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거울
거울
코하네에게 친구가 있었다는 사실을
들었음에도 믿기지 않아
연신 그녀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탐색을 멈추지 않고 있는 중이다.
나오코는 코하네가 거주하고 있는
맨션을 좋은 여건에 소개해 준 건
마호의 재량임을 알고 있는 듯해 보였다.
코하네의 친구라고 보기엔
여러 부분이 벅차거나
선을 넘어선 여자였다.
첫 생일이 지난 아이의 엄마라는
사실도 믿어지지 않았다.
보라색이 감도는 붉은 립스틱은
여러 각도에서 볼 때마다 색이 달라졌다.
첫눈에 딱, 보아도 무지개 색깔을
뿜고 있는 그녀와 잘 어울리는 색이다.
큰 키는 치마 길이를 더 짧아 보이게 했고,
민소매 블라우스는 마호의 눈을
자꾸만 붙잡아 두려 한다.
마호는 생전 처음
화려한 색깔을 발산하고 있는
여성과 마주하고 있다.
오늘도 마사토가 나오코를 위한
새까만 초콜릿을 탁자 위에 올려놓는다.
군데군데 박힌 아몬드의
오돌톨한 모양이
마사토의 피부와 같아
코하네는 남몰래 웃음을 삼켰다.
나오코의 감정과 성격은
코하네의 곁에서 적극적이고,
보다 순진한 양으로 변했다.
“달콤한 초콜릿, 고마워요 마사토 씨.”
나오코의 목소리에
그의 심장이 빠르게
펌프질 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나오코의 이러한 인사법은
굉장히 배려심이 강한 성격을
나타내는 말투다.
나오코는 잠시 겐토의 얼굴을 떠올리며
딱, 몇 초 동안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나오코의 목소리에 마사토는
복권이라도 들어맞은 것처럼
희열에 찬 눈빛이다.
겉으로만 드러내지 않았을 뿐,
분명 그의 심장은
살을 뚫고 나와 바닥으로
나동그라졌을 것이다.
“하하하, 별말씀을 요, 영광이지요.”
마호가 눈치도 없이
불쑥 끼어들며 마사토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툭, 하고 건드려 본다.
“마사토, 난 이곳에
몇 년을 드나들었건만,
아몬드 박힌 초콜릿은 처음 봅니다?”
장난으로 내뱉은 말에
마사토의 얼굴은 멍게처럼
알록달록 변해가고 있었다.
할 말을 잃고 제발 그만해,라고
눈빛으로 외치는 것 같다.
나오코가 재빨리 대꾸한다.
“마사토 씨, 따뜻한 한 물 한 잔 부탁해요.”
“아, 네… 네.”
말을 더듬고 고개까지 까딱까딱
더듬고 있는 그의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다.
마사토는 몇 발걸음을 내딛더니
나오코의 등 뒤로
마호에게 눈을 흘기며
삐죽거리며 돌아선다.
나오코는 여러 소리를 듣고,
여러 말을 내뱉으면서
쭉, 말이 없던 코하네의
표정과 몸짓 하나하나를 살피고 있었다.
마호는 그 모습이 코하네를 대할
때 자기 모습과도 같았기 때문에
그런 나오코의 모습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마치 마호처럼 나오코는 코하네를
살피고 또 귀 기울였다.
햇빛이 반사된 입술은 지금,
푸른빛이 돈다.
“코하네, 안색이 안 좋아,
여전히 악몽에 시달리는 거니?”
나오코는 순간,
미네코의 말투를 꼭 닮은 말투가
거슬려 화들짝 놀라며
아닌 척 몸을 비틀었다.
코하네의 썩, 좋지 않은 수면의 질은
마호만 알고 있었던 비밀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비밀이 순식간에 쨍그랑, 하고
깨지는 순간이다.
마호는 다시 보라색이 감도는
입술을 흘긋거렸다.
“난, 괜찮아.”
보통 자신의 속내를 잘
내색하지 않는 코하네지만
꽤 예민하거나, 불편하거나,
또는 말하고 싶은 것이 분명했다.
물론 나오코 또한 알고 있는 눈치다.
“흠, 괜찮은 거 맞지?”
순간 코하네의 왼쪽 눈썹이
위로 올라가더니, 물결을 만들고 있었다.
“후, 나오코 난 정말 괜찮아.”
코하네는 자신에 대해서
너무 잘 알고 있는 두 사람이
앞에 앉아 자신을 탐색하거나,
눈동자를 굴리는 모습이
영 불편하고 어색했다.
괜찮다는 말의 끝부분은
마호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마무리한다.
마호가 관심을 돌리려
마사토의 시선을 빼앗으며
보란 듯 초콜릿을 우적우적 씹어 먹는다.
그 소리는 가게 안 사람들이
모두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쩝, 쩝, 하는 소리였다.
“날씨가 더워질수록
단것을 충분히 먹어 줘야 해 자.”
마호가 코하네에게 초콜릿을 건넨다.
당연히 먹지 않겠지, 라
생각했지만 코하네는 냉큼
그것을 입속으로 가져갔다.
그 모습을 본 나오코가 미소 지으며 말한다.
“달콤한 건, 기분을 좋게 해.”
꼭, 자신이 코하네의 마음을
꽤 뚫고 있다는 것을
마호에게 자랑이라도 하듯,
고개를 위로 치켜들었다.
지금, 입술은 다시 붉은빛이 돌았다.
코하네는 나오코의 말에 미동하지 않는다.
“아, 인사가 늦었어요,
아주 좋은 집이에요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요, 코하네의 부탁인걸요.”
나오코가 그녀를 힐끔거렸다.
코하네가 어깨를 으쓱하며
창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빠가 있을 곳이라
신경이 쓰였는데,
생각보다 더 좋은 곳이라 마음이 놓여.”
코하네가 대답한다.
“다행이야.”
“아무튼 정말 고마워요.”
마호는 하나 남은 초콜릿을
마저 입에 넣으며 씹어 먹었다.
“뭘요.”
“코하네 함께 저녁 먹자,
마호 씨도요, 근사하게 대접하고 싶어요.”
나오코는 그들을 대하는 상냥함에
다시 한번 겐토의 얼굴을
떠올리며 죄책감에 빠졌다.
이번에는 조금 더 긴 몇 초였던 것 같다.
눈치 없는 마호가 빠르게 대답한다.
“난 좋아요, 코하네? 어때?”
“으응.”
근처 고깃집은 걸러지지 않은
연기가 하늘 위로 뻗어 나가며
길을 내고 있는 모습이다.
자욱한 연기가 가게 사이사이마다
빼곡히 들어차 있다.
벌집처럼 붙어 있는 꼴은
가게 주인이 누구인지,
그 식당의 문이, 그 문이 맞는지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어디가 어디인지,
복잡하기만 했다.
구운 고기를 먹으러 온 사람들은
화장실을 들르기 위해
자리를 한 번 뜨기 시작하면 옆집이나,
또 그 집의 옆집을 방문하며
자신의 일행들을 찾으며
헤매는 일은 다반사다.
이제 막, 고기를 불 위에
올려놓기 시작한 그들은
헤매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담배 연기와 고기를 태우는 연기가 만나
눈과 코는 투명한 액체를 계속 담는 중이다.
함께 연결된 귀라는 구멍에서
투명한 액체가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염이 심한 마호는
연신 휴지로 코를 풀어낸다.
자신도 모르게 비어 있는 콧속을
인지하지 못한 채
코를 풀어낼 땐 마치 뱃고동 소리가
울려 퍼지는 듯한 뱅, 하는
소리를 내곤 한다.
그 소리를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은
꼭, 한 번씩 그를 흘긋거렸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고,
눈치채지도 못한다.
그저 그의 눈치는
코하네에게 꽂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오코는 은색의 네모 상자를 꺼내더니,
그 속에서 하얗고 긴 물건이 나온다.
마호가 늘 말했던 애증의 물건을
나오코도 갖고 있었다.
코하네는 반짝거리는 상자에
시선을 빼앗겼다.
여러 빛에 반사되어
코하네의 눈동자를 숨겨 버린다.
나오코는 구운 고기를 맛보느라
보라색을 잃어버린 입술에
담배를 꺼내 물며
마호를 흘긋 바라보았다.
그는 나오코에게 불 붙인 성냥을 들이밀었다.
나오코의 양쪽 볼이 쑥 들어가더니,
입술은 뾰족하게,
눈은 지그시 감고
애증의 물건을 깊게 들이마셨다.
“후우우우우.”
나오코의 입에서 애증이
길게 뿜어져 나와
코하네의 얼굴을 가렸다.
코하네가 말한다.
“얼마큼, 맛있어?”
나오코가 말없이 상자에서
애증을 꺼내더니 코하네에게 건넨다.
고개를 흔들며 손사래를 쳤다.
“이 요물 같은 것에 빠지고 싶지 않아.”
나오코는 놀란 눈을 하더니
담배를 중지에 끼운 손으로
코하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순간 적은 양의 담뱃재가
코하네의 머리카락을 타고
탁자 위로 떨어졌다.
코하네가 떨어진 담뱃재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입을 동그랗게 오므리곤 훅, 하고 불었다.
“얘도 순식간에 사라지네.”
애증의 물건을 삼킨 나오코는
취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코하네, 넌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해.”
마호가 코하네의 테이블을 탁탁,
털어 내며 중얼거렸다.
“난 알아들어요.”
나오코가 비아냥댄다.
“잘난 척은.”
“하하.”
“물론 그렇겠지, 둘은 뭐,
그런 특별한 사이니까?”
나오코는 말끝을 특이하게 올리며
부정의 의미를 남겨두었다.
마호는 듣지 않았다는 것처럼
남은 갈비를 화로 위에 올리며
익지 않은 선홍색을 뒤집고 또 뒤집는다.
나오코 또한 남은 음식을
보지 못한 것처럼
다시 메뉴의 무언가를 쭉,
훑어 내려간다.
코하네가 메뉴판의 한쪽 모서리를
손끝으로 잡아당기며 말했다.
“나오코, 그만.”
“응” 아니 아니.”
“남은 것 먹자.”
“오우, 널 보면 뭘 더
시켜야 할 것 같단 말이야, 원.”
웃는 나오코의 눈을 마주한 마호도
동의한다는 듯이 따라 웃었다.
코하네는 자기의 몸을
한 번 훑더니 인정한다며 손짓했다.
잘 익은 갈색 갈비를 집어 먹으며
질겅질겅 씹었다.
맥주도 함께 단숨에 들이켠다.
그는 금방 비워진 잔에
맥주를 거품 없이 가득 따랐다.
선홍빛 갈비가 담겨 있던
빈 접시의 핏빛 얼룩이
코하네의 인상을 찌푸리게 한다.
입안 가득한 갈비의 육즙에
녹슨 쇠의 맛이 맴돌아
다시 맥주를 단숨에 들이켠다.
이번엔 마호가 코하네의 잔을
모른 척, 해 본다.
“코하네, 천천히 마셔.”
나오코가 그의 어깨를 살짝 밀더니 만류했다.
“그냥 둬요,
이런 날 마시는 거니까.”
나오코는 마호 손에 쥔 맥주를
홱, 하고 낚아채더니
코하네의 잔에 가득 따랐다.
먹음직스러운 거품이
컵의 겉면을 타고 탁자 위로
흘러내린다.
코하네의 얼룩진 빈 접시 위를
다시 고기로 채워 넣었다.
코하네는 갑자기 접시 안으로
코를 밀어 넣듯,
입으로 그것들을 빨아들이며
찹, 찹 소리를 내며 씹어 먹는다.
나오코는 다시 붉게 얼룩진 접시 위에
선홍빛 갈비를 올려놓는다.
채 식지 않은 고기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났다.
기름진 육즙이 흘러나와
식어 빠진 붉은 얼룩과 함께
섞이는 중이다.
찹, 찹 거리던 소리가
점점 작아지더니,
갑자기 코하네의 모든 행동은
정지 상태가 되어 버렸다.
눈은 얼룩진 접시에 고정되어 있었고,
웅성거리던 사람들의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귓속으로 묵직한 무엇을
집어넣어 놓은 것처럼
막힌 느낌이 들었고
발끝은 개미가 기어가듯,
저리기 시작했다.
나오코의 입이 코하네를 바라보며
쉴 새 없이 말하고 있었고,
마호의 손은 코하네의
어깨를 잡고 흔들어 대고 있다.
코하네의 목이 부러질 듯,
흔들거리고 있지만
마호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깨웠다.
그때 코하네의 볼이
부풀어 올랐고,
독이 바짝 오른 복어를 연상케 했다.
눈동자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그녀는 벌떡 일어나
입을 틀어막고 뛰기 시작했다.
나오코가 따라 일어나자
마호가 나오코의 팔목을 거세가 잡아챘다.
“아얏.”
“그냥 둬요.”
“아니…”
“그냥 두라고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완강한 그의 말투는
그래야 하는 이유가
몇천 개는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오코는 힘없이 털썩 주저앉았다.
“하… 대체.”
코하네의 틀어막은 손을
내리자마자 핏빛 음식물이
모두 쏟아져 내렸다.
그 광경을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었는지
코하네는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묻어 나온 것들이 다시 욕지기를 일으켰다.
“우아엑, 우엑.”
채 소화가 되지 않은
뭉텅이의 고기가
비좁은 목을 뚫고 나왔다.
그녀는 고통스러움에
눈물을 찔끔거린다.
발끝에서 간질거리던
핏물까지 모두 쏟아냈다.
멍든 듯한 검붉은 얼굴색이
점점 자기 색을 찾아가고 있었고,
힘 빠지게 하는 욕지기도 멈추었다.
“하악, 하악.”
불균형한 호흡도
점점 돌아오기 시작했다.
화장실을 찾아 또각또각
소리를 내고 들어온 여자는 멈칫,
하며 들리지 않을 정도의
중얼거림으로 내색하더니
다시 또각 소리를 내며 밖을 나선다.
코하네는 불편한 기분을 느낄 새도,
미안하다는 말 할 여유도 없다.
세면대의 수도꼭지를 끝까지
비틀어 보지만
질질 새어 나온다고 말할 정도로
수압은 형편없다.
얼음처럼 차가운 물이 살에 닿자,
반가움에 절로 탄식이 배어 나온다.
“하아아, 후.”
마호는 코하네의 행동이
마치 나오코의 잘못인 것처럼
내내 입을 내밀고
불편한 기색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당연히 코하네의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의 모습과 같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것은 아니다.
나오코는 궁금함을 입으로 뱉고 난 후
그에게 답을 얻어내고 싶지만,
잘못을 저지른 사람처럼
담배만 물고 있을 뿐이다.
마호의 표정은 꼭, 조용히,
가만히, 그냥 있어라고
협박하는 것처럼 보였다.
코하네는 표정 없이
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나 때문에 심각해진 거지?”
걱정 어린 표정의 나오코는
그녀를 발견하자마자 화색이 돌았다.
“아, 코하네.”
그제야 구부정하던 마호의 허리도
펴지더니 팔짱을 끼며
코하네를 바라보았다.
코하네가 중얼거렸다.
“심각했구나, 미안.”
미소 짓는 코하네의 얼굴은
백자처럼 창백했다.
마호가 먼저 일어나 밖을 나선다.
“가자.”
“으응.”
나오코가 차가운 그녀의
손등을 잡으며 비비적거렸다.
“찬 바람 좀 맞고 있어.”
코하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오코는 두툼한 지갑을 꺼내 들며
그녀의 뒷모습을 기웃거렸다.
거스름돈은 생각하지도 않고
여러 장의 지폐를 내놓자마자
급히 코하네를 뒤따랐다.
마호는 나오코가 있는 둥 마는 둥
자연스럽게 코하네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좀 걷자.”
코하네는 나오코가
뒤따라오는 것을 확인하더니 손짓한다.
나오코는 그들의 걸음을
절대 넘어서고 싶지 않았다.
천천히 뒤를 따르며
다시 담배를 입에 물었다.
꼭 고기를 맛보면 담배는 디저트라도 된 양,
입에서 떠나질 않는다.
나오코의 몇 번의 시도 끝에
주황색 불이 붙었다.
성냥에서 풍기는 황 냄새에
기침이 배어 나왔다.
후덥지근함이 서서히 시작되는
날씨의 밤공기는 아직 신선했다.
뇌가 차가운 공기를 들이마실 수 있도록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기를 반복하길 바랐다.
과한 호흡에 약간의 어지러움을 느꼈지만
얼빠진 느낌이 나쁘지 않다.
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등줄기에 오돌토돌한 돌기를
만들어 내는 중이다.
나오코가 소리친다.
“저기, 마실 것 좀 사 올 게.”
“응.”
작은 돌덩이가 쌓여 있는 곳을 밟으니
자박자박 소리가 난다.
마호는 입을 꾹, 다문 채
못을 향해 돌을 던졌다.
거짓말처럼 책에서 나올 법한 풍덩,
이란 글자를 떠올릴 정도의 소리가
풍덩, 하고 들렸다.
이번엔 더 신경질적으로 돌을 세게 던졌다.
또다시 묵직하게 풍덩거렸다.
“마호.”
그는 코하네의 부름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시 풍덩, 소리를 냈다.
“미안.”
돌을 든 손을 추켜올리다 말고
그제야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주 미련한 바보.”
“아주 정말 미안.”
인기척 없이 나타난 나오코가
두 개의 종이컵을
그들에게 다가가 내밀었다.
“자, 마셔요 마호 씨도.”
인상을 구기던 그는 미안했는지
나오코의 눈을 마주치지 않고 대답했다.
“나오코 씨는요?”
“난 마셨어요.”
“고마워, 나오코.”
“잘 마실 게요.”
“별거 아닌데, 다들.”
코하네가 종이컵을
두 손바닥으로 감싸 쥐고 웃었다.
“아직 따뜻한 게 좋아.”
나오코가 얼굴을 살짝 돌리며
코하네를 흘기며 바라본다.
눈빛에는 여전히 걱정과 연민을
가득 담고 있었다.
“괜찮은 거지?”
코하네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빠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마호가 끼어들었다.
“나오코 씨, 늦지 않았어요?”
“음, 일찍 들어간다고
착한 아내가 될 수 있는 건 아니라서요.”
그는 대답할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하고
애꿎은 돌멩이만 만지작거렸다.
코하네의 얼굴을 보자,
그녀 또한 집에 갈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늘 여유 있는 휴일을
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마호는 아쉬움만 가득하다.
휴일마다 아키라를 돌보기 위해,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유키코를 돕기 위해 꼭, 가야 했다.
코하네가 해 줄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지만 그것마저 하지 못한다면
지금 그녀의 얼굴은
더욱 만신창이가 되어 있을 게 뻔했다.
모처럼 찾아온 휴일을
코하네의 친구와 함께 보내고 있었고
시간은 기다려 주지 않았다.
“아참, 구둣방 할아버지는 괜찮으신 거야?”
“으응.”
마호는 나오코의 입에서
아키라의 이름까지 나온 것을 보니
정말 보통 친구는 아니다란 생각이 들었다.
“으응? 그게 다야?”
“응?”
“마호 씨, 얜 정말 방어적이지 않아요?”
그는 아주 빠르게 맞다,라고
말할 뻔한 입을 오므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뭐…”
나오코가 찌푸리며 말했다.
“남이 알고 싶어 한다,라는 건
긍정적인 신호야
방어만 하는 건 옳지 않아.”
코하네는 마저 남은 녹차를
고개를 등에 닿을 것처럼
번쩍 들어 올리는 시늉을 하며 마신다.
“흠, 좋은 말이네.”
“응? 또? 그게 다야?”
코하네가 큭큭, 거리며 웃는다.
“남들이 꼭, 내게 하는 말이 있어
너 괜찮아?라는 말은
사람들이 내 삶이 꽤
고달프다는 걸 알면 그렇게 되지,
한데 난 괜찮아?라는 말을
죽을 때까지 들어야 하는 건
난 더 고달플 것 같아.”
“뭐야? 하하.”
마호도 정말 딱 들어맞는 말이라며
무릎을 한 번 치더니
손뼉을 소리가 나도록 마주쳤다.
“공감”
나오코가 고개를 저었다.
“아, 코하네…”
“나오코도 점점 내게 괜찮냐, 고
물을 때가 많아졌지.”
“그럼 마호 씨는?”
“물론 마호도.”
“그럼 말을 바꾸자,
너도 내게 나도 네게.”
“어떻게?”
“이상 무, 묻기 전에
이상 무,라고 하는 거야, 어때?”
마호가 이번에도
손바닥을 마주치며 쩍, 소리를 낸다.
“난 찬성.”
나오코가 코트 주머니 속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담배를 입에 물고 말하는 그녀의 행동은
굉장히 매력적이고 당당해 보였다.
“좋아.”
“우린 계속 살아가고 있고,
점점 더 많이 이상 무,라는
말을 많이 하고 살아야 하겠지?
그지? 나오코, 마호.”
나오코의 입속에서
구름 하나가 나와 동동 떠다닌다.
“어른이네, 코하네 큭.”
코하네가 입을 비죽 내밀며
거드름을 피웠다.
마호가 비어 있는 주머니를
만지작거리자 나오코가 담배를
그에게 훅, 집어던졌다.
빠르게 낚아채더니
고맙다는 눈인사를 찡긋해 보이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런 마호를 눈 한번 깜박하지 않고
빤히 쳐다보며 궁금증을 풀어 내려한다.
“마호 씨도 아빠를 갖고 있어요?”
맞지 않는 표현,
약간의 불편함을 주는 언어에
눈만 굴리고 나오코를 쳐다보았다.
“지금 그 표정은 잃었다는 것?”
코하네의 목소리가 경직되어
굵게 소리를 낸다.
“이 나라가 앗아 갔어.”
“응?”
“응, 전쟁.”
마호가 끼어들었다.
“이 나라가 전쟁을 일으켰으니까요.”
“아…”
나오코가 새끼손가락 반 만 한
길이의 담배를 끝까지 물고 빨아들였다.
“흠, 하… 우린 모두 같은가?”
죽음에 대해 쉽게 말하는 나오코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더 솔직히 말하자면
죽음에 대해 쉽게 말할 수 있는
그녀가 부러웠다.
죽음, 아빠, 엄마, 에 대해
늘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았던
자신의 표정이 떠올라
또다시 속이 메스꺼워졌다.
“기억나? 졸업식 때 아빠,
완벽했던 나의 두 번째 아빠.”
“당연히 기억해.”
“완벽한 아빠를 갖게 되어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 아주 잠시였지만.”
갖게 되었다, 란 말에 마호는
다시 나오코를 흘긋거렸다.
“그럼?”
“응, 나빴지 그렇게 빨리 갈 걸,
왜 아빠 노릇은 완벽하게 한 건지.”
나오코는 자신의 못난 버릇을
고치기 위해 타다요시가
뒤 뜰에 심어 놓았던 나무가 생각났다.
그 속에 까만 색깔의 카미가
뿌리와 엉켜 잠자고 있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코하네가 심장 위에 손을 갖다 대며
숨을 몰아쉬며 내쉰다.
마호 손에 든 담배를
다시 나오코에게 던졌다.
애증의 물건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그들의 호흡은 그것을 빨아 마실 때만큼
잘 맞아떨어졌다.
“받아요.”
코하네는 나오코를 위해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소중한 사람을 잃었을 때의
세상에 있는 그 어떤 단어도
위로할 수 있는 단어는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나오코는 검은 하늘에서
빛을 발한 달을 노려보듯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집어 든 담배는
그녀의 입술에 오랫동안 그대로 머물렀다.
코하네가 말했다.
“그 사진, 아직 갖고 있어.”
나오코는 말없이 코하네를 돌아본다.
“그게 유일한 졸업 사진.”
흰색과 검은색 머리칼이 골고루 박힌
나오코의 두 번째 아빠가 기억났다.
사진을 억지로 꺼내 보진 않았지만,
눈에 가끔 스칠 때마다 색이 바래고 있었다.
바랜 사진처럼 그녀의 두 번째 아빠는
그때에도 회색빛을 머금고 있는 사람 같았다.
선명하게 기억나는 건,
그의 냄새. 그것은 아키라의 것과
너무 닮아 있던 터라
기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코하네는 맑고 어려 보였던
신페이의 얼굴을 생각하니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난 아빠의 하얀 수염을 한 번 본 적 없어 흣.”
돌만 만지작거리던 마호가
코하네를 바라보며 같은 미소를 지었다.
담배를 질겅거리던 나오코가 일어나
그처럼 돌을 만지작거리며
까만 어둠 속으로 휙, 하고 던졌다.
한참을 허공에 맴돌았는지
그제야 풍덩,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오코는 쭈그리고 앉아
돌을 고르기 시작했다.
아주 매끈하고 납작한 것을 찾아야
허공을 맴도는 시간이 더 길어질 것이다.
마호는 은근한 경쟁이 붙었는지
돌을 찾느라 눈이 왼쪽 오른쪽, 바쁘다.
코하네는 기억할 만한,
추억할 만한 것들이 없던 그때였다.
이유는 몰라도 그때를 떠올려 보니
그때 늘 우울했던 감정이 아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런 감정들이 몰려왔다.
분명한 건, 그 감정은
그때의 감정과는 아주 다른 감정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키가 큰 나오코가 쭈그리고
앉아 있는 모습은 영, 어색해 보인다.
나오코의 굽은 등을 보니,
그녀를 자석처럼 따라다녔던
여자아이가 생각났다.
당연히 이름은 생각나지 않았고,
어디서든 그녀의 굽은 등은
눈에 띌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코하네의 기억에도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그 아이와 함께 있을 때,
나오코의 표정은
주위를 두리번거리거나,
불안해 보였고 눈썹 사이에는
11자가 그려져 있었다.
이유를 알 순 없었지만
그렇게 함께 다니면서도
나오코는 늘 그랬다.
더욱 이해할 수 없었던 건
나란히 걷지 않았던 그들이었다.
등이 굽은 아이는
나오코의 뒤를 따르거나
멀리 떨어진 옆이었거나,
조금 앞선 걸음이었거나,
그날 졸업식에서도
코하네에게 호의를 베풀고 있었던
나오코를 먼 곳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의 감정은 아직도 느낄 수 있을 만큼
서늘하고 매서웠다.
코하네와 나오코를 번갈아 가면서 보더니
코하네에게 눈을 멈추고 있었을 때의 눈은
머리끝에서 발끝을 타고 내려가고 있었다.
나오코는 한 번도 친구들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고,
그들의 삶에 관해서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코하네는 등이 굽은 소녀가 궁금했다.
죽음에 관한 얘기를 놓았을 때
잠깐의 우울함은 온데간데없이
돌 던지기 삼매경이다.
검은 밤하늘에 그녀들의 웃음소리만
갸르륵, 꺄르륵 울려 퍼졌다.
자갈이 깔려있는 바닥의 한 부분이
파여 흙더미가 보일 지경이다.
마호가 소리쳤다.
“자, 이번이 마지막 읏샤.”
마지막 돌이 캄캄한 못 위로
다시 날아간다.
어둠 속에서 둔탁한 소리가 나더니,
괘액, 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호가 놀라 뒷걸음질 친다.
“어엇, 뭐야?”
퍼드득, 날개 짓 소리에 이어
커다란 몸의 정체불명 조류가
낮게 그들의 머리 위를 날아갔다.
코하네가 바닥에 앉아 위를 바라보았다.
“맙소사, 맞은 거야?”
나오코의 웃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아, 푸, 하하하하하하.”
코하네와 마호는
넋 나간 얼굴을 하곤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어쩌지, 괜찮을까?”
마호는 웃음을 그치지 못하는
나오코를 보며
코하네에게 어깨를 으쓱한다.
“날아갔으니, 뭐 아… 정말 놀랐다.”
“응, 날았으니까… 후.”
나오코는 아예 바닥에 주저앉아
배를 움켜쥐고 있었다.
“아, 눈물이 나올 지경이야.”
코하네는 이 상황이
웃음이 터질 수 있는 상황인지 의아했다.
나오코는 숨을 헐떡거리며 말했다.
“하악, 하… 저 오리?
의 운명이야 어쩔 수 없는 거지.”
끝나기가 무섭게 나오코는
다시 주저앉은 채,
숨을 할딱거리며 웃었다.
코하네의 창백한 얼굴은
어둠 속에서 빛을 발했다.
마치 달빛이 오로지
그녀만을 위해 비추는 것처럼.
오랜 시간 동안 그들은 말없이,
돌에 맞은 조류의 운명에 대해서,
그들에게 들이닥친,
그들에게 들이닥칠 운명에 대해서
깊은 생각에 빠졌다.
세상의 밤이 고요하듯 그들의 밤도 고요했다.
한참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입을 꾹,
다물고 까만 허공에 시선을 박고
움직이지 않았다.
다시 하늘을 날기 힘든 조류의
퍼드득거리는 헛된 날개 짓 소리가 들려왔다.