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다시 여름
녹나무
도시 생활은 시계추처럼
정확히 지나갔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시간을 지키고 할애해야
겨우 혼자만의 시간을
맞이할 수 있다.
매일 차분히 앉아서 마시던
커피 한 잔의 여유도
오늘은 허락하지 않는다.
울퉁불퉁 고르지 않은 도로 때문에
나오코의 얼굴은 창백해지고
아플 듯 마는 배의 통증도
참기가 힘들었다.
겐토의 거친 운전 솜씨에
아들 쇼를 안고 있는
나오코의 얼굴은 연신
붉으락푸르락 참지 못하고
겨우 짧은 한마디를 내뱉는다.
“겐토, 당신 아들 좀 봐!
설마 편해 보이진 않겠지?”
그는 백미러로 쇼의 얼굴을 본다.
쇼는 금방이라도
잠이 들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고,
가느다란 목이 왔다 갔다
지탱할 줄 모르고 꺾이고 있었다.
나오코가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은
여전히 시간이 흘러도
어색했고 불안정해 보였다.
아이의 목을 받쳐, 란 말이
입안에서 맴돌았지만,
나오코의 눈치를 살피더니
빠르게 속도를 줄이고 거북이처럼
기어갈 작정이다.
나오코가 내쉬는 큰 숨은
그의 귓불을 스치고 지나간다.
몸속에 있는 수분이 빠져나갈 때처럼
체온이 급격히 떨어짐을 느끼며
등줄기에 소름이 돋아났다.
겐토는 뭐든 빨리 잊어버릴 것처럼
정신을 차리려 고개를 흔들며
어깨를 연신 움직인다.
나오코는 처음부터 쇼의 첫 생일을
미네코 곁에서 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미네코는 나오코가 싫다고 하면
그뿐이지만, 집 안에 하나뿐인 아이,
쇼의 생일을 그렇게 보낼 수는 없다며
겐토의 고모들이 며칠째
나오코를 다그치는 중이었다.
고향으로 오지 않는다면
도쿄로 직접 와서
쇼의 생일을 챙기겠다는 그녀들의 말에
나오코는 싫다는 내색 한번 없이
빠르게 짐을 꾸리고 차에 올라탔다.
덕분에 미네코는 쓸데없다고 생각했던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다시 한번 느끼게 될 것이다.
또한 꼭 마주치지 않아도 될
사람들을 마주치게 생겼다.
분명한 건 미네코는 뚱뚱하고
목소리까지 큰 고모들에게
지지 않기 위해
가족이라는 비슷한 단어가
어울릴만한 사람들을
모조리 불러 모을 것이 뻔했다.
그런 자리에 마나츠는 절대
빠지지 않을 것이고,
마나츠를 따라 나오코를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은 이츠키도 올 것이 분명하다.
하즈키는 나오코와 눈 한 번 제대로
마주하지 않을 것이 불 보듯 뻔하지만,
더욱 절망적이었던 건
나오코의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이다.
차라리 마주치지 않은 게 낫다며
생각의 끝은 인상을 찡그리게
만들고 있었다.
나오코는 아이의 젖을 뗀 지
얼마 안 된 상태였고,
그 어떤 상의를 걸쳐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투덜거렸다.
타다요시의 집,
아니 이젠 미네코의 집.
그녀의 집으로 가까워질수록
오른쪽 관자놀이를 딱따구리가 와서
쪼고 있는 고통을 느끼고 있다.
쇼는 모든 행동이나 말이
또래 아이들과 비교했을 때
무척 느린 편이다.
겐토의 뚱뚱한 고모들은
그런 아이들이 더욱 똑똑한 법이라며
말도 안 되는 말을 늘어놓긴 했지만
내심 걱정하고 있었던 나오코는
그런 소리가 싫지는 않은 모양이다.
하지만, 단, 한 명
오랜 시간이 흘러도 그녀,
마나츠에게 만은 이런 모습을
보이기가 너무나 싫었다.
덩치는 커다란 쇼가
기어 다니면서 마나츠의 주위를
맴돌 것을 생각하니 배알이 뒤틀렸다.
나오코는 깊은 잠에 빠진
쇼를 바라보았다.
안고 있는 쇼의 긴 다리가
운전석 뒤를 통통, 부딪히며
소리를 내고 있었다.
나오코의 입에서 또 한 번 한숨이
길게 뿜어져 나왔다.
그녀가 눈치채지 겐토가
백미러로 흘긋거렸다.
시간이 지나면 잠을 잘 법도 했지만
진정하지 못하고 온갖 상상에 빠진
나오코의 모습은 운전대를 잡은
겐토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쇼를 안고 있는 나오코의 얼굴과
목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긴 머리칼이 붙어 있을 만한 곳에
모두 붙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쇼를 안고 있는 나오코는
달리할 수 있는 게 없다.
그저 간지러움과 끈적함을
견뎌내는 것뿐,
품에 잠든 쇼는 천국이라도 온 듯하다.
그때 그녀의 호흡이 점점 빨라지더니,
잠시 잠이든 쇼를 잊고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앗, 제발 겐토 천천히.”
겐토는 그녀의 소리에 놀라
브레이크를 세게 밟고 말았다.
당연히 쇼의 발이 더욱 가까이서
꺾이듯, 부딪혔고
나오코는 또 한 번 짧게 소리쳤다.
“아악.”
이번엔 겐토도 인내의 끝부분에서
터지길 망설이다 숨만 몰아쉰다.
“알았어, 알았다고
그렇게 하고 있어,
안 보여?
속도가 60도 채 되지 않아.”
나오코는 쇼의 몸을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이런 똥차 같으니.”
나오코의 독기가 가득한 목소리에
겐토는 오히려 다시 평정을 되찾고
아예 60도 되지 않은 속도로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속도를 유지했다.
겐토가 말했다.
“3월인데, 무슨 날씨가
이렇게 더운지 모르겠군.”
나오코는 겐토가 알아들을 수 없게
중얼거리며 혼잣말하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분명 아랫니와 윗니를
물고 말하는 소리다.
“아이를 안고 가는 사람도 있어.”
겐토는 브레이크에 발을 얹고 있었다.
쇼가 옹알거리는 소리를 내자
브레이크를 누르고 싶은
화가 섞인 충동을 참을 수 있었다.
나오코는 씩씩거리는 소리만
내지 않았을 뿐, 흥분된 상태로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신발 속은 마치 빗물에 잠긴
장화를 신고 있는 것처럼
땀으로 축축했다.
마나츠가 지나는 곳은
어디든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시끌벅적했고 웃음소리가 떠나질 않는다.
마나츠에게 풍기는 꽃향기는
하즈키의 미간이 좁아지지
않을 정도로 적당했으며
목덜미에 코를 박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게 만든다.
마나츠는 향기로도 충분히
유혹이 가능한 여자다.
하즈키는 마나츠의 끊이지 않은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마냥 즐거웠다.
웃음이 나오지 않은 이야기에도
하즈키는 끊임없이 웃음을 실어 날랐다.
겐토의 뚱뚱한 고모들은
일찍이 미네코의 집에 자릴 잡았고,
굵고 큰 목소리와 덩치가
집 안을 좁게 만들었다.
쉴 새 없는 그녀들의 질문에
마나츠와 하즈키는 이층으로 달아났다.
마나츠가 후덥지근한 방 안의
공기를 맡더니 커튼을 밀쳐내며
하즈키를 다그쳤다.
“덥지 않아?”
“뭐…”
마나츠가 창문 쪽을 살피며
무언가 찾는 듯했다.
“어떻게 된 거야?
그 볼 빨간 술 취한 고양이 말이야?”
“응?”
“어딜 간 거야?”
하즈키가 호탕하게 웃었다.
“술 취해서 산산조각이 났더라.”
마나츠가 그를 비꼰다.
“그것 참, 잘됐네.”
하즈키는 일 층을 내려다본다.
마나츠가 말했다.
“겐토, 많이 늦네?”
“오전에 출발했으니,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이긴 해.”
마나츠가 약간의 불만 섞인
말투를 뱉었다.
“편한 신칸센을 두고…
분명히 나오코가 제멋대로
내린 선택일 거야
나오코에게만 매너 좋은 겐토는
말없이 운전대를 잡았겠지?”
하즈키가 말했다.
“둘이 알아서 할 문제지.”
“누가 몰라?
너무 답답해서 하는 소리야
늘 그러니까, 겐토는 늘 당해.”
“마나츠.”
“알았어, 알았다고.”
마나츠가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창문에 기대고 있는
하즈키의 품에 파고들었다.
자연스럽게 그녀의 목덜미
가까이서 하즈키의 코가 간질거렸다.
하즈키가 나지막이 말했다.
“당신은 늘 맞춰주니까,
이해하기 힘들겠지.”
마나츠가 그의 이마에 입맞춤하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문을 나선다.
“난 내려가서 좀 도울 게,
1분만 더 버텼다 간
덩치 큰 고모들에게
쫓겨날지도 모르거든?
아주 귀한 쇼 님께서 오시니까 큿.”
마나츠를 바라보는
하즈키의 눈빛은 아직 남은
욕망이 가득하다.
그 욕망이 그저 몸이 원하는
종류의 것인지를
그는 아직도 모른다.
마나츠는 그런 그의 눈을
모르지 않았고,
지금도 자신을 원하고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푸른색을 띤 짧은 청치마는
살색 스타킹으로 감싸있는
마나츠의 다리 덕분에
더욱 빛을 발한다.
하즈키는 문틈 사이로
계단을 내려가는 그녀의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마나츠의 살색 스타킹 속이 궁금해졌다.
작은 마을을 이루는 그곳은
순식간에 마나츠의 음식 냄새로
후각과 미각이 곤두설 지경이다.
마나츠와 하즈키가 결혼 후,
미네코는 마나츠의 음식 솜씨로
꽤 자존심이 상했던
날들을 보내곤 했다.
미네코 또한 제대로 된 음식을
만들어 상을 차리곤 했지만,
마나츠에게 만은 역부족이었기 때문이다.
건조하거나 말수가 적은
타다요시의 입을 촉촉하게 만들었고,
말 수를 언제나 한 단어씩,
더 늘어나게 해 주던 장본인이 마나츠다.
한데 재미있는 건,
마나츠도 못하는 음식이 있었다는 것이다.
음식 중 가지절임은 유일하게
미네코의 실력이 더 뛰어났었고,
하즈키의 입맛에 맞는
가지절임을 하기 위해
미네코의 뒤를 졸졸 따르기도 했지만,
그 비밀은 아직도 유효했다.
하즈키는 눈치도 없이
미네코의 가지절임을
그의 입속으로 가져간 횟수는 엄청났다.
마나츠가 그의 미세한 움직임을
보고 있을 때면 늘
나오코와 눈이 마주치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나오코는
마나츠를 비꼬는 듯한 눈웃음을 치곤 했다.
그 모습은 늘 일상처럼 반복해 왔다.
주방 한 편에 놓인 절임 요리는
가지각색의 색깔들로 요란했다.
오이의 녹색, 당근의 주황색,
가지의 보라색, 무의 흰색,
성격들이 다양하다.
마치 절임 요리 뷔페를 방불케 했다.
마나츠는 나오코의 눈빛이
생각났던지 심기가 잠시 불편해짐을 느꼈다.
갑자기 냉장고를 뒤지더니
맥주를 집어 들어 꿀꺽거리며 마셨다.
참았던 목마름이 한 번에 달아나는 것 같다.
“딸깍, 크하.”
생선을 요리하던 미네코가
그녀를 바라보며 혀를 끌끌, 찼다.
“쯧쯧, 날 도와주러 온 것 아니니?
벌써 맥주야?”
“하, 이 정도, 뭐 술인가요?
갈증 나서요.”
닭 손질을 하는 덩치 큰
고모가 한마디 거들었다.
“이런, 마나츠는 그 옷 때문에
앉기도 힘들겠어.”
다른 고모가 말이 끝나자마자
달갑지 않은 눈빛으로 마나츠를 대했다.
아랑곳할 리 없는 마나츠는
오히려 다리를 쭉, 하고
늘어뜨리는 모습을 해 보이며
당당하게 맞섰다.
“세상에 나온 옷 중
제일 편한 옷이라고요, 보세요! 자.”
마나츠의 행동이 미울 리 없는
미네코가 편을 들어준다.
“내가 나이가 다섯 살만 젊었다면
그 치마를 입고 청소를 했겠지.”
“크큿.”
마나츠에 관한 모든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고모들은
쇼의 얘기들로 채우려 작정했다.
“마나츠는 왜 다시
결혼을 안 해요?
여자가 아이를 낳는 시기는
정해져 있어.”
전과 후, 사정을 알지 못하는 그들은
마나츠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리고 말았다.
오히려 미네코의 인상이
더욱 찌푸려지더니, 그들에게
날카로운 화살과 같은 눈빛으로
허공에 대고 쏘고 있다.
눈치 빠른 고모 한 명이 입을 쉬지 않는
고모의 옆구리를 쿡, 찌른다.
어찌나 그 손가락이 살들로 쑥,
들어가던지 손가락 전체가 숨겨지다가
다시 짠, 하고 나타났다.
마나츠는 이야기의 아킬레스건은
뒷전이었고 그 모습에 눈물이
날 정도로 크게 웃게 시작했다.
“어머, 으하하하.”
이유를 알 수 없던 그들은
서로 눈치만 살피는 중이다.
손질된 닭에 간장 소스를 얹더니
깎은 감자를 덩어리째 넣었다.
미네코는 감자의 크기가 맘에 들지 않아,
입을 닫고 감자를 다시 건져 내기 시작했다.
“감자가 너무 크지 않아요?”
“뭐, 이래야 먹음직스럽죠.”
마나츠가 끝나지 않은
웃음을 보이며 거들었다.
“으흐흣, 하긴 고모들에겐
한 입 거리예요, 미네코 큿.”
마나츠의 곁에 있으면
그 누구나 좋은 공기와 웃음으로
전염이 된다.
마나츠는 웬만해선 절대
화를 내지 않았다.
미네코가 마나츠를 따라 웃었다.
“아, 사돈 몇 개는 그냥 넣죠, 뭐.”
고모들은 깎은 감자를
반으로 나누더니, 금세 웃음을 보인다.
“아이고, 고맙습니다.”
주방 안에서 동시에 맥주 캔을 딸깍,
거리는 소리로 가득했다.
오랜 시간 동안 음식을 조리한
미네코의 혀는 간을 맞추기 위해
소금과 간장에 잔뜩 절여 있는 것만 같았다.
맥주로 입안을 가시고 난 후,
마나츠는 귀를 자극할 정도로
맥주를 큰 소리로 꼴깍거렸다.
거의 완성된 요리가 하나씩
자리를 메워가고 있었다.
마나츠는 연한 두부를 사람 수에 맞게
잘라 보기 좋게 담아낸다.
간 생강과 채 썬 파도 잊지 않고 담아낸다.
짠맛을 뺀 삶은 멸치도 한자리를 차지했다.
맥주가 완벽하게 없어질 때,
그 모습에 고모들의 인내심도
바닥이 났는지 한숨을 푹푹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대체 하루를 꼬박 새우려 하나,
기차를 탔으면
벌써 식사도 해치웠을 시간이야.”
“언니, 차를 끌고 온다고 하잖아,
오래 걸릴 거야.”
미네코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끙,
하는 소리가 들렸다.
“으흠, 내 딸이지만
피곤한 아이예요, 휴.”
자기 딸을 탓하며
겐토를 생각하는 모습은
고모들에게 위안이 됐는지,
더 이상 두 부부를 재촉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고모 중, 제일 작은 목소리를 내던
막내 고모가 입을 뗀다.
“더운 날, 아이를 안고
오는 사람이 더 힘들겠죠.”
미네코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에게 어깨를 으쓱하며
고마움을 대신했다.
“출발 시간이 꽤 지났는데,
여덟 시간은 흐른 것 같네요.”
미네코의 근심 가득한 표정은
이제껏 알고 있었던
그녀의 모습이 아니었다.
탱탱했던 볼살은 처졌고,
만들어낸 굴곡은 어색하지 않게
잘 어울린다.
처진 살은 여러 개의 턱이 되었고,
세월을 피하지 못한 주름은
깊이 팬 상처처럼 보인다.
마나츠는 순간 미네코가 안쓰러워
그녀의 팔뚝을 살며시 쓸어내렸다.
미네코 또한 마나츠의 손을
살포시 잡았다.
그 표현은 아마도 살가움에 대한
고마움일 것이다.
미네코라 하면 늘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었다.
붉은 립스틱과 새하얀 얼굴,
새까만 머리칼, 커다란 눈,
가느다란 목덜미.
미네코의 것들은 온데간데없고
검 붉은 입술에는
각질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고
눈 밑은 검은 기미들로,
짙은 파운데이션으로도 감출 수 없는
커다란 지도처럼 보인다.
마나츠는 수심 깊은 미망인의
얼굴을 한 그녀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미세하게 떨리는 그녀의 손가락은
음식을 매만지고 있다.
“마나츠, 채소 좀 손질해 줘.”
마나츠는 불안함이 섞인 말투로
미네코를 걱정했다.
“네, 근데 미네코
건강이 좋아 보이지 않아요.”
미네코는 마나츠의 손에 담긴 채소를
휙, 뺏더니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쓸데없는 소리는, 돕기나 해.”
표현이 서투른 미네코는
물을 세게 틀어내며
바구니 속에 채소를 투박하게 솎아냈다.
“마나츠, 마저 손질해.”
미네코는 갑자기 자신의 방에
들어가더니 방문을 쾅, 하는
소리가 나도록 닫았다.
막내 고모가 마나츠에게 가르치듯,
말을 건넸다.
“마나츠, 여자는 나이를 먹으면,
듣기 좋은 말도 골라 듣게 돼요
나도 그렇다네.”
“네…”
하즈키는 미네코가 집 안에
머무는 시간에는 마치 숨바꼭질이라도 하는 듯,
숨소리, 발소리, 맥주 캔을 따는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오랜만에 마나츠의 방문으로
집 안은 마치 그들의 결혼 생활이
진행 중일 것 같은 기분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게 만들었다.
하즈키는 조심스레 계단을 밟으며 내려왔다.
운이 좋았던 건지,
하즈키만 보면 볼을 쓰다듬으면서
타다요시를 얘기하는
고모들도 잔소리를 시작할 미네코도 자리에 없다.
그는 결혼 초,
추억 속으로 빠져들며
마나츠가 주방 안에서
무언가를 만지작거리는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마치, 자신 또한 보통의 삶을
살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버렸다.
자각하지 못했던 건 아니었지만,
하즈키는 보통의 삶을
애타게 갈망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건,
마나츠는 자신의 품에 있을 때보다
현재가 더욱 아름다웠고,
웃음 또한 맑다는 것이다.
그녀에 대한 욕심은
감정의 것이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그 욕심으로 마나츠의 아름다움을
찢어발기고 싶지는 않았다.
마나츠는 인기척에 뒤를 돌아보았다.
청치마 위로 걸친 앞치마가 마치,
발가벗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물에 젖은 손을 앞치마에 쓱쓱,
닦더니 하즈키에게 다가갔다.
마나츠의 미소는 그에게만
보여주던 야릇함의 대명사다.
손에서 물 한 방울이 바닥으로 뚝, 떨어진다.
앉아 있는 하즈키의 얼굴이
마나츠의 배꼽에 다다라 묻힌다.
이윽고 마나츠는 두 손으로
하즈키의 양쪽 볼을 감싸며
그의 입술을 가볍게 앙, 물어보았다.
그의 왼쪽 눈꺼풀이 움찔했다.
하즈키의 반응은 여전히 마나츠를 즐겁게 했다.
그녀가 하즈키를 안쓰럽게 내려다보았다.
“나를 그리워하는 당신
어쩌나, 불쌍해서.”
하즈키는 마나츠의 허리를 있는 힘껏,
뱀이 똬리를 틀 듯,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고 싶었다.
온 힘을 다해 그녀 속에 있는
모든 공기를 입으로 빨아들이고 싶었다.
한참을 뚫어져라 마나츠를 올려 보았다.
그때 미네코의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고맙게 느껴진다.
그는 빠르게 마나츠에게서 벗어나려
얼굴을 돌렸다.
마나츠는 아랑곳하지 않고 두 손은
여전히 그의 볼 가까이 머물렀다.
“놔주지 않을 거야, 크킄.”
미네코가 그들을 보더니,
언제나 그랬다는 듯,
모른 척 주전자를 집어 물을 따랐다.
오히려 당황한 하즈키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올 때가 됐는데…”
“딴소리.”
하즈키가 현관문을 나서자
미네코가 마나츠에게 말했다.
“아직도 야?”
마나츠는 미네코의 말뜻을
순식간에 알아차린다.
“힛, 미네코도 그렇잖아요?”
“그렇지, 어려운 일이지.”
미네코의 방 안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미네코의 얼굴은 찹쌀가루를
바른 것처럼 새하얗게 변해 있었고
입술은 더 밝은 색의
발간 끼로 동동 떠 돌아다녔다.
억지로 감춰진 주름 사이에는
시간이 지날수록 무너질
파운데이션이 깊게 자리할 것이다.
마나츠는 달라진 그녀의 모습을 보고,
또다시 그녀를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고개를 빠르게 주억거린다.
“으응, 당연! 와,
미네코 갑자기 너무 화사해 보여요.”
싫지 않은 듯, 눈을 찡긋하는 미네코다.
“하기 나름이야.”
쯔루마이 공원에 가까워지자
내내 얌전하던 쇼는
알아채기라도 한 것처럼
보채기 시작했다.
겐토는 알아듣지 못할 말인 줄
알면서도 부정적인 단어로
쇼를 채근하는 나오코가 씁쓸하다.
쇼는 나오코가 어떤 화난 모습을
보여준다 해도 절대 뭐든
그만두는 아이가 아니다.
이상하리만큼 엄마 나오코를 따르지 않았다.
그녀가 하지 말라는 부정적인 단어를
쓰기만 해도 쇼는
더욱 알 수 없는 소리를 지르며 악을 썼다.
“정말이지 넌, 너 같은 애는…”
더 심한 말을 쇼가 듣기 전에
겐토가 빠르게 끼어들었다.
“말조심해.”
“뭐?”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해도
기분으로 다 아는 법이야.”
나오코는 백미러로 비친
겐토를 바라보며 눈 한번
깜박이지 않았다.
입안으로 뭔가를 씹는 것처럼
오물거렸다.
나오코는 그가 여러 번
하고 싶은 말을 속으로 삼키다가
어렵게 뱉은 말에는
대부분 반응하지 않았다.
아마도 진짜 싸움은
그때 일어날 수도 있다는
불길함 때문일 것이다.
나오코는 겐토의 그런 점을
조금은 존중하는 모양이다.
그녀는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후 우우하암.”
나오코의 몰골은 육아에
지친 보통 엄마의 모습보다
더 지쳐 보인다.
겐토는 집 앞에 주차를 하자마자
뒷문을 열고 빠르게 쇼를 안았다.
쇼는 겐토에게 안기자마자,
울음을 그쳤고 딸꾹질하기 시작했다.
“후, 8시간이나
이 애를 들고 있었어.”
“고생 많았어.”
겐토는 뒤이을 당신도,
라는 말을 가식적으로라도
간절하게 듣고 싶었다.
“잠깐 기다려,
이대로 들어갈 순 없어.”
거울을 꺼내 들더니 볼에 붙어 있던
머리칼을 떼어내고
립스틱을 집어 들고 화장을 고친다.
겐토에게 안겨 있던 쇼는
엄마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다시 울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나오코는 자기 모습과
쇼의 모습을 번갈아 보더니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듯한
표정을 하고 애써 평정을 찾으려는 중이다.
나오코의 힘 풀린 목소리가 애처롭기까지 하다.
“나도 울고 싶어, 쇼오.”
“나오코, 당신은 아직도 아름다워.”
나오코의 눈 안에는 눈물이 잔뜩,
고여 있었지만 흐르진 않는다.
“나는 젖가슴이 퉁퉁 불어
젖을 흘린 자국이
보이는 옷을 입고 있어, 겐토.”
나오코가 고개를 저었다.
“나오코.”
“이제야 알겠어?
내가 왜 오지 않으려 했는지,
난 아주 보기 좋은 꼴이 될 거야.”
“가족이잖아, 나오코.”
“그만, 그만 제발 먼저 들어가.”
“같이 들어가자.”
쇼는 더 큰 목소리로 악을 쓰며
울음을 터트렸다.
“제발, 겐토 기저귀나 갈아줘.”
“그럴 게, 곧 들어와.”
겐토는 쇼를 어르고 흔들며
집 안으로 들어간다.
나오코는 늘 사용했던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쭈그리고 앉았다.
젖으로 얼룩진 티셔츠를 감싸며
리넨으로 된 재킷을 걸쳤다.
다행히 커다란 옷은
얼룩을 가려 줄 수가 있었다.
귀가 꽉 막히는 느낌이 들더니,
눈과 코가 뜨거워진다.
고개를 흔들며 입을 오므리고
있는 힘껏 눈물샘을 틀어막는 중이다.
마지막에 삼킨 마른침은 목으로
흘러버린 눈물이었을 것이다.
“후우.”
쇼를 안고 오는 동안 내내
흘린 땀은 3월의 남지 않은
밤의 한기에 금방 식어 내렸다.
체온이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일 년 만에 만나는 사람들의
얼굴이 필름처럼 지나갔다.
마지막 필름에서 하즈키의 얼굴이
보이며 멈춰 버렸다.
“나오코.”
그의 목소리로 착각을 할 만한
목소리가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환청이 들렸을까,
앞에 멈춰 선 사람은 다행히 그가 아닌,
마나츠다.
지금의 몰골을 보여줄 수 없기에
천만다행이라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나오코는 마나츠의 표정을 보면서
이런 표정일 줄 알았어,라고
중얼거리며 내키지 않아 했다.
마나츠는 이층에서부터
나오코를 쭉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길게 뻗은 마나츠의 손에서
꽃향기가 퍼졌다.
“들어가자, 나오코.”
발을 딛는 마나츠의 구두가
또각, 소리를 낸다.
“좀, 이따.”
“기온이 떨어졌어, 들어가자.”
나오코는 길게 뻗고 꽃향기를
뿜어 대는 마나츠의 손가락을
잡지 않을 거야,라는 판단과
반대로 덥석, 잡아버린다.
마나츠 또한 약간 놀란 눈치다.
마치 적이었던 관계가 공감이라는
한 단어로 동맹을 맺는 것처럼,
하지만 어색하다.
더욱 난감한 건,
나오코의 코와 눈이
다시 뜨거워지고 있는 것이었다.
마나츠의 손은 나오코의 눈과
코처럼 온기가 가득했다.
“내 모습, 우습게 보는 거 알아요.”
그때 마나츠의 표정은
이불을 덮어주던 미네코의 표정과도 같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모습처럼
감탄할 만한 상대가 또, 있을까?”
나오코가 손에 이끌려
하체를 마저 일으켜 세운다.
“좋은 말만 하는 거,
질리지 않아요?”
“이런 이런, 진심이야
나오코 날 싫어하는 건 알겠지만,
2년 만에 본 사람한테 이러기야?”
나오코가 먼저 앞장서 계단을 오른다.
“변하지 않은 것 보니 보기 좋네? 후.”
“그것도 좋은 말?”
“그래 나오코 어서 올라가시죠!”
나오코는 오랜만에
짙은 나무 냄새를 깊게 빨아들였다.
“먼저 내려가요, 난 이것 좀.”
나오코는 얼룩진 티셔츠를 가리키며 말했다.
“응, 그래.”
나오코의 방문이 소리를 내며 인사한다.
“달칵.”
방에 들어선 순간,
과연 자신이 오고 싶어 하지 않아
했던 곳이었던가, 라며
온갖 생각들이 교차되는 중이다.
죽도록 오고 싶지 않았던 곳에
발을 들이자, 최근 느껴보지 못했던
평화를 느끼고 있었다.
벽에 스며들었던 수많은 향내가
짙게 퍼져 있었다.
스스로 만들어 놓았던
어색한 재단은 그대로 있었다.
미네코의 성격과도 어울리게
새하얀 면으로 쓰지 않는 것들 위에
툭, 걸쳐져 있었다.
재단 위는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다.
아마도 미네코의 손길이
늘 자리했던 모양이다.
“쓸데없이.”
옷장을 열어 챙기지 않았던 옷을 뒤적였다.
나오코는 결혼 후,
새집을 이사하면서
이곳에 있던 물건은 거의 챙기지 않았다.
그것은 앞으로 자신의 삶을
어떻게 살아갈지를 보여주는
다짐이기도 했다.
오늘은 되도록
어두운 색깔의 옷을 고를 작정이다.
갈색의 블라우스를 대충 걸치고
검은 바지를 입었다.
다행히 원래 넉넉하게 입는
스타일의 옷이라 맞지 않은 몸을
구겨 넣으며 다시 한번
좌절할 일은 없다.
거울에 자신의 몸을 비춰보며
끈적한 머리칼을 틀어 올렸다.
조금씩 삐죽, 나온 머리칼은
오히려 그녀를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든다.
이층 계단에서 발을 디디며 하나씩,
하나씩 계단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계단은 윤기가 흘렀다.
타타요시가 죽고 난 후부터
죽은 고목나무로 지은 집 같았던 곳이,
변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결혼 후, 집을 떠나올 때
하즈키에게 물었다.
“어떻게 살아갈 거야?”
무슨 질문이 그렇냐, 고
물어볼 만도 하지만
그는 즉각 환한 웃음을 짓고 대답했다.
“평화, 우선 마음의
평화를 찾을 거야.”
집 안 곳곳에 그의 평화가 느껴진다.
하즈키가 칠해 놓은 니스 칠,
나무의 결 따라 섬세하게 발라 놓은
모습은 그의 성격이
고스란히 담겨 있음을 확인할 수가 있다.
기름처럼 윤기가 흐르는 나무는
빈틈이 없었다.
숨을 들이마실 때,
끝에 남은 니스 향은
꼭, 중독될 것처럼 뇌를 즐겁게 했다.
일 층에 다다랐을 때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집이 낯설 정도로 이렇게
환하고 밝았나,라고
기억을 더듬어 봐도
생각나지 않았다.
정확히 타다요시가 떠나고 난 후,
그랬던 적이 없던 곳이다.
집 안의 등을 확인해야만
답이 나올 것 같다.
집 안은 사람들의
온기와 음식 냄새로 가득했고
몇 안 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겐토가 미리 나오코의
심신에 관한 얘기를 늘어놨는지
모르겠지만, 하즈키는 그녀를 보자,
가볍게 손을 흔들며 인사한다.
겐토는 나오코에게
시선을 주지도 않은 채,
쇼를 안고 달래느라 정신이 없다.
겐토의 고모들 또한
그에게 완벽한 교육을
선사받은 모양이다.
첫인사가 쇼의 동생에 관한
이야기만 늘어놓기만 했던
그녀들은 나오코를 보자마자
반갑게 등을 두들겨 주느라 바빴다.
그런 모습을 봐 선,
겐토는 완벽한 남편,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네코는 어색한 죄수라도 된
표정으로 딸 나오코의 손을 잡았다.
“왔니? 힘들었지?”
그토록 듣고 싶어 했던
다정한 말투는 나오코가 집을
떠나고 나서야 시작되었다.
나오코는 어깨만 으쓱할 뿐,
대답하지 않는다.
미네코가 서둘러 몸을
주방으로 옮기며 말했다.
“땀이 많이 난 모양이야,
음식을 준비할 테니, 씻고 와라.”
언제 다가왔는지,
겐토도 빠르게 미네코의 말을 거들었다.
“그래, 여보 이츠키가 오면 식사할 거야.”
마나츠도 나오코를 바라보며
눈짓으로 이층 계단을 가리켰다.
불편한 상황에 나오코는
다시 발걸음을 옮기며 겐토를 다그쳤다.
“겐토, 기저귀.”
쇼의 기저귀가 볼록한 모양으로
오줌을 머금고 있는 것이
한눈에 들어왔다.
겐토에게 부탁한 쇼의 기저귀
갈아주기, 가 아직, 이라는 생각에
나오코는 다시 심장에 불길이
솟아오르는 것처럼 뜨거워졌다.
바보 같은 겐토는 실실 웃으며
그녀에게 올라가라며 손짓했다.
나오코는 입안에서, 멍청이,
라는 단어를 몇 번씩이나 오물거렸다.
“나오코, 얼른 올라가
안 그래도 하즈키한테
기저귀를 갈기를 시켜 볼 거야 하하.”
하즈키가 기저귀를 들어 보이며
앞과 뒤를 확인하는 중이다.
“이거야, 원 면접보다 더 힘들겠어.”
나오코의 눈이 웃고 있는
하즈키와 마주치자 후다닥,
소리를 내며 계단으로 순식간에 올라선다.
집 안 한구석에 쇼의 선물이
가득히 쌓여 있었다.
고모들이 준비한 옷은 쇼가 몇 년이
훌쩍 지나도 입을 수 있을 만한 것이다.
당연히 지금 입기에는 무리다.
나오코는 그녀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떤 행동이든, 말이든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다.
이츠키는 이츠키의
저녁 손님을 받지 않고 오긴 했지만
홀로 늦게 온 탓에
고모들을 똑바로 보지도 못한다.
양손에는 요즘 젊은 엄마들이
많이 쓴다는 기저귀 박스와
온갖 종류의 술을 치렁치렁 매달고 있었다.
술을 본 미네코는 이츠키에게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눈을 찡긋해 보였다.
기어 다니기가 느린 쇼가
겐토의 손을 잡고 천천히 준비하며
무릎을 쫙, 펴 보이더니
이내 힘이 빠졌는지 주저앉고 말았다.
모든 사람의 입에서는
동시에 탄식의 소리를 뱉는다.
“아, 하아…”
쇼는 큰 소리에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더니,
마나츠에게 오랜 시간 동안
천천히 어렵게 기어갔다.
마나츠가 두 손을 치며 내밀었다.
“쇼오오, 내게 오려고?”
쇼는 빠른 속도로 마나츠의 품에 안겼다.
마나츠는 쇼를 꼭 껴안더니
자신도 모르게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쇼의 볼에서 진한 젖비린내가 풍겼다.
낯선 얼굴만 보면 기겁하던 쇼를 보며
고모들은 혀를 내두르며 마나츠를 칭찬했다.
“어쩜, 쇼가 사람을 볼 줄 안다고.”
막내 고모가 겐토의 눈치를 보며
첫째 고모의 갈비뼈가 만져지지
않을 살점을 쿡, 찔렀다.
하즈키는 아이를 안고 있는
마나츠에 대한 욕망이 다 타고
남은 초의 심지처럼 사그라든다.
마나츠는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 잘 어울렸고,
하루라도 빨리 평범한 생활을
하기를 다시 한번 바랬다.
쇼는 마나츠가 선물로 준비한
큼지막한 미키 마우스가
신기했던 모양이다.
나오코와 겐토가 그 어떤 장난감을 들고
요란을 떨어도 절대 웃거나
호기심을 보이지 않던 쇼가
미키의 귀를 잡더니
입으로 한가득 집어넣으며
물어뜯기 시작했다.
집 안은 아이 하나로 똘똘 뭉쳐
사람들의 목소리는 마치
헬륨 가스를 가득 머금은
목소리로 떠들어 댔고,
미각을 돋우는 온갖
음식 냄새는 뒷전이었다.
오랜만에 적막을 깨뜨린 소리는
그들이 술을 들이켜지 않아도
볼을 발갛게 만드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여러 번 음식을 담아내느라 바쁜
미네코는 식사를 모두 마치고 나니
얼굴색이 급격히 거무튀튀해졌다.
하얗게 들떠 있던 피부는
얼룩덜룩한 무늬를 만들더니
입술의 붉은색도 겉만 남아
지저분한 미망인의 얼굴을 떠올리게 했다.
이제야 자리에 앉아
제대로 쇼를 볼 수 있었다.
나오코는 그런 미네코의 모습이
계속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무언가 얘기를 꺼내고 싶어 하는 듯했으나,
덩치 큰 고모들 앞에서
그런 말을 꺼낼 순 없다.
미네코는 막내 고모의 품에
안겨 있던 쇼를 들어 안아 볼 모양이다.
“쇼오, 이제 할미한테 와야지?
이리 와 봐”
미네코는 잘 걷지 못하는 쇼의
겨드랑이를 지탱해 주며
걷기를 희망했다.
“자, 한 발 한 발,
그렇지 우리 쇼오, 잘하는구나.”
나오코는 미네코의 혀가 고부라지는
생전 처음 듣는 목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자신도 모르게 말이 툭, 떨어졌다.
“그런 말도 할 줄 알아요?”
정작, 미네코는 나오코의
가시 돋친 말에 반응이 없었지만,
역시나 제일 덩치가 크고 하마 같은
첫째 고모가 나오코에게
눈을 흘기며 말했다.
“나오코, 넌 애가 어쩜,
변한 게 하나도 없구나.”
큰 소리에 설거지를 도맡아 하던
마나츠가 앞치마를 두르고
뒤를 돌아보았다.
당연히 겐토가 모른 척
고모에게 다가가 나오코를
대신해 입을 벙긋했다.
“고모, 이츠키가
진짜 좋은 술을 가져왔네?
이것 좀 봐요.”
나오코는 물러서지 않을 작정인 듯하다.
“칭찬하시는 거예요?”
마나츠가 고개를 저으며
혼잣말하더니 다시 개수대의
그릇을 씻기 시작했다.
“좋은 날에 꼭,
그래야만 하냐, 이거다.”
쇼를 잡고 걸음마를 가르치는
미네코의 몸에서 두둑, 하는
소리가 들렸다.
눈치 빠른 나오코는 미네코의 다리가
내는 소리인 줄 금방 알아차린다.
쇼를 잡고 손을 놓지 못하는
미네코의 모습은
나오코의 어릴 적 엄마의 모습과는
너무 상반되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좋은 날에 그만들 좀 해요.”
겐토가 벌떡 일어나,
고모의 하마 같은 허리 잡아끌며
나오코를 바라보며
눈을 찡긋해 보였다.
“무슨 말이 그러냐? 겐토.”
나오코는 멍청이 같은
겐토의 행동에 할 말을 잃고,
기가 막힌다는 듯한 웃음을 지었다.
“고모 자자, 이리 오세요.”
막내 고모도 겐토를 도와
그녀를 잡아끌었다.
“언니, 그만해요.”
미네코의 귀는 들리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걸음마를 떼는 게 힘이 들었는지,
쇼는 끝내 미네코의 손에서
울음을 터트렸다.
당황스러워할 수도 있었지만
능숙하게 쇼를 들어 올리며
이상한 소리로 어르고 달래는 중이다.
정리되지 못한 긴 손톱 위는
수명을 다한 붉은 매니큐어가
딱지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나오코는 그 손가락으로
쇼의 등을 매만지고,
파운데이션이 얼룩진 얼굴로
쇼의 얼굴을 비벼 대는
미네코의 모습이 못마땅하다.
나오코는 끝내 참지 못하고,
쇼를 덥석 잡아채더니
미네코를 잠시 응시했다.
미네코의 두 팔과 손가락은
마치 쇼가 안겨 있는 것처럼
그대로 멈춰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나오코가 눈을 내리깔며
최대한 목소리를 낮춘다.
“울잖아, 재우고 올 게요.”
그 모습을 쭉, 지켜본 마나츠는
자기 부모는 아니지만
한풀 꺾여 늙어 가는
미네코의 모습이 안쓰러워 코끝이 매웠다.
마나츠가 빠르게
미네코의 팔목을 잡으며 끼어들었다.
“응, 그게 좋겠다,
우리 쇼가 많이 졸렸네?”
겐토는 고모들을 이츠키에게 맡긴 후,
나오코를 따라나선다.
“어머니, 아이 좀 재우고 내려올게요.”
미네코는 말없이 눈가에
힘없는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 찰나에 미네코의 눈 밑은
깊은 고랑을 파 놓은 듯,
말할 수 없이 숨기고 싶은
감정들이 그대로 들어 있었다.
이층 방문이 콰광, 하고 닫히는
소리가 나서야 미네코의 긴장되어 있던
등에 힘이 빠지며 숨과 함께
동그란 반원을 만들었다.
“후유우.”
하즈키는 다른 공간으로
당연히 자리를 옮긴 상태였고,
마나츠는 여전히 미네코에게
시선을 떼지 못하고 바라보고 있었다.
“뭘, 그렇게 뚫어져라 보는 거야.”
“미네코.”
“그런 거 질색이다.”
미네코는 방석에서
천천히 일어서며 약간의 어지럼증을
느꼈는지 곁에 있던 마나츠를 잡았다.
“어쿠우, 네 어깨가 있어서 다행이군.”
“다 쓸데가 있어요, 미네코 큭.”
“흠, 우리가 왜 진작에
이렇게 지내지 못했을까,
모두 내 부덕이지.”
“미네코… 무슨”
미네코가 마나츠의
어깨를 가볍게 툭, 친다.
마나츠가 미네코를 부축하며
방까지 함께 걸었다.
미네코의 주름에 끼인
뭉친 살색의 그것들을
드러내 보이며 마나츠를 보며
고맙다는 말 대신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미네코의 방은 타다요시가 살아 있을 때,
함께 지냈던 모습과 한치도 틀림없이
꼭, 같았다.
마나츠가 그 집을 떠난 지
몇 년이 지났는데,
어떻게 이런 모습을 하고
살 수 있었는지가 의문이다.
그 어떤 물건도 다름이 없었다.
그가 병을 앓기 시작할 무렵,
미네코는 엄청난 가격의
침대를 사들였다.
누워 지낼 날들이
많을 거란 의사 말에
직접 구매한 것이다.
그가 쓰던 베개가
미네코의 베개 옆에
나란히 여전히 뉘어 있었다.
조금 공포스럽기도 하다.
그것들은 마치 새것처럼
새하얗게 빛이 났고
금방이라도 그가
굵은 목소리를 내며 나타날 것 같았다.
“미네코, 누워요.”
미네코는 침대에 걸쳐
앉아 바닥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나오코의 모습은 당연해.”
마나츠가 그녀의 등을 쓸었다.
“난 나오코보다
내가 늘 중요했어, 내 인생이.”
“미네코가 행복해야
나오코도 행복할 수 있으니까요.”
“그 애가 쇼만 할 때
아무리 울어도
난 그 애를 안아줘 본 적이 없어
내 인생이 그 애 때문에
불행해졌다고 생각했으니까…
왜 그땐 그저 억울하기만 했는지.”
마나츠가 주전자의 보리차를 따라
그녀에게 내밀었다.
“늙어 버린 거지,
늦게 알아버린 거지,
세상에 저렇게 귀한 딸이 내 곁에…”
미네코의 컵을 받아들인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끝내 그녀의 두 눈에서
검은 물이 흘러내린다.
“미네코…”
“그 아이가 어이없어할 만한
내 모습이, 맞아.”
늙어 버린 그녀는 마나츠에게
그만 나가보라는 손짓을 하더니,
침대가 아닌 다다미 바닥에
풀썩, 하고 앉는다.
“괜찮아요?”
그녀가 입을 쭉, 내밀더니 웃었다.
“그럼, 좀 쉬어요.”
“불 좀 꺼 주겠어?”
“응, 그럴게요.”
미네코는 그가 누워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고 꼭,
그를 감싸듯 왼팔을 침대 위에
살포시 올린다.
강한 성격의 돈만 밝히던 그녀는
온데간데없고,
그녀의 등은 낡아 빠진,
휘어진 활처럼 외롭기 짝이 없다.
어느 시간에 감쪽같이
준비해 두었는지
미네코의 배려에 나오코는 어안이 벙벙하다.
칭얼대는 쇼를 겐토에게 건넨다.
다다미에 깔린 앙증맞은
요가 직각을 이루며
진열해 놓은 듯 펼쳐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손으로 만져 보지 않아도
그것의 폭신함은
말이 필요 없을 듯한 두께다.
베개를 만져 보니 꼭,
메밀이 들어 있는 것처럼
사삭사삭, 시원한 소리가 들렸다.
쇼도 어느새 칭얼댐을 멈추고
손가락을 맛있게 씹고 있었다.
눈꺼풀을 깜박거리더니,
눈물 한 방울이 볼에 떨어져 맺힌다
.
나오코의 불그죽죽했던 얼굴이
언제 그랬냐는 듯,
불편한 심기가 사라져
만질만질한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쇼는 빨던 손가락을
뽑 소리가 나도록 빼곤
젖 냄새를 따라 나오코의 가슴을
파고들며 얼굴을 비벼댔다.
쇼는 젖을 뗀 시기가 오래 지났지만,
아직도 엄마의 젖을 찾거나,
물거나 비비적거렸다.
그러다 성에 차지 않으면
두 발을 쭉 뻗으며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은 채
다시 칭얼거리기 시작한다.
젖을 뗀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땐
나오코가 쇼의 고집에 넘어가기
일쑤였지만 이제 그 부분만은
아주 능숙하게 모른 척
잘도 지나간다.
겐토는 쭉, 그녀의 눈치만 살피며
쇼가 얼른 잠이 들기를
기도할 뿐이다.
몇 번을 나오코의 가슴으로 데구루루,
다다미 밖으로 데구루루,
구르더니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겐토가 천천히 쇼의 가슴 위로
이불을 덮어준다.
나오코의 목덜미와 이마에는
또다시 습기가 가득 들어찼다.
그녀는 쇼의 머리에서
천천히 팔을 빼더니
버릇처럼 큰 숨을 몰아 내쉰다.
“후우, 아아아.”
겐토는 말할 시기를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
나지막이 나오코의 이름을 불렀다.
“나오코.”
그녀는 겐토에게 검지를 올리며
조용히,라는 시늉을 한다.
“쉬이.”
“깨지 않아.”
나오코의 눈은
겐토를 모른 척하나
겐토는 이번만은
끝까지 말할 작정이다.
“말, 좀 조심… 부탁해.”
“누구? 누구에게?”
“나오코.”
“고모는 말을
아주 듣기 좋게 하셨고?”
“어머니 미네코 말이야,
서운하셨을 거야.”
“틀린 말 아니야.”
겐토가 그녀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제발 나오코 언제까지
그렇게 삐뚤거릴 거야?”
“내가 입을 열지 않게 해,
그럼 되는 거야.”
“당신, 지금 그게 말이라고 하냐?”
“나도 이런 말들을 떠벌리고
있는 내가 기가 막혀.”
“나오코, 넌 아이 엄마야
순응할 때도 됐어
정말 미네코를 이해 못 하는 거야?
나도 이해가 되는데?”
“너무 이해해 너무 이해하지
그렇게 내가 해왔던
모든 것들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
충분히 벌 받고 있는 기분이니까,
모두 다 아는 것처럼 말하지 마.
겐토가 그녀의 두 손목을
다시 고쳐 잡아 이끈다.
“나오코, 미네코는 예전 같지 않아,
당신도 보이지 않아?”
나오코는 그의 손을 뿌리치지만,
그의 힘과 고집은 완강했다.
“당신이야 말로 안 보여?
아직도 그런 두꺼운
화장을 하고 머리 아픈 냄새를 풍겨 대,
그뿐인 줄 알아?
가끔 마주치는 눈은
차가워서 얼어붙을 것만 같아
그 얼굴로 쇼의 볼에 비벼 대?
손톱에 자리 잡은 붉은색이
피가 아니니 천만다행이야.”
겐토는 자신을 말하는 말이
아니라 해도 가슴을 후벼 파는
고통이 느껴지는 단어들이었다.
“그러면 좀 어때?
뭐가 잘못됐어?
당신에게 쇼가 소중하듯,
그녀도 같아,
나오코, 세월이 많이 흘렀어.”
“당신은 늘 옳아야 하지,
그리고 말이 많지
언제나 난 악역이고.”
겐토는 그녀의 손목을
세게 뿌리치더니, 벌떡 일어났다.
겐토의 인내심과 설득과
눈치 보기는 바닥이 난 게 분명하다.
이때쯤 되면 겐토의 얼굴은
정말 무섭게 변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얼굴을 보지 않았고,
태평한 것처럼 위장한 얼굴로
더 이상 싸움하지 않겠다는
신호를 보이며 쇼 옆에 누웠다.
겐토가 위에서 그녀를
아무 말 없이 한참을 노려보더니,
튀어나오는 말을 치아로 틀어막았다.
곧 문을 닫고 나가 쾅 소리에 놀란
쇼의 두 팔과 다리가 공중으로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간다.
나오코는 미간을 찌푸리며
손바닥을 쇼의 가슴에 대고
지그시 누르며 두드리기를 반복했다.
다행히 쇼는 다시 깊은 잠 속으로 빠졌다.
나오코는 다시 깊이 숨을 몰아쉬는 중이다.
순간, 눈이 감기고
몸이 바닥으로 쑥, 빨려
들어가는 기분을 느꼈다.
화들짝, 놀라 눈을 떠보니
불에 그을린 것 같은
검은 자국들이 천장에 그려져 있었다.
늘, 천장을 보고 눈을 깜박이길
수년을 해왔지만
처음 본 것처럼 낯설다.
쇼를 잊고 있었는지
인기척에 옆을 바라보았다.
쇼가 큰 눈을 끔벅끔벅,
나오코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아이를 내려보며
오랫동안 눈을 마주쳤다.
쇼의 반짝이는 눈은 마치
커피 향이 날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아랫입술보다 더 두꺼운 윗입술은
뾰족하게 코를 향해 있었다.
입술 산을 쿡쿡, 찔러보니
말캉거리는 느낌이 좋았다.
쇼의 입술은 피를 속이지 못할,
미네코와 똑 닮아 있었다.
쇼의 두 다리를 잡고 꾹꾹,
주물러 보았다.
역시 쇼는 표정에 변화 없이
엄마를 쳐다볼 뿐이다.
겐토가 일어서며 세게 밀린
다다미의 연결 부위가 찢겨 있었다.
도르르 말린 모양이
신경이 쓰였는지 제자리로
말아보지만 역부족이다.
갑자기 이유 없이
쇼가 발버둥 치며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나오코는 몸을 웅크린 채
쇼의 다리를 꼭 잡고,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한 방울의 눈물도
용서할 수 없다는 듯이
숨을 가쁘게 쉬고
입술을 깨물었다.
터져 나올 눈물 한 방울도
남기지 않을 작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나오코의 눈은 바싹 마른
가을 나뭇잎이 되고 싶은 모양이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잦아들지만 여전히 밤공기는 차다.
마당 한 구석의 조금씩 늘어나는
소주, 맥주병이 나란히 줄지어 있었다.
그들의 취기가 밤공기를
녹일 작정인 듯하다.
마당 한 편에 곧게 뻗은
녹나무의 웅장함은
마치 다타요시가 상석에 앉아
그들을 보고 있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하즈키는 자신도 모르게
녹나무에 고개가 자꾸만 돌아간다.
마나츠가 그의 반복되는
행동을 보다 못해 제지하려 말을 꺼낸다.
“하즈키, 왜 그래?
뭘 자꾸 보는 거야?”
장난기가 발동한 하즈키가
마나츠가 서 있는
뒤쪽을 매섭게 노려보는 시늉을 했다.
“누가 있는 것 같아서.”
“뭣?”
“저기.”
하즈키가 손을 가리키며
마나츠가 뒤돌아보는 틈을 타
어깨를 툭, 건드렸다.
마나츠는 소스라치게
호들갑을 떨며 뒤로 자빠질 기세다.
“으아 장난치지 마, 무섭다고.”
“크하, 크크큭.”
이츠키가 자빠질 뻔한 마나츠의
손을 잡으며 그녀를 거들었다.
이츠키는 늘 그녀를 위해
준비된 기사 같다.
이츠키가 말했다.
“뭐야, 하즈키 나도 놀랐잖아.”
겐토가 이츠키를 놀려 댄다.
“남자 맞아?”
녹나무가 열렬한 반응에
나뭇잎을 나부끼며
유치함에 그들을 비웃는 것 같다.
“저 나무, 아버지가 아끼던 나무야
잎들이 움직이니까
자꾸 신경 쓰여.”
마나츠가 황당하다며
하즈키를 윽박질렀다.
“뭐야, 아주 잔잔한 바람에도
잎은 움직여, 바보.”
겐토가 하즈키에게 맥주를 따라 준다.
“이 자식은, 너무 감상적이야
술이나 마셔.”
겐토가 하즈키의 어깨에
팔을 두르니, 마나츠가 하즈키의
곁에 바싹 다가와 앉으며 말했다.
“들어봐, 얘기.”
하즈키가 마나츠의 머리칼을 비비적거린다.
“으응?”
“하즈키 당신은 알 거야,
겐토 잘 들어 봐
저기 뒷마당에 있는 나무 두 개, 알지?
그게 왜 심어졌는지 알아?”
하즈키는 자신도 몰랐다는 듯이
어리둥절하며 그녀를 바라본다.
“뭐, 아버님은 워낙
자연을 좋아했던 분이니까,
타다요시는 정말 자상한 분이셨어,
나오코를 위해서 심은 거래.”
하즈키는 그런 줄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오코네?”
“으응?”
“나무 이름.”
감상적인 이야기가 재미없다며
겐토는 하즈키의 뒤통수를
때리는 시늉을 했다.
“또, 또 나오코.”
마나츠가 입을 삐죽거리며
겐토에게 혀를 내밀었다.
“혼자 즐기지 말고
나오코랑 교대 좀 하지 그래?”
이츠키가 겐토를 거들어 준다.
“아이는 엄마가 재워야지.”
“헛, 이츠키 그건 시대적으로
굉장히 뒤떨어지는 말이란 것 모르시나?”
이츠키는 그저 마나츠에게
못되게 구는 나오코가
맘에 들지 않아 하는 말에
불과하지만 기도 못 펴 볼 것처럼
순간 움츠러들었다.
이츠키는 연신 머리를 긁적이며
두리번거렸다.
하즈키가 마나츠와 이츠키를
번갈아 보더니 마나츠의 기에
눌려 말 한번 못하는 이츠키를
수상하게 여기며 말했다.
“이츠키, 뭐야?
마나츠 말 한마디에?”
마나츠라면 앞뒤 구분하지 않고
입장까지 바꾸는 그가 대답한다.
“틀린 말이 아니지, 맞아 맞아.”
하즈키는 큰 소리로
이츠키를 놀려 먹는 중이다.
“우리 남자들이란.”
겐토는 나오코의 지친 얼굴이
떠올라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겐토의 볼이 붉게 달아오른 것이
나오코 때문인지,
취기 때문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겐토가 말했다.
“결국, 마나츠와 나오코가
한편이 됐네, 축하해 축하.”
겐토가 맥주잔을 들고일어나
계단으로 향했다.
마나츠가 그의 등에 대고 소리를 친다.
“계단 조심하라고.”
이츠키가 빈 병을 구석으로 몰아넣으며
술을 마시지 않은 것처럼.
다시 시작할 요량으로,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싶은 욕구로
마나츠 옆에 붙어 앉았다.
이번엔 남자처럼 거친 목소리로 말을 내뱉는다.
“겐토, 저 자식 왜 저래?”
겐토는 일그러진 얼굴로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잔에 가득 찬 맥주를 한숨에 들이켰다.
발끝에 쇠고랑을 질질 끌고 가는
사람처럼 걷고 있는
다리의 무게가 꽤 무거워 보였다.
하즈키가 말했다.
“마나츠가 한 말이 틀렸으니까.”
“내가 뭘?”
“보고도 몰라?”
“왜 모르겠어,
하지만 지금이라도 빨리
올라가 보는 게 낫지, 안 그래?”
이츠키가 마나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화에 더욱 적극적으로 끼어들었다.
“겐토 자식, 아마 둘을 키우느라
지친 것이 틀림없어.”
“푸핫, 쇼가 조금 더 자라면
괜찮아질 거야.”
어느새 마나츠와 하즈키 사이에
자릴 잡고 앉은 이츠키를
하즈키가 물끄러미 보며 생각했다.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이 정확하리라,
의심치 않았다.
이츠키는 말할 때,
마나츠를 똑바로 보고 말하지 않았지만,
괴물 같은 집중력으로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빠르게 반응하고 있었다.
이츠키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그녀에게 맞춰서 움직였다.
골똘히 생각해 보니,
이츠키의 저런 모습은
굉장히 오랫동안 봐 왔던 모습이었다.
정말 늘 그랬다.
이츠키가 그녀에게 관심을
보였던 것은 아마도 그녀와
결혼하기 전부터 라고 확신이 들었다.
떠도는 소문은 진실이었다.
하즈키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무슨 말이라도 내뱉어야 할 것 같았다.
“푸핫, 하하하하
나오코가 좀 특별하긴 하지.”
마나츠가 어이없다는 듯이
하즈키를 보며 말을 꺼낸다.
“응? 뭐가 그렇게 재미있어?
그게 그렇게 우스운 얘기야?”
마나츠가 고개를 젓는다.
“하, 대체, 우린 왜 아직도
정상적으로 살지 못하고 있는 걸까?”
마나츠의 소리에 하즈키는
이츠키를 보며 더욱 큰 소리로 웃어 댔다.
눈치를 챈 건지,
이츠키가 하즈키의 허벅지를
발로 밀어내는 시늉을 하며 중얼거린다.
“이것 봐, 네 정신이 제일 의심스러워.”
하즈키는 자신이 마신 술병을
세어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이것 좀 봐, 이 술을 다 마셔 놓고도
다들 제정신이라고? 풋.”
이츠키는 어깨를 으쓱하며
어디서 나온 자신감인지,
그 답지 않게 몸을 놀렸다.
술에 취한 것처럼
혀를 내밀고 콧구멍을 벌렁거리는
시늉을 하더니 허리를
오랑우탄처럼 구부리는 시늉을 했다.
빠르게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는
마나츠에게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싫지 않았는지,
그녀도 따라 술 취한
여자의 모습을 따라 하며
흔들흔들 이츠키의 손을 잡고 일어난다.
마나츠의 허리를 감싸며
마치 시소를 탄 것처럼 왼쪽,
오른쪽을 왔다 갔다 박자를 잘도 맞춘다.
때마침 하즈키의 작은 카세트 속에서
음악이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