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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끼

20. 여름의 시작

by 금봉


미끼



출처,아수라처럼


겐토의 집은 고모들의 보살핌으로

여전히 사람이 살고 있는 것처럼

아늑했고 언제나 신선한 물을

마실 수 있었다.

본격적으로 시작될 여름 장마와

바람에 대비하기 위해

온 집안의 창문을

나무판자로 덮어 두거나

밧줄로 꽁꽁 매는 작업을 서두른다.

언제 또 이곳에

오고 싶어 하지 않은 나오코를

데리고 올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제 나이가 꽉,

차 무거운 몸을 이끌고 다니는 것을

버거워하는 고모들에게

맡기는 것도 하루 이틀, 면목이 없었다.

그렇다고 고모들이 모른 척할 사람들은

아니지만 거드는 척이라도 해야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들은 친 자식보다 더 겐토를 챙겼다.


거의 2년 만에 본 나오코와

마주해야 할 시간이 어색했는지

하즈키는 겐토를 돕기 위해

팔을 걷어붙인다.

여전히 눈치 없는 겐토는

손사래를 치며

그를 정적이 가득한 공간으로

계속 내몰았다.

어쩌면 오빠 하즈키라는 갈증에

목말라했던 나오코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고 싶은 생각이

더 컸을지 모를 일이다.


겐토는 늘 그렇게 나오코를 배려했다.

어색함에 눈과 손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햇볕이 쨍, 한 날임에도 불구하고

주머니 속으로 손을 찔러 넣었다.

자동으로 나온 헛기침은

자신이 생각해도 어색하기 짝이 없다.

그 모습을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바라보기만 한 나오코가

한 마디 먼저 거든다.


“하즈키, 좀 앉지?

불안해서 못 봐주겠네.”


왼손으로 머리를 긁적이는

하즈키의 버릇은

여전히 나오코에게 친근함을 주었다.


“응, 응.”


“이곳은 내가 나이를 먹고 있음에도

늘 그대로 네.”


“그래 보여?”


“으응, 늘 그대로야.”


햇볕이 나오코의 눈에 내려앉아

눈동자가 사라지며 눈이 가늘어졌다.


“좋아 보여, 하즈키.”


긴장감까지 보였던 그들 사이는

시시하지만, 몇 마디의 대화로

어색함은 금세 누그러졌다.

그의 기다란 손가락은

이곳처럼 변하지 않았다.

이상하게 하즈키의 손가락을

보고 있으면 나오코의

몸 구석구석 통증이 밀려왔다.

나오코는 입술을 잘근, 물었다.


“언제, 도쿄로 돌아가?”


그녀의 입술이

발갛게 부어 도드라진다.


“나 이곳에 온 지 하루도 안 됐어
벌써 갈 날짜를 묻는 거야?”


“그런 뜻, 아니야.”


그녀가 웃자,

그도 입을 벌려 가볍게 웃었다.


“넌 아직도 날 놀릴 줄 아는군.”


“이 못 땐 구석이 사라지겠어?”


“너다워.”


그가 두 팔을 머리 위로 올리더니

하늘 향해 기지개를 켠다.

하즈키가 말했다.


“나쁘지 않아 보여.”


“좋아 보이진 않는다는 거지?”


하즈키의 입술이 앞으로 쭉,

나왔다가 다시 들어간다.


“뭐, 아이를 키우면서

힘든 건 당연하니까.”


“그 얘기를 하려던 거야?”


“으응?”


“아니야?”


그의 빛나는 갈색 눈이

동그랗게 원을 그린다.


“겐토를 묻는 거지?”


하즈키를 꿰뚫어 보는

나오코의 말투에 익숙해질 때도 됐지만,

오랜만에 찾아온 이 상황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다.

다시 입을 꾹, 닫은 채

그는 말을 이어 가기가 힘들다.

나오코의 길게 뻗은 긴 눈을

계속 보고 있다간

고해성사를 해 버릴 것만 같았다.

그가 천천히 일어서며

다시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더니

딴청을 부리며 말했다.


“겐토는 좋은 사람이야.”


나오코의 숨이 길어졌다.


“다 아는 사실이잖아?

나는 나쁜 사람이고.”


멀찌감치 떨어져서

나오코를 바라보니

시선 처리가 훨씬 가벼워졌다.

하즈키는 두 부부 사이의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해 보였다.


“난 너, 나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그렇겠지, 관심이 없으니까.”


“넌 정말...”




하즈키는 그녀와의 거리를 냉큼 좁히더니,

어릴 적, 늘 그랬던 것처럼

손으로 그녀의 코를 잡아당겼다.

마치, 커다란 나무 앞에서

그녀의 머리를 흩으러 놓았을 때처럼.


불쑥 나간 손이 당황스러워 멋쩍게 웃는다.

나오코는 그 순간

시간이 멈춘 것처럼

바닥으로 눈을 떨군 채,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다시 그녀와의 거리를 두며

잰걸음으로 왔다 갔다,

냉큼 정돈되지 않은 잔디 위에 벌러덩,

드러눕는다.

나오코의 목소리가

어린 소녀처럼 약간은 수줍은 듯하다.


“하즈키는 왜 떠나지 않아?”


“떠나야 해? 꼭?”


“늘 그랬잖아, 가고 싶어 했잖아.”


“글쎄, 이젠 잘 모르겠어.”


“떠나지 않은 게 아니라
못 떠나는 거, 그거 아닐까?”


나오코는 턱을 무릎 위에 얹고

두 손은 다리를 감싸며

눈을 감은 하즈키를 바라보았다.


“역시 하즈키는 대답할 수 없지?”


하즈키는 두 눈으로 하늘의 볕을

정면으로 대응하다

이기지 못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다시 고개를 들어 그녀가 있는 쪽을

응시하지만, 볕이 만든 하얀 점들이

보글보글 퍼져 나오코를 가렸다.

눈물이 조금씩 맺히는 것처럼

눈이 시리지만 눈을 감지 않았다.

굽어 있는 그녀의 기다란 다리와

긴 머리칼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 그녀의 모습은 영락없는

그때의 작은 모습의 동생 나오코이다.


“그럴지도.”


그가 다시 눈을 감고

조금씩 콧속으로 올라오는

풀 냄새를 깊게 들이마신다.

마구 자란 풀이 바람에 콧등,

입술, 귓가 눈가를 간질인다.


그녀도 하고 싶지 않은

미네코와의 동거를

그는 아주 잘 해내고 있었다.

정말이지 그가 마치 신이라도

된 것처럼 대단해 보였다.


“뭐… 하고 살아?”


“뭐든, 바쁠 수 있으면.”


내리쬐는 볕에 금세

하즈키의 얼굴은 붉게 익었다.

뜨거운 볕을 피하기도

모자란 시간에 그는 줄곧

어림없는 태양에 대적한다.

땀은 목을 타고 내려가

그대로 잔디 위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엉덩이 사이에 맺힌 땀은

벌레가 기어가는 듯 간질거렸다.


갑자기 나타난 겐토가

누워 있는 하즈키를 발로 툭툭,

건드리다 뻥, 걷어차는 시늉을 한다.

눈을 커다랗게 떴지만

역시 보이는 건 흰 점 하나.


“이 더위에 뭐 하는 짓이야?

등에 물이나 좀 뿌려.”


겐토의 윗옷은 연한 하늘 색에서

진한 바다의 색깔로

땀을 품고 변해 있다.

젖은 윗옷을 거꾸로 벗어 집어 던지더니,

길게 늘어진 호수를

하즈키에게 던졌다.

나오코는 자신의 몫인

젖은 셔츠를 집어 올리며

축축함을 견디다 못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거들었다.


“겐토, 샤워를 하는 편이 나아.”


웬일인지, 나오코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엎드린 채 하즈키를 다시 흘겨본다.

신이 난 하즈키는

호수 앞머리를 잡고 등에

물을 뿌려 주는 척 하더니,

그의 바지춤을 들어 올려

엉덩이 속으로 거센 물줄기를 고정했다.

겐토의 입에서

악, 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다.


순발력이 좋은 겐토는 벌떡 일어나

호수 앞머리를 낚아채며

벌써 한달음 달아난

하즈키에게 물을 뿌리기 시작했다.

겐토는 수도꼭지의 머리를

세게 돌리다 못해

고정된 수도꼭지를 풀었다.

덕분에 잡고 있던 호수가

이상한 모양을 만들며

바람 빠진 풍선처럼

마당 전체를 헤집고 있었다.

기어코 겐토의 입에서 욕이 나온다.


“아, 저 자식.”


하즈키의 옷이 젖는 바람에

마른 몸을 훤히 드러내며

숨을 헐떡거렸다.

두 팔을 들어 올리더니

빠르게 항복의 자세를 취한다.


“항복 항복, 헉헉 헉,

내가 잠글 게 허헉.”


“꼭지가 아예 돌아가 버렸어.”


겐토가 잔디 위에 널브러졌다.

하즈키가 수전을 쇼 다루듯,

몇 번을 만지더니

마당을 물바다로 적시고 나서야

물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하악, 후 아, 난 지쳤어.”


그들은 나오코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는지,

내내 그만하라는 목소리를 이제야 들었다.


“제발, 나 좀 봐줄래?

다 젖었잖아?”


겐토는 그제야 나오코의 모습을

확인하며 큰 소리로 웃어 댔다.


“아, 정말.”


“나오코 미안 미안,

저 자식 때문이야 헉헉.”


하즈키는 연신 헉헉대며 이죽거린다.

가까운 곳에서

쇼의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마나츠가 물 바다가 된

마당을 보곤 입이 떡, 하고 벌어졌다.


“이게 다 뭐야?”


나오코가 마나츠에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마나츠, 나는 피해자예요.”


“쯧, 안 봐도 뻔해, 남자들이란.”


마나츠는 유모차에 태운 쇼를

나오코에게 안겨주려

다 젖어 있는 나오코의 옷을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겐토와 그의 웃음소리는

떠날 줄 모르고 쭉,

집 안에 울려 퍼진다.


“마나츠, 잠깐 쇼 좀, 수건을 가져올 게요.”


“으응.”


쇼는 엄마를 보고도

마나츠에게 눈을 떼지 않고

전에 보지 못했던 가르륵 소리를 내며

겐토처럼 웃고 있다.

나오코의 기분도 한껏

들떠 있는 모양새다.


“쇼오, 우리 아들.”


마나츠가 손사래를 치며

저리 가라는 시늉을 해 보인다.


“젖잖아, 겐토 저리가.”


“에이, 너무 빡빡하긴

참 이츠키는?”


겐토가 윗옷을 꾹, 짜더니

툭툭 털어내는 시늉을 하며

축축한 옷을 다시 입었다.


“이츠키는 이츠키에.”


나오코가 바싹 마른 수건을

그들에게 건네며 축축한 옷을

다시 입은 겐토에게 눈을 흘겼다.


“그 상태로 애를

안을 생각은 하지도 마.”


“여자들은 정말이지 빡빡해.”


하즈키가 수전을 다시 틀어

흙과 잔디가 엉망이 된 곳을 쓸어 냈다.

호스를 잡은 하즈키를

모두가 긴장한 상태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하, 왜들 그렇게 보는 거야
그럴 리 없잖아?

쇼가 있는 걸 하하.”


마나츠가 유모차의 방향을 틀어

나오코를 잡아끌었다.


“가자고.”


겐토가 쇼에게 다가가

입맞춤하며 손을 흔들어 댔다.


“쇼오, 우리 아들 빠이빠이.”


동그란 눈의 쇼가

겐토를 보며 싱글싱글 웃는다.

나오코는 스스로 유모차를 끌기는커녕,

자기 일이 더 바쁘다는 듯,

빠른 걸음을 하더니

나오코의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유모차를 끌던 마나츠는

그녀의 행동에 하즈키를 뒤돌아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하즈키도 따라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그리 관심 있는 행동은 아니다.


유모차를 끄는 마나츠의 뒤통수로

들리는 겐토의 긴 한숨은

분명 땅속 깊은 곳으로

꺼져 들어갔을 것이다.

뒤를 돌아 하즈키를 바라보았다.

겐토의 헛헛한 웃음이

오랫동안 잔디 위를 날아다녔다.


아무 말 없이 한참을 잔디 위에서

각자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마치 경쟁이라도 하는 것처럼

누가 먼저 그늘을 찾을지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겐토는 꼭, 화가 난

어린아이의 얼굴을 하고는

하즈키를 바라보지도 않는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동시에 그늘을 찾아 나섰다.

하즈키가 먼저 헉헉거리는 소리를 뱉는다.


“헉헉, 얼굴, 밤 되면 화끈거릴 거야.”


하즈키의 얼굴은

붉은 듯하다가 창백하게 절어 있었다.


“멍청이, 그게 웃기냐?”


“네 얼굴 꼴을 봐, 꽤 웃겨.”


겐토는 당장 거울로 달려가

젖은 수건으로 달아오른 얼굴을

달래려 애를 썼지만,

수건의 온도도 어느새 미지근해

역할을 하기엔 부족했다.

겐토가 말했다.


“하, 정상적이지 않아.”


“뭐, 가?”


“내 주위, 모든 것,

아직 시작도 안 한 계절에
땀이 범벅이 된 것도.”


겐토가 입을 벌리며 쩝, 하는

소리를 내며 쓴 물약을 삼킨 표정을

지어 보인다.

여름을 알리는 미지근한 바람은

냉장고 속 맥주를 찾게 만든다.

이때의 맥주는 그 어떤 여자보다

더 매력적이다.

하즈키는 목구멍을 완전히 열어

꿀꺽꿀꺽 마셔 댔다.


“네가 제일 그래.”


“크하, 시원하다.”


하즈키는 빈 맥주 캔을

겐토에게 날려 보지만

날렵한 그의 순발력에

그만 잡히고 말았다.

겐토가 말했다.


“너란 자식을 곁에 둔 뒤로

쭉, 주변이 온통 그래.”


이번엔 정말 센 힘으로

하즈키의 머리 쪽으로 캔을 던져 버렸다.


“으엇, 어쭈.”


빈 캔이 아스팔트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뭐야? 왜 그래?”


겐토의 얼굴은 금방 상기되었다.

하즈키는 겐토가 내뱉는 말이

진심인 것과 동시에

앓고 있는 문제가 많다는 것을 눈치챈다.

그 이유가 확실하게

맞아떨어지는 건 아니지만,

그 이유 속에는 자신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분명했다.

겐토가 보여주는 표정과 눈빛은

함께 해 온 세월 속에서

봐 왔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말 한 그대로야.”


“너, 무슨 일이야?”





겐토가 갑자기 실실 웃었다.


“크크큿, 네가 안다고 답이 있겠냐?”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이죽거리는 겐토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진심으로 그가 걱정되었다.


“맥주, 줘?”


하즈키의 시선에

거울로 비친 겐토는 다른 곳을

응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또한 맥주를 집어 들자마자

목구멍을 열고

지친 사막의 여행자가 된 것처럼

단숨에 들이켰다.

겐토는 나오코에 대한

열렬한 감정은

미래를 보지 않고

단숨에 약속해 버렸다.

마치 그때의 감정처럼

순식간에 맥주 캔은 찌그러진 채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하즈키가 나오코 얘기를 하면

겐토는 나는 괜찮아, 라는

말을 되풀이했던 그때가 떠올랐다.

그때 하즈키는 그에게 말했었다.


“수없이 남은 세월 동안에도 넌...
나오코에 대해서 그때도 괜찮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물론 그때의 겐토는

예스라는 대답을 했고,

지금도 그는 괜찮아, 라고

말하며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괜찮아, 라는 말이

조금씩 그를 지치게 하고 있는 게

눈에 보였다.

겐토는 젖은 수건을

다시 물에 적시며

온 힘을 다해 비틀어 짰다.

하즈키가 말했다.


“사람들은 다 그래,
지금 욕심을 채워야

미래가 행복할 거라고
착각하고 살지."


겐토를 꿰뚫어 보는 하즈키의 말에

순간 가슴이 탁, 하고 막혔다.

겐토의 심장이 불에 타는 것처럼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은

하즈키 때문이 아니라 괜찮아, 라는

말을 지키고 살고 싶지만

이제 와서 버겁기만 한 자신 때문일 것이다.

겐토가 답했다.


“아는 척, 말아라.”


“알고 있었잖아 정상적이지 못한 거.”


“나오코를 말하는 게 아니야

까불지 마.”


하즈키는 손가락으로

자기 자신을 가리켰고,

겐토에게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하즈키가 말했다.


“무슨 악마 같은 소리야?
계속 또라이 같은 소리만 하네?”


겐토가 젖은 수건으로 바닥을 쓱,

닦더니 하즈키의 얼굴에 명중시킨다.


“앗, 이 사악한 놈.”


“됐다, 됐어.”


“그게 다야? 끝?”


겐토는 정말 정신 나간 사람처럼

다시 키득거린다.

하즈키가 벌떡 일어나

남은 맥주를 들이켜고

낡은 운동화를 서둘러 꺾어 신었다.

겐토가 말했다.


“미친 새끼, 너 때문에

남은 정신까지 또라이가 된 기분이야.”


하즈키는 빠른 걸음으로

겐토의 집을 나섰다.

겐토는 그의 뒤통수에 대고

계속 비아냥거렸다.


“뭐야? 가는 거야?
꼬마냐, 삐치게?”


하즈키는 계속 걷던 걸음을 멈추고

순간 불긋함이 솟아올라

숨을 몰아쉬었다.


어릴 적 타다요시의 지갑에서

돈을 훔친 적이 있었다.

그 돈은 적은 돈이 아니었고,

며칠 동안의 가출을

도와주는 역할을 톡톡히 했었다.

며칠 후, 돈이 떨어지자

배고픔과 추위와 어둠의 공포에

발은 저절로 집을 향했고,

타다요시는 모든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언으로 하즈키를 괴롭혔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타다요시는

말하지 않았을 뿐,

정작 그를 괴롭힌 건

하즈키 자신이었다.

그때 그가 느낀 죄책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무슨 짓을 해서라도

돈을 구해 보란 듯이

타다요시에게 던져 주고

그 집을 나오고 싶었다.

하지만 어린 하즈키가 그때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 그가 느끼고 있는 감정은

그때의 것과 너무 닮았다.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었고,

그 속엔 자신도 들어 있음을 짐작했지만,

하즈키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자신에게 병적으로 집착했던

나오코를 생각하면 반성, 이라는 단어가

꼭, 마치 자신의 것 같이 느껴졌다.

겐토의 의미심장한 단어를 들을 때마다

도둑이 제 발 저리는 기분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이 찝찝함은 계속 반복해서

하즈키를 옭아맬 것만 같았다.


하즈키가 만들어 놓은 문틈으로

끈적한 바람이 타고 들어와

집 안을 맴돌았다.

하즈키의 발소리가 저벅저벅 들리지만,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후우.”


나오코는 늘, 극도의

아드레날린을 미리 준비해 놓은

사람처럼 금방이라도 그것이

뿜어 나올 것처럼 흥분된 상태였다.

나오코는 그날도 그랬다.

그녀의 흥분을 가라앉히는 방법을

알고 있었던 겐토는

아직도 그날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출처,우연히


습기를 머금은 피부와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한 눈동자,

말 할 때마다 입에서 풍기는

달콤한 캐러멜 냄새,

바람에 펄럭이는 블라우스,

물이 고일 것 같은 움푹 파인 쇄 골,

그때 겐토 자신의 벌렁거리던 심장,

침을 삼키던 꿀꺽거리는 소리,

그때의 그녀를 상상하면

지금 막 사랑이 시작된 것처럼

주체할 수 없이 온몸에 전율이 시작된다.

겐토는 다시 꿀꺽꿀꺽

침을 삼키게 되곤 한다.

나오코가 만들어낸

손 등의 긁힌 상처가

끝이 없길 바라면서 완벽하게 감긴

붕대임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끌기 위해,

다시 풀어내고 또 풀어내길 몇 번.

겐토는 회상하며

피식, 거리며 웃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오코의

흥분 상태는 더욱 잦았고,

꽤 잘 달래던 겐토의 방법이

먹히지 않을 때부터 더 심해졌다.

그 둘을 포개 놓는다 해도

떨어져 나가고 마는 같은

극을 가진 자석이 되어 버렸다.

겐토는 지금도 가끔

허공을 바라보는 나오코를

바라보고 있을 때면

그녀의 늪에 빠져 버린다.

확실한 건 결혼 전부터 지금까지

나오코는 변하지 않았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겐토에 대한 감정이

변하지 않았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어차피 괜찮다고 시작한

겐토의 감정이었기 때문에

그는 그 어떤 것도

나오코에게 바랄 수가 없다.


나오코의 빗나간 관심을 받은

겐토가 했던 말들은,

그 어떤 단어 하나 틀린 게 없었다.

너무 옳은 말들이었기 때문에

가끔은 겐토가 미웠다.

빗나간 관심은 더욱 겐토를

옥죄기 시작했고 그걸 이용하려는

비열하기까지 한 자신이

한심스러울 뿐이다.


해가 겨우겨우 중천에서 머물다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찌나 그 모습이 이글거리던지,

지금 자신의 감정과도

같아 씁쓸하다.


나오코가 가끔 보여주는 행동 중에

겐토가 위로를 받는 행동이 있다.

요즘 들어 나오코의 외출이

잦아진 새벽에

귀가 할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취기가

나오코를 그렇게 만들었는지, 는

확실치 않지만 잠에 빠진 겐토의 뺨을

오랫동안 쓰다듬다가

혼잣말로 잠든 그와 대화하곤 했다.


물론 나오코가 들어오지 않은 밤,

잠을 잘 수 없던 겐토는

그녀를 기다리다 인기척에 드러누워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를

느끼며 지켜보았다.

허탈함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그녀의 애정 담긴 행동은

다시 또 그를 위로했다.


겐토는 여전히 검은 생머리를 하고

퉁퉁 부은 얼굴을 하고

불만을 토로하는

교복 입은 그녀를 사랑한다.

이 게임에서 승자는

빗나간 그녀의 관심을 받는

그, 겐토이어야만 한다.

그래야 버틸 수가 있었다.


“사랑한다, 안 한다 사랑한다, 안 한다
사랑한다, 안 할 거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난, 괜찮다.”


이글거리며 내려오던 태양의 모습이

구름 속으로 숨어 버렸다.

사라져 버린 하즈키의 발소리가

다시 저벅저벅 소리를 내며 가까워졌다.

역시 하즈키는 꼬마가 아닌가 보다.


하즈키의 손에 봉투가 들려 있었고,

무게가 꽤 나갔는지 밑으로 축 처져

땅에 닿을 듯, 말듯 한 모습이다.

하즈키라는 것을 짐작했지만

눈을 뜨지 않고

입가는 티 나지 않게

위로 위로 올라간다.

역시나 누워 있는 겐토의 발을

툭툭, 건드리며 눈을 뗄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해 지기 전에 들어가야

미네코가 서운하지 않을 거야.”


한 쪽 눈을 떠 보이며

툭툭 치던 하즈키의 발을 뻥 차버린다.


“그 말은, 해 지기 전까지

이걸 다 마시자는 거지?”


겐토가 재빨리 땅에 닿은

봉투를 뒤적였다.


“꼬마, 안주는?”


“사악한 새끼.”


따로 챙긴 땅콩을

주머니에서 꺼내어 겐토에게 던져 주었다.


“큭.”


겐토가 일어서서 허리를 굽실거리며

잔을 주며 맥주를 따라 낸다.


“내 것도.”


“아 예예 그러지요.”


그들은 동시에 큭큭거리며 웃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볕에

익었던 얼굴이 화상을 입은 것처럼

발개지기 시작했다.

마치 화상 치료가 필요할 것처럼 시뻘겋다.

어느새 빈 병 사이에

홀로 남은 맥주병이 쓸쓸히 남았다.

하즈키는 마지막 남은 땅콩을

오도독 씹으며 말했다.


“떠날 거야, 신칸센을 타고 말이야.”


겐토가 자기의 일인 양,

눈을 둥그렇게 뜨고 하즈키를 바라보았다.


“뭐야? 결정? 그럼 도쿄?”


땅콩을 씹으며 별일 아니라는 듯,

눈만 깜박이는 하즈키의 어깨를

툭, 치며 짧게 박수 쳤다.


“여기서 술을 축낼 것이 아니었네,

미네코는 알고 있어?”


하즈키가 고개를 저었다.


“계획은 세운 거야?”


겐토는 갑자기 없던 관심이

증폭하기 시작했다.


“벌써 나왔어야 했어, 계획은 뭐.”


“뭐, 하긴.”


“맨션이나 알아봐 줘.”


“그거야 어렵지 않지.”


“난, 짐도 없고,

세간살이도 필요 없어

좋은 집은 더더욱 필요 없지.”


겐토가 그의 눈을 흘기며 피식거린다.


“쳇, 나오코가 잘도 그렇게 하겠다.”


나오코라는 소리에

하즈키는 급격히 피곤함을 느끼며

인상을 찌푸렸다.

겐토가 말했다.


“미네코가 서운할 거야.”


하즈키의 표정은

나오코를 말할 때의 얼굴과

같은 표정으로 머물렀다.

겐토에게 답을 주고 싶지만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곤 숨만 길게 내쉰다.


“잘 됐다.”


“그런가?”


“그건 무슨 소리?

아주 오래 전부터 생각했으면서.”


“훗.”


“이거, 마나츠까지 도쿄에 오겠군,

기대할 게 꼬마 흣.”


하나 남은 맥주 뚜껑을 따자마자

벌이 날아들었다.


“자, 축하해 또라이.”


“고맙다, 고 말해?”


“다시 말할 게, 축하한다.”


“고맙다.”


“알아 둬, 도쿄 생활은 아주 빡빡해,

그래야 먹고 사니까.”


하즈키가 말했다.


“네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오니까

안 어울린다.”


겐토는 모두가 부러워하는

좋은 직장을 다니고 있었고,

휴일도 남들처럼 둘쑥날쑥하지

않았기 때문에 안정적인 육아도

가능했을 것이다.


“물론, 이렇게 되기까지 그랬다는 거야,
지금 네가 생활하는 것처럼 했다가
손가락 빨기도 힘들 거란 얘기야.”


하즈키가 큰 숨을 내쉬며 말했다.


“부딪혀야지.”


“이 자식, 전투적인 모습 오랜만인데?”


하즈키는 겐토의 속을

마저 달래 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지 못한 얘기로 다시 돌아가

마저 말할 생각이다.


“겐토, 쇼가 좀 더 자라면

네 상황도 더 좋아질 거야.”


“자식, 엉뚱한 말은.”


남은 맥주병도 더 이상

찰랑이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하즈키가 말했다.


“항상 말은 간단해,
그것처럼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이렇게 간단하게, 말이야.”


겐토가 일어나 다듬어 놓은

나무판을 다시 매만지며

좀 더 큰 소리로 말했다.


“이 정도면 비가 마구

쏟아져도 거뜬하겠지?”


하즈키가 엄지를 치켜세우며

고개까지 끄덕였다.

지문 자국을 뿌옇게 찍어 둔

유리잔을 대충 물에 헹구고

선반 위에 올려놓았다.

한눈에 보아도 제대로 씻기지 않은

모양이 꽤 더러워 보였다.

어디선가 바람을 타고

먼지에 비가 떨어지기 시작할 때의

흙의 비린내가 흘러 들어왔다.


겐토의 고개는 자연스럽게 밖을 내다본다.

역시나 나무 지붕에서 타닥타닥, 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그 소리는 그들의 감성을 삐죽이 드러냈다.

윙윙거리며 달큰한 냄새를 찾아

맥주병을 헤매던 벌도

비 때문에 몸을 피했는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잔잔히 타닥거리던 소리는

후드득, 하는 소리를 내며

그들을 공포로 휘감을 정도로

무섭게 쏟아져 내린다.

겐토가 허탈하게 웃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군.”


겐토가 바쁘게 집 안을 돌아다니며

구석구석을 뒤지더니

커다란 우산 하나를 찾아 활짝 펴 보았다.

그 순간 하즈키가 미친 듯 웃기 시작했다.

우산의 뼈대가 모두 정상이 아닌

뒤집어진 상태이다.

게다가 찢긴 건지 삭아 버렸는지

크기만 거대하다.

겐토가 중얼거렸다.


“젠장, 미치겠군.”


하즈키가 우산을 받아

돌돌 말아 움켜쥔다.


“정말이지 오늘은 완벽한 날이야, 하하.”


그가 겐토를 바라보며

턱을 앞으로 내밀더니

앞을 가리키며 먼저 굵은 비를 맞는다.


“아, 하즈키 정말 넌 정상적이지 않아.”


자신만이 오직 정상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겐토는

하즈키의 뒤를 따라 걸었다.

빗방울인지 얼음덩어리인지

분간할 수 없는 묵직한 것들이

정수리를 내리치고 있었다.


“으악, 이건 정말 미친 짓이야.”


“얼른 뛰어, 머리에 구멍 나기 전에.”


고개를 돌려 겐토를 바라보고

웃고 있는 하즈키의 얼굴은

쇼의 얼굴과 거의 흡사했다.

겐토는 쇼의 오뚝한 콧날과

자신의 콧날을 상상하며

다시 괜찮다고 중얼거렸다.


'사랑한다, 안 한다 사랑한다, 안 한다
용서한… 다, 안 한다 난, 괜찮…다.'


끈적한 더위에 지친 나오코는

쇼의 칭얼거림에 한계에 이르렀다.

자신도 모르게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아아아아악.”


쇼는 놀라기는커녕, 보란 듯

고개를 뒤로 젖히며

자지러질 듯이 울어 댄다.

나오코는 아예 드러누운 쇼를

넋 놓고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비명에 놀란 미네코가

방문을 덜컹 소리가 날 정도로

급하게 열었지만

나오코는 인기척에 놀란 모습도

찾을 수가 없다.


미네코가 얼굴이 새빨개져

콧물이 범벅이 된 쇼를

끌어안아 달래며

나오코에게 나가라며 손짓한다.

하지만, 나오코는 한참을 그렇게

허공을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여간해서 쇼의 울음소리는

잦아들지 않았고

거의 발작처럼 온몸을 버둥거렸다.

신기했던 건 미네코는

단 한 번도 당황한 기색 없이

쇼를 어르고 달랬다는 것이다.

정말이지 아이를 안고 있는

미네코의 모습은 수십 번을 보아도

어색하기 짝이 없었지만

역시 미네코도 엄마였다는 사실에

약간의 믿음이 가기 시작했다.


나오코는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쇼를 어르는 그녀를

계속 지켜보았다.

나오코가 저만 했을 때

그때 그녀도 자신을 저렇게

어르고 달랬을까, 라는 생각에

잠시 커다란 돌덩이가

심장에 내려앉은 통증이 밀려왔다.


“후우.”


쇼는 어느새 착한 아이가 되어

미네코의 품에서 잠이 들었다.

채 닦아주지 못한 눈물과 콧물이

끈적하게 쇼의 목덜미에

흥건히 고여 있었다.

미네코는 자연스럽게

한 쪽 손으로 쇼를 받치고

몸을 뒤로 젖히더니

한쪽 손으로는 목덜미를 닦아내는 중이다.

나오코는 선풍기 머리 방향을 틀어

미네코 쪽으로 돌려준다.

미네코는 너무 강한 바람이라며

손을 내저었다.


“좀 더 줄여.”


나오코는 허리를 굽히지 않고

발로 꾹, 하고 버튼을 눌렀다.

습기에 붙은 어깨 위 머리칼을

훔치더니 쭉, 잡아당긴 후

비틀어 올렸다.

마치 다시는 쇼를 보지 않을 것처럼.


방을 나와 복도 끝 계단이

시작되는 부분에 멈춰 서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수많은 날을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열흘을 앉아 기다리면

꼭, 한 번은 하즈키의 낯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인사는 단 몇 마디에 불과했으나

입가에 흐르는 미소 하나에

그날 밤 나오코는

온전한 잠에 빠질 수 있었다.


성인이 되고 난 후부터,

맞지 않은 옷을 꾸역꾸역 넣어

입은 것처럼 자신의 방 외에는

서성거리는 것조차 불편했다.

그 감정은 아직 사라지지

않은 게 분명하다.

한참을 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눈동자만 계속 배회하는 중이다.


어색하기 짝이 없는 장면을 목격했다.

하즈키의 방문이 반 틈이나 열려 있다.

당연히 그는 겐토와 함께

쓸데없는 말을 듣느라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그제야, 눈이 아닌 발을

조금씩 떼기 시작했다.

방문을 조금씩 열었더니,

삐이익, 하는 소리로 인기척을 한다.


이해할 수가 없다.

늘 하즈키의 사생활은

꽉, 잠겨 있었고 운이 좋아야

들어올 수 있었고,

죽치고 앉아 있을 수도 없는 공간이었다.

하즈키는 그렇게 조금씩

변해 가고 있었던 모양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가 미네코를 대하는 행동은

조금의 적대감도 없어 보였다.


앞에 커다란 벽이 놓여 진 것처럼

굴었던 하즈키가 변했다.

나쁘지 않은 일은 분명하나,

왠지 모르게 기분은 좋지 않다.

갑자기 들이닥친 비로

다다미가 축축했다.

하즈키의 방은 달라진 게 없다.

늘 꼭 같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해바라기 엄마, 타다요시,

듬성듬성 꽂힌 책까지,

만져 보지 않아도 눅눅해 보이는 이불,

그가 잠들었던 모습 그대로다.

하나 달라진 게 있다면

깨끗했던 벽지들이 군데군데

누런 색깔을 하고 있었고,

낡은 다다미도 실이 뜯어져 나풀거렸다.


또한 낯선 그녀

마네키 네코가 물기를 머금고

바람에 손짓하고 있다.

비는 나무와 만나

나오코의 코가 킁킁대고

냄새를 들이마시도록 했다.

나오코를 짓눌렀던 돌덩이들이

빠져나간 기분에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흔적 없이 날아가도

후회하지 않을 것 같았다.


“흠으흠, 하…”




축축한 다다미 위에

그대로 드러누워 눈을 감았다.

바람에 커튼이 펄럭거리는 소리,

낯선 마네키 네코의 손짓이 댕,

가끔 들리는 차르륵, 하는

책 넘기는 소리,

딱딱거리며 나무가 비틀어지는 소리,

그리곤 다시 커튼이 펄럭거린다.




한낮에 들이켠 술로

피곤함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거들어 준 태양 덕분에

얼굴까지 벌겋게 익어

달콤하고 시원한 커피를 찾게 만든다.

하즈키는 커다란 유리잔에

커피를 들이붓고

물과 얼음을 잔뜩 넣어

딸랑딸랑 소리를 내며 계단을 올라갔다.


“캬아, 시원해.”


자신이 탄 커피가 제법 맘에 드는 모양이다.

하즈키의 방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그 속에 곤히 잠들어 있는 나오코가 보였다.

그녀는 몸을 쭈그러뜨린 채,

잠들어 있었다.

보지 않으려 해도 눈에 들어온

나오코의 풍만한 가슴살에

마저 남은 커피를 없애 버리기에 충분했다.


당황스러움에 잠시 뒷걸음질 치며

겐토 얼굴이 떠올라 꽤,

웃긴 상황이라 생각했다.

하즈키는 재빨리 홑겹 이불을

그녀의 어깨까지 덮어 버렸다.

어쩌면 나오코를 위한 마음보다

눈에 보이는 것을 가려 버리고 싶은

마음이 더 컸을 것이다.

예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나오코가 과연 잠이 들었을까? 란

의심은 역시 적중했다.


나오코가 눈을 살며시 뜨고

하즈키를 바라보았다.

도망치기엔 이미 늦어 버린 것이 확실하다.

고맙게도 나오코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잠깐, 잠이 들었네, 미안.”


웬만한 일에 미안하단 말을

잘 하지 못하는 그녀의 입에서

미안하단 말이 흘러나왔다.


“미안하긴.”


나오코는 이어 묻지 않은 말을

줄줄이 이었다.


“미네코가 쇼를 보는 중이야.”


나오코의 손가락이

자신의 방을 가리키는 듯하다.


“알고 있다시피,

쇼는 나라면 더 우는 아이라…”


하즈키는 순간 나오코를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음, 나오코 좀 더 쉬어 난 옷만 챙기려고...”


“아니야.”


“창문을 닫고 가는 걸 깜박했네 비, 가…”


“으, 응.”


조금씩 잦아들고 있는 비지만,

하즈키는 창문을 걸어 잠그며

젖은 마네키 네코를

소중하게 닦아낸다.

자신의 움직임에 따라

나오코의 시선이 등에 꽂히고

있는 것 같아 목덜미가 따끔따끔해졌다.


“겐토는 이츠키에 갔다가 금방 올 거야.


“그래?”


“응, 옷이나 갈아입어야겠다,

겐토도 옷이 필요할 거야.”


나오코의 고개가 끄덕거리지만,

몸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나오코, 내 옷을 줄 테니 겐토를 챙겨 줘.”


하즈키는 서랍을 열어

대충 맨 위에 있는 옷을

그녀에게 내어준다.

그리고 예전처럼 왼손으로 문을 가리켰다.

그 메시지는 쉬지 않을 거면

빨리, 나가 줘, 라는 의미일 것이다.

옷을 받아 들었음에도 나오코는

꼼작하지 않고 그의 두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는 동안 눈꺼풀은

단 한 번도 깜박거리지 않았다.


“나오코?”


겐토의 말 대로 나오코의 모습은

정상적이지가 못했다.

더욱 정확히 말하자면

더 심해졌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그녀를 다시 한번 채근했다.


“나오코?”


그제야 눈을 뗀 채

천천히 걸어 나가며 중얼거렸다.

그녀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끝을

올리지 않고 바닥으로 흐르게 했다.

나오코의 등 뒤로

타다요시가 튼튼하게 만든 문의

잠금장치 소리가 찰칵, 하고 들린다.

하즈키가 내어준 옷에서

한여름에 내리쬐는 볕, 냄새가 났다.


성인이 되고 나서부터

단 것을 입에 거의 댄 적이 없었다.

하즈키가 올려놓은

캐러멜의 포장지가 붙어

냄새가 새어 날 틈도 없을 것 같았지만

달큼함이 입안에 퍼지는 것만 같았다.

마치 잘 훈련된 돌고래를

달래기 위한 생선 처럼 말이다.

녹아내릴 듯한 포장지를 뜯기 시작했다.


노란 알맹이는

포장지에 늘러 붙어

나오코의 입속으로 들어간 건

새끼손톱 만 한 크기다.

붙어 버린 포장지를 한참 지켜보더니

그것마저 입속으로

던져 넣어 오물거렸다.

채워지지 않은 욕심은 씹어도,

씹어도 모자랄 판이다.


다시 비의 속도가 빨라졌고

나무 위에서 투닥투닥

소리를 내고 바쁘게 조르륵, 하고

시멘트 바닥의 낮은 곳으로 흘러갔다.

나오코의 눈 밑에는

방금 흐른 눈물방울 하나가

점처럼 오랫동안 머물다 사라졌다.


가족의 인연이 끝난 지,

시간이 꽤 흘렀지만

미네코에게 마나츠는

여전히 가족보다 더 친근한 사람이다.

여전히 그녀는 미네코의 며느리 같았고,

하즈키의 아내 같았다.

마나츠는 미네코를 대신해

따뜻한 차를 만든다.

타다요시가 좋아했던

다기 세트는 아직도 새것처럼 반짝였다.

갑자기 천장을 뚫을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껏 들어보지 못했던

미네코의 거친 목소리다.


“뭣? 갑자기?

겐토, 쟤가 뭐라고 하는 거지?”


미네코는 남아 있던 여성 호르몬마저

잃어버렸는지 굵고 쉰 듯한 목소리로

그들을 당황하게 만드는 중이다.

사실 하즈키는 도쿄로 간다는 말에

미네코가 이렇게 놀랄 줄,

상상해 보지 못한 구석이다.

말이 끝나자마자 그럴 줄 알았지, 라는

말이면 모든 게 마무리될 줄 알았다.

정말이지 이 반응은 의외였다.

여성스러움의 절대적인 미를 갖추고 살았던

미네코의 모습은 사라진 지 오래다.

마나츠는 따르던 주전자를

놓칠 뻔하다 중얼거린다.


“이런 젠장.”


겐토가 놀라는 미네코에게 다가가

어깨를 감싸 쥐며 말했다.


“어머니, 하즈키가 설명할 거예요.”


“간다는데, 이게 무슨

설명이 필요한 얘기야?
통보하는 거겠지.”


하즈키가 마나츠를 곁눈질하며 말한다.


“오래전부터 계획했던 일이에요.”


출처,아수라처럼



“그걸 내가 몰랐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오랜 시간 동안 가지 않을 것처럼

굴더니 이제 와서?”


하즈키는 미네코가 말하는 뜻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나츠가 구수한 냄새를 풍기며 앉는다.


“자, 드세요.”


상 위에 나란히 찻잔을 놓으며

하즈키에게 눈치를 주지만

그는 인상을 찌푸릴 뿐이다.


“왜 지금이야?
나는 늙고 이젠 병도 들겠지.”


이제야 미네코의 말을 이해했다는 듯,

하즈키는 한숨을 몰아쉬며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미네코는 마나츠가 따라 낸 차를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타다요시가 죽고 난 뒤

아직 젊음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

미네코에겐 하즈키가

걸림돌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조금은 불편함에

이기적인 생각도 했던 그녀다.


타다요시가 없는 집에

그의 아들과 한집에

오롯이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하지만 자주 미네코의 집을 들러

챙겨 준 마나츠 덕에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살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그의 아들을 위해

밥을 짓고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하기 시작했다.

그의 아들이 미네코의 아들인 것처럼

아주 당연한 일이 되어 버린 지금이다.

마치 미네코 피부의 한 부분인 것처럼,

그 일은 그랬다.

내내 침묵을 지키고 있었던 나오코가

차를 입에 갖다 대며

옅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예전에 하고 싶었던 것처럼

엄마가 쫓아냈다고 생각해,
그럼 맘은 편하겠지.”


겐토가 눈을 붉히며 다그쳤다.


“나오코.”


나오코가 내 지른 말의 속뜻은

미네코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편하게 해주려던 것이었지만

역시 빗나간 상상이다.

나오코의 말이 끝난 순간

한참 동안 정적이 흘렀고,

그 누구도 입을 벌려 반박하지 않았다.

마나츠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끼어들었다.


“뭐, 하즈키 나이를 봐요,
자식이 함께 늙어 가고

곁에 있으면 정말 곤혹이지.”


마나츠를 바라보는 나오코는

입만 거짓말이라고 벙긋거렸다.

겐토가 미네코의 어깨를

다시 감싸며 토닥거렸다.


“날짜가 결정되면 말이나 해줘.”


“그럴게요.”


미네코는 거무튀튀하게

얼굴 색이 바뀌더니

천천히 일어서며 자신을 부축하려던

겐토를 밀어낸다.

마나츠가 겐토에게 손짓하며

미네코의 뒤를 따라나섰다.


“난 그만 들어가 쉬어야겠어.”


“네 어머니, 쉬세요.”


마나츠는 문을 닫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습한 기온이 바닥에 가라앉아

걸음을 옮길 때마다 쩍쩍,

붙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미네코는 힘없이 벽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한

깊게 파인 주름 사이에

검은 반점들이 눈에 들어왔다.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생겨났다.

무슨 일인가 싶어 다시 한번

확인해 보지만 검버섯이 확실하다.


“마나츠 그만 나가 봐.”


“다시 차를 내올게요.”


미네코는 고개를 천천히 도리질한다.


“그럴 필요 없어.”


“필요한 거 있으시면 말해요.”


“마나츠, 넌 더 이상

내 며느리도 그 아이의

아내도 아니야.”


“무슨 뜻인지 잘 알아요,

미네코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뿐.”


“후우…”


여름을 준비하기 전,

밤바람은 아직 차다.

마나츠가 카디건을 꺼내

미네코의 어깨 위에 얹어 놓았다.


“쉬어요.”


“고마워.”


“별 얘길 요.”


미네코가 주글거리는

담배의 포장지 안을 헤맸다.

겨우 찾은 남은 담배를

입에 갖다 댔다.

담배의 표면 또한

쭈글쭈글해 불이

붙을지가 의문이다.

마치 미네코의 이마처럼

그렇게 주글거렸다.

미네코는 담배를 입에 물고 중얼거렸다.


“나가 봐, 혼자 있고 싶어.”


마나츠는 고개를 끄덕이며

재떨이를 그녀 앞에 끌어 놓아주었다.

마나츠가 뒤를 돌자마자

열어 놓은 창문을 향해

담배 연기를 뿜었다.

그 모습을 고집 센 동네 아저씨가

본다면 아마 또 한바탕

싸움이 날 게 뻔했지만

마나츠는 그녀를 말리고 싶지는 않다.


바람에 날리는 담배 연기가

금방 사라진다.

마치 자신이 갖고 있던

아름다움과 젊음처럼,

그리고 그들처럼.




숨을 쉬지 못할 때까지

담배 연기를 들이마신 후 숨을 멈췄다.

그리고 연기를 삼켜 본다.

마치 자신에게 벌이라도

내리는 것처럼 보였다.

눈 안에 눈물이 맺혀

떨어지고 나니

그때야 연기를 토해 내며 흩날렸다.

그들이 흩어지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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