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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새, 큰 새

18. 백합

by 금봉


백합



아키라의 빈자리를 알려주듯,

강을 앞에 둔 집은 삭막하기 짝이 없다.

계절답게 나뭇가지에도

빈자리가 많다.

나무의 빈자리는 겨울의 긴 잠에서

깨어날 생각조차 하지 않은 듯 조용하다.

얕은 강 속의 생명체도

자취를 감춰 버린 것 같아

마음이 조급하다.


여름의 비릿함은 사라지고

냉기를 가득 품은 바람이

강을 타고 콧속으로 파고들었다.

냉기에 말간 콧물이

훌쩍하는 소리를 냈다.


마호는 며칠 동안 지독한 감기에 걸려

눈 밑이 거뭇할 정도로

수척해진 모습이다.

유일하게 코하네의 고집을

꺾을 수 있던 마호는

그녀의 만류에도 바싹 마른 입을

몰래 적셔가며 결국 그곳으로 동행했다.

마호는 강 속에 빠질 것처럼

가까이 다가서는 코하네를 잡아당겼다.


“위험해 코하네.”


넋을 놓던 그녀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으응.”


“들어가자, 춥다.”


대문 안에 들어선 마호는

길게 늘어진 지붕의

웅장함을 맞닥뜨린다.

자기 나이보다 더 나이를

먹었을 법한 커다란 나무를

바라보더니 입이 쩍 벌어진 채

발을 멈추고 한참을 올려 보았다.

고택의 나무 색깔은

상상했던 것처럼 검푸른 갈색의 모습이었다.

일 년 내내 고스란히 계절을 받아들인

짙은 색의 모습은

꽤 고단해 보이기까지 했다.


출처, 리틀 포레스트



코하네는 눈짓으로

볕이 잘 들어 따뜻한 가장자리의

자리를 앉으라며 가리키는 중이다.

조심스럽게 회색 돌을 밟고

올라가 앉아 보았다.

화로를 피워 놓은 자리 마냥

온기가 올라온다.


“하아.”


“따뜻하지?”


마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코하네의 입에서 나올

이야깃거리를 들을 준비라도 하는 듯하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그의 모습은 마치 키만 자란 어린아이 같다.

코하네가 입을 열었다.


“흠, 여긴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야
난, 봄이 되기 전에 화단을 정리하고

꽃을 피울 준비를 할 거야,
또 집 안을 둘러보고

할 일을 찾을 거야
아키라 할아버지가 했던 것처럼.”


“으응?”


“응?”


“이렇게 커다란 곳을 혼자?”


“뭐...”


코하네가 어깨를 으쓱한다.


“내가 따라오길 잘했어.”


빛을 따라 걸으며

코하네는 왔다 갔다를 반복했다.


“그럼, 이 집엔 아무도 없는 거야?”


“응, 다들 돌아가셨지,

아키라 할아버지만.”


“아.”


코하네는 모든 문을 빠르게 열어젖혀

환기할 모양이다.

마호도 따라 모든 미닫이문을

열어 놓았다.

바닥에 깔린 다다미 냄새,

종이 냄새, 나무 냄새가

섞여 나풀거렸다.

코하네가 그녀의 손 만 한

방문 손잡이를 소중하게 다루며 말했다.


“마호, 여기가 아키라의 방.”


마호의 눈이 더욱 동그래진다.


“할아버지의 키는 그렇게 큰데,

방은 작지.”


“할머니 말로는 아키라의

고집을 꺾을 수가 없었대,
빈방이 이렇게 많은데 말이야.”


코하네가 선반마다

소복이 쌓인 먼지들을 후후, 불어 냈다.

낯선 모습의 사진 속 그들은

그녀의 가족일 것이다.

코하네의 엄마로 보이는

여자의 모습은

코하네처럼 아주 작은 체구다.

흑백의 사진이라 그런지

그녀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공포가 마호에게도 젖어들어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잠시 코하네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난,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마른 수건으로 다다미를 닦아 내던

그녀가 마호를 바라보았다.


“뭘?”


“너에 대해서 말이야, 그런데...
난 알고 있는 게 없는 것 같아.”


“마호는 나를 알고 있잖아? 힛.”


미소 띤 그녀의 눈은

눈동자가 또 사라졌다.

햇살에 비치는 코하네의 신발이

도드라져 보인다.

가장 큰 문의 덧문을 툭툭, 건드리며

마호를 부른다.


“마호, 도와줘.”


“응, 내가 할 게.”


“고마워.”


마호는 시간이 갈수록,

코하네의 대한 수많은 물음표를

쌓여 풀고 싶지만 풀 수 없다.

그녀가 하는 말은 틀린 말이

없었기 때문에 질문을 폭풍처럼

쏘아 댈 수가 없다.

또다시 마호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호를 보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는 코하네지만

자기 엄마 사진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그를 모를 리 없다.

코하네는 다시 미소 지으며

헛기침을 했다.


“허업, 헙.”


“이 집은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어.”


마호는 귀를 쫑긋 세우며

코하네를 보지 않고 덧문을 떼어낸다.


“늘, 괴로워하는 엄마의 모든 행동을

지켜봐야만 했어
한 시라도 눈을 떼면 안 됐거든?

그럼에도 우린, 정말 행복했어 정말.”


마호가 뒤를 돌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행복이란 단어에 머리 위의 햇살이

기울어지며 그녀를 비췄다.

볕의 계속된 움직임에

그들은 잠시 추위를 잊을 수 있었다.

마호는 겨울의 따뜻한 볕이

방해될 정도로 땀을 흘리는 중이다.

지독한 감기로 인한 추위에

덜덜 떨었던 것이 몇 시간 전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사막에서 느끼는 갈증처럼

본능적으로 물을 찾았다.

딱딱하게 굳어 있는 수도꼭지를

있는 힘껏 비틀었지만,

물은 졸졸, 거리며 나올 뿐이다.

마호가 급하게 입속으로 물을

집어넣으려 하자, 코하네는 호수를

낚아채며 인상을 찌푸렸다.


“마호, 안됏.”


“앗, 깜짝이야.”


“지하수야.”


“응? 왜?”


“정확하진 않지만,

내 기억에 지하수는
몸을 아프게 하는 물이라고 들었어.”


코하네의 머릿속에

엄마 후미코가 땅속에 묻힌

벌건 모든 것들 대해 중얼거리며

지하수를 틀어 놓고

흙을 뿌렸던 장면이

어제 일처럼 선명했다.


“코하네, 난 지금 물이 필요해.”


“부엌으로 들어가면

수도가 있어 그건 수돗물이야.”


“네, 잘 알겠습니다.”


복잡하게 연결된 다다미를

몇 번 밟고 지나가면

미닫이문이 경계를 알려준다.

좌, 우가 확 트인 전망 좋은

마루 한 편에는

재단이 이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순서대로 놓인 사진을 보면

처음 보이는 사진이 할아버지,

할머니 임이 분명하다.

마호는 츠키노를 보자,

너무 놀라 뒷걸음질 쳤다.

그러고 보니 코하네는

츠키노의 얼굴과

후미코의 얼굴을 모두 갖고 있다.

신기할 정도로 그랬다.

코하네의 사진을 얼굴만 잘라

츠키노의 얼굴에 붙여 놓은 듯한 모습이다.

순간, 아키라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코하네는 츠키노와 너무도 닮아서

난 가끔 놀라지,
내가 마치 삼십 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아서 말이야 허허허허허.”


그때 흘려들은 아키라의 말이

지금 와서 귀에 쏙, 들어올 줄은 몰랐다.

그러고 보니, 아키라가

츠키노를 무척이나 연모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마호는 츠키노 사진에 쌓인

먼지를 옷깃으로 쓱, 닦아 낸다.

그녀의 얼굴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나니

자신도 모르게 심장이 쿵쾅거려

숨이 턱 밑까지 차오름을 느꼈다.

마호는 아키라의 마음을 몇 번이고

이해한다며 속으로 중얼거리더니, 피식거렸다.





미닫이문의 경계를 하나 더 넘어서니

부엌이 자리 잡고 있었다.

예스러움과 지금의 것을 합해 놓은 건,

마치 박물관을 떠올리게 했다.

옛날 주방이라 하기엔 크기로 압도한다.

방을 하나 더 만들어도

될 것 같은 크기다.

하늘색과 짙은 파란 색의

촘촘한 사각형의 타일은

아마도 요즘의 것을 갖다 붙였을 것이다.

누구의 솜씨인지는 알려주지 않아도

마치 아키라의 이름이 짙게

새겨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삐뚤빼뚤 선이 고르지는 않았지만

특유의 투박함이 정겹기만 했다.


어느새 잊고 있었던 갈증이

뻑뻑해진 혀가 알아차리며 채근한다.

교체한 지 얼마 안 된 수도꼭지도

요즘의 것이 분명하다.

한두 번 쓰긴 했을까,라는

의문이 생길 정도로 새것이었다.

화단 앞의 수도꼭지를 비틀었던 것처럼

꼭 같이 세게 비틀었다.

깜짝 놀랄 정도로 수압은 거

세게 물을 뿜어 댔다.


“촤아아아아아.”


마치 폭포에서 내려오는

거센 물살과도 같은 소리를 냈다.

당황스러움에 빠르게

수도꼭지를 잠그며 한참을 내려보다,

마침내 물을 담아낸다.


“으아함 크아아하.”


얼음 두 알을 씹어 먹은 것처럼 차갑다.

뿌연 유리컵을 몇 번이고

흐르는 물에 씻어 냈다.

맑은 물을 담아

세 개의 미닫이문을 지나

그녀에게 다다랐다.


“코하네.”


마호는 화단에 웅크리고 있는

그녀를 불러 반짝반짝 빛을 발하는

물 잔을 보이며 희롱한다.

그녀는 물 한 모금을

입에 머금더니, 눈을 찡긋했다.


“앗, 차가.”


“천천히 마셔 아주 얼음이야.”


차가운 바람이 잠시 정체됐듯,

그들도 마루에 걸쳐 앉아

휴식을 취했다.

그녀가 마호의 얼굴을

갸우뚱 바라보며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을 꺼냈다.


“괜찮아?”


옆자리에 앉은 그녀의 얼굴이

마호의 얼굴 가까이 다가와

묻고 있었다.

마호의 심장이 츠키노의

사진을 봤을 때처럼

다시 쿵쾅거렸다.


“뭐, 어.”


아닌 척하는 그의 목소리

끝이 숨이 찼다.


“아팠잖아.”


“후우, 그러게 거짓말이었나?”


“마호.”


“아무렇지도 않은걸?”


코하네의 하얗고 작은 손이

그의 이마 위에 머물렀다.

마호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감정에 딸꾹질이 나왔다.


“열은 없어, 다행이다.”


“어흡, 헙.”


“으으응?

딸꾹질? 하는 거야?”


“헙, 괜찮아.”


“열은 없는데, 얼굴이 발개졌어.”


“어헙, 흡. 괜찮다니까.”


그녀에게 처음으로

짜증 섞인 말을 내뱉은 마호다.

약간은 당황스러워하는 그녀지만

아픈 듯한 그가 걱정되는

마음에 여전히 친절을 베풀었다.


“숨을 조금만 참고 물을 마셔 봐.”


내리쬐는 볕에 어느새

물이 먹기 좋은 온도의 물로

바뀌어 있었다.


“헙.”


다시 시작된 딸꾹질에

안타까워하는 그녀의 표정은

절대 잊을 수 없는 최고의 표정이라

할 만큼 귀여웠다.

마호는 자신의 속도 모르고

걱정하는 그녀가 너무

신비스럽게 다가왔다.


“잠깐만.”


마호는 딸꾹질도, 웃음도,

참으며 그녀와 멀리 떨어져

도망가듯 뒤뜰로 향했다.

볕이 들진 않았지만

나쁘지 않은 곳이다.

한참을 앉아 그녀의 표정을

지우며 숨을 참았다.


돌을 쌓아 물고기가 살아

움직였을 곳으로 생각되는

작은 못, 도 있었다.

물론 지금은 바싹 말라

물 한 방울도 남아있지 않았지만,

아키라를 생각하고

눈을 감으면 살아 있는 잉어들이

꼬리를 살랑거리며

헤엄치는 모습이 상상이 된다.

정말 그녀가 자란 이곳은

어마어마한 곳임이 분명하다.

다른 건 몰라도 그녀가 왜,

삶의 터를 옮겨야 했는지

이젠, 온전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코하네는 화단의 썩은 뿌리와

잡초를 솎아내고 보기에도

촉촉하고 영양분이 가득해

보이는 흙을 덮어 고른다.

찬 공기에도 생명을 붙잡고 있던

잘라 낸 잡초를 보니

안쓰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미안한 마음에 눈을 질끈 감고,

그것들을 모아 비닐 포대에

마구 집어넣었다.

아직 눈을 감은 채

포대를 보이지 않는 곳으로 옮긴 뒤,

그제야 실눈을 뜬다.

기분 좋은 한숨을 크게 내쉬고

다가오는 봄날에 싹이 움트길,

자신이 피운 꽃들을

아키라와 함께 마주하길

간절히 바라본다.


마호는 그녀가 잠시 자리를

비운 틈에 가지런히 놓인

그녀의 구두를 손에 들었다.

어찌 보면 남자들이 흔히 신는

구두처럼 보였지만

마호의 손에 들린 구두는

정말 작고 귀엽기만 하다.

겨울에 불어 대는 입김은

습기를 더욱 머금고 있음이다.

입김을 훅훅, 불어가며

흙이 털리고 먼지가 털리도록

쓱쓱, 닦아 냈다.

구두에 윤기가 나기 시작했고,

잘하면 그의 얼굴도 흐릿하게

비춰주진 않을까,

고개를 갸우뚱하며

구두 앞 코에 얼굴을 갖다 댄다.


이상하리만치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집을 포함한 나무, 돌, 흙. 과 같은

모든 것들은 눈에 띄게 낡아 있었고

모두 같은 냄새를 뿜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아키라의 곁에 가면 풍기던

짙은 나무 향과 같은 것들이었다.

그것들은 빠르게 그의 가슴에

스며들어 박혔다.


조금 더 가까이 그녀에게

발을 내딛고 싶지만,

유리처럼 챙, 소리를 내며

깨질 것 같아 다가가기가 버겁다.

그 두려움도 이젠 익숙해져 버린 그다.

잘 닦아진 구두는

그에게 부족한 그녀의

애정을 대신 채워주고 있었다.


흙을 털어 내고 씻고 나온

그녀가 다가온 순간

비누 냄새가 흩날린다.

이전보다 더욱 그녀를 섬세하게

느끼고 있는 게 분명하다.

세포 하나하나에

그녀의 모든 감정이

스며드는 느낌이다.

다시 급히 뛰기 시작한 심장이

차분해지기만을 기다려 본다.


“데운 물이 더 있어.”


그녀가 고개를 젓더니

눈동자가 사라지도록 미소 짓는다.


“으응, 괜찮아 마호.”


그녀는 아는지 모르는지

반짝이는 구두를 신으며 앞장선다.


출처,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



“가자, 마호.”


“응.”


앞장서는 코하네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이번에 입을 실룩대며

혼잣말로 입만 벙긋, 고마워,라고

속삭였다.


국숫집은 여전히 낡아 빠진

간판을 달고 끽끽하고 등이

돌아가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위태로워 보이기까지 한 등은

절대 떨어지지 않고

흔들흔들 그들을 반기려 춤을 추었다.

세월을 그대로 먹은 아주머니의

흰 머리칼이 코하네에게

안정감을 느끼게 해 준다.

여전히 말 없는 아주머니는

그녀를 보자 한달음에 달려와

반가움을 벙긋, 하는 입 모양을 하며

간단한 손짓으로 무언가를 설명했다.

아주머니는 코하네의 어깨를

연신 쓰다듬으며 자연스레

구석진 자리로 그들을 끌어 앉혔다.

그 또한 알아들을 순 없지만

반가움과 친절함이 섞인 몸짓이란

것을 누가 봐도 알 것이다.

마호는 눈을 떼지 못하고

소리를 내지 않고 벙긋, 하는

아주머니를 계속 바라보는 중이다.


“마호, 그렇게 빤히 바라보면 어떻게 힛.”


마호는 그제야 머리를 긁적였다.


“앗, 그러게.”


아주머니가 손짓하며 방긋, 했지만

마호는 그저 웃기만 할 뿐이다.

코하네가 속삭였다.


“빤히 보는 시선은 익숙하다?라는 뜻이야.”


아주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괜찮다며 손사래 친다.

난로 위에 자리 잡은 누런 주전자

또한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역할을 해내고 있었다.

아주머니가 잔에 차를 따라내니

입에 대지 않아도 진한 구수함이

가슴까지 전해졌다.


김이 모락모락 꽃처럼 피어난다.

호로록, 소리를 내며

보리차를 마시는 코하네를 보니,

그녀와 어울리는 곳이라며

마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코하네가 들고 있던 옥색 도자기 잔은

왜 그리도 커 보이는지,

자신의 물 잔과 같은 것인지

재차 확인하도록 만들었다.


“마호.”


“응.”


“여기까지 와서 국수 한 그릇, 뿐이지만...”


“으응?”


“음, 그러니까 여긴 대단한

맛을 지니고 있다는 얘기야.”


“기대할게.”


드디어 기대하던 국수가 나오고

아주머니는 또 한 번 방긋하고 돌아섰다.

코하네의 그릇과 그의 그릇은

한눈에 봐도 차이가 났다.

같은 국수를 시켜도

아주머니는 늘 이렇게 정을 담는다.

마호는 두 배로 많은

양의 국수를 씹어 먹는다, 가

아니라 집어삼키는 모습이다.

그의 입은 쉴 줄을 모르고

계속 오물거렸다.


“어때?”


코하네의 목소리에

그제야 마호의 입이 열렸다.


“이건 정말이지

천국을 집어삼키는 기분.”


마호는 다시 면을 있는 힘껏

끌어올려 집어삼켰다.

코하네는 말없이 열심히 먹어 주는

그를 바라보며 남은 자신의

튀김 하나를 그의 그릇에 얹혀 주었다.


“후회할 거야 훗.”


마호는 코하네의 사랑을 받는 것

같아 뜨거운 튀김을 한 번에 와그작,

와그작거리며 그녀에게 화답한다.

코하네의 옥색 물 잔에는

다시 채워 놓은 보리차의

향기가 코 밑으로 넘실거렸다.


코하네는 이곳의 나이는

대체 몇이나 먹었을까,라는

생각에 둘러볼 필요도 없는

작은 공간을 섬세하게 지켜보았다.

가게 안의 구석진 조명 하나가

꺼짐과 켜짐을 반복하며

그녀의 섬세함을 방해했다.

코하네의 얼굴에 그늘을 만들며

그렇게 반복하기를 수십 번 만에

켜짐을 오랫동안 버티고 있었지만

이내 또다시 그늘을 만든다.


지켜보던 코하네와 아주머니의

눈이 동시에 마주쳤고

미소는 짓고 있지만

근심 어린 얼굴이다.

아마도 등을 갈아야 하는

시기가 왔다는 뜻일 것이다.


“드르르르륵.”


저녁 시간이 조금 넘는 시간이다.

마호는 미닫이문을 등지고 있었고

배를 만져가며 문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문이 열리자, 아주머니의

반가움 표현은

코하네를 본 순간과

같은 것이어서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고개를 휙, 하고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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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남자의 얼굴은

굉장한 미남형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을 봐 왔으나

눈동자 색을 구별하게 될 줄은 몰랐다.

남자는 눈에 띄는 얼굴을 하고 있었고,

표현하기 힘든 갈색 눈은

빛이 났고 이상하게

퇴폐적으로 보이기도 하다.

두꺼운 남색 코트는

보기만 해도 무거워 보인다.


뒤늦게 마호의 눈을 따라간 코하네는

자신도 모르게 민망할 정도로

그 남자에게 시선을 멈추고 있었다.

말할 수 없는 익숙함에

시선을 뗄 수가 없다.

남자는 다른 곳을 의식할 새 없이

아주머니와 알 수 없는

손짓의 대화를 잘도 했다.

남자는 아마도 손짓의 대화를

아주 잘 알고 있는 듯하다.

남자의 희고 가느다란 손짓은

마치 날개 짓하는 새와 같다.

마호는 넋이 나간 코하네를

보더니 어깨를 잡아당기며

흔들어 깨웠다.


“아는 사람?”


“글쎄”


“글쎄?”


“모르는 사람이겠지”


코하네는 재빨리 시선을

마호에게 고정하며 이를 드러냈다.


“뭐야 싱겁긴”


성냥개비로 탑을 세우던 코하네는

남은 성냥들을 마저 쌓기 시작했다.

마호의 투박한 손가락이

그것들을 건드리자

1초도 되지 않은 시간에

쉽게 무너져 버렸다.


“앗 마호.”


“미안, 미안.”


코하네는 장난스럽게

눈을 흘기며 남은 차로

목을 축이더니,

무너진 성냥개비들을

붉은색 열을 맞춰 제자리에 놓았다.


“역시 원래 모습이 더 예뻐.”


남자의 탁자에 마호가 해치웠던

똑같은 모양의 국수 그릇이 놓여있다.

남자 또한 참, 맛있게도 후루룩거린다.


“코하네, 손 좀 씻고 올게.”


“응.”


마호가 자리를 비운 탓에

낯선 남자가 코하네의 눈에

온전히 담겼다.

코하네는 머쓱함에

눈을 이리저리 굴려 보지만,

남자는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의자에 기대어 보란 듯이

코하네의 눈을 마주치려 했다.


코하네가 눈을 밑으로 내리깔면

남자도 꼭, 같이 그녀의 눈을 따라

움직였고 옆으로 가면 옆으로,

위로 들면 위로,

그러다 어느 순간 시선은

서로에게 꽂힌다.

그때 시간은 아마 멈춰 있었을

것이라 확신했다.

너울거리던 국수 국물도

더 이상 너울거리지 않는다.


출처, 비몽



시선을 피하던 코하네는

남자의 눈빛에 제압되어

더 이상 피할 길이 없었다.

이상하게 남자는 그녀를 알고 있다는 듯,

다행이라는 듯 안도의 숨을

내쉬고 있었다.

남자에게 느낀 익숙함이 그 이유일까,

라는 생각에 한참 사로잡혀 있는 중이다.


그때 마호가 코하네의 앞에서

남자의 시선을 가려주며

코하네의 손을 잡았다.


“가자.”


“응, 그래.”


아주머니가 주는 사탕은

여전히 땅콩 맛이 나는

커다란 알사탕이다.

작은 입으로 오물거려 보지만

워낙 큰 크기의 사탕을 물고

있기가 처음엔 버겁다.

시간이 흘러 녹아 작아지길,

츄압, 하는 소리가 나도록 오물거린다.


마호는 밖으로 발을 디디면서도

자꾸만 수상한 눈빛의 남자를

뒤돌아보았다.

하지만 남자는 마호의 시선을

봤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코하네의 남은 뒷모습까지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의 눈빛은 코하네를 향해

말도 안 되는 욕심을 채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코하네는 마치 마호가 곁에

없었던 것처럼 놀란 사람처럼

보폭이 작은 빠른 걸음으로

홀로 앞서 걸었다.

마호는 빠르게 코하네를 따라잡더니

팔을 세게 잡아채며 소리를 질렀다.


“코하네, 뭣 하는 거야?”


“아얏, 마호 아파.”


코하네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녀는 당황스러워하며

마호가 소리치는 목소리에

위압감을 느꼈다.

처음 듣는 마호의 지르는 목소리는

귀를 굉장히 압박하는

화가 담긴 감정의 소리였다.


마호가 코하네의 팔을 놓아주며

두어 걸음 뒷걸음질 친다.

자기 행동에 그 또한 놀란 눈치다.

그는 자주 넋을 빼고 있는

코하네의 모습에

적당히 적응이 되어있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낯선 남자의 눈빛은

마호의 갈증을 바닥나게 만들어 버렸다.


“엇, 미, 미안.”


마호는 한 손으로 머리를 감싸더니

어찌할 바를 몰라

자리에 가만히 서서

코하네를 바라볼 뿐이다.

코하네 또한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코하네의 얼굴은 하얀 분가루를

군데군데 발라 놓은 듯 얼룩얼룩했다.


“마호, 미안, 해...”


코하네는 자신이 넋을 놓고

있었다는 것을 빠르게 인지하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하얀 이를 드러냈다.


“아니, 내가 미안.”


이번에 코하네가 마호의 팔을 잡아당겼다.


“마호.”


마호의 입에서 긴 한숨이

늘어질 대로 늘어져 나온다.


“후후우우우우, 하...”


“마호?”


마호가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응, 가자.”


마호는 가는 내내 오랫동안

남자가 있는 곳을 뒤돌아보았고,

남자는 아예 가게에서 나와

그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때 남자의 눈빛은

코하네를 품 안에 오랫동안

끌어안은 듯한 격렬함이었다.


하즈키는 국수 국물이

면을 흡수하고 있는 것을 보기만 할 뿐,

결국 먹기를 체념한다.

가게 입구에는 손바닥보다

더 작은 마네키 네코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반복되는 팔의 흔들림이

형광등의 깜박임과 박자를 맞추어 나갔다.

그는 마네키 네코에게 현혹되어

아주머니의 요란한 손짓도

그를 깨우지 못했다.


“드르르르륵.”


밝은 하늘색 코트를 입은 마나츠가

손에 입김을 훅훅, 불어넣으며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그를 끌어안으며 자리에 앉는다.

그녀의 화사함은 주위를

밝게 만들어 주는 구석이 있다.

재스민 꽃을 품고 나타난 사람처럼

꽃 향이 가게 안을 휘감았다.


“자기, 많이 기다렸어?”


확장되어 있던 하즈키의

빛나는 갈색 눈동자가

제자리를 찾으며 마나츠를 반겼다.


“아니.”


“이렇게 오랜만에 봤는데,

뭐야 시시해.”


하즈키는 말이 없다.


“뭐야? 왜 그리 넋을 놓고 있어?”


“아니야.”


마나츠는 불어 터진 면을 확인한 뒤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라는 뜻이다.


“하즈키?”


하즈키는 아주머니가 새로 따라낸

보리차인지 모르고 뜨거운 차를

벌컥 들이켰다.

차를 들이마시자마자

토악질하듯 소리를 내며 뿜어 댔다.


“으억.”


아주머니는 놀라

빠르게 찬물을 들고

그에게 들이밀었고,

마나츠는 그의 어눌한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하즈키?”


마나츠는 하즈키의 입술을

맨손으로 닦아 내더니,

탁자에 남은 흔적도 서둘러 닦아 냈다.

하즈키의 얼굴은

뜨거움에 고통스러워 보였지만

눈은 반짝, 반짝 빛이 감돌았다.

그의 기침이 조금씩 사그라지더니

입술이 붉어졌고

이마에는 전에 없던

힘줄이 불긋 솟아 올라왔다.


“후… 아.”


“자기? 웃는 거야?”


마나츠는 의자에 기대어 팔짱을 낀 채

그의 대답이 나올 때까지

얼굴을 살피는 중이다.

그는 갑자기 가게가 떠나갈 정도로

크게 웃으며 난데없이 고개를 저었다.


“하하하하하, 아…”


“히다…?”


“마네키를 봤어.”


마나츠는 말이 끝나자마자

재빨리 탁자 위로 팔을 얹더니

나머지 이야기를 들으려 귀를 쫑긋 세운다.


“그게 다야.”


“다?”


“응, 이곳에서 아주 잘생긴 남자와

국수를 먹고 있었어.”


마나츠는 그를 비꼬아 줄 요량으로

오른쪽 다리를 심하게 비틀어 꼬았다.


“그것 참, 안 됐네.”


마나츠는 입을 삐죽거리며

김이 피어나는 국수를

젓가락으로 휘휘 저었다.

애써 태연한 척하지만,

하즈키가 몇 년째 이상하게

마네키를 닮은 여자에게

집착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나츠가 알고 있다는 것을

하즈키도 알고 있음에도

마나츠에게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마네키 네코 얘기가 서운하다.


마나츠의 젓가락질은

마네키 생각에 연신 말도 안 되게

면을 놓치고 있었다.

마나츠의 반응에

눈길 한번 멈추지 않는

하즈키의 얼굴은 마치 신이라도

마주친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고,

내내 차가운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깜박이는 형광등을 모른 척하며

지내던 아주머니는 작정했는지,

낮은 천정을 위로 보고

의자 위에 올라섰다.

마나츠는 흔들거리는 의자를

잡아주려 벌떡 일어난다.

괜찮다는 손짓에도

마나츠는 막무가내로 의자를 꽉, 잡았다.

마나츠는 마네키 때문에 상기된

그의 붉어진 얼굴이

맘에 들지 않은 모양이다.


아주머니가 드디어

늙어 버린 전구를 힘겹게 빼냈다.

전구를 받아 든 그녀에게

고맙다고 손짓하지만,

아직 붉은 하즈키의 얼굴을

확인하곤 다시 입술이 삐죽빼죽,

하는 중이다.


천장의 질서가 전구 하나로 무너졌다.

있어야 할 자리에

휑하니 구멍만 남은 꼴이다.

조금 어두워진 조명에

하즈키의 붉은 얼굴은 교묘히 가려진다.

그때 뭔가, 생각났다는 듯

그가 중얼거렸다.


“사실, 따라가고 싶었어.”


마나츠의 얼굴에

하나 빠진 형광등의 빈자리,

어둠이 내려앉았다.

하즈키의 그런 즉흥적인 행동은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마나츠는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당신, 내가 안 보이는 거야?”


마나츠는 아무리 서로의 관계가

끝맺음이 있었다, 해도

그의 행동은 예의가 없는 것이라

말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다.

지금 그에겐 마나츠의 목소리는

아주 평범하게 흘릴 수 있는

목소리의 것이었다.


“인연이라면 당신 앞에 쨘,

하고 다시 나타나겠지.”


그리고 마나츠는 생각했다.


‘그러니까, 지금은 내게 집중해.’


마나츠는 자신의 마음과 다른,

말을 아무렇지 않게 말해

놓고는 밀려오는 후회에 치를 떨었다.


“가자, 마나츠.”


아주머니는 새로 끼워 놓은 전구가

맘에 들었는지 손짓하며

고맙다고 인사를 건넸다.

한층 밝아진 마네키 네코의 팔이

문틈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에

속도가 빨라졌다.

마치 자신을 찾아내라며

재촉하는 듯한 모습이다.

덩달아 다급해진 그의 심장이

빠르게 두근거리며

발을 맞춰 뛰기 시작했다.


“하즈키.”


흘려버릴 목소리는

여전히 그에게 들리지 않았고,

아주머니의 알사탕 하나가

아스팔트 위에 툭, 떨어졌다.

그는 그들이 지나간 거리 위를

밟고 또 밟았다.


경사가 높은 길 위에

좁은 골목길, 강이 보이는 길,

상점들이 듬성듬성 자리 잡은 그 길이,

하즈키의 발목을 잡는다.

멈칫하는 것 같던 모습은

고민도 할 것 없이

강이 보이는 길로 쭉 따라 걸었다.

마나츠는 그가 가는 길에

목소리 한 번 내지 않고

그를 뒤따랐다.


그는 정말이지 미친 사람처럼 굴었다.

다급했던 그가 뒤를 돌아보며

마나츠에게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그제야 미안함에 자신의 이마를 툭, 하고

건드려 본다.


“아, 마나츠.”


“내가 이제야 생각이 났네?

참 고맙다.”


그들은 걸어온 반대 방향의 길로

걸음을 옮겼다.

그는 느린 걸음을 걸으며

자꾸 뒤를 돌아본다.


“하즈키, 추워.”


그는 긴 팔로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급히 돌아간 구둣방엔 꼭

필요한 아키라의 물건들이 없었다.

코하네는 얼마 안 되는

그의 물건을 챙겼다.

유키코는 그곳에 있는 물건을

쓸 수 없다며 나중으로 미루자는

말을 쭉, 해왔다.

유키코의 말만 듣고 늑장을 부린

자기 자신이 미웠다.

유키코는 아키라를 돌봐야 했고

이곳에서 아키라의 물건을

챙기고 올 사람은 자신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키코는 코하네에게 불편함을

주기 싫었고 그 말뜻을
이제야 이해한 코하네는

자기 머리를 쥐어박고 싶었다.


아키라의 낡은 지팡이의 끝이

꼬부라져 그녀를 보고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코하네는 지팡이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지팡이를 짚고 하루 한 번

꼭 산책을 나서던 그가

금방이라도 지팡이가 어디 있냐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를 것만 같다.


방구석 모서리에는

아키라의 손때가 묻은 책이

수북이 쌓여 있다.

얇은 두께의 시집처럼 생긴

책 한 권이 아키라의 차분한 성격을

닮아 있는 것 같아 덥석,

잡아 보았다.


책장마다 남은 시커먼 때가

책의 나이를 가늠케 했다.

과연 아키라와 같을까, 란

생각이 들었다.

이곳저곳이 낡아 책장을

넘기기도 겁이 났다.
적당한 습도를 유지하지 못한 탓에

바스락, 소리를 내며 부서질 것이 뻔하다.


『한 줌의 모래』 이사카와 다쿠보쿠


코하네는 책의 겉표지를

여러 번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수백 번 읽으셨을까.”


잠깐 촤르르륵, 소리를 내며 보이는

책 속의 언어는 아름다움을 머금고 있었다.

아키라가 가끔 먼 산을 보며 읊어 댔던

소리가 어렴풋이 보이는 듯하다.

마호가 놀라지 않게 그녀의 어깨를 살짝, 잡았다.


“아직 멀었어?”


“헛, 깜짝이야.”


조심스레 잡고 있던 페이지

한쪽이 찢어지고 말았다.

코하네는 손을, 몸을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멈춘 채 마호를 보았다.


“앗, 이런.”


쉽게 체념한 코하네는 고개를 푹 숙이고

탄식의 소리를 뱉는다.

코하네의 한숨은 그것이 분명

중요한 물건임을 알아차리게 했다.


“이런, 어쩌지?”


“이건 할머니가 좋아했던 책이야.”


“아, 맙소사 정말 미안해 코하네,
계속 나는…

미안한 일만 만드는군.”


코하네는 찢어진 부분을 탁,

소리와 함께 덮어 버렸다.


“할아버지가 찢긴 부위를 보고

벌떡 일어나 화라도 내셨으면 좋겠다.”


열어 놓은 문틈으로 달빛이 들어왔다.

나뭇가지의 그림자가

삐죽이 튀어나온 모습이

그들을 엿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마침, 마호는 코하네의

행동 하나하나에 집중하며

코하네의 마음을 엿보고 있었다.

읽을 수 없는 그녀의 표정은

침묵을 지키고 앉아 있게끔 만든다.


코하네는 잠시 자리를 비우더니,

따뜻한 보리차를 끓여 내며

멈추어 있던 표정에서

드디어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여기서 자야 해.”


마호는 놀라지 않은 척,

코하네를 보지 않고 대답했다.


“으응, 그래.”


“자, 마셔. 따뜻해질 거야.”


마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책장에 꽂혀 있는 낯선 글자를

가리키며 조심스레 물었다.


“저건 무슨 책, 이야?”


코하네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도 알아차리며 대답한다.


“응, 한국어.”


마호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글을 배우지 않았다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신문의 중요한 부분의

글을 큰 소리로 읽어보라며

가끔 그를 자리에 앉히곤 했던

아키라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 모습에 당연히 아키라는

글을 배우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할아버지도 글을 배우신 거야?”


코하네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라는 듯, 뒤를 돌아보며

눈을 둥그렇게 떴다.


“글?”


“으응.”


“할아버진, 여섯 살 때에

글을 모두 익히셨다고 했어,
물론 할머니의 말이지만…”


마호의 입이 쩍, 벌어지더니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한참하고 있다.


“저 책도 할머니 책이야.”


코하네는 한글로 된 책을

마저 가방 안에 집어넣으며

지퍼를 닫았다.


“할머니는 엄마와 대화할 땐 꼭,

엄마의 언어를 섞어 가며 말씀하셨어
덕분에 나도 모르게

알고 있는 단어가 꽤 되지.”


한국이란 나라와 관련된

이야기를 할 때의 코하네는

늘 얼굴에서 빛이 났다.

코하네는 달력이 있던 자리와

시계가 놓여있던 자리를

번갈아 가며 쓰다듬는다.


“예전에 늘 이 자리에 있던

시계가 없어진 걸 오늘 알았지 뭐야?
아마도 꽤 된 것 같았는데 말이야.”


“시계?”


“응, 내 생각엔 시간이

흐르면 당신의 기억이
희미해지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으셨을 거야,
시계가 보기 싫다고 하신 말을

난 그냥 지나쳤어.”


마호가 그녀의 등을 쓸어내린다.


“얼마나 두려웠을까를 생각하면

위가 꼬이는 것처럼 여기가 아파.”


코하네는 명치 아랫부분을 가리키며

지금도 통증을 느끼고 있는지

눈 밑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마호가 비운 잔에 보리차를

가득 채워 그녀에게 내밀었다.


“자, 마셔.”


코하네는 영영 입을 다물었을

성격의 이야기들을 풀어냈다.


“엄만, 죽기 전까지 아팠고,
아빤 엄마가 아파서 죽기 전까지

여기가 아팠을 거야.”


코하네는 다시 명치

아랫부분을 만지작거렸다.


“아키라만 남았는데,

이제 그도 아파.”


“난, 아키라가 좋아질 거라, 믿어.”


“할아버진 내 인생의 답이야
아키라마저 사라져 버리면 난,

어떻게 될까?”


보리차를 들고 있는

그녀의 새 하얀 손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마호가 그녀의 팔목을

살포시 감싸며 따뜻한 온기를 전했다.


“아키라가 네 할아버지인 것처럼,
나도 그렇게 생각해 줄래?
가족 같은 거,

아니 가족 말이야.”


코하네가 눈동자를 감추며 웃었다.


“마호, 넌 정말 좋은 사람이야.”


마호도 따라 함박 웃는다.


“코하네, 돌아가면 한국어?

그거 나도 좀 가르쳐 줘.”


뜻밖의 말을 들은 코하네는

당황스러워 금세 눈이 커다래졌다.


“응? 정말? 아직 나도 잘은 모르지만…”


“꼭, 그곳을 갈 거라고 했지?”


“응.”


그녀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니까, 그래야 헤매지 않겠지?”


마치 마호가 네가 가는 곳에

늘 함께 야,라고 속삭이는 것만 같다.


“후훗 마호.”


주전자에 뜨거운 보리차가

식어갈 때까지 이야기는 계속 흘렀다.

깊은 밤 어둠 속 적막은

코하네의 웃음소리를 더욱

선명하게 들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잠든 코하네는

내내 악몽을 꾸는 건지 몸을 움찔움찔,

마치 바늘에 찔려 놀란 사람처럼

같은 움직임을 반복했다.

그녀의 몸은 관에 들어가 있는 듯,

똑바른 자세를 유지했고,

두 손을 깍지 낀 채

나란히 배 위에 올려져 있었다.

약간은 비정상적으로

편하지 않은 자세지만

잠이 들었다는 게 중요하다.

마호는 작은 소리에도 움찔대는

그녀의 심장을 손바닥으로

살포시 눌러 주었다.


창을 덮는 덧문의 작은 틈새로

새벽바람에 예민해진

마호의 코를 자극했다.

제대로 나올 것 같은

재채기를 온 힘을 다해 입

을 틀어막았다.

한참을 지나서야

그녀의 숨소리는 낮게 소리 내며

깊은 잠으로 들어간 듯했다.

다행히 더 이상

그녀의 움찔거림은 나타나지 않았다.


마호는 갑자기 엉금엉금 기어가더니,

그녀의 옆자리를 피해

방구석의 모서리에 앉았다.

벽에 기대어 달빛이 감싸고 있는

그녀의 얼굴을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바라보았다.


차라리 멀리서 바라보니

방망이질하는 심장은 천천히

안정을 취할 준비를 한다.


“후우.”


평화로운 저 얼굴 안의 고통은

대체 얼만 큼의 크기일지,

그곳에 깊숙이 들어가

모조리 담아내고 싶은

욕망에 휩싸였다.

밤새도록 그녀의 얼굴을

탐색하고 탐닉했다.


틈 사이로 새벽의 빛이

들어올 때까지 그의 탐색은 계속되었다.

그녀의 낮은 숨소리는

그의 발끝부터 머리까지

전기가 오는 듯한 자극을 느끼게 한다.

눈을 감고 벽에 기대어

그녀의 숨소리에 맞춰 호흡했다.

감은 눈 속에서 코하네의

새하얀 코가 그의 얼굴에 맞닿아

깨끗한 살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그가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잡으려 했지만 이내 다시 사라졌다,

나타났다, 를 반복하며 놀려 댄다.


달콤한 꿈속 또한 그녀를 만질 수가 없다.

그때 그의 심장은

이미 터져버린 채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오랫동안 빛을 발한 티를

내는 햇살이 심술을 부리며 코하네를 깨웠다.

자신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시계가 자리 잡고 있던 곳을

바라보았지만 텅 빈 먼지 낀 선반만 남았다.


“하아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오로지 자신의 몸을 덥히고

있던 이불을 보았다.

마호가 벽에 기댄 채

몸을 비틀어 잠이 들어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다

빠르게 이불을 그에게 덮어준다.


자신만 맛있는 잠을 잤다는

미안함에 작은 소리하나 들릴세라,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끼익, 하는 소리에 입이 벌어지지만,

그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친절하게도 살을 애일 것 같던

바람은 밤새 잦아들었고,

따뜻한 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그녀의 팔목에서

작은 시계가 정각 아홉 시를

가리키는 소리를 낸다.


“띠띠.”

출처, 바다마을 다이어리

코하네는 엄마의 가장자리에

자릴 잡고 앉았다.

감격할 정도의 따스함은

생생하게 후미코와 함께 했던

추억으로 들어가

머릿속을 헤집어 놓고 있다.

그녀는 그렇게 오랫동안

살며시 눈을 감고 있었다.

후미코는 아프지 않은 세상 속에 있고

신페이는 그것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힘이 세진 것 같은 코하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밝게 소리를 질렀다.


“마호, 일어나 마 호!”


자리에 편하게 누운 지 얼마 안 된

그는 이불을 돌돌 말았다.

그녀는 서둘러 전날 사 온

카스텔라와 보리차를 준비한다.

먼발치서 아키라가 지팡이를 짚으며

서두르라며 그녀를 채근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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