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할아버지의 꽃 계절
망각
깊은 밤, 깊은 잠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이불속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한다.
홑겹 이불은 어느새 무거운
철 덩이로 변해 있었고,
분명 자신의 팔과 다리를
힘껏 움직이며 공포에서 빠져나오려
애를 쓰고 있었다.
모기 날개 짓 만한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철 덩이에 짓눌려
몸이 납작한 모양을 하더니
땅으로 점점 스며들고 있었다.
곧 죽으리라는 예감과
도움을 청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코하네는
자신을 포기한다.
귓속으로 살을 뚫고 들어올 것 같은
쇳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고통스러워질수록 온몸에 힘을 뺀 채
시간을 기다렸다.
말발굽처럼 다그닥거리는 심장은
이미 터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끝내 숨을 쉴 수가 없었고
입을 벌리고 콧구멍을 벌렁거려 보아도
소용이 없다.
감고 있는 눈동자 속으로
거뭇한 얼굴에 보랏빛 얼룩이
선명한 여자아이의 모습이 돌아다녔다.
누런 저고리에도 같은 색의
얼룩이 선명했고 흰 고무신의 밑창은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구멍 사이로 삐죽 나온
그녀의 발가락이 꿈틀거린다.
여자아이는 코하네의 눈 속에서
고개를 흔들며 입을 벙긋거렸다.
“지 켜 줄 게.”
쇳소리는 점점 더 귀를 파고들었다.
“따릉 따릉 따르릉, 따르르르릉.”
결국 숨이 터져 나왔다.
코하네는 미동도 하지 않고
천장만 바라보았다.
눈이 깜박이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트으어어하아, 하악 하악.”
죽을 뻔한 영상에도 그녀는 침착하다.
눈 속에서 보랏빛 액체가 흘러
귓속으로 들어갔다.
몸을 추켜세워
등에 땀으로 딱 붙어
떨어지지 않은 흰 원피스를 떼어 낸다.
귀로 흘러 들어간 액체가
가슴을 타고 배꼽 밑으로 흐트러졌다.
“2, 4, 6, 8, 10, 12… 80.”
축축한 옷을 벗어던지며
바닥을 네발로 기어가고 있다.
어쨌든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시간에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다.
세면대를 한 손으로 지지하며
물을 틀었다.
빠르게 가득 고인 물속으로
얼굴을 풍덩.
스스로 멈춘 전화벨 소리가 다시 울렸다.
이번엔 꽤 화가 났다고 말하는 것 같다.
목구멍을 벌려 물을 들이켜고 나니
뿌옇던 눈앞이 또렷하게 보였다.
“따르르르르르릉, 따릉 따릉.”
그녀는 다시 한번 숨을 몰아쉬고
또 내쉬며 수화기를 들었다.
“네.”
카펫 위로 채 닦지 않은
꿈속의 보랏빛 액체가 뚝뚝 떨어진다.
“코하네?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 안부를 재촉하는
그녀는 나오코다.
“코하네? 괜찮아?”
코하네는 그녀가 마치
앞에 있는 것처럼 그녀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나오코의 한숨 소리가 길다.
“하아아아, 놀랐다.”
“미안.”
바닥에 벗어 놓은
흰 원피스를 들더니
젖은 얼굴에 대고 쓱쓱 문질렀다.
“전화, 네 번이나 했어.”
“미안.”
“별일 없어서 다행이야,
혼자 사는 사람은
연락을 잘 받아야 해, 코하네.”
나오코는 또, 엄마처럼, 마호처럼 굴었다.
“응.”
“그 동네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 때문에 하루 종일 아주 난리야.”
“으응?”
“모른다는 거네,
흠 지금은 해가 지고 있다고.”
“여긴 아직 캄캄해.”
코하네는 검은 커튼을
한 번에 힘껏 밀어냈다.
어김없이 5시를 가리키는 종소리가 울렸다.
늘어진 석양이 2센티미터
정도 창문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알만 해.”
“고마워 나오코.”
“으응?”
“덕분에 정신 차렸어,
근데 무슨 일이야?”
“응, 안부 겸, 부탁 겸.”
코하네의 눈썹이
이마 위로 펄쩍 뛰어 올라간다.
“응, 말해.”
코하네는 수화기를
어깨와 턱 사이로 끼워 넣더니,
길게 늘어진 전화 선을 밟았다.
바스락거리는 옷이 필요했다.
구김이 사방으로 난
흰 티셔츠는 보기만 해도
부서질 듯하다.
한 손으로 몸을 구겨 넣는 모양이
아주 쉬워 보이는 게
한두 번 해보는 솜씨가 아니다.
커다란 티셔츠는 마른 몸을
빠르게 감싸 안는다.
“네가 있는 맨션이 필요해 꼭 그곳이 아니어도 돼.”
“으응?”
“내가 있는 곳은 너무 가까워서.”
나오코는 코하네가 이해하기
힘든 말을 계속 이어갔다.
“나오코? 잠깐 혹시 혼자 살 집이 필요…한.”
나오코가 말을 뚝, 자르더니 웃었다.
“큭, 아니 아니야.”
수화기 너머로 코하네의
긴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하즈키, 그러니까 음…
오빠가 살 집이 필요해.”
그녀에게 오빠란, 단어는
아직도 입에 올리기가 버겁다.
“아…”
나오코는 무엇인지 모르게
굉장히 들떠 있었고 급해 보였다.
“아무튼 부탁해,
자세한 건 만나서.”
“어려운 일도 아닌걸.”
“코하네, 너 괜찮은 거지?”
“어어, 괜찮아 나오코.”
“그래, 그럼 연락 기다릴게 안녕.”
“안녕.”
흘러내린 물과 땀이 말라
피부가 따끔거렸다.
손바닥의 끈적함은
수화기에 선명한 자국을 남겼다.
건너편 맨션에서 여자가
툭툭거리며 옷을 털더니
집게를 이용해 옷을 널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속옷을
아무렇지 않게 모두가 잘 보이는
방향으로 널고 있었다.
코하네는 어릴 적을 제외하고
이곳에서 이런 광경을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당황스러운 모습은
오히려 코하네에게만 보였다.
도시에 모든 이들이
자신의 삶을 드러내지 않고
살기를 원했고 드러낸다고 해도
주위 사람들은 속으로는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이 다 반사다.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당당한 그녀의 모습에
굉장한 호기심을 느꼈다.
코하네는 널어놓은 빨래 사이로
보이는 여자의 모습을
놓치지 않고 계속 바라보더니,
눈이 동그래지며 입이 어, 하는
작은 소리를 낸다.
속옷만 걸치고 있는
여자의 모습은 아주 당당했다.
그 모습이 부럽기라도 한 사람처럼
열어 놓지 않던 창문을 열었다.
창문에서 삐이이익, 하는 소리가 들렸고,
소리를 찾아 눈을 돌린
당당한 여자는 코하네와 눈이 마주쳤다.
여자는 먼저 고개를 숙이며
아는 척하더니 입가엔
미소까지 번지고 있었다.
코하네는 덩달아 고개를 숙이긴 했지만
역시 수줍은 몸짓은
상대방이 알아차리기엔 역부족인 듯하다.
코하네의 어깨 길이도 채 되지 않은
창문 사이로 바람이 살랑거린다.
흰 커튼은 겨우 들어온 햇살을
가리며 잘도 넘실거린다.
여자의 널찍한 베란다와
창문이 내심 부러웠다.
여자의 뒤편으로
꼬물거리는 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낯선 사람의 인기척에
겁이 났던 모양이지만
아이의 호기심은
코하네를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짧은 커트 머리 모양을 한
아이의 성별은 나이보다 더
가늠하기가 힘들다.
여자의 허벅지를 꼭 붙들고 있는
손을 보니 심장이 두근거리고
이유 없이 조여왔다.
여자는 아이를 들어 올려
볼에 입을 맞추더니,
넓은 창문 속으로 천천히 사라진다.
넓은 창문 속의 여자는
곧 있을 저녁 식사를 위해서
온갖 재료를 꺼내 놓고
음식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칼의 날카로운 부분이
도마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코하네는 드디어 샤워기 밑으로
몸을 맡기며 끈적거리는
목덜미를 매만졌다.
악몽 속 작은 아이가
다시 나타나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물에 젖어 무거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어 보지만
목덜미에 딱 붙은 머리칼이 꿈쩍, 도 않는다.
순간, 나오코가 말한
하즈키란 이름이 떠올랐다.
“하즈키? 히다 나오코, 히다 하즈키?”
왠지 낯설지 않은 이름이다.
“예쁜 이름.”
그때 악몽 속 작은 코하네는
거짓말처럼 코하네의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하, 즈, 키.”
코하네의 4월은
흩날리는 꽃에서 풍기는
후미코의 향기로
행복한 기억이 가득했던 때다.
꽃이 만개한 시절의 후미코는
엄마의 모습을 굉장히 오랫동안
붙들고 있던 시기이기도 했다.
4월은 늘 그렇게 행복한 추억 덩어리이다.
할머니 츠키노가 죽은 후, 로
후미코의 4월도
전쟁만 가득한 때가 되고 만다.
세 살배기 아이의 기억이
남아있으리라고 생각한다면
설마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코하네의 그 기억은
4월에 피는 파란 물망초처럼 선명하고 짙었다.
4월은(April) 그녀만의 독특한 Apple이다.
문자에 호기심이 발동하기 시작할 때의 꼬마,
코하네는 신페이가 들고 온
영어로 표기된 달력에
눈을 떼지 못했다.
둥글게 꼬부라진 모양의 글씨는
히라가나보다 더 쉽게
따라 그릴 수가 있었다.
April이란 글자는
꼬마 아이의 눈에 아주 예쁜 그림이었다.
“엄마, 봐요 활짝 웃고 있어요.”
코하네는 문자를 보며
사람의 얼굴에 쓰는 표현을 자주 했다.
문자에 호기심이 많던 그녀가
April을 보고 물었다.
당연히 문자를 알 수 없는 후미코는
딸을 위해 신페이에게 들은
짧은 지식을 습득하려 노력했다.
발음이 잘되지 않던 때의
세 살배기 꼬마와 후미코의
엉뚱한 발음의 입 모양은
집 안에 웃음을 자아내곤 했다.
“애플.”
후미코는 꼭, 하루에 한 번
행복했던 기억을 끄집어 내려했다.
빠르게 자라는 코하네를 보며
단 하루도 빠짐없이
애플 이야기를 빼먹지 않았다.
달력을 들고 내내 혀가 꼬부라지는
이상한 소리를 냈던 꼬마를
잊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사라질 수 없는 고통의 기억 속에서
싸워 이기려 했던
후미코의 머릿속을 생각하면
지금도 숨이 멎을 것만 같다.
후미코가 갖고 있던 고통이
훅, 들이닥치는 기분은
여전히 쉴 새 없이
코하네를 놀라게 했다.
천장에서 내리쬐는
노란 불빛이 바다처럼
소용돌이치는 것처럼 보였다.
월요일의 문두스는
음악 소리마저 고요하다.
마호가 조용히 코하네를 불렀지만
역시 대답은 없다.
혹시나 그녀가 놀라지 않을까,
다가서기보다 탁자를 두어 번 두드려 본다.
“똑, 똑.”
그제야 고개를 돌려
마호를 바라보더니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가씨, 퇴근해야지.”
“으응? 벌써?”
“월요일이야.”
작은 달력 속,
4월의 글자를 더욱 자세히 들여 보았다.
“응.”
“여긴 내가 마무리할 게,
옷 갈아입고 내려와.”
그녀는 작은 머리를 끄덕이며
다시 미소 지었다.
마호는 다시 한번
코하네의 안전을 확인하려 들었다.
“천천히 해, 계단도.”
코하네의 작은 머리가 돌아서며
오른쪽으로 갸우뚱,
입은 삐죽,
눈은 다시 미소를 짓는다.
“알았어요, 엄마.”
코하네는 보란 듯 계단을 타닥타닥,
하는 소리가 나도록 서둘러 올라섰다.
뒤이어 갸르륵하는 웃음소리는
마호의 귀를 간질였다.
그는 그녀가 뚫어져라 바라보던
달력을 들어 올리더니
구석구석 염탐하는 중이다.
검은 글씨와 붉은 글씨가
반듯하게 정리되어 있을 뿐,
특별한 구석은 아무것도 없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달력의 모든 부분을 훑어보았지만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
“비밀 덩어리, 코하네.”
밖을 나서자마자
건물 사이로 들이닥치는 바람이
서 있기 힘들 정도로 몸을 후려쳤다.
차갑기까지 한 공기는
그들의 얼굴을 찡그리게 했다.
마호는 코하네의 어깨를
티 나지 않게 붙들고 있었고
그의 손을 본 리리카는
날리는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리리카가 말했다.
“당연히 나 먼저 가야겠지?”
코하네는 눈치 없는 대답을 했다.
“으응? 왜?”
마호가 끼어들어
리리카를 얼른 보낼 작정이다.
“오늘도 수고했어, 휴일 잘 보내.”
리리카는 갈까 말까를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포기하며 발을 돌린다.
“응, 휴일 잘 보내.”
눈치 없이 밝게 웃는 코하네의 목소리가
리리카의 신경을 건드렸다.
“응, 리리카 잘 가.”
리리카는 코하네의 인사를
받아 줄 생각이 없다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갔다.
다시 바람이 세게 불기 시작했다.
고개를 숙여 보지만 아무 소용이 없다.
이번엔 마호가 코하네의 어깨를
티 나게 꽉, 붙들었다.
마치 자석에 들러붙은 모양처럼,
코하네는 그의 가슴속에 폭,
쌓여 있는 모양이다.
“마호, 태풍?”
“글쎄.”
“대단해.”
“얼른 가자.”
“어쩌지?”
그는 그녀가 뱉은 단어에 즉각 반응했다.
“왜? 무슨 일이야?”
코하네가 고개를 위로 들고
웃기 시작했다.
“마호, 뭐야 왜 이렇게 놀라?”
“뭔데?”
그의 표정이 더욱 심각해졌다.
“말하면 마호의 표정보다
덜 심각한 얘기라 안 될 것 같아.”
바람은 다시 잦아들었다.
“뭐... 야?”
마호가 제자리에 서서
그녀를 애원하듯 바라보았다.
“정말 못 말려,
잘 들어 아주 심각한 얘기야.”
그의 눈이 둥그러지더니
코하네의 얼굴 속으로
들어갈 것처럼 집중하는 모습이다.
“앞집은 늘 모든 빨래를
밖에 걸어놓거든? 속옷까지...
집게가 놓진 않을까 걱정이 돼.”
힘이 잔뜩 들어갔던 마호의 어깨가
마치 바람 빠진 풍선처럼 꺼졌다.
“아, 그게 뭐야?”
코하네가 고개를 도리질한다.
“으으응, 난 정말 걱정돼
옷이 하나라도 날아갔다 간,
뭔가 일이 일어날 것 같거든.”
코하네는 정말이지
그 작고 작은 속옷이
어디라도 날아갈까, 걱정되었다.
“난 네가 더 걱정이다 이그.”
코하네가 길 한중간에 서서
움직이지 않을 작정으로 꼿꼿이 서 있었다.
“치잇.”
“바보, 가자.”
마호가 코하네의 팔을 잡아당긴다.
다시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틈을 타 그녀의 어깨를 강하게 잡았다.
“거기, 가자.”
그녀의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으응? 음, 그래 좋아.”
나오코와 자주 왔던 곳이
아지트가 되어 유일한 여자 손님으로
제대로 대우받는 곳이다.
아마도 나오코의 미모 때문일 게 뻔했다.
이곳에 오면 마치 여왕이라도
된 것처럼 우쭐거리고 싶어진다.
낮은 값의 술은
모두가 피곤한 월요일에도
유일하게 붐비게 하는 곳이다.
바 안은 사람들의 걸쭉한 목소리와
담배 연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속의 주인장 목소리는
천둥소리와 도 같아
한 번 목소리를 내면
모두의 목소리는 잠시 멈칫하곤 했다.
마치 얼음땡, 놀이처럼.
웬일인지, 그들이 도착하기 전부터
바 모서리 쪽으로
중년의 여자가 홀로 앉아 있었다.
짙은 화장으로 가면을 쓴,
그녀의 진짜 얼굴은
가늠되지 않을 정도다.
당연히 여자는 남자들의 시선을 받고 있었고,
천둥소리를 내는 주인장도 한몫했다.
내내 독한 술을 마셨는지
짙은 화장은 마치 피에로의 번진
분장처럼 흘러내렸다.
간혹, 멋 모르는 남자가
말이라도 걸었다 하면
홀로 중얼거리며 알아듣지
못할 말을 뱉는다.
남자들은 정말이지 알다 가도
모를 사람들이다.
멍청이 거나, 아님 매너가 좋은 사람이거나,
이렇게 단순하게 몇 갈래도
채 되지 않게 두 갈래로 나뉜다.
중년의 여자가 저렇게 표현한다는 건,
내버려 둬,라고 욕을 뱉는 거나 다름없는데
그들은 눈치채지 못한다.
하지만 멍청이에 속하는 남자들은
끼리끼리 수군거리며 도도한 척,
또는 관심 좀 줘,라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코하네는 아예 보고 싶지 않다는 듯,
등을 돌려 옆자리에 앉은
마호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그의 옆모습을
처음으로 또렷하게 보았다.
코하네가 알고 있던 익숙한
마호의 모습이 아니었다.
마치 처음 본 사람처럼 낯설었다.
마치 또 성장한 것처럼.
그의 턱선은 굉장히 날렵했고 날카로워 보인다.
또한 굉장히 남자다운 모습이다.
손을 갖다 대고 확인하고 싶을 정도의
매력적인 턱을 갖고 있었다.
코하네의 눈빛을 느낀 마호가
그녀와 눈이 마주쳤고,
둘은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얼음이 된다.
그 어색함 속에 코하네에 대한
진심은 마호의 눈빛에 적당히 묻어나고 있었다
.
중년의 여자가 입을 열어
주인장을 부르는 순간,
들리는 남성의 목소리에
그들 멍청이들도 함께 경직되거나
입이 벌어지거나, 욕을 내뱉거나,
또한 구석에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중년 여자의 목소리는 정말 남자의 것이었다.
그 소리를 듣고 나니
중년 여자의 모든 것이 여성스러움과
꽤 어울리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매너 좋은 단 한 사람 마호는
고개를 티 나지 않게 잠시 젓다가
웃음이 삐죽 나올 것 같았는지
고개를 푹 숙이며 헛기침했다.
“음음.”
코하네는 마치 영웅이라도 본 것처럼
입을 쩍 벌리고 중년의 여자를 바라보았다.
붉은 립스틱이 자연스럽지 않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세상의 그 무엇도
절실하게 여자가 되고 싶은 마음을
따라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코하네는 박수를, 위로를,
칭찬을 해 주고 싶지만,
그녀의 버릇과도 같은
위축과 쭈그러듦은
당연히 이 순간에도 그것들을
발휘하기엔 역부족이다.
심각하게 소란스러워진 바 안에
주인장의 천둥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다시 자연스러운 술집 분위기가
형성되기 시작했고,
중년의 여자에게
함부로 말을 거는 멍청이들은 이후,
사라지고 흘긋거리는 시선도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주인장은 독한 테킬라를 잔에 따르더니,
멋없이 중년 여자에게 쓱, 내밀었다.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하며
고마움의 표시를 전했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주인장과 중년의 여자, 또는 남자는
그 이후 연인관계가 되어 있었다.
신
가장 붐비는 지하철역
중앙의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비쩍 마른 할아버지,
날이 궂은날에도 그 자리를
오늘도 비우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키가 비정상적으로 커서
구걸하는 사람치곤 위엄이라고 해야 할까,
왠지 바라보면 두려움을 느낄 수 있는
표정을 갖고 있었다.
그들의 세상에서 좋은 자리란,
생계와 직결되는 부분이기 때문에
간혹, 검은 알코올 냄새를
풍기는 낯선 이방인이
그의 자리를 어슬렁거리기라도 하는 날에는
이방인이 자리를 뜰 때까지 단 한 번,
일어서는 일이 없다.
방심이란 단어는
그에게 찾아볼 수 없는 순간일 것이다.
그랬다가 생계와 직결이 되는
자리다툼은 역한 피비린내를
일으키기도 한다.
여전히 오늘도 그는 눈을 감고 있는 것처럼
내리깔고 자신의 동전이 든
깡통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한 일은 코하네만 겪는 일이었을까?
늘 코하네가 그곳을 지나칠 때마다
할아버지는 흰 눈썹 털이 가리고 있는
눈으로 위로 치켜뜨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시선을 정면에 두고 모른 척,
걸음을 걸어도 할아버지의 눈이
코하네의 아킬레스건을
뚫어 버리는 건 아닐까, 겁이 났다.
결국 그에게 시선을 빼앗기고,
동전마저 빼앗기고 만다.
어느 날, 그런 그가
너무 궁금한 나머지
역 앞 이층 카페에 들어가
그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날도 술 취한 이방인은
자리를 꿰기 위해
주변을 맴돌다 사라졌고,
그는 짐을 싸기 시작하더니,
순간 사라져 버렸다.
뒷모습의 꼬리를 잃어버린 코하네는
자신도 모르게 텅 비어 있는
그의 자리를 눈으로
대신 지키려 하고 있었다.
코하네는 두 잔 째,
커피를 비우고 있었고
시간은 끝없이 흘러갔다.
그의 공간을 지키려던 눈을
포기하려던 순간,
담요를 들고 다시 그가 나타났다.
혹시나 그 자리가 다른 사람의
차지가 되어 벌릴까,
걱정한 그녀의 입에서
긴 한숨이 발끝까지 내려앉았다.
“후 우우우.”
코하네는 이 이후로 그의 눈을 피하지도,
돌아가지도, 동전을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떨어트리지도 않았다.
역 가장자리를 지나야
빠른 길로 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중앙 부분을 거쳐
허리를 굽혀 존경 섞인 인사라도 하는 듯,
깡통 안에 동전을 집어넣었다.
그의 눈 모양을 알고 싶지만
흰 눈썹이 얼마나 길던지
겨우 눈동자 확인만 가능했다.
코하네가 그렇게 걸음을 옮기고 나면
그는 손바닥 크기의 수첩에
무언가 열심히 적어 내려간다.
그가 자신의 깡통이 채워지는
순간 늘 하는 행동이었다.
오늘따라 그는 늘 곧추세우던 허리를
차가운 시멘트벽에 기대어
오랫동안 잠들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좀 더 길게 뻗어 나온 눈썹 때문에
확인이 어렵지만 몹시 고단해 보였다.
코하네는 조용히 허리를 굽혀
오늘도 동전을 깡통 속에 집어넣었다.
녹슨 깡통이 새것으로 바뀐 모양이다.
좁은 입구에 손을 넣었더니
날카로움에 긁힌다.
소리 내지 않고 일어나 걸음을 옮길 참이다.
작은 체구에 둘러맨 가방의 무게가
점점 더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
마호를 기다리며 마시려던
따뜻한 커피 대신
자판기 속 녹차를 선택했다.
코하네도 그처럼 역 가장자리를
차지하고 벽에 기대어 보았다.
도쿄에서 가장 시끄럽고 복잡한 역이지만
눈을 감고 벽에 기댄 순간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가 왜 눈을 감을 수밖에 없는지 알 것 같았다.
눈을 감았을 때의 암흑은
늘 정적을 동반했고 꼭,
듣고 싶어 하는 소리 한 가지만 들릴 뿐이다.
‘기억이 멀쩡하면 고통스러운 걸까,
멀쩡하지 않아서 고통스러운 걸까,
아키라는 지금, 고통 속에 있을까…’
점점 어깨가 짓눌리고 다리가 아팠다.
짐을 내려놓기가 더 힘들게 뻔했다.
감은 눈을 열려던 순간
가방의 무게가 줄어들었음을 느꼈다.
코하네는 속으로 말했다.
‘나의 구세주.’
갑자기 뜬 눈으로 밝은 불빛이 공격해 오더니,
마호의 얼굴은 한참 후가 돼서
눈 안에 들어찼다.
마호의 큰 손아귀에
가방이 꼼짝없이 쥐어지고 만다.
코하네의 까치발은
마치 가방과 함께 들려 있는 모양새다.
“마호.”
“이럴 줄 알고 일찍 나온 건데,
매번 실패야.”
그녀가 어딘가 불편해 보인다.
“마호? 잠깐만 놔줄래?”
“응? 어?”
그제야 들려 있는 발을 보며
그녀를 살며시 놓더니,
가방만을 번쩍 들어 올렸다.
“고마워.”
뭐가 그렇게도 눈치를 끌었는지
지나치는 사람마다 눈을 흘긋거리며 지나갔다.
그는 한 손으로 들어 올린 가방을
자신의 어깨에 걸치며 말했다.
“아니, 자기 몸보다 큰 배낭을 갖고 오면
어쩌자는 거야?”
“히잇.”
“바, 보.”
바보란 소리에도
코하네는 마호를 보며 방실거렸다.
“구세주.”
마호는 맘에 드는 단어를 들었는지,
순간 얼굴이 발개지며
바싹 다가온 그녀의 얼굴을
슬쩍 밀어내며 걷기 시작했다.
“구세주, 같이 가.”
코하네가 보지 못한
앞서 걷는 마호의 얼굴에는
웃음이 퍼지고 있었다.
걸음걸이마저 씩씩한 군인 같다.
코하네가 쫓아와 그에게 기대듯,
팔목을 잡고 따라 걷는다.
씩씩했던 걸음걸이가
어느새 요조숙녀처럼 보폭이 작아진다.
“그 노인한테 커피값,
뺏긴 거지?”
“빼앗긴 건 아니지,
아니야, 그 덕에 눈을 감고 쉬었는걸.”
“아직 찬 바람이야, 바보.”
“네가 이렇게 금방 왔잖아.”
“흠, 준비됐어?”
코하네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초승달처럼 웃으며 돌돌 말았다.
마호는 행복감에
그 어떤 무거운 철 덩이라도
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강 위에 만개한 벚꽃이
늘어져 있는 모양이 더 이상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다.
해가 바뀔 때마다 무사함을 기원하며
벚꽃이 만개하길 아키라와
수 해를 보내왔지만,
그는 더 이상 꽃이 꽃이라는 것조차
기억해 내지 못하는 것 같다.
아키라의 기억을 앗아가고 있는
꽃의 세월은 코하네에게도
아키라에게도 고통일 것이다.
구둣방에 다다르자,
언제나 그랬듯이 발을 더 이상
앞으로 내디디기가 힘이 들었다.
한 발걸음 내디디면
그만큼의 기억을 또 잃어버렸을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다.
처음엔 그 두려움이 공포로 다가왔다.
아키라가 갖고 있던
하나의 기억이 사라질 때마다
그들은 그렇게 또, 적응해 나간다는 것,
이것은 너무 현실적이고
잔인한 망각이었다.
“코하네? 다 왔어.”
코하네는 고개를 들어 마호를 바라보지만
먼 산 바라보는 듯 초점은 뻥 뚫려 있었다.
“또 얼마나 적응해야 할까…”
“조금 더 있다가 들어갈까?”
그녀는 아무 대답이 없다.
“괜찮아?”
어떻게 괜찮을 수가 있을까,라고
그녀의 얼굴에 온갖 문자들이
적혀 있는 것 같았다. 마호가 말했다.
“모른 척할까?”
갑자기 코하네의 입에서 푸핫, 하며
웃음을 뿜어내는 소리가 들렸다.
“아, 마호.”
“아... 이미 아는 척을 해 놓곤.”
“마호”
“웃었네? 그래도.”
“으응.”
마호가 커다란 손을 내밀었다.
“가자.”
“응.”
아키라는 볕이 정면으로
내리쬐고 있는 곳에 앉아
눈을 찡그리고 있었다.
정면으로 오는 볕을
질색하던 아키라가 정면으로 볕에
대응하고 있다.
예전 같으면 벌써 백 미터 밖에서
아키라를 외치고
작은 발로 뛰어왔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아키라는 말했다.
“코하네, 네가 놀라게 할 때마다
이 할아비 수명이 줄어드는 것 같구나,
조심해야지 조심.”
마호가 먼저 그에게 다가가 인사한다.
“아키라 할아버지, 오랜만이에요.”
아키라는 앞니가 빠진 입을
헤 벌리고 그를 보고 웃었다.
아키라는 매일 새벽 일어나자마자
깨끗이 닦아 놓은 틀니를
끼우는 게 첫 일과였다.
그는 그 일과도 이제 잃어버린 모양이다.
웃고 있는 그의 모습이
그저 해맑기만 하다.
볕을 바라보는 아키라의 눈동자에
뿌연 막이 씌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시력이 더 안 좋아진 것이 분명했다.
“마호, 부축 좀 해줘.”
“으으응.”
아키라의 덩치보다
훨씬 작은 나무 의자가
위태롭게 보였다.
이대로 계속 앉아 있다가
시력도, 살점이 남아있지 않은 엉치뼈도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는 뭣도 모르고
붉은 잇몸을 드러내고
웃기만 할 뿐이다.
“할아버지, 천천히.”
마호의 힘은 정말이지
가늠할 수가 없다.
그녀에게 비켜 달라는 손짓을 하더니
한쪽 손은 아키라의 겨드랑이에,
한쪽은 아키라의 팔을 잡고
어깨에 걸치고 들었다.
아키라의 발이 한두 걸음은
허공에서 걸었고
코하네는 그 모습을 꼭,
머릿속에 담아둘 작정이다.
코하네는 재빨리
구둣방에 내리쬐는 볕을
커튼으로 가렸다.
마호가 아키라를 아기 다루듯,
천천히 의자에 앉히며
머리끝부터 발까지 꼼꼼히 훑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에게 만족하고 있었다.
“할아버지, 나 보여요?”
순간 아키라가 눈을
번쩍 크게 뜨더니
구둣방이 날아갈 듯한 목소리로 버럭 한다.
“이 녀석은 왜 데리고 온 것이야?”
그의 눈동자가 힘 있게 움직이는
모양을 보면 마호에 대한 기억은
굉장히 선명했다.
늘 마호를 못마땅해하는 것처럼
보이긴 했지만 코하네를 챙기는
모습을 보며 내색 없이
그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었던
아키라였다.
얼마 만에 들어보는
아키라의 호통인지,
하늘에서 별이 떨어지는
것만큼 놀랍고 목소리는 아름다웠다.
“할아버지?”
마호가 놀랄 사이 없이
머리를 긁적이며 그와 대적했다.
“에이, 왜 또 그러세요.”
당황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려 애를 썼지만,
휘둥그레진 눈은 감출 수가 없었다.
마호답게 코하네의 감정이
드러난 표정을 세심하게 살피며
행동하는 중이다.
좋아하는 코하네의 모습을 보니
마호도 함박웃음이다.
“그렇게 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니니
돈 벌기는 글렀어, 쯧쯧.”
정말이지 아키라의 기억이
온전히 돌아온 것처럼 보였다.
코하네는 마호의 옆구리를
쿡쿡 찔러 대며
계속 말을 걸어 달라는 신호 중이다.
“에이, 걱정 마요 아키라.”
아키라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꿈도 꾸지 마.”
내내 보기만 하던 코하네의
눈 안에 물방울이 방울방울
맺혀 있었다.
고민하던 그녀가 어렵게 입을 뗀다.
“하, 할아버지.”
코하네가 곁에 있는지조차
몰랐던 것처럼,
할아버지라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 벌떡 엉덩이를 들어
물러나기에 급급하다.
뒷걸음 하다 다시 천천히
앞으로 내딛더니, 코하네의 손을
덥석 잡는다.
코하네는 자신을 알아보는
아키라의 눈동자를
똑똑히 바라보았다.
정말 자신을 알아보고 있었다.
“츠, 츠키노.”
코하네는 조금의 당황스러움도 없이
이미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마저 남은 손으로 아키라의 손을 꼭 쥐었다.
대체 어디서 맥이 잡히는 건지
쥐고 있던 손으로
아키라의 심장박동이 느껴졌다.
쿵쿵 쿵쿵, 끝도 없이 펌프질 한다.
마호에게 손짓하며
그를 다시 의자에 앉혔다.
아키라는 코하네의 손을 놓지 않고
뚫어져라 그녀를 바라보는 중이다.
코하네는 무릎을 굽히고
아키라 앞에 앉아
츠키노의 역할을 대신한다.
갑자기 아키라가 입을 빠르게
오물거리며 입술은 말하고 있었지만,
웅얼거림은 그 어떤 단어도
들을 수 있게 만들어 주질 않는다.
쉬지 않고 그의 입술을
움직이고 또 움직였다.
박자를 맞추는 것처럼
코하네는 고개를 연신 끄덕여주고 있었다.
유키코가 이층 계단에서
산더미 같은 이불을 들고 오는 중이다.
그녀는 이불과의 씨름 중이었다.
앞이 보이지 않았는지,
발을 연신 더듬거리며 말했다.
“오늘의 츠키노 여사는 코하네가 당첨이네?”
그 말을 듣자마자 코하네는
다리 힘이 쭉 풀리더니
의자에 주저앉고 만다.
마호가 재빨리 이불을 전해 받았다.
“안녕하세요.”
“응, 마호 고마워.”
“별말씀을요.”
“저기 방에 놔주겠어?”
“네.”
유키코가 코하네를 보며 한숨을 쉬며 말했다.
“여자만 보면 츠키노라셔.”
“유키…”
“모두가 다 아는 예정된 일에
너무 감정 빼지는 말자.”
“유키.”
“알아들은 거지?”
“으응, 네.”
유키코는 고장 난 채
방치되어 있던 마네키가
한없이 돌아가는 오르골을
아키라의 손에 쥐었다.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오르골을 바라보며
평화를 되찾은 표정을 지었다.
오르골은 소리도 내지 못하는 게
잘도 돌아간다.
유키코의 몸짓, 손짓, 은
재빠르고 해결이란 단어에
익숙한 듯해 보였다.
“유키코, 너무 야위었어요.”
물을 끓이는 그녀의 손가락이
너무 뾰족해 코하네의 심장을 찔렀다.
“살이 좀 많았었던 거지.”
그녀는 여전히 환자를 돌보는
사람 같지 않게 여유를 부렸다.
코하네는 미안한 마음에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차를 따라내는 그녀의 모습은
차분하기까지 했다.
“조르륵.”
갈 곳 없는 듯 구둣방을 서성이며
눈치를 보는 마호가 걸렸는지
코하네보다 더 먼저 그녀가
그를 불러 세웠다.
“마호, 차 한잔해.”
그제야 코하네 옆을 차지했다.
“코하네, 마호를 계속 세워 둘 참이야?”
코하네는 마호를 보더니
그의 존재를 다시 확인했다.
“아, 미안 마호.”
“무슨.”
유키코가 그에게 차를 내어준다.
다시 쪼르르륵.
“이 차가 머리를 맑게 한데…
아키라는 평생을 마셨는데 말이야,
아무튼 나도 열심히 마셔 볼 참이야.”
그녀의 무거운 농담에
그들은 차마 웃을 수가 없다.
“아직은, 따뜻한 차가 좋은 계절이에요.
“잘 마실 게요, 유키코.”
유키코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녀가 내어준 차는
이제껏 마셔 보지 못한
부드럽고 진한 향이 일품이다.
그 맛에 혀가 자꾸 마중을 나간다.
코하네는 아키라가
식사하는 양이 어떠한지,
하루에 몇 번이나 맑은 기억이 돌아오는지,
어떤 이야기를 주로 하는지를
질문하고 싶었지만,
감히 유키코 앞에서
그녀보다 더 많은 걱정을
하고 있다는 듯,
기분 나쁘거나, 혹은 건방지거나, 로
생각할 수 있는 표현을
절대 삼가 하고 싶었다.
그저 목 안에서 질문들이
그녀를 간질간질 못살게 구는 중이다.
마호가 주머니 속을 만지작거리며
구겨진 담배를 꺼내 들었다.
“저기, 잠시만.”
유키코가 탁자 위 재떨이를
송곳 같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니, 괜찮아요.”
그가 손을 젓더니
댕댕하는 종소리를 내며
밖으로 나간다.
그 소리에 아키라의 평화가 깨졌는지
화들짝 놀라 다시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중얼거리며
때로는 큰 소리로 때로는 작은 소리로
오물거렸다.
코하네는 다시 아키라의 앞에
무릎을 굽히며 앉았다.
코하네의 혀는 풍미 짙은 차를
계속 원하지만 식은 후도
계속될 것이라 내심 기대하고
그에게 시간을 양보한다.
“할아버지?”
유키코가 약간 신경질적인 어투로
할아버지라는 단어에 응대한다.
“아, 코하네 모든 움직임에 반응하는 게
그리 좋은 건 아닌 것 같아.”
이제껏 여유 있어 보였던
유키코의 모습은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흔들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할 수 있었던
기회를 놓쳐 버린 것만으로도
땅이 갈라지는 기분이 들었을 텐데,
그녀는 정말 강한 정신력을
갖고 있는 여자이다.
마치 빼다 박은 아키라처럼 말이다.
코하네는 아키라의 입에서
아주 익숙한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다시 한번 되묻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
코하네는 말 대신 마호가 짊어지고 온
가방 안에서 사진첩을 꺼내 들며
미리 유키코에게 에둘러 말할 작정이다.
“유키코, 이건 아키라 방에
있었던 것들이에요.”
유키코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는 눈초리다.
코하네가 먼저 꺼내든 사진은
유키코의 엄마 모습이다.
유키코는 두껍고 넓은 책들을 쌓아
그가 보기 좋게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자, 할아버지, 보세요.”
유키코 또한 반가워하는 기색이다.
“아…”
유키코의 말끝이 감정에 흐려졌다가
다시 나올 듯했지만
나오지 못한 채 가슴에 갇혀버렸다.
마치 오르골에 오랫동안
집중했던 것처럼
그의 흐릿한 동공은
사진을 하나하나 눈을 마주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훑어간 사진들을
다시 되풀이하며
책을 읽듯 읽어 내려간다.
유키코가 말을 이어가려 하지만
코하네가 손가락으로 입을 쉬, 하며
눈을 찡긋해 보인다.
코하네가 아키라의 손을
살며시 쥐어 보았다.
다시 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고,
손가락이 츠키노 사진을 가리키더니
다시 코하네를 바라보았다.
다시 츠키노라 말할 것이다.
그들의 생각이 빗나간 순간이다.
그는 츠키노를 보고 코하네를
바라보기를 몇 번 반복하더니,
이번에는 정확한 발음으로
입술을 오물거린다.
“코, 코 코하, 네.”
코하네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으응, 네 할아버지, 저예요.”
그때 아키라의 눈빛은
자신이 치매를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눈빛이었다.
그는 코하네를 수십 년이
지난 후 만난 것처럼
시간이 아득하다.
“왜, 이제야 왔느냐.”
그 말은 꼭, 조금 후면
난 또 널 잊어버리고 말 거야,
라고 자신을 원망하는 말투였다.
“할아버지 죄송해요.”
아키라가 고개를 젓더니
유키코를 슬픈 눈으로
바라보곤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일어난 후부터 쭉,
잠을 청하지 않아,
꼭 네가 오는 것을 알았는지 말이야.”
“꼭, 며칠 밤을 새우신 분 같아요.”
유키코는 아키라 보다
엄마의 젊었을 때의 모습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엄마, 아주 젊은 아가씨로 다시 돌아왔네.”
“아키라 방에서
가장 눈에 띄는 곳에 있었어요,
일어나자마자 눈이 마주치는 곳.”
아키라가 다시 중얼거리며 콜록거렸다.
“피곤해 쿨룩쿨룩.”
유키코가 빠르게 미지근한 물을
그의 입술에 갖다 댄다.
그는 할 말이 많은 듯했지만
터져 나오지 않는 단어 때문에
답답함을 호소하는 것처럼 보였다.
유키코가 들이댄 물컵을
세게 밀쳐내더니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코하네는 당황스러움에
컵을 주워 올리는 것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유키코는 또 자연스럽게
아키라를 흘긴 후,
마른걸레로 쓱쓱, 바닥을 닦아냈다.
“오늘은 왜 안 그러시나 했네.”
“주세요, 유키 내가 할 게요.”
“괜찮아, 내가 컵을 모조리
플라스틱으로 바꿨으니 망정이지.”
유키가 말을 끝내며
아키라를 보고 혀를 쭉, 내밀고
약을 바싹 올리는 중이다.
그녀를 흘겨보고는 있지만
지금까진 기억은 맑아 보였다.
그는 화가 났는지 엉덩이가
조금씩 들썩거리는 모습이다.
“코하네 봐, 눈빛이 살아났지?
날 괴롭힐 땐 늘 저러셔.”
유키코는 다시 아키라에게 혀를 쭉, 내밀었다.
금방이라도 잠이 들 것 같던 모습이
그녀의 혓바닥 하나로
움찔하니 반갑기까지 했다.
“나 가자 나가.”
코하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응, 그래요, 우리 나가요.”
“아버지, 나가자는 단어 처음 말하시네?”
유키코의 눈도 덩달아 동그래지더니
반가운 기색이 역력하다.
구둣방 밖에 서성이던 눈치 빠른
마호가 성급히 종소리를 울리며
아키라를 잡았다.
아키라도 싫지 않은 눈치다.
유키코가 재빠르게
아키라의 방으로 내달리더니
얇은 카디건을 건네며 말했다.
“해가 져서 쌀쌀할 거야.”
“네.”
유키코의 콧등이 갑자기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코하네는 그녀의 콧등을
모른 척하려 고개를 돌렸지만,
코하네의 콧등도 함께 물들어 가고 있었다.
아키라의 움직임은 굉장히 조급해 보였다.
꼭, 잊기 전에 붙들어 매고 싶은
자신의 기억을 잡으러 가는 사람처럼.
코하네가 중얼거리며 훌쩍거린다.
“네, 할아버지 꽃 보러 가요.”
걷는 내내 아키라의 손가락이
기억을 주먹 안에 쥐며
손끝이 하얘지도록 힘을 주어
잡고 있었다.
코하네는 아키라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미소를 보이며
눈을 깜박였다.
아키라의 손가락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고,
코하네는 그의 손가락을 펼쳐 보더니 꾹꾹,
주무르기를 몇 번,
다시 붉은 기를 되찾는다.
벚나무는 가느다란 가지를
길게 늘어뜨린 채
강 위에 꽃들이
거울을 들여다보며 뽐내고 있었다.
불규칙하게 뻗어 나온 가지는
아키라의 얼굴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는 주먹을 다시 꼭 쥐며
하얗게 창백한 손등을 하고 있다.
강의 끝은 끊임없이 펼쳐져 보이지 않았다.
그의 기억과도 같게 끝이 정확하지가 않다.
코하네는 강의 끝을 응시하는
아키라를 조용히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이번엔 그의 창백한 주먹을 모른 척할 모양이다.
아키라의 좁은 팔뚝에
가볍게 고개를 파묻고는
창백한 주먹을 꽉 잡았다.
마호가 다시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담배를 찾았다.
안타깝게도 마지막 담배는 이미 비워진 후다.
“마호?”
“응.”
“없어?”
그가 배시시 웃으며
아키라의 귀에 대고 말했다.
“아키라가 담배를 태우지 않다니
놀라운 일이에요.”
아키라는 들은 척 안 하고
먼 곳만 응시하는 중이다.
코하네가 바닥에 흩날리는
분홍 꽃잎을 주워
아키라의 주먹 쥔 손안에 살포시 놓는다.
그가 아이처럼 함박웃음을 지었다.
아키라는 기억이 도망가기 전에도
잘 웃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처럼 밝은 미소를 짓는 그를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아니 어쩌면 처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팡이를 미세하게 흔들거리며
몸을 마호에게 의지하며
꽃잎을 더욱 가까이서 보려
눈앞에 갖다 댄다.
바람에 날아갈까, 손바닥을 오므리며
코를 킁킁거리기 시작했다.
코하네도 따라 꽃잎을 주워 킁킁거렸다.
만약 향기가 날렸다면 꼭,
아주 달콤한 분홍빛 사탕의 냄새였을 것 같다.
아카라의 얼굴엔 만족감이
넓게 퍼져 있었고,
손을 강가에 뻗으며 꽃잎을 날려 보낸다.
마치 자신의 기억을 보내는 것과 같이,
그 모습은 가슴을 아리게 했다.
역시 그녀도 따라 꽃잎을 날려 보냈다.
지팡이를 짚고 있던 팔이
좀 더 격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아키라는 당황하지 않고
다시 마호에게 몸을 기댄다.
마호는 티 내지 않고
버팀목 역할을 톡톡히 하는 중이다.
호흡을 짧게 몇 번을
급하게 들이쉰 아키라는
기대고 있던 어깨에 바싹 힘을 주어
홀로 왼발을 디디려 했다.
코하네는 갑작스럽게
홀로 움직이려는 모습에
당황하며 제지하려 하자,
그의 뒤에 바싹 붙어 있던
마호가 아무 말 말라며
눈치를 주었다.
눈을 찡긋하며 그를 받치고 있다며
두 손으로 그의 등을
에워싸는 모양을 해 보였다.
코하네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불안은 어쩔 수가 없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아키라는 거북이처럼 느리다.
지팡이가 손이 떨고 있는 모양대로
좌, 우로 조금씩 흔들리긴 하지만
오히려 그 모습은
균형을 잡기 위한 모습으로 안정적이었다.
가다가 서다가, 를 연신 반복했지만
코하네는 신이 났는지
흥얼흥얼 중얼거린다.
길고 긴 히말라야 같은 계단을
혼자 힘으로 올라선
아키라의 이마에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마지막 계단 하나를 남기고는
아키라의 입에서 소리가 들렸다.
“끄으으응 차, 으읏차.”
몸이 앞으로 흔들렸다 뒤로 흔들렸다,
잠깐 흔들린 균형에
마호가 등을 받쳐 주었지만
이내 싫다며 지팡이를 들어
먼저 가라는 시늉을 한다.
마호는 멈칫하며 한참을
아키라의 걸음보다 느리게 걸으며
그의 등만 바라보았다.
마지막 계단까지 올라서며
한참을 우두커니 서서
자신의 구둣방을 보았다.
무언가 되었다는 듯,
뒤돌아서 그들을 한 번씩 번갈아 본다.
갑자기 지팡이를 길바닥에 팽개치더니,
보란 듯 팔자로
구둣방으로 빠르게 걸어 들어갔다.
너무 놀란 코하네의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고,
마호는 억울하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엇.”
코하네는 할 말을 잃어버린 눈치다.
믿을 수 없다며 아키라를 따라
구둣방에 들어섰다.
그는 이미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 뒤다.
유키코는 지팡이를 잡지 않은
그의 모습이 대수롭지 않았는지,
태연한 모습으로 말했다.
“다리가 불편하다는 것도
가끔 잊는 것 같지?”
“유키, 기억이 굉장히 또렷했어요.”
그녀가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잠을 자야 해.”
코하네는 며칠 동안
통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얘기가 떠올라 아키라의 방 문턱에
올려놓은 발을 티 나지 않게 뒤로 물렸다.
“네.”
코하네는 아키라의 의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의자의 벌어진 틈 사이로
누런색을 띤 담배꽁초가
끼어 있는 모습이 보였다.
담배를 태우지 않던 그가
그럴 리 없는데, 라며
머리를 긁적이며 빼내려 안간힘을 써 본다.
역시 낡아빠진 의자의 주인처럼 고집이 세다.
코하네는 이내 포기하며 일어섰다.
“후우아.”
유키코가 마호에게
커다란 빨래 덩이를 건네며
개구쟁이처럼 발을 동동거렸다.
마호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며 고개를 젓는다.
“이층 욕조에 넣어줘 밟아 주면 더 좋고!”
마호는 싫은 내색 없이
성큼성큼 올라가더니
한참 동안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처음 아키라의 손에 이끌려
구둣방에 온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코하네가 사용할 곳이라며
깔끔하게 정돈된 이층 방을
마치 세입자에게 소개하듯
들떠 있었던 아키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낡았지만 나쁘지 않을 거다,
볕도 잘 들어오는 곳이지
네가 원하면 커튼을 달아 주마.”
이층으로 올라서자마자
개방된 방이 맘에 걸렸는지
아키라는 며칠 동안을
커튼이란 단어를 입에 달고 살았다.
오래된 나무를 밟아
삐걱거리는 소리에
아주 잠시 미안하다는 생각이 스친다.
그 소리는 늘 상상하게 만드는
규칙적이지 않은 그의 삐죽한 수염과도 같았다.
화장실의 열린 문틈 사이로 마호가 보였다.
180센티가 넘는 키로 작은 욕조 안에서
제자리걸음을 하는 모습은 꽤 우스꽝스럽다.
장난기가 발동한 코하네가 문을 세게 밀어제쳤다.
“앗, 깜짝.. 이야.”
“놀라긴.”
“난 아주 착한 일을 하는 중이야.”
“히잇, 마호.”
그녀는 길게 뻗은
두 눈꼬리를 귀 쪽으로
내려보내며 웃었다.
“어우, 그런 표정은 사절이야.”
“하핫, 고마워.”
마호는 방해하지 말라며
손짓하곤 우스꽝스러운
제자리걸음을 더욱 씩씩하게 걸었다.
한쪽 벽면에는 한글로 된 글씨가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어느 것 하나 손을 덴 흔적은 없다.
창문 앞에 줄지어 놓은
마네키 네코 인형은
오히려 하나가 늘어나 있었고,
창문에 달린 커튼은
새하얀 색을 뽐내고 있다.
엉터리로 만들었던 저고리도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간혹 보이던 붉은 글씨를 보니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보랏빛 얼굴을 한 작은 소녀가
누더기 같은 저고리를 입은 채
창문 턱에 올라가 앉아 있었다.
코하네는 그럴 줄 알았다며 한숨을 내쉰다.
“후, 진짜가 아니야.”
그녀는 자신의 물건을
한쪽으로 모으기 시작했다.
몸보다 더 큰 가방 안에
그것들을 쑤셔 넣었다.
붉은 글씨와 검은 글씨로
도배된 벽지를 모두 뜯어내고 싶었다.
코하네는 고민에 빠져버렸다.
정말이지 새하얀 벽지를
새로 발라 놓고 싶은 심정이었다.
다시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만
보라색 얼굴의 소녀는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
유키코가 마호와 말을 섞는 소리도
몇 번의 기침 소리도 드르륵, 하며
미닫이문을 여는 소리도
그녀에게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이번엔 더 크게 코하네의 뒤통수에 대고
소리를 질러 본다.
“코하네? 응?”
그제야 창문 턱에 앉아 있던
보라색 얼굴의 소녀가 사라졌다.
코하네의 몸이 꿈틀거리며 신음한다.
“허…”
“코하네, 왜 그렇게 얼이 빠진 거야?”
코하네는 다시 창문 쪽을 확인하며 말했다.
“짐을 좀 챙겼어요.”
유키코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응? 아니 집을 옮길 때도
가져가지 않던 것들인데, 왜?”
“유키코가 잠을 자는 이곳은 마치…”
유키코가 짐작하며
코하네의 말을 가위로 싹둑, 잘라버렸다.
“알다시피 난 돌아갈 곳이 있어
이곳이 내 집은 아니니까.”
코하네는 이곳에 발을 들일 때도
하지 않았던 말들을 늘어놓았다.
“여긴 유키코의 집인데,
내가 너무 잊고 있었어요.”
“지금에 와서?”
유키코의 말뜻에 어떤 원망이나
억압적인 뜻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숨이 막힐 정도로
미안한 감정에 또다시 숨고 싶었다.
“그런 표정 짓지 않아도 돼 코하네.”
유키코의 얼굴은
손을 갖다 대지 않아도
온기를 느낄 수 있는 표정이었다.
코하네는 남아있지 않은
손톱을 찾아 입술을 오물거렸다.
더 이상 물어뜯을 손톱이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을 땐 이미 굳은 살의
표피가 떨어져 나간 후다.
“우린 이미 가족이야.”
손톱을 물어뜯는 버릇을
이미 알고 있었던 유키코가
코하네의 손을 살며시
잡으며 바닥을 향해 내려놓았다.
고개를 젓는 모습까지 잊지 않고 흔들었다.
“으읏차.”
마호가 들려주는 요란한 소리가
욕실 문이 열리자 더욱 요란을 떨었다.
플라스틱으로 된 큰 대야 속에
철이 들어 있는 것처럼 무거웠다.
그의 몸 전체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모습이 우스꽝스럽다.
그들은 동시에 그에게 달려가
대야를 함께 들어 올린다.
“마호, 뜨거운 물을 쓴 거야?”
“네, 물이 아직은 너무 차가워서…”
“코하네 이걸 들고 있어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은데?
베란다 문이나 열어 주지 않을래?”
코하네는 입을 삐죽 내밀더니,
빠른 속도로 베란다 문을 열었다.
“자, 오시죠.”
마호의 입속에서
끊이지 않은 신음이 끙차 끙차,
하는 소리를 낸다.
아직 멀었다는 듯,
그를 흘겨보던 유키코는
이불 하나를 번쩍 들어 올리며
고정된 탄탄해 보이는 줄에
조금씩 걸친다.
분명 굵고 탄탄한 실을
한 올 한 올 틀어
모양을 잡아 놓은 건,
아키라의 솜씨일 것이다.
덩치 큰 마호가 걸쳐진 이불의
모서리 끝 쪽을 밑으로 있는 힘껏
당겨 걸어도 끈은 꿈쩍하지 않는다.
기세등등했던 아키라의 어깨처럼.
“하, 유키코는 어떻게 이 일을 혼자 해요? 하아.”
마호의 말속에는 단내 나는 공기가 가득 담겨 있다.
“하하, 이게 힘으로만 하는 게 아니거든.”
마호가 물기 있는 손바닥을 탁탁,
소리를 내더니 엄지를 내보이며
입을 동그랗게 말아 보인다.
먼지 하나 없는 베란다 바닥에
코하네가 털썩 주저앉아
강을 내려다보았다.
발바닥에 닿은 타일의 느낌이
달걀의 겉면처럼 매끄럽고 차가웠다.
“마호, 애썼어 정말 고마워.”
코하네도 덩달아 말했다.
“나도, 마호.”
그가 멋쩍어 머리를 긁적인다.
“자, 오늘 저녁은 내가 대접할게.”
“우왓, 감사합니다.”
“참, 코하네 미리 말하지만,
부엌엔 얼씬도 하지 말라고, 알았지?”
“그래도 도움은 될 거예요.”
유키코의 손가락이 고급스러운
메트로놈처럼 좌, 우로 도리질한다.
그녀의 경쾌한 발걸음은
소리도 없이 빠르게 사라졌다.
강바람이 적당한 신선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바람을 들이마시면
강물의 특유한 비린 냄새가
싫지 않아 숨을 참고,
또 참을 만큼 참은 뒤 내뿜기를
계속 반복했다.
약간의 어지러움을 느꼈지만,
이 또한 행복하다.
마호가 다리를 가로질러
뛰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지난 시간 속에 수없이 보아왔던 모습이다.
어두워진 강 너머는
시야가 분명하지 않았지만,
낯선 사람이 마호의 집에서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넋을 놓고 숨 고르기를 하던
코하네가 고개를 길바닥으로
떨어져 내릴 것만큼 쭉, 내밀어 관찰한다.
낯선 남자가 뒤를 이어
아주머니의 모습도 함께 보인다.
마호도 함께 나와 몇 마디 말을 섞더니,
낯선 남자와 악수하곤
보이지 않은 깊은 골목길로
아주머니도 함께 따라 사라졌다.
멀리서 마호는 그 모습을
아주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당연히 마호는 코하네가 있는
이층 방을 멀리서 보고 있는 중이다.
이럴 때의 길 가장자리 쪽
어두운 가로등이 무척이나 원망스럽다.
마호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마호가 다시 구둣방으로
열심히 뛰기 시작했다.
마호가 가까워질 때까지
코하네는 놓칠세라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마호는 단 한 번 멈추지 않은
뜀박질에 숨을 헐떡이며
상체를 꺾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당연히 코하네를 올려다볼 줄 알고
기다렸지만 돌아서서 다시 꽉 들어 찬
담배를 꺼내어 만지작거렸다.
돌아선 그의 얼굴은 볼 수 없지만
머리 위로 모락모락 피어나는 연기를 보니
보지 않아도 마호의 마음이 전해졌다.
코하네는 다시 강 위로 보이는
그림자를 관찰한다.
코하네의 뒤통수가
마호의 냄새를 아는 척하려 움찔거렸다.
저녁 식사를 함께할 예정이었던
아주머니의 안부를 코하네는 모른 척한다.
내내 보고 있었던 마호도 모른 척할 생각이다.
“배.. 고, 파.”
어느새 나란히 앉은 마호의
날카롭고 남자다운 옆모습이 보인다.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땀,
한 방울이 외롭다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마호의 뱃속에서 물 흘러가는 소리가 들린다.
“으으응? 마호도 배고프네?”
그가 웃었다.
“으응.”
코하네가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노릿한 담배 냄새를 맡았다.
“마호는 중독됐어?”
“응?”
“그것 말이야.”
코하네가 가득 찬
담배 더미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흠, 그런 것 같아 애증의 존재,
사라져 버리면 좋겠는데,
사라지면 내가 다시 찾지.”
“흐음, 그것 참 괴롭겠다.”
코하네가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움츠린다.
마호의 눈에 그녀의 새하얀 맨발이
눈이 들어왔다.
어찌나 새하얗던지
우유 빛 타일 색깔과 같다.
마호가 그녀의 발등 위를
손으로 감싸 쥐었다.
“춥지? 들어가자.”
“엇.”
그의 따뜻한 손길이 싫은 건
아니었지만 발등이라는
위치 때문인지 약간의 주눅이 들었다.
빠르게 마호의 손아귀에서
발을 쓱, 하고 빼기 바쁘다.
“으응.”
코하네의 발은 바람처럼 빠르다.
코하네는 서랍장을 뒤적거리더니,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얼굴이
나란히 보이는 종이를 꺼내 들었다.
코하네의 취미가 이런 곳에도
있었는지 마호는 의아한 얼굴을
들이밀고 말했다.
“응? 이건 비틀스잖아?”
“비틀스를 모르는 사람은 없지.”
그가 브로마이드를
자신의 기다란 팔로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쭉 잡아당긴다.
“하하, 관심 있는 줄 몰랐네.”
그녀가 그를 흘긋거린다.
“왜?”
“의외!”
“이건 꽃 축제 때에 받았던 거야,
그땐 몰랐지, 이 사람들이 누군지…
한데 이들이 얼마나 유명한 사람인지
알았을 땐 그냥 버릴 수가 없었어,
넣어 두길 잘했지?”
코하네는 다시 서랍장을 뒤지며
접착제를 꺼내 들었다.
“코하네, 난 정말 좋아해.”
“응?”
“노래 말이야.”
“그래?”
마호가 그녀의 뒤통수를 꾹, 누른다.
“으이그.”
코하네는 브로마이드를
바닥에 뒤집어 놓더니
접착제를 바르고 또 덧바른다.
“붙이려고?”
고개를 끄덕이며
종이의 모서리 쪽으로 한 번 더
꼼꼼히 덧바른다.
“마호, 들어줘.”
코하네가 알아볼 수 없는
글씨로 도배된 벽 쪽을
가리키며 벽 위에도
접착제를 둥글리며 발랐다.
뭐가 그리 신이 났는지
그녀의 얼굴은 내내 웃는 얼굴이다.
“자, 얼른.”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긴 팔로 브로마이드가
벽과 하나가 될 수 있도록
꼼꼼히 눌러본다.
코하네가 꺄르륵 소리를 내며 웃었다.
“이힛, 하하하 감쪽같다 그지?”
무슨 영문이지 확실치 않지만,
글씨를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란
것쯤은 짐작할 수 있다.
“응.”
웃음 짓던 그녀의 얼굴이
갑자기 상기되더니,
짧은 한숨을 훅, 뱉는다.
“왜? 맘에 안 들어?”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접착제가 묻은 손가락을 서로 붙였다,
떼었다 하며 눈은 비틀스를 훑어 내린다.
“가끔은 신페이 얼굴이 생각나지 않아.”
마호는 신페이, 라는 낯선 이름에
갸우뚱, 하다가 다시 기억해 낸 얼굴을 한다.
“아…”
“엄마 얼굴로 가득 차서,
도무지 기억할 수 없게 만들어.”
마호가 코하네의 정수리를
두어 번 쓸어내린다.
“나도 가끔 그래.”
말을 끝낸 마호의 얼굴은
어찌나 쓸쓸해 보이는지
심장 깊은 곳이 저릿하다.
“마호.”
“모든 게 다 전쟁 때문이지,
나라를 위해서라 하지만…
상처만 가득한 꼴, 이지.”
“으응.”
코하네는 서랍 속에 가둬 둔
신페이의 얼굴을 꺼내 들었다.
“이건 가져가야겠어.”
“응.”
코하네의 입이 우물쭈물
망설이더니 말을 꺼낸다.
“저기, 마호.”
“응.”
“저녁 식사, 아주머니는 오시지 않는 거지?”
마호가 짓궂은 표정으로 눈을 흘기며 웃었다.
“봤으면서.”
“알았어 알았다고.”
꽤 신경이 쓰일 법한 일이었지만
마호는 늘 쉽게 웃어넘기는 모양새다.
“걱정돼서 그러는 거 알아
그 사람 몇 번 보진 않았지만
좋은 사람인 것 같아.”
“응, 마호.”
1층에서 유키코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코하네, 어서 내려와”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큰 소리로 답한다.
“네에.”
코하네가 먼저 계단 앞을 나섰다.
“마호 가자.”
“응.”
벽에 스며든 접착제의
진한 냄새가 풍겨 왔다.
비틀스의 사진 옆으로
후미코의 이름 ‘영’ 자가
삐죽 나와 그들을 훔쳐보고 있다.
사라진 누더기 저고리를 입은 소녀가
다시 자리를 잡고 앉아
비틀스를 보고 흥얼거린다.
The Beatles – Norwegian Woo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