을 조금씩 들어 올리도록 했다.


작은 배 한 척으로

바다를 홀로 가르고 있었다.

거짓말처럼 조용한 바다 위는 찰싹,

거리는 소리 한번,

갈매기 소리 한 번 들리지 않고 고요했다.

파도의 요동도 느끼지 않았고,

배 안에서 깊은 잠이 들었다.

달빛에 묶인 실타래가

그의 발목을 섬세하게

아주 조금씩 끌어당기고 있었다.

이 달콤함이 끝나지 않기를

깊은 잠 속에서

애원하고 또 애원했다.

드디어 벌이 귓속을 헤맬

준비를 끝냈다.

반사적으로 상체를 들어 올려

고개를 뒤흔들며 손바닥으로

귀를 몇 번이고 후려쳤다.


“앗, 으.”


소스라치게 놀라 벌인 줄 알았다며,

창문을 열어 손바닥으로

여러 번 공기를 갈랐다.

달큼한 카레 냄새가

창문을 타고 흘러 들어왔다.

아주 오랜만에 맡아보는

집에서의 음식 냄새다.


깊은 잠은 식욕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하다.

시간을 확인하더니,

미네코의 찌푸린 얼굴이 떠오른다.

미네코는 늘 식사 시간을

지키지 않는 것에 불만을 품고

타다요시와 성공하지도 못할

말다툼을 늘 했다.

그의 미안하단 말 한마디는,

더 할 말을 하고 싶은 미네코의

입을 막아 버렸기 때문에

더한 화를 불러일으키는 원인이었다.


하즈키는 죄송하다는 말 대신,

할 말을 생각해야 한다.

주방 안을 빼꼼, 들여 보았지만,

미네코는 보이지 않았다.

상 위에 먹음직스러운 달걀말이,

큼직한 모양의 감자조림,

절인 오이가 어우러져 있다.

생선 대가리가 들어있는

장국은 약한 불에 보글보글

끓어오르며 짠 내와

비린내를 동시에 뿜어냈다.


거실에서 삐그덕, 하는 소리가 요란했다.

아마도 그것 또한 타다요시의

손길이 필요한 터일 것이다.

미네코가 의자에 앉아 다리를

가슴으로 들어 올리는

이상한 자세로 발바닥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역시 어울리지 않은 맨발이다.


“휴, 나오코가 아직 이야.”


미네코가 콧등 위에 얹은

돋보기로 보이는 세상은

왜곡되어 보인다.


“네.”


미네코가 들고 있던 살색의 무언가

툭, 떨어졌다.


“이런.”


하즈키가 빠르게 주워 물었다.


“어디, 다치셨어요?”


이 물음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걱정의 물음이다.


“응, 뭐 별거 아니야.”


내심 기분이 좋은 미네코는 휙,

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밴드를 낚아채더니,

발꿈치에 갖다 댔다.


“아니지, 별거 아닌 게 아니지,
현관 앞에 유리 조각이

잔뜩 있었는데, 봤지?”


미네코의 말은 하즈키가

마치 알고 있었을 거란 말투다.


“유리, 요?”


원래의 흰색을 잃은

구급약 통은

타다요시의 손을 빌린다 해도

누런빛을 벗어 내긴 힘들어 보였다.


“넌 계단으로 다니니까…
모르겠지, 치우다 말았어.”


“내가 치울게요.”


미네코가 의자에서 일어서자

삐그덕, 거리는 소리가

더 요란을 피운다.

유리 조각들은 너무 투명해서

회색빛 바닥의 색을

더 잘 드러냈고,

분간하기가 힘들었다.

미네코의 상처는 이곳을

맨발로 나오다 다쳤다는 얘기였고,

하즈키는 다시 또 맨발의

미네코를 이해할 수 없다.


하즈키는 네 번이나

마당을 돌아다니며

온갖 것들을 쓸어 담았다.

눈에 띄는 건 유리 조각뿐만이 아니다.

타다 남은 종이 조각들도 널브러져 있다.

나오코의 짓이란 건,

알고도 남을 만한 상황이다.


길 건너 사는 이웃,

야마다 씨도 알고 있는

얘기일 것이다.

과연 미네코도 나오코 짓이란 걸,

모른다고 말할 수 있을까? 싶었다.


하즈키에게 뒤집어씌우고

싶은 눈빛은

영락없는 계모의 모습이다.

아니면 모성애가 불쑥하고

안녕하며 나온

나오코를 감싸고 싶은

엄마의 마음일 수도.


미네코는 다시 맥주를 집어 들었고,

모조리 들이켠 빈 맥주 캔에

붉은색 립스틱 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맥주 할래?”


미네코가 냉장고 문을 열고

서서 하즈키에게 맥주를 들이밀었다.


“네, 주세요.”


“탈칵.”


텅 비어 있는 위 안으로

차가운 맥주가 빠르게 길을 트고 내려간다.


“하.”


“나오코가 있는 시간은 네가 없고,
이젠 네가 있는 시간에

그 애가 없고,
음… 둘 사이 문제라도 있는 거니?”


“만나야 부딪힐 일도 있죠.”


하즈키는 잘못도 없이

의심하는 기분에 조금 억울하다.


“나오코 얼굴 본 지가,

기억은 나니?”


미네코는 졸아든 장국 걱정에

씁쓸한 얼굴로 가스 불을 꺼 버린다.


“네?”


“아님, 혹시 이유 없이 피하는 거야?”


미네코는 분명 나오코의 빗나간 집착은

하즈키를 향한 것이란 것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하즈키는 당신 딸은 제정신이 아니에요,

라는 말을 하고 난 후를

상상하곤 몸서리를 쳤다.


“왜 그러지?”


“일자리 구하기가 힘들 뿐,

다른 건 신경 쓰지 않아요.”


미네코는 타다요시 아들다운

적절한 대답에 순간

웃음이 피식, 하고 나왔다.


“후훗, 그래? 하…

그 애가 이젠 내 통제를 벗어났어,

아니 늘 그랬지.”


둔탁한 소리가 쿵, 하며

문이 열리더니 나오코가 들어섰다.

어떤 영문이지, 미네코는 물론

하즈키까지 본체 만 체다.

미네코가 이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나오코? 이번에도 모른 척이야?”


나오코의 표정은

집 밖을 나섰을 때와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꼭, 미소를 띠고 있는 것처럼

온화해 보인다.

나오코는 미네코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말했다.


“저기 할 말이 있어.”


미네코는 하즈키에 대한 말일까,

겁이 났던지,

나오코의 말을 막고 재촉했다.


“카레가 아주 맛있게 됐어.

저녁 먼저 먹자, 기다렸어.”


카레 냄새가 싫지는 않았는지,

어깨를 으쓱한다.

나오코가 말했다.


“하즈키, 오랜만이야.”


“으응.”


“참, 겐토가 왔어.”


하즈키는 겐토의 소식을

나오코에게 듣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오코는 그의 반응을

섬세하게 살피고 있었다.


“어?”


“하즈키한테 연락할 세는

없었을 거야,

우린 함께 있었으니까.”


미네코가 나오코를 부른다.


“나오코 그렇게 서 있을 거니?

그릇이나 옮겨.”


“연락해 봐, 겐토 집에서 왔던 길이야.”


“어? 그, 그래.”


분명히 하즈키의 눈 밑이

움찔하는 것을

나오코의 눈으로 확인했다.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나오코는

이번에는 미네코를

냉대하지도,

모른 척하지도 않는다.


그릇을 옮겨 담는

나오코의 모습은

영락없이 착한 딸의 모습이다.

미네코는 집 밖을 나갈 때의

모습과는 사뭇 달라 보여

내내 나오코의 행동을

주의 깊게 관찰하는 중이다.

나오코의 그림을 보는 것처럼

심장이 쿵쾅거렸다.


나오코가 하고 싶어 했던

말이 무엇일지,

미네코는 점점 두려워지는 중이다.

나오코는 미네코의

그런 눈치를 모를 리가 없다.


젓가락이 밥상을

두드리는 소리만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주전자에 물이 끓어 넘치더니,

스스로 불을 꺼버렸다.

찻잎은 여름날의 숲처럼

습기를 머금고 있다.

손만 갖다 대도 부서지던

것들이 질겨 보이기까지 했다.

차의 첫 물은

여름에 내리는 비를 머금은

숲의 색깔이다.

미네코는 자신이 따라낸

차를 마시며 감탄의 신음을 내쉬었다.


“하…”


미네코는 나오코가

입을 다물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했다.

만약, 그림에 관한 얘기를

늘어놓는다면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계획을 잡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화를 낸다면

나오코는 또다시 어긋나 버릴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지,

알면서 모른 척하는 건지,

하즈키는 빛나는 갈색 눈을

반은 감은 채

신선놀음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먼저 일어날게요, 잘 먹었습니다.”


하즈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나오코는 낮은 목소리로

겁을 주듯 달려들었다.


“하즈키도 내 얘기, 들어야 할 거야.”


개수대에 쌓아 놓은 그릇이

떨어져 부딪히는 소리를 낸다.

하지만 아무도 그 소리를 듣지

못한 것 같다.

하즈키를 자리에 머물게 한

나오코의 말에

미네코는 본격적으로 겁을 먹고 있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돼...”


미네코는 정말 바보 같은 말을

늘어놓았고, 나오코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거칠게 또는 큰 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나, 결혼할 거야.”


나오코는 하즈키의 얼굴을 흘긋거렸다.

미네코의 입은 열릴 생각 없이

나오코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렇게 볼 필요 없어,

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은

결혼을 할 거야.”


미네코가 먹다 남은 위스키를

길쭉한 컵에 따라

한 번에 들이켠다.

결혼이라는 단어에

누군가의 이름이 붙여질까

두려워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미네코가 증오 섞인 말투를 뱉었다.


“너, 너 말이야 어쩜 그리 네 멋대로 지?”


나오코는 미네코의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오직 하즈키에게 눈이 굳어 있는 중이다.


“나오코? 넌 학교를 아직 마치지도 않았어.”


“언제부터 진심으로 학교가

내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마치 엄마로서 자격은 없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아

미네코는 대답할 변명이 필요했다.


“널 낳아 준 건 나야,

최소한 결혼이라면

상의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니?”


“내가 지금,

최소한 말이라도 해 주고 있잖아?”


“허, 참 고마운 일이구나, 응?”


“남는 것 없는 말씨름 하고 싶지 않아.”


“말씨름이라고 했니?

어떻게 상황을 이렇게 만들 수가 있지?
어떻게? 하즈키 말 좀 해봐,

대, 대체 이게 무, 무슨… 일이지?”


미네코는 꼭, 상대가 너야?라고

말하며 하즈키를 노려본다.

벌떡 일어나 주방을 서성이더니,

두 손을 비비적대고,

말을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결혼은 내가 하는 거고,

아무것도 필요 없어.”


“나오코.”


미네코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너, 혹시 실수라도 저지른 거야?

기어코?”


“억지스러운 말 좀 그만해.”


하즈키는 골똘히 머리를 굴리다

기가 막힌 생각이 떠오른 사람처럼,

감탄사를 말과 함께 뱉는다.


“아… 나오코!”


미네코는 나오코의 이름을

탄식처럼 뱉는 하즈키를

노려보며 말했다.


“뭐야?”


하즈키가 말했다.


“겐토.”


미네코는 나오코의

겐토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면

하즈키의 뺨을 날릴 기세였다.


“뭐? 뭐라고 했지? 겐토라고 했니?”


고개를 끄덕이는 하즈키를 보더니

그제야 미네코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즈키가 이마를 짚으며 피식거렸다.

겐토의 소원이 이루어졌다는 것과

겐토의 대담함에 웃었다.

하즈키는 진심을 담아 나오코에게 말했다.


“축하해.”


미네코는 이 상황이

자신이 알고 있던 상황과는

다른 것 같아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맥박은 여전히

백 미터 달리기 중이다.


“축하라니?

하즈키 너도 알고 있었던 거야?”


“겐토가 좋아하는 것까지만요.”


“겐토가?”


나오코가 말했다.


“며칠 후, 겐토가 올 거야.”


미네코가 어이없는 말투로 물었다.


“그래서?”


“그래서라니?

결혼할 거라 했잖아.”


미네코는 상대가 겐토임을,

다행으로 생각했지만,

뭔가 잔뜩 꼬이고 있다는

느낌을 버릴 수가 없었다.

분명히 나오코의

그림 속 주인공은

하즈키의 눈이었고,

그는 그림을 그리는

나오코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즈키가 그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빠르게 걸음을 옮긴다.


“올라갈게요.”


유리에 베인 미네코의 발꿈치에

다른 유리 조각이 들어간 것처럼

욱신거렸다.

도무지 낫질 않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오코는 다른 무슨 더 할 말이

남았는지 보통의 모습과 다르게

미네코 앞에서 쭈뼛거리는 중이다.


“하즈키, 결혼, 이라는 단어가 나왔어,

동생에게 관심이 없는 거니?”


나오코가 미네코의 말이 끝나자마자

미간을 찌푸렸다.


“상관없는 하즈키는 왜 건드려?”


하즈키는 계단을 오르던 걸음을 멈추다,

튄 불똥에 맞을까,

모른 척 빠르게 뒤돌아 간다.


“하즈키도 떠날 거야.”


미네코는 하즈키도,라는 말에

입이 다물어졌다.

미네코는 아닌 척,

마음과는 다른 단어를 꺼내 물었다.


“어딜 간다는 거야?”


“그건 나도 아직 몰라.”


“둘 다 똑같이 멋대로군.”


미네코의 얼굴은 당혹감을

감추기 어렵다.

나오코는 잘못이라도 저지른 사람의

목소리처럼 점점 작은 소리로 말했다.


“내가 먼저 가겠지.”


“뭐?”


"혼자 남겨질 준비를 해요."


미네코는 위스키병에 남은

액체를 마저 따라냈다.

빠르게 취기가 돌았고,

바닥을 짚고 천천히 앉아

벽에 기댔다.

긴장했던 어깨가 순식간에

푹 꺼지는 것을 느꼈다.

쥐가 날 것처럼 등줄기가

조여들었다.


“우후…”


나오코는 말없이 그 모습을

확인하며 빈 병을 주워 담았다.


“나도, 올라가요.”


미네코는 필요 없다는 듯,

손을 들어가라는 시늉을 한다.

나오코의 뒷모습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눈은 허공 속에서 맴돌았다.

언젠가 올 날들이었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예고 없이, 이건 아니었다.


처음, 타다요시의 집에

발을 들였을 때

장성한 아들이 한집에

같이 있다는 게 싫어

그가 하루빨리 독립하기를

바랐던 적이 있었다.

그 마음이 어느 시기부터

사라졌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묻혀

그렇게 가족 흉내를 내며 살아왔다.

홀로 남아 집을 지킬

자기 모습을 생각하니,

타다요시 곁에 있는

하즈키의 엄마가 부러울 지경이다.


그녀가 타다요시 곁에서

미네코를 보고 비웃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배알이 틀렸다.

물론 그런 여자가 아니란 것쯤은

알고 있지만 생각은 늘

뒤틀리기 십상이다.


출처, 아수라처럼



뒤집힌 붉은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멀리 보이는 거울 속,

희끗희끗한 머리칼이

튀어나와 약을 올렸다.

벌떡 일어나,

타다요시의 사진을 뒤집어 놓더니,

어렵게 밝혀 놓은 향을 짓이기며

냄새를 풍긴다.

꼭, 짚고 넘어가할 일들이

덮이기 직전이었다.


겐토와 결혼을 한다는

나오코에게서 그림 속 주인공에

대한 감정을 확실하게 끄집어낼 일인지,

그냥 넘어가야 할 일인지, 가

문제였다.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해

불길한 예감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런 나오코의 모습은

자기 모습과 꼭, 닮아 있었다.


미네코가 만들어 놓고 간

흔적을 빈틈없는

나오코가 당연히 눈치채지 못할 리 없다.

미네코 또한 모르지 않을 것이다.

누구의 입에서 먼저 소리가 나던가,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던가,

둘 중 하나이다.


나오코는 이제 와서 상관없다는 듯,

당황한 기색 없이

스케치북을 책상 밑으로

완벽하게 밀어 넣었다.

미네코의 말을 더듬는 행동과,

불안한 목소리가,

이제야 이해가 되는 중이다.

하즈키의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삐그덕, 하는 소리는

나오코를 향한 발소리임을 증명한다.


“똑, 똑.”


나오코는 그가 방문을 두드리는

똑, 하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조금 더 시간을 끌어 볼 작정이다.


“똑, 똑, 자니?”


그럴 리 없다.

딱, 네 번째 그의 방문이다.


“들어와.”


나오코는 책상에 앉아

턱을 괴고 하즈키를 바라보았다.


“잠깐, 앉아도 되지?”


나오코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난 하즈키가 올 줄 알았어.”


하즈키는 눈이 빠질 듯,

자신을 바라보는 나오코가

부담스러워 시선을 바닥으로 내려놓는다.


“겐토, 정말 좋은 녀석이야.”


“그 말은…

겐토가 나를 만나서 걱정돼?”


“나오코, 그런 말이 어디 있어?”


나오코가 손사래를 친다.


“아니야, 나도 정말 걱정이 되니까.”


하즈키가 나오코의 말을

못 들은 척 말을 이어갔다.


“둘 다 잘 살 거야,

겐토는 그런 사람이니까.”


나오코가 노란 불만 보이는

창밖을 보며 말했다.


“겐토 부모님이 있었다면

어림없는 일이었겠지.”


하즈키는 웃을 일이 아닌 일에

웃으며 말하는 나오코가

이해되지 않는다.

하즈키가 고개를 숙인 채

눈을 치켜뜨고 바라보며

당황스러워했다.


“겐토는 진심으로 널 좋아해,

아마, 달라질 건 없었을 거야.”


나오코의 볼살이 실룩거리며

얕게 움직였다.

하즈키의 표정이

너의 감정은 거짓이야라고

말하는 것 같아

그가 잠시 원망스러웠다.


“혹시 필요한 게 생각나면 꼭 말해 줘.”


말끝을 흐리는 하즈키는

자기의 말이 창피했는지

머리를 긁적인다.

그런 모습은 여간해서

잘 볼 수 없는 모습이다.

어색한 그 모습에

나오코가 웃음을 터트렸다.


“풋, 하하 왜 그렇게 어색하게 구는 거야?

못 봐주겠어.”


“하하, 그러게 말이다.”


“아무튼 고마워,

도움이 필요하면 얘기할게.”


“응, 그래 쉬어.”


“잠깐.”


문고리를 잡아당기는

하즈키를 다시 불러 세운다.


“하즈키는 언제 떠나?”


나오코는 역시 다 알고 있었고

그 물음에 어떻게 알았냐,라고

말하기도 우습다.


“뭐, 언제든?”


“먼저 이 집을 떠나는 건

내가 될 수도 있겠어.”


“다시 한번 진심으로 축하해.”


하즈키의 말은 진심으로 부럽거나,

이곳을 떠나는 일만큼

좋은 일은 없을 거야,라는

뜻이었다.


“저기, 뭐, 쉽진 않겠지만

하즈키가 떠나기 전까지는…

엄마 좀 잘 참아줘.”


“걱정 말아,

우린 이제까지 잘 지내왔으니까 잘 자.”


하즈키가 손을 들어 보이며

마지막이 될 것 같은

나오코의 방 모서리 끝,

그 자리를 떠난다.

나오코는 허수아비처럼

손을 흔들어 보이는 그의 모습을

오랫동안 눈 속에 담았다.

문이 열린 틈으로 비집고 들어온

하즈키의 나무 냄새가 코를 찔렀는지,

뇌 속의 감정이 눈을 찔렀는지

물방울이 맺혔다.

나오코가 되뇌었다.


출처, 오버 더 펜스



‘그곳에서 우리, 다시 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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