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미익(尾翼)
미익(尾翼)
1976년의 새해를 알리는
요란한 소리와 사람들의 들뜸은
여전히 가라앉지 못한 채
구름 위를 둥둥 떠다녔다.
오랜만의 여유에 똑같은 억양과
똑같은 단어를 쓰는 바보상자를 바라보다
화가 치밀었는지 물 잔을 집어던진다.
나오코는 자기 행동에 놀라
눈을 흘깃하더니 플라스틱 컵이라는 것을
보고 내심 안도했다.
투박한 소리를 들은 겐토는
아이를 안고 거실로 나와
나오코를 허탈하게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야?”
나오코는 쏟긴 물을 가리키며
보면 몰라? 란 눈빛으로 겐토를 타박한다.
젖은 수건을 쓱쓱, 밀며
닦기를 멈추지 않았다.
겐토는 벌써 같은 말을
몇 번째 반복하는 중이다.
“나오코, 답답해하지 말고,
어디든 다녀와,
쇼는 걱정할 필요 없다니까?”
여러 번 친절을 베푸는
겐토의 모습이 못마땅한
나오코는 헛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알아, 알아들었어,
같은 말 그만 좀 얘기할 순 없어?”
겐토는 이유 없이 화가 잔뜩 나 있는
나오코의 말투에 짜증이 났지만,
이내 숨을 골랐다.
“당신이 이러고 있으니까 하는 소리야.”
나오코는 젖은 수건을
바닥에 툭, 하고 떨어트렸다.
“정말, 말 좀 그만해 응?”
아이를 안고 있던 겐토는
말 대신 숨을 고르며 나오코의 뒤로,
다시 방으로 걸음을 옮긴다.
“후우...”
나오코는 이유 없이 짜증을 내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몰래 그릇을 일부러 깨뜨리거나
하는 행동이 잘못됐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행동은 끝을 모르고
툭툭,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마다
늘고 또 늘었다.
나오코는 무엇인가에 쫓기듯
겐토와 빠르게 결혼식을 올렸고,
시간을 잡고 여유 부릴 순간도 없이
배가 무거워졌다.
임신한 사실을 모르고 한 결혼은
아니었지만, 미네코의 말 대로
순간순간 후회가 밀려오는 시간이 늘어났다.
나오코는 이제껏 빌어왔던
모든 저주가 자신에게 내렸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집 안마다 향을 피워 댔고,
겐토와 아이는 늘 매캐한 냄새를
맡아야만 했다.
겐토의 끊임없는 설득에도
나오코는 아랑곳하지 않았고,
전보다 더 이상한 행동들은 늘기만 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나오코를
말리기보다 아이를 지키는 것에 열중했다.
그게 더 빠른 방법이라 생각했다.
나오코가 하나의 의식처럼 행하는
향 피기를 할 때면 겐토는
아이((쇼)와 함께 방 안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나오코는 겐토에게 빈정거린다.
“어떤 집이든,
향을 피우고 기도를 올려,
왜 그리 유난스러운 거야?”
분명 나오코는 자기의 행동이
도가 지나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유난스러운 건 그가 아니라
자신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겐토가 가장 이해 못 하는 부분은
그가 출근한 시간부터
퇴근하는 시간까지는
향을 피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모든 원인은 그,라고
딱 꼬집어 주는 행동 중 하나였다.
나오코는 결혼하기 전부터
겐토에게 그리 친절한 사람이 아니었다.
어쨌든 나오코는 겐토를 선택했고,
겐토는 나오코의 차가운 모습도
감싸고 살아갈 자신이 있었다.
쇼를 낳고 점점 더 켄토에게
소원한 나오코지만,
겐토는 지금도 변함없이
나오코를 사랑한다.
겐토는 나오코가 예전처럼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환하게 웃는 얼굴을 보고 싶었다.
일주일 한 번 돌아오는 휴일은
온전히 그녀를 위해 아이 쇼를 맡았다.
하지만 여전히 나오코는
집 밖을 나서지 않았다.
겐토가 나오코의 친구인 치호를
찾아 나섰던 것도 그 이유이다.
나오코는 입이 닳도록 치호 얘기를 했다.
보고 싶다는 언어를 사용하진 않았지만,
쉽사리 누군가와 친해질 수 없는
사람이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늘 치호라는 이름을 입에 달고 있는
나오코를 위해 그녀를 찾아 주고 싶었다.
나오코는 치호라는 친구는
아주 예쁜 얼굴을 하고
평범한 집에서 사랑을 받고
자란 아이라고 했다.
학교에서 치호의 인기는
엄청났다는 말과 함께,
나오코를 섬세하게 챙겨 주었다고 한다.
그런 친구와 왜,
연락을 끊고 살게 됐는지는 의문이지만,
늘 치호를 자랑하는 나오코에게
선물해 주고 싶었다.
쇼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오코의 생일이 돌아왔고,
겐토 고모들의 초대로
오랜만에 집에 돌아왔을 때였다.
마침, 나오코는 겐토의 친척에게
온갖 달콤한 말들을 듣고 있었고,
반짝이는 선물까지, 받고
오랜만에 자주 웃는 얼굴을 볼 수 있던 터였다.
겐토는 어렵게 치호와 연락이 닿았고,
다행히 치호는 그곳에서
가정을 꾸리고 두 아이의 엄마로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겐토는 나오코에게 생일 선물로
치호를 데리고 와
깜짝 파티를 열어 준다면
얼마나 기뻐할지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돋았다.
겐토는 계획대로 쇼를
고모에게 맡긴 채,
나오코의 손을 잡고
시끌벅적 한 집을 빠져나왔다.
나오코는 대체 무슨 일이냐며
그를 채근하며 싱글벙글 웃기만 하는
그를 만류하진 않았다.
기분 좋은 일이 생길 것을
암시하는 겐토의 눈빛은
정말 행복해 보였기 때문이다.
멀지 않은 곳에 다다랐을 때,
새로 들어선 지 얼마 안 된
카페로 겐토가 손을 잡아끌었다.
늦은 시간이었고, 다행히 사람도 많지 않았다.
겐토가 나오코의 손을 잡아당기고 있지만,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곤
얼음이 되어 나오코는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치호를 본 것이었다.
겐토도 직감적으로 치호임을 알고
얼굴을 확인했다.
한 눈에도 그녀가 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치호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나오코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당연히 겐토는 나오코와 함께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나오코가 말한 치호라는 친구가
그녀가 맞는 건지 어안이 벙벙했다.
당황스러운 건 겐토도 마찬가지다.
“나오코.”
치호는 키가 더 커진 나오코와
비교하면 반도 되지 않았다.
“나오코? 정말 나오코야?”
나오코는 여전히 얼음처럼
굳어 입이 열리지 않았다.
“나야 치호,
못 알아보진 않을 텐데?”
치호는 자신의 등을 보이며
웃음을 지었다.
그제야 나오코의 입이
열리기 시작했다.
“응, 오랜만이야.”
“넌 하나도 안 변했구나?
그대로야.”
겐토가 넋을 빼고 치호를 바라보았다.
“안녕하세요,
전화 통화한 나오코 남편분,
맞으시죠?”
“아 네 반갑습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겐토는 보지 않으려
무척이나 애쓰지만
자꾸만 그녀의 등 뒤에
시선이 꽂히고 있었다.
“나오코, 난 네가 날
이렇게 찾고 있는지,
꿈에도 몰랐어,
이렇게 먼저 찾아 줘서 고마워.”
나오코는 창백해진 얼굴을 하곤,
겐토를 흘긋거리며 말했다.
“치호, 잠깐만 기다려 줄래?”
“으응? 응, 그럴게.”
치호는 환하게 웃었다.
이번엔 나오코가 겐토의 손을
이끌고 밖을 나섰다.
겐토는 아직도 넋이 나간 상태였다.
나오코는 이를 앙 물며 말했다.
“이게 무슨 짓이야?”
“나오코, 난.”
그녀가 겐토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하, 됐다 됐어, 어차피 벌어졌으니까,
제발 눈앞에서 사라져 주겠어?”
“나오코...”
“사라져 주겠어? 사라지라고 당장.”
나오코는 소리를 지르는 대신
이를 악물고 얘기하는 중이다.
겐토는 곧장 이츠키를 향했고,
목구멍으로 마구 들어간 술은
어떻게 집을 향해 걸어갔는지
기억조차 하지 못하게 했다.
그날 이후, 나오코는
겐토를 남처럼 대했고,
저주가 내렸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마나츠에게 들은 얘기로는
치호는 선천적으로
등이 굽은 장애를 갖고 있었다고 했다.
집은 너무 가난해
하루 끼니를 먹는 것조차
어려운 환경이었고,
치호를 놀리거나 구박하는 아이들을
나오코가 호되게 혼내 준 후
급격히 친해졌을 거란 얘기를 들었다.
마치 슈퍼맨처럼 짜잔 하고
나타난 나오코는 소문이 자자했고
이 좁은 마을에서
마나츠 또한 모를 리 없었다.
그들은 그렇게 비밀 없는 사이가
됐다고 했다.
겐토는 나오코를 이해할 수가 없다.
왜 자신에게 치호에 대해
완벽한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세월이 흐른 지금도 알 수가 없다.
치호는 같은 학교를 나온 남학생과
딱, 스무 살이 되던 해에 결혼했고,
딸아이 둘을 낳고 살고 있다.
아마도 결혼식은 올리진 않았던 것 같다.
당연히 대학이란 곳은 꿈꾸지 못했고,
남편 또한 가난했다.
그는 식당에서 설거지와 허드렛일을
성실히 한 덕에 어깨너머로
배운 음식 솜씨로 재주를 부렸다.
사람 네 명 정도면 꽉 들어차
보이는 식당은 작은 동네지만
꽤 정평이 나 있었던 상태다.
또한 장애를 갖고 있는 아내를
끔찍이도 사랑하고 아끼는
남편으로도 소문이 자자했다.
다행히 두 딸은 정상적인 등을 갖고 있었고,
하루도 끼니를 거르거나,
치호처럼 구멍 난 실내화를
꿰맨 채 신고 다니지도,
우정을 구걸하지도 않는 삶을 살고 있었다.
몇 년 만에 만난 치호의 등은
완벽하진 않지만 나오코의 눈에는
거짓말처럼 쭉, 펴진 등처럼 보였다.
심하게 작은 키가 오히려
장애를 티 나게 하는 부분이지만,
그녀를 잘 알고 있었던 나오코가
봤을 땐, 완벽한 등, 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말 완벽한 어른처럼 보이는
치호는, 주뼛거리며
주변을 훑던 버릇도,
남이 먹는 모습을 보고
침을 꼴깍거리지도,
굽은 등을 더 굽어 보이게 하는
기죽은 행동도 하지 않았다.
나오코 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없다고 생각한 치호가
행복이란 단어를 이마에 줄줄,
흘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볼에는 발그레한 볼 터치까지
한 모양이었고,
틀어 올린 머리카락은
숱이 많고 윤기가 흘렀다.
내내 웃음을 짓고 있는 치호는
정말이지 행복해 보였다.
얼굴에서 뿜어져 나오는
행복이란 글자가 나오코를
당황스럽게 만들고 있다.
나오코는 유리 너머로
치호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카페의 주인과는 잘 아는 사이였는지,
치호에게 무언가 말을 건네며
연신 웃음을 지었다.
주인은 그녀에게 머리를 숙이며
웃는 시늉까지 해 보였다.
나오코가 아닌 다른 누군가와
이를 드러내며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정말이지 굉장해 보였다.
나오코가 알고 있던 치호의 모습은
완벽하게 사라진 것이다.
나오코는 예전 치호 주변의
모든 환경이 싫었다.
치호 곁에 있으면 우울했고,
그 상황에서 영영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아 두려웠다.
치호는 나오코에게 아팠고 그리웠지만
창피한 존재였다.
몇 번이고 그녀를 만나고 싶었지만,
시궁창에서 방금 나온 모습을 하고
우울한 눈물을 보이고
한탄스러운 말을 할 것 같은
치호가 두려웠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치호는 하즈키도,
친아빠의 죽음도,
치호와 같이 구멍 난 실내화를
꿰매 신던 그 모든 과거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치부를 드러내는 것 같은
두려움은 더욱 컸다.
그런 치호가 지금 이토록
완벽하게 행복한 모습을 하고 있다니
믿어지지 않음과
조금의 불편한 심정이다.
치호가 입은 옥색의
헐렁한 원피스가 바람에
찰랑거린다.
그 사이로 볼록해 보이는
배는 분명 아이가 꼼지락거리고
있는 모습이다.
나오코는 자신이 무엇을
바라고 있었는지를 잊고 있었다.
이상한 건,
오히려 치호답지 않은 모습을
확인하고 나니, 더욱 치호가
보고 싶지 않다.
나오코 심장 속에서
이유 모를 분노 같은 것이
치밀어 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나오코가 두려워했던 모습과는
반대인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치호를 보고 싶지 않았다.
치호가 볼록 나온 배를 감싸며
다시 원피스를 찰랑거리고
나오코에게 다가왔다.
나오코가 입을 오물오물, 중얼거렸다.
나오코의 모습은 치호 앞에선
그때에도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오지 마 오지 마, 싫어 싫다고.”
나오코는 조금씩 뒷걸음질 치다
빠르게 뛰었다.
뒤통수로 다급한 치호의 목소리가 들린다.
“나오코, 나오코?
무슨 일이야? 나오코?"
나오코는 눈을 질끈 감고
무언가 부딪혀 멈추길 바라며
계속 뛰었다.
속물 같은 자신의 감정을
토해 내고 싶었다.
숨이 머리끝까지 차오르지만
멈추지 않았다.
푹 꺼진 아스팔트 위에서
발목이 꺾이더니,
그제야 털썩 주저앉는다.
“하악, 하악, 헉 억.”
몇 시간째 비어 있던 위에서
노란 물이 역류했다.
눈앞이 흐려지더니,
점점 깜깜해졌다.
숨을 쉬려면 입을 벌려야 했지만,
공기가 들어오기는커녕,
쓴 물만 계속 역류했다.
딱딱한 아스팔트의 냉기가
등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나오코의 바람대로 콱, 하는
묵직한 느낌이 머리에 닿았다.
원하는 대로 벼랑에서 떨어지는
기분처럼 아찔하고 뜨거웠다.
눈을 떴을 땐, 거짓말처럼
그가, 하즈키가 보였다.
몇 번이고 눈을 깜박여 보았다.
꿈이라면 다시 눈을 감고 싶었다.
그가 입을 벌리고 말하고 있지만,
귓속은 한참을 윙윙거리기만
할 뿐이다.
아, 그는 하즈키가 아니다.
나오코는 눈을 감고
나지막이 겐토에게 말했다.
“나… 도 행복, 하고 싶어.”
겐토가 나오코의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다시 곤히 잠든 모습을 확인하더니,
병실을 빠져나왔다.
겐토는 고모가 안고 있던 아들
쇼를 받아 꼭 안았다.
나오코는 지금 순간에도 그때의 그, 가
겐토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물론, 겐토 또한 자신이
그였다는 사실 또한 알지 못했다.
나오코는 차도 위에
쓰러져 있었고, 다행히 빠르게
병원으로 옮겨졌다.
찻길 한중간에 쓰러져 있던 그녀지만,
의사는 다행히 심각한 외상은
없다고 말했다.
가벼운 탈수 증상이 있었고,
약간의 뇌진탕 증상으로
심각한 상황이 아니라고 했다.
나오코는 병원을 빠져나온 순간부터,
며칠 동안 입을 열지도
무언가를 삼키지도 않았다.
겐토는 그녀에게 화를 내다 못해
무릎을 꿇고 빌기까지 했다.
“내가 정말 잘못했어, 제발 먹자 응?”
당연히 나오코는 아랑곳하지 않고,
결국 다시 도로 한가운데서 쓰러진 채,
같은 증상으로 입원할 수밖에 없었다.
치호는 겐토에게 소식을 들었고,
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집으로 쳐들어왔다.
치호는 그 누구도 거부할 수 없게
만드는 모든 역경을 이겨낸 듯한
강한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었다.
“겐토 씨, 미안하지만
자리 좀 비켜 주세요,
죄송합니다.”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
눈을 부릅뜨고 있는
카리스마 있는 모습에
반사적으로 예,라는 말이 튀어나왔고,
몸은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저절로 밖을 향했다.
치호는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은
시간을 나오코와 보내고 난 뒤,
해맑은 웃음을 겐토에게
보여주며 등을 보였다.
치호의 애쓰는 듯한 웃음은
극복하지 못할 일은 없어요,라고
말하고 있었다.
겐토는 자신도 모르게
한참 고개를 숙이고
부동자세를 취했다.
“나오코는 잘 회복하고 있군요?
실례가 많았습니다.”
“제가 더 죄송합니다,
저기 차라도 하고 가시겠습니까?”
그녀가 다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고맙지만,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어서요, 그럼.”
겐토는 나오코가 회복할 거라는
치호의 말을 의심하지 않는다.
방문에 귀를 가까이 갖다 대도
들리지 않는 그들의 목소리는
대체 어디로 사라졌을까
의문이 들었지만.
치호의 웃음을 믿었다.
그녀가 돌아간 후,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의
적막이 사방에 깔려 있었다.
벌써, 한 달째 쇼를 보지 못했던 나오코다.
엄마 자격이 있을까, 란
생각이 들 정도로
나오코는 쇼를 궁금해하지 않았다.
고모의 말에 의하면
쇼 또한 엄마를 찾지 않고
잘 지내고 있다고 했다.
"드르르륵"
미닫이문을 여는 소리는
늘 불쾌한 소리를 만들어 낸다.
적막이 깨지는 소리에도
나오코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고,
천장만 바라본다.
수많은 단어가 목구멍을 드나들지만,
아직 때가 아닌 듯, 싶어
불쾌한 소리가 나는
미닫이문을 다시 닫아야만 했다.
"드르르륵"
그때 나오코의 목소리가 들렸다.
“쇼를 데리러 가야겠어.”
얼마 만에 듣는 나오코의 목소리인지,
반가움에 콧등이 시큰거렸다.
겐토는 나오코를 병원에
입원시켜야 한다는 가족들의 말을
고민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어쩌면 정말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날이 올 수도 있다란 생각에
밤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먹을 것을 거부한 나오코의
앙상한 뼈가 불거져 나온 것을
확인할 때마다 당장이라도
입원을 시키겠다, 고 굳게 마음먹곤 했다.
지금 겐토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오랫동안 고민하는 중이다.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국수를 먹어야겠어.”
“그, 그래 그러자.”
나오코가 몸을 비틀거리며
빠른 속도로 미닫이문을 밀어제쳤다.
"드르르륵."
겐토는 나오코가 다시
쓰러지기라도 할까,
두 손을 벌리며 그녀의 뒤를
아슬아슬하게 따라가는 중이다.
겐토는 쇼를 데리러 가는 내내,
피곤한 줄도 모르고
몇 시간의 운전을 거뜬히 했다.
쇼보다 먼저 나오코에게 중요했던 건,
국수였던 모양이다.
한 달 내내 링거에 의지한 채,
굶은 사람의 위치곤,
엄청난 양을 순식간에 해치워 버렸다.
싹 비워낸 그릇에
국물 한 방울도 남기지 않았다.
나오코는 아주 오랜만에
쇼를 끌어안고
깊은 잠에 빠져 버렸다.
나오코가 온다는 말에
고모들은 하나둘, 모여 쉿, 하는
소리를 연발하며 고개를 내 저으며 말했다.
“정말 괜찮은 거야?
우선은 쇼가 안전해야 해 겐토.”
하나 같이 덩치 큰 고모들은
세 명만 모여도 집 안이 꽉 차 보였다.
늘 북적거렸고,
정신이 없음은 물론이다.
나오코는 그 모습이 늘 숨이 막힌다며
그나마 일 년에 한두 번 밖에 오지 않은
이곳을 썩 내키지 않아 했다.
물론, 숙면한 적 또한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 나오코가 깊은 잠에 빠졌고,
숨이 막힐 것 같은 몸집을 한
고모들은 숨찬 소리를 내며
연신 쇼의 이름을 말하며
수다를 떨었다.
겐토는 쇼를 애지중지하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뿜어내는
고모들의 모습을 보면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쇼를 도쿄에 데리고 온 지
일주일 만에 나오코는
살이 찌기 시작했다.
살가죽이 비틀어질 정도의 광대는
손을 갖다 대면 튕겨 오를 정도로
탱탱해졌고, 붉은빛이 도는 피부는
크레파스의 빛나는
살색을 말하는 듯, 맑았다.
잘록한 허리는
살집이 오른 엉덩이 덕에
더욱 잘록해 보이기까지 했다.
겐토는 그녀를 바라보지 않는 것처럼,
스치듯 더욱 자주 그녀를 흘긋거렸다.
나오코의 허리를 감싸 안으려 다,
봉변을 당할 뻔했지만,
그는 그 모습 또한 싫지 않았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왔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 갑갑한 병원에
나오코를 집어넣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안도했다.
겐토는 나오코 앞에서 치, 자가
들어가는 단어조차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들의 관계나, 치호에 대한
거짓말에 대한 궁금증은 날이 갈수록,
깊어만 갔지만 그는 절대 내색하지 않았다.
겐토는 나오코 몰래
치호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고,
가끔 마나츠를 통해
치호의 소식을 듣곤 했다.
임신 중이던 치호는
셋째 아이를 낳았다고 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안타까운 소식이 들려왔다.
바라던 아들을 낳았지만,
미숙아로 태어나 적극적인 치료에도
불구하고 그녀 곁을 떠났다는 것이다.
그 소식을 나오코가
들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어느 순간 나오코가 겐토에게 먼저
치호 얘기를 끄집어낸 것이다.
아마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을 게 뻔했다.
그때 겐토는 나오코가 진심으로
치호를 걱정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치호를 만나러 가야겠어.”
겐토는 다행이라고 생각했고,
나오코가 다시 치호와 둘도 없는
사이가 되길 바라고 있었다.
나오코가 치호를 만나겠다고
결심을 끝내기까지
몇 달의 시간이 필요했다.
치호와 날짜를 잡았다는 소식에
겐토는 당연히 회사에 휴가를 냈고,
쇼를 돌볼 작정이었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그날의 쇼에 대한 집착은
대단해 보였다.
꼭 데리고 나가겠다는
그녀의 고집을 꺾을 수가 없었다.
결국 내키진 않은 그 둘을 보내고
꼬박 하루를 일 년처럼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나오코는 분명 다음날, 도착 예정이었다.
그런데 새벽 두 시가 채 안 된
시간에 나오코는 문을 두드렸다.
쇼를 안고 문을 열자마자,
술을 벌컥거리기 시작했다.
뭔가 잘못된 것이 분명했으나,
불안함에 그 어떤 말도
입으로 내뱉을 수가 없었다.
쇼는 먼 거리를 오가느라 지쳤는지,
칭얼대기 시작했고,
날이 밝을 때까지도
잠을 자지 않았다.
어렵게 잠든 쇼의 모습을 보니,
마지막 눈물이 움푹 팬
코와 눈 사이를 찰랑이고 있었다.
화가 났지만, 나오코를 지켜보는
수밖에 없다.
겐토도 따라 얼굴을 비추는
태양을 맞으며 맥주를 들이켰다.
나오코의 눈은 반은 감긴 채,
초점도 정확하지 않았다.
겐토는 비워진 맥주병을
소리 내지 않고
천천히 옮겨 담는 중이었다.
“치호가 임신을 했어.”
겐토는 눈치를 살피며
조용히 다시 자리에 앉아 경청했다.
“셋째 아이가 죽은 지 얼마 됐다고...”
적당한 단어를 골라서
얘기해야만 했지만,
겐토는 반사적으로 말이 툭 튀어나왔다.
“잘됐네.”
“난 위로하러 간 거지,
축하하러 간 게 아니야
눈물을 흘리는 치호를
안아주려 간 거야, 그런데..."
“그러니까, 잘 된…”
“아무 말하지 마, 부탁이야.”
나오코는 비틀거리며
방으로 사라졌다.
겐토는 나오코가 말하는 행복하고
싶다는 말에 대해
몇 번이고 생각하고 고민했다.
그렇다고 나오코는 둘째 아이를
갖길 원하는 것도 아니었고
넉넉히 재산을 더 갖고 싶어
한 것도 아니다.
나오코가 말한 행복해지고 싶다는 말은
겐토가 넘지 못한 또 하나의 그녀였다.
겐토가 방 안에서 쇼를 위해
온갖 기교 섞인 목소리로
요란하게 떠들어 대고 있었다.
쇼는 그 어떤 기교 섞인 말과
손짓을 해 보여도
동심을 자극하는 모든 것들에 있어서
반응이 그리 격하지 않은 아이다.
헬륨 가스를 잔뜩 들이마신
목소리로 또래 아이들에게
말만 걸어도 그들은 자지러지게 웃는다.
하지만 쇼는 광대 짓을 하는
그 누군가를 빤히 바라만 볼 뿐
반응은 미비했다.
쇼에게 좋은 아빠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겐토가 고맙지만,
쇼의 성향을 아예 모르고
헛물켜는 그가 조금은
한심해 보이기도 한다.
나오코는 반복되는 움직임을 하며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끊임없이 비춰 보았다.
어느 방향으로 몸을 움직여 보아도
구부정한 어깨와 두부처럼 찰랑거리는
살이 붙어 있는 옆구리는
올록볼록했다.
마치 누가 더 튀어나올까,
라며 경쟁이라도 하는 것처럼
앞을 다투었다.
목까지 올라오는 흰색 니트는
그녀의 숨을 조이기에 충분했다.
여전히 딱, 맞아 들어갈 줄 알았던
착각이 뱃살을 더욱 도드라지게 한다.
축 처진 가슴은 살이 찐
고릴라를 연상케 했다.
거울에 비친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나오코는 뭔가 생각난 듯,
옷장을 뒤졌고,
커다란 크기의 코트를 꺼내 들었다.
겐토가 입어도 적당히 맞을 듯한 크기다.
코트를 걸치더니 단추를 꼭꼭,
걸어 잠그며 튀어나온
뱃살의 흔적을 없애 버렸다.
커다란 코트 덕에
나오코의 몸은 감춰졌고,
큰 키 또한 그 연기를 한몫 거들었다.
오랫동안 손질하지 못했던
머리카락은 꼭, 치호의 머리 모양 마냥
바싹, 틀어 올리며 푸석함을 감추었다.
붉은 립스틱은 나오코의 통통한
볼살로 가는 시선을 빼앗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진한 머스크향과 지갑 속의
두둑한 현금은 그녀를 자아도취에
빠지도록 만들었다.
“난 아직 나오코야.”
작은 새와 큰 새
특별한 곳에 가지 않아도
지하철 속 가지각색의 사람들은
볼거리를 충족시켜 준다.
나오코는 갓 성인이 된 것 같은
연인들을 바라보았다.
마치 손을 놓으면
지구가 멸망이라도 할 것처럼
그들은 연결되어 있었다.
지상으로 빠져나온 열차 안에
빛이 스며들었다.
마치 학교 앞에서
나오코를 기다리고 있던
하즈키의 모습과도 겹쳐 보인다.
그때의 하즈키는
나오코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연인의 남자도
여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빛이 남자의 얼굴에
오랫동안 스며들었다.
여자의 얼굴은 못생긴 나오코의
어릴 적 얼굴을 떠올리게 했다.
나오코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먼 길을 떠나온 사람처럼
나오코의 심장은 두근거리기 시작했고,
가족이 있는 곳과 반대로,
더 반대로 걸을 때마다
심장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역을 나와 보니,
밝은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정오의 햇살은
커다란 눈을 가느다랗게 만든다.
햇살의 반가운 인사에
잠시 앞이 보이질 않았다.
잠시 뿌옇던 주위가
선명하게 보이더니
새하얀 분을 칠하고
붉은 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밀고 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보기만 해도 목이 부러질 것처럼
둥글고 둔탁해 보이는 머리칼을
틀어 올리고 기모노를 입고 있었다.
걸음걸이의 보폭은 어찌나 짧은지
위태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마치 걸을 때마다 총총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재주라도 부리듯,
위태로움은 매력으로
철철 넘쳐흘렀다.
나오코는 자신도 모르게
주술에 걸려든 사람처럼
그들을 따라가고 있었다.
바람이 반대로 들이닥치는 바람에
그들의 분가루가 내뿜는 향이
넓게 퍼져 나갔다.
길거리에 놓인 사람들은
모두 목적을 두고 늦을세라
연신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바삐 걸었다.
나오코만 어떤 목적도 없이
끝없이 걷기만을 반복했다.
눈에 꽂힌 태양은
어느새 내려와 냉기를 가득 품은
차가운 바람을 느끼게 한다.
코트의 여밈이 느슨한 탓에
벌어진 틈 사이로 바람이
비집고 들어왔다.
코끝은 발개지고
자신도 모르게 나온 콧물은
오후 햇살에 반짝거렸다.
바라보기만 해도 따뜻한
온기가 가득 차 있는
유리 속 실내에 비친 사람들은
연신 후루룩, 하는 모습이다.
온기는 유리에 습기를 가득 머금게 했다.
손가락으로 훑어 내리면
뽀드득, 하고 소리 낼 것이 분명하다.
가게 안의 문을 열자
상상했던 것보다 더 따뜻한 온기가
얼굴을 감쌌다.
반짝거렸던 콧물은 더 이상
매력 없는 지저분한 것이 되어 버린다.
빠르게 콧물을 닦고 자리를 잡았다.
머리 위로 돌아다니는
온기 속 가다랑어의 진한 향이 맴돌았다.
입을 벌리면 마치 맛있는 국물을
맛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좁은 공간의 주방은
흰옷을 차려입은 한 사람이 꼭,
몇 사람이 있는 것처럼
바쁘게 움직인다.
흰옷을 입은 사람의 눈썹은
어쩌다 쭉, 뻗어 나온
기다란 털이 자릴 잡고 있었다.
눈에 띈 그것들을
잘라 낼 법도 했을 텐데,
무슨 이유에서 인지,
그는 그것들을 나풀거리고 있었다.
가락국수를 만들어 파는 사람과는
어울리지 않은 행색이지만,
나오코는 비어 있는 위를 부여잡고
냉기를 머금은 곳으로 나갈 용기는 없다.
바쁘게 움직이는
굵고 뭉툭한 손은
이 일이 고된 일임을 짐작하게 한다.
그의 뭉툭한 손은 순간
나오코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타다요시의 뭉툭한 손가락이 떠올랐다.
생각을 더듬어 보니
타다요시가 전직 군인이었다는 것
외에 어떤 공간에서 무슨 일을 했고
어떻게 돈을 벌었는지
알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월급날이 다가오면
그가 들고 올 선물에 눈이 더 갔던 건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뭉툭한 손가락처럼
그 사람의 목소리도 뭉툭하고 낮았다.
“주문!”
그의 말은 아주 짧았다.
나오코는 대답 대신
걸려 있는 메뉴 중 가장 큰
글씨의 가락국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기다리쇼.”
뭐가 그리들 바쁜지,
허겁지겁 먹던 사람들이
하나둘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의아했던 건, 빈자리엔
다시 새로운 사람들로 바쁘게 채워진다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급하게.
십여 분이 지났을까,
뭉툭한 손이 큰 그릇을 들고
그녀 앞에 놓았다.
“맛있게 드시오.”
내던지듯 놓인 그릇에
국물이 찰랑거렸지만,
신기하게도 넘치진 않았다.
그 사람은 꽤 능력자처럼 보였다.
나오코는 그의 행동에
맘 상한 것도 잊은 채
가락국수 위 소복이 쌓인 고명에
눈이 휘둥그렇다.
윤기가 흐르는 미역과,
튀김, 분홍색을 띤 어묵,
하얗고 울퉁불퉁한 면발,
투명한 갈색의 육수,
흔히 볼 수 있는 가락국수의 질이 아니다.
가락국수의 면발은 주인처럼 투박했다.
나오코의 입은 뜨거운 국물을 먼저
넣어 달라고 애원한다.
자신도 모르게 국물 맛을 보자마자,
감탄사도 잊은 채
허겁지겁 면발을 당기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허겁지겁, 은
바쁜 탓이 아님을 증명하는 순간이다.
투박하게 움푹 팬 그릇은
남아있는 음식의 움직임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게 말끔했다.
마치 설거지를 막 끝낸
그릇의 모양이다.
그녀의 얼굴은 살색을 잃어버린 지
오래고 붉어진 얼굴과
입술은 같은 색을 띠고 있었다.
“하아아.”
나오코는 최대한
긴 숨을 바닥으로 내리깔았다.
빈 그릇을 가져간
투박한 손의 주인장이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마치 나오코의 맘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눈으로 배시시 웃어 보였다.
먹느라 정신없던 그녀는
창밖의 흰 그림을 그제야 바라보았다.
아주 잠시 어찌나 굵은 눈발을 날렸는지,
그 새 아스팔트 위에 쌓이는 중이다.
강한 바람에 사선으로 내리는
굵은 눈은 마치 가락국수의
희고 굵은 면발과도 같아 보인다.
따뜻함에 몸이 점점
바닥으로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고개를 뒤흔들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두터운 지갑 속에서
지폐 한 장을 꺼내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이보시오, 이보시오.”
나오코가 남긴 지폐는
가락국수 다섯 그릇의 가격이었다.
잠시 후, 나오코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오코를 부르는 소리는 딱,
두 번 만에 잠잠해졌다.
가락국수가 바람과 함께
그녀의 볼을 스치거나,
내려앉아 서서히 녹아 사라졌다.
그동안 느끼던 꼬리뼈의 통증은
익숙해질 법도 했지만,
여전히 딱딱한 의자의
솟아오른 부분은
코하네의 인내심을 바닥나게 한다.
연신 엉덩이를 왼쪽 오른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카페의 문이 열리자,
바람과 눈이 함께 후둑둑, 들이닥쳤다.
유난히 큰 키는
헝클어진 머리칼까지
나오코를 돋보이게 했다.
틀어 올린 머리칼이
바람에 풀어헤쳐진 지 오래지만,
강한 바람에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보지 않으려 애를 써도
카페 안 사람들의
나오코를 향한 흘긋거림은 계속되었다.
그녀는 가락국수 한 그릇에
친절함의 마법이라도 걸린 듯했다.
자신도 모르게 허허거리며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에게
친절한 말을 하고 있었다.
“하하, 바람에 제 머리가 당했네요, 흐흣.”
나오코의 목소리는 당당했고,
웃음으로 끝을 흐리는 억양은
굉장히 매력적으로 들렸다.
빼곡히 들어차 있는 사람들은
일제히 그녀와 함께 웃음을 내비쳤고,
코하네의 생각처럼
그들도 나오코를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오코 또한 반사적으로
나온 자기 말에 놀란 표정이다.
마치 미네코 같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가락국수 한 그릇은
분명 나오코를 변하게 만든
마법의 수프가 확실했다.
나오코는 자신이 원하지 않아도
쭉, 입가에 미소가 멈추지를 않았다.
주인장 마사토는 기다렸다는 듯이
나오코에게 마른 수건을 건넸다.
그는 그렇게 친절한 사람이 아니다.
더군다나 마른 수건을
던지지 않고 직접
가져다주는 모습은
천지개벽할 일이 맞을 것이다.
참고로 마사토는 나이 많은 총각이다.
코하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마사토의 모습을 보며
입을 가리고 피식거렸다.
그렇다고 눈치 볼 마사토는 아니지만,
잠시 코하네를 흘긋거리긴 했다.
수건을 받은 나오코의
입꼬리는 여전히 위로
치켜 올라가 있었다.
“아 정말 고맙습니다,
저기 따뜻한 커피도 부탁드려요.”
“네, 네!”
나오코의 모습은 한눈에 보아도
고급스러움이 풍겼다.
짙은 머리칼부터,
반짝이는 각진 구두와
군데군데 가죽이 붙어 있는 코트,
제 멋대로 두른 갈색 스카프,
부드러운 가죽으로 둘러싼
검은 가방까지,
모든 게 꽤 값이 나가 보이는
것들이다.
긴 다리를 포개는 모습까지
굉장히 매력적이다.
나오코는 왼손잡이 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든 주문한 차가 나오면
자신이 주로 사용하는 손으로
잔을 들기 마련이다.
나오코는 엄지와 나머지
두 손가락을 이용해
커피를 들어 올렸다.
코하네는 무언가 적고 있던 펜을
다시 말아 쥐며,
창밖을 응시한다.
다행히 아직, 잔은 식지 않았고,
꼬리뼈가 버텨 주는 한,
더 오랫동안 앉아 있을 작정이다.
흔하지 않은 날씨를
뻥 뚫린 곳에서 본다는 건,
작은 창을 갖고 있던 코하네에게
굉장히 반가운 일이기 때문이다.
넋을 놓고 있던 코하네가
인기척에 옆을 돌아보았다.
머리칼을 헝클어뜨린
나오코가 말을 건넸다.
“저기 잠시, 실례해요.”
코하네의 얼굴이
잘 익은 토마토처럼 발개졌다.
“아, 네.”
“혹시, ○○○학교 졸업생 아닌가요?"
코하네는 잠시,
고개를 떨구더니 무언가
알아챘다는 듯 입을 쩍, 하고 벌렸다.
“아아.”
나오코가 머리칼을 귀에 걸며
눈을 크게 뜨고 코하네를 바라보았다.
“세상에, 맞는 거지? 아, 이름이…”
“넌, 나… 오코?”
나오코가 고개를 끄덕이며
발을 동동거렸다.
“맞아, 맞아 어 너는 코…”
“응, 코하네.”
나오코는 여전히
마법에 걸린 사람처럼 굴었다.
“맞아, 코하네,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지?”
호들갑인 나오코의 반에
코하네는 침착했다.
나오코가 말했다.
“정말 반가워,
이렇게 우연히 만날 수도 있는 건가?
신기해.”
“응, 반가워.”
내내 서서 코하네를
아래로 바라보던 그녀가
뭔가 잊었다는 듯,
자신의 자리로 달려가
가방을 들고 돌아와
딱딱한 의자에 앉았다.
이곳에 앉으려면 둘 중 하나는
포기를 해야 한다.
꼬리뼈의 통증을 참든 가,
유혹적인 창밖을 보지 않던가.
잘 알지 못한 나오코는
그 딱딱한 의자에 앉아 버렸다.
코하네는 빠르게 마사토에게 손짓했다.
“마사토 씨,
커피 이쪽으로 부탁해요.”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낯설고 직각인 네모 모양의
꽉 낀 도시에서
너라면 괜찮을 것 같아,라는
생각이 나오코를 사로잡는다.
코하네는 묘한 분위기를
뿜어내는 여자다.
코하네의 분위기는
한 눈에도 그녀인지
알아볼 수 있을 정도다.
여전히 작은 체구에
드러나 보이는 모든 곳이
가늘고 부러질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교복을 입던 시절보다
더 비틀어져 보였다.
코하네가 웃을 때마다
숨어 버리는 작은 눈동자도
그때와 똑같았다.
눈처럼 하얀 피부는
만지면 방금 꺼낸 얼음 같아
붙어 버릴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하얀 분가루를 칠하고
기모노를 입은 그녀들의
피부가 잠시 떠오른다.
쭉, 지켜보던 마사토는
식어 버린 코하네의
커피잔을 회수하더니,
새로 담은 잔을 코하네에게 내밀었다.
나오코에게 내민 잔은
유난히 반짝거린다.
코하네의 잔이 식어 버린 것까지
세심하게 챙길 그가 아니란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코하네는 눈으로 웃음을 참고 있었다.
“고마워요, 마사토 씨.”
그는 코하네의 말을 들었는지
듣지 못했는지,
나오코에게 말을 건넨다.
“아가씨, 이건 서비스예요.”
보기만 해도 달달한 초콜릿을
담은 접시를 내밀었다.
초콜릿은 나오코의 손이
더 가까운 곳에 놓인다.
“고맙습니다.”
단순한 인사말로만 끝낸
나오코의 눈동자는
그를 바라보지도 않고
내내 코하네에게 박혀 있었다.
조금은 서운하단 듯,
다른 말을 덧붙이려 다 말고
그제야 돌아서는 그다.
코하네는 그날 마사토가 나이 많은
노총각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의 겉모습은 결혼하지 않음, 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을 정도의
나이에 가까웠다.
그 사실을 알고 나니,
나오코에게 관심을 보였던
그가 무척이나 딱한 생각이 들었다.
나오코가 갑자기 코하네의 손을
덥석, 잡았다.
나오코는 자신이 한 행동임에도
어색함이 배어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눈치다.
한참 후에 자신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곰곰이 생각해 봐도
자신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코하네, 너무 반갑다.”
약간의 당황스러움을
내비치는 코하네다.
“으응, 그래 반가워.”
코하네는 그녀와 학교 내에서
한 번이라도 함께 다니거나,
밥을 함께 먹거나,
수다를 떨어 본 적이 없다.
단 한 번 도움을 받았을 뿐이다.
그런 그녀가 자신을 그렇게
반가워하다니, 쉽게 이해되는
상황은 아니다.
하지만 코하네 또한
나오코가 반가웠다.
매력적으로 보인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칼이
어느새 습기에 축 처져
볼품없이 가라앉았다.
나오코가 말했다.
“넌 어쩜, 변한 게 없어 정말 같아.”
“넌, 여전히 멋있고.”
코하네의 머릿속으로
필름이 하나둘, 스쳐 지나간다.
나오코는 여전히 용감해 보였고,
매력적이며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나오코에게서 날리는
머스크 향이
초콜릿 향보다 달았다.
“에이, 그렇지 않아
아이 엄마가 된 지 오래야.”
내내 곁눈질로 나오코를 살피던
마사토는 엄마,라는 소리에
무척 실망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코하네가 다 실망스러울 정도의 표정이다.
“아…”
“난 결혼을 빨리 했어 흣.”
나오코의 붉은 입술은
상대방의 시선을 굳히게 했고
매력적인 목소리는
시간이 흐르는 것도
모르게 만들어 버렸다.
그들은 장소를 옮겨
긴 얘기들을 포장하며
얘기하기 시작했다.
결혼에 대한 나오코의
이야기는 재미는 물론
굉장히 자극적인 이야기였다.
그들은 얼마 안 되는 시간 동안,
마치 굉장한 우정을 나누어
지내던 친구처럼 아주 가까워졌다.
내내 시선을 독점했던 그 자리에서
나오코가 잠시 사라지자,
중년의 남자들은
코하네가 있는 쪽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코하네는 머스크 향을 따라
전화박스 안의
나오코에게 시선을 떼지 못했다.
“겐토, 나야.”
“응.”
나오코의 목소리는 들떠 있었고,
보지 않아도 들떠 있는
나오코의 기분을
겐토는 느낄 수 있었다.
“쇼는?”
“으응, 실컷 놀다 지금은 잠이 들었어.”
“우리, 쇼 착하네!”
겐토의 표정은 늘어난
나오코의 말수에 당황스러움이 가득하다.
“그럼, 누구 아들인데.”
“나 좀 늦을 거야.”
“응, 그래 너무 늦지만 마
위험하니까.”
겐토는 누구와 함께 야?라는
말을 털어 내고 싶었지만
오랜만에 기분이 좋은
그녀의 목소리를
다시 우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응, 끊을게.”
다행이란 생각과,
궁금증이 함께 쏟아졌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새근거리는 쇼를
물끄러미 내려다본다.
백색의 딱 붙는 니트는
나오코의 상체를 모두 감쌌지만,
오히려 풍만한 가슴을
도드라져 보이게 했다.
니트는 상체의 비밀스러움을
상상하게 만든다.
나오코가 자리로 돌아오는 내내
나오코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남자들의 입에선
탄식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나오코,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나오코가 도리질한다.
“으음, 아니야
오늘은 내 시간이라고
정말 놀라운 일이야,
오늘을 그냥 버릴 수는 없어.”
나오코는 투명한 칵테일 잔을
들어 올리며 바텐더에게
검지를 들어 보인다.
코하네의 한 모금 남은
잔을 보며 거들었다.
“한 잔 더 하지 그래?
오늘은 대단한 날이니까.”
코하네는 나오코의 성화에
잔을 들어 올리며
가쁘게 남은 칵테일을
들이켜더니 기어코 나오코의
검지와 중지가
동시에 바텐더를 향했다.
“코하네, 이젠 네 얘기 좀 해봐.”
한쪽으로 치우친 머리칼을 넘기며
붉어진 얼굴로 턱을 괴고
코하네를 빤히 바라보았다.
“음… 난 그대로야,
달라진 게 없어.”
“으응? 뭐야 시시하잖아,
네가 도쿄로 갔다는
소식은 알고 있었어.”
코하네의 표정은 진지하다.
“난 그때와 너무 같아
쭉 그렇게 지냈어.”
눈치 빠른 그녀는
코하네의 상기된 얼굴을 보더니
두툼한 지갑 속에서
쇼의 사진을 꺼내어 내밀었다.
쇼를 낳고 처음 해 보는 행동이다.
“봐, 내 뱃속에서 나온 아이.”
열린 지갑 속의 내용물이
우두둑 떨어져 코하네는
쇼의 얼굴을 보기도 전에
당황하며 그것들을 주워 담았다.
“이런, 괜찮아 내가 주울게.”
코하네는 떨어진 것 중
눈에 띄는 사진 한 장을
들어 올렸다.
쇼와 닮아 있는 모습을 보고
나오코에게 사진을 내밀며 웃었다.
“이 사람이 아이 아빠?
동그란 눈이 닮았어.”
순간, 나오코의 눈은
무섭게 사진을 노려보더니
시간이 멈춘 것처럼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나오코?”
“어, 으응.”
“왜 그래?”
“아니야.”
나오코는 사진을 재빨리
지갑에 구겨 넣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쇼는 나를 닮았어.”
재빨리 낚아채 간 덕에
코하네의 손가락에
기분 나쁜 촉감을 남겼다.
사진의 얇은 모서리도
꽤 힘을 쓰는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많이 닮았다.”
베인 손가락을 움켜쥔 채
허벅지 위에 올려놓고
모른 척 나오코의 이야기를 들었다.
나오코는 정리되지 않은
잡동사니들을 가방에 쑤셔 넣었다.
“쇼의 생일에 초대할게.”
코하네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 주가 시작되는 새벽은
적막하고 우울하다.
취기가 가득한 나오코는
부축하려는 코하네를
극구 만류하며 자리를 나섰다.
“걱정 마, 난 신이 보살피고 있어.”
눈동자의 초점이 풀리기
시작할 무렵부터 했던 말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종류의 말들은 아니었지만,
신이란 존재에게 기대고 있는 나오코가,
조금은 부럽기도 했다.
다행히 택시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기 때문에
안심하며 나오코를 보낼 수 있었다.
아니, 조금은 나오코의
신을 믿어 보기로
작정한 게 맞을 것이다.
모두가 꿈꾸고 있는 시간까지
깨어 있다는 것은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고통은 마치 쓰고
넘기기도 힘든
레몬 색깔의 가루약을
넘기는 것과 같은 것이다.
눈은 감고 있지만
감은 세상에서
무언가 끊임없이 돌아다녔다.
어슴푸레한 새벽의 색을
느끼지 않기 위해
최대한 커튼으로
빈틈없이 빛을 가렸다.
노란빛을 발하는 조명등에서
귀를 기울여야만 들리는
깨진 유리를 밟는 것 같은
소리가 따닥따닥하며
알은 체를 한다.
어쩌면 깊은 밤과 같았다.
나오코가 떨어뜨린 사진에
베인 검지가 욱신거렸다.
손톱으로 꾹꾹, 눌러보니
아프기도, 간지럽기도
한 느낌이 싫지 않다.
입으로 숫자를 오물거리며
함께 박자를 맞추었다.
감은 눈앞에 반짝거림이
사라지며 진짜 암흑이 되어
서서히 잠이 들기 시작했다.
밝은 빛이 커튼 틈 사이로
새어 들어와 그녀의 밤을
방해하려 들었다.
모든 것이 시작되는 시간,
코하네는 아랑곳하지 않고
더 깊은 잠으로 빠져 버렸다.
따릉, 따릉 따릉 따릉.
한쪽 눈을 살며시 열었다.
코하네의 얼굴은 창백하다 못한
버짐이 핀 것처럼
하얗게 동동 떠다녔다.
몸을 움츠리고 눈을 다시 감았다.
다시 시작하고 싶은 잠을
깊은숨으로 내뱉어 보았다.
잠시 벨 소리가 끊기는가 싶더니,
소리는 다시 시작이다.
따릉, 따릉
이번엔 굉장히 다급하게 들린다.
순간 어젯밤, 택시를 타고 간
나오코의 얼굴이 떠올라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나
수화기를 번쩍 들어 올렸다.
“여보세요.”
코하네의 목소리는 갈라졌고, 낮았다.
“맙소사, 코하네 일어나라고…”
단잠을 깨우고 재촉하는
나오코의 목소리가
짜증이 날 법도 했지만
싫지 않았다.
갈라진 목소리를
다듬기 위해 헛기침을 뱉었다.
“음, 흐음 그렇지 않아도
걱정했었어.”
걱정이라는 단어에
나오코는 코하네가 더욱 친근하다.
“오랜만에 잠을 잘 잤어. 큿.”
“으응.”
“일어나 봐, 코하네
날씨가 아주 좋아.”
“응.”
코하네는 한쪽 손을 천장으로
쭉 뻗어 기지개를 켠다.
“코하네, 덕분에
난 컨디션이 아주 좋아,
어제 고마워.”
“고맙긴, 나 또한 그래.”
“코하네, 자주 연락할 게
잘 지내고 있어.”
“으응, 너도.”
“응, 안녕!”
“안녕.”
나오코의 말 대로
좋은 날씨를 확인하려
커튼을 열었다.
쨍, 하고 들어온 햇살은
히터를 켜지 않은
방 안에 온기를 가득 실어 날랐다.
저절로 입꼬리의
좌우가 눈가에 다다랐다.
그제야 언제 들렀다 갔을지 모를
백합의 주인이 궁금했다.
그가 꽂아 둔 백합꽃 향기가
숙취와 함께 코하네의 머리를
어지럽혔다.
바로 앞 맨션의 주인도
아직 잠에서 허둥대고
있을 게 뻔했다.
다행히 그곳도 어두운 색깔의
커튼으로 감싸져 있었다.
오랜만에 마음껏 창을 열고
차갑고 신선한 공기를
방 안으로 들였다.
티 내지 않던 손가락이
어느새 붉은 세로줄로
변해 있었다.
동그란 눈 쇼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이의 얼굴은
굉장히 비밀스러워 보였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그림 속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신비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오코의 가족이 궁금해졌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살고 있는 나오코의 삶이
부러웠던 모양이다.
백합이 잠시 바람에 갸우뚱거린다.
가족 같은 마호가 생각나
웃음이 배시시 나왔다.
수화기를 들어 급하게 전화를 걸었다.
마호는 백합을 확인하면
걸어 올 코하네의 전화를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한 번의 벨이 울리기도 전에
성급하게 입을 열었다.
“여보세요.”
“크크큿."
“코하네?”
“언제 왔다 갔어?”
“네가 없는 시간.”
“치.”
코하네의 입이 비죽, 나왔다.
“걱정했잖아.”
“지금도?”
“코하네, 짓궂어.”
“힛, 밥 먹자.”
“생각해 볼게.”
“마호, 짓궂어.”
수화기 너머로 크게 웃는
그의 웃음소리가
햇살의 온기보다 더 따뜻하다.
“삼십 분 시간 줄게.”
“히잇, 넵.”
코하네는 마치 후다닥, 이라는
소리를 온몸으로 알려주듯,
빠르게 움직였다.
얼음처럼 차가운 수돗물도
급하다고 쏴아, 쏴아 소리를 낸다.
젖은 머리를 말리는 것도
잊은 채 다시 후다닥 거리며
뛰어 날았다.
마호는 이미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중이다.
“하악, 하악. 힛.”
“뛰지 마, 천천히 와도 돼.”
대략 스무 개 정도 남은
계단 위에서 코하네가 웃고 있다.
“으응.”
마호는 다가온 그녀의 머리칼을
보며 인상을 찌푸린다.
“다시 가자.”
“응?”
마호가 손을 내밀었다.
“자.”
손에 이끌려 다시 계단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호는 코하네의 얼굴보다
더 작은 드라이기를 꺼내 들었다.
“난 또.”
“춥잖아.”
“이리 줘, 내가 해.”
마호는 잠깐 멈칫하더니,
드라이기를 그녀에게 건넨다.
어깨에 닿을락, 말락 한
머리칼은 숱도 없이 잘도
너풀거렸다.
그녀는 빗질도 하지 않은 채
다 되었다는 표정을 하며
그를 재촉했다.
이번엔 그녀를 만류하기엔
그른 것 같다.
“배고파.”
“가자.”
“응.”
앞서 걷는 그녀의 뒤통수가
헝클어져 있다.
코하네는 끝도 없이 재잘거렸다.
재잘거림의 원인은 마호다.
그 앞에서만은 늘 입이
떨어져 있는 상태의 그녀다.
그 덕에 마호는 궁금했던 것들을
고민하며 물어보지 않아도 된다.
코하네에게 친구를 만났다는
얘기는 아주 반가운 소식이었다.
코하네는 나오코라는 친구 보다
그녀의 아들이 더 궁금한 모양이다.
그녀의 아들 쇼를 실제로
만나기 전까지 코하네는
쇼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했다.
이상하리만큼의 큰 관심이다.
물어보지 않아도 저절로
알 수 있는 궁금증이 아니었다.
“왜 그렇게 쇼에게 관심이 많아?”
“아이를 낳았다는 거,
그게 신기해.”
“으응?”
“왜? 이상한 거야?”
“아니.”
쇼를 만나고 온 코하네는
더 자주 쇼 이야기를 했다.
쇼라는 아이의 얼굴은
굉장히 신비스러웠다고 했다.
아이의 얼굴이 신비스럽다니,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지만
그 또한 궁금했다.
시간이 지나고,
마호 또한 쇼를 마주했을 때,
코하네가 했던 모든 말들과
관심이 대체 무슨 뜻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코하네는 자주 쇼를 마주했고,
자주 보고 싶어 했다.
코하네의 친구 나오코,
그리고 쇼와 마치 가족과 같이
지낼 수 있었다.
어느새 코하네가 늘 말하던
가족의 울타리가
그녀 주위에 미완성의 원을 그리며
조금씩 완성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17-2 백합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