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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마지막 밤

16. 문두스

by 금봉



Mundus 문두스



유리병 속 하얀 백합이

시간에 시달려 입을 쩍 벌리고 늘어져

앙상하게 뼈대만 남았다.

소리 없는 바람에

조금씩 날리고 있었고,

모습에 비해 향은 또렷하다.

뿌옇게 먼지 낀 유리병을 바라보며

피곤한 웃음을 지어 본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좁은 틈의 빛은

오히려 유리병을 돋보이게 했다.


반복된 장기간 호텔 생활은

직사각형의 좁은 상자 안에

몸을 구겨 넣은 것처럼

호흡을 망가뜨리기 일쑤다.


괴롭던 생활의 끝은 항상 있었다.

겨우 찾은 따뜻한 안식처는

씁쓸한 맛의 하루를 보냈다가도

웃음을 짓게 하는 마술과 같은

힘을 갖고 있었다.

드디어 호텔이 아닌 작은 집에서

코하네는 호흡을 길게 내뱉고

잠에서 완전히 깨어난다.


출처, 나를 잡아줘



숱 없는 머리칼은

사방으로 뻗쳐 있었고,

여전히 핏기 없는 피부색은

붉은 물감으로 물들이고 싶은

충동을 일으켰다.

눈 밑은 하늘에서 잔뜩 웅크리고 있는

비구름이 몰려들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비는 눈 속에 갇힌 채,

해방될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코하네의 새카만 눈동자는

흰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큰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고,

작지만 또렷하다.

틈새를 비집고 나온 빛을

따라가 보지만 금세 빛은 도망가 버린다.


생수통에 반쯤 남은 물을 들이켰다.

비릿하기도 찝찔하기도 한 맛은

아마도 미지근한 온도 때문일 것이다.

아직 냉장고를 마련하지 못한 터라,

내내 창문 쪽에 생수통을 놓아두지만,

소용이 없다.

개수대로 달려가

그나마 시원한 수돗물을 벌컥거렸다.


“하암.”


방금 나타났던 빛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방 안은 다시 캄캄하다.

갑자기 창문으로 후드득 부딪치며

비가 쏟아졌다.

몸을 뚫은 것 같은 아주 굵고

힘이 센 비가 내렸다.

사라진 빛은 유리병 속의

뿌연 먼지를 더 이상 확인시켜 주지 않았다.

어둠은 거짓말처럼

깨끗한 유리병으로 둔갑시켜 준다.

작은 속임수는 커다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대단한 힘을 갖고

있는 법이다.

코하네는 갑자기 맞은편

맨션을 의식하더니 신경질적으로

커튼을 닫아 버렸다.


“헛, 뭐지?”


분명 커튼 틈 사이로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그 형체는 빠르게 휙, 하고 사라져 버렸다.

겨드랑이와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이곳의 맨션은 앞 집과의 거리가

불과 몇 미터밖에 되지 않았다.

정말이지 참새 방앗간처럼

붙어 있는 꼴을 보면,

방 하나라도 더 쪼개어

만들어 보려는 의지가 돋보인다.

그 속에 우리들은 빼곡히 들어앉아,

그곳이 안식처라며

그 안에서 휴식을 취한다.


맨션에 커튼은 필수다.

커튼 없인 개인 생활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코하네가 좋아하는 아침 햇살과

내리는 비를 맘껏 보기란

구둣방의 삶,

예전처럼 쉽지 않다.


쩍, 벌어진 백합의 입을

처지지 않게 갖은 방법을 써 보지만,

축 늘어져 활짝 핀 잎의 무게를

이기지 못했다.

수명이 다 됐다는 뜻이다.

이파리마저 누런빛이 맴돌기 시작했다.

손바닥에 묻어 난 꽃가루가

끈적한 습기를 머금고 있다.

노란 꽃가루가 손바닥에 묻어났다.

짙은 향이 다시 코를 찌른다.

가을의 문턱은

여전히 여름에 미련이

남아 있는 모양이다.


코하네의 하얀 원피스는

비옷에 가려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

신은 장화가 키 작은 그녀의

무릎까지 침범하는 바람에 꽤,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되었다.

그 모습을 전혀 알 리 없는

코하네는 장화를 비껴간 빗물이

고소하기만 했다.


바닷속 말캉한 것들이 늘 즐비해 있는

시장 골목은 비가 반갑지 않다.

말캉한 것들의 냄새는 더욱 활기가 돋았고

사람들의 코끝을 자극해

때론 반갑지 않은 쓴 침을 고이도록 만들었다.

비린 냄새의 쨍, 함은

코하네의 코끝도 역시 점령해 버렸다.

붉은 색깔로 변해 버린 코끝은

연신 숨을 내뱉고,

고인 침을 당장이라도 뱉고 싶은 심정이다.


코하네는 그들의 시선에

역시 미안한 양심을 머금고

꼴깍, 하고 삼켜 버린다.

우스꽝스러운 긴 장화는

비린내를 반사적으로 피하려

더 먼 거리를 돌아 큰길로 나섰고,

비닐우산은 길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앞을 가렸다.

점점 낮아지는 시선에

왼손 오른손을 바꾸어 있는 힘껏

우산을 들어 올려 본다.

꽤 센 바람과 사선으로 빗겨 내리는

비는 코하네의 얼굴을

냅다 후려칠 기세다.

반사적인 목소리는

연신 바닥으로 툭툭, 잘도 떨어졌다.



출처, 4월 이야기



“으엇, 으악.”


뜨거운 태양에 달궈졌던 아스팔트가

식어 먼지들이 나풀거리는 냄새가 났다.

오래된 책이 뿜는 냄새 와도

거의 흡사했다.

콧구멍이 간질거렸지만,

그 냄새를 깊이 먹어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흠, 화아.”


커튼 너머 낯선 사람 덕에

출근 전 여유를 부릴 시간이 충분했다.

급하게 시계를 보더니,

세상을 다 얻은 듯한 표정을 하곤

우산을 털어 내느라 정신이 없다.

카페의 문이 열리자 바람과 함께 들이닥친

비에 놀라 주인이 소리쳤다.


“요란스럽기도 해, 코하네! 자 받아.”


주인 마사토는 아마도 가게 안이

빗물로 칠갑하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아

친절을 베풀었을 것이다.

코하네는 그의 낯선 친절함에

눈이 동그래졌다.


“마사토씨, 고마워요.”


“얼른 닦기나 해.”


재촉하는 마사토는

대신 닦아주기라도 할 것처럼 굴었다.


“커피 부탁해요.”


마사토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대신했다.

뒤돌아선 그의 미간은

불친절함을 머금었고

보란 듯 찌푸려져 있었다.


큰 건물을 차지하고 있는

값 비싼 상점들 사이에

허리를 굽혀야만 들어갈 수 있는

작은 문을 가진 이곳,

이 도시의 빠름을 느림으로 만들어 주는

코하네만의 유일한 공간이다.


테이블은 겨우 찻잔 하나,

더 하자면 책 한 권이면

꽉 들어찰 크기를 자랑했다.

오래 앉아 있을수록

꼬리뼈의 잔잔한 통증을 만드는

딱딱한 나무 의자,

사포로 다듬지 않아 우둘투둘,

경사가 나 있었다.

그 통증을 참아 내면

이곳의 매력에 빠졌다는 증거다.


마사토의 게으름은 색이 바랜

누런 찻잔을 보면 알 수 있다.

게으름의 그 색은 나무 의자와

어색해 보이지만, 꽤 조화롭다.

나무로 덧댄 유리문을

세차게 때려대는 비는

불공평하다며 평안한 표정의

코하네를 시샘했다.

가을 문턱의 비는 전쟁과도 같았다.





“우르르 쾅 콰광.”


코하네는 하늘이 내리는

노여움의 소리에 놀라

어깨를 들썩인다.

커피를 가져온 마사토 씨가 중얼거렸다.


“요란하기도 하네, 거 참.”


그의 말은 코하네의 젖은 어깨인지

요란한 하늘인지,

바닥에 떨어뜨린 빗물로

눈치를 준다.

코하네는 비를 피해 앉아

피곤한 웃음을 짓고 있는 작은 새,

꽃잎에 앉은 보이지도 않은

작은 새 같다.






비 오는 날, 문두스의 바닥은

축축하고 미끈거렸다.

카펫을 갈지 못하는 날에는

끈적함도 함께 난리를 쳤다.

카펫을 꾹, 밟고 있으면

검은 커피 색깔의 액체가

조금씩 묻어난다.

마호는 길어진 장마 덕에

그것을 내내 갈아줘야 했다.

부지런한 마호는

좀 더 부지런 떨 수밖에 없다.

붉은 카펫을 보는 것만으로도

고개를 내 저으며

질려 버렸다는 듯, 내색을 떨었다.


그러던 중, 카페 주인 마사토가

카펫을 전문적으로 관리해 주는

업체가 있다며 그의 귀를 간질였다.

고민하던 중, 단 한 번의 테스트로 쭉,

더 이상 카펫 때문에

부지런 떨지 않을 수 있었다.

물론 문두스의 주인은

낯선 사람들의 방문을

못마땅해하며 질색했지만,

오랫동안 문두스를 지키고 있는

매니저 마호의 말을

따르지 않을 수는 없다.


오히려 건물을 갖고 있거나,

그곳에서 주인 노릇을 하는 사람들이

마호의 눈치를 보거나,

제 발로 찾아와 무언가 부탁하는 모습이다.

또한 마호의 소문난 인격은

말할 필요도 없다.


문두스의 1층은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밖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바와 주방이 붙어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주방인지 바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비슷한 구조다.

2층은 식사할 수 있는 공간과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으로

가장 바쁜 곳이기도 했다.

3층은 유리문으로 안과 밖을 나뉘어

놓고 밖으로 테이블이 쭉 뻗어 있었다.

밖이 훤히 내다보이는 창가 자리는

예약하지 않으면 쉽게 앉을 수 없는 자리다.

그나마 하늘과 닿아 있는 이곳은

식사를 끝낸 사람들의

아쉬움을 달래는 곳이기도 했다.

이곳은 코하네가 시선을 멀리 내다볼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기도 했다.

가장 일거리가 적은 곳을 선택할 수 있던 것은,

아마도 마호의 배려일 것이다.


해는 기울어져 가고,

공기는 점점 서늘하다.

준비를 마친 문두스의 문이

열리길 기다렸다.


흰 셔츠와 검은 바지는

문두스의 그들이 공동체임을

알려 주는 하나의 신호이고,

검은 배지 속의 이름은

그들을 기억하게 만드는 첫인사다.

비가 내리는 날, 이곳은 늘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비를 기다렸단 듯,

다들 같은 곳을 바라보고 술잔을 들었다.


열린 유리문 사이로

차가운 공기가 스며들었다.

마호는 얕게 떨리는 코하네의 어깨를

확인하며 조용히 문을 닫았다.

눈치챈 코하네가 마호를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문두스의 음악은 오직 하나의

악기만이 주인공이 된다.

코하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나무 특유의 삐걱대는 소리,

손톱이 잔에 긁히는 소리,

툭, 툭, 물이 떨어지는 소리,

계단의 오름과 내림을 반복하는

사람들의 복잡한 소리가 가득했다.

습도가 높은 날의 소음은

더 큰 울림을 만들어 낸다.

알록달록한 색의 기모노를

차려입은 여자는 분홍빛 피부를 뽐내듯,

자신감이 가득한 얼굴을

추켜올리고 있었고,

의외의 큰 엉덩이는

꽉 낀 기모노가 불편해 보일 지경이다.


다른 한 여자는 화장기 없는

맑은 얼굴을 하고 있었고

탐스러운 붉은 입술에

시선이 닿지 않는 사람들이 없었다.

기모노를 입은 여자는

그 입술을 흘긋거리며

자신의 앞에 앉은 남자의 시선을

확인하는 중이다.

그 남자는 기모노를 입은 여자보다

더 훨씬 어린 소년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다른 한 남자는 중년의 여유와

젊음을 갖고 싶은 욕망이

턱살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예약한 자리에 서로의 눈치를

봐 가며 가식 섞인 친절함을

눈 끝으로 자아낸다.

두 남자의 시선은

동시에 탐스러운 소녀의 입술을

맞대고 있었고,

앉아 있는 몸의 방향도

소녀를 향해 있었다.

이를 모를 리 없는 기모노를 입은

여자는 조용한 소년의 본능을 깨우듯,

엉성한 손길로,

모른 척 떨며,

또 웃으며 남자들의 손등을 스쳐 간다.

마호가 메뉴를 받아 적은

종이를 코하네에게 내밀며 속삭였다.


“말도 안 돼.”


“으응?”


마호의 시선이 기모노를 향해 있었다.

그때 기모노는 다시 젊은 남자의

어깨를 툭, 스친다.


“봐, 말이 안 되잖아.”


웃고 있는 코하네는

조용히 하라는 말 대신

자신의 입을 막아 버린다.

몇 잔의 술로 어린 소녀의

찹쌀떡 같은 볼이 발그레하다.

마호는 내내 중년 남자와

기모노를 입은 여자를

호시탐탐 확인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마치 자기 일 인양, 너스레를 떨었다.


이미 해는 저물어

달빛이 하늘을 가득 담고 있었고

문두스의 이야기는 문이 닫힌 후,

더욱 많아질 것이다.

마호의 입술은 벌써 바쁘게 움직였다.

낮은 습도 속의 피아노 소리는

경쾌하게 울려 퍼진다.


♬♬Chopin:polonaise NO.6 In a flat Major Op.53 ‘Heroic’






가을 햇살은

다시는 내리쬐지 않을 것처럼

작정한 듯 사람들의 얼굴을

가지각색의 표정으로 만들었다.

조금씩 말라비틀어져

가기 시작한 낙엽에

시선이 닿기만 해도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어깨가 움찔거렸다.

커다란 은행나무 앞을 이리 갔다,

저리 갔다 돌아다니는

작은 아이의 흰색 운동화가

코하네의 눈에 들어온다.

흰색 운동화는 시간을 말해 주듯,

거뭇거뭇 찌든 때와

찢긴 듯한 자국이 선명하다.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는 낡은 운동화를 신고

가볍게 위로, 위로 올라간다.

갑자기 불쑥, 나타난 남자의 모습이

아이를 시야에서 앗아 갔다.


남자는 자신의 가방에서

새하얀 새 운동화를 꺼내 보이며

아이에게 손짓한다.

아이는 자신 앞에 놓인

새하얀 운동화 보다

남자의 얼굴을 더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아이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출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남자는 달려오는 아이를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아이는 남자의 손을 잡더니,

새하얀 운동화를 신고

발을 흔들거리며

둥글게 둥글게 돌고 또 돌았다.

남자는 아이를 번쩍 들어 올리다,

내리다, 를 반복하며

함께 춤을 추는 것처럼

노래도 흥얼거린다.


코하네는 그 모습에

사연도 모른 채 눈물이 핑, 돌았다.

그들의 모습은 뿌연 눈물 덕에

점점 작아지며 사라진다.

그때 어디선가 훅하는 소리와 함께

바람이 날았다.

마호의 긴 한숨이 그녀를 깨웠다.

마호가 무언가 열심히 이야기하던

중이란 것을 그제야 알아차리며

당황에 빠져 난처했다.

코하네는 놀란 눈을 하더니,

끙, 하는 소리를 낸다.


“헛, 마호, 미안.”


마호는 너무 익숙한 일인 양,

오히려 그녀의 어깨를 다독여 준다.


“미안하긴.”


“다시, 해, 다시.”


“힛, 중요한 얘기 아니야.”


마호는 자신만의 세계에

멈추는 시간이 많은

코하네와 말 없는 대화법을

이미 시행한 꿰뚫은 사람처럼 행동했다.

지금도 역시 물 흐르듯

웃음을 흘려보내면 그만인 그다.

코하네는 고개를 돌려

공원을 빙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마호가 말했다.


“요즘 들어 더 심해졌어.”


코하네가 마호를 올려본다.


“으응?”


“으으응?”


“마, 호오.”


“숨을 자꾸 길게 내쉬어서,

한숨을 버릇처럼.”


“응.”


“응? 그게 다야?”


“응.”


마호가 코하네의 뒤통수를 쓸어내리듯, 튕겼다.


“흔적 남기기.”


“응?”


이번만큼은 뜻을 알 수 없다며

곤란해지는 코하네의 얼굴이다.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것 같아서, 하아, 하고

숨이 길게 내쉬면

내가 여기에 남을 것 같거든.”


코하네는 의자 밑의 돌 더미들을

주워 우거진 풀 더미에 던져 버렸다.

순식간에 돌의 흔적이 사라졌다.

코하네가 속삭이듯 말했다.


“엄마는 한국 사람이야.”


마호는 자신이 피우던 담배 연기에

사레들어 눈이 벌게질 때까지

기침을 해댔다.

코하네는 그의 행동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전쟁은 가한 자도 당한 자도,

흔적이 남아야 되는 건데…
이 나라는 그 흔적을

모두 지우려고 만해
마치, 총포 소리도 총을 든 자도

죽은 자도 없었던 것처럼.”


“난, 그런… 생각해 보지 못했어.”


코하네는 마호의 어깨에 기대어

사라진 돌의 흔적을 찾으러

뚫어져라 앞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아빠는 총을 쏘는 군인이었고,
엄만 그 총 때문에 아빠를 만난 거지
이해할 수 없었던 건,
한국을 향해 총을 겨누던

아빠란 사람도 반은 한국인이었다는 거야.”


“끔찍하군.”


마호는 이해할 수 없는 말에

귀를 더욱 기울인다.


“더 끔찍한 건, 그들이 겪었던

모든 것들의 흔적을 찾기 힘들다는 거야.”


코하네의 웃고 있는 눈은 우는 듯 가늘어졌다.


“코하네가 기억하고 있잖아.”


“내가 사라지면?”


“내가 기억하지.”


“푸흣, 하하하.”


코하네는 다시 한번

풀 더미로 돌을 세게 던졌다.

빠르게 풀을 헤집더니,

사라진 돌을 주워

마호에게 내밀었다.


“여기, 흣 내가 이렇게 기억한 것처럼.”


코하네는 어린아이처럼

함박웃음을 짓다가도

금세 풀이 죽는다.

짙은 검은 눈동자는

수평선에 놓인 길 잃은 작은

배처럼 잔잔하게 흔들거렸다.

석양이 시작된 하늘의 보랏빛과

주황빛이 허공에 자리한

코하네의 눈을 지나간다.

검고 작은 배에 빛이 반짝거렸다.


“해가 떠 있는 시간이 점점 짧아지면

긴소매 옷을 챙겨야 해.”


“코하네, 그 말 또 하네?”


“응?”


“이 맘쯤 되면 항상 꺼내는 그 말.”


“아키라 할아버지가 늘 하던 얘기.”


“네 걱정에?”


“으응.”


마호가 코하네의 작은 코를

살짝 잡아당겼다.

마호의 손에 담긴 담배 냄새는

삐뚤빼뚤한 아키라의

덥수룩한 수염을 생각나게 했다.

마호가 그녀의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


“일어날까?”


“응 마호.”


“가자, 배고프다.”


코하네는 수많은 물음표를 남기고,

작고 빠른 걸음으로

그보다 더 앞장섰다.

어느 순간, 코하네를 볼 때마다

생기는 몸의 통증은

마치 코하네가 길게 뱉은 한숨처럼

습관이 되어버렸다.

마호의 심장이 그것을 기억했다.

시간이 지나도 그 통증은

사라지지 않은 코하네의

또 다른 흔적이라 생각했다.

버릇처럼, 갑자기 밀려오는 통증에

마호는 한참을 서서 움직일 수가 없다.

코하네의 목소리가 들린다.


“마호, 마호 얼른 와.”


뒤돌아선 코하네가

다시 함박웃음 지으며

마호의 걸음이 다다를 때까지

기다리는 중이다.

코하네의 앞에 멈춰 서서

뚫어져라 얼굴을 바라보았다.


“마호, 뭐야?”


마호는 씁쓸하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으으응? 왜?”


코하네가 말했다.


“잠깐만, 이리 와 봐.”


마호의 말대로 코하네는

그 앞에 가까이 다가섰다.

고개를 번쩍 들고 마호를 올려 보았다.

마호는 최대한 어깨를 숙이고

코하네를 천천히 꼭 안았다.

코하네의 찌든 운동화가

들렸다 내렸다 하며 수줍어한다.


출처, 아사코


“저기…”


그녀의 목소리에

마호는 더욱 그녀를 꼭, 안았다.


“쉬이…”


코하네의 말대로 안고 있는 그녀는

너무도 작아 금방이라도

흔적도 없이 공기 속으로

사라질 것만 같았다.

마호도 그녀처럼

숨을 길게 바닥으로 내려놓듯 후한다.


“마호, 난 괜찮아.”


마호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그녀를 놓지 못한다.

코하네는 마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랫동안 고개를 들고

석양을 바라보았다.




1975년의 마지막 밤



얕은 천이 길게 뻗어 있는

곳의 겨울밤. 규칙 없이 뻗어 난

앙상한 벚나무의 가지가

길게 뻗은 손가락 마냥,

마치 버려진 음습한 마을처럼 보인다.

얕은 강의 표면에 등불이 맞닿아

노란 물결을 만들어 냈다.

1975년의 마지막 날을

기념하기 위한 사람들의 복잡하고

요란한 소리가 다행히 끊긴 시간이었다.

덕분에 잠을 이룰 수 없는

사람들의 집마다

등불은 이제야 하나씩, 하나씩

소등되는 중이다.


아키라의 구둣방 또한

대낮처럼 훤한 불이 켜져 있다.

베란다에 걸린 커다란 이불을

걷어 내기엔 유키코의 힘이

모자라 보인다.

유키코의 덩치보다

훨씬 큰 이불은

그녀의 입에서 신음을 만들었다.


“읏차.”


코하네는 훤히 열려 있는

문을 두고도 가게 앞에서

머뭇거리기만 할 뿐이다.

2층에서 내려오는

유키코와 눈이 마주쳤다.


“코하네?”


“아 유키…”


“뭐 해? 들어가지 않고.”


코하네는 유키코 앞에서

고개를 들 수가 없다.


“대체 왜 그러는 거야?

남의 집에 온 것처럼.”


“유키...”


“오늘 날씨가 워낙 좋아서

이불 빨래를 했는데,
이건 보통 일이 아니야, 휴...”


아키라의 구둣방은

여전히 온기가 가득했고,

오래된 책장을 넘길 때

나풀거리는 냄새 또한 변함이 없다.

변한 건 아무것도 없지만

코하네가 처음 느낀 낯섦은

입이 떨어지지 않게 만들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유키코는 끊임없는 말을 했다.


아마도 코하네의 긴장,

또는 마음을 풀어주려는 속셈일 것이다.

유키코는 노아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갈 예정이었고,

그곳에서 축복 속에

결혼식을 올리려는 참이었다.

이상하리만큼 계획은

차질 없이 척척, 진행되고 있었고,

아키라 또한 반기는 찰나였다.

유키코는 눈을 허공에 두며

실실 웃으며 말했다.


“이 땅에 다시 발을 디딜 때는

작은 아이 손을 잡고 올 거야,
한쪽은 노아의 손을 잡고,

한쪽은 내 손을 잡을 테지,
아키라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어떻게 상상만으로도

그런 웃음을 지을 수 있는지,

그때 유키코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의 모습이었다.

코하네는 유키코의 행복을

누구라도 무너뜨린다면

그 누가 됐든 용서치 않겠다고,

그녀에게 너스레를 떨며 말했었다.


아키라가 쓰러지고 난 후,

누구보다 더 먼저

그를 돌봐야 한다고 말한 사람은 노아다.

유키코는 사실 망설이는 눈치였다.

유키코가 올 때까지

돌봐 줄 코하네가 있기 때문에 고민했다.

코하네 또한 유키코와 노아의 계획이

수포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며칠을 망설였던 유키코는 결국,

옮겨 갔던 짐들을 모두 다시

구둣방으로 옮기기 시작했고,

모든 것은 자연스럽게

그리고 좋게 말해,

유키코의 차지가 되어 버렸다.


물론, 노아의 설득이

큰 영향을 준 것이 분명하다.

노아는 계획대로 부모님이 기다리는

그곳으로 홀로 떠났고,

코하네에게 유키코를 잘 부탁한다며

신신당부한 채 떠났다.


노아가 길지 않은 시간에

곧 돌아온다는 건,

변하지 않은 사실이지만,

코하네는 모든 것이 상실되어 버린

유키코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자신 없었다.

코하네는 노아와 유키코를

설득하며 고집을 꺾어 보려

갖은 노력을 다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딱, 한 가지뿐이다.


“내가 버림받았다고,

아버지도 똑같이 둘 순 없어.”


그 한마디에 코하네는

더 이상 그들을 설득할 수 있는

이유가 없었고,

따를 수밖에 없었다.

노아가 떠난 후로 코하네는

유키코를 찾아올 수가 없었다.

아닌 척, 하며 애써 웃는

유키코의 얼굴을 보게 되면

심장이 멈춘 채 고장 날 것만 같았다.


그 생각만 하면

코하네는 자신이 정말

이기적인 인간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결국, 자신을 위해서

유키코와 아키라를 찾아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유키코는 쉴 새 없이 말을 이어갔다.

유키코는 가끔,

코하네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멈추다,

다시 말을 이었다.


“노아, 전화가 왔어,

주변이 얼마나 시끄럽던지 말이야
가족들 목소리가

영어로 흘러나오니 정신이 없더라.”


코하네는 마치 노아는 꼭 돌아올 거야,

라고 강요하며 말하는 것 같다.


“노아의 가족은 벌써,

내가 가족이라도 된 것처럼 말해,
말을 알아듣긴 힘들지만 뭐,

좋은 사람들임이 분명해.”


“네, 노아를 보면 알 수 있어요.”


“아참, 아버진 네가 오는 걸 알고

계신 듯 눈을 부릅뜨고 계셔.”


코하네가 문을 드르륵, 열었다.

아키라가 늘 앉던 의자가 눈에 들어왔다.

볼 때마다 새것처럼 윤기가 흐르던 가죽이

주인의 돌봄을 잃어버렸는지

긁힌 자국과 푸석함이

어느새 배어 있다.

낡은 지팡이를 꼭 쥔 채

코하네를 기다렸다는 듯,

아이의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급격하게 나빠지는 것 같았는데...

한 번 나빠지고는, 쭉 그대로야.”


코하네는 앙상한 뼈와 핏줄이

엉켜 있는 손을 잡았다.

아키라가 입을 천천히 열었다.


“왔, 어?”


코하네가 고개를 끄덕인다.


“네, 할아버지 늦어서... 죄송해요.”


코하네를 바라보던

그의 검은 눈동자가 대답이라도 하듯

점점 동그래졌다.


“하루 종일 말 한마디 없으신 분이,

입이 떨어지셨네?”


코하네가 연신 아키라의 손을 쓰다듬었다.


“말을 잘 안 하셔,

의사 말로는 말도, 식탐도
모든 게 달라질 거라 했는데

아버지는 정 반대야.”


아키라를 돌보는 유키코의

밝은 표정은 도저히 환자를 돌보는

얼굴이 아니었다.

다시 코하네의 고개가 숙여진다.


“분간하기가 힘들어,

어느 때의 정신이 아픈 건지,

아프지 않은 건지 말이야.”


“할아버진, 그대로인 것 같은데.”


“그렇지? 느려지기만 했을 뿐.”


갑자기 아키라가 앙상한 손을

느릿느릿 저으며 코하네를

비켜서게 했다.

그는 선반 위의 이름이

새겨진 손수건을 천천히 집어

손에 꼭 쥐었다.

무언가 말하고 싶은 모양이지만,

입안에서만 얼버무리며

입을 오물거릴 뿐,

소리는 튀어나오지 않았다.


순간 코하네의 가슴속에

숨겨둔 깊은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아 치아를 앙, 깨물었다.

들키지 않으려 했지만,

그 감정은 고스란히 유키코에게 전해졌다.

코하네의 얼굴을 빤히 들여보던

아키라가 온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유키코는 자연스럽게

그의 어깨를 단단히 고정하며 꽉 잡았다.

유키코의 모습은 얼마 안 된 시간 동안

굉장히 숙련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키라의 경련에

코하네는 놀라 뒷걸음질 치다

바닥에 주저앉았다.


“늘, 있는 일이야 원하는 말이

튀어나오질 않으니까.”


그는 코하네가 오지 않는 동안,

사실 아주 빠르게 퇴행하고 있는 모습이다.

아키라는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고,

떨리던 어깨도 언제 그랬냐는 듯,

축 처져 있었다.

그는 굉장히 지쳐 보인다.


유키코가 아키라의 지팡이를

그의 손에서 내려놓으며 일으켰다.

아키라의 모습은

뼈가 그대로 드러나 앙상한 모습이지만,

늘 부축해야 하는 유키코에겐

무리였을 것이다.

유키코가 이불을 걷어 내며

내는 소리와 다르지 않다.


“좀 도와줄래?”


넋이 나간 채 그들을 바라보던 코하네는

대체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버벅거리다 유키코의 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아버지는 지금 단잠이 필요해.”


어설프게 좌우를 왔다 갔다 하는

코하네에게 손수건을 꽉 쥐고 있는

손을 가리키며 방향을 잡아 준다.

아키라의 옆구리를 짚는 순간,

뼈가 앙상하게 만져진다.

코하네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와 같은 신음을 내뱉었다.


“엇, 후.”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

아키라의 이름이 선명하게 새겨진 손수건이

툭, 하고 떨어졌다.

코하네는 아키라의 모습에

굉장히 혼란스러웠다.

병원에서 돌아오고 나서도

그는 코하네를 곧 잘 알아보고,

반응했었다.

워낙 말수가 없었던 터라,

많은 대화는 오고 가지 않았지만,

코하네를 알아보는 초점도 정확했다.


한 계절을 그냥 보낸 후,

돌아왔을 때 아키라의 모습은

영락없는 아이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좋아질 수 있는 시기를 뭉텅,

잃어버린 것 같아

코하네는 스스로 자책하지 않을 수가 없다.


늦은 밤, 술을 잔에 따르는 소리는

다른 이의 잠을 깨울 수 있을 만큼

호기심을 자극한다.

맥주를 따라내는 유키코의 야윈 손은

꼭, 아키라의 것과 꽤 닮아 있었다.

말이 필요 없는 혈육의 증거다.


“가끔, 아키라의 뇌 속이 궁금해,
과연 딸이라는 존재가 박혀 있을까란 생각.”


“할아버진 꼭, 알고 있으면서 모른 척, 해요 늘.”


코하네의 진심이 섞여 있는 말에

유키코는 피식, 하고 웃어 버린다.


“흐흣, 그런가?”


코하네가 고개를 끄덕인다.


“하나, 안타까운 건 그 독한 병을

내가 알고 있었다면
준비라도 했을 거란 거야,
그랬다면 급격하게 나빠지진 않았을 거야.”


“유키코 가장 가까이 곁에 있었던

제 잘못이 커요.”


유키코는 고개를 격하게 흔들며 코하네를 나무란다.


“그런 소리하면 안 되는 거, 알고 있지?”


“하지만 사실이에요.”


“쉿, 되돌릴 수 없는 걸 말하는 건

시간 낭비잖아?”


코하네가 자신이 지내 온 방을 쭉,

둘러보았다. 어느 것 하나,

사라진 흔적이 없다.

지저분하게 벽에 쓰인 한글이

선명하게 자신을 드러내고 있었다.


“어때? 그곳 생활은?”


“전, 아주 좋아요,

가끔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일하던 때가 그립기도 하지만.”


“마호가 있으니까, 아주 든든해.”


“늘, 미안한 맘이 드는 친구예요.”


“정신이 맑을 땐,

마호 어머니가 절인
고등어가 먹고 싶단 얘길 자주 해
그때마다 가끔 당신의 상황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아서 놀라기도 해.”



아키라와 닮은 앙상한 손은

들고 있는 맥주잔이 버거워 보일 정도다.

다행히 유키코는 맥주를 단숨에 들이켠다.


“한 날 마호 어머니가 절인 생선이라고

거짓말을 했어, 통 드시질 않으니까...
난 정말 놀랐어, 어디서 거짓말을 하냐며

한 십 년 전 내던 목소리로 호통을 치는 거야
놀라기도 했지만,

그 목소리가 얼마나 반갑던지,
그 자리에서 얼마나 크게 웃었는지 모를 거야.”


코하네는 유키코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뿐,

자신이 할 수 있는 대답은

아무것도 없다.


“정말 네 말대로 일부러

이러고 있는 건 아닐까? 라며
어이없는 생각을 하기도 해.”


유키코가 큰 소리로 웃자,

그녀도 따라 웃었다.

코하네는 준비해 온 말을

어떻게 풀어낼지 구둣방에

발을 들이기 전부터 고민 중이다.

떨어지지 않는 입이 원망스럽다.

어느새 유키코의 얼굴이

술에 발그레하다.


“아마 나도 제정신이 아니지 싶어.”


코하네가 놀라 유키코를 바라보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전보다

훨씬 안정된 느낌이야
늘 불안했던 삶을 내가 정말 살았었나,

하고 생각할 정도로 말이야.”


코하네가 유키코의 앙상한

나뭇가지를 쓰다듬었다.


“그때도 아키라는 단 하루도

유키코 얘길 하지 않은 적이 없었어요,
뭐… 질책하는 소리긴 했지만,

잘 알잖아요?
할아버지의 에두르는 사랑, 같은 거요.”


유키코는 마시던 맥주를

조금 뿜어내며 슬프게 웃었다.


“너무 못난 짓만 하고 살았어.”


“유키...”


“괜찮아 어쨌든 난 지금

아키라의 딸로 살고 있잖아?
비록 이런 모습으로 돌아왔지만,

불행 중에서 안정을 찾고 있어

꽤 이기적이지?”


유키코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고 코하네도 따라 웃었다.


“코하네, 난...”


유키코는 다음 말에 한참 공을 들였다.


“으응, 말해요.”


“난 아키라를 아직 용서하지 않았어.”


맥주잔의 비우기와 채우기는

얼음처럼 굳어 있었던

감정을 녹여 주었다.

직각으로 힘이 잔뜩 들어갔던

어깨가 풀리며

삼각형을 이루고 있었다.


“유키코 당신처럼 착한 딸은

세상에 없을 거예요.”


유키코가 연신 나뭇가지를 내 젓는다.

그녀 옆을 맥주병이

위태롭게 줄지어 서 있었다.

코하네는 움직이지 않은 것처럼

천천히 그것들을 내려놓았다.

유키코가 두 팔을 흔들며

일어나 금고 안의 갈색 구두를 꺼내어

코하네 앞에 밀었다.


“네 거잖아.”


“아...”


“혹시나 해서 신어 봤었어,

역시 내 것은 아니더라.”


유키코는 코하네가 미안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것을 알았는지,

금세 다른 곳을 바라보고

다른 이야깃거리를 생각하는 중이다.

코하네는 잊고 있었던

할아버지의 선물은

오늘따라 맘에 들지 않았다.


유키코는 얼마 남지 않은

머리칼을 움켜쥐더니

질끈 묶어 틀어 올렸다.

술은 그녀의 목덜미까지

붉은 계곡으로 뒤덮어 놓았다.


“유키코, 괜찮아요?”


“에잇, 술을 마시는데...

괜찮냐, 는 말은 정말 재미없지.”


“하하, 그렇네요.”


“아마도, 그 자식이 이것마저 훔치진 않을까,

노심초사했던 모양이야, 큿.”


유키코는 자신의 입으로

전남편의 얘기를 꺼내 놓고는

맘에 들지 않았는지 한숨을 내쉬며

다시 맥주를 들이켠다.

그리고 오랫동안

코하네의 얼굴을 빤히 들여보았다.


“넌 아무리 봐도 츠키노 같아

너무 똑 닮았어.”


“엄마도 자주 그런 말을 했어요.”


“그래서 더욱 널 미워할 수가 없었어,

정말 미워하고 싶었는데...
엄마가 세상을 떠났을 땐,

미안하지만, 난 츠키노를 원망했고 저주했어.”


코하네가 침을 꼴깍,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순간 돌아보니,

아버지가 아닌 엄마 곁을

지켰던 사람은 그녀였어
츠키노는 죽은 엄마 곁을

떠나는 법이 없었지,
언니들의 그 어떤 독한 말에도

흔들리는 법이 없었지...
모든 게 끝나고,

혼자 남은 그녀를 몰래 지켜봤어,
그때 츠키노는 세상을

통째로 잃어버린 듯한 표정을 하곤,
절망이 가득한

짐승의 울음을 뿜고 있었는데... “


그 누구와도 마음을 나눌 수 없었던

그때의 유키코가

고스란히 코하네에게 전해졌다.

누구보다 더 강한 얼굴을 하고 있었던

유키코는 순식간에 얼굴이 일그러지며

눈에서 물방울이 툭, 떨어진다.


“노아는, 꼭 내가 아키라 곁에

머물러야 맞는 거라 말했어
돌릴 수 없는 후회를

남기게 될 거라고 말이야,
하지만 내 눈에는 사실

노아만 보였기 때문에
그와의 관계에만 눈이 멀어

서운함을 감출 수가 없더라
마치 나쁜 그 자식에게

빠졌을 때처럼 말이야,
이젠 알아,

노아의 그 말이 그게 무슨 뜻인지...”


“유키코, 나도 지금 알았는걸요.”


“난 용서한 적도 없는데,

더 이상 아키라와 싸움은 안 되고,

좀 억울하긴 해.”


코하네는 희미하게 웃어 보이는

그녀의 등을 온기가 느껴질 때까지

쓰다듬었다.

아키라가 만들어 준 신발은

만든 사람을 닮았는지

짝짝이로 놓여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새 신발의 티도 한번 내지 못하고

색깔은 바래지고 낡아 버렸다.


바람에 스치는 종소리가

흐느끼는 유키코를 위로했고

창밖의 어슴푸레한 빛은

잔의 마지막을 채우라며 채근했다.

생각하지 못했던 기억이 문득, 떠오른다.


코하네가 아키라의

자그마한 방에서 깨어났을 때,

미닫이문 사이로 들어온 빛이

눈에 선했다.

빛의 끝은 눈에 보일 듯 말 듯한

흑백 사진을 향하고 있다.

그 흑백 사진의 주인공이

유키코의 어머니였다는 사실을,

코하네는 이제야 기억해 냈다.


온몸을 웅크리고 잠든

유키코의 모습에 가슴이 아려 온다.

쓴 침이 목을 타고 역류해

뱉어 내지만 가슴 아림에는 소용이 없다.

이른 새벽 한기가 집 안에 들이닥쳤다.

이맘 즘이면 오래된 나무의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찬 바람을 막을 준비를 했던

아키라가 떠올랐다.


매서운 한기가 더 들이닥치기 전에

그가 하던 일을 마호에게

부탁하기로 마음먹었다.

걷어치운 이불을

유키코의 목까지 쭈욱,

잡아당겨 덮어준다.


유키코는 얕은 잠 덕에

작은 소리에도 몸을 연신 움찔거렸다.

코하네는 조심스럽게 삐걱대는 계단을

오랜 시간을 들여 내려갔다.

계단을 모두 내려간 후에야,

쓴 침이 올라오는 것을 멈췄다.

목이 타는 뜨거움을 느낀다.

헛구역질이 올라와

수도꼭지에 입을 대고 벌컥대며

물을 마셨다.


구둣방 안으로 싱그러운

새벽빛이 들어왔다.

새벽의 푸르름은 아키라의 의자를

멋들어지게 표현했고,

그의 방으로 가는 길목을

훤히 비춰주었다.


출처, 미나미 양장점


코하네는 아키라의 의자에 앉아

오랫동안 밖을 응시하고 냄새를 맡았다.

마치 먼지다듬이가 툭,

튀어나올 것 같은 오래된

책 냄새지만,

그리 달콤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눈을 감으니, 공기 중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떠돌아다녔다.

그 목소리는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코하네의 목소리다.

숫자를 세는 목소리는

조금씩 누그러져 간다.

코하네의 입은 움직이지 않았으나,

소리는 계속 공기를 떠다니며

코하네의 눈이 스르르 감기기를 기다렸다.


오랜만에 깊은 잠이 들었다.

얼마 되지 않은 시간 동안

감은 눈은 개운함을 선사했다.

석양처럼 길게 들어온 아침 해가

유난히 반짝거린다.

밖이 훤히 드러나는 커튼에

빛이 스며들었다.

손을 뻗으니, 아키라의 손처럼

따뜻했고 사각거렸다.

곤히 잠든 아키라의 숨소리가

아이처럼 새근거린다.

늘 아침을 밝히는 해보다

더 먼저 하루를 시작했던 모습과는

상반되는 모습이다.

지금쯤 코하네를 깨우며

잔소리를 시작했을 그다.

빛을 머금은 그를 바라보며

그녀는 눈을 깜박거렸다.


아키라의 머리 밭에

이름이 새겨진 손수건이 놓여 있었다.

아키라는 손수건의 정체를

잊지 않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고요히 잠든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속삭인다.


“할아버지, 다 알고 계신 거죠?”


핏줄이 불거져 나온 그의 손 위에

코하네의 손을 살포시 올린다.


“할아버지가 키운 꽃이 보고 싶어요.”


아키라의 수염을 바라보며

눈으로 웃음을 지었다.


“힛, 할아버지가 잘랐을까?

여전히 삐뚤 해.”


코하네는 이불을 끌어당기며

다시 속삭였다.


“할아버지, 사랑해요.”


코하네는 숫자를 세며

발걸음을 맞추어 걸었다.

아키라가 금방이라도 코하네,라는

이름을 부르며 불러 세울 것만 같았다.

마치 부른 것 같은 착각에

고개를 돌려 보지만

여전히 그는 다른 세상에

머물러 잠이 들어 있다.

아키라는 웃고 있던 게 분명하다.


출처, 4월 이야기



따뜻하게 스며들었던 빛은

밖의 온도를 착각하게 했다.

살을 애일 것 같은 바람은

심장이 느끼는 통증을

금세 잊게 해주는 고마운 존재가 된다.

바람은 더욱 잔인하게

코하네의 심장을 후려쳤고,

아키라의 갈색 신발은

코하네의 걸음을 더욱 더디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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